1990년대 초반에 메릴랜드주 체사피크 만에 위치한 어떤 무한리필 게 요리 식당 (All you can eat restaurant)에 게를 먹으러 간 적이 있다. 수염이 덥수룩한 신구 씨가 쪽배에 누워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광고 카피를 날리기 오래 전 일이다. 그 크랩 하우스에서는 우리가 요청하기만 하면 식당 종업원들이 갓 쪄내서 발갛게 상기된 굵고 기다란 킹크랩 다리를 버킷에 담아서 한없이 갖다 주었다. 입장료가 인당 $19.99였으니까 당시 한국 돈으로 2만원이 채 안 되었다. 우리는 집게와 망치를 양손에 들고 두드리고 깨뜨리며 알맞게 간이 된 야들야들한 게살을 쏙쏙 집어내어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여한 없이’ 먹었다. 우리는 식당 문을 나오며 “아이고, 잘 먹었다.”라고 중얼거렸다.
“여한 없이 살게.”(Live all you can.)라는 말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대사들』에서 55세의 주인공인 미국인 램버트 스트레더가 파리의 한 정원 파티에서 리틀 빌햄이라는 유럽의 한 젊은 예술가에게 들려주는 충고이기도 하고,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토로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한 없이 살게. 그렇게 살지 않는 건 실수하는 걸세. 인생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네. …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충분히 살지 못했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무 늙어버렸네. ... 내가 한 실수를 자네가 범하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걸 하게나. 난 실수를 범했네. 살아 가게나!”
미래가 짧아진 노인이 긴 인생 경험을 통해서 얻은,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미래가 긴 젊은이에게 당부하는 지혜이고 조언이다. 나는 그 격언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내가 아끼는 청년이 삶의 방향에 대해 마음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추리고 추려서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바로 그 말을 들려주고 싶다. 물론 그 말은, 비록 가진 미래가 짧다고 해도, 나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뼈 때리는 명제이기도 하다.
그 격언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아류 표현들이 몇몇 있다. ‘너의 삶을 만땅으로 살아라.’(Live your life fully.)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 ‘오늘을 붙잡아라.’(Seize the day.) 그리고 그 개념을 니체식으로 조금 더 확장하면,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등이 그것들이다. 금 박편들이 찰랑대는 두루마기 같은 의상을 입고 무대를 휘저으며 노래하는 김연자 씨의 히트곡 “아모르파티” 때문에 그 의미가 약간 와전된 느낌이 있지만, ‘아모르파티’는 너의 삶의 사태들—고난이나 상실감, 좌절 등을 포함하여—을 단지 수동적으로 견뎌 내거나 받아들이는 데 머물지 말고, 그것들을 너의 인생 여정의 꼭 필요한 요소들로 포용하고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무한리필 식당’이나 ‘여한 없이 살라’는 표현은 둘 다 ‘한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공통지반을 가진다. ‘무한리필 식당’에서는 여한 없어지는 그 지점을 누구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고,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여한 없이 살라’는 격언에 있어서는 한이 남지 않게 사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모호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여한 없이 먹기 위해서는 그냥 먹으면 된다. 그러다가 먹기 시작했을 때 그토록 맛있었던 음식이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면 저절로 맛이 없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숟가락을 놓고 의자를 뒤로 빼 앉으면서 손을 좌우로 젓는다. 갓난아기가 배고파 울다가 엄마 젖을 양껏 충분히 먹고 나면 입에 빠는 힘이 빠지고, 혀와 입과 목구멍이 동작을 멈추며, 아기가 스르르 젖꼭지에서 물러난다. 갓난아기든 이팔청춘이든 백세 노인이든 여한 없이 먹는 법은 너무도 잘 알며, 그걸 너무도 분명히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게 여한 없이 사는 건지는 누구도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을 남기지 않게 살아서 삶의 끝에 이르러 “아이고, 잘 살았다”고 스스로 중얼거릴 수 있을까? (To be continued)
첫댓글 덕분에 제게 매릴랜드 항구 무한리필게요리가 여한이
되었습니다.
^^
여한없이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만 해봅니다.
운명의 여신이 두 손 두 발 다 들 만큼 잘 살고 싶은데...말입니다. ㅎ
아이구, 55세가 '이제 나는 너무 늙어버렸네'라고 하다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