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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삶
1. 달란트의 열매, 시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선뜻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이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갈파한 것처럼 그만큼 시에 대한 정체성은 애매 모호하다. 하지만 시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은 시 외에도 소설, 수필, 희곡, 비평 등 여러 문학 장르가 있다. 그 중에서 시가 가장 언어에 민감하다. 그것은 시인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대상에 대하여 느낀 감정과 생각을 짧은 형식에 담아 압축된 시어로 표현한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고심 끝에 선택한 시어에는 수많은 나날 흘린 눈물, 아픔, 기쁨, 땀방울 등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시는 한 번 읽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오랜 시간 읽으면서 음미해야 시 속에 깃든 의미를 마침내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를 선물로 받았다. 원래 달란트는 ‘한 덩어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키카르’(kikar)의 음역이고 헬라어 ‘탈란톤’(talanton)은 ‘저울’, ‘계량된 것’의 뜻으로 무게를 재는 단위의 명칭이 되었다. 이런 무게와 화폐의 단위를 나타내었던 달란트(talent)가 재능, 능력을 나타내는 뜻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마 25:15-28) 누구나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에 주신 달란트를 최대한 갈고 닦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다.
일제강점기 때 모국어 말살 정책이 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시를 지어서 지금까지 큰 울림을 주고 있는 시인이 있다. 그가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믿음의 뿌리에서 싹틔우고 꽃피운 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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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믿음으로 시의 싹이 트다
별처럼 빛나고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른 시를 남기고 떠나간 시인 윤동주. 그는 1917년 12월 30일,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북간도)에서 명동소학교 교원이던 아버지 윤영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윤재옥은 기골이 장대하고 신수가 훤한 분으로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민은 그에 의해 이루어졌다. 윤재옥은 1886년 42세때 함경북도 종성군을 떠나 가족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는 척박한 땅을 부지런히 일구어 농토를 마련했고 큰 아들 하현(윤동주의 조부)을 결혼시킬 즈음에는 ‘부자’소리를 듣고 지낼 만큼 잘 살았다. 1900년에 윤재옥은 처음 자리 잡았던 지동에서 북간도 명동촌으로 이사를 했다. 명동촌은 바로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다. 북간도 이민 1세인 윤재옥은 의지가 강하고 신명이 있었던 인물임에 비해 윤하현은 풍모와 도량이 컸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목사도 그 지역의 대통령이란 별칭까지 얻었지만 인물됨은 윤하현 장로가 더 컸다고 한다.(송우혜, 윤동주 평전)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체구가 작고 심성이 부드러웠으며 정식으로 학문을 배웠다. 그는 1909년 18세때 중국 북경 유학길에 올랐으며, 유학 후 돌아와서 명동학교 교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 학관 같은 데서 영어를 공부했다. 친지들에 의하면 그는 ‘시적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보통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랬지만 교회 예배 시 대표기도를 할 때 무척 시적으로 기도를 했다고 하니 윤동주의 시인으로서의 기질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로마서 12:6)인 것이다.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랐던 명동촌에는 일찍이 기독교가 전파되어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교회를 다녔다. 윤동주의 집은 학교촌에 소속되어 있었고 집 가까이에 교회가 있었다. 명동촌은 본래 유학자들이 신학문을 교육시키기 위해 1908년 ‘명동서숙’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세웠는데 그때 숙감(지금의 교감)을 맡은 분이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목사이다. 그는 명동촌 지도자들과 함께 자녀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배울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선생을 물색하던 차 정재면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서울에 있는 ‘청년회관’이라는 기독교계 신학문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김구, 이동휘, 안창호 등이 활약했던 애국비밀결사단체 ’신민회‘회원이었던 젊은 지사였다. 그런 그가 명동촌에 발을 딛게 되자 마을 지도자들은 그에게 명동학교 교사가 되어 줄 것을 적극 요청했다. 이때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인 정재면은 부임 승낙 조건으로 놀라운 것을 제안했다. “학생들에게 정규 과목의 하나로 성경을 가르치고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명동촌 지도자들은 며칠 동안 의논한 끝에 그의 요구를 수락하기로 했다. 그들은 유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신학문에 대한 열의가 컸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람의 만남은 그 어떤 것도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섭리 가운데 이끄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는 것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듯이”(전도서 3:1) 모든 것이 하나님 주권 하에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유학 중심의 명동촌에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듯이”(시편 65:10)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정재면을 통하여 신학문과 기독교가 함께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09년 정재면이 교사로 부임하면서 학교 체재도 개편되어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교장, 정재면이 교감이 되었다. 정재면은 열심히 가르쳤을 뿐 아니라 훌륭한 교사진도 확보하여 기독교교육과 민족교육을 동시에 실행했다. 그는 처음에는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렸는데 얼마 지나자 교사직을 내걸고 담대하게 새로운 요구를 내 놓았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부모들도 다 같이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겠다는 뜻도 밝힌 것이다. 결국 마을 어른들도 그의 실력과 인품으로 인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을 보내셔서 이토록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정재면의 복음 전파에 대한 간절한 열정으로 인해 명동촌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구약에 나오는 에스더가 민족이 진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밤낮 3일을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라는 각오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갔듯이 정재면도 복음을 위해 모든 걸 걸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9년 6월경 마침내 교회가 세워졌고 마을 어른들도 모두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저명한 유학자들이 훨씬 어린 젊은 선생 정재면 앞에 나가서 성경을 배우고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윤동주는 신실한 기독교 신앙의 가정과 학교의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명동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2년 용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사촌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은진중학교가 있던 용정은 일본 세력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만주 침략의 기지로 삼고 있던 곳이다. 이런 곳에 기독교계 학교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장로교파에 속한 캐나다 선교부가 있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일본측도 절대 손을 쓸 수 없는 치외법권의 특수지역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신앙교육과 민족주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윤동주의 가족이 명동에서 용정으로 이사한 것은 큰 결단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어서 성공한 집안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한 것이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려서 가족 생계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천성적으로 선비형이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실패를 했다. 이어서 포목점, 양계업 등에 손을 대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런 과정 속에서 신앙마저 잃어 버렸다. 집안 모두 교회에 나갔지만 혼자 교회를 등진 것이다.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 장로에게는 상당히 아픈 상처가 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기도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윤동주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히게 되자 윤영석은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들 동주의 불행 앞에서 다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실족하기 쉬우나 그럴수록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베드로전서 4:12-13)는 말씀처럼 그런 고난을 ”온전히 기쁘게“(야고보 1:2)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3. 기독교 문화에서 시의 꽃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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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 체제가 더 굳어지고 조선인에 대한 탄압도 거세어졌다. 거기다가 일본은 만주로 세력을 더 넓혀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평양은 기독교세가 급속도로 팽창하여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 문화가 크게 꽃피운 도시였다고 한다(송우혜, 윤동주 평전). 이런 기독교 문화 가운데 숭실학교는 기독교 교육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관서 지역에서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윤동주는 숭실에서 2학기 동안 교육을 받았다. 1934년 12월 중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로 당선되었다. 송몽규의 등단은 시를 쓰는 윤동주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동주의 문학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 자기 작품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시를 짓고 나면 완성 날짜를 기록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숭실학교 생활 불과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을 썼으니 한 달에 2편씩 쓴 셈이다. 그의 나이 18세,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객지에서 고독과 고뇌를 겪으면서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하였다. 그는 숭실학교에서 교내 문예부 편집을 맡으면서 거기에 자신의 시 1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5년 10월에 동주가 평생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의 <정지용 시집>이 출간되었다. 그는 이 시집을 수없이 읽으면서 시집 곳곳에 붉은 밑줄을 긋기도 했고 짧은 평도 적을 만큼 정지용의 시를 좋아했다. 숭실중학교 생활을 마친 윤동주는 선교사가 세운 당대 최고의 조선인 학자들 이양하, 최현배, 백낙준 등이 포진되어 있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 연희전문 4년간은 시를 쓰는 동주에게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운 시기였다. 또한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였기 때문에 신앙 생활도 함께 할 수 있던 경건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힘들고 암울한 시대여서 청년으로서 방황하기도 했다. 모국어를 자유롭게 쓸 수 없었고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던 때여서 의식이 있는 조선인이면 누구라도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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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인의 고뇌,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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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이 일제의 압력으로 바뀌었다. 일명 ‘친일파’를 교장으로 세운 것이다.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초조한 나머지 조선을 더욱 핍박하기 시작했다. 3월에 조선사상범 예비구금령에 이어 국방보안법이 공포되고 학생들을 학도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근로 동원을 시켰다. 이런 불안과 공포의 상황에서 윤동주는 연희전문 4학년을 맞이 했다. 이때 그가 쓴 작품이 한 해동안 17편이었으니(시 16편, 산문 1편) 실로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한 것이다. 첫 작품이 <무서운 時間>인데 시시각각 죄어오는 시대의 엄습에 대한 반응을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나를 부르는 것이오//”에서처럼 처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시편 중에는 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시가 상당수가 된다. <태초(太初)의 아침>, <또 태초(太初)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등이다. 물론 1940년 12월에 예수님의 ‘팔복’에 관한 교훈으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 5장을 배경으로 쓴 시 <팔복>도 있다. 이 시는 제목 자체를 팔복이라고 했고 시 원문에 마태福音 五章 3-12라고 아예 명기되어 있다.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줄곧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생활을 하였고 방학이 되면 용정의 집에 가서도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등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런 그도 연희전문 3학년 때 신앙적으로 방황한 적이 있었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 문익환 목사와 동생 윤일주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신앙적 회의에 빠져서 기도가 예전과는 달리 서툴러졌다고 한다(송우혜). 그토록 오랜 시간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해 왔고 좋은 기독교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로 인한 절망적 상황 앞에서 잠시 신앙이 흔들렸던 것이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마음껏 쓸 수 없었고 성과 이름까지 일본말로 바꾸어야 했던 참담한 시대를 겪으면서 방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39년 9월 이후 절필했다가 1940년 12월이 되어서야 긴 침묵을 깨고 3편의 시를 썼으니 그만큼 고통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런 신앙적 회의기를 겪고 극복하고 난 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자신이 쓴 시 중에서 18편을 선별하였다. 그리고 1941년 11월 20일에 마지막으로 <서시>를 완성하여 총 19편의 시로 육필 자선시집 3부를 만들었다. 1부는 스승 이양하 선생님게 드리고, 1부는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고 나머지 1부는 본인이 간직하였다. 이 3부 가운데 정병욱에게 준 것이 유일하게 남아 윤동주가 이국 땅 차디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난 후 1948년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된 것이다. 시집이 출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후배 정병욱은 본인이 학도병으로 징용을 당해 전쟁터에 끌려 나가게 되었다. 그때 고향 전남 광양 본가로 내려가서 어머니께 밑기면서 “나나 동주가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잘 간직하여 달라고 부탁하였고(정병욱,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 나라사랑 23집, 외솔회 141쪽, 송우혜 466쪽),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말씀 드리고 떠났다. 그의 모친은 그것을 마루널 아래 땅 속 깊이 독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일본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마침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병욱의 신앙을 잠시 살펴보면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동주와 같이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했지만 주일에는 신앙이 좋은 동주를 따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던 사람이다.
윤동주가 그토록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1947년 동주의 시를 읽고 한 말 “동(冬)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는 대시인답게 감각적으로 탁월한 표현이었다. 추운 겨울 12월에 피는 꽃이라니. 사실 겨울에 피는 꽃은 거의 드물다. 또 꽁공 얼어 붙은 강 아래 유유하게 뛰어 노는 잉어라니. 참으로 멋진 시적 표현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이 바로 윤동주의 시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동주의 연희전문 친구인 강처중은 동주가 도쿄로 유학을 가기 전에 하숙에 남긴 원고와 짐을 맡고 있었고 도쿄에서 보내온 5편의 시도 잘 간직한 사람이다. 광복 후 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는 형의 친구를 찾아 다니다가 정병욱을 만났다. 그래서 그가 지켜낸 유일하게 남은 자필 시고 1부의 19편 시와 강처중에게 맡겼던 원고 중 12편의 시를 합쳐서 1948년 총 31편의 시를 담은 시인 윤동주의 유고시집 초판본<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비록 윤동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집은 두 친구 정병욱과 강처중의 손에 의해 출간되어서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아말렉과 싸울 때 피곤하여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는(출애굽 17:11)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때 모세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두 사람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출애굽 17:12-13)승리한 것처럼 윤동주에게는 그러한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5. 불멸의 시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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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30일, 시인이 태어난 날이다. 그로부터 27년 1개월 17일을 살다가 떠나간 시인. 그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옥사하였다. 그 날이 1945년 2월 16일이니 광복 되기 직전이다. 6개월만 버티면 그가 그토록 바라던 광복인데... 하지만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모국어 말살 정책이 감행되었던 때에 모국어로 시를 지었다. 그러다가 일본 도시샤대학 유학 시절 모국어로 시를 써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고통스런 옥중 시간을 견디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런 안타까운 최후를 맞은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행사가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995년 그가 다녔던 도시샤대학 코리아동창회에서 윤동주 추모비를 세워 해마다 헌화식을 하고 있고, 같은 해 일본에서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 결성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일본인들은 윤동주 기일 뿐만 아니라 3.1절, 8.15 광복절에도 그를 기리고 있다고 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에서처럼 윤동주 시인은 나라가 어둠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직접 행동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시를 쓴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견디기 힘들어 했다.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맨 처음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서시’가 나온다. 시의 첫 행도 역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다. 이어서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라고 고백적인 어조로 표현한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그는 부끄러움에 그치지 않고 괴로워하기까지 했다. 사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가. 윤동주 시인처럼 부끄러움을 안다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서시에 나타난 부끄러움은 ‘하늘’이라는 시어가 지닌 함축으로 인하여 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 맑고 드넓은 하늘에 주목하면 순수함을 잃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하늘을 높은 이상으로 간주하면 이상을 실천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하늘은 절대자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점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토록 시어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음으로 인하여 시를 읽는 묘미가 있다.
윤동주 시인이 탄생한 지 한 세기가 되었다. 그동안 큰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고 수많은 고귀한 죽음이 있었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선조들은 시련을 끝까지 견뎌내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런 숭고한 목숨에 빚져서 사는 것이 아닐까. 비록 시인은 떠나갔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들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는 신실한 믿음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줄곧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천품적으로 심성이 부드럽고 온화한 그가 암울한 시대의 수난을 겪으면서 살아야 했을 때 무척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지닌 신실한 청지기였기 때문에 말씀과 기도로 고통의 불길을 잠재우며 고난의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시인으로서의 달란트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그는 시로써 동참하였다. 그가 남긴 시의 은하가 여전히 우리 곁을 흐르고 있다. 백 년 아니 천 년이 지난 후에도 면면히 흐를 것이다.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부는”(‘자화상’ 중에서)우물 속에 비친 영원한 청년 윤동주. 부끄러움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그는 우리들 기억 속에 불멸의 시인으로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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