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 -
1970년대 부터 활동한 문단 활동 50년, 어느새 반 백년이 되었다
1. 돌아본 시간들
젊음이 어젠 듯한데, 어느새? 인생 후반기가 되었다. 중국의 진나라 때 환거기는 검소하게 사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환거기가 목욕을 하고 나오자, 부인은 새 옷을 가져다 주었다. 늘 헌 옷 만을 입고 다니는 모습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환거기는 크게 역정을 내며 다시 가져가라고 하였다. 부인은 다시 헌 옷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옷이 새것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낡았겠는가? 하고 말했답니다.” 환거기는 부인의 지혜로움에 크게 웃으며 새 옷을 입었다고 한다.
내 몸역시 젊음이 없이 어찌 이리 늙었겠는가. 헌 옷을 입고서도 새 옷이었을 때를 돌아보듯이 함이 중요하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보다는 뒤돌아보며 살아야겠다. 어찌 보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 어찌 오늘이 있기까지 내 힘으로 이룩한 것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위의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아껴주신 덕분이란 걸 늘그막에야 알게 되었다. 주위의 고마운 분들 중에는 이미 타계하신 분들도 많다. 그 분들께는 삼가 명복을 빌면서 많은 고마운 분들의 큰 힘을 여기에 새겨놓는다.
2. 어린 날은 동화속 세상
나는 평생을 불만족스럽게 살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도 많았지만 그건 누구에게나 오는 인생사의 한 대목, 대목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상당히 마음에 새길 수 있눈 지난날을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많은 시간은 글을 쓰는 데 보낸 시간이었다.
내 고향은 정선군 임계면 문래리, 당시는 골지리라 불렀다. 그곳에서 나의 유년기를 지냈다.
고향 집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사는 초가집이었지만 고향 집에서 보낸 날들이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내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동심의 봄날이었다.
3. 때아닌 잔칫집 분위기
나는 시골에서 국민 학교를 졸업 후, 강릉의 경포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는 입학시험이 있었다. 내 수험 번호는 242번이었다. 강릉이란 곳을 그때 처음 아버지와 함께 갔다. 시험을 친 뒤 얼마 후 발표가 라디오 방송으로 나왔다. 학교 선생님들이 방송을 들었다. 합격자 발표 때 내 수험번호인 242번을 들었다고 했다. 곧바로 선생님들이 모두 우리 집에 오셨다. 그날 우리 집은 때아닌 잔칫집 분위기였다.
강릉은 교육도시로 알려져 있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당시 교장 선생님 아들과 나, 토산에 사는 친구인 안홍문이가 강릉에 있는 중학교에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 댁 자제인 안창욱이는 명륜중학교, 안홍문이는 강릉중학교, 나는 경포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65년 3월, 문래 국민 학교가 생긴 이래 강릉의 중학교에 세 명의 어린이가 입학한 것은 처음 있는 아주 경사스런 일이었다.
4. 아버님의 걱정과 결심
아버님은 중학교에 입학한 나를 친척 집에 맡겨놓고 올라가셨다. 일명, 하숙을 시킨 셈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지 못하셨다. 그 집엔 얼굴이 시커먼 아이가 살았다.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들인 아이였다.
어느 날 아버님이 내려오셔서 영어 콘사이스 사전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잉크 냄새가 마르지 않은 새 책들이었다. 당시 콘사이스는 헌책방에서 사들였다. 많은 아이들이 영어 콘사이스를 가져다 팔아서 용돈을 하였다. 내 콘사이스 사전도 하숙집 그 시커먼 얼굴의 주인공이 한 짓이 분명하였다.
그 아이는 어느 날 자신의 콘사이스를 팔아 챙겼다고 내게 자랑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아버님은 무척 걱정이 되셨던 것 같았다.. 강릉에 큰마음 먹고 친척집에 아이를 맡기긴 했지만 친척집 아이의 꾐에 빠져 오히려 나쁜 길로 빠져들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콘사이스 사건 이후, 강릉으로 이사할 결심을 하셨다. 그리고 곧 실행에 옮기셨다. 삼척군 하장면 갈전리에 있는 다른 분의 고택 기와집을 매압하여 강릉에다 옮겨 지었다.
나는 하숙집에서 나와 강릉의 새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내가 다니는 경포중학교는 새로 지은 집의 앞쪽에 있었다. 걸어서는 10여분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강릉시 홍제동 179- 11번지. 이 집에서 강릉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을 때까지 기거하였다.
5. 우울했던 나의 중학교 생활
나는 모든 환경이 낯설어서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강릉에서 지내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반 아이들은 내가 시골에서 내려온 것을 알고 놀려 먹기가 일쑤였다. 아이들이 조금만 시비를 걸어도 눈에 눈물부터 났다. 나는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울벵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 하나를 더 얻었다.
그간 아버님의 엄격함과 무서움 때문에 내 기운이 푹 꺾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영향으로 나는 친구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저항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눈물로 그런 마음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내게는 멋대로 놀리고 장난치는 건 예사였다. 나는 이런 아이들과 학교가 싫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고향 하늘 쪽을 바라보곤 하였다. 나의 중학교 학창 시절은 이처럼 엉망이었다.
중학교 생활 중에서도 유일하게 방학은 나의 숨구멍을 트여주었다. 방학을 하면 고향마을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름 철, 노란 교복과 모자를 쓰고 고향 마을로 가면 아이들이 놀라워하기도 하고 반가워도 하였다. 고등학교 때에는 끝내는 자전거를 타고 150리길 고향 마을을 달려가곤 하였던 것이다.
6. 문학 소년이던 고등학교 학창 시절
어찌 어찌 공부를 하여 겨우 강릉고등학교 시험에 붙었다. 240명 모집에 아마 235등 정도로 들어갔을 것 같았다. 학교 생활 내내 시험을 보아 그 점수에 순위를 매겨 교무실 복도 위에 붙여놓았다. 나는 교무실 부근을 다닐 땐 다른 아이들처럼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 맨 꼬라비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어 시간만은 열심히 배웠다. 양주동 선생의 ‘가시리 평설’은 재미에 재미를 더하였다. 특히 서정주 선생의 시 ‘국화 옆에서’는 그 아름다운 서정성에 압도되었다. 김소월의 시는 너무 좋아서 표지가 빨간 시집 『진달래꽃』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였다. 교과서에 실린 조병화 시인의 ‘의자’ 역시 좋아했다. 또한 중국 시인들도 좋았다.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에 나오는 ‘飛流直下三千尺’ 역시 놀라울 뿐이었다. 평이하면서도 호방함을 잃지 않던 당나라때 시인 두목의 시에도 매료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정치가의 꿈을 가졌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강릉교육대학을 들어가 교원이 되었다. ‘울뱅이’의 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릉의 비술관 도장을 찾아가 무술을 익혔다. 그리고. 무술 사범이 되어 강릉의 군부대 군인들에게 무술을 전수하기도 했고 병산리에 가서 내 또래의 청년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황지읍 화전 국민 학교에 발령이 났을 때에는 황지에서 미리 도장을 하던 김강산 형을 도와 황지 도장에서 무술을 지도해 주기도 하였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삶의 기백을 스스로 무술을 하며 모두 찾았던 것 같았다. .
7. 아버님, 존경하는 나의 아버님!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신념, ‘배워야 산다!’ 는 신념 덕분에 경포중학교와 강릉고등학교를 졸업 후 강릉교육대학까지 졸업하였다. 1973년 10월 13일자 교사 발령을 받고 초등학교에 근무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국민 학교 동창생들을 만났다. 서류에 살던 창록이는 “넌 아버지 잘 만나 좋은 직장을 가졌구나!” 하며 부러운 듯 말하였다. 나는 당시 아버지를 잘 만났다는 말에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운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그런데 창록이가 그런 말을 하니, 괜한 말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 돌이켜 생각하니 친구들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 친구들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여 거개가 탄광을 전전하였다. 그게 얼마나 고단한 삶인 줄을 나는 황지읍에 살면서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 덕분에 친구들도 부러워하는 직업을, 내가 갖은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님이 살아생전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였어야 했다., 나는 그때 이처럼 철딱서니가 없었다.
그리운 아버님
남진원
아버님 살아 계실 때엔
몰랐습니다
태산보다 큰 어른인 줄을
몰랐습니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길 다하여라 라는
정철 선생의 시구도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제 한 몸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아버님의 높은 뜻 알고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합니다.
스스로 제 잘난 줄로만 알았던
무지와 어리석음의 못난 자식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어릴 때나 늙어서나
늘 아버님의 철부지 자식입니다.
모자란 자식입니다.
아버님,
그리운 아버님
부끄러워 아버님 앞에 고개 숙입니다.
죄스러워 아버님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 2025. 8. 25 )
8. 방학이면 찾아간 고향 마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까지 한 분의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다. 3년 내내 급훈은 ‘남에게 뒤떨어진 점은 없는가’였다.
늘 급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의도는 자칫 친구 간에 우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좀 뒤떨어지면 어떻고 뒤처지면 어떤가? 넉넉한 마음으로 주체적 공부를 하면서 살면 되는 일을 꼭 저렇게 경쟁적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강하게 들었다.
친구 관계도, 선생님도 못마땅한 학교생활이었다. 공부라는 게 원리는 없고 주입식 교육이었다. 그러나 방학만큼은 신났다. 방학은 이 모든 것에서 나를 탈출시키는 유일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방학을 하면 무조건 국민 학교를 다니던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반가운 친구들이 있었고 다정한 마을 어른들이 계셨다. 언제나 즐겁던 여름방학의 고향길이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집에서 용돈을 주지 않기에 나는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150리 고향길을 가기도 했다. 삽당령을 넘을 때면 자전거를 끌고 령을 넘었다. .고향에 도착해서 친구들을 마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 걷기도 힘든 나이에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이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라는 노래도 있지만 무작정 고향은 좋았다. 무슨 행동을 하여도 신나는 일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대단한 서커스를 구경하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고향은 길옆의 돌멩이조차 친근하였던 것이다.
9. 문학 인생에서 잊지 못할 분, 최도규 선생님
1973년, 21살에 교육대학을 졸업(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 .제37647호. 문교부장관)하였다. 그 해 10월 13일자 발령을 받아 삼척군 황지읍 화전 국민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74년 3월 초에 5학년 담임을 맡았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 기쁘고 좋은 일인 줄을 몰랐다. 학년이 끝날 무렵에 아이들 작품을 모아 가리방으로 긁어, 학급 문집인 [나룻배]를 발간하였다. 이 문집은 실전되어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1975년 3월 1일자로 황지 국민 학교에 근무하던 최도규 선생이 우리 학교로 전근을 오셨다. 내가 만든 문집을 본 모양이었다. 술 좌석에서 여러 선생님들께 내가 만든 문집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내가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의례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얼굴과 말에 진심이 배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무슨 글을 써?’ 하며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하였다. 그런데 그후 선생님들이 앉는 술자리마다 내 글 이야기를 꺼내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추천 응모작을 써서 <교육자료>와 <새교실>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년 내내 추천은커녕 선후평에도 내 이름은 오르지 못했다. 추천작은 못 되어도 아쉽다던가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한다든가 하는 이런 심사위원의 말씀을 기대했는데 말이다. 큰 실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글재주가 없는 놈이야!’ 이런 자탄에 빠졌다.
이런 내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도규 선생은 또 여러 사람 앞에서 ‘남선생은 멀지 않았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자포자기에 빠졌다가도 그 말에 억지로 ‘쓰는 흉내는 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갖었다.
내 문학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분이 최도규 선생님이다.
최도규 선생님은 1974년 「교육자료」에 동시가 추천되면서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약 18년 동안 문단에서 주옥 같은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다.
1979년 첫 동시집 『교실 꽉 찬 나비』를 낸 이후 많은 시집과 동요집을 내셨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최도규 선생님의 시 작품을 읽고 나서야, 평화로움과 감동의 맛을 느꼈다. 시어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을 잔잔하게 흔드는 음악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