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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한반도의 남동단에 위치한 부산만을 모태로 성장된 도시로서 지형적으로 한반도의 척량산맥인 태백산맥의 말단인 포항구조분지에서 남서방향으로 진로를 바꿔 달리다가 대한해협에 몰입하여 소반도와 섬 그리고 만입이 발달하는 리아스식 해안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배후에는 고도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독립적으로 분포하고 여기서 뻗어 나온 산각은 완만한 경사로서 해안에 몰입하고 있다.
또한 대한해협을 남으로 두고, 북으로는 경남 양산군의 양산시와 물금면, 김해시 장유면과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울산시의 서생면과 온양면, 서쪽으로는 진해시와 김해시 장유면과 접해 있다.
먼저 수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동단은 동경 129°18′13″(장안읍 효암리), 서단은 동경 128°45′54″(천가동 미백도), 남단은 북위 34°52′50″(다대동 남형제도), 북단은 북위 35°23′ 36″(장안읍 명례리)이다. 따라서 북반구 중위도와 동반구 중경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부산과 위도가 비슷한 우리나라 도시로는 진해, 광주 등이 있고, 외국의 경우 일본의 도쿄, 중국의 정센, 알제리의 알제이, 그리고 미국의 오클라호마시티 등이 이에 해당된다. 경도 상으로는 시베리아의 르호얀스크, 일본의 나카사키, 호주의 다윈이 이에 속한다. 한편, 부산은 표준시보다 약 8시간 37분 빠르고, 한국 표준시(동경 135°기준) 보다는 약 24분이 늦은 곳이다.
부산은 15구 1개군을 가진 광역시로서 그 면적은 총 765.94㎢ 에 달한다. 기장군이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여 전체의 28.47%이고, 다음으로 강서구 23.59%, 금정구 8.51% 순이다. 부산의 도심지에 해당하는 중구와 동구는 각각 0.37%와 1.28%에 그치고 있어 가장 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부산의 면적 변화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산이 근대도시의 성격을 갖춘 시기는 일제시기인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산부제가 실시되면서부터이다. 당시 면적은 불과 84.15㎢로 지금의 중구·동구·영도구 그리고 서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936년 4월 1일 제1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동래군 서면과 사하면 암남리 편입으로 면적이 112.12㎢로 늘어났으며, 1942년 10월 1일 제2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면적이 이전보다 두배 이상인 241.12㎢로 확대되면서 오랫동안 이 지방의 행정중심지였던 동래군 동래읍과 사하면·남면·북면일부가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부산이 정부직할시로 승격과 동시에 제3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동래군 구포읍·사상면·북면과 기장읍의 송정리가 편입되면서 면적은 360.25㎢로 늘어났고, 1978년 2월 25일 제4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김해군 대저읍·명지면·가락면의 일부지역이 편입되면서 면적은 432.32㎢로 확대되었다.
1989년 1월 1일 제5차 행정구역 확장으로 경상남도의 김해군의 가락면·녹산면과 창원군 천가면의 편입으로 면적은 525.25㎢에 이르게 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기구 개편에 따라 광역시로 개칭하였으며, 3월 1일부로 제6차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양산군 5개읍·면(기장·장안읍, 일광·정관·철마면)과 진해시 웅동 일부지역이 편입(749.17㎢)되었으며,
2009년 12월 31일 현재 일부 해안지역의 매립으로 766.166㎢로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아시아 계절풍이 탁월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한반도의 남동단에 위치하고 있어 온대계절풍의 기후대에 속하면서 해안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이가 적고,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봄철에는 대륙성 고기압이 쇠퇴하고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을 주로 받아 좋은 날씨를 보일때가 많으나 양자강 부근에서 발생한 저기압의 잦은 통과로 비도 자주 내린다. 부산의 봄은 3월이 되면 매화가 만개하고, 중순 이후 민들레가 핀다. 4월에 들어서면 복숭아꽃이 활짝 피고, 제비가 날아들며 개구리가 나온다. 또한 일교차가 매우 크고, 이상건조, 황사, 늦서리 같은 특수한 기상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여름철에는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해 고기압 사이에 형성된 장마의 전선으로 6월 하순경부터 7월 하순경까지 본격적인 장마철이 시작된다. 7월 하순경부터 8월 중순경까지 일최고기온 32℃ 이상의 무더위가 수주일간 계속되기도 한다. 또 밤에도 최저기온이 25℃이상이 되어 잠 이루기 힘든 열대야가 나타나기도 한다.
가을철에는 대륙의 고기압이 점차 발달하여 맑은 날이 맞는다. 또한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날씨가 주기적으로 변하여 9월에 들어서면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겨울철에는 대륙성 고기압의 발달이 이어져 한랭하고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고 북서 계절풍이 강하게 불어오나 타지방보다는 다소 온화한 기온을 보이는 편으로, 이는 쉽게 데워지지도 쉽게 식지도 않는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보인다.
겨울 평균기온이 3.8℃정도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다음으로 겨울철이 온화하며, 일 최저기온이 0℃이하인 일수가 53일로서 제주도를 제외하고 가장 적다.
△ 낙동강 하구, 을숙도
민족과 문화의 젓줄인 낙동강은 부산의 을숙도를 끝으로 바다로 흘러간다. 충적지평야로 넓게 펼쳐진 김해평야에 서낙동강을 나누어주고 물금 ․ 호포 ․ 구포를 지나 을숙도의 하구까지 흐르는 것이 부산의 낙동강인 것이다.
109,327㎡(33,017천 평)의 광대한 땅은 우리나라가 끌어안고 있는 지구의 자연유산으로서 거대한 축복의 땅이다. 23,860㎢ 낙동강유역을 적셔온 1,300리 물길 속에 퇴적과 충적으로 만들어진 보배같은 모래섬 ․ 삼각주 ․ 기수지대로서 땅에는 갈대를 솟게 하고 물에는 온갖 생명들이 찾아들고 하늘에는 구름과 바람과 일몰 ․ 일출이 철새 날개짓과 더불에 생명의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그러면서 서로가 바닷물이 되고, 강물되는 공존의 기회로서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는 땅이 ‘낙동강 하구’다.
낙동강 하구의 중심적인 생태 축이자 삼각주로서의 상징인 을숙도는 전체면적이 약 70만평이다.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기수역으로 해안 염습지 식생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 철새들의 먹이인 해안저서생물이 풍부하고, 또한 이곳은 겨울새의 월동지, 나그네새의 중간기착지로서 아시아의 이동경로 중의 하나로 동아시아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여 동양 최대 규모의 철새도래지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고니, 재두루미, 흑두루미, 저어새, 노랑부리저어새, 황새, 노랑부리백로, 흰꼬리수리, 참수리, 새매, 잿빛개구리매, 황조롱이, 쇠부엉이 등이 찾아오는 곳이며 부산시에서는 낙동강 하구의 생태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해 문화재보호구역(철새도래지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을숙도는 낙동강 하구에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하중도(河中島)로, 갈대와 수초가 무성하고 어패류가 풍부하여 한때는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였으며,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대부분이 저습지대로 홍수 때는 수몰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섬 크기에 비하여 주민이 적었다. 그러다가 윤중제(輪中堤)가 축조되고 경지정리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많은 주민이 입주함으로써 부산의 원예작물 공급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4월 낙동강 하구둑의 완공으로 섬 전역이 공원화되면서 대부분의 갈대밭이 훼손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철새가 줄어드는 등 생태계 파괴가 가속화되었다. 이에 부산시는 을숙도 개발계획을 백지화하고 이 일대를 핵심보전구역으로 지정하는 등 을숙도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플랑크톤
동물플랑크톤은 소형어류의 중요한 먹이가 된다. 요각류, 야광충, 지각류의 출현빈도가 높고 여름철에는 다양한 출현종수를 보이며 겨울철에는 단순한 출현종수에 출현 밀도가 낮다. 식물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하여 수중의 오염물질을 정화 하고 동물플랑크톤의 먹이가 되는 생체를 합성한다. 생태계 저층의 중요한 생산자이지만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수중동물에 위해를 주기도 한다.
‣ 저서생물
도요류의 먹이가 되는 엽낭게, 달랑게, 밤게, 방게, 길게 등의 게류와 가리맛조개, 가무락조개, 백합, 갈미조개 등의 조개류, 민챙이, 고동류가 흔히 보인다.
‣ 어류
낙동강하구둑을 중심으로 강과 바다를 오가던 어류들의 이동을 위해 어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어도에서 출현하는 어류는 총 21과 29종으로 많은 종의 어류가 회유성 어종으로 나타났는데, 은어, 뱀장어, 전어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 식물
낙동강하구의 아래에 형성되어 있는 많은 사주에는 가장자리에 갈대가 자라고 군데군데에는 모래지치, 갯메꽃, 통보리사초, 퉁퉁마디, 그리고 갯잔디 등 약 572종의 해안가 식물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낙동강하구는 다양한 환경에서 서식하는 다양한 식물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 해안사구 식물들
우산잔디, 좀보리사초, 통보리사초, 수송나물, 갯씀바귀, 갯메꽃, 모래지치, 갯완두, 순비기나무, 해당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 염습지 식물
갈대, 세모고랭이, 갯잔디, 천일사초, 나문재, 갯질경, 갯
개미취 등이 이에 해당한다.
‣ 수생식물
정수식물 |
뿌리는 토양 속, 줄기와 잎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물위로 뻗어있는 식물 (갈대,줄,부들 등) |
부엽식물 |
뿌리는 물 밑바닥에 고착, 잎은 물위에 뜨는 식물 (수련, 가래, 마름, 노랑어리연꽃, 가시연꽃 등) |
침수식물 |
식물체 전체가 물속에 잠겨서 고착하는 수중 식물 (붕어마름, 나자스말, 검정말, 말즘 등) |
부유식물 |
물위에 떠서 생활하는 식물 (개구리밥, 생이 가래, 자라풀, 부레옥잠 등) |
‣ 조류 - 철새
일찍이 1966년 겨울철새도래지로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 제 179호)로 지정되었고, 연안오염특별관리구역(82년 환경부) 자연환경보전지역(88년 건설교통부) 자연생태계보전구역(89년 환경부) 습지보호구역의 5개 법으로 보호받는 우리나라 유일의 습지이다.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인 한국을 대표하는 습지로 해외에도 널리 소개되어 있다. 독수리 물수리 흰꼬리수리 검독수리 고니 재두루미 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 등 온갖 희귀조와 수십만의 철새가 찾아오는 동양최대의 철새도래지로 특히 겨울철새가 무리 지어 나는 모습은 왜 이 땅이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 불리는 가를 실감케 한다.
겨울새
겨울철새는 대체로 10월 하순에서 3월 상순경까지 볼 수 있으며, 낙동강하구에서 볼 수 있는 겨울철새로는 오리, 갈매기, 고니, 큰고니, 쇠기러기, 큰기러기, 흰죽지, 댕기흰죽지, 청둥오리 등이 있다.
여름새
여름새는 대체로 4월 무렵 모습을 나타내어 9월까지 번식하며 살다가 가을이 되면 남쪽 지방으로 이동한다. 쇠제비갈매기는 모래사주에서 국내 최대 규모로 번식하며, 갈대밭에는 개개비, 쇠물닭, 뜸부기, 덤불해오라기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나그네새
나그네새는 4~5월 무렵과 8월 하순경부터 10월경 번식지와 월동지로 이동할 때 낙동강하구에서 쉬면서 먹이를 구하고, 장거리 여행에 대비하여 에너지를 저장한다. 나그네새는 대부분 도요류와 물떼새류로서 4,000~5,000마리 이상 무리를 형성하여 모래사주와 갯벌을 뒤덮는다.
‣ 조류 - 텃새
연중 같은 지방에 서식하는 것을 텃새라고 하며, 낙동강하구에서 볼 수 있는 텃새는 오리과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번식하는 흰뺨검둥오리, 갈대숲의 붉은머리오목눈이, 박새, 굴뚝새, 강가의 벌판과 논밭에서 서식하는 까마귀, 까치, 꿩, 매추라기, 멧비둘기, 참새, 방울새, 멧새, 종다리, 때까치, 딱새와 맹금류인 매, 황조롱이, 솔개, 새매 등이 있다.
△ 문화의 섬, 을숙도
자연생태의 경관 때문에 시와 소설의 단골소재가 되었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모래톱 이야기>,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2부>, 시인 천양희의 <을숙도에서>, 최정란의 <등>, 문정임의 <돛배> 등의 문학 작품에 을숙도를 직간접적으로 소재로 사용되었다.
다음은 위에서 이야기한 작가들의 일부 작품이다.
석양 때도 아닌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마음은 자꾸 갯벌처럼 빠지고
나는 왠지 슬퍼져서
알고 있는 새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노랑부리저어새, 백로, 재두루미, 고니, 흰뺨검둥오리, 황새,
큰기러기, 흑두루미, 검은목두루미, 백할미새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누가 새들을 보내버렸을까요.
강은 말이 없고
갈대들만 갈데없이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을숙도가 아니라 얼룩도 같고
도래지가 아니라 도태지 같습니다.
다시 새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아 그런데 새들은 이곳에 없습니다.
석양때도 아닌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천양희 <을숙도에서>
이 시에는 을숙도의 과거와 현재를 걱정하고 생각한 것이 드러나 있고, 예전의 자연경관을 보고 싶어 아쉬워하는 작가의 내면이 잘 나타나 있다.
돛배를 아십니까. 돛대에 넓은 천을 달고서 바람을 받아가는 배. 내겐 휘고 오래된 배가 한 척 있습니다. 눈에 담가두고 가끔 거풍하듯 꺼내어 보는, 언젠가 풍석배라 이름하던 작은배. 그래요 정작 선주는 제 아버지입니다. 명지 끝물 일웅도 모래톱까지 데려다 주곤하던, 지금은 동력선이 된 그 배가 예전엔 돛단배였습니다.
‣ 문정임<돛단배를 찾아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많은 문학인들이 을숙도 자연에서 그리움과 위안을 얻고 상처도 받을 만큼 빼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었고 소중히 지켜야 되는 자연이기에 문학을 통해서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 을숙도 영화촬영지
을숙도는 영화촬영지의 단골 무대 중 하나다. 장건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 재림>,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 곽경택 감독의 <친구>, 이한 감독의 <청춘만화> 등 을숙도의 빼어난 경관 때문에 여러 영화에 소재로 사용되었다.
△ 을숙도 둘레길
을숙도가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둘레길이 있다는 것은 생소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부산시가 1990년대 중반 쓰레기 매립장을 조성하면서, 3~5m씩 돋워 두리반처럼 둥글게 길을 내면서 콘크리트로 덮어 만들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을숙도 전경을 볼 수 있고 을숙도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할 수 있지만, 본래 흙길이었던 길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 하루 빨리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풋풋한 흙길을 밟으며 자연의 신비감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동양최대의 생태 도래지라는 명성을 되찾았으면 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을숙도 문화회관
낙동강 하구둑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1995년 12월 22일에 공사 착공하여 2002년 9월 5일에 을숙도 문화회관 대공연장 및 관리동 준공하여 2002년 10월 5일에 개관하였고 2005년 12월 30일에 을숙도 문화회관 소공연장 준공하여 2006년 2월16일에 소공연장 개관하여 지금의 을숙도 문화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대공연장, 소공연장, 야외공연장, 전시실 1, 2, 3으로 구성되어있고, 일정은 주로 연극, 무용, 음악, 공연 등이 열려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을숙도의 자연경관을 둘러보고 문화 공연을 감상할 수 있어 자연과 어우러진 열린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시가 되면 을숙도 철새공원에 자동차 출입 및 인원을 통제한다.
문화회관 주변으로는 을숙도 갈대밭, 조각공원, 연못쉼터 등이 있어 많은 부산시민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 을숙조각공원
을숙도문화회관 내에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진 을숙도와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조각공원으로 시민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2004년 부산 비엔날레 부산 조각프로젝트 출품작 20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에서 인간에 의해 희생된 도심 속의 자연 생태를 주목, 인간과 자연이 서로간의 ‘틈'을 넘어서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 국제 비엔날레 출품했던 작품들 중 국내외 유명 조각 작가 작품이 배치 되어 있다.
△ 갈대밭
갈대밭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어 걷기 운동을 하기엔 좋은 장소이다. 걸으면서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갈대밭은 위 그림에서 일반인에게 개방된 B지구 안에서만 감상 할 수 있다. C지구는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다. 갈대밭과 을숙도에 찾아드는 철새를 찍고 싶다면 망원렌즈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 낙동강 하루 에코센터
층 연면적 4,075m² 규모로 1층은 다목적실과 사무실, 2층은 전시실, 3층은 다목적 영상실이다. 전시실은 중앙홀과 5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중앙홀에서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통해 낙동강 하구의 철새들을 실시간으로 관찰 할 수 있고, 5개 구역은 낙동강하구의 역사와 습지, 이야기, 생물, 조류, 과거 현재 미래, 체험학습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류박제 55종 85개체가 전시되어 조류 학습 체험하기엔 더 없이 좋다.
에코센터의 주요업무는 을숙도 철새공원 보존을 위한 관리, 낙동강 하구 자연 생태에 대한 조사, 안내, 교육, 전시 국내외 습지 및 철새 네트워크 구축 및 교류, 야생동물 치료 및 재활보호(야생동물 치료센터 운영)조사 연구 등의 업무를 소화해내고 있다.
사회형성 현황 |
□ 행정조직 및 재정규모
△ 행정구역
15구 ․ 1군, 210동 ․ 2읍 ․ 3면
□ 인구
부산은 1876년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의 무역 상공업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1936년에 이르러 20만 명을 넘어섰고 그 후 해방과 6.25사변과 같은 사회의 격변에 따라 인구가 대거 유입됨으로써 1955년 100만명을 넘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성장 정책으로 농어촌인구의 도시 유입이 급격히 증가하여 1972년에 200만, 1979년 300만 명에 육박하여 한국 제2의 도시인 동시에 세계적인 대도시로 그 위치가 부상되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부산 산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노동집약형 신발 산업이 급격히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이와 관련된 협력 ․ 하청업체들의 역외 이전 등으로 차츰 인구가 감소되는 추세에 있다.
부산은 1876년 근대 국제항으로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의 무역·상공업 중심지로서 발전하면서, 1914년 4월 부제(府制)를 실시했을 당시 인구는 20,000명을 조금 넘었으나, 시역(市域)의 확장과 항만의 발달로 점차 증가하여 1925년에는 116,853명으로 불어났다.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관문으로서 무역량이 증가하고, 1936년과 1942년 시역확장으로 도시의 발달이 촉진됨에 따라 인구는 1942년에 334,318명으로 증가되었다가, 광복이후 1945년에는 281,160명으로 일본인이 물러감에 따라 일시 줄어들기도 했다.
1949년 8월 부산시(釜山市) 개칭과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반발하자 전국각지에서 피난민이 몰려들고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는 급증하여 1951년 844,134명으로, 1955년 1,049,363명으로 100만명을 돌파하였다. 이후 1963년 1월 정부 직할시(直轄市) 승격과 행정구역 확장으로 1963년의 인구는 1,360,630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으로 경제발전과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인구는 점차 급증하기 시작하여 1970년에는 1,842,259명으로 불어났고, 1978년 행정구역 확장으로 김해일부 지역이 편입되면서 2,879,570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1980년에는 3,159,766명으로 300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90년에 3,798,113명(1990년까지는 상주 인구조사 기준)으로 인구 증가는 둔화되면서, 1992년 3,887,278명(1991년 이후는 주민등록인구 통계 기준)으로 전년도 보다 0.1%가 감소하였다. 1995년 1월 광역시(廣域市) 개칭과 3월 행정구역 확장으로 양산군의 5개 읍?면이 편입되면서 인구는 3,892,972명으로 약간의 증가가 있었다. 이후 경제침체에 따른 영세기업의 역외이전과 출산율 감소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부산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2000년에는 3,812,392명이었고, 2003년 3,711,268명이었으나 최근 몇 년간 계속하여 1.0%대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2005년 10월말 기준으로 부산의 1일 출생은 72명, 1일 사망은 52명이며, 인구이동은 1일 2,646명으로 나타났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 부산인구는 3,574,340명(외국인 31,310명 포함)에 이른다.
□ 도로 ․ 교통
부산은 배산임수형의 지형적 특성을 지닌 도시로 바다를 매립한 지역을 포함하여, 30% 정도만이 평지로 형성되어 있어 도로망 역시 과거에는 해안선을 따라 동서를 축으로 한 벨트형의 간선도로가 건설되어 왔다. 1991년 부산의 도로율은 13.6%로 서울 18.3%, 대구 14.6, 인천 14,3%보다 낮아 6대도시중 최저수준의 도로율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급격히 증가하는 교통수요량을 흡수하기 위해 1980년 10월에 완공된 번영로는 왕복 4차선의 유료도로로 문현시장~구서IC간 총연장 15.7㎞로 항만 물동량의 원활한 수송과 도심교통량 분산수용 등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동서고가로(10.9㎞)는 1992년 1월 9일 준공되면서 항만물동량의 부마고속도로와 연계로 가야로의 교통량 감소효과 등을 거두었다. 관문대로(10.8㎞)는 2001년 10월 준공으로 백양터널과 수정터널을 관통하여 연결되었다. 또한 항만배후도로 건설로 항만물동량을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광안대로는 2003년 1월 6일 완공으로 항만배후도로로 부산항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고 있다. 부산항 순환도로의 한 축인 남항대교 1997년 10월 착공 2008년 6월 준공예정이며, 북항대교는 2006년 12월 착공 2010말 준공예정이다.
도로율은 19.49%로서 타 시도에 비하여 낮은 실정이며, 도로포장율은 98.90%이다. 시내 교량 현황은 352개이며, 육교는 166개소이다. 또한 지하차도는 22개소 총연장 6,408.0m이며, 지하보도는 33개소 총길이가 3,113m이다.
부산은 남북과 동서축의 주요 간선도로에 대중교통 수단인 시내버스나 택시의 운행이 집중되고 있다. 1992년말 시내버스가 2,546대의 운행으로 1일 교통인구는 5,534천명으로 시내교통 인구의 49.9%를 차지하였다. 부산은 대중교통 수단인 시내버스와 택시가 교통인구의 68.3%나 차지하고 있으나 극심한 교통체증을 낳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지형여건상 해발 100m 이상의 산지점유율이 33%로서 취약한 지형여건에다 체계적인 도로망이 형성되지 못했고, 둘째는 배산임수형의 시가지와 항만관련 교통량의 도심통과에 따른 교통수요와 공급간의 불균형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차량 증가율은 무려 5.55배나 된다. 부산의 교통난은 심각하다.
그 원인은 도시구조상 산지 사이로 도시가 형성되어 도심내부와 외부간의 연계도로가 부족하고, 동서·남북 두 축의 간선도로에 교통량이 집중 유입되고 항만이 도심과 인접하고 있어 전국 컨테이너 처리물동량의 95%이상이 도심 통과로 교통난이 가중되고 있다.
부족한 도시철도망에 도로율 또한 전국에서 가장 열악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1990년도 16만7천대에 불과하던 자동차 수가 1997년말 72만대에 이르러 폭발적인 자동차의 증가에도 그 원인이 있다.
지하철은 서울에 이어 두번째로 운행되고 있는 도시로 도심의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1호선(노포~신평동)은 총연장 32.5㎞로, 1일 평균이용자는 1997년말 현재 62만3천명을 돌파하고 있으나 지하철의 수송 분담율은 9.8%에 그치고 있다.
지하철 2호선(호포~좌동) 1단계(호포~서면) 구간을 ‘99년 9월 개통되었고, 2단계(서면~장산) 구간중 서면~금련산 구간이 2001년 8월 개통, 금련산~광안 구간이 2001. 1월 개통하였고, 나머지 구간인 광안~장산간은 2002년 8월 완전 개통으로 수송분담율 17.2%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3호선 1단계(대저~수영)가 2005년 11월 준공되었으며, 2단계(미남로터리~반송) 공사가 2008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 중에 있다. 그리고 녹산공단과 연계한 가덕~사상간의 지하철 건설이 완공될 2011년에는 34.3%를 수송을 분담할 것이다.
또한 민자유치를 통한 김해선(사상~김해)의 경전철공사가 진행 중이며, 앞으로 초읍선(서면~종합운동장), 영도선(부산역~영도구청)의 건설로 부산의 대중교통 수단을 확충할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최대 현안과제는 교통난을 해소하는 일로써 교통정체로 인한 막대한 물류 유통비용을 줄이고. 시민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매년 시 가용재원의 60% 이상을 도로·교통시설부문에 투자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엄청난 부지보상비와 함께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교통망 확충사업과 다양한 교통관리시스템이 완성되면 부산의 교통은 훨씬 좋아 질 것으로 예상되어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05년말 현재 부산시의 1일 교통량 분담현황으로는 버스 27.6%(1,638천명), 택시 15.9%(944천명,), 지하철 11.5%(687천명), 승용차 28.3%(1,680천명), 기타 16.7%(992천명)로 지하철의 교통분담 비율이 많이 증가하였다.
부산시민들의 보행환경개선 사업을 위해 2000년 10월 “보행환경개선 조례를 제정, 2001년 5월 보행환경개선 기본계획을 확정하여, 지금까지 총 468개 사업장에 1,206억원을 투입하였다.
첨단교통시스템 구축을 위해 유로도로 자동요금징수시스템(ETCS)를 구축을 통해 차량정체 해소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국 첫 시행한 대중교통 환승활인제는 2006년 시내버스간 무료환승제를 시작으로 2007년 시내버스↔지하철간 환승활인제, 2008년 시내버스↔지하철↔마을버스간 활인환승제까지 확대도입하였다.
□ 산업
△ 산업별 취업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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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 천 명 |
년도 |
취업자 총 수 |
농·림·어업 |
광 공 업 |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서비스업 | |||
|
제조업 |
|
건설업 |
기 타 | |||
1990 |
1,525 |
33 |
588 |
587 |
904 |
96 |
808 |
1991 |
1,581 |
27 |
590 |
589 |
964 |
110 |
854 |
1992 |
1,597 |
24 |
548 |
545 |
1,025 |
127 |
898 |
1993 |
1,597 |
34 |
491 |
491 |
1,071 |
139 |
933 |
1994 |
1,625 |
36 |
463 |
463 |
1,125 |
154 |
970 |
1995 |
1,701 |
57 |
447 |
446 |
1,197 |
159 |
1,038 |
1996 |
1,700 |
51 |
422 |
422 |
1,226 |
158 |
1,069 |
1997 |
1,704 |
51 |
400 |
400 |
1,253 |
153 |
1,101 |
1998 |
1,604 |
39 |
374 |
374 |
1,190 |
116 |
1,074 |
1999 |
1,584 |
41 |
381 |
381 |
1,163 |
109 |
1,055 |
2000 |
1,645 |
40 |
384 |
384 |
1,220 |
121 |
1,110 |
2001 |
1,654 |
33 |
371 |
371 |
1,250 |
119 |
1,131 |
2002 |
1,704 |
29 |
365 |
365 |
1,310 |
126 |
1,183 |
2003 |
1,610 |
31 |
323 |
323 |
1,255 |
130 |
1,125 |
2004 |
1,612 |
30 |
305 |
305 |
1,278 |
129 |
1,149 |
2005 |
1,624 |
25 |
298 |
297 |
1,301 |
122 |
1,179 |
2006 |
1,610 |
22 |
301 |
299 |
1,288 |
117 |
1,171 |
2007 |
1,616 |
24 |
298 |
297 |
1,294 |
122 |
1,172 |
2008 |
1,597 |
11 |
289 |
287 |
1,297 |
120 |
1,177 |
2009. 1 |
1,572 |
7 |
286 |
285 |
1,279 |
114 |
1,165 |
2 |
1,557 |
9 |
284 |
282 |
1,265 |
110 |
1,155 |
3 |
1,565 |
9 |
291 |
290 |
1,265 |
114 |
1,151 |
4 |
1,567 |
12 |
283 |
281 |
1,273 |
112 |
1,061 |
5 |
1,577 |
11 |
282 |
281 |
1,284 |
106 |
1,178 |
6 |
1,590 |
11 |
276 |
274 |
1,303 |
108 |
1,195 |
□ 역사
부산은 해운대 좌동, 중동의 후기 구석기 유적과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개 시내 도처에서 발견 된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온 곳이며, 삼한시대에는 거칠삼국, 삼국시대의 동래군, 고려시대에는 동래현, 조선시대에는 동래부에 소속된 곳이었다.
부산이라는 지명은 부산포에서 유래된 것으로 1407년에는 부산포(富山浦)로 최초 개항하였으며,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지금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의 모양을 따서 부산(釜山)이라 불렀다. 1876년 국제항으로 개항된 이래 발전을 거듭, 1963년 정부직할시로 승격하여 명실상부한 국제교역 및 해양관광도시로 발전하였으며, 1995년 부산광역시로 확대 개편되어 21세기 환태평양 중심도시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 지명유래
1402년(태종 2) 1월 28일『태종실록』에 富 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며,『경상도지리지(1425)』『세종실록지리지(1454)』『경상도속찬지리지(1469)』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성종실록』에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南悌)가 그린「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부산(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시기는 부산(富山)과 부산(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동국여지승람(1481)』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보면, "부산(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일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 양진(兩鎭)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동국여지승람(1481)』편찬 이전에는 富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부산(釜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해사록』에 실려 있는「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에 임하여"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釜山鎭城)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鄭公壇)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詩文)에 나오는 산은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변박이 그린「왜관도(倭館圖)」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가모령」이라 하고「부산호장소(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枾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枾, 嶺)은 우리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자원 |
□ 설화
△ 범어사 창건이야기
신라 문무왕 때, 왜구가 대거하여 침투하는지라 왕이 그 퇴치 방안을 아무리 생각하여도 묘책이 없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대왕은 근심하지 마소서. 태백산중의 의상대사는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후신으로 항상 여러 신중(神衆)을 거느리고 다닙니다.
또 東國의 해변에는 금정산이 있는데, 그 산정에는 암석이 흘립(屹立)하여 높이가 50척여(尺餘)가 됩니다. 그 암석 위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에는 물이 있어 그 빛이 항상 금색이고, 사시(四時)로 가득 차서 마르지 않으며, 또한 금색의 고기가 오색의 구름을 드리우고 범천(梵川)으로부터 내려와서 그 속에 노닐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대사를 맞이하여 친히 함께 그 산으로 가시어 금정암(金井庵) 밑에서 7일 7야 화엄신중경(華嚴神衆經)을 독송(讀誦)하고 정근(精勤) 하시면 미륵여래(彌勒如來)가 금색신(金色身)을 현현(顯現)하고 사방의 천왕(天王)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해동을 위압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 만약 후대에 어진이가 이어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하고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거든 또한 이 바위 밑에서 화엄정근(華嚴精勤)을 하시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간과가 길이 쉬게 될 것"(≪世宗文化遺蹟總覽≫)고 하였다.
그래서 문무왕은 의상대사를 불러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금정산 밑에 범어사를 짓게 한 것이다.
△ 신선암
하단 동평의 산을 「호박꿈(虎伏口)」이라고 부른다. 산의 모양이 마치 호랑이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숲이 울창하고, 높지 않은 산이기 때문에 선사 시대부터 살아 온 하단 주민의 꿈이 어우러져 있다.
호박꿈(虎伏口) 산기슭 낙동강변에 신선암(神仙岩)이라 부르는 큰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아 있다.「신선바위」는 700리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낙동강 물이 감싸고 돌아 넓은 평야를 이루고, 뒤로는 호박꿈의 산줄기가 숲을 이루어 묻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산기슭 끝에 있어 그 아름다운 정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정취에 도취된 신선이 와서 놀았다는 전설에 따라 신선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에덴공원에 있는 강선대(降仙臺)에도 신선이 내려와 앉았다는 바위가 있으며, 이 같은 전설은 원시신앙(原始信仰)내지 후세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선암은 바위 밑에 작은 굴을 형성하고 있어서 선사(先使)시대 주거지(住居地)의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으나,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1934년 낙동강 호안공사를 맡은 일본인 청부업자가 호박꿈 산기슭 낙동강변에 우뚝 솟은 이 바위를 깨어서 -조선사람들의 전해 오는 전설을 깨뜨릴 목적으로 -돌을 쓸려고 몇 사람의 석수장이를 불렀다.
한 석수장이가 연장을 가다듬어 일을 시작하려는 순간 갑자기 즉사하였다. 그 뒤 이 원인불명의 죽음이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었고, 지금까지 이 바위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 황산진구
낙동강은 ‘황산하’라는 이름으로 문헌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실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2세기 때에는 ‘황산하’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황산진구라는 나루가 문헌에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다. <삼국사기> 탈해이사금조(서기 77년)에는 신라와 가야의 처절한 전쟁 장면이 나온다. 황산진구는 정사의 기록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나루다.
그리고 현재는 황산진구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양산 원동의 가야진나루라는 주장과 물금읍의 물금나루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데, 이후 전개된 전투의 양상과 후대의 기록을 보면 물금나루일 가능성이 높다.
△ 을숙도 똥다리
을숙도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나무다리. 옛날 배 타고 을숙도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통과의례처럼 갈대숲 속 수로를 배경으로 오똑하니 세워진 그 나무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무성한 갈대숲이 기다렸다. 을숙도 갈대밭이 온전히 살아 있을 때, 연인들이 즐겨 걸었던 추억의 다리이다. 현재는 다릿발 두 개만 앙상하게 남았다.
△ 하단 나루터
하단 나루터는 1932년 구포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 구포와 더불어 낙동강 하구 최대의 도선장이었다. 하단 나루터로 운행되는 배는 을숙도와 일웅도 사이의 물길을 지나 명지나루까지 운행되었다고 한다.
하단나루터에서 을숙도까지는 10여분, 하단~명지 도선은 대략 40~50분 걸렸다고 한다. 하단 나루터에서 운행되었던 을숙도 유선은 1960년대엔 20여척 1970년대엔 늘어나 50여척이 운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 옛 동산유지 쪽으로 나루터가 옮겨졌다가 하구둑 건설 후엔 없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1970년대 나루터 주변의 정취는 야트막한 갈대밭과 갈대밭 사이의 오솔길이 보이고 나루터 주위의 가게에선 재첩국과 백합구이를 팔았고, 통나무와 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야트막한 다리 그 다리를 건너 찻집과 막걸리 집까지 1970년 이전부터 서민의 발이 되었던 나룻배는 아마도 강 건너 장을 보러 가거나 물건을 팔려고 짐을 한가득 가지고 나룻배를 이용하던 서민과 장사꾼들이 주 고객이었을 것이다. 장에 가서 볼거리와 사고 싶은 것을 생각하거나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상상을 나룻배에서 했으리라 생각된다.
□ 문화재
△ 국보
㉠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
국보 제 69호 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 동아대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부산 서구 부민동2가 1번지)이 녹권은 1397년(태조 6) 10월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왕명을 받아 개국원종공신인 사재부령(司宰副令) 심지백(沈之伯)에게 내린 것이다.
녹권의 내용은 심지백이1395년(태조4) 11월에 황주목사 최사용 등 수십명과 함께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1397년9월 11일에 왕지(王旨)로이녹권을 하사하여 포상의 은전을 내린다고 되어있는데, 이러한사실은《태조실록》에는 누락되었으나 이 녹권에 의하여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개국원종공신은 1392년부터 1397년까지 1,400여명이 책봉되었는데, 이 때 내려진 은전은 대장군 이화영(李和英)의 전례에 따라 각기 전(田) 15결(結)을 하사하고, 공신의 부모와 처에게 벼슬을 내리고 자손은 음직을 수여하며 후손에게도 은전과 천역에 처하지 않게 하는 신분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공신이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으로 구분하는데, 공적의 내용과 직위에 따라 정공신은 1등에서 4등으로, 원종 공신은 3등까지로 나누었다. 조선초기에는 정공신에 한하여 교서와 녹권을 함께 주었으나 원종공신에게는 녹권만을 주었다.
이 녹권은 조선 초기의 문서라는 점 뿐아니라 내용이 이후 원종공신제도의 법제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당시의 이두문이 많이 사용되어 문체와 내용도 사료적가치가 높다.
더욱이 이 녹권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랜 목활자본 실물이란 점에서 우리나라 활자 인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녹권 중 으뜸으로 꼽히는 유물이다.
㉡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국보 제 200호로 통일신라시대(8세기)에 만들어졌으며, 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보살상은 보관(寶冠), 대좌, 광배가 없어지고 천의 (天衣)의 일부가 결손 되었으나, 8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높이가 34cm나 되는 큰 보살상으로 비교적 잘 보존된 작품이다.
체구는 다소 뻣뻣한 느낌이 있으나, 떡 벌어진 어깨와 풍만한 가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은 한결 부드럽고 탄력성과 중량감이 넘치는 듯 하여 전체적인 자태는 품위가 있고 당당하다. 얼굴은 원만한데 아래턱은 살이 올라 풍만하고, 치켜 올라간 가는눈과 오뚝한 콧날, 작은 입 등 표정은 자신만만해 보이면서도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있어 보살의 자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양팔에 장식되어있는 2쌍의 팔찌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것이 이 보살상의 특징 중 하나이며, 풍만한 가슴에서 가는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이 아름답다.
하반신의 아름다운 옷주름과 천의의 율동적인 곡선은 장부와도 같이 당당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조화시켜 보살의 성스러운 정신을 표현하는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표현이 사실에 충실한 편이며, 균형과 입체감도 충분하여 보살의 위엄과 자비로움을 함께 갖춘 보살상으로 당당한 신체표현을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시대초기의 뛰어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보살상은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내부는 비어있으며, 도금은 거의 완전하여 아직도 금색이 찬연하다.
㉢ 영태2년명 납석제호(永泰二年銘 蠟石製壺)
국보 제 233호로 통일신라(766)에 만들어졌다.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부산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석남사 절터의 석불대좌 중대석에서 발견된 곱돌항아리로 그릇의 안밖에 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어깨에 한줄, 아랫배에두 줄의 쌍선을 음각하였다.
뚜껑의 윗면에도 두 줄의 동심원을 음각하였고, 그 안에 간결하게 새긴 세 겹의 연화문이 유일한 장식이다.
이 그릇의 몸통에는 한줄에 8-11자씩 15줄 136자의 비로자나불상조상기(毘盧遮那佛像造像記)가 새겨져 있고 그릇의 밑바닥에도 4줄 22자의 이두문이 초서로 새겨져 있는데, 이명문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공양승과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들의 업이 소멸되기를 비는 일종의 기원문이다.
처음 이 항아리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속에 청동으로 만든 장방형의 작은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산화되어 재가 된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던 석조불상은 1947년 석남리에 사는 주민이 반출하여 보관하였다가, 1959년경에 내원사(산청군삼장면 내원리)에 양도하였다.
이와 같이 불상대좌중대석에 법사리를 봉안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사례로서 복장(腹臟)의 초기양식으로 보이며, 영태 2년( 7 6 6이 ) 라는 절대 연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또 항아리의 형태나 몸통 표면에명문을 새기는 방식도 그 뒤 동화사(桐華寺) 석탑에서 나온 석합 등으로 양식적 계통이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곱돌 항아리로 인해 내원사 석조비로자나 좌상이 우리나라에서가장 오래된 것 임이 밝혀져 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의조성 연대를 8세기까지 끌어올리게 됨으로써, 불교사와 미술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호로 조선시대(19세기)에 만들어졌다 서구 부민동 2가 1번지 동아대학교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동궐도는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그림이다.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으며 이와 똑같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동궐도 등과 비교해 볼 때 원래 16개의 화첩으로 되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대학교 소장품의 표면에 동궐도 인(人)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동궐도는 본래 천(天)·지(地)·인(人)의 3본이 작성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 작품과 고려대학교 소장본 외에 한질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단에 먹과 채색을 써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수많은 건축물과 조원, 그 밖의 시설물 등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 모습을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궁궐 주위의 산과 언덕들은 남종화풍의 필법으로 그려졌으나, 건물의 표현과 원근처리 등에는 서양화법의 영향도 엿보인다. 이 그림은 궁궐의 배치, 건축물과 각종 시설, 조원의원 모습을 파악할 수 있어 파괴되거나 훼손되어 없어진 건물이나 시설물 등을 그림을 그릴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고증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그림은 당시 유행했던 화풍을 알 수 있는 회화사 연구자료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건축·조경·과학기술사·궁궐사 등 궁궐의 역사를 비롯한 각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도화서의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제작 연대는 궁궐 건물의 소실이나 재건 연대 등으로 보아 1826년에서 1831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이 그림은 조사 결과 고려대학교 소장본과 동일본으로 인정되어 1995년 6월 23일 보물 제596호에서 국보 제24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 백자대호(白磁大壺)
국보 제 310호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남구 용호동 176-30번지에 가면 볼 수 있다. 백자대호(백자 큰 항아리)는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항아리로서 생긴 모양이 둥그런 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달항아리라고 불리고 있는데, 주로 17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형태이다.
흔히 백자대호를 조선 백자의 정수로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한 형태미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넉넉한 모습의 이 항아리에서 당시 사람들의 안분자족(安分自足)하고자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백자 큰 항아리는 아래 부분과 윗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붙였던 부분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하고, 모양도 비대칭인 것이 대부분인데, 이를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러한 비대칭을 즐기듯이 거리낌 없이 제작함으로써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조선 중기 백자 큰 항아리의 멋을 창출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백자 큰 항아리도 위와 같은 제작 기법으로 인해 모양이 완전한 대칭은 아니지만 약간 비틀어지고 변형된 상태가 전체의 조형에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주면서 생동감을 갖게 한다. 높이 45.5㎝, 입지름 19.5㎝, 몸체 지름 44.0㎝, 굽 지름 17.0㎝인 이 백자 큰 항아리는 높이에 비하여 몸통이 둥글고 다소 커 보이지만, 입 지름과 굽 지름의 비례는 대체로 이상적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굽과 입의 높이도 적당하여 몸통이 둔하지 않고, 무겁거나 처져 보이지도 않는다. 유약 상태는 양호하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도자기이다.
□ 사적
△ 동래패총(東萊貝塚)
사적 제 192호로 삼한시대(3~4세기)에 만들어져 부산지방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삼한시대 패총이다. 원래 낙민동·수안동에 걸친 낮은 구릉지대의 서남 경사면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던 대규모 유적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파괴·소멸되고 주택가에 인접한 구릉지대 일부만 보존되고 있다.
동래패총은 1930년 철도공사 때 4개의 옹관이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이후 1967~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회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1992년 부산박물관에서 동래패총 정화사업을 위해 부분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지금은 바닷가로부터 약 6㎞ 정도 떨어져 있지만, 유적이 형성될 당시에는 이 일대가 바닷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토 유물로는 원저단경호, 시루, 노형토기 등의 토기들과 골각기, 사슴·소·말 등의 동물뼈, 쇠도끼·쇠낫·쇠침 등 철기류, 초본류의 잎이 섞인 불탄 흙덩어리와 숯이 출토되었고, 조개껍질은 홍합, 굴, 대합, 바다고동 등이 채집되었다.
이 패총의 북쪽 가장자리 부분의 아래층에서 평면이 원형에 가까운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 조사 때에는 역시 아래층인 패각이 거의 없는 회색점토질층에 다량의 재, 불에 탄 흙, 숯 부스러기와 함께 불순한 철재(鐵滓, 쇠 찌꺼기) 등이 흘러내려 굳어진 탄탄한 철층(鐵層)이 상하로 2~3cm 내지 10cm 정도의 사이를 두고 여러 겹 층을 이루어 깔려 있었다. 이러한 포함층은 원래의 지형을 따라 서쪽으로 경사지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북쪽의 제일 높은 곳에 야철노지(冶鐵盧址)로 생각되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노지들은 남아있는 상태가 불량하여 원형이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철을 제작하던 시설의 일부로 생각되어 특히 주목되었다.
동래패총의 존속 시기는 대체로 3~4C 전반 경으로 추정되며, 특히 유물의 양이 많고 질도 우수하기 때문에 동래지방에 강력한 정치적 집단이 출현하는 전환기에 형성된 생활유적이라 할 수 있다.
△ 금정산성(金井山城)
사적 제215호로 조선시대 만들어진 금정산성은 길이 17,337m, 성벽 높이 1.5m~3m 정도로 우리나라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광대한 성곽이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 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금정산성의 성벽은 금정산의 능선을 따라 지형의 굴곡과 높낮이에 맞춰 쌓았고, 높은 봉우리들을 이용하여 봉우리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금정산에 언제부터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없으나 고대에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 때부터 이미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또 일부의 유구(遺構)를 두고 신라시대에 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의 산성은 1703년(숙종 29)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667년(현종 8)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들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계책을 강의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성이 신라 때부터 있었던 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금정산에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여러 차례 대두하였으나, 1702년(숙종 28)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청에 의해 1703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완공된 성은 둘레 9,011보, 높이 1척으로,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특히 서문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인 적대(敵臺)를 성문 양쪽에 설치하였으며, 서문 오른쪽에는 3개의 아치형으로 된 홍예수구(虹霓水口)를 설치하여 성안의 물이 밖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장대(將臺), 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는데, 평상시에는 중군(中軍), 승병장(僧兵將), 군기감(軍器監), 도계도(都計導), 군뢰(軍牢), 문직(門直) 등의 직책을 가진 자와 군병 등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등 3개 읍 소속군과 3개 읍 소재 사찰의 승려들이 군사로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 있다.
금정산성은 일제강점기에 관아건물 들을 비롯하여 많을 시설물이 파괴 몰수당하였다고 한다. 부산시에는 연차적으로 성곽, 성문, 망루 등 성곽 시설을 보수 정비하고 있다.
△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
사적 제266호로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져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해안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또한 신석기 초기부터 말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문화층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남해안 신석기시대 유적을 대표하는 표준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적의 중요성 때문에 일찍부터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제 때에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굴되었고, 1963~4년에는 미국의 학자들이 시굴조사를, 1969~71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을 실시하였으며, 1999년에는 부산박물관에서 철거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출토 유물로는 융기문토기, 빗살무늬토기, 단도마연토기 등 토기류와 결합식 낚시, 숫돌, 석도, 박편찍개, 자갈돌긁개, 날부분만 갈아서 다듬은 도끼, 뼈바늘, 마제석부, 타제석부 등 석기 및 골각기류가 있으며, 조개류, 물고기, 동물 등의 자연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당시의 경제활동과 자연환경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1999년 실시한 부산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옹관묘와 주거지 유적, 사슴이 그려진 토기편 그리고 수 백점의 조개 팔찌와 1969년 국립중앙박물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3점의 배모양 토기 등은 동삼동패총 문화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동삼동패총은 우리나라 남해안지방 신석기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 신석기문화 내용 전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출토된 일본의 죠몽토기(繩文土器)와 일본산 흑요석제(黑曜石製) 석기를 통해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 등 바다를 통한 고대의 교역 또는 문화교류활동 등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동삼동패총은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 내용과 상호 교류관계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과의 교류관계까지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옹관묘 구조의 분묘형태는 신석기시대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부산시에서는 2002년 4월 동삼동패총전시관을 건립하여 유적의 보호, 출토 유물의 체계적인 보존관리 및 전시를 하고 있다.
△ 동래 복천동고분군(東萊 福泉洞古墳群)
사적 재 273호로 삼국시대 중 가야시대에 만들어졌다. 현재 동래 중심가 북쪽 마안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95년까지 부산대학교 박물관과 부산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는 모두 130여 기에 달하며, 출토유물은 총 9,000여점이다. 출토유물은 토기류 2,500여점, 철기류(금속류 포함) 3,200여점, 장신구류 4,010여점, 골각기 등 기타 유물 10여점, 인골 5구, 말 이빨 등 동물유존체(動物遺存體) 7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주지역과 같이 금 은 등으로 만든 화려한 유물은 많지 않으나 대신 철제 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무구류(武具類)와 갑주류(甲胄類)가 특히 많아 주목을 받고 있다.
부장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기류는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보물 제598호인 마두식각배, 오리모양토기, 등잔모양토기, 신발모양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방어용 무기인 갑주류(갑옷과 투구)는 제4호 무덤에서 나온 단갑, 제11호 무덤에서 부속장식까지 완전하게 갖춘 완제품 상태로 발견된 괘갑, 10호 무덤에서 발견된 완전히 갖추어진 실전용 마구 등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복천동고분군의 중요한 유물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아, 우리나라 고대 갑옷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천동고분군은 경주의 대형 고분을 제외하고는 함안의 말이산도항리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더불어 남부지방 최대의 고분군 중의 하나이며, 유물은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다음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복천동고분군은 새로운 무덤 양식의 출현으로 우리나라 고대 묘제의 변천과정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출토 유물은 4~5세기경에 이룩된 가야문화의 이해와 아울러 당시 일본에 전달된 우리 문화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부산시에서는 1992년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고분군을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고, 1996년에는 복천박물관을 개관하여 복천동고분군 출토유물 뿐 아니라 인근 가야지역 및 같은 시기의 일본 유물도 함께 전시함으로써 가야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특산품
△ 기장미역
쫄깃한 맛과 특유의 향이 좋은 ’기장미역’ 수온·조류 등 최적의 어장서 자라 미역 중 최상품 ’기장’이라는 지명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미역’일 것이다. 그만큼 ’기장미역’하면 미역 중에 최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기장의 자연환경이 준 선물이다.
미역에는 건조미역으로 이용되고 동해에서 잘 자라는 북방형과 조기산 생미역 및 염장 가공용으로 적합한 남방형이 있는데, 기장에는 북방형과 남방형이 모두 나지만 기장의 특산품인 기장미역은 북방형을 말한다. 기장의 북방형 미역은 조류의 소통이 빠른 동해안의 특성에 따라 줄기가 넓고 엽체는 좁은 미역으로서 건조미역으로 국을 끓였을 때 미역이 흐물흐물해지지 않고 쫄깃한 맛과 향기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장미역은 타 지역 미역에 비해 일본으로 수출될 때 ㎏당 1달러가량 높은 가격으로 수출계약을 맺고 있을 만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중국산 미역이 일본으로 대량 진출하고 있어 국내산 미역은 가격경쟁력에 뒤져 수출량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미역 양식 어가의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난해 국립수산진흥원에서 개발한 ’미역가락’과 같이 소비자의 요구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식품 개발이 요구되고 있다.
△ 기장멸치
기장에서 잡히는 멸치는 산란기에 달한 길이 10∼15㎝ 사이의 왕멸치로 지방질이 풍부한 봄멸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살이 연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해 많은 사람들이 멸치회를 즐기러 오고 있다.
기장에서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멸치잡이를 하는데 기장에서는 봄멸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타지역에서는 맛보기 힘든 달콤하고 연한 멸치회 뿐 아니라 기장멸치로 담은 젓갈은 살이 다 녹아버리고 액젓만 남게 되는데 김장용뿐만 아니라 보쌈의 양념 혹은 말려서 조림을 해먹기도 한다.
특히 전국 유자망 멸치 어획고의 60%를 차지하는 대변항은 기장멸치의. 대표적 산지인데 대변항에 입하되는 멸치는 연간 7천여톤으로 1천여톤은 생멸치로 시판되어 우리지방 어민소득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동해안에서 가장 큰 멸치어장답게 대변항에는 봄멸치(2월∼6월)와 가을멸치(9월∼12월)가 잡히는 시기가 되면 각지에서 생멸치나 멸치젓을 사러오는 사람들로 붐비고, 대변항을 감싸듯 늘어서 있는 좌판마다 ㎏단위로 통에 담긴 멸치젓이 쌓여 있는 것도 대변항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기장 대변항은 타지에서 보기 힘든 멸치회와 매년 4월이면 대변항 일원에서 멸치축제가 열리는 데 풍어제, 임금님진상행렬, 갯마을마당극, 멸치털기체험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 부산에서 맛 볼 수 있는 음식
△ 멸치젓, 멸치회
부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멸치회와 멸치로 담은 멸치 젓갈이다. 그 중 대변항은 특히 전국 멸치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의 멸치산지로 유명하다. 청정한 수질과 빠른 물살 때문에 멸치의 운동량이 많아 맛도 좋다. 때문에 멸치의 집산지답게 대변항은 유일하게 멸치회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재첩국
재첩국은 숙취해소에 좋고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이런 재첩국은 애주가가 많기로 유명한 부산에서 효자노릇을 했다. 낙동강 하구에서 많이 잡혔던 재첩으로 담백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 밀면
밀면은 부산지방의 전통 음식으로 밀가루와 고구마전분을 넣고 반죽한 면을 끓는 물에 끓여 면을 찬물에 식힌 뒤 냉면과 동일하게 물밀면 비빔밀면 등으로 나뉜다. 기존 냉면 면발이 잘 안 끊어지고 질기었는데, 냉면보다 면발이 부드럽고 쫄깃하여 먹기에 편하다. 밀면의 유래는 6.25 전쟁 발발이후 낙동강을 경계로 후퇴하게 되었을 때 보급물자로 밀가루가 공급이 되었는데 그 당시 메밀을 구할 수 없어 밀가루로 대신하여 냉면으로 만든 것이 밀면의 시작이었다.
△ 동래파전과 산성막걸리
동래파전의 경우 산성막걸리와 먹으면 궁합이 아주 끝내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산성막걸리는 금정산성 토산주로서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전통주로 명맥이 이어올 정도로 맛이 깔끔 정갈하다.
△ 기장 꼼장어(곰장어)
기장에서 잡은 꼼장어(곰장어)를 가지고 집불에 구은 집불구이 소금에 구은 소금구이 고추장과 해물을 넣어 요리하는 고추장구이 등의 메뉴가 있는게 특징이고, 쫄깃쫄깃한 것이 일품이다.
△ 국밥
부산의 국밥은 주로 돼지국밥이 유명하다. 뽀얀 국물에 깔끔한 맛이 일품인 돼지국밥은 부산사투리로 전구지(부추)와 김치와 함께 먹으면 금상첨화다. 광안리 백사장 끝에 위치한 돼지국밥집이 유명하다.
△ 낙지볶음(조방낙지볶음)
부산 조방에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조방낙지볶음이라고 한다. 낙지와 함께 해산물과 함께 얼큰하고 매콤하게 볶아내어 요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번 먹으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매콤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 축제
축제명 |
개최일시/ 기간 |
주요내용 |
윤흥신장군향사 |
매년 음력 4월 14일 |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공과 함께 싸우다 순사한 군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4월 14일 윤공단에서 향사가 거행되고 있다. 위업 소개 및 헌관분향 |
정운장군 향사 |
매년 음력 9월 1일 |
정운장군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과 지역주민들이 매년 음력9월1일 정운공순의비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음 위업 소개 및 헌관분향 |
부산 록 페스티벌 |
매년 7~8월중 (2일간) |
세계정상의 록그룹을 만날 수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락 음악 축제, 국내외 락 매니아들의 만남의 장이 되는 국제 축제이며, 다대포해수욕장의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열정의 라이브 공연을 펼치는 꿈의 축제 |
문화의달 기념 전시회 |
매년 10월 중 |
10월 문화의 달을 맞이하여 매년 구청민원실에 다양한 작품 등을 전시하여 민원을 보러 오는 주민에게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 꽃꽃이, 도자기, 그림, 수석 등 작품 전시 |
다대포 해넘이 축제 |
매년 12월 31일 |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구의 자랑인 다대포의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하며 송구영신의 의미를 되새기는 - 아름다운 빛과 어우러진 - 「 다대포 해넘이 축제」 |
낙동강 하구 갈대축제 |
매년 10월 중 |
을숙도의 갈대밭 사잇길을 걸으면서 머리위로 날아가는 철새들의 날갯소리도 듣고, 낙동강하구의 상징새인 고니의 먹이 먹는 모습도 관찰하고, 배를 타고 낙동강하구 갯벌에서 쉬고 있는 수많은 겨울철새들을 관찰 |
□ 부산국제 영화제
10월에 열리는 세계적인 국제 영화제이다. 8일간 해운대 요트 경기장에서 광복동 등 출품작품이 극장에서 상영된다. 영화가 상영되면서 출연배우 와 감독과 토론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 반응은 해를 거듭할수록 뜨겁다. 상영되는 출품작은 독립영화에서부터 상업영화까지 다양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의 발상지인 부산을 영상문화의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발전시킨 것과 함께 서구에 억눌려 있던 아시아 영화를 활성화하고 영화인의 연대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신인감독들의 영화를 비롯해 수준 높은 아시아 영화인들의 열정이 담긴 영화 감상할 수 있고, 더불어 부산의 주요 관광지인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의 열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즐거움도 함께 맛볼 수 있다.
□ 부산 세계 불꽃 축제
10월에 열리는 불꽃 축제이다. 2005 APEC 정상회의 경축 첨단멀티미디어 해상쇼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6회째 이어오고 있는 세계적인 규모의 불꽃축제입니다.
부산의 바다와 하늘,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수만발의 화려한 불꽃과 최첨단 레이저 조명, 웅장한 음악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이 축제는 연인들의 고백이나 이 광경을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광안리나 해운대로 찾고 있다. 축제는 3일간 야간에 진행되는데 축제기간 동안 광안리 근처 도로는 차량이 통제된다.
□ 해운대 모래 축제
6월에 열리는 축제로 해운대 바닷가를 배경으로 모래로 만들어진 많은 예술작품을 볼 수 있고 (메인프로그램),동호인프로그램(비치발리볼,씨름왕선발대회,비치사커),참여·체험프로그램(40여개),공연·전시행사(축제주제관 축하공연,금빛노래자랑) 등으로 볼거리와 다채로운 축제 등을 볼 수 있다.
□ 강서 낙동강 갈대꽃 축제(갈대꽃 축제)
축제는 2일간 진행되고 맥도 생태공원에서 갈대꽃과 함께 비빔밥 나눔행사, 버들길 걷기대회, 갈대터널걷기, 갈대 소원탑 태우기, 갈대공예, 갈대솟 대장승 만들기, KNN유랑극단, 청소년스타킹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생태공원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축제를 통해 알 수 있는 살아있는 생태교육 축제이다.
□ 온천 및 해수욕장
△ 동래 온천
제3기 이전의 화산암의 병입으로 형성된 온천인데, 멀리 신라 때부터 신정(神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동래온천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삼국유사』(1281)에서 찾을 수 있다. 신문왕 3년(683)에 신라의 제상 忠元公(충원공)이 이곳에서 온천욕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의 기록으로는 아래의 『동국여지승람』(1481)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에서도 신라왕이 이곳까지 거둥하여 온천욕을 즐겼다고 전한다.
1691년(숙종 17)에 처음으로 욕사(浴舍)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약 100년간 폐허가 되었다가 이 고장 유지인 고창녕(高昌寧)에 의하여 소생되었다고 한다. 1883년(고종 20)에는 일본인들이 온천장의 일부를 조차하여 경영하다가 주민의 반발로 일단 물러갔는데, 1898년(광무 2) 다시 들어와 여관을 개설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경영하였고, 8 ·15광복 후 부산에서 운영을 맡아 오늘에 이른다. 현재 대부분의 온천수는 시영 양탕장(揚湯場)에서 뽑아 올려 파이프라인으로 관광호텔이나 공중탕 등의 업소에 공급하고 있고, 자체적으로 탕원(湯源)을 개발하여 사용하는 업소는 9개소 정도이다. 시영 양탕장의 경우 5개 천공(泉孔)에서 하루 1,100∼1,200t의 물을 뽑아올리며 수온은 62℃이다. 천질은 단순천으로, 약알칼리성 식염천(食鹽泉)이다. 효능은 위장병 ·치질 ·신경통 ·부인병 ·피부병 등 광범위하다.
△ 해운대 온천
수온 45~62 ℃. pH 7.7. 통일신라의 진성여왕도 애용했다고 하는 오래된 온천으로, 왜구의 침범 이후 폐탕(廢湯)되어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부활, 공중욕장도 생겼다고 하는데 외진 곳이어서 마을사람이나 환자들이 이용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온천장으로서의 근대적 개발이 시작된 것은 일제 침략 이후였다.
일본인에 의한 해운대온천의 개발은 이웃한 동래온천(東萊溫泉)의 경우와 거의 같은 양상으로 추진되어 왔으며 1937년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의 개통은 이 지역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8 ·15광복 후 이 일대가 부산에 편입되고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해수욕장과 함께 급속히 도시화하여 지금은 국내의 대표적 관광 ·휴양지가 되었다. 수질은 무색 투명한 알칼리성 단순식염천으로 라듐 성분이 약간 포함되어 있으며, 위장병 ·부인병 ·피부병 등에 특효가 있다.
현재는 동래온천보다 해운대 온천이 많이 발전하여 찜질방과 연계하여 많이 생겨났고, 24시간 운영되고 온천을 즐기고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
△ 해운대해수욕장
백사장 길이 1.8km, 너비 35~50m, 면적 7만 2000㎡이다. 수심이 얕고 조수의 변화도 심하지 않아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이 좋다. 숙박·오락시설이 잘 정비된 국내 1급의 해수욕장으로, 국내 유수의 온천장까지 끼고 있어 해마다 여름철에는 50~60만의 인파로 붐빈다. 근처에 있는 수중 박물관인 아쿠아리움도 볼 수 있고, 동백섬과 오륙도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 광안리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이라고도 한다. 넓이 120만 4000 m2. 서쪽 끝은 남천동(南川洞)에서 동쪽 끝은 민락동(民樂洞)에 이르는, 광활한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의 서남단을 매립하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나, 아름다운 백사장이 끝없이 전개되어 해운대해수욕장과 더불어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광안대교가 바로 보이며. 광안대교 야경이 일품이다.
△ 송정해수욕장
은빛 백사장과 청정한 바닷물이 주변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몽돌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단애 해안도 구경할 수 있다.
남해도에서 상주해수욕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해수욕장이다. 남해군은 1999년에 송정생태주차공원을 개장하고 해수욕장 주변의 가로등에 꽃바구니를 설치하는 등 해수욕장을 운치 있는 공원으로 조성했다. 인근에는 아름다운 항구인 미조항이 있어 싱싱한 해산물을 싸게 맛볼 수도 있다.
△ 다대포해수욕장
백사장 면적 5만 3000㎡, 길이 900m, 너비 100m, 평균 수온은 21.6℃, 수심 1.5m로 부산시내에서 서남쪽으로 8km 떨어진 낙동강 하구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다. 낙동강 상류에서 실려온 양질의 모래밭과 완만한 경사, 얕은 수심과 따뜻한 수온으로 널리 알려진 피서지이다.
민박이나 야영이 안 되는 곳으로 주변에 숙박과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1970년대에 해수욕장으로 개장한 이래 매년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장하고 있다.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준공되어 강물의 자연스런 유입이 막힘에 따라 해수욕장의 기능이 예전만 못해져 하굿둑에서 낚시를 하거나 간조 때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소라나 게를 잡으려는 관광객이 해수욕객보다 더 많이 찾는다.
인근에 옛날에는 섬이었지만 낙동강 상류에서 밀려온 모래로 육지와 이어진 몰운대(沒雲臺)가 있고 다대포패총과 낙동강하류 철새도래지, 다대포객사, 정운공순의비, 윤공단 등의 문화유적지와 관광명소가 많다.
김해
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북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 ․ 양산시와 접하고, 동쪽은 낙동강 건너 양산군 ․ 부산광역시 강서구, 남쪽은 부산 ․ 진해시, 서쪽은 창원시에 접하고 있다. 서쪽에는 무릉산(3,122m), 남쪽에는 용지봉(750m) ․ 화산(792m) ․ 굴암산(651m) 등의 대산지가 뻗어 있고, 북쪽에는 무척산(700m) ․ 석룡산(417m), 동쪽에는 신어산(630m) ․ 도봉산 등의 산지가 동서로 뻗어 있다.
중앙부에는 낙동강의 하얀평야가 전개되어 있고, 평야에 잔구가 산재되어 있다. 북쪽과 동쪽으로 낙동이 남류하며, 낙동강의 지류인 조문강과 해반천이 중앙부를 동류하여 낙동강에 흘러든다. 서쪽 용지봉에서 발원한 화포천은 북서부를 북류하여 낙동강에 합류한다.
△ 하천환경 특성
AD 42년 수로왕이 가락국(금관가야)을 세워 6가야의 맹주국으로서 찬란한 가야문화를 꽃 피웠던 김해는, 낙동강하류의 오랜 퇴적장용으로 생겨난 충적지를 기름진 땅으로 가꾸어 만든 130㎢에 달하는 김해평야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농경문화를 일으킨 곳이지만 1960년 한국의 산업화 이후 기존의 토속적 환경이 새로운 공업 환경과 충돌하면서 1934년까지 자연하천이었던 서낙동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부담지역이 되었다.
사회형성 현황 |
□ 행정구역 및 재정규모
|
읍 |
면 |
동 |
법정 리동 |
마을 (통) |
반 |
1 |
7 |
9 |
101 |
746 |
4,842(2010.08월말 현재) |
△ 기 구
의회사무국, 5국 2직속 1출장소 4사업소 17읍면동
△ 공무원
1,312명
본청595, 직속190, 사업소180, 출장소54, 읍면동273, 의회20
△ 예 산
9,210억원(일반회계 8,066 , 특별회계 1,144)
재정자립도 : 38.4%
□ 인구
연도별 |
인구 |
인구증가 |
세대 |
세대증가 | ||
증가수 |
증가율 |
증가수 |
증가율 | |||
2009 |
492,103 |
14,841 |
3.1% |
171,380 |
7,490 |
4.6% |
2008 |
477,572 |
12,608 |
2.7% |
163,890 |
6,189 |
3.9% |
2007 |
464,964 |
11,236 |
2.5% |
157,701 |
5,547 |
3.7% |
2006 |
453,728 |
10,711 |
2.4% |
152,154 |
5,205 |
3.5% |
2005 |
443,017 |
15,585 |
2.4% |
146,949 |
6,866 |
4.9% |
2004 |
427,432 |
20,064 |
5.0% |
140,083 |
8,135 |
6.2% |
2003 |
407,368 |
17,076 |
4.4% |
131,948 |
8,121 |
6.6% |
2002 |
390,292 |
36,524 |
10.3% |
123,827 |
13,731 |
12.5% |
2001 |
353,768 |
10,151 |
3.0% |
110,096 |
3,944 |
3.7% |
2000 |
343,617 |
17,547 |
5.4% |
106,152 |
6,440 |
6.5% |
1999 |
326,070 |
5,581 |
1.7% |
99,712 |
1,335 |
2.4% |
1998 |
320,489 |
16,001 |
5.3% |
97,377 |
5,830 |
6.4% |
1997 |
304,488 |
17,683 |
6.2% |
91,547 |
6,303 |
7.4% |
1996 |
286,805 |
23,451 |
8.9% |
85,244 |
7,911 |
10.2% |
□ 교통
교통상으로 인근에 김해국제공항, 부산항등 국제적인 교통망과 남해 고속도로, 김해-양산간 고속도로, 부마고속도로 등 3개의 고속도로를 갖춰 전국을 연결하는 최적의 교통여건을 갖춘 도시 입니다.
□ 산업
기업체 : 5,984개 (종업원 77,433명)
자동차등록 : 211천대(2009년 12월말현재)
학 교 : 109개교 (초57, 중28, 고19, 대학교4, 특수1)
도로 포장률 : 95%
주택 보급률 : 107%
상수도 보급률 : 92%
□ 역사
42년 (가야) 김수로왕 가락국(금관가야) 창건
532년 (삼국) 신라에 합병, 금관군으로 됨
756년 (통일신라) 김해소경으로 됨
971년 (고려) 김해부로 고침
1895년 (조선) 김해군이 됨
1931년 11월 01일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
1942년 10월 01일 진영면이 진영읍으로 승격
1978년 02월 15일 대저읍, 명지면, 가락면 낙동지구가 부산시로 편입
1981년 07월 01일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
1989년 01월 01일 가락면, 녹산면이 부산시로 편입
1995년 05월 10일 김해시, 군이 통합하여 김해시로 됨
1998년 09월 12일 칠산동과 서부동을 칠산서부동으로 통합
△ 지명의 유래
<금바다>라는 뜻의 “김해”라는 이름이 처음 불리우게 된 것은 500년간 번창하던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 후 정치적,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던 이곳에 A.D. 756년 신라의 작은 수도격인 ‘김해소경“이 설치되면서 김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 선사시대
김해지역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생각되지만, 김해의 선사시대는 김해지역에 사람들이 집단을 이뤄 흔적이 처음 확인되는 신석기시대부터 김해에 대한 문자기록이 보이기 시작하는 초기철기시대 이전까지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김해의 신석기시대는 약 7천∼5천5백년 전입니다. 기원전 5천년 경부터 기원전후까지 무려 5천년 동안 김해의 선사시대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상세히 나눌만한 시기적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선사시대의 김해인 들이 사용했던 도구의 재질에 따라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 가야시대
삼국시대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고대한국에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야사가 소외되는 시대이름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바르고 빠짐없는 한국고대사의 복원을 위해서도 반드시 고쳐져야 할 시대이름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말하는 가야시대가 삼국시대를 대체할 수 있는 시대 구분의 이름은 아닙니다. 주체적 역사관으로 우리 고장의 역사를 되살리는 이 글에서 가야의 나라가 있었던 시대라는 뜻으로 가야시대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야시대는 가야의 여러 나라가 경상남도 일원에 기원 전 후부터 532년 김해 대가락(大駕洛)과 562년 고령 대가야(大加耶)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대개 600여 년 간의 역사를 말합니다.
△ 신라시대
신라시대란 가락국이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종말을 고하고 고려가 건국되기 전까지입니다. 이른바 통일신라라 불리는 시대의 대부분이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약 100여 년 전부터 김해지역은 신라의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금관이란 지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정복자인 신라가 가락국의 철을 관장하겠다는 의지로 붙였던 이름입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680년에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지방의 군(郡)에서 작은 서울(小京)으로 승격한 셈입니다. 경덕왕 16년(757)에 금관소경은 김해소경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김해의 지명은 이 때부터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철(金)과 해상(海)왕국의 전통은 이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이 때 쇠(金)바다(海)의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겁니다.
△ 고려시대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왕권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각각의 행정구역을 승격 또는 강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건국 초에는 후삼국의 통일전쟁과정에서 태조 왕건을 도왔던 지역이면 승격되었고, 후백제나 태봉(후고구려)의 편이 되었던 지역은 강등되었습니다.
후기가 되면 왜구(倭寇)의 침임을 막는데 기여한다거나, 민란(民亂)을 일으킨 책임 등을 물어 승격과 강등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김해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936년에 통일을 완수한 태조는 940년에 김해소경을 김해부(金海府)로 낮추었고, 다시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추었다가, 임해군(臨海郡)으로 올렸습니다. 광종22년(971)에 김해부(金海府)로 승격되었다가 지방제도가 완비되는 성종14년(995)에 10도를 정하면서 영동도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크게 승격되었습니다.
목종3년(1000)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두어졌다가, 현종3년(1012)에 금주(金州)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습니다. 충선왕1년(1309)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충선왕 3년(1311)에 김해부로 고칩니다.
△ 조선시대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2년(1393)에 전국 각도의 수관(首官)을 정하면서 경상도에는 계림, 안동, 상주, 진주, 경산과 함께 김해를 수관으로 정하였습니다.
태종13년(1413)에 각도의 관명을 고치면서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가 되었고, 세조5년(1459)에 김해진관(金海鎭管)을 설치해, 웅천(熊川, 웅동)·완포(莞浦, 진해)의 2현이 행정적으로, 창원·칠원·함안·고성·거제·진해·웅천이 군사적으로 각각 김해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해부의 행정은 정3품의 부사(府使), 사법은 종5품의 판관(判官), 교육은 종6품의 교수(敎授)가 각각 맡았으며, 부사는 6방을 두어 김해출신의 향리(鄕吏)로 실무를 담당케 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김해군은 대한제국 때 23개 면이 었으나, 1918년 7월에 13개 면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각 면(面)에는 면장·면서기·회계원이 실무를 담당하고, 동(洞)·리(里)에는 무보수의 구장이 임명되었습니다.
김해군의 치안은 경찰을 대신해 진주헌병대 마산분대가 맡았다가, 1914년 4월에 부산분대로 넘어갔고, 좌부면(부원동)에 헌병대 김해분견소와 활천·칠산·가락·주촌·녹산·명지 등의 15개소에 헌병파견소가 설치되어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로 불리는 일제의 철권통치에 억눌리게 되었습니다.
문화자원 |
□ 설화
△ 수로왕 탄강
김해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 신화로 가락국의 수로왕 탄강 설화에 대해서 자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후에 이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옛날에 구간(九干)이 있어 이들이 백성을 다스렸으니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때마침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유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여기에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추어라.” 라는 말이 들려왔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추었다. 그러자 곧 하늘에서 자색(紫色)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幅)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 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의 탄강 설화는 김해 가락국의 건국신화이기도 합니다.
△ 수로왕비
건무(建武) 24년 (기원 48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구간 등은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하는 말을 올렸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유천간(留天干)에게 빠른 배와 말을 주어서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그때 갑자기 한 척의 배가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육지로 내려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가서 왕에게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왕은 구간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게 했다. 그러나 배 안의 왕비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갈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에 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비도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비는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수로왕에게 이야기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합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고 떠났는데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두 밤 한나절을 지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이후 수로왕비는 기원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하여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매년 7월29일에 이 지방의 사람들은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으로써 즐기고 떠들면서 동서로 눈짓을 보내 건장한 인부들을 좌우로 나누었다.
그리고 망산도로부터 말은 육지로 달리고 배는 북으로 옛 포구를 향해 달리게 했다. 이것은 수로왕비가 도착한 것을 왕에게 급히 알리려 했던 유천간과 귀천간의 일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 황세와 여의 낭자
김해 시내 봉황대에 얽힌 가야시대의 비극적인 결혼 전설로 가락국 제 9대 겸지왕(肅王) 때 남대정동(南大政洞)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北大寺洞:현 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이후에 황정승은 아들 세(洗)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게 되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습니다.
자라면서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는데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황세는 개라암(황세바위)에 올라 '오줌 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가 마침 그곳에 있는 삼대로 오줌을 누어서 낭패를 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여름 거북내(龜川)에서 멱을 감게되자 여의는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어 보내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출정승도 결국 황세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혼약을 맺어주었습니다.
얼마 후 황세는 신라군이 침범해오게 되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流民)공주와 혼례를 시켜 부마로 삼습니다. 여의의 부모는 파혼 당한 여의낭자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지만 낭자는 끝내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공주와 혼인한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으로 그 해에 역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성안 사람들은 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한편 유민공주도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林虎山)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임호산을 유민산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전설과 관련된 곳으로는 여의낭자가 죽어서 혼이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하늘문 이라고 불리는 돌문이 있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약혼한 후 처음으로 놀았다는 평평한 바위인 여의좌(如意座), 그리고 망견대(望見臺), 여의목(如意木), 황세목(黃洗木), 소변터 등이 남아 있습니다.
△ 무척산 천지
김해 생림면 무척산 천지에 얽힌 수로왕릉 조성 전설로 수로왕과 가락국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무척산은 김해 상동면과 생림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기묘한 바위들과 깊은 계곡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높이 703m의 비교적 나지막한 산입니다.
이 산의 중턱에는 모은암(母恩庵)이라는 사찰이 있고 정상 부근에는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호수가 있습니다. 이 산의 낙동강 건너편 만어산에는 또 만어사(萬魚寺)가 있기도 합니다.
모은암은 수로왕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지었다거나 혹은 가락국 제 2대 거등왕(居登王)이 모후인 허황옥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사찰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모은암과 삼랑진의 부은암(夫恩庵)과 진영읍의 자암(子庵)이 가락국의 세 원찰(願刹)이었다고 합니다.
무척산 정상 가까이 있는 천지 역시 수로왕의 설화가 깃들여 있습니다. 수로왕이 돌아가자 지금 김해시 서상동의 왕릉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에 묘를 만들기 위하여 땅을 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물이 솟아나게 되어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늙은 도사가 나타나서 무척산 꼭대기에 연못을 파면 수로왕릉의 물줄기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이를 일러준 것은 도사가 아니라 인도에서부터 허왕후를 수행하여 따라왔던 신보(申輔)였다고 합니다.
신하와 백성들이 이 말을 따라 연못을 파니 물이 더 이상 솟아나지 않아 무사히 장례를 마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판 연못이 지금의 무척산 천지라고 합니다. 이 설화 역시 수로왕의 신성함을 보여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문화재
△ 국보
㉠ 선조국 문교서
보물 제 951호로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하여 의주에 있을 적에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쓴 교서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일반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이것은 선조가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기 한 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그 후 이 교서는 권탁의 후손 집에서 보관하다가 도둑을 맞고 다시 찾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과 한글로 쓰여 진 점에서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다.
㉡ 묘법연화경(원4~7)
보물 제 961호로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묘법연화경 중 권4에서 권7에 해당하는 이 책은 태종 5년(1405)에 성달생·성개 형제가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옮겨 적은 불경을 신문(信文)이 목판에 새겨 찍어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4권을 하나의 책으로 엮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26.8㎝, 가로 16㎝이다.
2004년 10월 서울에 거주하는 이경희씨가 대동면 원명사(주지 : 박형국)에 기증하였다.
△ 사적
분산성 : 사적 제 66호로 고려 우왕 3년(1377년) 박 위 부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고종 8년(1871년) 정현석 부사가 개축한 것이다. 그러나 성의 기초 선정방법이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위 테뫼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때 최초 축성연대는 가야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의 길이는 총 929m, 평균 폭은 약 8m이다. 현재 남북의 2개 문지와 서편의 암문, 우물지 등이 남아 있으며, 97년 복원된 봉수대가 있다.
수로왕릉 : 사적 제 73호로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 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3일 구지봉에 탄강하여 3월 15일에 즉위함으로써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서기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년)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조 25년(1647년) 능비를 세우고 고종 15년(1878년)에는 숭선전이란 호를 내리고 침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숭선전 제례는 지방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로왕비릉 : 사적 제74호로 수로왕비는 원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이름은 허황옥이다. 수로왕 7년인 서기 48년에 16세의 나이로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하여 왕비가 되었고 서기 18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규모는 길이 18m, 폭 6m, 높이 약 5m로 현재의 능은 조선 인조 25년(1641년)에 수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왕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중 두 아들을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구지봉 : 사적 제429호로 신라 유리왕 19년(42년)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 왕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가야문화의 출발지 이자 고대 국문학상 중요한 서사시인 '구지가'가 남아 있는 곳이다.
2001년 3월 7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원래는 거북이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이라 불리었는데 현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편으로 쪽 내민 것이 거북의 머리모양이다. 1908년 참봉 허선이 세운「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란 석비가 있으며 석비의 남동쪽에 있는 지석묘의 상석위에 「구지봉석」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양동리고분군 : 사적 제454호로 가곡부락 뒷산에 위치한 양동고분군은 삼한 및 삼국시대 무덤 유적지로 전체규모는 약 3만평으로 추정되며 김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이 고분군은 지하에 무덤이 중복된 상태로 조밀하게 설치되어 매우 복잡한 배치상태를 보여주며, 시기적으로 가야시대 전 기간 동안 걸쳐 조성되었음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다. 가야철기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토기, 청동기, 구슬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외국과의 교섭, 교역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 전래민속
㉠ 김해석전놀이
모든 민속놀이가 그러하듯 우리고장의 석전놀이 역시 최초의 근원은 알 수가 없지만 원시시대 부족들이 적으로부터 자신들의 방어목적으로 돌을 무기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석전놀이가 문헌상으로 나타난 것은 고구려시대 전투에서 돌팔매질을 이용했음과 신라에서는 하나의 조직된 군사집단으로 “석투당(石投螳)”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전투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는 석전사(石戰士)의 활약상이 크게 돋보인다. 조선 중종 5년(中宗 5年)에 삼포(三浦)(부산포, 염포, 제포)에 거주하던 왜인(倭人)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김해(金海)의 석전사(石戰士)들이 전라도까지 원정하여 왜구 토벌에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음이 동국여지승람에 명시되어 전한다.
이렇듯 무기가 근대화 되지 못했던 시대에 전투수단으로 이용 되었던 돌팔매질이 하나의 놀이로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조선시대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김해지방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경부터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성(城)의 남쪽지역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좌, 우부(左, 右部)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기상을 돋우고 돌을 던져 상대편을 공격하는데 마치 돌비(石雨)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사상자가 생겨도 승부가 가려질 때까지 싸웠다고 하며 음력 5월 단오날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석전놀이는 김해의 전통 민속놀이로 이어져 왔으나 경술국치 후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혼 말살정책으로 금지시켰다.
□ 축제
△ 가야문화축제
4월말에서 5월초까지 열리는 축제로 가야문화를 창의적으로 재현하는 프로그램 개발과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 개발에 초점을 맞추어 기획된 “가야문화축제”는 찬란했던 가야문화를 느낄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 의의
가락국이 492년간 존속한 동안 토기, 철, 동 등을 생산하여 생활용구, 무기등을 제작하여 이웃 일본, 낙랑, 중국 등에 수출하여 국제무역을 시작하면서 찬란한 문화민족임을 과시했다. 이러한 찬란한 문화를 가야문화축제를 통하여 김해 시민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고 더 나아가 세계만방에 가야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함.
㉡ 유래
가야문화축제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을 건국하여 500여 년간 철기문화와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옛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의 얼을 되새기며 이를 통해 김해 시민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고 더 나아가 세계만방에 가야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62년부터 수로왕 춘향대제일(음력 3월 15일)에 맞추어 개최한 가락문화제와 가야문화유산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목표로 2년간 개최해 온 가야세계문화축전을 통합하여 2007년에 새롭게 단장된 축제임
㉢ 소개
가야문화축제는 6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를 바탕으로 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김해시의 역사문화 축제로서 국내·외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탄강하여 가야를 건국하였고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과 결혼하였는데 이는 한반도 역사 최초의 국제 혼인이었다. 가야는 일찍부터 토기와 철기 문화의 발달로 중국, 낙랑, 일본 등 이웃 나라들과 교역하며 동북아시아 국제 교류의 중심지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유구한 역사와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가야문화의 발상지 김해는 가야문화축제를 통하여 가야 문화를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며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제4의 제국 가야가 존재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 김해분청도자기 축제
옛 가야국 선인들이 사용한 가야토기에서 발전한 김해도자기를 관광 상품으로 육성, 발전시켜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도자기 축제가 매년 10월 말경에 개최되고 있으며, 행사기간에는 전통 가마를 행사장에 설치하여 불을 지펴 관광객에게 도자기 생산과정을 보여주고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현장에서 직접 경매 판매한다.
또한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내가 만든 도자기 코너와 진열된 도자기를 직접 골라 진품일 경우 본인이 가져가고 불량인 도자기를 고를 경우 그 자리에서 깨뜨리는 진품명품 찾기 코너는 축제행사의 즐길 거리를 제공하며 행사기간 중에 도자기를 생산원가에 판매하고 있다. 10월말에 6일 동안 진행된다.
㉠ 유래
경기도 이천의 청, 백자나 전남 강진의 청자축제와 달리 한국도자기 사상 가장 한국적인 미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는 분청사기축제로 치러집니다.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인 15, 16세기에 번성했던 생활자기의 하나로 투박하지만 형태와 문양이 자유롭고 표현이 분방하면서도 박진감 넘쳐 서민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도자기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약 2000년 전 가야시대의 맥을 이어 발전하기 시작한 김해지역의 분청도자기는 조선시대부터 생활자기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도공들이 차츰 그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분청사기가 김해지역에 다시 선보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가야토기 2천년 역사의 향기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도공과 학자들을 하나 둘씩 불러 모으면서 복원작업이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김해는 잃어버린 분청사기의 빛과 색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대의 분청사기 도예촌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약간 모자라고 못생긴 듯하면서도 완숙한 조형미, 쓸쓸한 듯 따스한 담황색 살결이 한없이 그윽한 분청사기가 4백년 세월을 거슬러 오늘날에 새롭게 부활한 것입니다.
㉡ 축제소개
도자기 축제는 그래서 "흙에 혼을 담는사람들" 이라는 주제로 치러집니다. 주요행사로는 축제성공기원제, 불꽃놀이가 전야제 행사로 개최되며 행사 마지막 날 전통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경매로 판매하며 전통가마 불지피기, 도예교실운영, 학생도자기경연대회, 내가 만든 도자기, 진품명품 찾기 코너 등이 개최되며 도자기홍보관과 가야토기재현 전시관도 설치하여 많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전통가마불지피기에서는 도자기의 소성 및 생산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내가 만든 도자기코너에서는 도자기를 직접 빚어보거나 초벌구이한 도자기에 자신의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넣어 관광객이 원할 경우 도자기를 구워 배달해 주기도 합니다.
새로 신설된 진품명품찾기코너에서는 고가의 도자기를 무상으로 가져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코너로 진품과 불량품을 섞어 전시된 도자기를 관광객이 직접 골라 진품을 찾을 경우에 무상으로 가져가고 불량품을 찾을 때는 그 자리에서 도자기를 깨뜨리는 행사를 합니다.
또한 축제기간 중 도자기는 평상시 보다 30%~40% 싼 가격에 살 수 있으며 주변 도예공장 견학도 가능하다. 행사장은 김해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진례면 송정리에서 개최됩니다.
㉢ 김해도자기 소개
분청사기는 청자, 백자와는 달리 생활자기로서 민족자기로 표현되어 14세기부터 15세기 중엽까지 다양한 기법으로 전성기를 이루었고, 분청사기를 통해 우리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갖게 되었다.
또한 가야인의 후예인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조상의 슬기와 얼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96년부터 매년 10월경 진례면 송정리 일원에서 김해도자기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분청사기의 유약은 천연에서 얻을 수 있는 생유로서 장석과 소나무를 태우고 난 뒤 얻은 재와 석회석, 점토 등의 조합이며 주성분은 장석이다. 그러나 어느 지방의 흙을 쓰고 어떻게 태토와 유약을 조합하느냐에 따라 태토의 질과 표면 색상에 차이가 생긴다.
그리고 분장기법은 일곱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상감기법, 인화기법, 박지기법, 음각기법, 철화기법, 귀얄기법, 담금분장기법이 있다. 따라서 가야문화의 발상지인 우리김해의 도예인들은 가야토기를 재현하기 위해 도자기의 깊이 있는 연구와 활발한 생산 활동을 통해 한국도예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흙에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 혼을 담은 불을 가마에 지피면서 구워낸 분청사기는 현재 김해의 특산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우리는 생활도자기에서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선조가 물려준 문화를 지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연구하고, 새로운 기술과 예술성을 창출하기 위해 전 도예인들이 혼을 바쳐 우리고장 도자기의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도자기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지극정성으로 흙을 빚어 3일 밤낮 혼신을 다하여 불을 사르면 잿빛 가마 속에서 그 흙은 빛의 도자기로 부활한다. 도자기축제를 일러 "흙과 불과 인간 혼의 잔치" 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 진영단감축제
매년 11월초 3일간 진행된다. 김해의 특산물인 단감의 홍보 및 판매를 위한 축제로 지역민의 향토애고취 및 고품종 생산을 촉진하여 단감 사업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1985년부터 매년 실시하는 가장 오래된 농산물 축제이다.
㉠ 특성
진영지방은 난지과수인 단감을 재배하기에 알맞도록 연평균 기온이 14도씨를 항상 유지해주고 있으며 산이 병풍처럼 동서로 가로 지르며 주산지대를 감싸고 있어 남쪽지방에서 흔히 받고 있는 해풍 및 태풍으로부터 보호되고 있고 토양의 보수력이 뛰어나 가뭄 피해도 덜 받는 지역이다.
특히 서리 오는 시기가 늦어 생육기간이 다른 지역에 비해 10일정도 길어 일조량이 풍부하며 단감 재배에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이다. 또한 80년간에 이르는 재배역사가 말해주듯 기술 수준이 매우 높고 토성이 식양토 지대여서 뿌리가 깊고 넓게 분포되어 있어 과실의 당도 및 무기 성분 함량이 월등하게 뛰어나 오래전부터 단감의 명산지로 자리 잡아 오고 있는 곳이다.
△ 김해예술제
매년 10월 중순경에 열리는 축제이다.
㉠ 유래
1980년 이전에는 가락문화제와 병행, 실시하여 왔으나, 1980년부터 독립, 시행하고 있으며, 매년 특정한 주제를 정하여 단위지부별로 작품을 구성, 발표하고 있으며, 우리시에서는 이러한 예술인들의 작품들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하여 시민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 지역예술인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승화, 명실공히 김해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김해예술제는 지역예술인들 간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함은 물론, 지역예술인들의 창작의욕을 높이고 양질의 순수 문화예술 작품들을 시민들에게 선보이는 우리지역의 유일한 순수예술축제이다.
김해예술제는 우리시가 주최하고 한국예총 김해지부가 주관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예총 김해지부에는 음악협회, 미술협회, 문인협회, 연극협회, 연예협회, 무용협회, 국악협회, 사진작가협회 등 8개 단위지부가 있어 그동안 김해예술제를 통하여 많은 인재 발굴 및 실력 배양에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다.
△ 연지축제
매년 4월 벚꽃 개화시기에 열리는 축제로 연지공원에서 숲과 호수로 이어지는 아늑한 공원 분위기와 봄의 정취가 어울어지는 공연과 전시, 체험마당을 구성하여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축제이다.
연지 봄 축제는 우리시가 주최하고 한국예총 김해지부가 주관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우리지역의 예술단체, 대학 동아리 등의 주 무대를 통한 음악, 무용, 연극 등 공연과 호수 주변 산책로를 따라 펼쳐진 그림, 시, 사진, 야생난 등의 전시행사, 각종 공예작품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체험마당 등 시민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연지 축제는 우리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많은 축제와는 달리 체험위주의 프로그램으로 운영,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마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