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겨울 더덕밭
조호연
오름 하나 달팽이처럼 등에 진 마을 있다
성산포에서 시오리, 돌아앉은 산간 마을
첫눈이
첫사랑인 양
지분대는 밭 언저리
아서라, 옆 마을에 공항이 들어선다니!
겨울잠 든 더덕밭 땅값도 들썩들썩
멍하니
일손을 놓고
보느니 백약이오름
어질머리 세월 속에 치매 도진 저 어머니
“메께라, 메시께라*, 내 땅이라, 내 몸이라”
밭머리
퍼질러 앉아
더덕줄기 붙들고 있다
*메께라, 메시께라 : 글자는 다르지만 같은 뜻. 남이 하는 말이 기막히고 황당할 때 반사적으로 나오는 감탄사격인 제주 여인들의 전용어
[당선소감]
올해도 멍하니 빈손인가 했습니다. 몇 장 남지 않은 탁상용 일력을 만지작거리는데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순자의 수신편(修身篇)에 ‘노마십가(駑馬十駕)’란 말이 있습니다. ‘무릇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지만, 둔한 말일지라도 열흘을 달려간다면 천리마를 따라잡을 수 있다.’ 즉 ‘부족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재능 있는 사람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시조의 길을 가면서 늘 저에게 다독거리던 말이기도 하구요, 제게 다시 다짐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제주로 시집 온지 올해 25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저희 마을은 성산포에 제2공항이 들어선다는 소식으로 들썩들썩 합니다. 한쪽에선 땅값이 오른다고 좋아하고, 다른 한쪽에선 대대로 물려받은 터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한숨소리가 들립니다. 사실 저도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더덕밭에 나가 겨울잠 든 더덕줄기라도 어루만져주고 싶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제겐 늘 큰 나무 같은 선생님을 비롯한 마당시(詩) 회원들, 그리고 묵묵히 지켜봐준 남편과 지혜, 슬기와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과 영주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약력
경남 산청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세계자연유산해설사
[심사평]
접수된 응모작들의 수준과 기량이 전반적으로 만만치 않았다. 시조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갈수록 고조되는 창작 현장의 고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든든했다.
장시간의 숙고를 거치며 선자들은 조호연의 「겨울 더덕밭」을 당선작으로 밀어 올리는 합의에 도달했다. 배경과 시적 정황과 대상 인물의 내면 심리를 통해 정서와 주제를 생생하고 선명하게 도출해 낸 작품으로, 시상의 전개가 유려하고 호흡과 보법도 안정되고 자연스러웠다.
원경에서 근경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면서 시상을 집중하고 메시지를 포착하는 역량과 내공도 녹록지 않았다. 또한 ‘시의성’을 살리면서 ‘고어의 보고’인 제주어를 적절히 활용해 토착 분위기를 이끌어낸 언어적 운용도 높이 살 만했다. 완성도 높은 나머지 7편의 응모작들도 당선작을 받쳐주는 단단한 초석으로 작용했다.
하성호의 「晩船」 은 선명한 주제의식과 함께 비유와 심상을 잘 살린 함축적인 표현과 안정된 기법이 돋보였으나, 나머지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시적 긴장감과 밀도가 떨어져,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었다.
이종현의 「대장간의 오후」, 서명희의 「애월리 소묘」도 끝까지 각축을 벌였던 작품이었음을 밝히며 분발과 정진을 부탁드린다. 장도에 오른 당선자에겐 축하와 함께 신발 끈을 한껏 조여 맬 것을 당부 드리고 싶다.
<심사위원 : 박명숙(대표집필), 문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