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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있습니다. 사내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냅니다.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軍神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전시에서 최고사령관을 파직합니다.
선조와 이순신 간에는 맞지 않는 게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이 나라는 완전히 망가져 버립니다. 제가 그때 그 사내였다면 아마 그 권력자를 향해서 칼 끝을 겨누지 않았을까요? 나라를 살렸을 때, 나라가 버린 그 사내 이야기입니다.
將軍 李舜臣, 여수에 오다:
바다, 바다가 봄을 맞았습니다. 여기는 남해와 맞닿은 항구도시입니다. 427년전 이곳에는 철갑선으로 조선을 지킨 장수가 있습니다. 자, 그가 이곳에 왔던 1591년도로 가봅니다.
여기는 바다가 아름다운 여수입니다. 제 앞에 언덕이 하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투를 지휘했던 姑蘇臺입니다.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姑蘇臺가 있습니다 (姑蘇臺-전라좌수영 성채를 보완해 만든 대포 발사대, 장군이 군졸들을 지휘하던 將臺로 사용, 예전에는 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비각만 남아있음). 姑蘇臺는 전라좌수영 성벽에 있던 포구입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姑蘇臺를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將臺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姑蘇亭이라는 비각이 서 있습니다. 키가 3.6미터나 되는 대척비가 눈길을 끕니다. 400년전 저 자리에 이순신이 서 있었겠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전인 1591년 전라도 정읍 현감이 여기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에 부임합니다. 계급은 전라좌수사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은 해군 제1함대 사령관입니다. 일개 지방 고을관리가 한 나라 해군의 사령관이 된 겁니다. 사간원이 아뢰었다. “이순신이 아직 군수에도 부임하지 않은 현감인데 좌수사로 급승진하시니 승진절차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물리시옵소서” (선조실록 25권, 선조24년(1591년) 2월16일).
이순신 7계급 특진의 진실:
이순신은 아직 군수도 아니고 현감입니다. 전라좌수사로의 승진은 너무 과하십니다. 다시 물리시옵소서. 나도 안다. 그러나 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따질 필요가 없다. 공연히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선조실록 25권, 선조24년(1591년) 2월16일). 조종 대신들이 반대할 만큼 훌쩍 벼슬이 높아진 이순신, 그러나 현실은 꽃밭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은 軍政은 문란하고 군기는 엉망이었습니다.
병조판서 李珥가 아뢰었다. 조선이 오래도록 평화롭다 보니 태만함이 심해져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고 하찮은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해도 온 나라가 술렁입니다(선조실록 17권, 선조16년(1583년) 2월 15일).
그런 혼란기에 李舜臣을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이는 류성룡입니다. 잘못을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하라는 懲毖錄을 쓴 사람이죠. (懲毖-전에 있었던 잘못과 비리를 경계하여 삼간다). 李舜臣의 천거야 말로 진정한 징비였습니다 (임진왜란을 대비한 탁월한 선택). 여기 여수에서 전라좌수사 李舜臣이 닥쳐올 전란에 철저하게 대비를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거북선의 탄생, 선소유적지:
李舜臣은 매일 같이 관내 고을을 돌며, 군사들의 훈련상황과 군장비를 점검합니다 특히 수군의 생명, 선박건조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여기는 바로 배를 만들었던 곳, 선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여수선소 유적지입니다(麗水船所遺蹟-전남 여수시 시전동 선소마을). 임진왜란 전부터 배를 만들었던 선소는 전쟁 중에도 배를 만들었습니다. 거북선을 제작한 조선소 3군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작은 물론 성능 실험을 했다는 기록도 나와 있습니다. 3월 27일 거북배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 (난중일기, 1592년 3월 27일). (난중일기, 1592년 4월 12일) 임진왜란 발발 바로 전날, 배를 타고 거북함의 지자-현자포를 쏘았다. 이 날은 바로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날 이었습니다. 李舜臣이 전쟁에 대비하는 그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風臣秀吉(1536~1598)가 1590년 일본을 통일, 2년 뒤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미리 방비하지 못했던 조선입니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20일만에 조선의 수도까지 함락시킵니다.
임진왜란의 첫승리! 옥포해전:
李舜臣의 수군이 출병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592년 5월, 전라좌수영의 수군이 출격을 합니다. 목표는 경상도 옥포입니다. 李舜臣의 함대가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이 시작됐습니다. 1592년 5월, 전선 24척을 비롯한 85척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출격합니다. 玉浦海戰-1592년(선조25년) 5월, 玉浦(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군 함대 40척을 격파하는 大勝을 거둡니다. 임진왜란 해전 첫승리, 옥포해전입니다. 1592년 5월 29일에는 거북선도 출격합니다. 북상중인 육군에게 줄 보급물자를 싣고 서해안으로 향하는 일본 함대를 泗川 앞 바다에서 격퇴시킵니다(泗川海戰).
육군은 진격하고 수군은 무기와 식량을 보급하면서 함께 전진한다는 일본군의 수륙병진 작전, 하지만 李舜臣의 수군에 의해 작전은 깨집니다. (옥포해전 1592.5.7, 사천해전 1592.5.29, 당포해전 1592.6.2, 한산대첩 1592.7.8, 부산포해전 1592.9.1). 남해안을 장악한 李舜臣이 일본군 보급로를 차단해 버립니다. 일본군에게 李舜臣은 이름만으로도 무서운 존재로 떠오릅니다. 1593년 李舜臣은 조선 최초로 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됩니다. 세 바다를 지휘하는 해군참모총장이죠.
이순신 활약상의 흔적, 고소대:
충청, 전라, 경상도 바다를 누빈, 해군 총사령관의 흔적이 여기 여수 고소대에 남아 있습니다. 麗水統制李公大捷碑는 우리나라 최대의 大捷碑로 1620년(광해군12년)에 건립, 비각 안에 서 있는 3.6미터, 커다란 비석입니다.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때 세워졌습니다.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한산도, 노량, 명량, 이 세 군데의 요지를 막아낸 사람이 統制使 李公이었다. 왼쪽 옆에는 작은 비가 하나 서 있습니다. 이름은 墮淚碑,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뜻입니다. 1603년(선조36년)에 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603년, 이순신이 전사한 6년뒤, 이순신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이 세웠습니다. 크기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존경과 사랑이 아주 큰 비석입니다.
이순신 명령 불복종 사건!:
조선 최초의 三道水軍統制使입니다. 그리고 벌이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던 영웅이요,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軍神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죄인으로 몰려서 포승줄에 묶인 채 서울로 압송되고 맙니다. 전쟁이 한창인 1597년 2월 1일, 해군 총사령관 이순신을 잡아오라는 선조의 명이 떨어집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노승석/여해고전 연구소장: 정유재란이 발생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인 요시라가 거짓 정보를 (육군사령관) 권율에게 전달합니다.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조만간 조선으로 올 것인데” “이 때를 이용해서 李舜臣을 출동시켜 가토 기요마사를 잡아 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된 선조가 李舜臣에게 빨리 가서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李舜臣이 출동을 안합니다. 왕명을 거역합니다.
李舜臣이 왕명을 거역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선조 수정실록 31권, 선조30년(1597년) 2월1일). 일본군이 반드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는 李舜臣입니다. 그런 그가 정유재란(1597년) 첫 출병명령을 거역한 겁니다.
당시 일본군에는 지휘관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화친주장)와 가토 기요마사(전쟁주장), 둘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자자했죠. 그런데 고니시 부하인 요시라 라는 자가 조선조정에 이렇게 말합니다. 가토가 대마도를 출발해 다대포로 올 것이니 그때 치면 이제 전쟁은 없을 것이다. 이 정보를 그대로 믿은 선조가 李舜臣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잡아 오라고 명령했던 겁니다. 李舜臣, 출병거부 그 이유는? 李舜臣은 이 정보가 거짓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가토가 온다는 것은 미끼였고, 이미 부산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들이 우리 수군을 불러들여 몰살 시키려는 작전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는 이렇게 보고가 올라갑니다. 李舜臣이 내버려둔 덕에 가토가 무사히 조선에 상륙했다는 말입니다. 선조는 격분하죠. 일본군 장수가 정보를 주었는데도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다니, 우리 군이 일본군 보다도 못하다. 李舜臣은 한산도에 누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선조실록 84권, 선조30년(1597년) 1월 23일).
李舜臣 같은 자는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가져온다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 그때 선조가 李舜臣에게 씌운 혐의는 이렇습니다.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李舜臣欺罔朝廷, 無君之罪), 적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곤경에 빠뜨린 죄(縱賊不討 負國之罪), 방자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죄 (無非縱恣無 忌憚之罪).
1597년 2월 26일, 李舜臣이 한양으로 압송됩니다. 하루 아침에 나라를 구한 군인에서 임금을 무시한 죄인으로 전락해 버린 李舜臣,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조선정부에게 일본인 요시라가 준 정보가 李舜臣의 판단대로 거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가등청정이 다대포(多大浦,부산) 앞 바다에 왔다가 그대로 서생포(西生浦,울산)로 향했는데 이는 실로 행장과 함께 작은 군사로 우리를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을 들어 李舜臣을 하옥시켜 栲訙하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30년(1597년) 2월 1일).
적에게 속아 전투중인 지휘관을 붙잡고자 선조는 치밀한 체포작전까지 세웁니다. 李舜臣을 잡아오되 원균과 교대한 후에, 전투 중이면 전투가 끝난 후에 잡아와라 (선조실록 85권, 선조30년(1597년) 2월 6일). 1597년 3월 5일 한양에 도착한 李舜臣, 의금부 감옥에 갇힙니다. 12일에는 고문까지 받습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렇게 썼습니다. 李舜臣이 고신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 (이덕형의 漢陰文稿).
李舜臣이 고신을 받아 거의 죽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대가가 가혹했습니다. 군인 李舜臣의 심경이 어땠을까요? ‘욱’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군인은 참습니다. 이 치욕을 말없이 견뎌냅니다. 李舜臣은 곧 처형될 운명에 처합니다. 하지만 극소수 신하들이 전투중 將帥를 바꿀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조정회의 때 몇몇 신하들의 간언으로 겨우 죽음을 면한 李舜臣). 선조, 마음을 바꿉니다. 李舜臣을 특사하여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백의종군케 하라. (이충무공 행록 1597년 1월1일 ‘선조가 특사하여 도원수(권율) 아래에서 백의종군 하라 명하다’ 赦令白衣立功於元帥幕下.
뼈아픈 길 ‘백의종군로’:
해군 총사령관이 일개 병사로 전락합니다. 목숨은 구했으되 명예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4월 1일 석방 명령을 받은 李舜臣은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상도 초계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여기 여수 전라좌수영에 있던 어머니 변씨가 듣습니다. 여든 세살이었습니다. 이 노모가 배를 타고 서둘러 아산 고향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4월 13일 노모가 배위 선상에서 죽습니다. 홀로 된 어머니에 효심이 지극했던 李舜臣, 절절한 슬픔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라에 충성을 다 하려다가
이미 죄가 여기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돌아가셨구나”
---------이충무공행록 1597년 4월 11일--------------
“비는 퍼붓고 맥은 다 빠졌다
어머니를 두고 남쪽으로
가야 할 길은 다가오니
곡을 하며 차라리 죽었으면
바라는 마음뿐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6일-----------------
찢어지는 심정을 가누며 이순신은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를 향합니다. 한양에서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남 초계까지 총거리 640킬로미터 (한양-수원-아산-논산-전주-남원-구례-순천-구례-하동-진주-초계-사천)에 달하는 白衣從軍路, 李舜臣은 석달 넘게 걸어갑니다. 나라를 위한 ‘명령불복종’ 임금은 ‘白衣從軍’을 명하였다. 그 조차 받아들이는 것이 군인의 길이라 믿었을까? 계급장을 뺏긴 사내가 길을 걷습니다. 군인이었습니다. 몸은 피폐하고 정신은 망가졌습니다. 그 길을 사람들은 ‘白衣從軍路’ 라고 부릅니다. 여기 진주의 덕천 강변도 그 길이었습니다.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전, 칠천량해전:
그 사내가 경상남도 합천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그 해 1597년 7월 18일, 그에게 비보가 전해져 옵니다. 그가 양성했던 조선의 해군, 그의 후임, 원균이 이끌던 조선의 해군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로 부산포 앞 바다에서요. 칠천량 해전이었습니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水軍統制使가 된 元均이, 군선 160여척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출격합니다. 漆川梁海戰-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30년) 7월 15일 元均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수군과 벌인 해전. 16일 새벽 수군이 몰래 기습 공격을 받아 大敗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참지 못했다.
16일 새벽에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전라우수사 이억기-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大敗했다고 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8일, 맑음). 수군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격합니다. 진주가 함락되고 호남이 일본군 발 아래 짓밟힙니다. 여수에서 전라좌수사를 지낸 李舜臣입니다. 전라도가 도륙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과묵하고 우직한 군인 李舜臣입니다.
그가 쓴 일기를 볼까요. 亂中日記입니다. 1월 15일,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望闕禮를 하였다(이충무공전서). 일기에는 매달 초하루, 혹은 보름이면 빠짐없이 적혀있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望闕禮를 행했다는 기록입니다. 望闕禮란 궁에서 멀리 떨어진 신하가 임금에게 절을 하는 예식입니다. 忠誠心의 표현이죠. 그런데 白衣從軍을 시작한 1597년 4월 이후 望闕禮에 대한 기록이 사라집니다. 자기를 버린 국가, 그리고 군주에 대한 서운함이 읽힙니다. 천하의 李舜臣도 인간이니까요.
부활한 해군 총사령관 이순신:
자, 다시 李舜臣의 발자국을 쫓아갑니다. 음력 7월 18일 초계, 지금의 합천에서 칠청량 패전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그 달말 하동을 지나 진주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손경례 라는 사람의 집입니다. 그 때까지도 李舜臣은 흰옷을 입은 白衣從軍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있을 때 선조가 李舜臣에게 보낸 서류가 도착합니다. 정확하게 421년 전 늦여름 어느날 李舜臣이 바로 이 자리에서 계급장을 돌려 받습니다. 덕천로 504번 길입니다.
경남 초계(손경례 고택)에 있던 李舜臣이 칠천량 해전 패전 소식을 듣고 수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길을 가던 중 8월 3일 三道水軍統制使 재임명 교서를 받은 곳이 손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그 당시 진양땅입니다. 여기에서 李舜臣은 조선해군총사령관의 직위를 돌려받습니다. 忠武公李舜臣將軍三道水軍統制使再受任史跡地는 원계리 손경례 고택(경남 진주시 수곡면)입니다.
그는 기뻤을까요?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병사들까지 바다에 수장시킨 뒤에 복직 변경이 떨어진 겁니다. 李舜臣은 묵묵히 명령에 따릅니다. 李舜臣을 재임명한 선조의 글이 궁금합니다. 대체 뭐라고 써서 보냈을까요? 起復授職敎書-상복을 벗고 관직을 받으라는 뜻의 교서. 지난번 그대의 직첩을 바꾸고 죄인의 이름으로 白衣從軍케 한 것은 과인의 지모가 밝지 못하여 생긴 일이오. 이토록 패전의 욕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기복수직교서, 보물 제1564-3호).
같은 사람이 맞긴 한 건 가요? 5개월전 일본군 총사령관의 목을 베어와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쟁에서 패배한 이 모든 상황이 자기 잘못이라고 용서를 빕니다. 도대체 진심이 뭘까요? 마음이 변했다면 그 원인은 무얼까요?
이연, 선조가 궁금하다:
이쯤되면 이연이라는 사내를 연구해 봐야 합니다. 이연, 당시 조선의 최고 지도자, 선조의 이름입니다. 이상합니다. 그 전시에 최고 사령관을 파직시키고 패전이 불보듯 뻔한 전쟁터에 조선의 해군을 몰아넣고 수장시켜 버립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죽이라고 우겼던 그 사령관을 복직을 시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뭐가 있었을까요? 조선 14대 국왕 선조 본명 이연, 선조(14대)의 아버지 덕흥군은 11대 중종과 후궁(창빈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庶子였습니다. 이전의 왕들은 모두 왕과 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들이었죠.
조선 최초의 방계출신 왕 선조, 그의 정통성에 대한 자격지심은 왕위에 대한 집착으로 변합니다. 역사에서도 왕의 보전을 위한 선조의 조바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일찌감치 피란을 결정한 선조는 둘째 아들 광해군을 왕세자로 임명해 전쟁 지휘를 맡깁니다. 민심을 잠재우고 왕위를 보전하기 위한 두뇌회전은 남달랐습니다. 조총을 직접 조립해서 개선할 줄도 알 정도로 머리도 좋았습니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1593년) 11월 12일). 조총은 신기한 무기지만 화약을 장전하기가 쉽지 않다 그 점을 염려하여 내가 이 총을 만들었다. 한 사람은 조종해 쏘고 한 사람이 화약을 장전하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전략과 전술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칠천량 해전 참패소식을 들은 후 선조가 말하길,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 지방을 방수해야 한다(선조실록 90권, 선조30년(1597년) 7월 22일). 이렇게 똑똑했던 선조가 왜 李舜臣에게 대해서만은 편견을 가졌을까요? 李舜臣에 대한 선조, 선조에 대한 李舜臣의 심리가 궁금합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혹시 그들이 남긴 글씨로 짐작할 수 있을까요?
구본진 변호사/필적연구가: 선조 글씨의 가장 큰 특징은 글자 안에 있는 부분들이 아주 밀접하게 붙어 있습니다. 선 자, 월 자, 의 자, 약 자, 이런 걸 보면 안에가 꽉 붙어있지 않습니까. 조금도 틈이 없이, 그러니까 폐쇄형이라고 보통들 말을 하는데, 이게 마음이 넓지 않고 포용력이 없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글씨체입니다. 그리고 이제 글자 간의 간격을 보면 거의 빈틈이 없을 정도로 붙어 있죠. 이런 것들을 보면 자의식이 강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이런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글씨체로 본 李舜臣은 어땠을까요? 李舜臣의 亂中日記에는 역사 뿐아니라 그의 성격이 담겨있지 않을까요?
구본진: 李舜臣 장군의 필적은 머리가 좋고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근데 보통 사람의 글씨와는 달리 자유분방함이 많이 있는 거죠. 선조와 李舜臣 간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선조는 굉장히 기존의 룰을 따라서 할려고 했던 사람이고 李舜臣은 기존의 룰을 조금 무시하고 새로운 사고를 할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좀 부딪힘이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머리가 좋지만 독단적이었던 선조가 스스로 판단하는 李舜臣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선조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전황분석에는 누구보다도 밝았고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기적이었습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李舜臣을 사령관에 앉힐 만큼 사람도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죠. 하지만 李舜臣 휘하의 조선의 전 병력의 3분지 1이 모여들고 민심이 그에게 몰리자 그를 제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조선이 위험에 빠지자 그의 적인 李舜臣을 슬그머니 다시 찾습니다. 아니, 조선이 위험에 빠진게 아니라 자신의 안위가 걱정되자 李舜臣을 다시 찾은 겁니다. 그런 유능하되 이기적인 지도자 밑에서 조선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수군재건을 꿈꾸다:
복직한 총사령관 李舜臣은, 병력과 군량미를 모으러 전라도로 향합니다. 8월3일-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8월 4일-곡성에 이르니 관청과 민가가 모두 비어 있고 인기척이 끊어졌다. 8월 5일-옥과에 이르니 피란민이 길에 가득찼다. 그러나 전라도는 이미 쑥대밭이었습니다. 수군 재건은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李舜臣입니다! 그 李舜臣이 복귀했다는 소식에, 온 천지가 부활합니다. 산 골짜기에 숨어 두려움에 떨던 백성들이 홀연히 나타나 천지를 뒤덮습니다. 기적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여기는 그 기적의 현장, 전라남도 순천 낙안읍성입니다.
온 백성을 다시 일으킨 기적의 낙안읍성:
성벽을 내려서니 시간이 멈춘 듯 조선시대 마을이 펼쳐집니다(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은 태조 때인 1397년 의병장 김빈길 장군이 방어를 위해 토성을 쌓고 마을을 지켰습니다. 300년 뒤 무장 임경업이 낙안군수로 오면서 돌로 성을 쌓았습니다. 더욱 튼튼한 방비태세를 갖추었죠. 양반들이 사는 기와집이 아닌 초가지붕, 백성들의 삶이 그대로 남아서 더욱 정겨운 낙안읍성입니다.
조선시대에 관아로 쓰던 건물과 100여 채 초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 서기 1597년 음력 8월 9일, 부활한 장군 李舜臣이 이 낙안읍성에 들어옵니다. 낙안읍성에 있던 모든 백성이 시전거리를 가득 메우며 장군을 환영합니다. 부활한 장군이 자신들, 그리고 조선을 부활시키리라 기대하며 모두가 만세를 부릅니다. 그 기대는 곧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절대적이었습니다. 亂中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낙안군에 이르니 오리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른들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권했다(난중일기 8월9일). 거기에 거친 비 바람을 막아 주는 늙은 나무가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던 당시 조선 백성에게 李舜臣은 그런 든든한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는 당시 낙안읍성을 찾은 李舜臣이 직접 심은 나무라고 전해집니다. 듣고 보니 예사 나무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나무 여기 저기에 술병들이 보입니다. 李舜臣 장군이 심은 나무에 술병이라니, 대체 무슨 사연일까요?
송갑득 73세/낙안읍성 향토사 연구원: 장군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성 내를 둘러보고 나서 이 옆에 빙허루에 올라가서 빙허루에서 관료들과 회의를 하였던 李舜臣,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의 도움 없이는 안되거든요. 그래서 여기 10년생 되는 푸조나무를 한 그루 심고, 명량해전을 앞두고 전쟁이 승리로 끝나기를 기원했던 제를 올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將軍木 이라고 부르고 또 장군한테 절 받아먹고 술 받아 먹은 나무라고 얘기합니다. 6년전만 해도 이렇게 컸던 將軍木입니다. 그런데 2012년 태풍 볼라벤에 나무 절반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將軍木이 넘어진 이유가 태풍탓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송갑득: 李舜臣의 혼령이 깃든 나무인데 아베가 취임후 우리 조선 침략사를 부인하고 있잖아요. 나무가 그런 것을 미리 예견한 뒤 통분을 금치 못하고 넘어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그럼 싸워야지 왜 넘어져요. 물론 우스개 소리입니다. 하지만 李舜臣 장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믿음이 여전하다는 얘기겠죠. 420여년 전에도 李舜臣은 그 민심의 도움으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마을 마다 군량미를 보태고 병사들이 모여듭니다.
기적을 맛보다, 명량해전:
그런데, 우리의 선조 임금님께서 李舜臣에게 뜻밖의 편지를 보냅니다. 수군이 너무 약해 일본군에 맞설 수 없으니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는 것입니다. 수군을 재건하라고 복직시켜놓고는 또 변덕을 부립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李舜臣의 마음, 어두웠습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를 비추는 것을 보았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난중일기 1597년 8월 15일). 李舜臣은 또 다시 항명을 결심합니다. 이번에는 보고서를 작성 하죠.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신의 몸이 살아있는 한 적은 감히 이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이옵니다(臣不死 則賊不敢侮矣). 1597년 8월 16일-군사 120인을 이루다. 그렇게 李舜臣은 전장으로 나아갑니다. 1597년 8월 18일-배설에게서 배 열십여척을 인수하다. 1597년 8월 24일-진도 인근 어란진에 당도, 그가 도착한 곳, 어란진입니다.
어란진은 바로 여기 진도와 해남반도 사이에 있었습니다. 소용돌이가 몰아칩니다. 명량해전의 현장 울돌목입니다. 명량해전은 1597년 9월 진도 앞바다인 명량해전에서 李舜臣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일본수군 130여 척을 맞아 大勝을 거둔 전투였다. 李舜臣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던 기적적인 승리였습니다. 전황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은 大勝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사기는 바다에 침몰했고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李舜臣은 亂中日記에 이렇게 적습니다.
하늘이 도왔다고. 李舜臣 스스로도 기적이라고 불렀던 명량해전의 大勝利로 李舜臣은 조선 백성의 유일한 등불로 자리 잡습니다. 활활 타오르죠. 조선 백성들이 그 위험한 전쟁터를 피하기는커녕 조선수군이 있는 곳으로 몰려듭니다. 그게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믿었죠. 그 믿음, 종교와도 비슷한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보고가 조정으로 올라갑니다.
조선의 최고 지도자 선조, 기분이 어땠을까요? 기뻐했을까요? 분명히 불쾌했을 겁니다! 나라를 지키고 자신의 왕위를 보전해준 군인 李舜臣입니다. 하지만 선조는 李舜臣을 경계합니다. 두 사람은 이미 임진왜란 시작부터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민심-군사 모두 이순신에게 있었다:
종묘사직이 모두 한양에 있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겁니까? 전하께서 도성을 나가시면 민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폭우 속에 도성을 빠져나갑니다. 화가난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왕으로부터 버려진 백성들 마음은 李舜臣에게로 향합니다. 피란민들이 우리 수군이 大捷을 치른 것을 알고 앞 다투어 치하하고 많은 양식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주었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7일).
李舜臣에게는 막강한 군사력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사는 15만명 정도였죠. 그 가운데 李舜臣이 이끄는 수군이 5만명, 우선 전군의 3분의 1이나 됩니다. 게다가 수군은 전투를 거듭하며 더욱 강해집니다. 계속되는 勝利로 사기도 높았죠. 민심과 군사력 두가지 모두, 李舜臣에게는 있고 선조에게는 없거나 그에게 등을 돌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다, 충무사:
그리고 李舜臣에게는 막강한 友軍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 友軍은 丁酉再亂 당시 바로 여기 전라남도 고금도에 있었습니다. 고금도에는 묘당도라고 불리는 새끼섬이 있습니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와 하나가 된 廟堂島, 그 묘당도에 李舜臣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廟堂島 李忠武公遺蹟-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있는 李舜臣의 유적(사적 제114호). 말에서 내려서 걸으라는 下馬碑와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서원이나 묘지 앞에 세우는 홍살문도 보입니다.
1597년 7월 명나라 援軍, 해군이 도착합니다. 진린이 이끄는 5천여 군사들이 바로 여기 고금도에 진을 칩니다. 이후 명나라 해군과 조선의 해군이 함께 연합작전을 펼칩니다. 여기 이 자리는 바로 조명연합 해군본부가 있던 곳입니다. 조명연합군 사령부가 있었던 자리, 지금은 李舜臣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가 있습니다. 忠武祠-충무공 李舜臣 將軍의 愛國忠情을 기리고자 건립된 사당.
李舜臣을 기념하는 여러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충무사 자리는 관왕, 그러니까 삼국지의 관우를 모시는 곳이라고 합니다. (충무사에 있는 관왕묘비). 전쟁이 끝나고 후대에 이 자리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관왕묘를 세운 사람은 당시 명나라 해군 사령관 진린입니다. 陳璘-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은 丁酉再亂 때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李舜臣과 함께 작전을 치릅니다. 처음에는 갈등도 있었으나 결국 李舜臣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늘을 다스리고 꿰고, 땅을 다스리는 인재이며(經天緯地之才), 그리고 진영에 이르러 그가 죽은 것을 보자 통곡을 했다(臨陳見其死哭之). 진린이 李舜臣을 이야(李爺) (어르신) 라고 부르며 ‘공은 작은 나라에서 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중국으로 들어가 벼슬하라고 권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이충무공행록中).
조선이 떠받들고, 조선의 왕을 승인해 주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던 명나라입니다. 민심과 군사력에 이어 명나라의 정치적 후원까지 받았던 李舜臣, 혁명의 조건은 모두 갖췄습니다. 임진왜란입니다. 나라는 개판이었습니다. 민심은 李舜臣의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 전군의 병력의 3분의 1이 李舜臣의 지휘를 받고 있었습니다. 李舜臣이라면 그 나라를 한번 바꿔놓고 싶지 않았을까요?
이순신과 선조, 품계가 동급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하나 더 터집니다. 조선에 떠도는 소문 하나가 선조를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李舜臣이 명나라의 도독이 됐대’ 명나라의 도독이면 李舜臣이 선조 임금과 품계가 같다’ 김육이 쓴 李舜臣의 신도비문에도 명나라 황제가 도독인 그러니까 도독임을 증명하는 도장을 내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명나라 황제가 李舜臣에게 주었다는 여덟가지 하사품이 지금까지 전해내려 옵니다. 統營忠烈祠 八賜品一括 [보물제440호]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명황제 신종에게 李舜臣의 전공을 보고하자 신종이 李舜臣에게 하사한 8종 15점의 물품. 명나라 품계로 보면 변방국 왕인 선조도 정1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도독에 임명된 李舜臣도 정1품이니, 선조와 李舜臣의 품계가 같다는 얘기입니다. (선조=이순신). 전쟁초부터 터진 이 소문은 李舜臣의 귀에 까지 들어옵니다. 명나라에서 나에게 銀淸金紫光祿大夫의 직위를 주었다고 하는데, 아마 잘못 들은 소문일 것이다 (난중일기 1593년 5월 5일).
이 이야기는 헛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팔사품은 명나라 황제가 아니라 진린이 주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고 李舜臣의 정1품 이야기는 중국쪽 기록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위여부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 국왕과 동급이라는 사실이 마치 사실인 것 처럼 조선팔도에 소문이 나고 그게 조정에 까지 다 보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 사실이 선조가 李舜臣에게 보였던 그 모든 행동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인지도 모릅니다.
李舜臣은 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까요? 명분과 민심, 그리고 군사력까지 혁명, 아니 쿠데타의 성공요소는 모두 갖춘 李舜臣이었습니다. 문득 의문이 생깁니다. 李舜臣은 혁명을 꿈꾸지 않았을까요?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여기는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선유공이 있는 섬, 선유도입니다.
명량해전 직후인 1597년 9월 李舜臣 함대가 여기 선유도에 상륙합니다. 명량해전에서 大勝利를 거둔 李舜臣 함대가 돌연 더 이상의 전투를 하지 않고 북상을 합니다. 목포를 거쳐서, 신안을 거쳐서, 북상, 하염없이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혹자는 이를 작전상 후퇴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이를 도주했다고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상황이 참으로 위태로워 당사도(무안군 임태면)로 진을 옮겨 밤을 지냈다.
명량해전의 승리는 참으로 天幸이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勝利를 하고도 안심할 수 없었던 李舜臣과 조선수군입니다. 조선수군의 숫자는 너무도 적어 일본군 함대라도 만나면 전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백성들과 역사 앞에서는 名將이자 軍神이었으나 현실 속 李舜臣은 패배와 병마에 위협을 받으며 힘겨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어두울 무렵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난중일기 1597년 19월 19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이날 밤에는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난중일기 1597년 9월 26일). 쿠데타를 꿈꿀 여유가 없었습니다. 삶이 전쟁이었습니다. 많이 아픕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픕니다. 勝利를 했지만, 어느 바다에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바다를 표류하다가 이곳 선유도에 도착합니다.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李舜臣은 쉬질 못합니다. 쉬질 않습니다. 곧 바로 조선 수군의 재건을 계획합니다. 군사를 모으고 군량미를 확보한 李舜臣, 고금도에 진영을 꾸리고 이듬해 겨울, 그는 마지막 전쟁터로 향합니다.
軍神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1598년 11월, 노량해전입니다. 조선땅을 밟은 일본군을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로 출전한 노량해전, 조선의 수군 대장선 안으로 일본군 총탄이 날아듭니다. 李舜臣은 숨을 거두고 끝날 것 같지 않았던 7년 전쟁, 임진왜란이 끝납니다.
땅도 슬퍼한 이순신의 죽음:
李舜臣의 유해는 이곳 요당도로 옮겨옵니다. 생전 李舜臣이 소나무에 비친 달빛을 좋아했다는 월송대입니다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노량에서 전사한 李舜臣의 유해는 조명연합군의 본부가 있는 여기 고금도, 본부 앞 언덕에 임시로 안장됩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그의 고향이자 선영이 있는 아산으로 운구됩니다. 여기가 그의 유해가 안장됐던 월송대입니다.
지금도 그의 초본지에는 풀이 자라지 않습니다. 땅 조차 슬퍼한 李舜臣의 죽음, 그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조선의 왕 선조는 어땠을까요? 李舜臣이 전사하였으니 그를 대신할 자를 즉시 뽑아야 합니다. 알았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아침 비변사로 하여금 천거하여 뽑도록 하라 (선조실록 106권, 선조31년(1598년) 11월 24일).
우리가 이순신을 사랑하는 이유:
선조는 애도의 말도 눈물도 없었습니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45년 뒤, 1643년 인조가 붙여준 겁니다. 李舜臣 정도 공신이면 왕들이 직접 비문을 지어서 내려보내주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비문도 지어주지 않습니다. 200년 가까이 흐른 뒤인 1794년 정조가 내려주죠. 그가 가고 꼭 40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李舜臣은 여전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만약 李舜臣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새로운 왕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亂中日記 1598년 10월 8일 일기 뒤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신하가 몸을 던져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8일). 성리학의 시대, 조선, 조선의 충신이었던 李舜臣. 자기를 버린 지도자를 향한 분노를 일기를 쓰며 억누릅니다.
시간이 멎은 곳, 아산 현충사:
李舜臣에게는 분노보다는 국가에 대한 의무가 먼저였습니다 (이충무공묘, 충남 아산시 음봉면). 李舜臣은 쿠데타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李舜臣은 군인으로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납니다.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뀝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정권이 들어섭니다. 전혀 다른 국가가 건설됩니다. 대륙에서는 明나라가 淸나라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신천지가 막을 엽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은 300년이 넘도록 그대로 存續합니다. 시간이 멎습니다. 그가 살렸던 그 나라가 그대로 멈춥니다. 李舜臣 하나의 존재가 역사를 바꾸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 남았다면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그립습니다. 끝. (TV조선 박종인의 땅의 역사 32회, “이순신은 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까?”에서 정리).
①1592년 4월 13일, 일본이 24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했다. 조선은 이 전쟁을 壬辰倭亂이라고 부른다. 일본군은 부산을 점령한지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지난 6.19에 조선일보사 주관 일본속의 한민족사 역사탐방(3박4일)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규슈 나고야(名護屋)성터를 방문, 조선침략 일본군 주둔지를 살펴봤다.
② 1591년 선조는 柳成龍의 천거로 정읍 현감 李舜臣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 7계급 특진, 임진왜란을 대비한 탁월한 선택이다. 이순신은, 1592.5.7.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 1592.5.29. 사천해전, 1592.6.2. 당포해전, 1592.7.8. 閑山島大捷, 1592.9.1. 부산포해전, 1597.9.16. 명량해전에서 大勝을 거둔다. 1593년(선조26년) 이순신은 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된다.
③ 전쟁 중 선조는 李舜臣을 시기했다. 선조는 일본 간첩 요시라의 함정에 빠져 李舜臣을 파직시키고 죽이려고 했다. 다행히 일부 대신들의 전쟁 중에 장수를 죽일 수는 없다고 반대해 사형은 면했고 대신 白衣從軍케 하였다.
④ 1597.7.15.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大敗하자 선조는 李舜臣을 復職시킨다. 李舜臣은 다시 전함을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고 해전에 대비한다. 그러다가 1598년 11월 19일 露梁海戰에서 戰死한다.
⑤ 선조는 李舜臣이 戰死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애도의 글도 내리지 않았다. 6년뒤 1603년(선조 36년) 좌수영의 군인들이 墮淚碑를 세웠다,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순신이 전사한 6년뒤, 이순신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이 세웠다. 크기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존경과 사랑이 아주 큰 비석이다. 임진왜란 大捷碑는 1620년(광해군 12년)에 내렸고, 忠武公 시호는 45년 뒤 1643년 인조가 붙여주었다. 비문은 200년뒤 1794년 정조가 내려주었다.
⑥ 李舜臣을 軍神이라고 한다. 壬辰倭亂 海戰에서 百戰百勝 패전한 일이 없다. 전함과 무기, 그리고 군량미를 스스로 만들고 공급하고 조달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將帥였다. 그가 가고 꼭 400년 세월이 흘렀다. 李舜臣은 여전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⑦ 1598년 壬辰倭亂이 끝난 후, 日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 막부 정권이 들어섭니다. 전혀 다른 국가가 건설됩니다. 대륙에서는 明나라가 淸나라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淸나라의 신천지가 막을 엽니다. 그러나 조선은 300년이 넘도록 그대로 存續합니다. 시간이 멎습니다. 그가 살렸던 그 나라가 그대로 멈춥니다. 李舜臣 하나의 존재가 조선의 역사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⑧ 세월은 흘러도 여전히 선조와 같은 군인들이 있었다. 40年 前 아주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대지휘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고 아주 혼났다. 1978.3.15~7.19 제1기갑여단 통신중대장 재직 때 상관이 전투준비에는 관심이 없고 교묘하게 무리한 뇌물을 요구, 불가능하니까 노골적으로 부대지휘를 못하게 해서 처벌하고 보직 해임시켰다. 군은 내부가 부패하면 적과 싸우기 전에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