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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뒤안길 이야기
이 창 훈
2007년 어느 여름날에
책상 위의 켜놓은 컴퓨터에서 새로운 이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린다. 조금 전, 시집간 딸에게 내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사진 한 장을 주면서 스캔을 떠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딸이 보낸 이메일이 지금 막 도착한 것이다. 나는 그 이메일 속의 사진 한 장을 초등학교 동창카페에 슬그머니 올려놓는다.
전도 탁구대회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직원실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인물들의 포즈가 제법 ‘폼 나’는 것 같다. 사진 뒷줄에는 ‘호랑이’로 유명했던 여중근 선생님이 단호한 표정으로 서 계시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외환은행에 다녔던 김영배 선배와 신제주 홀리데인인프라자호텔 뒤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수일 선배도 있다. 두 선배는 6학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산에 산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 연락이 두절된 지 상당히 오래된 김경호(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나에게는 외오촌 삼촌이다)가 앞줄 왼쪽에 나와 함께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갑자기 그 때 그 시절이 와락 그리워진다. 마침내 나이 60줄에 들어서는 게 아쉬운가 보다.
이 글은 대중 앞에 선보이는 나의 세 번째 글이다. 첫 번째 글은 의정부의 사령부 군대시절, 2박 3일 간 전방휴전선으로 훈련을 갔다 온 체험수기(의무적으로 써야 했다)를 부대원들 앞에서 발표한 글이고, 두 번째 글은 약 10년 전에 고등학교 동기 동창회장으로 있을 때 동창회지에 억지로 쓴 글이며, 세 번째 글은 이번에 국민학교 동기 동창회장이니까 하나 꼭 써야 한다는 100년사 편찬위원인 친구 김영규 교장의 강압에 못 이겨 쓰고 있는 바로 이 글이다.
사실 나는 워낙 글재주가 없어서 국어 과목에서는 대학교까지 ‘씨’ 학점 이상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족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사년 위인 형(47회)은 중학교 1학년 때 시를 써서 칠성통 옛 중앙극장에서 제주시 중고등학생들 앞에서 낭송할 정도였고, 선친께서는 서울에 있는 전문대 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제주농업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다니기 훨씬 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신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오년 위 남교졸업생들 형님들 중 여자동창 남편이나 내 처(54회)의 고교동창 남편으로부터 모친이 일학년 때 담임이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한 말을 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으로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는 2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지금도 병원에 누워 계시지만 정말로 험난한 인생을 사신 분이다. 어머니는 일제시대 때 농협에 다니시는 할아버지와 앞이 안 보이지만 유복한 집안의 큰딸인 할머니 사이에 태어나 모교(26회)와 전라남도의 욱고녀(전남여고의 전신)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농업학교 교사인 애월 출신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해방둥이 형님과 6ㆍ25전쟁이 발발하기 전해에 태어난 나를 얻으셨다. 그때까지가 어머니에겐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외가는 성안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부잣집이었던 듯하다. 지금은 천년타워건물이 들어선 나사로병원 자리에 널찍한 마당을 사이에 두고, 뒤에 큰 텃밭을 거느린 안채와 이뭇간이 딸린 사랑채가 마주보는 집도 있었고,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 일대의 굉장히 큰 밭을 비롯해 도처에 내가 알지 못하는 밭들도 있었다고 한다.
4ㆍ3사건과 6ㆍ25전쟁은 어머니의 삶을 기구하게 만들었다. 27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때인 1950년 6월 예비검속으로 잡혀 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되었다고 한다. 앞바다에 집단 수장시켰다는 말도 있다. 어딘가에 기록이 있을 법도 한데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애월에서 육지와 크게 교역을 하시면서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지만 4ㆍ3사건과 예비검속으로 큰아들, 셋째아들(아버지), 그리고 장손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비운을 겪으셨다.
큰아버지는 위미초등학교 교장과 동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셨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에서 제주도 학무과장으로 발탁된 적이 있다. 그러나 학무과장으로서의 업무는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대적 상황이 순식간에 급변했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1일에는 경찰의 발포로 양민 6명이 희생된 사건이, 3월10일에는 이에 크게 분노한 제주도민들(도청 직원들 포함)의 대대적인 파업이 있었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큰아버지는 두 번씩이나 농업학교 동쪽 운동장에 마련된 9연대 임시수용소에 수감된다.. 결국 무죄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당시 극우파로 꼽혔던 지사는 큰아버지와 다른 과장급 3명을 권고 사직시켰다. 그 후, 큰아버지는 제주중학교 2대 교장으로 재임하던 중 1948년 10월25일 관덕정 서편 집에서 여러 명의 서청대원들과 서너 명의 농업학교학생들에게 강제로 연행되셨다(모교 37회인 사촌누님의 목격담). 큰아버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 일간지에서 “4ㆍ3은 말한다”라는 제목의 기획기사가 연재되고 있을 때, 사촌누님은 그 기사의 ‘농업학교학생’이었던 한 분을 수소문해서 찾아내 전화로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했는지를 다그치듯 물었지만 끝내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이제 와서 무엇을 더 어떻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농업학교에 근무하실 때 학생들이 많이 따르는 교육자이셨다고 한다. 애월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1936년 3월에 아이이현 서미잠사학교를 졸업했고 1937년까지는 일본 산기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1938년 9월에는 경성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가 이듬해 3월에 졸업했고 전남 함평소학교 교사와 제주의 함덕공립소학교 교사를 지냈다. 향학열에 불탔던 아버지는 1940년 9월에 다시 서울 혜화전문학교 중문학과(흥아과)에 입학하여 1942년 9월에 졸업한 후 함경북도 경성공립농업학교를 거쳐 제주공립농업학교 교사로 재작 중 1947년에는 제주도 3ㆍ1사건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 직책을 맡아 대책방침 초안을 작성하셨다. 그 당시의 상황을 아는 분들 중에는 그 글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뛰어난 문장력이 후일에 불행의 빌미가 되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아버지는 소설가로서 일어 단편소설을 몇 편 쓰셨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글로 번역된 “이여도”가 유일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나와 친한 고등학교 동창인 대학교수 K씨가 찾아다 준 것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형님 책상에서 일어로 씌어진 「등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원고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사하면서 없어졌는지 지금은 조금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예비검속 때 관절염으로 애월집에 잠시 가 계셨던 아버지는 조카(앞에서 언급한 사촌누님)와 함께 애월 큰길가에 있었던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순사에 의해 연행되신 후 제주시에서 제주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끌려간 장조카와 함께 한줌의 흙으로도 남지 못한 채 33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 제사는 음력 유월 초하룻날에 지낸다. 지금도 제주도의 많은 마을에서는, 예비검속 때 돌아가신 분들의 제사를 지내는 그날이 오면 이집저집 ‘제사 먹으러’ 다니느라 바쁜 친척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일로 어머니는 한동안 옥고를 치른 후 초등학교 교사직도 그만 두게 된다. 당시는 우유가 꽤나 귀했는데, 배가 고파 악을 쓰며 우는 나를 보다 못해 형무소로 젖먹인 나를 안고 가 젖을 먹였다고 삼촌은 지금도 만날 때마다 말씀하시곤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좌제 때문에 이러한 글을 쓰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다. 서로 얼굴을 보며 쉬쉬할 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한일회담반대 대모대열에 낀 적이 있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 밤이었다. 학생들이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오현단 앞 교사 건물에 갑자기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외할아버지는 무조건 “이 죽일 놈의 자식”이라고 욕을 하면서 우산대로 나를 마구 때리고는 밖으로 끌고 갔다. 학교 밖으로 나를 끌고 간 외할아버지는 그제서야, 어머니가 계속 우시는 중에도, “다른 학생들에게 네가 미안하게 생각할 것 같아 일부러 때렸다”는 말씀과 함께 데모를 하는 자리에 끼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아버지의 일과 관련시키면서 설명해 주셨다.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가 앉아서 글만 쓰시다가 관절염으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다.
연좌제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의정부 부대에 배치된 후 2급 비밀 취급인가를 받기 위해 신원을 조회했을 때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서류는 온통 빨간 글씨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2급 비밀 취급인가를 받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어찌어찌해서 겨우 받았고, 서울의 종합상사에서 근무하던 내가 중미의 파나마로 파견을 갈 수 있었던 것도 3급 공무원 두 분의 신원보증 덕분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당시에 제주의 모 신문사 서울 지사장으로 있었던,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의 힘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신원을 보증해 준 두 분 중의 한 분은 초ㆍ중ㆍ고ㆍ대학 선배로 후에 정부부처의 차관을 역임한 분이고, 다른 한 분은 그 당시 제주도 산남의 유명한 국회의원 비서관이었던 분이다. 이 자리를 빌려, 재차 그 분들께 감사드린다.
어머니는 언젠가, 형무소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후 감시 속에서 두 어린 아들과 눈먼 어머니와 살아갈 일이 망막했다고 회고하신 적이 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와 상당 기간 동안 반목해서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육지 해남에서 오래 사셨는데 제주에 정착하러 오실 때에는 새 할머니를 동반했다. 외왕할머니 집 마당과 이웃한, 내가 어린 때 살았던 집은 왕할머니가 내주신 땅에 외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들어 알게 되었지만, 집을 내놓으라는 할아버지와 집을 못 내놓겠다는 어머니ㆍ할머니는 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마루 가운데에는 도끼로 찍힌 자국이 있었고 그 자국은 집이 팔려 삼다미락이라는 식당 건물을 짓기 위해 헐릴 때까지는 그대로 있었으리라. 하여튼 나중에 화해하신 후에도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이러저러한 일들 때문에 서로 왕래가 없었다.
어머니가 얻은 일은 그곳에 통역으로 계셨던 아는 분의 소개로 미군 비행장(지금의 제주공항)안에 있는 미군 막사의 하우스보이 밑에서 빨래를 해주는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세탁기가 없었다. 미군 군복을 모두 손으로 빨았던 탓에 어머니의 손마디는 여느 친구 어머니의 손마디와는 달리 굵고 쭈글쭈글 골이 패여 있다. 그 고마우신 분은 모교 앞에 있었던 치과 원장님 사모님의 오빠였는데 후에 제주대학 영문과 교수가 되셨지만 일찍이 작고하셨다. 큰아들은 나와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동창으로 유망한 친구였는데 그마저도 젊은 나이에 병으로 아깝게 요절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어머니는 친구의 남편(교수) 소개로 제주대학 서무과에 임시직으로 다니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곳에서도 법정에 서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학장 따님이 석연치 않은 서류로 강사가 되었는데 이 일에 연루된 어머니가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고 광주 고법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다. 후에 어머니는 시험을 치러 정식 교육공무원이 되셨고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여 군에 입대한 후에야 중앙여고 서무과를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마치셨다.
나는 어릴 때도 생활이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굶은 기억은 없다.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면서도 똑똑하시고 강하신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신 우리 어머니, 말년에 증손자 재롱을 받으며 행복하게 사셔야 하는데 반쪽은 팔 다리가 마비되고 기억을 많이 잃으신 채 병원 신세를 지고 계신다. 나쁜 추억들은 모두 잊고, 좋은 추억만 간직하셨으면 좋으련만. 어디 우리 어머니만 당하셨던 괴로움이었을까마는 정말 불쌍하시다.
나는 십년 전 재정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당해 지금은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고마운 친구의 배려로 아들과 딸을 다 대학원까지 공부시킬 수가 있었다. 현재 딸은 출가하여 초등학교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고 파나마에서 태어난 아들은 서울에서 레지던트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나는 가진 것은 없지만, 손자를 도맡아 키우면서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도와주는 집사람이 있어서 행복하다. 자식들이 있어서, 그리고 내 주위에 코흘리개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또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