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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동북쪽의 심산 준령에 둘러싸인 밀양은 이곳으로부터 발원한 풍부하면서도 맑고 깨끗한 물을 서남쪽 낙동강으로 흘려보내며, 넓은 계곡형 하천주변에 널려 있는 자정력 높은 생태환경의 영향으로 주변의 오염원에 대해 저항력이 강한 자연성을 가지고 있다.
밀양강의 중 ․ 하류 지점은 자연적 사행하천으로 이루어져 하천 유동활동에 의한 생태생산성이 높은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하천의 소비지구에 해당되는 밀양시의 도시중심지가 자리잡고 있어 하천생명 재생산에 계속되는 부담을 주고 있다.
경남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경북 청도군을 경계하여 주변 6개 시군에 포용되어 있고, 동·서·북 3면은 심산준령에 위치해 있으며 남으로는 낙동강이 유하하여 동북쪽이 높고 서남쪽이 낮으며 동서의 길이가 남북의 길이보다 큰 지형 형태를 이루고 있고 서북쪽은 밀양의 진산인 화악산이 우뚝 솟아 서북풍을 막아 주며 동북쪽으로는 재약산(1,189m)을 중심으로 하여 가지산(1,240m)을 주산으로 하고 남쪽은 천태산(631m), 서쪽으로 운문산(1,188m), 구만산(785m), 철마산(630m)을 산맥으로 엮어 있으며, 밀양강이 북에서 남으로 합류하여 강유역 토질이 비옥하고 농업이 발달되었다.
태백산맥의 제2맥이 남으로 뻗어 경북, 경남의 경계선상에 이르러 화악산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곧 밀양의 진산이요, 동쪽으로는 실혜, 재약, 천태, 만어의 여러 산들이 겹겹이 이루었다. 서쪽으로는 도리산과 태봉이 솟아 있으며, 남쪽에는 종남, 덕대의 여러 산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낙동강이 북에서 흘러와 밀양시의 서쪽을 적시며, 초동·하남·삼랑진의 서쪽 경계를 이루고 남류하는데 현풍 비금산 및 청도 운문산에서 발원한 북천수와 실혜산 및 재약산에서 발원한 동천수가 각각 북쪽과 동쪽에서 흘러 내려와 합하여 응천강(남천강)이 되어 밀양의 중앙을 관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가고 화악산에서 발원한 내진천이 서남쪽으로 30리를 흘러 역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북동쪽의 가지산, 북서쪽의 화악산 지맥에 접하여 있으면서 동쪽의 재약산과 남서쪽의 종남산을 등지고 계절풍의 영향을 받고 있는 편이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관계로 연평균 기온이 12.9 °C로 비교적 온화하며 연평균 습도는 연간 69%로 국내의 평균습도에 속할 뿐 아니라, 풍속은 연간 1.6m/sec로 동계의 계절풍은 북북서 내지 북동풍이 주축을 이루며, 하계의 계절풍은 남동, 남서풍이 재약산과 종남산의 영향으로 극히 적게 나타나고 있는 경향을 보일 뿐 대체로 일반적이다.
그리고 연평균 강수량이 1360.0mm로서 우리나라 기후 구분에 따르면 남부평지 다우형으로 6월, 7월, 8월 3개월의 우량이 1년 우량의 65%로 우기를 차지하는 한편, 하계를 제외한 춘·추·동 기간은 건기를 형성하며, 하계는 강우가 많고 동계는 비가 적은 것이 또한 특징이다. 밀양은 다같은 기후조건으로 작물재배는 물론 인간생활을 영위하기에 매우 적합한 천혜의 기후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사회형성 현황 |
□ 역사
삼한시대 가락국에 속하는 변지 24개국 중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태동하여 삼국시대인 신라 경덕왕 16년(757)때 ‘밀성군’으로 불리었다가 고려시대 성종 14년(995)때는 ‘밀주군’으로 개칭되었으며 공양왕 2년(1390)때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들어서 주민의 호수가 1000호 이상이 되면 ‘도호부’를 만든다는 기준이 생기면서 ‘밀양도호부’로 다시 한 번 승격되었따. 이때부터 밀양은 나라의 중요지역으로 성장하였고 고종 33년(1896)경상남도 밀양군으로 근대사와 연결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밀양시’로서 오늘의 경쟁력 있는 지방자치단체로 자리하고 있다.
□ 교통
부산과 대구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부선 철도가 시의 중앙부를 관통하고 경남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KTX가 정차하고, 신대구 부산 고속도로와 국도 24, 25호선의 확포장으로 명실상부한 영남의 교통중심도시로 발돋음 하였으며 인근 대도시인 창원(34.3km), 마산(45.2km), 울산(77.1km), 부산(79.1km), 대구(85.4km)를 연결하여 명실상부한 영남의 교통중심지이다.
삼랑진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고 있는 경전선 철도가 분기되어 나가며, 또한 신대구 부산 고속도로 개통과 국도 24,25호선으로 부산, 대구, 울산, 마산, 창원 및 창녕으로 통과하는 도로가 시의 중심부를 통과하고 있어, 시의 각 지역과 지방도 및 소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그래서 일찍이 근대화 초기부터 인근지방과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 산업
△ 농림수산업
농경지 면적은 17,505ha인데 농가는 12,223호이고 농가인구는 31,551명이다. 주요 생산 농작물은 벼, 단감, 풋고추, 들깻잎, 사과, 딸기, 대추, 포도 등이다. 2006년도 작물별 식량 생산 현황은 미곡이 7,128ha에 33,400톤이 생산되며, 맥류가 1,849ha에 5,473톤, 두류 753ha에 1,047톤, 서류 806ha에 21,674톤, 잡곡은 152ha에 325톤이다.
또한 밀양은 넓고 비옥한 농토와 따뜻한 기후조건으로 시설원예재배가 크게 발달되었다. 시설채소 재배현황을 보면 풋고추가 604ha에 36,515톤, 딸기 622ha에 19,249톤, 들깻잎 199ha에 10,199톤, 무 79ha에 2,167톤 수박 214ha에 7,342톤, 기타가 450ha에 11,250톤으로서 총 2,162ha에 88,362톤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과수재배현황으로는 단감이 1,137ha에 14,023톤, 사과 597ha에 12,149톤, 대추가 612ha에 1,578톤, 포도 262ha에 4,320톤이며, 기타가 497ha에 4,877톤이 생산되어 총 3,073ha에 36,905톤이다.
축산현황으로는 한우가 2,302가구에 20,742두, 젖소 16가구에 1,060두, 돼지가 69가구에 62,446돈, 닭이 234가구에 512,409수이다. 총임야면적은 51,998ha에 국유림이 1,807ha, 공유림 2,973ha, 사유림이 47,218ha이다.
수산업에 종사하는 어가는 2006년말 105가구이며 어민은 351명이다. 어선은 동력선이 78척에 38.90톤이고 무동력이 10척에 1.37톤이다. 주로 붕어, 잉어류, 뱀장어를 잡고 있다.
△ 광공업
2006년말 총 254개 업체로 현재 유형별 기업현황은 300인 이상 대기업은 1개 업체에 402명의 종업원이 고용되고 있으며, 30인이상 중소기업은 19개 업체에 2,393명, 기타 소기업은 234개 업체에 1,669명이 고용되어 있다. 업종별로는 1차금속에 48개 업체, 비금속 46개 업체, 섬유 28개 업체, 화학 27개 업체, 목재(인쇄) 14개 업체, 음식료품 55개 업체, 기타가 36개 업체이다. 농공단지현황을 보면 4개 농공단지에 687,490평이 조성되어 있으며, 가동업체가 64개 업체에 2,999명이 고용되어 있다.
△ 상업과 서비스업
상설시장 1개소와 정기시장은 5개소이며, 석유 및 가스 판매업소현황은 주유소가 70개소, 석유 판매업소 38개소, 가스충전소 4개 업소, 가스 판매업소 38개 업소 등이 있다.
문화자원 |
□ 설화
△ 나찰녀 다섯과 독룡
오랜 옛날(가락국 시대) 이곳에 살던 나찰녀(사람을 잡아먹는 鬼女의 이름) 다섯과 독룡이 사귀면서 횡포를 일삼다가 부처님의 설법으로 돌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때 큰 홍수를 따라 동해 바다에서 올라온 수많은 물고기들도 함께 돌(종석)로 변해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 있다.
㉠ 현재의 모습
만어사가 있는 계곡을 따라 수많은 바위들이 일제히 머리를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는 바위들이 존재합니다. 신기한 것은 이 바위들을 두드리면 2/3 가량이 종소리와 쇳소리, 옥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 만 마리의 고기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인연이 다하여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이 살 곳을 물어보니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의 터다"라고 했다. 이에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이곳에 와 쉬니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바위로 변하고, 수많은 고기떼는 크고 작은 화석으로 변했다고 한다.
㉠ 현재의 모습
현재 미륵전 안에 있는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은 용왕의 아들이 변한 것이라고 하며, 여기에 아이를 못 갖는 여인이 기원을 하면 득남할 수 있다고 전한다. 미륵전 아래에 돌무덤이 첩첩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고기떼가 변한 것이라 하여 만어석(萬魚石)이라고 하며,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 창건 이후 신라의 여러 왕이 이곳에 와 불공을 드렸다고 하며, 1180년(명종 10)에 중창하고, 1879년(고종 16)에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미륵전·삼성각·요사채·객사 등이 있고, 이밖에 만어사3층석탑이 남아 있다.
△ 아랑이야기
이조 명종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사백여 년 전의 일이다. 밀양부사로 부임한 윤부사에게는 아랑이라는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아랑의 이름은 東玉인데 자태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 뭇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랑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와 같이 살았다. 어느 달 밝은 사월 십육일, 기망일이었다
유모가 아랑에게 달도 밝고 좋은 날에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아버님에게 허락을 받아 영남루로 달구경을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랑은 윤부사에게 허락을 받고는 달구경을 나왔다. 아랑이 영남루 능파각 쪽으로 올라갈 무렵 유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갑자기 어떤 괴한이 나타나 겁탈을 하여 하자 아랑은 죽을힘을 다해 항거했다.
괴한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랑을 죽여서 대발 속에 던져 버렸다. 한편 괴한과 공모한 유모는 후환이 두려워 소문을 퍼뜨리기를 "아랑아씨가 호식을 당했다. 범이 와서 물어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안 윤부사는 온 나졸을 풀어서 무남독녀 딸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딸을 잃은 슬픔으로 홧병을 얻은 윤부사는 할 수 없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윤부사가 서울로 올라간 후 밀양에 내려오는 후임 부사마다 그 날로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부임하자마자 죽게 되니 그 밀양부사 자리는 비어 있게 되었다.
이때 글은 뛰어나자 배경이 없어서 급제를 못하고 과객으로 지내는 이진사라는 사람이 영남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아래위로 소복을 하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한 처녀가 나타나서, " 오랜만에 내 원수를 갚아줄 어른을 뵙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하는 것이었다.
이진사는 속으로 놀랐지만 워낙 대담한 사람이라서, "네가 도대체 귀신이냐, 사람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그 처녀가 하는 말이 "나는 아무 때 윤모부사의 딸인데 유모의 꾀임으로 영남루에 달구경을 나왔다가 욕보이려는 괴한에게 죽음을 당해서 대밭 속에 버려졌습니다.
그래서 내 원수를 갚기 위해 새로 부임하는 사또를 뵙고자 했는데, 모두 보자마자 기절해 돌아가시고 오늘에야 좋은 어른을 뵈었으니 내 한을 풀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진사가 네 원수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 처녀는 말을 안하고 자꾸 뒷걸음질 치면서 빨간 깃대를 흔들고 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이진사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이 고을에 부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과거를 보니 급제하였다. 그래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밀양부사를 자원해서 부임하게 되어 그 날 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밖이 소란했다. 신관사또 이진사가 죽은 줄 알고 모두 염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진사는 관속들을 호통하고 전임자를 막론하고 모든 관속들의 명단을 죄다 가져오라고 일렀다. 명단을 쭉 훑어보는데 제일 끝머리에 현직에서 물러난 사람으로 붉을 주(朱)자 기(旗)자 주기(朱旗)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 때 진사는 빨간 깃대 생각이 나서 유모와 함께 그놈을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둘을 추궁하니 결국 모두 자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놈을 앞세워 영남루 대밭에 가서 보니 시체가 칼이 꽂힌 채 썩지도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이부사가 시체에서 칼을 뽑으니 뼈만 남게 되었다. 그 뼈를 거두어 좋은 자리에 묻어주니 그 후로는 밀양 고을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아랑이 지킨 순결의 정신을 기리어 아랑사당을 짓고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4월 16일 모범된 규수들을 뽑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 석골사의 전설
석골사에 상좌스님과 스승인 주지스님이 있었다. 주지스님은 제자인 상좌스님보다 인망과 학덕이 못한 것을 항상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께서도 상좌 스님을 먼저 하늘로 올라오게 했기 때문에 항상 상좌스님을 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좌스님 나란히 걸어가다 상좌스님이 길가 보리밭에서 한창 익어 가는 보리를 손으로 슬쩍 만져본다는 것이 그만 이삭을 훑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본 주지스님은 기회를 놓칠세라 지팡이로 머리를 툭툭 치며 영원히 강철이(지나가기만 하면 초목이 다 말라붙는다는 전설상의 독룡)가 되어라고 주문을 외웠다.
상좌스님은 주문을 풀어 달라 애원을 했어나, 주지스님은 주문을 그치질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상좌스님은 원망에 찬 눈초리로 강철이가 되어 호박소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옥황상제는 주지스님의 술법으로 상좌스님이 강철이가 된 줄은 깜박 잊고 주지스님을 먼저 승천시켰다. 물 속에 갇힌 강철이는 억울함을 누리고 승천하기 위해 부처님의 공덕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보리가 익어갈 무렵, 강철이는 옥황상제에게 승천시켜 줄 것을 간청했지만, 옥황상제는 죄값을 더 치러야 한다며 강철이를 외면해버렸다. 화가 난 강철이가 몸부림을 치며 떠다니는 곳에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져 농작물 수확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자꾸 이런 이들이 되풀이되어 결국 강철이는 승천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승천할 수 없는 강철이의 억울함으로 해마다 창녕 화황산과 삼랑진으로 이어지는 상중에 떠올라 다니며 몸부림을 쳤다.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몸부림이 시작되었고, 강철이가 날아다니는 곳에는 우박이 쏟아져 농작물의 피해가 많아진 것이다. 강철이가 살던 이곳이 호박같이 생겼다고 해서 호박소 또는 구연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이조 때 가뭄이 들 때마다 밀양부사가 몸소 와서 기우제를 지내며 단비가 내리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 벼락바위의 전설
옛날 상남면 마산리 대안골에 돌석이란 불효자식이 있었다.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기는커녕 매일 술과 노름으로 어머니 속만 썩혔다. 그의 홀어머니는 생각다 못해 뒷산 큰 바위 아래에 가서 자식의 행실을 고쳐 달라고 산신(山神)에게 지성을 드렸다.
어느 날, 돌석이는 이웃 마을에서 노름판을 벌이다 돈을 몽땅 잃고 말았다. 돌석이는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겠다며 집으로 달려 왔다. 집안엔 어머니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 보다 뒷산 큰바위 아래 어머니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갔다.
그러나 돌석이가 큰바위 아래로 달려 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행실을 고치려고 지성을 드리다 기진하여 숨이 끊어진 후였다. 돌석이는 싸늘하게 식은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통곡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하늘에서 한줄기 불기둥(벼락)이 떨어지더니 어머니 곁에서 울고 있던 돌석이를 쳐죽여 버렸다.
그 뒤 그의 집 마당 앞에는 그의 참회의 눈물을 상징하듯 우물이 하나 생겼는데 이를 가리켜 체샘이라 하고 어머니가 신령님께 지성을 드리던 바위를 벼락바위라 불렀다.
△ 시례 호박소의 전설
단장면 골짜기에 시례 호박소라는 沼가 있는데, 그 소에 용이 한 마리 들었다는 유래가 있다. 옛날 그 골짜기에 이미기(이무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떤 선생 밑에서 수학했는데 어찌나 영특한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였다.
하루는 제자가 저녁에 "오줌누러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하자 스승은 허락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도중에 깨어 일어나 보니 아직도 제자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여서 선생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뒤를 밟아보기로 하였다,
사흘째 되는 밤 한시경에 이르자, 선생이 수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제자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뒤를 밟아보니 한 마을에 있는 소로 가더니 곧 물에 들어가 노는 것이었다. 선생이 유심히 살피니 분명 그 제자는 사람이 아니고 이무기였다.
그가 한참 물속에서 놀다가 나와서 다시 둔갑을 하여 사람으로 되돌아오자, 선생을 급히 돌아와 자는 척하였다. 얼마 후에 제자가 돌아와서 슬그머니 옆에 누워 자는데, 선생이 몸을 만져보니 몸이 매우 싸늘하였다. 그때 마침 마을에 비가 오지 않아 무척 가물었는데 선생은 옛말에 "사람이 용이 되면 가문다."는 말이 있듯이 아마도 그 제자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선생에게 찾아와 비가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간청하자 선생은 제자를 불러서 "애야, 백성들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데 네가 비 좀 내리게 할 수 없느냐?"라고 했지만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하면서 제자는 시치미를 떼고 거절하였다. 그러다 선생은, "네가 무슨 재주가 있는지 밝히지 않아도 되니 비만 내리게 해다오." 이렇게 계속 제자를 재촉하였다.
거듭되는 선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승낙하고 붓글씨를 쓰다가 먹을 손가락에 찍어 하늘에 튕기자 먹비가 막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을 이 제자는 옥황상제가 오년간 수양하라는 명을 내린 이무기였다. 그 이무기가 명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하자 옥황상제는 저승사자를 내려보냈다. 하늘에서 뇌성병력이 치며 선생 앞에 저승사자가 나타나 "여기 이미기라는 사람이 있느냐?" 묻자 이미기는 선생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선생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뒷산에 이미기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갑자기 그 나무에 벼락이 내리치고는 날씨가 다시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 후 아무도 이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등천을 못해서 그 길로 시례 호박소로 들어간 것이라고도 한다. 간혹 선생이 그 소로 찾아가면 이무기가 눈물을 흘리더란 이야기가 전한다.
△ 철화방담
조선사신인 사명당이 생불이 분명하다 생각하여 왜인들이 시험을 하는데 구리집을 짓고 사명달을 방안에 앉게한 후에 문을 잠그고 사면으로 숯을 쌓고 대풀무질을 하니 불꽃이 일어나며 겉으로 구리가 녹아 흐르니 “아무리 술법이 있는 생불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라고 믿었다.
사명당이 이 간계를 알고 사면 벽상에 서리상자를 써붙이고 방석 밑에는 얼음빙자를 써넣고 팔만대장경을 외니 방안이 빙고 같은지라 왜왕이 “조선 생불의 혼백이라도 살아남지 못하였으리라”하고 사관을 명하여 문을 여니 생불이 앉았으되 눈썹에는 서리가 끼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얼었다고 한다.
□ 문화재
△ 표충사 청동은입사 향완
국보 제 73호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향로로서 1957년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국내외를 통틀어 7좌밖에 없는 동제(銅製) 향로 가운데 하나이다.
향로에 도문(圖文)을 음각하고 그 음각한 홈 속에 은사(銀絲)를 메꾸어 넣어서 장식하는 소위 은상감(銀象嵌)의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완형의 몸체와 둥근 받침을 가진 대좌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향로의 몸체 둘레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있어서 이 향로의 시대와 유래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매우 귀중하다.
"大定十七年丁酉六月八日 法界生亡共增菩提之願以鑄成靑銅含銀香완一副重八斤印棟樑道人孝初通康柱等謹發至誠特造隨喜者射文"
(대정17년정유6월8일 법계생망공증보제지원이수성청동함은향완일부중팔근인동량도인효초통강주등발근지성특조수희자사문)
명문에 나타난 대정17년은 금(金)나라의 년호로서 고려 명종7년(1177년)에 해당하고 명문의 호칭을 그대로 따라서 이름을 청동은입사 향완이라고 한 것인데 상부 잎새부위에는 6자의 범자문(梵字文)을 일정한 간격으로 한자씩 상감하고 글자와 글자 사이에는 서운문(瑞雲文)으로 장식하고 있다.
몸체의 바깥 측면에는 역시 같은 간격으로 동심원 속에 4자의 범자(梵字)를 배치하였으며 높은 굽다리 둘레에는 한 마리의 큰 용을 상감해서 주장식으로 삼았고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넣고 굽다리 윗부분에는 여의주문(如意珠文)을 장식해서 상하부의 균형을 얻었으며 크게 번거롭지 않은 제한된 의장효과(意匠效果)를 거두고 있다.
△ 보물
㉠ 표충사 삼층석탑
보물 제467호로 표충사(表忠寺) 경내에서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들어서면 만일루(萬日樓) 앞 마당에 있는데, 기본적인 양식이 신라통일시기의 석탑 유래를 따르고 있는 단층(單層) 기단(基壇)의 3층석탑(三層石塔)이다.
조선조 숙종 3년(1677년)에 작성된 『영정사고적기(靈井寺古蹟記)』에 의하면 현재의 표충사가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인도의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창건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의 조성년대도 이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기단(基壇)의 형식은 단층(單層)이나 7매(枚)의 두꺼운 판석(板石)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24cm 정도의 제법 높은 2단의 각형 받침이 마련되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를 형성하므로써 상하층 기단의 효과를 살리고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屋身)은 대체로 높은 형태를 보이고 옥개석(屋蓋石)은 첫층부터 차례로 체감되었으며 추녀밑은 수평(水平)을 이루고 낙수면(落水面)은 우아한 경사를 이루었다. 옥개석(屋蓋石)의 머리에는 풍경(風磬)을 달아 운치를 살렸고, 상륜부(相輪部)에는 1m 남짓한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있고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등이 있으나 그 가운데는 뒤에 보수(補修)된 흔적도 남아 있다. 이 탑(塔) 옆에는 석등(石燈)도 1기(基)가 서 있으나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 천황사석불좌상
보물 제1213호로 밀양 얼음골에 있는 천황사(天皇寺)의 석불좌상(石佛坐像)은 광배(光背)만 없을뿐 대좌(臺座)와 신부(身部)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는 오른 다리를 뒤로 올린 향마좌(向魔座)인데 불상(佛像)의 얼굴 부분이 수정되어 있고, 손의 모양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모습으로 수리되어 있으나 우견편단(右肩偏袒) 법의(法衣)의 U자형의 층단식 주름이나 전체적인 형태를 볼 때 본래는 두손을 가슴 앞에서 맞잡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불상의 대좌(臺座)는 우리나라 조각에서는 처음 보이는 독특한 형태인 사자좌(獅子座)인데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된 대좌(臺座)의 상대는 둥근 원판형 위부분을 약간 높여 정교한 연주문(蓮柱文)을 새겼으며, 그 아래로 활짝핀 단관 연꽃무늬를 두겹으로 새긴 중엽(中葉) 연화문(蓮花文)을 보여주고 있다.
중대는 7cm 높이의 얇은 것으로 둥근 원형받침형태인데 두줄의 띠를 세기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예이다. 하대는 아랫 부분에 복관연화문을 새겼고 이 위로 사자 11마리를 환조로 새기고 있는데 정면에는 중심을 파낸 받침이 있어 향로 같은 공양구를 끼우던 받침으로 생각되고 사자는 대좌 안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 사자좌(獅子座)는 당대의 최고 일품으로 평가된다.
㉢ 숭진리 삼층석탑
보물 제468호로 이 탑(塔)이 속했던 사찰의 조성년대는 알 수 없으나 수법과 양식으로 보아 고려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층(單層) 기단(基壇) 위에 이루어진 3층석탑(三層石塔)이다.
1966년 문화재지정 신청을 위한 실측조사 당시에만 해도 지면 위에 돌무더기가 쌓여 기단(基壇)의 면석(面石) 이하는 매몰(埋沒) 되어 있었고 3층 옥개석(屋蓋石)은 땅위에 떨어져 팽개쳐져 있었으며 탑(塔)도 북쪽으로 기울어져 보존상태가 매우 나빴으나 지면을 정리하고 해체 복원(復元) 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지대석(地臺石)은 4매로 구성하였고 기단(基壇)의 면석(面石)도 4매의 판석(板石)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특이한 것은 왼쪽 면석의 한 하부 귀퉁이에 석재로 목침형(木枕形) 받침이 끼워져 있는 것이다.
탑신부(塔身部)의 옥신(屋身)에는 장식이 없고, 각층의 높이는 55cm, 20cm, 7cm로 매우 심한 체감비율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각층 모두 3단으로 주각되었고 추녀밑은 직선을 이루었으며 낙수면(落水面)은 비교적 급한 경사를 이루었는데 옥신석(屋身石) 윗면 중앙에는 직경 7cm, 깊이 10cm의 원형 찰주공(刹柱孔)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옥개석(屋蓋石)의 찰주공(刹柱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앙화(仰花), 보륜(寶輪)등의 장엄(莊嚴)을 갖추었던 석탑(石塔)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소태리 오층석탑
보물 제312호로 이 5층석탑(五層石塔)은 고려예종 2년(1109년)에 신라 호국사찰인 황룡사(皇龍寺) 출신의 승려 중대사(中大師) 학선(學先)이 이 탑이 속했던 절(확실한 절의 이름은 전하는 바 없고 다만 구전으로 천주사(天柱寺), 천축사(天竺寺), 또는 죽암사(竹岩寺)로 불리워졌다고 함.)의 주지로 있으면서 금당(金堂)과 함께 조성한 것이다.
1919년 3월에 이 탑의 상륜부에서 가로 60cm 세로 40cm의 백지에 반초서로 묵서한 "당탑조성기(堂塔造成記)"가 발견된바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
乾統玖年三月九日記
至今二百六新龍二年良中律業皇龍寺沙門惠照亦 住特爲乎矣亦中同寺依止中大師學先亦至今八 壬午年入寺火香爲只丁亥年元發心爲只金堂一問佛坐 造石塔五 新造鍮銅幷六十二斤 金堂塔名 香盧香盒幷梁捌斤五兩鐵物一千百斤 三實內鍮鏡一入十一斤幷以施行錄由 住特主法 儀中大師學先 玆上辛沖次辛先次應連次元先等亦造成日施行 同寺前住特尙資法護 重大師住特甘年
(건통구년삼월구일기지금이백육신용이년양중율업황용사사문혜조역 주특위호의역중동사의지중대사학선역지금팔 임오년입사화향위지정해년원발심위지금당일문불좌 조석탑오 신조유동병육십이근 김당탑명 향노향합병양팔근오양철물일천백근 삼실내유경일입십일근병이시행록유 주특주법 의중대사학선 자상신충차신선차응연차원선등역조성일시행 동사전주특상자법호 중대사주특감년)
이라고 이두문자(吏讀文字 : 傍點)를 혼용한 문장형태로 적혀 있는데
이 조성기를 작성한 연대인 건통(乾統) 9년은 중국 요(遼)나라 천조제(天祚帝)의 연호로서 고려 예종4년(1109년)에 해당되며, 이 해에서 206년전 즉 신라 효공왕 8년(신용2년)에 황룡사 사문 혜조가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는 것과 또 황룡사에 있던 중대사 학선이 8년전에 이 절의 주지로 와서 정해년(예종 2년 : 1107년) 정월에 발심하여 금당 1칸과 불좌를 만들고 5층 석탑을 세웠는데 구리와 놋쇠를 아울러 62근을 사용하였으며, 향로와 향합 등 절에 들인 물목(物目)과 재료의 사용량 등을 적고 불사에 참여한 주지이하 스님들의 법계(法階)와 법명(法名)을 열기했다.
㉤ 밀양영남루
보물 제147호로 영남루가 최초로 창건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그 전부터 있었던 작은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하여 개창하였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1844년(현종 10년)에 재건한 것으로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3대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다.
영남루는 응천강(凝川江)에 임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이 5칸이요, 측면이 4칸으로서 간격을 넓게 잡은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였으므로 누마루가 매우 높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연결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陵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공포(공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나타낸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안둘레의 높은 기둥위에 이중의 들보(樑)를 가설하고 주위의 외둘레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충량은 용의몸(龍身)을 조각하고 천장은 지붕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 무봉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93호로 무봉사(舞鳳寺)는 영남루(嶺南樓)의 전신인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암자로 전해오고 있으나 문헌상의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고 다만 이 불상(佛像)과 광배(光背)의 조각수법과 양식이 신라통일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됨에 따라 신라시대의 명찰(名刹)로 전해지고 있는 영남사(嶺南寺)의 유물로 추정된다.
화강석(花崗石)으로 만들어진 이 석불(石佛)은 상호(相好)가 원만한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으로서 나발(螺髮) 위의 육계(肉계)가 큰 편이고 두 눈섭 사이에는 백호(白毫)를 끼웠으며, 길상좌(吉祥坐)로 가부좌를 하고 항마촉지(降魔觸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광배석(光背石)은 불상과 같은 재질의 화강석(花崗石)으로 된 보주형광배(寶珠形光背)인데, 상부가 앞쪽으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구부러져 있고 당초문(唐草文), 연화문(蓮花文), 화염문(火焰文)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광배(光背)의 뒷면에는 연화좌(蓮花坐) 위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을 양각(陽刻)하였는데 소발(素髮)의 머리에 상호(相好)는 원만한 편이나 많이 마멸(磨滅)이 되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인상이 뚜렷하지 못하다.
이 불상(佛像)의 특징으로는 채색(彩色)을 한 흔적이 있어서 연구(硏究)해 볼 필요가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 만어사 삼층석탑
보물 제466호로 이 삼층석탑(三層石塔)은 고려 명종 10년(1180년) 경자년(更子年)에 만어사(萬魚寺)가 창건될 때 조성된 단층(單層)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搭身)으로 이루어진 고려시대의 석탑(石塔)이다.
지대석(地臺石)은 4매(枚)로 구성하여 큼직하게 2단으로 각형(角形)의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기단(基檀)의 면석을 받게 하였다. 면석 또한 4매로 이루어져 큼직한 우주(隅柱)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 위에 2매로 구성된 갑석(甲石)이 얹혀있다. 갑석의 두께는 평평하고 엷은 편이며 밑에는 부록(副錄)이 각출(刻出)되어 있고 윗면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그 중앙에 2단으로 각형의 굄으로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屋蓋)가 모두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신(屋身)에는 각층마다 우주형(隅柱形)을 표시하였을 뿐 다른 조각은 없고 비교적 체감율이 안정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각층 받침은 3단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추녀 밑은 수평이고 얇은 편이다. 지붕의 낙수면은 밖으로 볼록한 곡선을 그리면서 급하게 경사를 이룬 다음 추녀에 이르러 거의 수평이 되도록 처리하였으며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은 매우 경미한 편이다. 옥개석(屋蓋石)의 윗면에는 각층마다 각형의 굄이 조각되어 있으나 1.2층에는 1단씩, 3층에는 2단이 있어 각각 옥신(屋身)을 받게 하였다.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모양의 석재가 얹혀 있으나 뒤에 보수된 것으로 짐작이 되고 앙화(仰花)나 보륜(寶輪) 등 다른 장식은 없으며 탑신부(塔身部) 이하는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현상 변경이나 훼손의 흔적은 없다.
△ 사적
㉠ 밀양고법리박익벽화묘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의 밀성박씨 묘역의 능선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는 석인상, 갑석, 호석을 갖춘 방형분으로서, 봉분은 가로 6m, 세로 4.8m, 높이 2.3m이며, 내부 석실(길이 .5m, 폭 1m, 높이 0.8m)의 사방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묘의 축조수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도(隧道)를 갖춘 방형묘라는 점이다. 방형묘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일정 계층에서 유행한 묘제 중 하나이나, 남쪽으로 수도를 설치한 것과 병풍석이 경사지게 설치된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조선전기의 횡구식 석실 중 수도가 확인된 것은 아직 없으며, 묘도와 구(溝)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양식상의 원류에 대한 검토 자료가 된다. 벽화는 화강암 판석 위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먼저 검정선으로 벽화내용을 소묘한 뒤 마르기 전에 주요부위를 적·남·흑색으로 채색하는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부분적으로 퇴락되어 있으나 잔존부분에는 인물, 말, 도구 등 당시의 생활 풍속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1332∼1398)의 휘는 익(翊),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밀성으로 고려말의 문신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소감(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이부중서령(世子貳傅中書令)을 역임하고 한림문학이 되는 등 고려말 팔은(八隱)중 한 분으로,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벽화 발견에 의한 조선초 생활 풍습의 연구 등 고고학적 또는 회화사적 가치 외에 지석(誌石)의 출토로 고려말 문신인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00년도 태풍으로 훼손된 묘역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정밀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 특산물
지장수 황토정 딸기 |
태양광선을 많이 받아 태양에너지를 비축시켜준 황토에 정수물을 붓고 복숭아 나무막대나 또는 과목의 막대로 21회정도 휘저은 후 약 1시간 정도 가만히 놔두면 황토는 가라않고 약간 누런 빛의 물이 위에 뜨게 되는데 이 물을 "지장수"라 함, 이 물을 이용하여 재배한 딸기를 "지장수 황토정 딸기"라고 말함 |
황금실 단감 |
삼랑진 지역의 단감은 점토질인 산을 개간하여 대부분 재배하고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하여 당도 및 단감 고유의 사각사각한 맛이 뛰어나며 퇴비 및 유기질 비료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기 때문에 안전한 먹거리로 인정받고 있음 |
복숭아 |
삼랑진에서 재배되고 있는 복숭아는 일조량이 풍부하고 복숭아 재배에 적합한 기후, 일교차가 큰 관계로 당도가 높으며, 충분한 수분공급으로 과일이 크고 빛깔이과 맛이 좋은 것이 특징임 |
포도 |
삼랑진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캠벨의 품종으로 수확기 만부병 및 열과를 줄이기 위한 비가림시설을 90%이상의 농가가 설치하여 농약살포를 줄이는 저공해 재배로 당도가 높으며 껍질이 얇고 알이 굵어 먹기에 좋으며 게르마늄 함량이 높아 포도의 저장성이 좋음 |
토마토 |
토마토의 붉은 색소성분인 Lycopene(라이코핀)은 세포의 산화를 방지하고 암발생을 억제하는 항산화작용이 베타카로틴보다 약 2배 정도 강력해 암 예방효과가 뛰어남, 특히 구강, 후두, 폐, 자궁경부, 전립선에 발생하는 암 예방에 도움이 되고 열에 비교적 강해 가열요리해도 손실량이 많지 않고 약간의 오일을 첨가하여 섭취하면 매우 좋음, 비타민C 및 베타카로틴과 같은 다양한 효능을 지닌 녹황색채소로 여타 과일 보다 단맛은 떨어지나 토마토에 설탕을 넣을 경우 비타민C를 소모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음 |
□ 향토요리
곶감네 비빔밥 |
밀양시 삼랑진읍 일대에서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향토음식으로 소뼈나 닭 뼈를 고은 물에 밥을 짓는 것이 특징으로 밥맛이 고소하고 영양이 풍부하여 농가에서 손님접대용으로 많이 이용하던 음식이었음 |
호박풀띠죽 |
재래종 늙은호박을 서리 맞은 후에 따서 겨울철에 해먹는 구수한 향토음식으로 밀양의 전 지역에서 많이 해 먹는 음식임 |
재약산 산채비빔밥 |
옛 부터 약초나 산채가 많이 나는 곳으로 이름이 난 재약산에서 자생하는 산채를 이용한 담백한 맛의 비빔밥으로 산채 각각마다 특유의 향과 맛을 지니고 있어 밀양 표충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별미로 꼽힘 |
은어죽 |
은어는 밀양의 토산물로서 남천강과 고사천에서 많이 잡혔으며, 주로 8∼9 월에 강어귀에서 산란하고 민물고기 중에서 제일 깨끗한 생선으로 꼽히며 칼슘이 풍부하고 수박향이 독특해 성장기 어린이나 노약자들에게 특히 좋은 음식임 |
□ 특산물이용 별미요리
깻잎요리 |
깻잎소박이김치, 깻잎부각, 깻잎초김치, 깻잎초밥, 깻잎생일떡, 깻잎죽, 깻잎돼지고기편채, 깻잎말이김치 |
고추요리 |
고추잡채, 고추통김치, 고추산적, 풋고추장아찌 |
사과요리 |
사과시루떡, 사과초밥, 사과돼지고기말이튀김, 사과냉채, 사과돼지갈비찜, 사과컵샐러드 |
대추요리 |
대추인절미, 조란, 대추화전, 대추주악, 대추초, 대추차 |
딸기, 감자, 쌀요리 |
딸기생크림케익, 딸기잼, 딸기쉐이크, 감자자반, 감자장전, 감자크로켓, 인절미 소말이 |
□ 축제
축제명 |
개최일시/ 기간 |
주요내용 |
비고 |
밀양 아리랑대축제 |
매년 4월말 ~5월초 (4일간) |
전야제를 시작으로 문화예술행사, 체험행사, 공연, 전시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는 50여년 역사의 경상남도 대표 향토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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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여름공연 예술축제 |
매년 7월 중순 ~ 8월초 |
연극촌내의 숲의극장, 우리동네극장 등에서 연극을 관람할 수 있는 국제적인 규모의 공연예술축제 |
영남의 알프스내의 얼음골, 호박소, 표충사 계곡, 구만폭포 |
삼랑진 딸기 한마당 축제 |
매년 4월초 |
딸기의 최초 재배지였던 삼랑진에서 매년 봄 개최되는 이 딸기축제는 때맞춰 인근에 만발하는 벚꽃의 향연 속에서 딸기먹기, 딸기 품평회, 공연 등이 개최되어 삼랑진 딸기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알리는 축제로 발전하고 있음 |
삼랑진넷 게시판 통해 신청 |
얼음골 사과축제 |
매년 10월말~11월초 |
풍부한 과즙과 달콤한 향, 사근사근한 맛이 일품인 얼음골 사과르 홍보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어울리는 얼음골 사과축제가 매년 10월말 개최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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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맛나향 고추축제 |
매년 4월초 |
맛나향 고추축제는 유난히 달고 향기로운 무안의 고추를 홍보하고 농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로 고추 품평회, 고추요리 전시 및 시식회등의 행사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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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랑진
산골 색시 같은 밀양강이 선머슴 같은 낙동강을 만나는 지점에 삼랑리가 있다. 세 갈래의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거센 곳이라 하여 삼랑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물길이 왜 세 갈래일까. 현지 주민들은 “낙동강이 아침저녁으로 밀물과 썰물로 밀려오고, 밀양강이 합류하니 세 물”이라고 말한다. ‘삼랑’ 하면 떠오르는 시가 청마 유치환의 <낙동강이여>다.
삼랑은 낙동의 아름다운 ‘여울’이자 ‘목’이다. 유치환 - 낙동강이여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 꽃잎이.... 이하 중략... .... 진실로 인류의 거룩한 예지의 젖줄
△ 만어사의 전설
만어사의 옛 이름은 자시산(일명 자성산) 이라 불리었다. 근처에 옥지(玉池)라는 연못이 있어 못된 독룡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독룡은 성질이 사악하여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모두 뜯어먹고 짓밟아서 농사를 망치게 만들었다.
때는 김해 수로왕 시절이었다. 수로왕은 자시산에 큰 절을 창건하여 그 낙성식에 참석하러 자시산으로 행차를 하였다. 왕의 행차가 낙동강에 이르렀는데 수많은 새떼가 날아와 지저귀는 것이었다.
왕이 저 새는 무슨 새인가 하고 좌우에 물으니. 좌우의 한 사람이 까치라는 새로서 자고로 길조라고 전해온다고 아뢰었다. 왕이 다시 그곳 지명을 물으니 그곳은 아직 이름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수로왕은 그곳을 까치두들-지금의 작원(鵲院)-이라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수로왕의 행차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마침내 자시산에 이르렀다.
이때 인근의 백성들이 몰려와서 왕에게 옥지에 사는 독룡의 폐단을 고하고 퇴치해 줄 것을 청하였다. 왕은 백성들의 간청을 부처님께 기원하였다. 부처님은 수로왕의 기원을 받아들여 옥지의 독룡을 불러 꾸짖었다.
독룡은 부처님의 꾸짖음에 자신은 본시 부처님의 제자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그동안 해코지를 하였다고 하고, 이제 부처님께서 제자로 받아 주신다면 다시는 백성들의 농사를 망치는 일이 없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처님은 쾌히 독룡을 제자로 받아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이 멀리 동해 용궁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곳 용왕의 아들 역시 이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내가 못될 것이 없다 생각하고 수만 명의 물고기 부하들을 이끌고 이 자시산 부처님을 찾아와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자시산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불공을 드리며 불도를 닦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자시산은 만어산이라 이름하게 되었고, 김해 수로왕이 창건했던 절은 만어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만어사 근처에는 물고기 형상의 온갖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그 중에서 특히 큰 바위 하나가 있어 흡사 미륵불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한다.
△ 삼랑 나루터
삼랑은 세 갈래 강물이 부딪혀서 물길이 거센 곳이란 의미를 가진 곳이다. 철로가 들어서기 전 삼랑진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상부 하부 내부 일대가 중심지였습니다.
삼랑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나루인데, 주로 사람을 나르는 일 이외에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면 “조선조 문물의 유통은 수로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해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로 점촌·문경을 지나고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이른 뒤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했다“ 나룻배로 쌀과 소금을 날랐다고 합니다.
특히 가야시대의 김해는 아시아지역을 잇는 중요한 항구로써의 기능도 했다고 한다. 김해까지 많은 배들이 오고갔고 강을 통하여 화물이 운송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랑은 화물을 보관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기록은 2킬로미터 남짓한 곳에 삼랑나루 위로 조창나루, 뒷기미나루가 있다.
뒷기미나루터는 요산 김정한 선생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열차운행이 멈추고 찻길로 쓰이고 있는 삼랑진 철교와 삼랑진교 사이에 있습니다.
삼랑진 철교(통행 중단), 삼랑진교, 신항배후 경전선 철교(현재 통행중)
삼랑 나루터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었고 경전선 철도가 생긴 1905년 이후에 철도가 놓이면서 낙동강역을 가려는 사람들로 삼랑 나루터는 북적였다고 한다. 지금은 삼랑진교와 삼랑철교 사이에는 몇 척의 배가 묶여져 출렁이고 있다. 바로 삼랑 나루터 흔적이다.
오랜 세월을 거슬러 내륙을 넘나들었던 삼랑(낙동강, 밀양강, 바닷물)의 하나인 바닷물은 1987년 하구둑이 막히면서 바다는 차단되고 예전의 삼랑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이전에는 바다에서 잡히는 어종까지 잡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나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이곳을 이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낙동강 나루터 복원사업으로 예전 모습을 찾기를 기대해본다.
△ 작원관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에는 밀양시 문화재자료 제73호인 작원관지(鵲院關址)가 있다. 작원관(鵲院關)은 예로부터 영남지방의 동서와 그리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그 요지를 관리를 하던 관청이 있었으니 바로 작원관이다. 여기서 관(關)은 대문의 빗장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이 문을 통과하는 중요한 길목인 것이다.
경남 지정문화재 자료 제73호 작원
작원관은 여행하는 관원의 숙박의 기능을 담당하는 숙박소(宿泊所)의 기능과 왜적(倭敵)이 침입하여 이 지역을 공격을 한때는 군사적으로 방어의 기능을 하였으며 또한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가 있어 이 나루 출입하는 사람들의 검문과 화물을 검색하는 기능도 동시에 하였던 곳이 바로 작원관(鵲院關)이다.
다시 말해 작원관은 세 가지의 기능인 원(院) 관(關) 진(津)을 다함께 하는 독특한 구조의 관청이었던 것이다.
원(院)의 기능을 살펴보자. 원은 고려시대와 그리고 조선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원에게 숙식의 기능을 동시에 제공하는 곳으로 일종에 나라에서 운영하던 여관(旅館)인 셈이다. 그러나 원(院)이 있다는 것을 좀 더 고찰해 보면 오지(奧地)이거나 관의 영향력 떨어지는 곳이나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관원을 보호하던 곳이 바로 원(院)이다.
때로는 이 지역을 통과하는 사신(使臣)을 접대를 하거나 숙식을 하는 기능도 담당하였으며 세월이 흘러 일반인도 머무름이 허용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신분의 제도와 그리고 각종 제약으로 사용자가 엄격히 제한되는 바람에 그 기능은 점점 쇠태(衰態)해지고 말았던 곳이 바로 원(院)이다.
또한 이 작원관은 충절이 살아 있는 엄연한 유적(遺蹟)이다.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를 역임하였던 밀양부사(密陽府使) 박진 장군이 몰려오는 왜적을 소탕하기위하여 왜적을 맞아 결사(決死)으로 항전(抗戰)을 펼쳤던 곳이 바로 이 작원관이다.
작원관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關)의 기능이다.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는 기능과 외적을 경비(警備)하는 기능이다.
둘째 진(津)의 기능이다.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에 강변에 설치된 나루이다. 나루를 다른 표현으로는 관진(關津) 혹은 진관(津關)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원래는 강을 건너는 왕래자의 검색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관청의 명령전달 기능과 도강(渡江)을 위한 교통기능 그리고 통신기능도 함께 이루어 졌던 곳이 바로 진(津)이다.
작원관에 근처에는 진(津)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제법 남아 있다. 작원관이 있는 행정구역도 삼랑진(三浪津)이다. 이곳 가까이에는 용당나루터 명례나루터 등이 있었다. 작원나루터는 도강을 위한 나루터의 구실뿐만 아니라 화물 전초지 역할을 한 삼랑 나루터에 왜구가 습격하지 않도록 방어하는 부산에서 올라오는 배를 위한 일종의 포구(浦口)역활을 했을 것이다.
양산
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양산시는 경상남도 동남부에 위치하면서 북으로는 울산광역시와 접경하고, 서쪽은 낙동강을 끼고 김해시 ․ 밀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부산광역시와 맞닿아 있다.
양산시의 총면적은 484.16㎢이며, 2읍 4면 3동의 면적은 원동면이 148.12㎢로 제일 넓고 13.77㎢인 중앙동이 제일 작은 편이다. 시의 전체면적에 비하여 평야지는 비교적 적은 편이나 영축산 ․ 원효산 등이 진산을 이루면서 양산천 ․ 덕계천을 발원시켜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수리가 풍부하여 근교농업이 발달해 있다. 또한 유라시아 대륙의 중위도의 동쪽인 한반도의 남동단에 자리잡고 있어 사계절에 대한 감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양산의 최고, 최저기운을 보면 최저기온이 1936년 겨울이 영하 16.7℃로 가장 낮았고, 1993년 겨울이 영하 6.6℃로서 가장 따뜻하였으며, 최고기온이 1983년도 여름이 38.6℃로 가장 높았고 1981년도 여름이 31.3℃로 가장 낮았다.
강수량은 소백산맥 동쪽 기슭에 해당하는 북동기류의 영향을 많이 받아 대체적으로 타 시도에 비해 강우량이 많은 편이며 특히 장마철과 집중 호우 및 태풍이 닥칠 때는 강수량이 많아 인명 피해를 입기도 한다.
눈은 12월 하순경에 내리나 다른 지방에 비해서 눈 오는 날이 극히 적으며 적설량이 적어 생활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사회형성 현황 |
□ 행정조직 및 재정규모
△ 행정조직
구분 |
국 |
단 |
담당관 |
과 |
직속기관 |
사업소 |
출장소 |
읍면동 |
의회 |
가구수 |
3 |
1 |
2 |
21 |
2 |
1 |
1 |
13 |
1국 |
정원 |
계 |
본청 |
91 |
51 |
71 |
176 |
18 | ||
904 |
497 |
△ 예산규모 (단위:억원)
2009(결산추경 기준) |
2010(당초예산 기준) |
증감 | ||||
계 |
일반회계 |
특별회계 |
계 |
일반회계 |
특별회계 | |
6,380 |
5,685 |
695 |
6,012 |
5,360 |
652 |
△5.7% |
△ 인구
인구 |
세대수 |
면적(㎢) | ||
계 |
남 |
여 | ||
250,387 |
126,053 |
124,334 |
91,153 |
485.16 |
△ 산업
공단 |
기업체 | |||||||
계 |
산업단지 |
농공단지 |
업체수 |
종사자수(천명) |
연간매출액(억원) |
연간수출액(억불) | ||
계 |
광업 |
제조업 | ||||||
3 |
2 |
1 |
1,483 |
2 |
1,481 |
43 |
7조 300억 |
17 |
□ 역사
양산은 신라 문무왕5년 삽량주라 불리었고, 경덕왕16년(서기757년) 양주(良州)로 칭하다가 고려 태조23년(서기940년) 양주(梁州)라 하였다.
현 양산의 지명은 태종13년(서기1415년) 양산군(梁山郡)으로 명명, 고종 건양원년(서기1896년) 경상도를 경상남북도로 분리, 경상남도에 배속, 광무10년(서기1906년) 좌이·대상·대화 3개면을 부산부와 김해군에 이속, 울산군 외남·웅상 2개면을 본군에 편입, 융희4년(서기1910년) 외남면을 울산군으로 환속하였다.
일제시대 대정3년(서기1914년) 부산 좌이면 공창 및 북면 녹동·송정 등 3동과 언양 조일리가 양산에 통합되었고, 1973년 동래군 기장·일광·장안·서생·정관·철마 등 6개면이 양산에 통합되었으며 1979년 양산면이 읍으로 승격, 1980년 기장면이 읍으로 승격, 1983년 서생면이 울주군에 이속되었다. 1985년 장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에는 기장·장안 2개읍과 일광·정관·철마 3개면이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이속되었다. 그리고 1996년 3월 1일 현재의 양산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과 들이 좋고 문화 유적이 많으며, 고대로부터 불교 포교지로서 그 명성이 높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곳이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쪽은 낙동강을 끼고 밀양시와 김해시, 동쪽과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금정구에 각각 접하고 있다.
문화자원 |
□ 설화
△ 산막리 유래
양산시 산막동은 천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이다. 이 마을 남쪽 산등성이를 넘으면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반고굴이 있다.
옛날 원효대사를 찾아 이 마을까지 찾아온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요석공주였다. 이처럼 귀하신 신분의 공주가 중을 찾아 머나먼 산골까지 온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원효는 다른 스님들과 달리 불교를 대중화 하는데 힘쓴 승려다. 그러나 이러한 원효의 태도를 다른 스님들은 방탕한 것으로 오해하고서는 원효를 미워했다. 그러나 원효의 재능을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원효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가자 요석공주가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원효는 오직 불도를 닦고 중생들을 보살피는 데만 전력했을 뿐 요석공주의 애타는 구애를 듣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원효가 다리를 건너는데 어떤 사람이 무례하게도 원효를 다리 아래로 밀어넣어 옷을 젖게 한 다음 요석공주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려 입고 쉬어가게 하였다. 그 날 밤의 인연으로 생긴 아이가 바로 뒷날 신라의 위대한 학자였던 설총이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맺은 다음날 홀연히 궁을 빠져나와 수도와 진리탐구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 반고굴에 왔다. 그러자 일거후 무소식에 애가탄 요석공주는 원효를 만나기 위해 설총을 안고 여기까지 와서 산에 막을 치고 지냈다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요석공주가 산에 막을 치고 지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산막리라 하였다고 한다.
△ 자장율사와 통도사
신라 때 자장율사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은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 주었다.
"동국에 부처를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넓은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때 마침 엄동설한이어서 산과 들에는 흰눈이 쌓였는데 꽃이 핀 곳이 어디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장율사는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취산에 이르러 보니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에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 있었다.
자장율사가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 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유명한 통도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칡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내어서 그곳에 세우라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라 생각하고 율사는 곧 그 칡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쉬지 않고 칡꽃을 찾아다니던 중 율사는 양산고을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취산에 이르니 그곳에 큰 못이 있는데 그 못 근처에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있었다.
처음에는 세 송이가 피어 있던 것인데, 한 송이는 먼저 율사가 날려 보낸 오리가 물고 왔던 까닭에 두 송이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근방에는 송죽이 울창하고 봉봉이 열을 지었는데 검푸른 못물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율사는 그 못 가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자장 율사는 얼마 후에 이곳에 절을 세웠으니 이 절이 유명한 한국 제일의 통도사이다.
△ 통도사와 사리탑
신라 때 자장율사는 양산 통도사에다 사리를 받들어 모시고 뚜껑을 돌로 만들어 덮었다. 그런 뒤 어느 날 조정에서는 사자를 보내어 이 절에 참례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사자는 유명한 사리를 친히 보고자 스님들에게 명하여 돌 뚜껑을 열게 하여 보니까 그 곳에는 커다란 두꺼비가 앉아 눈알을 번득이고 있었다.그 뚜껑에는 뒷날 아무개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열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아무개 성이 바로 그 사자의 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리탑의 동쪽에 얼룩얼룩한 빛이 돌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고려 광종 4년에 경주 황룡사 구층탑이 세 번째 화재를 당하였을 때 이상하게도 이것이 나타났다고 한다.
△ 효성천
조선 성종 때 양산 고을에 오준이라고 하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한분을 모시고 있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 가까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마저 몹쓸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생전에 어머님께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뒷산 기슭에 장사를 지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삼년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그 무덤에 가서 곡을 하였다.
그는 워낙 가난하였으므로 제상에 올릴 술 살 돈이 없어 산중에 있는 샘물을 늘 길어다가 바쳤다. 어느 해 여름날의 일이었다. 밤새도록 뇌성벽력이 치고 폭풍이 일고 한 그 이튿날 아침, 무덤에 가보니 전날에 보지 못하던 샘물이 무덤 근처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하도 이상하여 그 샘물을 떠먹어 보았다. 그것은 물이 아니고 술이었다. 그는 매우 기뻐하여 그 술을 길어다가 제상에 바치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그 무덤 근처에 술이 솟아나게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삼년상을 다 마친 그 이튿날부터는 술이 솟아 오르지 않았으며, 술 대신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하여 그 근처 사람들은 이 샘을 "효성천"이라 부르고 있다 한다.
△ 오봉산 임경대(최지원 선생이 시를 읊던 곳)
신라 말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유상했다는 ‘임경대’. 임경. 거울(잔잔한 강물)앞에 마주한다, 거울 같은 경치를 본다,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천하의 거울을 대함과 같다는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아예 강에 비친 절벽 자체를 뜻하는 말일수도 있다.
‣ 현재의 모습
이 산 마루턱에는 고운 최치원의 유상지인 임경대 유적이 있다. 임경대는 오봉산 제1봉의 7부 능선에 있는 바위봉우리로 낙동강과 그 건너편의산, 들과 어울려 수려한 산천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명소 중의 하나다.
△ 가야진(용당진) 용신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앞 낙동강에 가야진사가 있다. 옛날 양주도독부에 있던 한 전령이 공문서를 갖고 대구로 가던 길에 이 곳 산막에서 하룻 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전령에게 용 한 마리가 나타났다. 용은 남편되는 이가 첩만 사랑하고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니 첩 용을 죽여 원수를 갚아주면 꼭 은혜를 갚겠다면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전령은 용의 딱한 사정에 동정심이 생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 용이 시키는 대로 칼을 빼들고 남편 용이 첩을 데리고 논다는 용소에 가서 바위틈에 숨어서 용 두 마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있다 갑자기 강물이 끓어오르면서 용 두 마리가 불쑥 솟아올라 오더니 서로 엉켜 희희낙락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겁에 질린 전령은 다급한 김에 앞뒤도 가릴 새 없이 칼을 뽑아들고 그 중 한 마리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칼이 빗나가 수룡을 죽이고 말았다.
남편 용의 죽음에 슬피 울던 용은 어쨌든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용궁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전령은 입었던 갑옷과 칼 투구를 벗어던지고 용 등에 올라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부터 용과 전령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 마을에는 재앙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용이 놀던 용소가 보이는 곳에 사당을 짓고 세 마리의 용과 전령의 넋을 위로했다. 그래 지금까지 매년 봄가을 두 번에 걸쳐 돼지를 잡아서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용신제를 지내는 것이다.
‣ 현재의 모습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사 사당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자그마한 목조 기와집이다. 사당 내의 제상 위에는 가야진지신이란 신주 위패가 모셔져 있고, 뒷벽에는 세 마리의 용상이 그려진 화룡도가 있다.
△ 개화바위
옛날 원동면 신주마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자식이 없었다. 하루는 할머니 꿈에 수염이 하얀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너의 집 뒤에 있는 산의 큰 암석 위에 가면 어린 아이가 울고 있을 것이다' 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성장하여 15세가 되는 해 5월5일은 밖에 내보내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가 꿈을 깨서 일어나 그 바위에 가보니 개 한 마리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할아버지와 함께 매우 기뻐하면서 길렀다. 할머니는 그 아기가 개에게 안겨 있었다고 하여 [개화]라고 이름을 지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개화가 15살 되던 해 5월5일 저녁이 되었다. 친구들이 놀러 가자고 개화를 찾아왔다. 개화가 놀러가고 한 시간 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때야 5월5일인 것을 생각해 내고 바쁘게 밖으로 뛰어 나가서 개화야 하고서 불러보았으나 개화는 이미 하늘나라로 올라간 뒤였다. 개화는 처음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였다.
하늘이 모처럼 내려주신 귀동자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놓쳐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도 이 바위는 개가 [개화]를 안고 있었던 바위라고 해서 개화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 화암산 신라 때
화암산 기슭에 사냥꾼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같이 산에서 산으로 다니며 짐승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산꼭대기 커다란 바위굴 속에는 큰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어서 이 산의 짐승은 거의 다 잡아먹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안 사냥꾼의 내외는 어느 날 그 곰을 잡아 없애려고 갔다가 도리어 그 곰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집에 남아 있던 오누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들은 부모를 찾아서 산에서 산으로 헤매고 있었다. 때가 마침 겨울이었으므로 모진 바람은 불고 눈은 점점 내려 쌓이는데 배는 고프고, 춥고 하여 두 오누이는 마침내 깊은 산 가운데에 넘어져 가엽게도 죽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성은 사랑하는 자기 자식의 죽음을 가엽게 여겨서 두 아이의 성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어 따뜻한 양지 쪽에 피어나게 하였다. 마침 그 때의 일이었다. 신라왕이 병이 들어 좋다는 약은 다 써 봐도 조금도 효능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유명한 의사의 말이 복숭아꽃을 잡수시면 낫는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때가 추운 겨울이라 복숭아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왕의 어명이라 사자는 여러 지방으로 그 꽃을 구하러 떠났다. 그때 사자가 언양의 남문근처에서 맞은 편 산기슭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그 곳에서 두 송이의 복숭아꽃이 양지쪽에 활짝 피어 있었다. 사자는 이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곧 그것을 꺾어서 돌아가 왕에게 드리었다. 왕은 이상하게도 그 꽃을 먹고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사자가 복숭아꽃을 꺾을 때 떨어져 시든 꽃송이가 근처에 나서 오빠의 정은 죽 숲이 되고, 누이의 정은 소나무가 되었다고 하는 데 추운 때에도 복숭아꽃이 피어 있었다고 해서 그 산의 이름을 화암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신동대굴
양산시 원동면 장선리 신불산 중턱에 "신동대 굴"이 있으니 약 사백여년전 신동대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신불산 중턱에 있는 천연석굴에서 술수공부를 연마하여 끝내 도통하여서 신비한 행적이 많았으나 그 중에도 특히 축지법에 능하여 하루저녁에 한양을 오고 갔다 한다.
그리하여 오만해져 그 술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한양의 궁녀들을 강간하기도 하였고, 낙동강 잉어도 잡아먹곤 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궁녀들의 몸에 명주끈을 매어 두었다가 이 명주끈을 단서로 나라에서 신동대의 있는 곳을 탐지하고 잡아오라 하자 즉시 중국으로 하루 저녁에 도망해 새벽에 안동땅에 도착하였다.
때마침 어느 노파가 마당을 비로 쓸면서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조선에 있는 신동대는 하루 저녁에 수만리를 왔는데 너희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고 호령했다.
이 말을 들은 신동대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줄 알고 오만피운 자신을 깨우친 바가 있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노파에게 자신의 부질없는 짓에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다시 노파에게 "어찌하여 저를 알아 보셨습니까?"하고 물으니 노파는 대답하기를 "한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장날에 만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오"한 후 안채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신씨는 고향에 돌아와 다시 도술을 의롭게 써서 임진왜란 때는 왜놈을 무찌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씨는 깨우쳐 준 노파의 예언을 잊어버리고 어느 날 장날에 우연히 만난 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말았다.
그래서 신동대는 그 날 바드리라는 고개에서 넘어오다 죽고 말았다. 그 뒤 신씨가 살던 동굴에는 어떤 할머니가 들어와서 걸식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 동굴 한 모퉁이에서 쌀이 흐르기 시작하였는데 쌀은 그 할머니가 먹을 만큼만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욕심이 생겨 쌀이 흐르는 구멍을 크게 넓혔다. 그랬더니 쌀은 영영 흐르지 않고 대신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뒤 할머니는 예전처럼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굴을 신동대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 "신동대굴"이라고 불리 우고 있다. 지금도 바위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 삼수리와 삼장사
하북면 삼수리는 본래 초산리의 일부였다. 그런데 고려 말 공민왕 때 순찰사였던 이전생이 이곳에 살면서 징석, 징옥, 징규라는 삼형제 장사를 낳으니 그로 인하여 삼수리가 되었다.
이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오고 있다.이들 삼형제가 태어 날 때 그의 어머니가 태몽에 장남 징석은 영축산이 현몽하였기 때문에 취봉이라고 이름짓고, 차남 징옥은 원적산이 현몽하였기 때문에 원봉이라 하고, 삼남 징규는 금정산이 현몽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금봉이라고 하였다.
이들 삼형제들은 각각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징석은 백운암에서 글공부하고 영축산 산봉 평원에서 무예를 닦았으며, 징옥은 원효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원적산 산상평원에서 무예를 닦았다.
그리고 징규는 금정산 금봉탕 앞에서 글공부를 하고 금정산 산상 평원에서 무예를 닦았다. 특히 징규가 무예를 닦았다는 금정산 고당제 근처에는 아직도 마애여래불좌상이 남아 있는데 이를 두고 일명 이징규장군의 자화상이라고도 한다.
징석과 징규는 유년 때 호랑이를 타고 글공부하러 다녔기 때문에 어머니는 크게 걱정하였으나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예부터 위인될 자는 대호가 먼저 알아보는 법이라면서 크게 기뻐하셨다.
그리고 이들 3형제는 자랄 때 많은 설화를 남겼는데 그 중 역사문헌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50여명의 도적떼를 사로잡았다는 설화) 징석은 13세, 징옥은 9세, 징규는 7세 때의 이야기이다. 이들 3형제는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양민의 재산을 약탈해가는 50여명의 도적떼를 발견하자 모두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본 고을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보고 날개가 달린 장사라고 부르게 되었고 혼이 났던 도적 떼들도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두 번 다시 이 고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고을에는 도적떼로 인한 민폐가 없는 평화롭고 밝은 고을이 되어 마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를 삼장사 민요의 시초라 하기도 한다.
"방아로 구나~! 방아로 구나~! 해가지면 달님이 뜨고 달님이 지면 해님이 뜨네"
징석과 징옥이 각각 열여덟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이들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묘책을 내었다.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살아있는 멧돼지 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두 아들은 각기 멧돼지를 잡으러 산으로 갔다. 석양 무렵이 되자 징석은 큰 멧돼지를 메고 와서 어머니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멧돼지를 산채로 잡기는 하였으나 메고 올 기운이 없어서 죽여서 가지고 왔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기운을 칭찬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징옥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워 하자 징옥의 앞에서는 호랑이 조차도 무릎을 꿇고 명령에 복종한다고 하며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이들은 징석이 잡아온 멧돼지를 요리하여 먹으면서 징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징옥은 사흘 밤낮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시체만이라도 찾아와야한다고 나섰으나 징석이 이를 만류하고 자신이 징옥을 찾아오겠노라고 나섰다.
징석이 출발하려는데 징옥이 황소 같은 멧돼지를 몰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간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징옥이 멧돼지를 발견하고 멧돼지를 쫓았는데 삼일간이나 쫓아다니자 멧돼지도 귀찮은 듯 말을 듣더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과연 대장군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칭찬하니 징옥은 대장군보다 높은 황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서 그런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꾸짖었다. 징옥은 어려서부터 이런 말을 수 없이 하였다고 한다.
"보잘 것 없는 여진족들도 한때는 황제국을 세워 중원까지 위세를 떨쳤고, 몽골족도 원나라를 세워서 팔십여 나라를 속국으로 다스렸으며, 거란족도 요나라를 세워서 황제국의 위세를 떨쳤다. 뿐만 아니라 한족도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으나 처음부터 황제국이었는데 왜 우리만 황제국을 세워보지 못하고 당나라와 원나라를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가?"
징옥이 열여섯 살 때 주변의 김해 고을에서는 호식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관아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징옥이 김해부사를 찾아갔다. 김해부사 정종은 민원관계로 한 소년이 찾아왔다는 이방의 말을 듣고 뇌물보따리를 가지고 왔느냐고 묻고서는 가지고 오지 않았다니까 만나지 않겠다는 분부를 전하였다.
이방은 징옥에게 가서 부사를 만나려거든 뇌물보따리를 가지고 와야 한다고 하였다. 징옥은 알았다고 답하고 그 길로 산으로 올라가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 보자기에 싸서 다시 부사의 관아로 찾아갔다. 문지기에게 빨리 문을 열라고 호령을 하자 이방이 나왔다.
이 방은 보따리를 보자 기뻐하며 문안으로 안내했다. 이 때 이징옥이 보따리를 풀자 호랑이가 튀어나와서 이방에게 달려들었다. 이방은 날 살려라 소리치며 달아나고, 호랑이는 다시 부사가 거처하는 곳으로 돌진해갔다. 부사가 기겁을 하여 징옥에게 살려주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애원하였다.
이 때 징옥은 돈 좋아하는 놈은 죽은 돈보다 살아있는 돈 맛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도와주지 않았다. 급기야 부사는 다시는 뇌물을 받지 않고 선정을 베풀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에 이징옥은 두 번 다시 백성을 괴롭히면 호랑이밥을 면치 못하리라는 경고를 하고 호랑이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해부사는 이징옥이 양산부원군의 아들임을 알고 큰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징옥은 탐관오리가 주는 상은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김해부사 정종은 후에 함경도 종성부사가 되었고, 이징옥은 함경도 절제사가 되었다. 이 징옥은 정종의 과거를 까맣게 잊어 버렸으나 정종은 과거지사가 탄로 날까 봐서 늘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그러던 정종이 마침내 수양대군의 방을 읽고서 경솔히 행동하여 이징옥장군을 암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혁목암과 반고굴
새 밭등 큰 바위아래 굴이 있는데, 이 굴은 신라 때 명승인 원효대사가 수도하는 곳인데, 원효는 그 때 화랑도령으로서 군직을 가지기도 했다.
영축산의 이름이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지고 그 나무이름이 "혁목"이라 하고, 낭지법사가 있던 암자를 시골사람들이 "혁목암"이라고 한다.
△ 포천산의 다섯비구
포천산에 성명이 자세하지 않은 다섯비구가 있어, 아미타불을 외우면서 극락세계를 구하기 몇 십 년에 문득 성중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를 맞아 갔다.
이에 다섯 비구가 연대에 앉아 공중으로 날아가다가 통도사 문 앞에 이르러 절 안의 중들이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나가서 보니 무상고공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비추면서 서쪽으로 가 버렸다. 유해를 버린 곳에 중들이 정자를 짓고, 이름을 치루라 하였다.
△ 안선장
안선장은 원동면 내포리 선장마을의 안쪽 골짜기 하천변에 위치한 곳이다. 여기는 산과 산사이의 깊은 계곡이 경치가 아름답고 물이 맑아서 그 옛날 신선들이 목욕하며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이 곳을 발견하고 천하에 이와 같은 명소가 있음에 감탄하여 노닐던 곳이라 하며, 지금도 이 곳 아녀자들은 신선이 놀던 곳이라 하여 달 밝은 밤이면 목욕재계하고 소원성취를 빌기도 한다.
△ 용궁굴
굴의 깊이는 알 수 없으나 , 옛 전설에 의하면 어떤 상제가 부모의 묘소자리를 구하려다 실수로 이 굴에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집에 갔는데, 그 다음날 낙동강 물에 지팡이가 나타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용궁과 통한다고 용궁굴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 무형문화재
△ 양산학춤
한국의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사찰 통도사가 양산에 있다. 양산 예술의 혼은 통도사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양산학춤 또한 통도사에 그 뿌리를 둔다.
1976년 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1925~, 전 부산대학교 영문과 교수, 전 무형문화재 전문위원).김천흥(1906~)이 조사 발굴한, 양산지역에 전승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22호에 의하여 ‘(양산)사찰학춤’의 명칭이 붙여졌는데 이는 1976년 발굴조사 당시 김말복 승려의 증언을 통해 통도사 승려에 의하여 학춤이 전승되었으므로 ‘사찰’이란 글자를 붙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1996년 문화재조사보고서 제243호(1996년 11월, 김옥진.구희서)에 의하면 복식이 민간의 복식이므로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 라는 내용으로 현재는 ‘양산사찰학춤’과 ‘양산학춤’을 병행해서 사용한다.
현재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40호(1971년도 지정)로 등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갓, 도포차림의 선비복장으로 학의 동태를 율동적으로 표현한 것을 학춤이라 하는데, 이는 주로 영남지방의 사찰 및 민간에서 전승되어 왔다. 현재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래학춤이 있고, 사찰에서 승려들에 의하여 발생하여 추어져 내려온 양산학춤이 있다.
㉠ 반주음악
장단 : 굿거리장단
악기 : 주로 타악 꽹과리, 장구를 사용하였으나 장내(사랑방·대청·요정·누각)에서 춤출 때는 장구·대금·피리·가야금·해금·아쟁 등 삼현육각에 해당하는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 복식
의상은 선비의 옷차림으로 양반 갓·망건·백색 도포·술·흰 바지저고리·백새행전·백색 대님·백색버선을 착용하여 춤을 추었다.
㉢ 양산학춤의 특징
궁중학무와 달리 복식이 남정네들의 나들이옷으로 꾸밈이 없이 소박하다. 대님 위에 다시 행전을 착용하여 동래학춤과 구별된다. 경상도 덧배기춤 형태와 유사하나 춤이 완만하지 않고 억세면서도 춤폭이 강렬하다.
상하 움직임과 함께 전후 움직임이 강조되어 춤이 시원하고 절도가 있으며 춤사위의 구별이 분명하다. 춤사위에서 학의 동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동작이 많다. 이는 학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동래학춤과 차별화 된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춤사위보다 강렬하면서 개인적 특성이 돋보이며 토속성이 짙다. 양산지역의 풍류랑들의 춤에서 사찰의 승려들까지도 이 학춤을 즐겨 추었으므로 춤추는 대상도 특이하여 다른 학춤과 구별되는 아주 희귀한 춤이다.
㉣ 양산학춤의 현재
현재 (2003년)는 양산학춤의 유일한 계승자이신 김덕명옹과 그의 제자 최찬수(1963년~)·김순임(1963년~)과 양산학춤보존회 회원들이 양산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울산에는 김성수(1954년~), 진주에서는 박계현(1960년~)등이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김덕명옹은 양산문화원 민속예술 지도사범으로 1996년부터 위촉되어 양산문화원 문화학교에서 혼신의 힘으로 지도하고 있다.
△ 연등나례무
연등나례무는 ‘교방살(煞)풀이 춤’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옛날부터 전해온 나례의식때 추던 춤이다. 나례의식이란 음력 섣달 그믐날 궁중과 민가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아내기 위한 의식을 말한다.
고려 정종 이후 송나라에서 들어온 이 의식은 우리 민족의 원시신앙 무속과 쉽게 융화되어 조선말까지 성행하였고, 지금도 그 유풍이 남아 있는데 나례춤이야말로 우리 민족 전통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또 끊임없이 전하여진 대표적인 춤이라 하겠다.
‘교방살풀이’의 교방이란 고려초부터 있어 온 여락을 관장하던 관청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 춤이 나례의식 때 추던 춤임을 말해 주는 것이며, 옛날에는 붉은 옷을 입고 추던 것을 조선말 교방사에서 춤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흰옷을 입고 붉은 띠를 상징적으로 두르고 추게끔 바뀌어지고 춤사위도 예술적인 면을 많이 가미한 것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나례무를 출 때 붉은 띠를 왼쪽어깨에 매는 것은 황금사목[즉, 네눈박이 黃狗]이 귀신을 몰아내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던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나례의 의식장소는 사정전, 명정전 등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한편 연등나례무(살풀이춤)가 성행해 온 것은 우리 조상들이 무당을 통해서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살풀이란 액(厄)과 살(煞)을 다루는 춤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의 뜻과 지시에 의하여 길흉을 점치고 인간이 뜻밖에 당하는 재회를 면하려고 신비로운 초능력을 받은 무당이 신과 인간의 중개구실을 하는데서 이 춤이 파생하여 조선시대에 와서는 민간신앙으로서 기우제ㆍ사은제ㆍ서낭제ㆍ액제ㆍ질병치료 등에 등장한 춤으로 전승되어 왔다.
양산에서의 전승은 1940년을 전후해서 양산권번의 사범인 김농주로부터 양산의 한량인 김덕명이 사사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해마다 양산지역의행사 때 시연을 하고 있으며 시연 때는 사물장단에 현악과 관악을 덧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 연등바라춤
연등(煙燈)바라춤은 서경별곡등 속악24곡과 함께 아득한 고려 전통 불교 예술의 소산이다. 거룩하신 부처님의 수많은 신행ㆍ공덕ㆍ정진ㆍ수행을 찬미하는 큰 뜻으로 제를 올릴 때 동발을 손에 들고 다라니 장엄염불을 외면서 장엄하게 추는 정통 불교의식무 중의 하나이다.
고려 연등회 때 온 겨레에 등불을 밝히고 시조묘에 제를 올리며 천지신명을 받들고 국가와 왕실 그리고 만 백성의 태령을 기원하는 춤으로서 통도사에 대대로 계승되어 온 귀중한 양산의 문화유산 중에 하나임을 통도사 윤월하 방장 큰스님이 밝히고 있다.
㉠ 연등바라춤의 특징
첫째로 신라 고찰 통도사에서 대대로 전승해 온 순수한 불교 소산의 춤이며 여타 바라춤과는 판이하다.
둘째로는 주된 것이 불교의 교리적 내용을 다루는 것이므로 지극히 진진하고 중후하여 종교적 예술성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며 국태민안을 위한 나라의 경축무이다.
셋째로는 춤사위가 불공에 맞추어 다양하면서 품위가 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불교 의식무인데 이는 배불적 불교 예술이 판치는 현대도 연등바라춤은 때묻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온 점이 그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넷째로는 모든 춤의 반주는 민속적 흥취에 의한 것인데 비해 이 연등바라춤은 예불의 사실적 유래된 내용과 불교정신으로 춤사위와 악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다섯째로는 연등바라춤은 우주의 해와 달, 음과 양을 조화한 것이고 또는 축귀와 수명장수의 의미를 띠고 있는 홍가사가 특이하다.
또 이 연등바라춤의 의상은 전통불교의상인 흑색 승모, 백팔염주, 홍색 일월가사, 적색 소가사, 백색 법복, 백색 바지저고리, 백색 버선, 백색 행건을 착용하고 황색 동바라를 가지고 춤을 춘다. 몇 가지 특징적인 춤사위를 보면 목탁소리와 함께 합장하고 제전에 입장하여 예배하는 춤사위, 나무아미타불 염불의 독경과 긴 염불 춤사위, 나무아미타불 자진염불 춤사위, 석가모니불 염불 독경과 바라치며 탑돌이 춤사위, 바라치며 나무아미타불 독경과 예불하는 춤사위, 관세음보살 염불 독경과 바라치며 춤추는 사위, 극락세계 천도 장엄염불에 이어 자진 염불 나막하리나야 염불 독경과 천도식 춤사위, 왕생극락의 송혼식적 춤사위, 나무아미타불 염불독경과 예불식 춤사위, 합장예배하고 퇴장하는 춤사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연등바라춤은 해방 후 대처승이 사찰의 실권을 잃은 후 전수시킬 스님이 없고 당시 통도사 학도인 김덕명(1924년~ )이 유일무이하게 계승 보유하여 현 양산문화원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는 실정에 있으며 양산에서는 그의 제자 최찬수ㆍ김순임과 보존회 회원들이 매년 10회정도 지역행사시 시연을 하고 있으며, 시연 시 장단은 장구ㆍ북 등의 사물장단에 현악과 관악을 덧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 유형문화재
△ 통도사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제290호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번지(통도사)에 있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중 으뜸인 불보종찰로서 나라의 큰 사찰이다.[國之大刹]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 : 스님들이 수계를 받는 장소)을 설치함으로써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통도사라는 절 이름은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인도(印度)와 통한다는 뜻과,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1)에 중창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 · 옆면 5칸이고, 지붕은 앞면을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층계석, 층계 양쪽의 소맷돌 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금강계단은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란 뜻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 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띄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수리한 것이다. 금강계단 가운데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천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금강계단은 조선시대 목조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 동여비고
보물 제1596로로 지도의 크기가 가로 33∼68㎝, 세로 37∼42㎝로 일정하지 않은 도별도와 군현도를 한 책으로 묶었다. 앞부분은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까지의 영토와 지역별 통치 단위를 구분하여 기록한 역사지도를 수록했다.
그 뒤에 도성도 등의 특수 지역도가 있으며 대부분은 도별도와 군현도로 되어 있다. 각 지도에는 역사적 사건은 물론 각 지역의 특색, 조선 중기 사찰과 암자, 성곽 및 군사 요충지 등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했다. 또한 같은 지명이라도 각각 다르게 표기된 곳도 있어 역사, 지리는 물론 지명학, 국어국문학 등 한국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통도사 청동은입사봉황문향완
보물 제 1354호로 지금까지 국내에 전해져 오는 고려·조선시대 고배형 청동은입사향완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큰 것으로, 넓은 테두리가 둘러진 밥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모양의 다리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배형식의 향완이다.
고려시대 고배형 청동은입사향완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향완으로서 현존 유례가 많지 않은 조선시대 고배형 향완 가운데 조성시기와 주성장인·봉안사찰이 명확하게 밝혀진 명문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유교가 득세했던 조선시대 후기의 조성임에도 불구하고 대형인 점과 은입사기법이 빼어나고 문양이 섬세하며 결구방식 또한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하겠다.
△ 통도사 아미타여래설법도
아미타여래설법도는 서방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와 그 권속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비단바탕에 채색한 것으로 1740년에 제작되었다.
화면의 구성은 중앙에 본존인 아미타여래가 불단위에 결가부좌하고 그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한 8대보살과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화면 윗부분에는 10대제자와 용왕.용녀등이 배치된 전형적인 설법도 형식의 그림이다. 채색은 주, 군청 그리고 녹청을 주조색으로 하였으며 중간색은 억제되어 있어 비교적 선명하다.
전반적으로 필치가 섬세하고 유연함이 돋보이며 인물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함이 엿보임과 아울러 조선후기 3대화사중 통도사를 중심으로 활동한'임한'이 수화사을 맡아 조성한 불화로서 이른바 -임한파 불화-화풍을 대표하는 자료적 가치가 크다.
△ 통도사 괘불탱
보물 제 1351호로 불화 중 가장 규모가 큰 그림으로 야외에서 법회의식(야단법석)을 수행할 때 걸어서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평소에는 법당 뒤편의 괘불함에 말아서 보관하며, 석가탄신일이나 영산재, 수륙재, 예수재, 기우재 등 대중이 모이는 날 불전 중앙 마당에 걸어 모신다. 거대한 괘불을 걸기 위해서는 괘불대를 비롯한 여러 장비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 공개된다.
따라서 일반탱화들 보다 색채의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괘불은 1600년부터 1900년대 초까지 약 100여 점이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괘불의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화엄 및 법화경신앙이 크게 유행하여 삼신불, 삼세불, 석가모니불을 그린 영산회상탱화이나 석가모니불의 장엄신인 재관보살형 장엄신불로 많이 그려졌다.
17세기에는 복잡한 구도의 영산회상탱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18, 19세기에는 영산회상도를 비롯하여 좌우의 성중들이 생략된 단순한 입불의 상이 서서히 많아지게 된다.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을 보신으로 표현한 불화로서 좌우 성중들을 생략하고 단독상의 보살을 화면 중심에 크게 배치한 가장 간략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상호는 자비원만하며, 보관에는 5화불(化佛)을 모시고 손은 두 손을 흉부 앞까지 들어 올려 설법인을 취하면서 연화가지를 들어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염화미소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다양하게 베풀어진 문양들로 인하여 화면은 더욱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색조는 적, 청, 황색을 단순하면서도 안정되게 채색한 가운데 복잡하지만 어지럽지 않게 문양을 조화시키고 있다. 또한 통도사의 괘불은 현괘(懸掛)시 사용되는 반야용선번, 5여래번, 8금강번, 4보살번, 12지번 등의 도량장엄용 번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 주목된다.
△ 통도사 은입사동제향로
보물 제 334호로 사찰용 향로란 마음의 때를 씻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를 총칭하는 말로 화완 또는 향완이라고 한다.
높이 33㎝, 입지름 30㎝, 받침대 지름 24.7㎝인 이 향로의 전체는 굵고 가는 은 · 금실을 이용하여 연꽃 · 덩굴 · 봉황 · 구름무늬로 가득차게 새겼다. 몸통 중앙 네 곳에 원을 두르고 그 주위에 꽃무늬가 있다. 현재 원안에 범자를 찍은 둥근 주석판을 4개의 못으로 고정시켰다.
특히 몸통의 덩굴무늬 사이를 은판으로 채운 것은 이 향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받침대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위쪽은 연꽃무늬, 아래쪽은 덩굴무늬, 중앙은 넓은 공간에 구름문과 봉황이 굵고 가는 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외형상 새긴 무늬가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보물 제 738호로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설법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원나라에 귀화한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이 고려 금강산법기보살도량(金剛山法起菩薩道陽)에 참가 하였을 때, 고려 충숙왕이 지공에게 설법을 요청하자 이 책을 내놓고 설법하였다고 한다.
나무에 새겨진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3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으며, 크기는 세로 26.1㎝, 가로 19.2㎝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쓴 이색(李穡)의 간행기록을 통해 1353년에 강금강(姜金剛)이 간행한 것을 고려에서 다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예안군 우공(禹公)이 옮겨 새기려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성암사(聖庵寺)의 시주로 1386년 5월에 완성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한국 · 중국 · 일본에 전하고 있는 여러 대장경 목록에 책 이름이 나오지 않은 유일본으로, 불교의 교리연구에 있어서 그 자료적 가치가 크게 평가된다.
△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권46>
보물 제 757호로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 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큰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 책은 당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화엄경』주본 80권 가운데 46권으로, 불부사 의법품(佛不思議法品)의 전반부 내용이 들어있다. 검푸른 빛이 도는 종이에 금색으로 정성껏 글씨를 써서 만든 것이며, 표지부분은 떨어져 나가 새로 붙여 놓은 것이다. 종이를 길게 이어 붙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으며, 펼쳤을 때의 길이는 세로 28.3㎝, 가로 758.2㎝이다.
권 앞부분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금색으로 그려져 있고, 본문의 내용이 금색글씨로 쓰여 있다. 변상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그 밖의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종이의 질이나 글씨의 솜씨 등으로 미루어 14세기에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
보물 1001호로 양산 이씨의 시조(始祖)인 이전생과 조선 전기 이름난 3명의 형제 장수인 이징석 · 이징옥 · 이징규를 포함하여 직계후손 이몽란까지 장남, 자손들에 관련된 문서이다. 총 6종 16점이다.
이전생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20년(1371) 순찰사로 경남지방을 돌아보았고, 지금의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하여 살게 되니 여기서 양산 이씨가 시작된다. 조선시대에는 공조전서, 예조판서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고, 후에 양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전생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가선대부공조전서로 임명받은 내용이 담긴 사령서인 왕지 1점과 이징석 관련 문서로 왕지 4점, 장수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긴 유서 1점, 왕이 신하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리는 내용의 사패교지 3점 그리고 이징석이 죽은 후 세조가 내린 사제문 등이 있다.
그리고 이징석의 장남 이팔동이 받은 교지와 이징석의 직계후손인 이몽란이 병조에서 발급받은 교첩,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교지, 이몽란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하여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이몽란선무원종공신록권」 등이 있다.
각 문서의 크기는 연도와 내용에 따라 다르다. 이씨 문중이 보관하고 있는 이 문서들은 왕지 · 유서 · 사제문 · 사패교지 등 조선 전기의 각종 문서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의 고문서들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 통도사 사인비구 동종
보물 제 11-6호로 조선 숙종 12년(1686)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유일하게 8괘(八卦) 문양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큰 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종 몸통에 있는 사각형의 유곽안에 9개의 돌기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종은 중앙에 단 한 개의 돌기만 새겨 둔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 통도사 금동천문도
보물 제 1373호로 일명 ‘순치9년명천문도(順治九年銘天文圖)’ 라 불리는 천문도로, 조선 효종 3년(1652) 서울 삼각산의 문수암에서 비구니 선화자(仙花子)가 제작한 것이다.
지름 41㎝, 두께 4㎝의 둥근 동판 앞면에 진주보석이 박힌 별자리를 배치하여 그 찬란한 빛으로 천문을 관측할 수 있도록 하였고, 뒷면에는 삼각산과 백운대를 그린 후 그 둘레에 33개의 별자리 이름을 돌아가며 기록하였다.
△ 통도사 영산전 영산회상탱
보물 제 1353로 영산회상도란 석가모니가 인도에 있는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법회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통도사 영산전에 보존되어 있는 이 영산회상도는 화폭 가운데 윗부분에 전신광배를 띈 석가여래가 한 손은 무릎 위쪽에 두고 한 손은 무릎 아래쪽에 걸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대좌 양쪽으로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다.
그 밖에도 관음과 미륵 등 8대 보살을 두었고, 그 위쪽으로 10제자를 배치하였으며, 화불과 사천왕, 용왕, 신중신 등이 화면의 여백을 꽉 채우고 있다.
전체 얼굴 모습과 조화를 이루어, 선(禪)을 닦는 모습과 설법을 하는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으며, 법의에 표현된 무늬는 산만하지 않고 채색 또한 다채로우며 선명하다. 길이 35.8m 폭22.9m의 크기로, 조선 영조 10년(1734)에 화원, 임한, 선심 등이 제작한 것이다.
△ 통도사 화엄탱
보물 제 1352호로 부처님의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장엄한 세계관을 설한 화엄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화엄경변상(華嚴經變相)이다. 보통 화엄변상탱은 연화장세계와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중생을 위해 9회의 법회를 여는 화엄경 칠처구회의 장면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며, 각 장면에는 화엄종의 종주인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설법을 청하는 보살과 법을 듣는 대중 그리고 설법 장소인 궁전누각 등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각 회(會)는 제1회 적멸도량. 제2회 보광법당회. 제3회 도리천회. 제4회 야마천회. 제5회 도솔천회. 제6회 타화천회. 제7회 보광법당중회. 제8회 보광법당삼회. 제9회 서다림회로 구성되며. 장면 마다 각 법회의 명칭이 적혀있다. 이 작품은 일반 채색화와 달리 검은 비단바탕 위에 금니를 사용하여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졌다. 철저구회 장면을 갖추어 표현하고 있으며, 화면의 하단에는 일반적으로 53선지식을 찾는 선재동자가 등장하는 것과 달리 특이하게 밀교적 도상인 천수관음이 그려져 있다.
□ 사적
△ 신기동 고분군
사적 제 94호로 양산 북정리 무덤들과 얕은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있는 무덤들이다. 높은 지역에는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모여 있어 북정리 무덤들과 같은 분포상태를 보여준다.
1990년에 모둔 30여 기의 무덤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제1호 무덤만이 대형 무덤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소형 무덤이었다. 그 가운데 높은 지역의 무덤은 구조나 출토된 유물이 북정리 무덤들에서 발견된 유물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또한, 지금까지는 보지못했던 다른 형태의 항아리로 만든 옹관(옹관묘)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신기리 무덤들은 6·7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무덤으로, 가야와 신라의 문물교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 중부동 고분군
사적 95호로 양산시의 여러 무덤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무덤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무덤들로, 북부동산성(사적 제98호)이 자리잡은 동산 일대에 있다. 분포 형태는 산등성이를 따라 큰 무덤들이 줄을 지어 있고, 그 주위에는 작은 규모의 무덤들이 모여있다.
현재 유적이 입지한 구릉 일대는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고 유적 중간 부위에는 체육시설과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수의 무덤이 파괴되었다. 그 주변에서 단경호, 유개고배 등 약간의 토기류가 채집되었다. 체육시설 근처에는 무덤 1기가 파괴되어 무덤 안의 일부가 밖으로 드러나 있다. 또한 무덤의 대부분은 일본강점기에 도굴·파괴되었으며,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무덤들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과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으로 5~6세기경에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된다.
△ 북부동 산성
사적 제 98호로 양산시 동쪽의 동산 해발 276.8m의 9부 능선을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언제 성이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유물과 동쪽의 고분군을 근거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산의 시가지를 발 밑에 두고 멀리 낙동강까지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비록 무너진 상태로 남아있지만 성이 만들어진 당시 성의 규모와 구조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곳이다. 성의 북동쪽에는 이 산성과 비슷한 신기리 산성이 있어 쌍성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 북정동 고분군
사적 제93호로 오봉산 중심이 되는 산등성이 일대에 있는 무덤들이다. 대형 무덤은 산의 윗 부분에 퍼져 있고, 소형 무덤은 비탈진 곳이나 산의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시기적인 차이에 따라 무덤의 위치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들 가운데 부부총(夫婦塚)과 금조총(金鳥塚)은 1920년에 조사되었고, 1990년에 내부구조확인을 위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무덤들은 모두 관을 보관하는 돌방(석실)의 앞면이 트인 앞트기식굴방무덤인데, 부부총은 산 위쪽에 자리잡은 대형무덤으로 돌방 내부의 벽면과 천장을 흰색으로 칠하여 장식하였다.
반면 금조총은 산의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소형 무덤인데, 무덤들이 자리잡은 위치와 형태가 다른 것은 무덤 주인들의 신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제장식품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은 경주지방의 대형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과 비슷하다.
부부총의 경우는 추가장으로 남편이 5세기 중반 이후에 먼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로 볼 때,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의 중앙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그 친족에 해당하는 인물로 추측된다.
△ 법기리도요지
사적 100호로써 오래 전부터 근처에 있는 창기마을의 이름을 붙인 ‘창기사발’을 만들던 가마터로 알려진 곳이며, 조선 중기인 16~17세기경 지방에서 사용하던 백자를 만들던 곳이다. 마을 뒷산의 기슭에서 산 윗 부분까지에 걸쳐 가마터가 여러 곳이 남아있는데, 사람들의 주거공간과 무덤들이 들어서면서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도자기의 형태는 대부분이 사발·대접·접시로, 만들어진 모양새가 거칠고 투박하여 좋은 질의 백자들은 아니었던듯 하다. 발견되는 백자들 가운데 굽의 형태나 백자의 질이 일반적인 백자들과는 다른 종류가 보이는데, 이것은 일본의 주문을 받아 수출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찻잔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법기리 가마터는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신기리 산성
사적 제 97호로 해발 232m의 산성봉 정상일대를 돌로 쌓은 성으로, 성황산에 있어 성황산성이라고도 불린다. 대부분 무너졌으나 둘레 2,600m, 높이 1m 정도가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낙동강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양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과 성안에서 신라 토기조각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의 남쪽에는 이 산성과 규모가 비슷한 북부동산성이 있어 쌍성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양산이 신라시대에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게 한다.
□ 특산물
삽량주 쌀 |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저공해 품질 인증미 |
원동딸기 |
딸기 재배 적정풍토에서 재배하여 열매가 굵고 당도가 높음, 비타민 C가 풍부함 |
원동매실 |
알칼리성 체질개선효과 및 숙취제거와 살균효과가 뛰어나며, 피로회복, 이뇨에도 효과가 좋음 |
상북계란 |
비타민과 단백질이 풍부하며, 산성체질을 알칼리성으로 개선하는데 효과가 큼 |
상북당근 |
재배지역 특성상 당도가 뛰어남, 품질이 우수하여 일본에 수출하고 있음 |
화제 청결미 |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저공해 품질 인증미로서 밥맛이 뛰어남 |
서운암 약된장 |
생약제를 첨가한 된장으로 색깔이 맑고 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며 한약재 향기가 배어남과 장류 특유의 역한 냄새가 나지 않는 순수한 자연건강 식품임, 통도사 서운암에서 생산됨 |
이파랑수경원 청정채소 |
수경재배로 된 무공해청정채소이며 농약과 중금속에 오염되지 않았고 신선채소로서 연중 생산되며 백화점과 대형 유통업체에 납품하고 있음 |
□ 향토음식
△ 잉어찜
예로부터 잉어는 귀한 생선으로 산모들의 임신중독증에 의한 부기를 가라앉히고 태아의 발육이나 출산후의 젓분비를 촉진한다하여 산모를 위한 영양식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낙동강에서 잡힌 잉어를 여러 가지 통째로 간장과 고추장, 부추, 미나리, 떡국, 콩나물, 느타리버섯 등으로 푹고아 잡냄새가 없고 담백하다.
□ 축제
축제명 |
개최일시/ 기간 |
주요내용 |
배내골 고로쇠축제 |
매년 2월 말경 |
청정지역 배내골에서 생산되는 고로쇠 수액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 하고 양산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고자하는 시민 참여축제 |
양산 유채꽃 축제 |
4월 하순 ~ 5월 초순 |
고려제강에서 호포대교까지 자연친환경적인 생태공원을 전국에서 제일 긴 거리에 (22.2km), 약10만평을 조성하여 유채의 향기가 양산시 전역에 그윽하게 퍼지고, 이곳을 찿는 관광객에게 마음의 안식과 볼거리를 제공하는 시민참여축제 |
천성산철 축제 |
5월초 |
천성산 정상(제2봉)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철쭉꽃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시민 참여축제 |
원동매화 축전 |
매년 3월 중순 |
낙동강변 기찻길을 따라 화사하게 핀 매화를 배경으로 따뜻한 인심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와 풍성한 이벤트로 양산의 대표 특산물인 원동 토종매실 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는 시민 참여축제 |
매월 3월 중순에 열리며, 낙동강변 기찻길을 따라 화사하게 핀 매화를 배경으로 따뜻한 인심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와 풍성한 이벤트(매실제품 시식회, 매화사진촬영대회, 매화보물찾기대회 등)로 양산의 대표 특산물인 원동 토종매실 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는 시민 참여축제이다. 해마다 3월경 원동일대에는 봄의 전령사 매화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원동 지역은 깨끗한 자연과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며, 봄이면 지천에 매화꽃이 만발하여 인근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낙동강변과 매화꽃이 어우러진 절경에서 사진을 찍고자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가족ㆍ연인들과의 드라이브코스로도 즐길만하다. 축제의 덤으로 원동의 특산물인 원동매실로 만든 음료, 막걸리, 장아찌 등을 무료로 맛보고, 저렴한 가격에 구매 할 수도 있다. | ||
서운암 들꽃축제 |
4월 |
통도사 서운암 주변 5천여평에 금낭화, 할미꽃, 매발톱등 야생화 수만포기가 그 기품있는 자태를 드러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몸과 마음의 안식과 볼거리를 제공하는 시민 참여축제 |
양산삽량 문화축전 |
매년 10월 (3일간) |
기원제, 축하불꽃쇼, 소망유등띄우기 등의 공식행사와 거리음악회, 추억의콩쿠르, 난장콘서트, 전통의향기 등의 공연행사 도자기체험전, 과학교실체험, 양산천뱃놀이, 혼례한마당 등의 시민 참여행사 등의 문화축전 |
축제는 양산시내 일원 및 양산천 둔치에서 행사가 열린다. 1986년부터 삽량축전으로 시작하여 2006년에 양산삽량문화축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삽량이란 1,600여년전 신라 눌지왕 2년(서기 418년)부터 경덕왕 16년(서기 757년) 340여년간 불러온 양산의 옛 이름이며, 당시 삽량주는 신라 수도인 경주를 에워싼 경남북의 중동부 지역을 관장 하였고, 삽량은 지극한 충성의 뜻을 담고 있다. 전통이 있는 축제인 만큼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등을 즐길 수 있다. 행사 내용으로는 공식행사, 축전속의 축제, 특별행사, 공연행사, 시민참여행사, 체험행사, 연계행사, 양산음식특별전 등 50여종의 프로그램 운영으로 많은 볼거리와 직접 체험행사를 하면서 문화, 예술, 놀이, 교육이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관광축제라 할 수 있으며, 양산의 대표적인 음식 체험전도 즐길 수 있다. 축전과 문화, 예술의 일상화를 통한 으뜸도시의 행복지수 높이기를 실현하기 위해 시민이 만드는 으뜸도시 양산을 주제로 화려하게 축전행사를 펼치고 있다. | ||
통도사 개산 대재 |
매년 음력 9월 |
영축총림 통도사의 창건일을 기념하여 개산조 (자장율사)의 사상과 가르침을 계승하기 위한 법회와 더불어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리는 전통불교문화 행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