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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없는 삶이 있었더냐
- 남진원 시 전집. 1
수록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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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에게
남진원
시 두 구절 얻는 데 3년이나 걸렸다는 데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 눈물을 흘렸구나
보아줄 사람도 없었으니 그 심사를 알만하다
( 남진원 산문집,『달빛에 싼 청산 한 채』‘구름 깊어 계신 곳 모른다 하네’ 중에서)
가도와 한유
남진원
관중이 포숙아를 친구로 두었기에
얼마나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가
가도는 한유를 만나 시명 높이 전했구나.
( 남진원 산문집,『달빛에 싼 청산 한 채』‘구름 깊어 계신 곳 모른다 하네’ 중에서)
가랑비
남진원
가랑비 사르르르
저걸 어쩌나
나무들 옷이
흠뻑 젖겠다.
가랑비 사르르르
저걸 어쩌나
풀잎들 머리가
흠뻑 젖겠다.
가랑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되어요. 나무와 풀들의 옷이 젖기 때문이죠. 그러면 감기 들겠죠? 우리 엄마도 비를 맞고 나의 모습을 보고 감기 들까봐 걱정하셨어요.
가래침
남진원
티비를 보려 하니 볼만한 게 하나 없다
그러한 모양세가 정치판과 꼭 닮았다
말장난, 고소질과 싸움 가래침을 뉘 뱉었나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가리왕산
남진원
계곡에는 소리가 있었다.
발자국을 남기며
서로 대물림하는 물방울
그래서 계곡에 들어서면
귀가 부드러워지는가 보다.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여기저기
손을 놓아둔 채
명상에 잠긴 바위와
바위를 붙들고 살아가는 뿌리들
저들은 지금
물림의 법을 익히고 있다.
살아 푸르던 천년의 나무
피와 살을 벗어두고
다시 천년,
침묵으로 말하는 枯死木
가리왕산 정상에선
아름다운 뼈들아
확연히
물림의 법 하나를 들고
오늘
내려오게 하는구나.
( 시집, 『어초(語草)』, 붓다가야, 2002. 8. 1.)
가리왕산 古死木
남진원
가리왕산 정상에는
천년은 더 살았음직한 고사목들이
또 천년을 살아갈 뼈를 다듬고 있었다.
누가
죽음이라 이름했던가
피와 살과 체온을
벗어 던진 후에야
온전히 살아 있는
삶의 自由
이름 지을 수 없는 넉넉함 속에
침묵으로 가득한
네 언어의 푸른 사리들
어둠이 등천하는 안개 밭에서
태초의 소금을 뿌리며
바람이 날고
하늘 문을 열고 쏟아진 별들이
나무의 가슴에 돋아나고 있었다.
( 1987. 10. 1. 제3시집『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가마솥 누룽지
남진원
벼 타작 하는 날은 가마솥도 들뜨는 날
와릉 와릉 탈곡기 소리, 단잠은 날아가도
가마솥 누룽지 생각, 발걸음이 날 듯 했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가목리 음식점에서
남진원
감자 적 수수부꿈 주문하며 멀 건넸지
눈 오면 잊지 말고 연락을 꼭 달라고
내리는 눈을 보면서 맘껏 취해 보겠다고.
가물다가 비가 오면
남진원
가물다가 비가 오면
시냇물도 기분이 좋은지
씽씽 골짜기를 달리며
노래를 하고
가물다가 비가 오면
나무들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말끔이 먼지를 씻으며
푸른 알몸뚱이로 손짓을 한다.
가물다가 비가 오면
꽃들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봉긋이 고개 내민 꽃망울들이
웃음을 마악 떠뜨리려 하고
가물다가 비가 오면
그래도 제일 기뻐하시는 분은
햇곡식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보시고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지다.
( 동시집 『선생님의 구멍 난 양말 』, 계몽사. 1992. )
가 뭄
남진원
출렁대던 푸른 물빛 바닥을 드러낸 채
진흙 뻘 같은 얼굴 하늘만 쳐다본다
날마다 폭염 속에서 너도 목이 탔구나
( 2024. 8. 27.)
가뭄 끝 비오다
남진원
고구마는 풀 사이서 거개 다 말라죽고
기세 좋던 바랭이도 잎이 바짝 오그라들 즈음
흐린 끝 비오는 모습 봐라, 커피 맛이 더 좋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가설극장
남진원
참 까마득한 옛날이구마
오줌이 잘금잘금 나오는 고놈 노랫가락이 어두컴컴한 마을을 휩쓸고 다녔쟤 그러면 밭에서 내려온 마을 사람들 몸이 가려워서 가설극장 안으로 모여 들었지라 마을도 사람도 잔칫날처럼 들 뜬 채 짚더미나 가마니때기에 올라앉아 홀라당 영화 속으로 빠져 들었구마 매일 저녁 귀경했으면 배부르것다 동네 아줌마들 욕심도 많으셨지 뭐시더라 그 영화가 그렇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커다란 생나무를 터억 어깨에 메고 산에서 내려오던 온달 공주는 봤던 기라 산의 거대한 힘이 그 몸에서 푸릇푸릇 솟아나는 것을 그래서 눈이 참시로 예쁜 평강공주 아닌가베
그 다음 날부터 우리도 평강공주 하나 쯤 찾아올 날 꿈꾸기 시작했쟤
참 까마득한 옛날이구나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 제8시집, 동시집. 『할아버지 이뽑기』, 1997.9. 25. 대교출판 )
가시연꽃 사랑
남진원
아름다운 경포 호수, 사랑이 핀다
멀어서 멀어서
아련하더니
자색으로 피워냈다 가시연꽃 사랑
우리
우리 사랑은 꿈결 같은 사랑
천년을 손잡고 가는 가시연꽃 사랑
아름다운 경포 호수, 애정이 핀다
아파서 아파서
아득하더니
별빛으로 피워냈다 가시연꽃 사랑
우리
우리 사랑은 미소 같은 사랑
영원을 손잡고 가는 가시연꽃 사랑
(2018. 3. 26)
2018년의 초가을
남진원
세상 끝날 것 같은 폭염이 엊그제 같았는데
아침 저녁 서늘한 바람이 분다.
뜰에나서면
그렇게 대들던 모기떼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고요한 들판에는 잠자리들이 헤엄치듯 날아다닌다.
그저 평화롭고 한가로운 날이다.
방울벌레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따뜻한 차 한 모금에 행복해지는 날이다.
가을
남진원
하늘 나는 고추잠자리, 가을은 참 예뻐라
은물결 평화로움 누가 이리 선물 했나
풀벌레 노래를 섞은 저 미소를 좀 보아.
가을
남진원
가을’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뛰는 가슴
잠자리 높이 날 때 그냥 마구 행복해서
내 삶의 그늘진 날도 미소되어 돌아온다
( 2022. 7. 20 )
가을
남진원
풀벌레 소리는 전설 같은 음색이다
하늘은 멋대로 높고 풍덩풍덩 잠자리 떼
가을도 마음 있다면 좋아죽겠다 호호호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가 을
남진원
파아란 하늘 속
방울방울
새들의 고운 노래
노래 따라
훨훨
나래펴는
마음은
마냥
높아만 가고
아,
나뭇잎
활활
불꽃 피우는 햇살
꽃내음 포옥 배어오는
들판을 달리다
바람은 꽃잎이 되어 뒹굴고
가을은
아가의 얼굴 만큼이나
맑고 탐스런 열매들을
익혀놓았구나.
(1975. 9)
어느 가을
남진원
헤어져 쓸쓸한
풀숲에
남은 꽃그늘
몹쓸
꽃대궁을 쓰다듬는
바람의 서운함만 쌓여
섭섭함이 비고
또 섭섭함이 비면
그때
우물 곁에 두고 싶은
귀뚜라미
귀뚜라미 울음
* 재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1987. 10. 1.)
* 익장회 회보 (1994. 3. 26.)
초가을
남진원
밤에 잠들기 전
한 쪽 문을 열어둔다
내 잠속에서도‘ 풀벌레들이
놀러 오게 말이다
요즘, 맛있는 꿈을 꾸는 것도
풀벌레들 덕분이다
어디 그 뿐이랴
열린 문밖에서
별들이 들여다보며
정겨운 눈짓을 한다
참, 요즘은
별과 풀벌레로 행복한 밤이다.
( 2024. 9. 9 )
가을 강
남진원
차가운 물소리
구부러진 채
나무 사이로
스며들고
사랑하는 이,
실낱같은 그리움의 머리칼을 세다가
너무 맑아서
눈을 뜨면
산도
강도
나무도
어깨가 허전해 보인다
가을 강가에
아무렇게
몇 송이 꽃이 피어 웃는 날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가을 강가에 서면
남진원
이가 아파도
기댈 곳이 없어
강가에 서면
차가운 물소리
구부러진 채
나무 사이로 스며들고
사랑하는 이,
실낱 같은 그리움의 머리칼을 세다가
너무 맑아서 눈을 뜨면
산도
강도
나무도
어깨가 허전해 보인다.
아무렇게 몇 송이 꽃이 피어
웃는 날
(「대관령 시인들」, 붓다가야, 1996.3.)
가을 강물
남진원
가을 하루가
풀잎에 떠내려왔구나
산도 깊게
꿈속에 빠진 것 같이 맑은 날
새들이 날아다니는 소리도
강물 속에서 번져나올 것 같아
나는 하늘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찾았다
( 2012. 톨스토이 태교동시집 . 처음쥬니어)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가을 개울가
남진원
풀잎이
떠내려 온다
단풍 든 가을 하루가 내 곁을 지나간다
가을 경영
남진원
이 저녁 풍성한 침묵
풍경도 눈을 뜬다
치솟은 산봉마다
핏빛으로 타는 단풍
달빛도 넉넉한 높이
살이 쪄서 살이 쪄서
미딛이 열어놓고
명상속에 먹을 갈면
마을이 한 장 동양화
갈바람에 흔들리고
방안은 잔잔한 禪景
산이 앉은 화선지
밤 깊어 난을 치다
문득 생각에 잠기면
귀뚜라미 푸른 귓밥
가슴 층층 고여오고
비워둔 적막한 뜰에
풀씨처럼 크는 서정
있는 듯 없는 듯
저 깊은 경영 속을
無常으로 저어오는
목이 하얀 바람 떼
그 속을 내 幼年 하나
목숨처럼 떠 간다.
( 1982. 10. 20. 강원문학 9집 )
( 1991. 9. 1. 제6시집. 시조집 『내 인생 밭을 매면 』)
가을 국화
남진원
그래 그래
슬픔 없는 삶이 있었더냐
고통도 고뇌도
사랑이구나
가을 국화, 네 맑은 웃음이
깨우쳐주는구나.
( 2022. 3. 12.)
가을 길
남진원
햇살의 입김 묻어 따사로운 길
낙엽 쌓인 길을 걸어가자
떠오르는 생각도 친구를 삼아
고향 같은 길을 걸어 보자.
짐 벗은 나무들이 반겨주는 길
낙엽 쌓인 길을 걸어가자
떠오르는 얼굴도 친구를 삼아
가을 덮인 길을 걸어가자.
( 솔바람 2집. 1990.3.1.)
가을 길목에서 바라본 코스모스
남진원
살면서
눈물 없는 인생이 있었더냐
배고픔 배신 번뇌 탐욕 부끄러움 사랑과 증오에 매달려 온 길이
아니더냐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백발을 날리는 석양 앞이네
삶은 꿈인냥 허망했지만
아니, 한갓 꿈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있었더냐
고개 돌리니
고와라
서리 맞아 싱그러운 코스모스
바람에 나부끼고
그래 그래
슬픔 없는 인생이 있었더냐
고통도 고뇌도
사랑이구나
코스모스, 네 맑은 웃음이
깨우쳐주는구나.
(2021. 6. 10. 새벽 2시에)
가을, 길의 노래
남진원
나서면 길이 났다. 그러나 선택하고 싶지 않은 길은 달아났다. 달아나면 찾아오는 새 길
안개를 닮아있다. 작은 호흡은 물방울 입자가 되어 날아가는,
단풍잎을 닮아있기도 했다. 불꽃놀이처럼 켜놓은 마음 속 글자들이 풀벌레의 자음으로 흩어지고,
물 갈대를 닮기도 했다. 뼈 속 까지 물들었던 ‘사랑해!’ 이 銀색의 환한 춤사위…
그 길은 지금도 눈부시고 있다. 千 江으로 출렁이는 금속성 달의 울음, 풋내가 나는 햇볕과 드디어 몸을 섞는….
가을 꽃
남진원
아무렇게나 서서
조그만 꽃잎들
손 흔들어요
막 1학년 들어온
우리 학교 애들처럼
웃는 모습도 삐뚤 빼뚤
그래서 더 정다워요.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가을 꽃
남진원
두근거리며
산꽃이 피었습니다
오래도록
쓸쓸한 모습입니다
가슴이 설레이고만 싶은
나즉한
눈물 하나 흘리고 싶습니다
다시는
불꽃으로 타지 않아도
두근거림 데워가는
작은 나라에 머물러 있습니다
억새꽃 우거진 길 따라
산새 울음이 고운
외로움 몇 송이가 손 흔드는 나라입니다.
( 1989년 9월. 『해안』6집 )
가을 나무들
남진원
손은 안 내보이고
코 코
예쁘게 잠자라고
온 산에
금빛 침구(寢具)
만드는 이불 한 채 두 채 세 채 …
가을날
남진원
자연은 무심해도 지날수록 정드는 곳
잠자리 떼로 날고 노을은 너무 붉어
맘 벌려 안겨 보게나, 웃게 되지 날마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가을날
남진원
이
좋은
가을날 오후,
안 마실 수
있나
커피
한 잔
( 2024. 10. 13 )
가을날
남진원
하늘빛은
일곱 살
마냥
푸른 날
열두 살 해바라기는
한나절
무슨 생각 하나
누님이 봉숭아 꽃물 들이고 있을 때
담 밑에 모여 앉아 소꿉장난하는
다섯 살 채송화 둘러보던
둘러보던
아홉 살 고추잠자리 고추잠자리 떼
노을로 뜹니다
노을로 번집니다
( 2025. 3. 3. ‘고추잠자리’ 개작 )
가을날 아침
남진원
방문을 여니
아침 산이 불쑥 다가온다
안개가 자욱하다
어느 故人의 시 속에
차 닳이는 스님의 묘사가 있었지
물긷는 스님이 산사로 들어간 후
잠시 뒤이어 숲속에서
모락모락 피는 연기
찻물 데우는 모습 속에
차 닳이는
연기가 나고
그 생각, 하는 것만으로도
싱그러운 아침이다
( 2024. 10. 13 )
가을날에
남진원
한세상 구한 부귀 풀잎에 이슬 방울
일찍이 말했던가 권세도 뜬구름이라
고요히 피다지는 꽃, 햇살만이 고옵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가을날의 미소
남진원
가을이 아름다원라 귀뚜라미 덕분이지
그 소리 생각만 해도 온전히 평화로워
염화의 미소보다도 자비로운 미소네
가을 논
남진원
짙은
산그늘
청청한
산빛
벼들이 마구 익어가는
때
와락,
노을이 달려들었다.
가을 달
남진원
이 저녁 풍성한 침묵 풍경이 눈을 뜬다
치솟은 산봉마다 단풍은 숨죽이고
허공은 無量 발걸음, 환희심의 燈 밝히네
( 2020, 전자책 시조집『꽃물 들어 아픈 날』, 한국문학방송)
가을 달밤에
남진원
소곤거리는 풀벌레는‘
우주가 들려주는
연주
그 멋이 좋아, 하늘에
달을 데려와
한 잔의 고요를 찻물처럼 마시네.
가을 바람
남진워
바람은
바람은
집배원 아저씨
풀벌레가
붉게 쓴
단풍잎 편지
이 산 저 산 다니며
전해 줍니다
바람은
바람은
집배원 아저씨
산 열매
노오랗게
익은 열매를
한아름 씩
마을로
가져옵니다.
( 1988. 8. 30. 제4시집<동시집>, 『풀잎과 코스모스에게 』)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남진원
앞산이 발긋발긋 바람이 엷은 물빛으로 술렁거리며 산에서 내려오는 날이면 맑게 씻긴 물소리를 퍼 담아 오는 누나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고 풀꽃의 작은 웃음소리 몇 개도 살결에 와 기댄다.
눈에 닿는 돌 하나도 친근해지지 않고는 서운한 가을바람 가을 속셈
여름이 떠나간 자리마다 잔잔한 햇빛이 닿아 그리움에 반짝이고 그리움은 풀꽃에 닿아 향기로 번져나고 어디에서도 탐스러운 가을 냄새가 난다.
고개 들면 작은 내 손 하나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이 파아란 하늘
잠자리 눈망울에 깃든 고요로움을 흔들며 교회 종소리가 번져나면 예쁜 빛깔과 소리가 마을에 동그랗게 내려앉는다.
보렴,
노을이 미끄러지는 하늘 아래 새소리도 귤빛으로 익어갈 때면 산에서 내려온 나무들이 잿빛 그림자를 마을마다 풀어놓고 무엇이라도 나누어 주고 싶은 얼굴을 한 과수원이며 언덕이며 들길을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운 빚을 지우려고 준비하는 환한 서두름을
그럴 즈음이면 나는 예쁜 크레용 하나 씩 들고 풀잎을 찾아가는 꿈을 꾼다.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화술, 1989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가을 바람 불 때
남진원
가을바람 부는
들길에 서면
나는 다 안다
코스모스가 울면
하나도 모습이 안 보이지만 ’
나는 다 안다
네가 얼마나 아름답게 울었는지를
나는 다 안다
나는 다 안다
아름답게 우는 법
내게도 가르쳐주렴
가르쳐주렴
가을바람 부는
풀밭에 가면
나는 다 안다
풀잎이 울 때는
하나도 소리가 안 들리지만
네가 얼마나 맑게 맑게 울었는지를
나는 다 안다
나는 다 안다
맑게 맑게 우는 범
내게도 가르쳐주렴
가르쳐주렴
가을밤
남진원
사르르르
나뭇잎 진다
또르르르
귀뚜라미 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
더욱 외로워
창가에 발처럼
달빛 드리우고
달빛 벗삼아
책을 읽는다
가을 밤
혼자 앉아
책을 읽는다
( 1980. 8. 20. 「물레방아」 제5호)
가을밤
남진원
<1.>
귀뚜라미
우는
사이
사이
바람
술렁
달빛도
입 꼭 다물고
나두 입 꼭 다물고
<2>
눈 감고
있으니
둥근 달, 오늘
뱃속에서
볼록볼록
훤히
보이네.
( 2000년 11월. [대관령 시인들 4집: 산꽃이 피었습니다])
( 제9시집 『어초』, 2002. 8. 1 )
가을밤
남진원
단풍 밴 뜰안에
어슴프레 누운 가을
한 장 고운 바람결도
댓돌 위에 스러지고
뉘 집 창 달빛 어리듯
귀뚜리도 저물어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가을 밤
남진원
마당엔 산이 누워
깊숙이 생각이 크고
뉘집 창 불빛 사위듯
저물어가는 풀벌레 울음
이 세상 인연가는 먼 곳으로
자꾸 떠나는 저 삶은
( 1991. 9. 1. 제6시집. 시조집. 『내인생 밭을 매면』 )
가을밤 별은
남진원
가을밤
별은
안개꽃 같은
눈빛
별아,
우리 아기처럼
너랑
친구해도 되지?
너랑
예쁜 꿈 꿔도
되지!
( 2012. 10. 13. 제11시집 『톨스토이태교동시』,처음주니어,)
가을볕
남진원
가을볕이
들깨 대궁과 마른 옥수수를 쓰다듬는다.
농부들보다 더 바빠졌다.
가을 비
남진원
가뭄으로 목이 타던 빨랫감만 수북한 날
껍질도 가난의 켜로 집을 짓고 성을 쌓는
그 팔월 갈증의 밭에 눌 듯 말 듯 하던 오줌
가랑이는 안 보이고 발가락만 자근자근
숨은 머리카락 언 듯 언 듯 내비치다
오늘은 엉덩이 까고 고운 은빛 하혈을
상큼한 새벽녘에 거울 닦듯 쟁반을 닦듯
몇 포기 먼지 낀 갈꽃들의 때를 벗기며
저 빛깔 맑은 음률을 파뒹기며 궁글리며.
( 시조집 『내 인생 밭을 매면』, 삼환인쇄사. 1991.)
( 월간문학 1987. 11. )
( 2020, 전자책 시조집『꽃물 들어 아픈 날』, 한국문학방송)
가을빛 고향
남진원
파아란
하늘 아래
고추잠자리 날때면
해바라기
한나절
해 따라 돌고
채송화 곱게 핀
고향집 마당 앞에
봉숭아
손톱마다
꽃물 들였지
소꿉장난 하던
애들의 웃음소리
나비처럼 나풀대는
어린 날
꿈의
고향 시골집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
가을 산
남진원
단풍잎 한들한들
손짓하는 산
날오라 정다웁게
손짓하는 산
산새도 비쭁비쭁
나를 부르면
내 맘은 바알갛게
꽃물이 들어
바람타고 동실동실
떠나갑니다
구름타고 둥실둥실
떠나갑니다
(1983. 10. 30. 조약돌 제11집)
( 1992. 5. 6. 제7시집, 동시집. 『선생님의 구멍난 양말』)
가을 산
남진원
하늘은 파란 볼테기
모두 모두 면도하고
산 산은 시원한 놀
머리 위에 걸렸다
분주히 나뭇잎 편지
연신 띄우는 나무들
산이 익는다
가을이 익는다
산골 물 한아름
가을빛으로 내려오고
바람은 가지 가지마다
생각의 열매로 맺혔다.
( 1979. 10. 20. 「물레방아」 제4호)
가을 산
남진원
두근거리며
산꽃이 피었습니다.
오래도록
쓸쓸한 모습입니다.
가슴이 설레이고만 싶은
나즉한
눈물 하나 흘리고 싶습니다.
다시는
불꽃으로 타지 않아도
두근거림 데워가는
작은 나라에 머물러 있습니다.
억새꽃 우거진 길 따라
산새 울음이 고운
외로움 몇 송이가 손 흔드는 나라입니다.
( 1987. 10. 1. 제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
가을 산
남진원
가을 산은
돌 하나에도 山色이 서려 있고
나래 넝쿨 지나면
새큼한 가을빛 온몸에 시려온다
좋을시고
이 산속 어디선가 바둑을 두고 있을
신선이라도 만날 같은
오늘은 村夫인 나도
한 세상 탈속한 느낌이 드이.
(1996년 시화 전시회 출품 작품)
가을 산길
남진원
아쉬움 속에
저무는
늦가을 산길
한쪽엔
곱게 물들다
단풍잎 지고
귀 기울이면
쓸쓸한
바람소리
이제는
뼈만 남아
서성이며 선 나무들
산길엔
가랑잎만
자꾸 구른다.
( 1979. 8. 20. 「물레방아」 제2호)
가을 散調
남진원
1.가을밤
마당엔 산이 누워 깊숙이 생각이 크고
뉘집 창 불빛 사위듯 저물어가는 풀벌레 울음
이 세상 인연과는 먼 곳으로 자꾸 떠나는 저 삶은 ...
2.귀뚜리
별들이 잎새 위에 스러져 잠이 든 밤
달빛은 가만가만 고독을 덮고 엎드려
마을 끝 댓돌 밑까지 귀뚜리 소리를 파내더니
그 울음 잠에 고인 목소리를 끌어내어
동구밖 여기저기 씨뿌리듯 뿌려놓고
저만치 멀찍이 떨어져 희죽이 웃는 뜻은...
뛰르뛰를 뛰르르르 뒤뜨르 뒤뜰뒤뜰
달빛이 서러워서 삶이 너무 서러워서
가을 밤 하얗게 열고 낭자히 구르는 독경소리
3.밤의 숲
어둠 갈피갈피 고요를 접어넣고
잎새들 설핏한 머리칼 잘라먹는 바람 한떼
짓푸른 피냄새 맡으며 바람 뒤에 내가 섰다.
갈기갈기 펄렁이는 개구리 울음처럼
목 말라 목이 말라 갈증을 펄렁이는 풀벌레
갈색 잠 연한 개울가에서 물소리를 씹는다.
별들이 산에 안겨 무성하게 자라는 밤
하늘은 달을 떼다 산마루에 걸어놓고
외로움 짙은 눈빛을 풀어 잠든 산을 태운다.
- 한국문인협회 월간 문학전문지,《월간문학》1980년 8월호에,
시조 ‘가을산조’로 제31회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가을 산촌
남진원
바람들이
갈대밭에서
웅성거리며 나온다
무 인 아주머니의
종종걸음이
산그늘 속에 저물면
목이 긴 오후의 햇살이
가을을 곱게 물들이는
산촌 마을
빨간
홍시가
떨어지고 있다.
( 국민학교 2-2 읽기. 1연 수록. 1995 - )
( 한국현대동시 20인 선집『끔을 심는 마음』, 1981. 10. 30 )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
가을 산행
남진원
가을산은 풍성해서 좋다.
구르는 돌 하나에도 山色이 서려 있고
산의 눈빛처럼 맑은 수풀 밑 옹달샘
팔과 다리를 구부리고 펼치며
제멋대로 엉켜 사는
잡목들의 우직한 자유스러움을 보며
익을 대로 익은 머루 덩굴을 지나고
다래 넝쿨을 지나고 있으면
새큼한 가을빛이 온 몸에 시려온다.
불쑥
나도
산봉 하나로 치솟아 오르고 싶은 날
예서제서 들리는 새소리를 세며
산꽃을 뜯기도 하다가
자작나무 숲을 헤치며
단풍 길을 접어들면
좋을시고
이 산속 어디선가 바둑을 두고 있을
신선이라도 만날 같소
오늘은 村夫인 나도
한 세상 탈속한 느낌이 드이
( 1987. 10. 1. 제3시집『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가을 새벽, 할머니는 …
남진원
우리 할머니는 해가 숲속에 들어서기 전에 바람이 푸릇한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문을 열고 나와 공기를 깨우고 샘물을 푹 바가지로 떠서 물을 깨웠다.
가을날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 숙인 아침, 할머니 걸음은 이슬에 젖은 파란색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은 모두 할머니 치마에서 풋풋한 풀벌레 소리를 들었다.
이즈음,
가을이 일정한 거리에 머문 채 바라보고 있다. 우리 집 앞 문래줄 숲 덩굴에서 몰래 몰래 다래가 익어갈 때처럼….
( 2018. 9. 2. 아침에 )
가을 새벽, 어머니는 …
남진원
우리 어머니는 해가 숲속에 들어서기 전에 바람이 푸릇한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문을 열고 나와 공기를 깨우고 샘물을 푹 바가지로 떠서 물을 깨웠다.
가을날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 숙인 아침, 물동이 인 어머니 걸음은 이슬에 젖은 파란색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어머니 치마에서 풋풋한 풀벌레 소리를 들었다.
이즈음,
가을도 일정한 거리에 머문 채 바라보고 있다. 우리 집 앞 문래줄 숲 덩굴에서 몰래 몰래 다래가 익어갈 때처럼….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가을 새벽, 할머니는 …
남진원
우리 할머니는 해가 숲속에 들어서기 전에 바람이 푸릇한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문을 열고 나와 공기를 깨우고 샘물을 푹 바가지로 떠서 물을 깨웠다.
가을날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 숙인 아침, 할머니 걸음은 이슬에 젖은 파란색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은 모두 할머니 치마에서 풋풋한 풀벌레 소리를 들었다.
이즈음,
가을이 일정한 거리에 머문 채 바라보고 있다. 우리 집 앞 문래줄 숲 덩굴에서 몰래 몰래 다래가 익어갈 때처럼….
( 2018. 9. 2. 아침에 )
가을 서경
남진원
머루 다래 어우러진 깊은 산 오솔길에
다람쥐 두어 마리 쪼르르 내달리고
바위는 우람한 가슴 한 것 펼쳐 보인다
물소리 계곡 가득 푸른 빛 쏟아내고
새들은 하늘 노래 총총하게 뿌려놓고
풀잎은 풀벌레 노래 가득가득 채우고
눈여겨 살펴보면 꽃 하나도 신비롭고
오색 물든 단풍 속에 산도 웃고 나도 웃고
천지간 이는 바람은 핏줄처럼 정답다
( 2020, 전자책 시조집『꽃물 들어 아픈 날』, 한국문학방송)
가을 숲
남진원
벌레 소리가 칡국수처럼 뽑아져 나오고 있다.
가을 아침
남진원
오늘 가울 아침
맑다
유난히 감사하고 소중하다
(먼지 긴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
67년 동안 내 인생의 ‘맑음’이 몇 번이었던가
저토록 투명하며 소박하고 산뜻한
맑음을 본다는 것
나를
숭고하게 하는구나
(2020. 9. 13)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가을 어느 날
남진원
헤어져 쓸쓸한
풀숲에
남은 꽃그늘
몹쓸
꽃대궁을 쓰다듬는
바람의 서운함만 쌓여
섭섭함이 비고
또 섭섭함이 비면
그 때
우물 곁에 두고 싶은
귀뚜라미
귀뚜라미 울음
(제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1987.10])
(익장회 회보. 1994. 3. 26)
(2024. 2. 3. ‘어느 가을’이란 제목을 ‘가을 어느 날’로 고침)
가을에
남진원
단풍이 들었다고
야단들이다
더러는 넋이 빠진 사람도 있었지만
아니다!
산이
세상을 향해
고함 지르는
소리 없는
절규,
절규다.
“세상살이,
이처럼 뜨겁게 살아온 날 있었더냐?”
라고.
( 2025. 11. 8. )
가을에 빨래를 널다
남진원
마당에 빨래를 널었다
이웃집 나들이 하듯
가을빛이 소문내지 않고 찾아왔다
살랑바람까지 끼어들었다
빨래들을
만져본다
내가 아내에게 좋아하는 표정을 지으면
감추려고 해도 얼굴에 즐거움이 드러나던 아내
지금 빨래들이 그런 모습이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가을엔 나무들이
남진원
본색이
드러난다
욕심쟁이도
심술쟁이도
꼬두머리도
대머리도
가을엔
숨길 수가 없어
정말로
착한 나무도
절로
드러난다.
( 1988. 8. 30. 제4시집<동시집>, 『풀잎과 코스모스에게 』)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가을엔 이가 아프다
남진원
씻길 대로 씻긴 가을 하늘을 보면
이가 아프다.
외진 산기슭
피어 있는 코스모스
흔들리는 바람에도
이가 아프다.
이리 소중해도
닦을 수가 없어서
차마 닦지 못해
다시 어느 해 저승 봄에 솟을
이가 아려 온다.
오랫동안 무던히
잊은 듯 살아온
뽀오얗고 귀여운 이
가을이 익어가는
강가에 서면
봄 그림자처럼
또 이가 아파온다.
( 1987. 10. 1. 제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
가을 오솔길
남진원
단풍 든 가을 오솔길은
편안한 정원이어요
여러분도 천천히 걸어보아요
여러분도 살그머니 걸어보세요
다람쥐 친구가 놀러 나올 거예요
너무 재미있어요
너무 즐거워요
들꽃 핀 가을 오솔길은
즐거운 동산이어요
친구와 손잡고 걸어보아요
친구와 웃으며 걸어보아요
도토리 친구도 반겨줄 거예요
너무 재미있어요
너무 즐거워요
가을 운동회
남진원
검정 팬티 런닝 셔츠
고무신을 신었어도
만국기 펄럭이는
운동장에 들어서면
마음은 새보다 높이
날았어라 날았어라
그러다 싫은 것이
딱 하나 있었지
덤블링, 곤봉체조
신명나게 했었지만
뜀박질 고 건참으로
가슴부터 콩닥였다
장대에 매단 바구니
콩주머니로 후려친다
바구니 터뜨려지자, 큰 글자 ‘점심시간!!’
점심밥 먹을 생각에
들뜬 채로 환호했지.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가을의 노래, 나무여 네 잎이 떨어질 때면
넘진원
가을 나무여, 네 잎이 떨어질 때면
낙엽쌓인 길이 아니라도
어깨가 낮은 사람과 가고 싶다
강물은 단풍처럼 붉어
외로움 더욱 잔잔한 강가에서
나무여, 네 잎이 질 때면
해 질 무렵 산 집에서 연기가 피고
하늘이 높아가는 지금은
세레나데의 노래를 듣지 않아도
좋은 때
밤은 깊어가고
달이 창가에 비친다
바람소리만 들어도 그리운 사람아
오늘 밤은 달빛이 스러지도록
낙엽을 태우고 싶어라
그러나 낙엽 태우는 냄새가 아니라도
네 잎이 떨어지는 오늘은
우리들 영혼의 갈매기를 띄우는
가슴이 고운 사람과 있고 싶다
얼굴을 마주하고
오늘 밤은 한 떨기 눈물을 피우는
밤이고 싶다.
( 1985. 9. 10. 『물레문학』 4집 )
가을이랍니다
남진원
가을이 와요, 수수가 익을 때면
물방울처럼 물방울처럼
귀뚜라미 울음이 맑아지는 날
가을아, 가을아 입으로 가만히
불러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마음
가을, 가을이랍니다.
가을이 와요. 들국화 필 때면
이슬방울처럼 이슬방울처럼
풀벌레 노래들 고와지는 날
‘상이야, 은이야’ 친구를 귓속말로
불러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웃음
가을, 가을이랍니다.
* 「솔바람 회보」301호, 2015. 7. 18.
가을 저녁
남진원
나뭇잎에서 벌레 소리가 난다
점점 붉어지는 노을
석양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을 건네려 하는 …
행복한 모습이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가을, 집 마당
남진원
한동안 그대로 두었더니
가을 집 마당이 풀밭이 되었다
찾는 이들이 없으니
풀만 제멋대로다
달빛
스며드니
풀벌레가
모여든다
오늘
밤
너희들이 내 벗이구나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가을 풍경
남진원
머루 다래 어우러진 깊은 산 오솔길에
다람쥐 두어 마리 쪼르르 내달리고
바위는 우람한 가슴 한 것 펼쳐 보인다
물소리 계곡 가득 푸른 빛 쏟아내고
새들은 하늘 노래 총총하게 뿌려놓고
풀잎은 풀벌레 노래 가득가득 채우고
눈여겨 살펴보면 꽃 하나도 신비롭고
오색 물든 단풍 속에 산도 웃고 나도 웃고
천지간 이는 바람은 핏줄처럼 정답다
가을 풍경
남진원
산과 들 고요해도 지낼수록 정드는 곳
허공은 신들렸나, 잠자리 떼로 난다
가을은 단맛이 들고 저리 맑은 하늘색.
가을 풍경
남진원
가을 달, 다 떠나보내고 난 저 들판이
마른 입술 같아도
저들이
생명을 깨우려는 몸짓임을 안다
고요하여
평화로운
거침없는 모습
씨앗의 속삭임을 넉넉한 품으로 받아들이고
정적 속으로
한 마리 새를 가로줄로 날려 보냈다
저 모습들이 너무 편안하여서
나는 할 일을 접어둔 채
이,
작은 풍요 속에서
무심한 즐거움을 배가한다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가을 하늘
남진원
꼬리 빨간 고추잠자리
몸이 달아 자꾸 날고
호박덩이 여기 저기
제멋 겨워 누워 있던
그런 날 왜 또 하늘은
눈시리게 푸르렀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가을 한낮
남진원
풀밭 바람이
언덕바지에서
신난다며
단풍빛 바람을 휘몰아오면
“이때다!”
과수원에 있던
사과빛 바람이
쏟아져나오고
미루나무 속
떠다니던
참새빛 바람도 달려와
코스모스 잎새를
하나 둘 셋 넷 …
엎어보고 젖혀보고 뒤적이다가
한 잎
두 잎
어느새
꽃잎이 되어 나뒹구는
가을
한낮
( * ‘바람들이 / 갈대밭에서/ 웅성거리며 나온다’ 라는 <가을 한낮>의 ㅂ연은 국정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임.
( 1979. 10, 2. 소년한국일보)
( 1992. 5. 6. 제7시집. 동시집 선생님의 구멍난 양말 )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가장 멋진 사나이
남진원
방터골 정류장에서 내리면 돌멩이도 꽃이 되어 웃는다. 계곡에는 맑은 하늘이 내려앉고 큰 다리를 건널 때면 작은 음악회를 여는 물들의 노래에 절로 귀가 모아진다.
한참을 걸어 올라오다가 두 그루 거대한 금강소나무를 마주하고 걸음을 잠시 멈춘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내 집 같아 바다 거북이처럼 느긋해진다.
금강소나무를 지나 낮은 언덕길을 오르면 아, 멀리 개울 건너 산 밑에 정이 들대로 든 녹색의집 한 채가 기다린다. 언제 봐도 믿음직하고 멋진 자태. 누가 세상을 다 가졌다고 말 했나.
숲이 노래하는 녹색의 집이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자이다. 그곳에서 꿈을 꾸고 밥을 먹고 풀을 뽑고 시 농사를 짓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나이다.
이런 나를 보고 긍정주의와 낭만주의라 하는 자들, 그들은 고된 땀방울과 진실한 눈물을 아는지 …
(2021. 8.31)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바다
남진원
방터골 골짜기에 내려가 발에 물을 담가본다.
대단하구나!
이 물은 산의 이름을 바꾸어놓았다.
물이 있어야 불려지는
명산
물은 흙의 이름도 바꾸었다.
물이 있을 때 불려지는
옥토
물은 집의 터도 이름지었다.
배산 임수
물이 있었을 때에야 그 빛을 발하는
明堂
비, 구름, 안개는 다 떠도는 물 방랑자들의 다른 이름
물이 가장 낮은 곳을 찾았을 때
물은
가장 큰 이름을 얻었다.
‘받아들인다’, ‘받다’라는 ‘바다’
바다!
이런 개념정립이 된 후에 다시 강릉 바다에 가 보았다.
바다의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본다.
가장 낮은 곳에서
혼탁한 것들을 모두 받아들여
정화하는
受用의 정점,
물의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바다’
들쭉날쭉 수없이 치솟아 있는 거대한 산들이
威容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한없이 가볍고 작은 이 물방울이 모여든
바다
바다에 기댄 덕택이었구나.
낮은 곳에 모여든
바다의 물방울
물방울의 바다
그곳에 의지해서야
에베레스트 산도 해발 8848m 라는
세계 최고의 봉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산들은 그때서야
제각각 자신의 높이를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나를 들여다본다.
우주에 떠돌던 맑은 물방울이 내 몸속에 들어와
붉은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물
나는 물을 담갔던 발에서 나와
슬며시 손바닥에 물을 담았다,
맑음,
끝없는 삶의 여정에서
내 안에 잠시 머물고 있는
순례자 같은
물
나는 이때에야
색 바래고 볼품없는 나의 높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가족
남진원
폭설이 내렸다.
1m 70cm나 왔다.
산짐승은
어찌 사누?
감자, 고구마, 배추시래기, 말린 칡 순을
뒷산 눈 위에다 뿌려 놓았다.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서로 말 안 해도
귀한 가족이라는 걸….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가족 사진을 또 보며
남진원
우리 네 사람
한 생에 나와서 만났구나
아내로 남편으로 아들로 딸로
사진관 아저씨는 솜씨도 좋아라
사진을 볼 때마다 감사드린다
우리 네 식구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운 미소의 순간이었나
어깨를 맞대고
평생 행복할 웃음을
나누고 있구나.
(2023. 11. 7.)
각시 붓꽃
남진원
봄 속에
나와 앉았다
산속에 각시붓꽃
들길에 각시붓꽃
계곡의 물소리가 엷어지고
새들의 지저귐이 연해진다
봄마저
멍래 있다
앳된 미소 앞에서 …
( 2012. 10. 13. 제11시집 『톨스토이태교동시』,처음주니어,)
갈비탕 먹던 날
남진원
배정순 시인께서 이금안 충주문협지부장과 함께 식사를 하자는 말을 이연희 처장께서 전했기에 내가 좋아하는 갈비탕 잘 하는 집에 모두들 갔다
이금안 선생,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여도 내색 않는 그 모습이 참 거룩해 보이기조차하였다
나만 내 좋아라 하는 갈비탕 싹싹 비우고 나니 염치없는 이 저급한 행위를 봐라!. 나이는 제일 많은 데도 철딱서니 없이 하는 이 짓이 제일 어린애 같았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후회하였다.
참, 부끄러웠던 날이었다.
( 2024. 9. 10 )
감
남진원
새만 알을 낳는 줄 알았는데
나무도 예쁜 알을 낳는다
감나무가 봄이 되자
파란 알을
조롱조롱 낳았다
가을 내내
햇살이 쏙쏙스며 들더니
빨간 알이
주렁주렁
엄마와 홍시를 먹는다
이건
달콤한 나무의 알을 막는 거야
( 2012. 10. 13. 제11시집 『톨스토이태교동시』,처음주니어,)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는 호랑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있지요. 그게 바로 곶감입니다. 감을 말려 놓은 게 곶감이죠. 홍시는 감이 포옥 익은 과일입니다. 제사 지낼 때에도 곶감이나 감은 빠지지 않는 음식입니다. 새가 알을 낳듯이 나무도 알을 낳는다는 생각이 재미있죠. 마음의 눈으로 보면 평범한 일도 새롭게 보입니다.
감
남진원
하늘에 감이 달렸다. 포옥 익었다.
2004년4월아침7시30분
둥둥 떠다니다가
땅에서 꽝하고
감이 터져버렸다.
( 시집,『장자의 하늘』, 태원출판사. 2004. 6. 30.)
Persimmon
skawlsdnjs
A persimmon was hung in the sky.
It grew ripe completely.
At 7 : 30 a.m. in April, 2004,
The persimmon floats in the air,
Fell with a thud on the earth,
Got broken down.
( 訳:원병관 )
감나무가 훨씬 더 멋져
남진원
방터골 고목의 감나무들. 지난해에는 감들이 적게 열렸다. 올해는 가지가 휘도록 열렸다. 감이 해거리를 하는 모양이다.
한 해 동안의 휴식이 가져다주는 힘이 저렇게 큰 것이구나.
높아서 사람들은 감을 따는 것을 포기했다. 누군가가 어려워지면 누군가는 그 어려움으로 덕을 본다고 했다.
사람들이 따 먹지 못하는 감 덕분에 새들은 겨울에도 실컷 단맛을 보는 삶을 살겠구나.
사람들은 해를 닮고 싶어. 해처럼 밝은 마음으로 살려고 한다. 감나무는 해를 닮고 싶어, 작고 달콤한 해를 가지마다 꺼내어 달아놓았다.
이런 걸로만 보면 사람보다 감나무가 훨씬 더 멋져.
(2019. 10. 22.)
감자꽃
남진원
어마, 어느새 감자꽃 폈나?
곁에 가니 감자밭에서 일하시던
엄마의 단삼(單衫) 냄새가 나는 듯하다
뻐꾸기가 좋다고 자꾸 노래 부른다.
구름이 떠돌다 잠시 내려다본다.
족두리 같은 꽃 왕관 쓰고
뽐내는 꽃
시골집 우리 엄마 같은 꽃
(강원아동문학 43집. 2018년)
감자꽃
남진원
감자꽃 필 즈음에는 마실이 순하였다
흙 묻은 옷을 털고 꽉 잡던 덕천이 손
질박한 미소 속에서 송진 냄새 물씬 났지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감자꽃 피면
남진원
감자 꽃 피면 뻐꾸기 울어요.
뻐꾸기 울면
생각나는 친구
흰 구름 두둥실 산을 넘으면
친구 얼굴 두둥실
떠오릅니다.
무얼 하고 지낼까 어떻게 지낼까
친구 모습 두둥실 궁금합니다.
잘 지낼까 행복할까 궁금합니다.
감자밭
남진원
할머니가 김을 맨다.
허리 구부리고 풀 뽑고 북을 준다.
훤히 트여가는 밭고랑
송화 가루처럼,
감자밭에 뻐꾸기 소리 날린다.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감자 밭매기
남진원
감자 포기 밑에
소복이 모여 있는 바랭이 풀들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지?
잘못하다 들킨 아이들처럼
내 손에 다 붙잡혀 나왔지 뭐.
감자서리
남진원
아카시아 수풀 위로 연기 폴폴 피어났지
감자서리 하는 거야 남자 여자 다들 모여,
검게 된 입을 닦으며 하하 깔깔 웃었지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감자씨를 놓으며
남진원
이랑을 켜고 감자씨를 놓았다.
흙을 덮었다.
얼마 후
싹이 돋았다.
감자씨가 잎을 내밀 듯
입을 내민다.
신비로움과 환희
감자씨가 죽음으로
삶을 말하고 있다.
온전한 썩음 뒤에야,
영원으로 가는
새로운 발걸음이 시작되고 있다.
( 바다시낭송 시첩 2017. 4.)
갑술년 아침에
남진원
무엇을 잃어버리고도 모른 채 흘러가며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그도 모른 채 떠다니며
사람아
검은 머리만 내보이는 사람아
땅이 하늘로 오르고
하늘이 땅에 엎드린다
벌써 닭우는 소리
마을 밖을 돌아나가고
누군가?
오시고 있어 새벽을 찾는
저 黃犬
( 1994. 10. 5. 『시와 산문』 )
江
남진원
다시
강이라 이름 붙이지 말자
진흙밭 흙탕물도
순한
연꽃을 피우는데
죽은 배때기만 드러내고
썩은 뼈다귀만 드러내고
속을 것이다
못볼 갓이다
…
속아 주랴.
( 1992. 11. 아라리문학 12집 )
歷史의 강
남진원
시인 묵객 호걸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이냐
흐르는 역사의 江 무심히 들여다보니
긴 고독 침묵의 낚싯줄! 세월 속에 잠 재웠네
강가에서
남진원
단풍 든 풀잎이
떠내려 온다
가을 일생의 한 분이 내 곁을 지나간다
강가에 서면
남진원
나는 바구니
강가에 서면
건질 것이 없어도
강가에 서면
물새가
울며
혼자 지날 땐
그 울음
외로워
담을 수 없는
나는
비인 바구니
강가에
서면
( 1988. 8. 30. 제4시집<동시집>, 『풀잎과 코스모스에게 』)
( 1989. 4. 15. 제5시집,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강가에 서면
남진원
강가에 서면
차가운 물소리
구부러진 채
나무 사이로 스며들고
사랑하는 이
실낱 같은 그리움의 머리칼을 세다가
너무 맑아서 눈을 뜨면
홀로
빛나는‘
눈 먼 사랑
그 곁에
반짝이고 싶은
나는
나는 별이 됩니다.
( 2000년 11월. [대관령 시인들 4집: 산꽃이 피었습니다])
강릉
- 9층 아파트에서 -
남진원
참 오랜만에 머리칼이 푸르러졌다
아침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보이는
강릉 시가지가 이리도 젊게 살고 있는 줄
남산의 숲이 뿜어내는 것은
산소가 아니라 향기였구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오누이처럼 어깨를 맞대고
퐁퐁 숨을 쉬고 있구나
낮아서 안 보이지만 나의 가게 <키작은 모차르트>도
저 쪽 어디엔가 숨어 있어
잠에서 깨어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멀리 연푸른 띠를 두른 동해 바다도 반갑고
제일 반가운 것은
강릉은 이름 그대로 가 ㅇ– 르 ㅇ -
시간이 흐를수록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확인이었다.
( 1993. 10. 22. 『달빛 쏟아지는 경포호의 시정』, 강릉예총 문협지부 )
강릉
남진원
강릉은 아름다운 곳
맞습니까?
누가 물으면
맞습니다.
경포대,오죽헌, 경포해수욕장…
무엇이 제일 아름다운가요?
누가 물으면
아닙니다.
이렇게 단박 대답하지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다시 물으면
이렇게 단박 대답하지요.
강릉
사람이라구.
( 시집, 『장자의 하늘』, 태원출판사, 2004. 6. 30.) .
Gangneung
Nam Jin Woan
If anyone ask me,
" Is Gangneung a beautiful place?"
Yes, it is.
If anyone ask me,
"Where is the most beautiful place of
Gyeongpodae, Ojukheon, Gyeongpo Beach?
"No." I answered instantly.
If anyone ask me,
"And, what is it?"
"Man in Gangneung."
I replied immediately.
( 訳:원병관 )
강릉 땅, 강릉 바다
남진워
내 집은 강릉 땅
강릉 바다는 우리 집 연못
오눌처럼,
맑은 날 바다를 보면
거칠게 날아다니는
예쁜 갈매기들 좀 봐
오리 바위 십리 바위
더 의젓하다.
내 집은 강릉 땅
강릉 바다는 우리 집 연못
희망처럼,
이런 날 바다를 보면
마음이 툭 터지는
넘실넘실 파도를 좀 봐
흰 모래밭 멋진 해송
더 행복하다..
(2024. 2. 18)
강릉 대관령과 바다
남진원
1.
둥두렷 둥근 달이 바다에서 솟아오르면
대관령 산과 들은 나들이 나온다
환하게 환하게 손을 잡고 나온다
달빛에 싼 오죽헌의 청산 한 채
여기는 지상의 파라다이스라오
2.
둥두렷 둥근 달이 대관령을 넘을 때면
동해의 푸른 바다 옥빛으로 흘러간다
환하게 환하게 웃으면서 흘러간다
달빛이 싼 경포대의 해변 한 채
여기는 꿈의 파라다이스라오
강릉대도호부 사거리
남진원
얼마나 깨끗한지 잠도 잘 것 같았지
60년대 시내 거리 그렇게 깨끗할 수 없었지
포장된 까만 아스팔트 위 미끄러지던 자동차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강릉 무선국 벚꽃
남진원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연인,
1965년 대 강릉 무선국 벚꽃
시내의 어느 벚나무라도 감히
미모를 견줄 수 없었다.
그래,
단연코 빼어났었지
아름다움아름다움아름다움 …
두근거리며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화려함의 절정,
蠱惑의 추파를
던지던 …
최고였다
(2024. 3. 23.)
강릉 바다
남진원
강릉바다는
강릉사람들에게는 기분이 나빠도 돈을 모아준다
강릉바다는
외지 사람들에게 기분을 좋게 만들어 돈을 쓰게 한다
강릉은 이래저래
바다가 보물이다
강릉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 덕분에 살아가는 것을
얼마나 깊이 느낄까
바다와 해변이 여름이면 쓰레기장이 되기도 한다
바다는 입이 없다고
할 말까지 없을까.
(2019. 7. 28.)
강릉 바다
남진원
(1)
바다에 나갑니다요.
내 옷깃에 젖는 것은
파도소리가 아닙니다.
솔 빛 푸른 바람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음악입니다요.
(2)
강릉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를 품고 살아야 강릉 사람이 됩니다요.
강릉 바다는
햇빛을 받지 않아도
언제나 닦인 모습을 하고 있습지요.
달이 뜨지 않아도
소리는 빛 속에서 들립니다.
강릉 사람은
어지간한 일쯤이야
모래밭에 묻고 맙니데이.
끓어오르는 恨, 가슴 한 쪽에
삭혀가는 여인처럼
스스로 물길이라고 당당해 하던 수로(水路)부인처럼
강릉 골테이 사람들은
대관령에서 굽이굽이 구부러져 내려오던 바람소리까지
배려 한 줄기로 반듯이 세웁디다요.
그래요, 이눔 저눔 다 -
붉은 소나무 닮고 바다를 닮았구먼요.
강릉 바다에 뜨는 보름달
남진원
늘 사람 살아가는 일상은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주저앉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지만,
우리 일어날 수 있는 건, 걸어갈 수 있는 건, 달려갈 수 있는 건
정월 보름날, 경호鏡湖 정자亭子에 올라 보면 알 수 있으니,
둥글고 커다란 달덩이 한 채, 젖은 물비늘 떨구며 두둥실 강릉 바다에서 떠오르는 걸 보면 알 수 있으니,
고요한 침묵으로
쏟아내는 은빛 언어들의 광채를,
듣는가 …
아름다운 선율은 구부러진 것을 펴고
기울어진 것을 세우고
흔들리는 것들을 포용하는
광활한 자유의 숨결
바다에서 하늘로 날아오른 강릉의 달은
바다에 달 하나를 다시 남겨두고, 호수에 달 하나를 또 내려놓고 경호의 정자에 다가와서 향기로운 달 하나 술잔에 띄우고,
사랑하는 임이여,
임의 눈 속에는 청송 같은 그리움의 달 하나를 새겨놓았구나,
다섯 개로 뜬 달은, 새 날 용서의 빛, 새 날 화해의 빛, 새 날 소망의 빛, 새날 믿음의 빛, 새 날 환희의 빛임에랴.
늘 사람 살아가는 일상은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주저앉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지만,
저 달이 있어, 해마다 희망을 꿈굴 수 있어 행복하네
저 달이 있어, 해마다 사랑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네.
강릉 바다, 오리바위 십리바위
남진원
강릉을 찾는 사람들은
오리바위 십리바위를 봐야
속 깊은 강릉 사람 情을 느끼게 됩니다요.
손닿을 듯 살가운
오리바위, 십리바위는
멀어지는가 싶으면 가깝고
가까운가 싶으면 멀어져
늘 고만한 거리 안에서
동해 바다를 둥둥
띄워놓았다네요
강릉 사람이 저리 무뚝뚝해 보이는 것은
다 바위 때문입니다요. 저놈, 회색빛 바위에
선남선녀
불같은 정을 다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요.
이런 모습이 꼴같잖아서
성산 막걸리 냄새나는 파도소리에 섞여 사는
강릉 사람들 목소리,
늘, 바다보다 짙은 남빛입니다요.
그래요, 그래. 이리 사는 강릉 사람들
ㅎ ㅎ 남새스럽다요.
강릉 바다의 아침
남진원
갈매기 날개깃에서
젖은 어둠이 벗겨지고
강릉 바다의 아침은
물너울 사이로 일어선다
거대한 실타래를 건져 올린 바다 용왕은
명사십리 모래밭에 푸른 상어 이빨을
토해놓는다
곧이어
바다를 송두리째 달구면서 차오르는
해의 저 황홀한 춤사위
扶桑의 숲에서
퍼져나오는
영겁의 바람을 앞세운 채
지구를 깨우며
금빛으로 날아오른다.
( 2021. 6. 17. 2024. 7. 27 개작)
강릉바다 해맞이
남진원
강릉의 새벽 바다는
어디, 꿈틀거리는 고기들의 비늘 번뜩임
뿐이랴,
동해의 가슴에
허균을 품고 김시습을 껴안고
역사의 유전자로 살아 빛나는
물굽이를 본다
석기 시대의 삶을 지키며
오늘을 사는 강릉바다의 해송
이제 거대한 집처럼, 느낌표로 섰구나.
그렇다, 바다를 보다가
새 유전자 같은 해를 두 손에 받드는 사람들
환희로움은
어느 행성에서 쓰는 파란색 문자처럼 채워지고
그래 아름다움이란 거,
지금 떠오르는 태양처럼
오늘을 딛고 서서, 내일을 말하고 싶은
저 바다의 얼굴이었던 것
보라!
새벽을 여는
해도,
해를 품은 사람들도,
모두
장엄한 환상적 에스프리였다
빛의 메타포였다.
강릉, 벚꽃 축제
남진원
이때쯤이면
사람 마음
잔뜩 달구어놓더니
올봄 벚꽃 축제?
벚꽃 없는
벚꽃 축제
할랑가
환경 파괴해 놓더니
기후 속을 확 뒤집어 놓았구나
강릉, 벚꽃은 커녕
벚꽃 망울 움츠려놓은
눈 왔다.
언제는, 그토록 기다려도 오지 않던 눈이 … .
( 2024. 3. 23. )
오늘, 강릉의 ‘맑음’
남진원
지난밤, 인근에 내리 눈 때문에
다들 치우느라 야단들이라고 한다
커튼 열고 내다보니
강릉은,
‘맑음’이다
건조한 날이 이리도 지속되다니
또 다시 산불 위험!
이뿐만이 아니다
모두들 마음속 건조 경보까지 내렸다
강릉의 ‘맑음’
밉살스럽다
( 2026. 2. 2. )
강릉의 봄은 어디서부터 오나
남진원
강릉의 봄은 어디서부터 오나
길 가는 사람들 옆에 지켜서서
선한 웃음을 내보이는
목련 향기에서부터 오신단다
강릉의 봄은 또 어디서부터 오나
방죽 따라 길게 이어진
개나리꽃 물결에서부터 피어난단다
강릉의 봄은 어디서부터 오시나
남대천 강변에 늘어선
미루나무 연노랑 잎들이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강릉의 봄을 펼쳐 보이고 있구나
사람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
꽃이 이렇게 피어도
무심한데
꽃들은 나무들은
마구마구 봄을 만개시키고 있구나
산에 들에 우두커니 선 돌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발그레 봄이 봄이 물들었을 거다.
( 2025. 3. 28 )
강릉의 옛 버스 터미널에서
남진원
사진관 있는 자리, 그곳이 터미널이었지
중학교 입학 위해 시골에서 막 내려왔지
모자 쓴 상급생 보고 겁이 난 건 나도 몰라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새해 강릉의 오후
남진원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노래의 선율처럼
부드러운
커피 한 모금
새해의 한낮이
마음을
은은히 데우는 날
노년의 뜰에 서서
젊은 날의 사랑을
생각해 보다가
빈 방안,
홀로
적막에 안겨
창 너머로 눈을 주니
멀리 보이는 대관령 능선
구부러져 있는 부드러움의
오후
나, 또한
산사의 적막 같은
휘어짐으로 앉았다.
( 2026. 1. 4. )
강릉항 바다 일출
남진원
갈매기 날갯짓에서
젖은
아침이
너울너울 일어선다
거대한 물의 실타래
건져 올린 강릉 바다는
모래밭에 상어 이빨을
토해 놓는다
그 틈새로
해저 밑바닥부터
달구면서
차오르는 해의
황홀한 춤사위
지구를 깨우면서
날아오르는 몸짓이다,
태초 원시의 바다에서
태어나던
소리의 빛이었다.
(2022. 6. 11.)
강 변
남진원
저물녘 강변에는
그림자가 누웠더이다
무거운 바람만
어두워지며 흔들리더이다
남루한 사랑 하나가
갈대처럼 살더이다
소리를 죽여가며
흐르는 물 있더이다
하늘 바라 키만 커진
나무가 있더이다
밤이면 순하게 순하게
달맞이꽃 피더이다
( 1988. 11. 20. 『강원시조문학』)
( 2020,. 전자책 시조집 [꽃물들어 아픈 날] , 한국문학방송 )
江雪
남진원
하늘길 산길 모두 자취가 끊어지고
눈 내리는 배 위에는 삿갓 쓴 도롱이 옹
낚싯대 드리워놓고 홀로 寂이 되었다
( 유종원의 한시 ‘강설’을 시조로 재창작한 작품 )
( 남진원 산문집,『달빛에 싼 청산 한 채』‘고독이 남긴 시인들’ 중에서)
江心
남진원
풀잎에 닿을 때는 이슬 하나 이름 붙지만
스며든 가을 만큼 달빛 숲을 돌아
그리움 한가운데 선 너의 이름은 이름은
( 1990. 11. 30. 『아라리문학』 9집 )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강아지
남진원
내가 가까이 가니
도망가요
며칠 안 왔다고
내가
미워졌나.
강아지가 왜 못 본 척 할까요?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강아지가 못 본 체하여 서운한 마음이 담긴 글입니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혼난 지도 모르죠. 그래서 사람을 무서워한 건 아닐까요? 아니면 그 동안 강아지를 많이 귀여워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사랑은 아주 귀한 선물인 것 같아요.
강원도 감자바위
남진원
중고등학교 때 여름 교복 목의 깃 부분에 빳빳하게 풀 먹여 다니던 애들이 있었다 애들 목도 빳빳이 풀 먹인 것 같았다 개들이 힘주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감자 전분 덕인 걸 알았다
쌍둥이 삼촌이 어릴 때 감자만 주로 드셨다. 마을에서 골목대장이셨지 지금 생각하니 감자 덕이었던 거야 70이 되신 지금도 떡대 좋고 힘 좋은 게 다 그 때문이야
녹말 가루를 만지면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뽀얀 가루가 손에 묻었지 그게 재밌어서 손 장난 하다 보면 얼굴이 온통 흰둥이가 된 적도 있었어
제 몸을 썩히고 썩히며 악취를 풍긴 후에야 백옥의 전분으로 다시 태어난 감자의 우직스러움
사람도 감자만 같아 봐라
강원도 사람들을 감자바위라 하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게야.
( 2013. 12. 10. 강릉문학 21집 )
강원도의 여름
남진원
아름다워라 강원도의 여름
산과 산들은
여름의 빛과 협약을 맺었는지
길게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동서로는 힘차게
다리를 뻗듯이 산맥을 드리웠다
저 힘차게 뻗어내리는 산맥처럼
푸른 나무로 어우러진
숲들의 의연함
산은 숲 아래 자리 하나 씩을 내어
사람들을 품었다.
옹기 종기 모여 앉은 집은
얼마나 정겨운가.
강원도 산,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저런 풍경에서 비롯되는
강원도의 아름다움
순박한 강원도 사람들처럼
침묵 같은, 깊은 믿음으로
너희들도 그렇게
대를 이어 장중함으로 대를 이어가는구나..
( 2025. 7. 1. 서울을 내려오며 본 느낌)
강의가 있는 날이면
남진원
아내는 어지간히 아파도 몸을 추스르며 강의가 있는 날이면 태워주었다
태성전문대학(강원관광대학), 영동대학, 강원도립대학, 옥계중학교, 정동초등학교, 구정초등학교, 남애초등학교…
강의를 하는 동안 아내는 길옆에 차를 세우고 기다려주었다
“지루했지?”
“아-니.”
굽이굽이 눈 관광도 하고 산 중턱 노상 찻집에서 전통차도 마시고 썰렁한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새 집 가까이 왔지.
행복해서 더 고맙고 더 미안하고 더 안쓰러웠던 날
( 2013.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강자아
남진원
강자아 80년 삶 萬古風情 아니더냐
점 봐주고 술 팔더니 제나라 候 되었네
조가의 주막집에서 그 술 한 잔 들고 싶네
( 강자아: 강태공을 이르는 말 )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나도 강태공
남진원
천만번 솟구치는 고뇌의 덩어리들
다 씻어 낼 때까지 바윗돌로 앉아 있다
고요한 시간의 물결 대면하는 隱者여
( 2024. 9. 19 )
같이 먹자!
남진원
밥 넘기기가 힘들어져서 먹여 주었다
한 숟갈 먹어서 또 한 숟갈 떠 입에 대니 고개를 젓는다
왜?
같이 먹자!
내가 한 숟갈 먹고 떠 주니 그제서야 먹는다
아내 한 숟갈 먹고
내가 한 숟갈 먹고 …
아픔 속에서도
같이 하고 싶은
아내의
마음
( 2013.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개가 어우러졌다
남진원
젊은 나이에 할아버님을 보내고
집안을 일구어 오신 할머니
봄은 멀찍이 산에 다가가서
짙고 연한 녹색의 푸름을 마구 일구어갈 때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산을 보며
느낌을 뭉뚱그려 말하셨다.
‘개가 어우러졌다’
해마다
짧은 그 말로 할머니의 봄이 출렁였던 것을
이 나이에 알아들었다.
개구리
남진원
괭이질 사이사이 질펀한 개구리 소리
들어와 얼른 씻고 고요히 앉았겠다
저 소리 듣고 있으니 부귀영화 무색하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개구리
남진원
공기 방울에 섞여
우주 가득히 떠도는
푸른
글자, 글자들…
( 2023. 1. 1.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개구리
남진원
개구리가 노래해
개굴개굴 개굴 개굴(표정 손 동작 함께)
선생님께 칭찬 받았대요.
개구리가 신나게 노래 해
개굴개굴 개굴개굴(표정 손 동작 함께)
엄마에게 칭찬받았대요.
무슨 일로 칭찬 받았을까요?
( ~으로 칭찬 받았대요.)
무슨 일로 칭찬 받았을까요?
( ~으로 칭찬 받았대요.)
( )안의 내용은 ‘착한 친구가 생겨서’, ‘심부름을 잘 해서’ 등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맞추어 넣도록 합시다. 곡을 붙여 재미있게 노래로 부르면 더욱 좋겠죠.
개구리 소리
남진원
공기 방울에
섞여
뽀글뽀글
헤엄쳐 다니는
푸른
글자들
멋대로 뛰어 논다.
개구리 소리
논물에서
방울방울 샘솟다가
짙은
나뭇잎 색깔로 퍼진다.
살짝, 실개울을
건너오기도 하고
건너가기도 하다가
급기야,
마구 방터골을
헝클어놓는다.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개구리 소리 들리는 밤
남진원
파종을 끝내고나니
어둑해졌다
시골에 살면서도
한 번도 실하게 듣지 못했던
개구리 울음소리
수목이 짙어지는
밤
문 다 열어놓고
허공처럼 앉았다
무슨
부귀를
더 구하랴
개구리 우는 밤
남진원
파종을 하고 나니 어느새 어둑하다
분주하여 새소리도 흘려서 들었는데
수목이 짙어지기까지 작심하고 앉았다.
문을 모두 열어놓고 내 맘도 다 열어놓고
왁자글 밀려드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있다.
옳구나, 더 무슨 부귀를 구할 것이 있으랴.
개구리 우는 밤
남진원
시골살이 더 바빠라 파종하니 어둑하네
문을 다 열어놓고 허공처럼 앉았구나
들리는 개구리 소리, 무슨 부귀 더 구하랴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2022. 시조문학 좋은 작품집 상 수상 대표 작품
(‘개구리 우는 밤, 누더기 몇 벌, 호수에 물들다, 홍시’)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시조 21, 소시집, 2021. 4. 28.)
개구쟁이가 되다
남진원
아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아무 것도 안 할 거다!'
병원 침실에서 뚱뚱한 배를 드러내놓고 누워 잠만 자고 있다. 개구쟁이가 되었구나
( 2013.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개 나 리
남진원
울타리 휘어지게
별이 총총 열렸다
연분홍 꽃바람에
나부끼는 순금의 별
마음도 노랗게 익어
마구 걷고 싶은 날
( 첫 시집(동시집), 『싸리울』1982. 12. 10. )
개나리
남진원
우리 학교 담장 밑에 노랗게 피었어요
방긋방긋 웃음으로 봄이 온 걸 알려줘요
등굣길 내 마음에도 금빛물결 일어요.
( 「강원아동문학」, 2010. 8. 23. 원고송고일 )
( 남진원 문학사 2-1 )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
개 눈알
남진원
개들이 모인 개마을에서
개가 개 모가지를 물었다
핏줄이 터져
물린 개가 죽어갔다
개를 죽인 개는 즐거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당당하기만 했다
개들이 모인 개마을의 개들도
즐거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당당하기만 했다
개에게 물린 개들만 개죽음이었다
개들이 모인 개 마을의 개들이
모두 개를 죽인 개를 닮아
눈알이 빨갛다
개눈알이었다.
( 2024. 3. 13 )
개울가에 앉다
남진원
청순한 물소리가 더 없이 정겨우니
보내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다더냐
低音의 물이 내는 말, 등줄기가 서늘하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
개자식, 개자식들아
남진원
아가야, 오오 내 아가야!
강아지를 껴안고 있는 한 여자가 승용차 안에서
강아지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고 야단질 났다
언제부턴가,
개자식들을
아이 대신
자식으로 여기고
좋아 죽는 자들을 ......
아이 낳아 애국하자는 말은 이미 허무 개그다.
개자식
개자식들아
개판된 세상
인간 하는 꼬라지를 보니,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 울음소리, 웃음소리 대신
온 동네가 개들이 판치는 세상이구나.
이,
개자식들아.
( 2024. 6. 11 )
개코 같은 冥想
남진원
산에서 돌아다닐라치면 새, 곤충 같은 산 식구들이 길을 터주기도 하고 막기도 하고 어떤 놈은 도망다니기에도 바빠보인다. 내가 뭐 어째는 것도 아닌데 …,
조용히 앉아 숨을 쉬면 컴컴한 채로 같이 섞인다 땅이 올라앉아 있고 아래는 하늘이 엎드리고, 괘(卦)를 달면 지천태라,
손을 점잖게 무릎 위에 놓고 하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명상은 저쪽으로 밀어놓고, 즐거운 혼돈 속으로 빠진다. 내 식대로 부르면, 개코 같은 명상이다.
(2006.6.28)
개판 5분 전 …
남진원
산골에서 살다가 ,
아프면 급히 병원이라도 찾으려고
백발노인이 되기 무섭게 도시로 내려왔다
아침에 잠을 깨우는 건
닭 울음소리가 아니라
새벽을 달리던 오토바이, 자동차 질주의 소리들이었다
아파트 창에서 눈을 비비며
커튼을 젖히면
아스팔트 길로 분주히 달려가고 달려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의 분주한 모습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도시는
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구나
도시와 함께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를
나는 생생히 듣고 있다
아, 저건
생존을 위해 울부짖는
위대한 고함이었다
‘살아내야 한다’는
뜨거운 함성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늘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저들
개판 5분 전인 정치판을 보다가
진정한 이 땅의 착하고 성실한 노동자들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다.
( 2025. 8. 3 )
개 화
남진원
살을 물어 뜯으며
모질게 다독인 숨결
이제 뜨거운 피
붉게 끓이며 태우며
피어서 영혼의 불을
사방 천지에 밝힌다.
( 1986. 1. 『월간문학』 )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개 화
남진원
이제는
맑은
우리들의 그리움
애욕의 저 바깥에서
사랑은
는뜨는가
한 겹
또 한겹
허물을 벗으며
깊으디 깊은
城을 쌓는
밤
다시 아침이 오고
태양이 뜨면
피어서, 더 쓸쓸한 꽃이여
피어서, 더 외로운 꽃이여.
( 1989년 9월. 해안 6집 )
객사에서
남진원
크고 작은 짐을 놓고
잠시 몸을 누웠으니
객사가 내 집인 줄 …
잠 속에서 눈 떠지고
내 집도 객사였구나
저간 일을 알겠다.
객지
남진원
먹을 것, 잠잘 곳 미리 생각해야 하고
집 나서니 고생인 말 이제야 실감난다
차창에 몸을 맡기니 흔들리는 삶이구나
( 현대시조 2025. 4. 11 송고 )
갱속에서
남진원
밤이었다.
무후하게 잠드어 있는
어둠
밥 한그릇의 의미를 생각하며
어둠을 삽질한다.
태초에
거대한 땅에다 풀어놓은
어둠의 주인은 누구일까
동굴 모서리에 말라 붙은
공룡의 정액을 쪼아 물고
박쥐가 날고
목숨 몇 개 무너져 막힌
폐석의 저 쪽
발바닥이 아픈 우리들의 새벽은
목마름으로 남고
어둠에 섞이는 노동과
살아있는 것을 위해
화석 같은
새가 울고 있었다.
( 1987. 10. 1. 제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
거대한 무능
남진원
시를 쓸 때에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나타내려고 하기 보다는 사물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내면의 정신에서 투시하는 것이 시의 영적 체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까마득하고 어둡고 조금은 불안하다. 이는 종교적 신앙과도 비슷한 이야기인데 사물의 겉에 드러난 것을 통과 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보고 인식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희극적일 수도 있고 비극적일 수도 있다.
나는 깃발을 올리며 넘어져 있는 저 자연스런 모습들이 되어간다, 나는 나였던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나였던 모든 것을 비인격체로 만들어놓았다. 나는 허무의 끝에 서서 바라보이는 것들만 응시한다. 그들은 뒷자리에 숨어 있어서 용서 받기를 거부한다. 신비적인 고독을 시도하기도 하고 굴욕적인 쾌감에 만족하기도 한다. 바다와 뭍 사이에 조바심을 치는 파도 떼처럼 매일 일어나는 조바심이 살아 꿈틀댄다. 그 때 무능은 나의 도구이다. 팔이 쑤시면 손가락 경혈요법을 쓰듯이 나의 무능을 도구로 쓴다. 주사액에 담긴 보이지 않는 고통처럼 말이다. 거대한 무능이 나의 일상이다.
( 2010.11.12.)
[ 시작노트 ]
시를 쓸 때에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나타내려고 하기보다는 사물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투시하는 것이 시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겉에 드러난 것을 통과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보고 내면화하는 작업이 시를 쓰는 일이다.
거들먹거려 봐야
남진원
위대하다고 하던 인물이며
막강한 권력자들
세계 최강의 부자 들
모두 거들먹거려 봐야 …
세월 앞에
한 줌 재 밖에
되지 못했구나
손안에 쥐니
미세 먼지일 뿐
거대한 세상이란 게
손 안에 티끌이구나
( 2023. 9. 28.)
거룩한 경전
남진원
겨울 뒷산
햇살이 들어차는 오후,
빈 몸으로 선 나무들이
보여주는
회색의 눈부심
무색
향기…
뿌리에서의 기운이
가지 끝, 끝마다 뻗어나와
뿜어내는
저,
고요,
거룩한
경전
(2021. 12. 2.)
거룩한 경전. 2
남진원
봄 마을에
남녘의 새소리 들어차고,
나무들이
신바람 타고 분주히 꺼내놓는 새잎들
연두색의 꿈꾸는 듯한 축제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복사꽃들의
대향연…
저들이 하고 싶은 말은
모두 꽃잎으로 피어
줄기 끝, 끝마다
뿜어내는
저,
환희로움
봄, 축복의
경전
(2024. 4. 2.)
거리두기
남진원
살면서 무심한 것 무엇이 있는 겐가
보고 듣고 만져지는 그 의지처, 또 나이니
眞理도 멀거니 서고 세상 물정 멀어졌네
( 2021. 3. 심하당 수록)
거리두기
남진원
전에는 친구끼리 너무 가까워
오히려 다투면 더 멀어졌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과는 너무 까까우면 더욱 안 돼
마스크 쓰고 적당히 거리두기
아, 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멀리 해서도 안된다)
옛날 성현들
이천 년 전에 이미 알고 계셨구나.
거미줄
남진원
거미가 저녁에
거미줄을 쳤다.
살아가려는
은빛 몸부림
지날 땐
숙연한 마음
조심조심 돌아서 갔다.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2023.포윅스 컴퍼니 출판사[또박또박 동시 쓰기- ])
거미줄
남진원
거미가 만들어놓은 허공 그물
거미줄,
나비, 매미, 잠자리, 똥파리까지 …
다 걸렸다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허공 그물에 매달려 있다
사람살이도,
허공 그물
누가 쳐놓은 그물일까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걸리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깨지고
욕망과 집착, 다 걸렸다
왜 사는 지도 모른 채 …
허공 그물에 매달려
죽자 살자 살아가고 있다.
( 2024. 9. [모던포엠] )
거 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웬 낯선 노인이 내 대신 들어앉아 있다.
(2021. 8. 26.)
거 울
남진원
한 세상 살다 보니 사람이, 자연이
모두 거울이다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이 거울이었다
사람에 따라 내 모습이 다 달랐다
웃는 모습, 행복한 모습
화내는 모습, 일그러진
내 모습이
거기에 모두 살아 있었다
꽃을 보고 나무를 보면
그들이 모두 또 거울이었다
미워하고 증오하던
부끄러웠던
내 모습들이
향기 나는 꽃 속에서 우뚝한 나무 속에서
다 勃起하곤 했다
마스크를 쓰고 나서야 겨우 볼 수 있는
뿌연 세상이라는 거울 속에는
기계와 욕망이 배설해놓은
부유물들이 먼지처럼 떠다녔다
한 세상 살다 보니 사람이, 자연이
모두 거울이었다
( 2023. 12. )
거울 앞에서
남진원
바둑이는 두 귀를 맞대고
정다운데
전등은 똥구멍을 대고
서로 삐져 있다.
( 1978년 『아동문학평론』제10호 )
거울을 보면
남진원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거울 속 나는 나는 부끄럼장이
헝클어진 머리칼에 찡그린 얼굴
거울속의 내가 내가 흉을 봅니다
세수하고 빗질하며 거울을 보면
거울 속 나는 나는 아주 멋쟁이
단정한 머리칼에 웃는 내 얼굴
거울 속의 내가 내가 칭찬합니다
( 1990. 3. 1. 『솔바람』 2집 )
거 지
남진원
둘러보니 빈 주먹
쥐어 보니 빈 자루
동냥을 받으려고
문밖 문밖 서성이며
이 빠진 전생의 거지
여기 가지 흘러왔다
슬프면 잠을 자고
더 슬프면 꿈을 꾸고
꿈속 여기저기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승의 거지 하나가
잠속으로 떠다닌다.
( 1990. 11. 30. 『아라리문학』 9집 )
건너 편 산 밑
남진원
건너 편 산 밑에
버드나무 한 채 두 채 세 채…
동그랗게 무리 지어
봄빛이 정겹다
어서, 가 보고 싶다
부지런히
신을 챙겨 신는다
(2021. 4. 10)
건빵
남진원
엄마는 군것질하지 말라고
타이르셔도
학교 가는 길에
건빵 먹는 재미 모를 거야
걸어가면서 만나는
꽃이나 들풀 만큼
건빵을 먹으며 가는 길은
평화롭다
해바라기 잎사귀를 세다가
한 개 꺼내 먹고
골목길을 돌다가
또 한 개 꺼내 먹고
어,
어느새 다 왔네
( 1997. 9. 25. 제8시집. 동시집 『할아버지 이뽑기』 )
걸레
남진원
청소를 한참 했다 헹구고 다시 닦고
너무도 깨끗하다 이렇게도 아름답다
뒤에는 더러움 껴안은 이 걸레가 있었어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걸레
남진원
더러운 모든 것을 받아들여요
냄새나는 구정물도 싫어하지 않아요
어느 날은 똥물 나는 사람들
말 찌꺼기나 글씨도 받아들여요
바쁘고 고단해도
즐겁습니다
단아한 멋을 만들어 가니까요
깨끗한 세상 만들어 가니까요
나는 걸레라서 행복해요.
( 2021. 『태백문학』, 제28호 )
걸레는 걸레라서 행복해요
남진원
더러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요
냄새나는 구정물도 싫다하지 않아요
바쁘고 고단해도 즐겁습니다
말끔한 모습 만들어가니까요
깨끗한 모습 만들어가니까요
걸레는 걸레라서 참 행복해요
나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요
먼지와 얼룩도 싫어하지 않아요
바쁘고 힘들어도 기뻐합니다.
말끔한 모습 만들어가니까요
깨끗한 모습 만들어가니까요
걸레는 걸레라서 참 행복해요
- 솔바람 310호 (2016.4.16. P.15) -
걸망 스님
남진원
걸망 매고
다니던 스님
귀한 발자국
만나기
쉽더냐
하늘을
벗삼는
幸運流水
비에 씻긴
수수한
돌 같은 모습
어느 날
폭포수퍼럼
걸망에서
쏟아내던
綠·水·靑·山
( 2023. 1. 1.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걸어가기
남진원
하늘 향해
머리 들고
두 발로 가는
걸어가기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기에
무관심 했는데
이제
알겠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야
하늘 기운 곧바로
받아들이며 걸어가는 …
땅에서 하는
최상의
아름다움이야.
(2025. 3. 31)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
남진원
때때로 배우면 즐겁고 배운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허나 배우면 즐겁고 신나는 일이라는 것을 논어를 읽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배우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배운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프리카 원주민, 히말라야의 원주민들은 글을 배우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하늘과 땅의 움직임을 보고 들으며 그들은 글을 몰라도 아름다움과 행복감에 살았다. 해는 아침이면 잠든 창문을 두드리고 달은 어김없이 산과 들을 비추었다. 들판은 곡식이 익어 수확의 기쁨에 들뜨기도 했고 바다의 물결은 바람과 함께 고기떼를 몰고 다니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배우지 않고도 사랑을 나누었고 자식을 낳고 기르며 행복에 겨웠다.
옛사람들은 배우지 않으면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라고 했다. 지금도 학식이 높고 배워서 권세를 지니고 있어야 사람처럼 산다고 믿는 부류가 대부분이다.
배워서 얻은 지식은 아무리 선한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자극하는 도구가 되고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배움은 아는 것이라 믿었던 결과이리라.
배움이 아는 것에 그치면 정의를 가장한 불의와 고급 도둑놈을 양성하는 학당에 불과할 것이다. 배움은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어야 하리라.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배운 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이것이야말로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보다 못한 고깃덩어리이라.
(2020. 1. 12.)
걸음걸이
남진원
천천히
길을 걷네
우리네 삶
눈물 섞인 걸음걸이 태반이네
이 길 걸으면 걸을수록
마르지 않는 눈물 보네
길을 가다가 만난 낯선 사람도
너무 닮아서
피붙이 같은 사람들
네 힘든 것
내 아픈 것
형제라네.
이쯤에서 조금씩 나누어 갖고 싶네.
(2006. 12. 9. 바다시 낭송 시첩 39집)
검객
남진원
은빛 잔 두 개
띄운다.
둥둥 꽃잎이 날아다닌다.
뿜어내는 劍氣
허공을 박살낸다.
자신을 평정하러 떠났던 그대,
아직 할 일이 남았는가.
돌아오는 길, 메밀꽃이 흐드러졌다.
이 밤
자미성 언덕배기로 오르시게.
술 한잔 권하노니 …
검둥소 한가로워라
남진원
마음이 외로울 때
언덕에 올라
그리운 내 고향
불러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저 하늘 너머
흰구름 뭉게뭉게 떠도는 그곳
울밑엔 채송화 해바라기가
노을처럼 붉게 타는
머언 고향집
대추나무 잎새마다
노래가 익어
매미소리 치렁치렁
늘어지는 한낮
파아란 하늘 속에
고추잠자리
검둥소 한가로워라
풀 뜯는 마을
밤이면
꿈속에서
찾아갑니다
( 동시집, <가을바람과 풀꽃, 그리움에게. 화술. 1989. )
검사 육탄전
남진원
내 일찍 사법시험 안 보길 잘했구나
서로 제가 당했다고 … 부끄럼을 알아야지
죄없는 백성들 앞에서 권력 가진 힘자랑?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검은 옥수수 밭
남진원
밤이면 옥수수들 한껏 서서 무섭던 때
칠흑 같은 황톳길은 천지분간 안 되었어도
원시의 진한 흙냄새 고향 마을 뿌리였다
검은 장화
남진원
장갑게 해 가리개 검은 장화 신고 나면
농사꾼의 완전무장, 풀밭 사이 활보하지
장부의 힘찬 괭이질 황무지도 옥답 되고.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검은 털
남진원
흰 개들은 검은 털이다.
그래, 검은 털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개털을 젊은 여자가 참빗으로 벗긴다.
하얀 서캐가 쏟아지고
졸음이 수북히 쌓인다.
( 시집, 『장자의 하늘』, 태원출판사, 2002. 6. 30.)
검집의 검
남진원
아직 녹슬지 않았구나
이따금
검을 빼어
허공을 베기도 하다가
오랜만에
검집의 검을 빼들었다
그 옛날 명분 없이 내게 명령하던 그분처럼
인간 모욕적인 언사를
왜 듣고 살아야 하나
진심 어린 이해의 바탕에서 하는 말이라면
그렇게 막돼먹은 말을 할 수는 없지
상처만 입히는
그런 말들
어렸을 때 참 많이도 들어왔건만,
안 보고
안 만나면 그만인 것을.
분노의 검으로
다시
무수한 하늘 자락 베어내고
검집에 넣었다.
( 2025. 9. 3. )
어느 겨울
남진원
깨꽃 같은 눈 잎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포옥 마을을 감싼다
나는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빼꼼이 밖을 내다본다.
한 겹 한 겹
눈이 자꾸 쌓인다
풍년 들라나?
윗방에서 할아버지 고드랫돌 넘기시는 소리 옆에
할머니 목소리도
눈발에 쌓여갔다
그때 시골 고향집에서는….
겨울 고향집
남진원
문고리를
잡으면
겨울 추위가 손에 쩍 쩍 달라붙었다.
아침 일찍 잉걸불을 담은 화로를
방에 들여놓으시는 어머니
금세 훈훈해지는 방
보리밥 시래기국 앞에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검둥개가 낳은 강아지 이야기에
싱글벙글 하던 가족들
가난한 살림에도
마냥 웃음이 솟아나고
숭늉그릇에는
모락모락
옥수수 타래처럼 정이 깊어갔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어 오른
연기들은
포플러나무에 걸려
맴을 돌 때
질화로 옆에 손을 얹고
식구들은 불을 쬐다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군밤처럼 익혀내었다.
겨울꽃
남진원
봄엔 봄의 꽃이 피고
여름엔 여름 꽃이 피고
가을엔 가을꽃이
철마다
고웁게
피어나지만
겨울엔 겨울대로
하얀 눈꽃이 핀다
진달래보다도 더 고운
백합보다도 더 흰
코스보스보다 더 청순한
눈꽃이
나무에 내려와
꽃나무 되고
꽃밭에 내려와
꽃잎이 되고
우리들 마음 속에
마음 꽃 심는
겨울엔 겨울대로
하얀 눈꽃이 핀다
( 1975. 화전 국교 5학년 동시 문집, [꽃밭] )
겨울 나무
남진원
찬바람 껴안고야
면목이 서는 나무
몇 잎 남은 잎과 열매
그마저 놓으시고
통째로 내보이는 삶
저 활달한 空虛여
( 『시세계』2014년 겨울호. (2014. 11. 25.)
겨울나무
남 진 원
찬바람 껴안고야
면목이 서는 나무
몊 잎 남은 잎과 열매
그 마저 놓으시고
통채로 내 보이는 삶
저 활달한 어리석음
겨울 나무
남진원
황량한 들판의 우울을 마시고 선
그대 가는 허리 목이 굽은 가슴 속에
계절도 눈물로 익어 강물처럼 저물었다
네 갈증의 뿌리 곁에 하얗게 밤을 지샌
손가락 매디 매디 아우성이 살아나고
헹궈도 속살이 젖는 이 산하여 하늘이여
당신을 조각하다 꿈을 깬 아침 나절
비로소 돌아누운 속질 푸른 아내 곁에
떠돌던 혈육의 피로 걸어오는 나의 바람
( 1981. 미래시 창간호 )
( 1991. 9. 1. 제6시집. 시조집 『내 인생 밭을 매면』)
겨울나무
남진원
나무가 잎을 다 떨구었다.
꽃잎을 내려놓은 지는 오래이다.
가을빛에 익은 열매마저 모두 나누어 주었다.
나무는 텅 빈 몸이 되었을 때에야
나는 우리 어머니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나무는 대 우주의 어머니였다.
(2020년 아동문예 1,2월호)
겨울나무에게
남진원
나무야
너무 춥지.
걱정 마,
아빠와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아빠와 나는 짚 목도리를 만들어
감아주었다.
화덕장군은 불의 신입니다. 추우면 불로 따뜻하게 해주고 나쁜 짓을 하는 악마를 혼내기도 합니다.
나무는 겨울이 되면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추운 겨울을 지냅니다. 그 모습을 보면 너무 가여워 보이지요. 그래서 나무에게 따뜻한 짚으로 된 목도리를 감아주었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지 못하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동시입니다.
겨울, 난설헌 고택
남진원
솟을 대문 열려 있어 조심스레 들어서니
고택의 겨울 바람 시린 채 다가선다
눈발도 내력 알았나 절름대며 쌓이고
백 매화 숨은 향기 혹독하여 맑던 시혼
한 시대 정제한 언어 이국까지 밝혔어도
어여쁜 스물일곱 살 꺾어지던 아픔이야 …
녹차 물 앞에 두니 가야금 뉘 데불었나
切腸의 恨을 풀어 가락가락 눕는구나
애절해 빛나던 슬픔 찻물 속에 휘어진다
(2020. 전자책시조집, 『꽃물 들어 아픈 날』, 한국문학방송)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 시집속의 시조집 「나를 놓다」
( 2015. 제 22회 현대시조문학상 수상작)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겨울날
남진원
보리밥 시래기국 앞에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가난한
살림에도
웃음이 솟고
숭늉그릇
모락모락
깊어가는 정
질화로에선
잉걸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싸락눈
사락사락
깊어가는 밤
호롱불 밝혀놓고
글을 읽다가
할머니 무릎 베고
잠이 들었지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겨울 대관령 골짜기
남진원
눈 쌓인 대관령 골짜기
자부룩이 안개가 떠돈다
흰 애벌레 같은 자동차들이 기어 다닌다
학교 다닐 때 잘못을 저질러서
반성하며 복도를 걷는 아이들 같았다
어질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겨울 뒷산
남진원
뒷산의 참나무들 소문 없이 지내더니
잎들을 모두 내주고 한겨울과 마주 섰다
고요히 사는 저 내력, 삶 자체가 대장경
겨울밤
남진원
등잔불 아래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면
꿀물을 타 주시던
어머니
어슴프레한 어둠이
따뜻해
평화로움이 넘실대던 방안
아궁이에선
탁, 탁
군불지핀 장작이 타오르고
밤 새 울음소리
책갈피 사이로
가만가만 찾아들었지.
겨울밤과 할머니
남진원
눈이
소복이 쌓이는 밤입니다.
담요 속에 묻었던 손으로
온갖 따스함을 다 집어넣을 듯
나를 쓰다듬으시는 할머니
여름밤을 몇 개나 이어도 모자랄
얘기 주머니를 열어 놓습니다.
옛날에 옛날에 ….
이야기 소리 듣다가
문풍지를 울리던 바람도
스르르 잠이 들면
화롯가엔
이야기가 익어가고
톡톡 군밤이 익어가고
밖에는 연실
할머니 얘기 같은
포근한 눈이 내리는데
나는 어느새
양지쪽 같은 할머니 무릎에서
봄 꿈을 꿉니다.
( 동시집 『선생님의 구멍 난 양말』, 계몽사. 1992. )
겨울밤 별
남진원
별들이
눈을 더 빛낸다.
‘추워서 힘든 아이들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하는 마음으로
반짝 반 짝
반 짝
반 짝 반짝
반짝 반짝 반짝
반 짝
별들이
사랑의 빛을 전한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큰 행복을 느끼지 못하죠. 별들은 하늘 높이 있어도 가장 낮은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네요. 남을 걱정해주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네요. 사랑을 전하는 별처럼 우리도 주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별이 되어 볼까요?
겨울 벌판에서
남진원
떠날 것 다 떠나고 貧子로 앉은 들판
한 평생 젖은 대궁 황덕불을 피워가도
목숨만, 퍼런 목숨만 얼어붙은 밭뙈기
우리네 모진 뿌리 매운 입맛만 남았지만
시려도 푸른 별빛 비늘처럼 돋아나고
바람은 지천에 쏟아져 새벽 창을 두드린다.
모두 허허로운 잠에 빠져 누웠을 때
깊은 적막 홀로 깨어 너와나 경작하는
부활의 피나는 울림 그 너머로 가는 걸음.
( 시조집,『내 인생 밭을 매면』, 삼환인쇄사. 1991.)
겨울 산
남진원
가끔은 일없어서 南窓에 눈이 간다
건너편 누운 殘雪 겨울 산은 安穩하고
나 또한 타산 없으니 보는 눈이 싱겁다
겨울 산막
남진원
한 채의
산막에서 겨울을 보낸다
적적하여
어리석은 것조차 모두 빛나는 곳
할 일이랑 저만큼
묶어놓고
방 구들에
누워 있으면
새소리
드문드문 찾아든다
그때는 편안하게 나무 타는 소리만 듣는다.
( 2025. 4. 7. * 나의 삶 나의 문학, 남진원문학전집 2권 ‘선가의 즐거움’ 에 수록 ])
겨울 산집
남진원
눈을 뜨니
문 밖이 하얗다
자는 동안
눈이 찾아왔구나
방에까지 들어오지는 못한고
밖에서 기다렸구나
난롯불 피워놓고
라디오를 켠다
좀 차가워서
더 고요한 아침
추위가
신선한 벗이다
커피 향에
녹아드는
산뜻한 기운
담백한 시 같이
깃드는 평온
겨울이 아름답다
( 2022. 1. 24. 방터골에서)
산방에서( 또는, ‘겨울 산방’ )
남진원
헌 난로 같은 내가
깨다가 졸다 보니
고요가 舊友인 냥
커피 향에 녹아든다
무심히 깃드는 평화
이 수수한
삶 한 끼
( 2024. 9. [모던포엠] )
겨울 산집
남진원
난롯불 피워놓고
라디오 듣는 아침
추위는 벗인 냥
커피 향에 녹아들고
무심히 깃드는 평화
담백한 시 한편
( 2020. 2. 5. 방터골에서)
겨울 산집
남진원
올 사람 없는 데도 문틈으로 내다본다.
폭설에 발 묶이니 적막한 산중 살이
그래도 귀 대고 듣지, 소식 같은 무소식
몇 며칠 퍼붓는 눈발 술 익고 밤 깊으니
꽃물 들어 아려오던 그날 情分 같았어라
흩날린 표음문자가 혼절한 채, 얼마였나.
이제는 난롯불 앞에 깨다가 졸다가 …
고요는 舊友인 냥 커피 향에 녹아드네.
무심히 깃드는 평화 이 담백한 집 한 채
( 2020 한국시조대사전 수록용 원고)
겨울 숲
남진원
Ⅰ
바람이 도끼처럼
날을 세워 패는 숲속
앙상한 나무들의
울음소리만 터뜨려놓고
살점도 다 뜯긴 달을
서천으로 몰고 간다.
Ⅱ
어둠은 빛난 상처
믿음은 굳은 약속
머리도 맞대인 채
마음도 껴안고서
해 하나 안으로 품고
온몸으로 견딘다.
Ⅲ
하늘의 뜻으로
눈은 내려 쌓인다.
보내고 맞는 이치
겨울은 아는지
눈 덮인 겨울 숲속에
하얗게 언 기도 소리.
( 「시조문학」, 1978. 여름,가을 합병호 )
( 시조집 『내 인생 밭을 매면』, 삼환인쇄사. 1991.)
겨울 스케치
남진원
눈이
내린다
간간이
바람의 작은
기침 소리
산에서 내려오고
뿌연
낮달이
눈내리는 저 너머
생각 속에 잠겨 있다.
( 1985. 11. 7. 제2시집,『나비, 청산의 나비』)
겨울 아침
남진원
영하 이십도 꽁꽁 언 겨울 아침
이 추위 이기는 법 어머님은 아셨구나
된장국 보글보글 끓여 언 마음도 녹였다
(2020.12.31.)
겨울 아침
남진원
내 잠을 깨우느라고
새벽녘 할머니는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털어내었다.
그러면 살찐 송아지 울음이 문 안으로 들어오고
시린 발가락이 고운
새소리까지 들어왔다.
어머니가 끓이는 여물 냄새는
하얀 김과 함께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잉걸불에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일 즈음
문을 닫으시는 할머니
짚자리 깔아놓은 방안은
화로의 더운 불빛에 알맞게 데워진
산 공기 냄새가 났다.
너무 좋았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겨울 아침 새소리
남진원
추울수록
더
눈부시다
추울수록 더
해맑다
사는 일도
이렇다면야 ….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겨울 월대산에서
남진원
마른 나뭇가지 위로 눈이 내리더니
四圍가 고요하다
살면서 이런저런 일로 소스라칠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눈 덮인 월대산에 오르니
담백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
( 문학세계, 2015. 11 )
( 2023. 1. 1.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겨울 유리창
남진원
희영이네 검정색 굴뚝이 안 보인다.
뒷산 밤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까치 소리도 얼어버린 가부다.
대신
유리창에
요술 궁전 한 채가 지어졌다.
궁전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
( 2025. 5. 남진원문학전집 6권, 시집, <할머니의 등잔불. 2009.> 수록)
이 겨울의 老木
남진원
동물이 썩으면 더러운 냄새가 나지만 노목은 오래되어도 악취가 없다
그래도 누가 기억이나 해 줄 것인가 마는, 저 혁혁한 회색빛은 푸르던 젊음의 전신이었던 것을
누군가의 톱날에 베어 던져진 채로 누웠는가 하면 구렁텅이에 처박힌 것, 어느 것은 흙에 묻혀 삐죽이 낡은 눈빛 같은 옹이를 내보이기도 하고
풍화된 몸뚱이들은 그늘진 모습으로 그렇게 아름다움이 쓸려나간 곳에 머물고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무관심 속에 버려진 채, 나뒹구는 나무들이었지만
뉘 알았으랴
火木만큼이나 뜨거움으로 활활 번지는 노목의 불길,
냉기 도는 세상을 향해 뿜어내고 있었다
- 남진원 시집 [무소유의 냄새 ] -
그 겨울의 아침
남진원
고인 물을 떠내고
새 물을 담 듯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터시는 할머니
살찐 송아지 울음도 들어앉고
발가락이 고운 새소리도 내려앉고
여물 끓는 냄새도
푸짐하게 들어찼다
잉걸불 담긴 화로가
방안에 놓일 즈음
해님이 우리 집을 찾아와
밝은 웃음을 깔아놓았지.
식구들이 모여 앉고
시린 손가락이 따뜻해지고 있었지.
겨울 잠
남진원
씨앗으로 꿈꾸고 있을 그대 언 땅속의 잠
가을이여, 햇빛도 추운
땅의 둘레 하늘의 둘레
끝 모를 외로움 구렁
또 몇 구빌 도는가
볼 것이다 깨어나라
잠만큼 수북한 꿈
떠도는 바람 재우고
봄을 틀어 앉히면
새잎 든 자리에 피는
은실 금실 아지랑이
(영동시조시문학회보 제7호, 1991.11.2.)
겨울 절집
남진원
눈 푹푹 내린
골짜기 기슭
절간
자북룩이
자부룩이
안개가 떠돈다
눈을 뒤집어 쓴
한 물건이 구물구물 들어온다
흰 애벌레다
( 2023. 1. 1.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겨울 지내기
남진원
산막에서
겨울을 지낸다
눈 치울 때를
빼놓고는
방구들에
누웠다
새소리
드문드문…
저들도 나처럼
할 일 없는 친구들이다.
겨울 창가에서
남진원
아직 추녀 끝엔
고드름이
달렸는데
눈을 감으면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고향의 봄 뒷동산
고요로이 일어서는
초록빛 산과 산
그 속에
어머니의 모습처럼
순하게 피는 진달래
한 줄기 두 줄기
녹색으로 번지는
새 울음소리 바람소리
아
고향의 버들피리 소리는
어디쯤에서 들려오는가
아직 추녀 끝엔
하얀 고드름이 달렸는데
고향을 찾는 내 마음엔
벌써 졸졸졸 졸졸졸
봄이 흐르네.
( 「아동문예」특선시, ‘책속의 시집’, 1982. 5.)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겨울철에 딸기를 맛보다니
남진원
금은보화 태산 같아도, 한겨울에
어디서 딸기를 구했으랴
전설 같은 효자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했던 겨울 딸기가,
한겨울 시장터에 지천으로 나오니
‘금값 딸기’라 해도
누구라도 돈 있으면 맛볼 수 있는 세상
겨울철에 딸기를 맛보다니
시대를 잘 타고 난 것인가
오히려 더 무서운 세상이 된 것인가.
(2023. 12. 17)
[시작 노트]
초여름 맛보던 달콤한 산딸기. 딸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간다고 하던 강소천 선생의 ‘산딸기’ 노래를 어릴 때 얼마나 즐겁게 불렀던가. 감히 겨울에 딸기를 먹을 것을 꿈에라도 꿀 수 있었던가.
겨울 초입에서
남진원
가을의
逝去
차 한 잔으로 정중히 凋喪하다
( 2024. 3. 7.)
겨울 초입에서
남진원
가을이 지난 월대산
마른 입술처럼 꺼칠하다
흰 눈이 덮인다
- 생사를 다투는 일도 많았구나 …
그때마다 허둥대고 서두르기만 했었지 -
이제, 담백하게 사는 맛을 알았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겨울 하늘
남진원
집에 가니 어머니는 얼른 보일러 스위치를 켜 놓는다 보일러 눈금을 보니 설 쇠던 일주일 전 그대로다 추운 날씨에도 돈 아끼려고 보일러를 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개짖는 소리에 후다닥 방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혹시 택지에 사는 동생이 오나해서이다 그간 개짖는 소리 몇 번이나 났을까 밖을 내다보시는 눈망울에 노을빛 산이 고여 있다…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들을 위해 물을 끓이고 만두를 물속에 넣으신다 지는 해의 한 줄기가 어머니 허리에 구부정하게 매달려있다 싱크대를 만지시기도 힘겨워 보이는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을 먹을 날이 몇 번이나 될까 만두를 삼킨다 만두가 울컥거린다
돌아서는 발길에다가 아버지는 연신 두 손을 들어보이신다 내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든신다 아버지 평생을 끌어 모은 따뜻한 마음 벌이 웅웅거리는 날개 같이 다가온다
겨울하늘에 회색 옷감 같은 슬픔이 걸렸다
겨울 한나절
남진원
햇빛이
종일
푸르니,
숲 사이 드문드문
쌓인 눈
내 눈을 맑게 한다
간간이 듣는
낙숫물 소리
은은한
보배로움이라,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