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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창녕군의 동쪽은 밀양군의 무안면과 초동면, 청도면이 붙어 있으며, 북쪽은 경북 청도군의 풍각면과 대구 달성군의 유가면, 구지변이 접해 있다.
서북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합천군의 덕곡면과 청덕면, 의령군의 낙서면과 부림면, 유곡면, 지정면이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은 낙동강과 남강을 끼고 함안군 대산면, 칠서면, 칠북면과 창원시 북면, 동면 등과 마주하고 있다.
총면적 532.9㎢인 창녕군은 동쪽이 높고 서남쪽응ㄴ 완만한 구릉지역으로서 낮은 평야지대로 되어 있다. 평야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토평천, 운봉천, 남창천, 계성천, 퇴천, 구계천 등의 근유역은 강이 실어와 축적시킨 영양소에 의해 비옥한 농지로 되어 있다.
□ 낙동강 중류의 우포늪
우포ㆍ목포늪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로 창녕군 이방면과 대합면 등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되던 소하천의 폭이 좁아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가로 약 2.5Km, 세로 약 1.6Km정도가 되며, 위치는 동경 128°25', 북위 35°33'이고 면적은 170ha이다.
우포늪은 전체 70만평 중 7만평이 담수지역으로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및 대합면에 걸쳐 원시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내륙습지이다. 현재는 이방면 토평리와 윗토평리 사이에 제방을 쌓아 우포와 목포로 나뉘어 있고 사지포와 우포사이에도 제방을 쌓아 나뉘어져 있어 외형상으로는 우포, 목포, 사지포와 같이 3개의 늪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변천과정
낙동강 중류인 경상남북도 경계에서부터 창녕과 남지 사이의 낙동강 변에는 배후습지성 호수가 집단적으로 분포한다. 빙하기에 침식곡이 발달하여 낙동강과 토평천이 만들어졌으며, 후빙기 해수면에 도달한 토평천은 하류의 운반량이 적어 홍수 때에 역수(逆水)현상이 나타났다.
이때 대하천의 낙동강 물이 소하천인 토평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퇴적물이 쌓여 자연제방이 생기고 그 안쪽에 물의 일부가 남아서 우포ㆍ목포ㆍ사지포 등 배후습지성 호수가 되었다. 전에는 우포도 홍수 때 낙동강 물이 역류하면서 수심이 깊어지고 평소에는 낙동강으로 자연 배수되어 수심이 낮아졌었다.
현재 우포ㆍ목포의 그 주변지역의 습지는 70년대 초 인공제방을 쌓아 낙동강의 홍수 때 하천 유입을 막고 배수ㆍ개답후 농토가 되었다. 하지만 우포ㆍ목포늪은 초여름에서 가을철에는 희귀식물인 가시연꽃과 마름, 생이가래, 자라풀 등의 수초가 늪을 덮어 훌륭한 경관을 연출하고 겨울이 되면 수천 마리의 철새(쇠기러기, 오리류, 고니 등)들이 아침저녁으로 늪위를 나는 등의 훌륭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우포ㆍ목포늪을 포함하고 있는 낙동강의 제1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분포하는 지층은 중생대 백악기의 신라층군에 속하는 신라역암층을 기저로 하여 함안층, 진동층 및 팔용산 응회암층의 퇴적암과 이를 관입한 미산 안산암층 및 함각력질(含角礫質) 안산암이 소규모로 분포하며, 이들 암층을 불국사통의 화강암체가 관입한 바 이들은 언급된 순서로 서측에서 동측으로 분포하여 서반부는 퇴적암이, 동반부는 화성암이 노성(露星)된다.
신라역암층은 유역의 입구인 성산리 부근에 분포하여 역암, 사암, 사질, 셰일, 실트스톤 및 니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안층은 그 상류로 초곡리-대벌리에 걸쳐 넓게 분포하며 회색 및 적색 셰일로 구성된다. 진동층은 함측으로 십이리-대암리-창녕까지 넓게 분포되며 암회색 내지 회색 셰일로 구성되며 불국사 화강암과의 접촉부는 화강암의 관입시 접촉변성 작용에 의해 백색 내지 회녹색 처트로 변성되어 노출된다. 이들 퇴적암은 N20W-N40W, NE10-NE20의 주향과 경사를 보여 거의 수평한 분포를 보이나 곳에 따라 요각(warping)된 형상을 보이기도 한다.
우포늪을 흐르는 토평천은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감리 열왕산(해발 662.5m)에서 시작하여 북측에는 왕영산과 진봉산이 분수령을 이루고, 남측에는 열왕산과 관룡산(해발 739.7m) 및 화왕산(해발 756.6m)이 분수령을 이룬다. 토평천은 동에서 서로 흐르다 창녕군 유어면 대대리에서 우포에 유입되어 동남방향으로 여러 번 "S"모양으로 물길을 바꾸어 가며 내려가다 창녕군 유어면 구미리에서 낙동강으로 유입한다. 토평천 유역은 경남의 북단에 위치하여 남북으로는 구마고속도로가 관통하며 동서로는 주요간선도로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토평천 곳곳의 하천연변에 대나무 숲이 들어서 있으며 하류부는 사행이 심하며 하상물질은 이토로 구성되어 있다.
토평천 유역면적은 67.1km², 유로연장은 12.0Km이다. 또한 유역의 형상은 남북에 비하여 동서의 유역폭이 넓은 장방형으로서 유역의 평균 폭은 약 5.6Km에 이른다. 토평천은 법적 준용하천인 본류 외 3개 지류로 구분되며, 각 지류의 유역형상을 보면 비교적 같은 간격으로 토평천 본류에 유입되고 있다.
하상물질의 평균 입경은 3.62mm~20.51mm로 분포되어 있고 토평천 유역의 평균 하상구배는 1/250~1/38로서, 상류부는 급류하천이나 우포늪 하류 구간의 하상구배는 1/7600으로 매우 완만하다 토평천 유역내에 1981년 8월 30일 호우와 9월 3일 태풍 애그니스호에 의해 농경지 침수, 제방유실, 도로침수, 수리시설의 피해가 있었으며, 또한 매년 농경지의 침수가 발생되는 실정이다.
△ 우포의 유래
주민들 사이에서는 우포를 소벌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지세와 관계가 있다. 장재리는 법정리상으로 이방면 사무소가 위치한 안리에 속해 있으며, 장재리는 행정리명이고 이는 다시 소목과 장재리로 나눠진다.
소목의 뒤편에 위치한 산이 우항산(牛項山)인데 이 부근의 지세가 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우항산은 소의 목 부위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명칭이라고 한다. 또한 소목은 이러한 연유로 해서 여름철에 항시 "분답해야(시끄러워야)" 먹을 것이 있다는 말이 전해 내려 오고 있는데 그 뜻은 소목의 지세가 소의 형상과 관계있음을 비유하여, 여름철에 소의 활동이 활발해야 (일하는 소가 열심히 일하느라고 울음소리가 많이 나야) 농사도 잘되고 사는 것이 나아진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소목에는 창녕 성씨의 재실과 산소가 있으며, 마을의 대부분이 창녕 성씨의 종중토지이다. 묘소가 있는 곳은 우항산이 소의 목이라고 한다면 허리잔등(복부)에 해당하는 지점이며 옛부터 묘를 잘 쓴 곳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창녕 성씨는 단일본으로 현재 이방면에는 많이 살고 있지 않으나 이웃한 대지면 모산 등 7개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의 재실에서 모시고 있는 분은 시조의 외아들 고려문화시중 성송국이다.
소목에서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개를 넘어가면 장재리에 이르게 되는데, 장재리에 부락이 형성된 것은 약 70여 년 전이라 하며 소목은 그보다 약간 더 앞서서 형성되었다. 장재리 부락이 면해 있는 늪지를 나무벌(목포) 이라 부르는데 우포늪지의 서쪽 수면을 차지하는 곳이며 지도상에는 이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나무벌을 사이로 해서 장재리의 대안에 위치한 노동, 토평부락 일대에는 옛부터 소나무들이 많았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가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가져오는 지역이었다. 나무 땔감을 많이 모을 수 있는 곳이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소벌과 나무벌은 제방을 경계로 우포의 남서쪽 지점에서 연결되는데, 여기에 제방이 있고 수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왕래가 가능하다.
제방은 낙동강의 범람으로 인한 침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70년대에 축조된 것인데, 강물이 소벌에서 넘쳐들어오면 수문을 닫아 침수로 인한 피해가 다소 줄어들었으며 따라서 장재리의 침수피해는 소목에 비해 덜한 편이다.
네 개의 늪 모두가 모래나 뻘이 있었지만 사지포늪은 가장 모래가 많이 있어서 모래벌이라 불렀다고 한다. 쪽지벌은 한자로 표기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네 개의 늪 중에서 크기가 가장 작기 때문에 쪽지벌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면적
늪면적은 우포늪이 1,278,285㎡이고 목포늪이 530,284㎡ 이며 주변에 사지포와 쪽지벌이 위치하고 있고 이방면, 유어면, 대합면 3개면, 14개 마을이 인접하고 있다.
사회형성 현황 |
□ 역사
영남의 중심에 자리 잡아 낙동강의 자양분으로 번성해 온 창녕은 창녕, 영산, 계성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이나 고분을 통해 이곳의 오랜 역사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창녕은 역사 기록이 없었던 오랜 옛날부터 취락지를 이루어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그 중에서도 북부지역의 창녕현 지역은 일찍이 신라와 병합하여 ‘ 비자회군’ 또는 ‘비사벌’이라 불렸다 한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화왕군’을 지금 이름인 ‘창녕군’으로 고쳤다.
고종 32년(1895)팔도제를 폐지하고 23부를 실시함에 따라 창녕군은 밀양과 함께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고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자 창녕군, 영산군의 두 군은 대구부에서 경상남도에 귀속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 ․ 군 ․ 면의 폐치분합에 따라 영산군의 길곡면 사촌리, 금곡리 일부는 함안군에 편입되었고 창녕 ․ 영산 두 군이 통합되면서 ‘창녕군’이 단일 행정지역명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1월 1일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이어 2년 뒤에는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지금까지 2읍 12면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 선사 및 가야시대
창녕군은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고인돌)와 창녕읍, 계성면, 영산면 등지에 산재한 고분군들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땅에 인류가 취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남방식 지석묘의 대표적인 것으로,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는 7기가 있었으나 현재 1기뿐이며, 부곡면 온정리의 고인돌과 고분, 도천면 일리와 영산면 신제리의 지석묘, 계성면 사리의 사은암 등은 지석묘로 모두 선사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생활한 흔적이다.
‣ 지석묘
일종의 거석(巨石)문화로 무문토기시대의 묘제(墓制)이며, 기원전 8~9백년대에 이미 나타났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기는 1세기 전후의 시대로 삼국지에 변진 24국의 소개에 나타나있는 불사국이 창녕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가야시대에는 불사국(不斯國) 또는 비화가야(非火伽倻)로 존립하여 오다가 일찍이 신라에 병합되어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子伐)이라 하였다.
영남의 중추인 낙동강을 자양으로 번성하여온 창녕군은 부족국가이던 옛 가야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서부터 나뉘어져 있던 여러 현이 합하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신라시대
신라진흥왕 16년(555) 에 하주(下州)의 치소(治所)를 두고 군대 주둔지인 정(停)을 두었다가 동왕(同王) 26년(565)에 폐지하고, 경덕왕 16년(757)에 화왕군(火王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 영산현은 본래 서화현(西火縣)이라 불렀으나 상약(尙藥)으로 고쳐서 밀양군의 현(縣)으로 되었다. 계성은 본래 신라 때 읍을 설치하였는데 옛이름은 알 수 없고, 경덕왕 16년에 계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 고려시대
고려 때에 이르러 태조 23년(940) 3월 화왕군(火王郡)을 지금의 이름인 창녕(昌寧)으로 고쳤다. 그후 현종이 밀성군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2年(1172年) 감무(監務)를 두었다. 역시 영산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밀성군에 소속시켰는데. 원종 15년(1274)에 감무를 두었다.
또 계성은 현종 9년(1018)에 밀성군에 속했다가 공민왕 15년(1366)에 영산현에 속하였으나 곧 공양왕 2년(1390)에 다시 밀성에 속하게 되는 등 변화가 많았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3년(1394) 창녕과 영산에 현감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 9년(1631)에 창녕현은 지도(至道)의 역변(逆變)으로 인하여 현이 혁파되고 강등되어 영산현에 합하여 소속되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6년후 어영군(御營軍)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인조 15년(1637)에 복현(復縣)되어 다시 창녕과 영산 양현으로 나누어 졌다.
고종 32년(1895) 5월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의 실시로 본 군은 밀양과 함께 대구부(大邱府)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1896) 8월 4일 13도제(道制)가 실시되자 창녕·영산군은 대구부에서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 일제 강점기 및 대한민국
1914년 4월 1일 부(府), 군(郡), 면(面) 폐지 분합에 따라 영산군의 길곡면 사촌(射村)·금곡리 일부(지금의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일대)는 함안군에 편입되고, 창녕군과 합병되면서 군의 이름은 창녕군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종 34년(1897)에 행정의 말단조직인 방(坊)이 면(面)으로 개칭되어 순종 융희원년 (隆熙元年,1907)에 통폐합을 거쳐 1910년 9월 면제(面制)가 시행되었다.
1914년 2개 군의 합병으로 창녕, 고암, 성산, 대합, 이방, 대지, 유어, 창락, 영산, 계성, 남곡, 부곡, 길곡, 도천, 장마 등 15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31년 3월 1일 남곡면을 남지면으로 개명하였다. 1955년 7월 1일 창락면이 창녕면에 편입되어 14개 면으로 되었다. 1960년 1월 1일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이어 3년후인 1963년 1월 1일에는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하게 되어 본군은 2읍 12면이 되었다.
1971년 2월 13일 창녕군조례 제175호로 남지읍 고곡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2읍 12면 1출장소가 되었다. 1998년 9월 10일 행정조직 개편으로 고곡출장소가 폐지되었고, 현재 139개 법정리에 285개의 행정리가 있다.
문화자원 |
□ 설화
△ 창녕조씨의 득성
창녕 조문(曺門)의 시조 탄생과 득성(得姓)유래를 살펴보면 시조의 모(母)는 신라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따님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속병으로 치병을 앓았으나 백약이 효험없어 신음중에 주위로부터 창녕 화왕산용지(火王山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드리면 효험을 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이 일어 백주(白晝)임에도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몽롱한 지경에 빠져들었다가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온 그로부터 속병은 씻은 듯이 나아지면서 태기(胎氣)가 있어, 그 뒤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曺"(조) 자와 같은 글무늬가 새겨져 있었을 뿐 아니라 꿈에 장부가 나타나 "나는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옥결인데 이 아이의 아비이다"하면서 "이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공후(公候)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신라 진평왕(眞平王)께서 이광옥으로 부터 전해 듣고 왕(王)이 기이하게 여기어 아이를 직접 접견하고 보니 과연 풍모가 특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曺"(조) 자와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보고 성을 "曺"(조) 라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용지(龍池)에서 동해신룡의 정기를 이어 받았다하여 "계룡(繼龍)"이라 지어주었다 한다.
그로부터 장성하여 신라 진평왕의 부마(駙馬)가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용지 근처에 높이 2.4M의 자연석에다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得姓之地)』를 새겨 두었다.
△ 장자늪과 부처고개
영산면 장척리, 도척면 덕곡리) 옛날 지금의 장척리(장재 : 현재 장척호)에 욕심 많고 독한 부자가 살았다 한다. 어느 여름날 중이 와서 시주를 청했는데 마침 두엄을 내던 중이라 머슴에게 두엄을 주라 했다.
이때 그 집 며느리가 물길러 나가다 이것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 시아버지 몰래 물동이에 쌀을 담아 나와 시주했다. 그러자 중은, "부처님의 은총이 아씨께 내렸으니 지체 말고 날 따르시오." 하고 무조건 따라오기를 재촉하므로 주저하다 가 쌀동이를 인 채 따라 나섰다.
동구 밖을 벗어나는데 검은 구름이 모여들더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시오. 뒤돌아보면 끝장나오." 중의 당부 말에 그녀는 정신없이 따라갔다. 삽시간에 소나기는 뇌성벽력을 동반한 폭우로 변하고 온 산천이 물바다가 되었다. 길도 논밭도 분간이 안 갔으나 중의 뒤만 따라 걸었더니 고갯길을 오르게 되었으며 그때야 비가 그쳤다.
그때 천지가 울려 퍼지는 소리에 집 걱정이 났으므로 여인은 중의 당부를 잊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이 무슨 괴변일까? 온 장제 동리는 바닷물이 넘친 듯, 땅이 꺼진 듯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순간 여인이 놀라움으로 그 자리에 돌로 굳어 돌부처가 되어 버렸다.(관음사 주지 김정용의 전언으로는 그때 돌부처가 되지 않고 그곳에서 암자를 짓고 물속에 들어간 시아버지, 남편등의 명복을 빌다 죽어 돌미륵이 되었다 한다.) 장제 부자가 산 동리는 큰 낙반으로 넓은 늪으로 변하고, 부자는 죽어 구렁이가 되어 지금도 늪 속 깊은 곳에 살고 있다 한다.
그녀가 돌부처가 된 고개는 영산에서 부곡으로 가는 고개로 부처고개라 불리 우는데 일제시대 도로개설을 하면서 이 돌미륵을 발견하여 더욱 부처고개, 부처골이라 유명해졌다.이 돌미륵은 일본인이 도천면 송진리에 있는 관음사에 옮겼는데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늪은 장자(장제)가 살았던지라 장자늪(장제늪), 또는 장척호라 불린다.
△ 함박산 약수와 효자 (영산면동리)
함박산은 온 산에 가득 박꽃이 피곤 한다. 정직하고도 지극한 효성으로 노모를 봉양하던 나무꾼이 영산에 백 오십여 년 전에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노모는 우연히 체증에 걸려 여러 가지 약을 썼으나 효과도 없이 날로 쇠약해져 갔다. 아들은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으나, 소용이 없자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들여 어머님의 병환이 쾌유하기를 빌었다. 기도한 지 7일째 되는 날 밤에 홀연히 기품이 있는 백발노인이 나타나,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아노니 이 산 함박꽃 있는 곳을 찾아오너라." 했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하도 이상하여 날이 새자마자 아들은 함박산을 올랐다. 산중턱 함박꽃이 소나무 우거진 사이에 만발하였으나 그가 구하는 약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꽃밭을 뒤지다 실망한 나무꾼은 갈증을 느끼고 함박꽃이 둘러싸인 계곡에서 솟아 흘러내리는 청수를 마셨다.
이게 어쩐 일일까? 그 물은 차고도 향긋하여 마치 활명수와도 같았다. 가슴이 단번에 시원해졌다. "이게 신령님이 가르쳐 주신 약이구나." 그는 기쁨에 넘쳐 약물을 떠다 드렸고 그 물을 마신 노모는 병이 완쾌되었다. 그 후에도 이 노모는 늘 청수를 애용하여 장수했다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이 약물을 마시게 되었으며, 반드시 효성이 지극한 사람만이 효험을 얻는다고 전한다. 때로는 산신령이 나타나 불효를 훈계하기도 한다는데, 요즘도 봄이면 찾는 이가 많다
△ 화왕산 이야기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과 고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낙동강과 밀양강이 둘러싸고 있는 창녕의 진산이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낙동강 하류지역에 솟아 있어 실제보다 우뚝하게 보인다. 삼국시대부터 있던 성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분전지로 알려져 있다.
화왕산성의 동문에서 남문터로 내려가는 길 잡초더미 사이에 분화구이자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지(三池)가 있다. 또한 산 정상의 서쪽 아래에는 조선 선조 이후에 축성되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마산성(사적 65)이 있다.
산의 서쪽 사면 말흘리에서 진흥왕의 척경비가 발견되었다. 남쪽 사면에는 옥천사가 있다. 현재는 600m 지대에는 화왕산성(사적 64)이 있다. 화왕산성의 동문에서 남문터로 내려가는 길 잡초더미 사이에 분화구이자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지(三池)가 있다. 또한 산 정상의 서쪽 아래에는 조선 선조 이후에 축성되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마산성(사적 65)이 있다.
덧붙여, 창녕군 낙동강 물줄기를 따르다 보면 경남 창원시 동면 본포리에 있는 본포나루라는 옛 나루를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배도 없고 뱃사공도 사라졌다. 옛 나루터 자리에는 본포대교가 놓여있다. 옛 나루터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알 수 없는 세상’이라는 찻집이 본포의 명물이다.
당일 등산코스로 최적의 주변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화왕산은 봄, 가을 주말과 화왕산 갈대제가 개최되는 10월에 전국에서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으며 정상의 분지 지형의 억새 군락지와 가야시대 때 축조한 화왕산성이 있으며 MBC에서 방영된 창사특집드라마 허준의 촬영세트장이 있어 좋은 관광자원이다 .
△ 화왕산억새
해발 757m 화왕산을 중심으로 울창한 숲, 맑은 계곡이 절경을 빚어내는 군립공원 화왕산은 진달래 만발한 봄, 녹음이 우거진 여름, 억새가 융단을 까는 가을, 새하얀 눈꽃이 피어나는 겨울로 사지사철 관광객을 즐겁게 맞이하며 듬직한 성곽, 작고 아담한 못(용지), 갖가지 비경이 곳곳에 펼쳐지는 관광의 보고입니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과 고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경상남도 중북부 산악지대에 있으며 낙동강과 밀양강이 둘러싸고 있는 창녕의 진산이다. 옛날 이 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불뫼·큰불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낙동강 하류지역에 솟아 있어 실제보다 우뚝하게 보인다.
이 산은 억새밭과 진달래 군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5만여 평의 억새밭이 펼쳐져 있어 3년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정상 일대의 억새밭에서 억새태우기 축제가 열린다. 매년 10월 초에는 화왕산 갈대제가 열린다.
억새는 습지에 사는 갈대와 구분되는 것으로 이 산의 정상에 서식하는 식생은 억새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억새를 갈대로 불러왔던 지역의 전통에 따라 10월에 열리는 행사는 여전히 갈대제로 불리고 있다.
가장 빠른 산행길은 창녕여자중학교 옆길로 들어가서 동쪽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자하골로 들어가면서 시작되는데 가파른 환장고개를 넘어 정상으로 오른다. 봄에 진달래를 보기 위해서는 옥천리 매표소를 기점으로 이어져 있는 관룡산의 관룡사에 들렀다가 관룡산 정상을 거쳐 이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을 억새를 보기 좋은 코스는 창녕여자중학교를 거쳐 도성암을 지나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창녕여자중학교로 하산하는 것이 좋다. 길게 잡아도 4시간 안팎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산 정상은 밋밋한 분지로 되어 있고 서면 관룡산과 영취산이 지척에 있으며 낙동강을 끼고 있는 평야와 영남알프스의 산들이 보인다. 600m 지대에는 화왕산성(사적 64)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있던 성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분전지로 알려져 있다.
화왕산성의 동문에서 남문터로 내려가는 길 잡초더미 사이에 분화구이자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지(三池)가 있다. 또한 산 정상의 서쪽 아래에는 조선 선조 이후에 축성되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마산성(사적 65)이 있다. 산의 서쪽 사면 말흘리에서 진흥왕의 척경비가 발견되었다. 남쪽 사면에는 옥천사가 있다.
□ 문화재
비사벌의 얼이 숨쉬는 문화의 고장인 창녕읍의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로 유명하며 교동 고분군에 위치한 창녕박물관에는 많은 문화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현재 창녕읍에 문화재 현황은 국보2점 보물8점 사적4점 중요민속자료2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5점등 총 27점의 문화재가 있으며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 창녕석빙고
조선후기에 조성된 얼음 창고로, 경주ㆍ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 형태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제로 빙실(氷室)의 크기는 길이 11m, 폭 3.6m, 높이 3.7m이다. 창녕군 교육청 바로 앞 개천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축조물이 곧 석빙고인데 봉토도 거의 완전하여 겉모양은 큰 고분처럼 보인다.
표면의 높이는 5.4m, 전체 길이는 13m이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설치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長大石)을 3단씩 쌓아서 벽을 축조하고 그 위에 1매의 장대석을 놓아 미석(楣石)을 삼았으므로 입구는 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4개의 홍예(紅霓)를 틀어 올리고 홍예 사이에는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질러 쌓아올려서 천장을 구성하였으며, 그 사이의 천장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설치되었다.
이 석빙고는 내·외 각부 구조가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그 규모는 약간 작다. 석빙고 남쪽에 석비 1기가 유존하는데, 이 비문에 보면 당시의 현감(縣監) 신후서(申侯曙) 등이 1742년(영조 18) 2월 초하루에 역사를 시작하여 그 해 4월에 끝마쳤다고 되어 있다.
△ 관룡사대웅전
팔각지붕의 다포집계 건물로 조선중기 건축물의 특징이 잘 보존되어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관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 신라 8대사찰의 하나이며 394년(내물왕 39)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1617년(조선 광해군 9)에 세운 건물로 정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다포(多包)집 계통으로 내부에는 중앙 뒷줄에 큰 기둥 2개를 세우고, 그 위에 걸친 대들보에는 좌우로 옆면의 기둥에 걸쳐 충량(衝樑)보를 2개씩 설치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중앙부분을 주위보다 한층 높게 한 것이 특징이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큰 기둥에 의지하여 불단(佛壇)을 두었고 그 위에 닫집을 달았다. 기둥 위로 처마 밑을 받친 공포(栱包)는 흔히 볼 수 있는 다포집 계통의 구조이나 그 세부에는 오래된 수법을 엿볼 수 있다.
출목(出目)은 내외 모두 2출목이며, 그 상단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은 삼각형을 이루었다. 쇠서의 곡선은 짧고 견실하며 내부에는 대들보를 받은 공포의 최선단 부분만이 양봉(樑奉)의 형태로 변하였는데, 이러한 세부 양식들은 거의 조선 중기 이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1965년 8월에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였고, 마룻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여 1401년(태종 1)에 창건, 1617년(광해군 9) 중수, 1749년(영조 25) 중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신라 진흥왕이 서기 561년에 세운 척경비중 하나이다. 561년(신라 진흥왕 22년). 순수비로 통칭되기도 하지만,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령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이 비는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개석이나 대석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기 비문의 통식을 갖추고 있으며, 일면을 간 다음 외연에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으로 줄을 돌렸는데 우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아 말행은 3자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우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연시, 사적, 수가인물의 3부분으로 되어 있고 인물열기는 속부·인명·직관·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자경 4cm이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한반도에 전하는 비석으로는 최고의 것이다.
현재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 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부분은 관련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줄은 3자이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6cm, 폭 175cm, 두께 약 30cm이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에 발견하였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창경읍 주민들과 문화재청에는 척경비라고 되어 있다.
△ 창녕 교동고분군
창녕읍 교리에 있고, 모두 36기가 복원되어 있으며, 송현동고분군과 인접하다.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창녕읍(昌寧邑) 교리(校里)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창녕읍 동쪽 목마산(牧馬山) 산기슭 송현리(松峴里) 구릉에서 읍의 북쪽 교리 고지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교리에 왕릉이라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크고 작은 고분들이 70여 기 모여 있었으나 현재는 8기만 남아 있다. 191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5~12호, 제21·31호분과 송현동 제89·91호분이 발굴되어 마차 20여 대, 화차 2량분의 유물과 부장품이 출토되었으나 제21·31호분만이 1918년 고적조사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제21호분의 봉분크기는 지름 약 10.6m, 높이 약 2.42m 정도였으며, 평면직사각형의 돌방[石室(석실)]은 봉토의 중앙에 있고 입구가 북면에 치우쳐 있으며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되었다.
제31호분은 봉분 원래의 지름이 16.67m, 높이는 돌방상면[石室床面(석실상면)]에서 3.94m 정도로 추측된다. 돌방은 평면직사각형으로 장축이 동남에서 서북방향이고 입구가 서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안벽 길이 5.55m, 나비 1.46m이며, 장벽의 높이는 1.91m 정도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굽다리접시의 형식으로 보아 시기는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으로 추측된다. 교동고분은 제12호분이 경주의 신라고분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인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야식인 직사각형의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墳(횡구식석곽분)]이고 부장품도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사적 제80호.
△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으로 단아한 아름다움이 불국사의 석가탑에 버금가는 석탑이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3층 석탑. 국보 제34호. 높이 5.75 m.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을 1석으로 하고, 하층 기단 갑석(甲石), 상층 기단 면석과 갑석은 모두 별석으로 하되 각부를 수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이며 옥개석 받침은 각층 5단이고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다. 세부양식에서 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랐으며 작풍이 장중 명쾌하고 기품이 있다. 이 탑을 동탑이라 함은 한 사역 내에 쌍탑이 건립되어서가 아니라, 같은 술정리 2 km 떨어진 서쪽에 또 하나의 3층 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본시 민가의 담 밑에 하층 기단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65년 민가를 철거하여 보존조치를 취하였을 때 석탑도 해체, 수리되었으며 제3층 탑신 상면의 사각형 사리공(舍利孔)에서 청동(靑銅) 개형용기(蓋形容器), 황색유리제 사리병, 향편(香片), 작은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 창녕 송현동 석불좌상 [昌寧松峴洞石佛坐像]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1.37m, 재료는 화강암이다. 큼직한 암석에 조각된 마애석불(磨崖石佛)로 바위 자체가 보주형(寶珠形)으로 생겨 자연광배(自然光背)를 이루었으며 문양은 없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소담스럽고,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귀는 길어 어깨까지 닿았고 목은 긴 편이지만 삼도(三道)가 없다. 팔과 가슴이 넓고 풍만하며 어깨도 넓고 당당하지만 다소 움츠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 끝을 땅으로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배꼽 앞에 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에는 두 발을 표현하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매우 얇은 데다 계단식으로 된 옷주름이 매우 유려하다. 이런 옷주름은 얼굴이나 전체적인 체구 등과 더불어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에 있는 석굴암(石窟庵:국보 24) 본존불(本尊佛)과 같은 양식을 하고 있다.
대좌(臺座)는 암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앞면에 연화무늬를 조각한 것 같지만 석전(石塼) 때문에 알아볼 수 없다. 온화한 인상에 안정감 있는 자세로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양식을 나타낸다.
△ 화왕산성 [火旺山城]
사적 제64호.1963년 지정. 면적 18만 5724m2. 조선 전기의 기록을 보면 둘레가 1,217보(步:1보는 6尺)이며, 성 내에는 샘이 9, 못이 3, 또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창녕뿐 아니라 영산(靈山) ·현풍(玄風)까지를 포용하는 성으로서 군사적으로 주요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실용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이 순식간에 대로를 따라 북상하게 되자 이 성의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곽재우(郭再祐)의 의병 근거지였으며, 그는 이 성을 굳게 지킴으로써 왜군의 경상우도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1596년(선조 29)이나 전쟁이 끝날 무렵인 1598년에 비변사(備邊司)는 이 성의 군사적 가치를 재인식하여 산성수축의 긴급함을 건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 창녕 관룡사 약사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1칸, 옆면 1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관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 394년(내물왕 39)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4면이 모두 단칸 평면의 작은 불당이며, 신륵사 조사당(神勒寺祖師堂:보물 180)이나 송광사 약사전(松廣寺藥師殿:보물 302)이 팔작지붕의 다포(多包)집 건축임에 비하여, 주심포(柱心包)집 계통의 맞배지붕 건물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공포(栱包)는 4귀에 세운 기둥 위에만 있고, 이 공포들 사이의 포벽(包壁)에는 화반(花盤)을 배치하지 않았다. 기둥머리에 나온 창방(昌枋) 끝을 그대로 첨차로 만들어 공포를 짜올린 솜씨는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수법이다.
좌우 옆면의 박공머리에서 보면, 도리의 뺄목은 건물 규모에 비해 매우 길게 나와서 지붕은 한층 무게가 있어 보이며, 소규모 건축이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안정감을 준다.
△ 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 [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58m, 폭 48cm, 두께 18cm, 재료는 화강석이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생략하고 장방형 대석과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을 가진 이례적인 석비이다. 표면과 양측면에 각자(刻字)를 했는데 모두 해서(楷書)이며, 뒷면에는 똑바로 선 승상(僧像) 1구가 조각되었다.
문면에는 비석의 제목은 없이 ‘元和五年庚寅六月三日∥表何飡…(원화오년경인유월삼일∥표하찬…)’으로 시작되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원화 5년은 비석을 세운 해로 810년(헌덕왕 2)에 해당한다. 전문이 인양사(仁陽寺)와 관련된 절 안의 범종·탑·금당·요사(寮舍)의 조성 연기 등을 기록한 것이며, 771년(혜공왕 7)부터 810년까지 약 40년간의 기사이다. 금석문(金石文)으로서뿐만 아니라 연대가 확실한 불상 조각으로서도 귀중한 유물이다.
△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觀龍寺石造如來坐像]
1970년 6월 24일 보물 제51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1m이다. 이 불상은 관룡사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觀龍寺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보물 295)을 본떠 만들었다.
관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 신라 8대사찰의 하나이며, 394년(내물왕 39)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16개의 연꽃이 조각된 높이 90cm의 대좌(臺座) 위에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 손은 약사정인(藥師定印)이며, 약항아리는 없어졌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삼도(三道)는 가슴에 표현되어 있으며, 옷주름은 도식적이다. 코는 얼굴에 비해 짧은 편이며, 입은 작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과 결가부좌한 하체부의 표현이 다소 소홀하나 고려시대의 불상으로는 가작이다. 좌대(座臺)는 상대석과 하대석의 조각솜씨가 다르다. 하대석은 신라시대의 것이고, 상대석은 솜씨가 거칠어 그 후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 술정리 서삼층석탑 [述亭里西三層石塔]
1970년 6월 24일 보물 제5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1m, 재료는 화강석이다. 술정리에는 동·서 석탑 2기가 있는데 서로 다른 형상의 탑으로,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34)과 술정리 서삼층석탑은 같은 곳에 있다.
상하의 이중기단 위에 3층을 세운 탑으로 하층기단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고 상층기단 면석 중앙에는 별석(別石)으로 끼웠는데 여기에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탑신에도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 받침은 5단으로 이루어졌다. 옥개석 전각의 반전은 그리 심하지 않다. 상륜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에서나 옥개석 전각의 반전이나, 평박(平薄)한 낙수면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8세기 중엽)의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보다 격이 매우 떨어진다. 술정리 서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 창녕 송현동 고분군 [昌寧松峴洞古墳群]
사적 제81호. 1963년 지정. 면적 1만 9195m2. 원래는 송현동 구릉 일대에 80기 가량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었으나, 도굴되고 논밭으로 경작되기도 하여 지금은 16기만 남아 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었으며, 무덤의 형태와 구조는 창녕읍 북쪽 교동(校洞)에 남아 있는 무덤들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3벽을 할석(割石)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뚜껑돌을 여러 개 놓은 뒤, 막지 않은 짧은 벽을 통해 시체를 안치하였다. 그런 다음, 나머지 벽을 쌓아 막고 그 위로 흙을 쌓아올려 봉분을 만든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으로, 내부의 공간은 장방형이 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무덤 형태는 가야시대의 형식으로서, 창녕 일대가 예전에는 가야의 영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특산물
토마토 |
창녕토마토는 지역적으로 1억 5천만년의 신비를 간직한 우포늪 주변 청정지대에서 생산되며,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비옥한 토질에서 재배되어 당도가 매우 뛰어남, 주출하시기가 매년 12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로 창녕농협 산지유통센터에서 공동선별하여 전국 각지로 판매하고 있음 |
마늘 |
창녕마늘은 우포늪 주변의 비옥한 토양에서 재배되어 신선하고, 특히 인산함량과 유황성분이 많아 마늘 특유의 향과 맛이 풍부함 |
양파 |
창녕지역의 대한민국 양파의 시배지이며, 1억 4천만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으며, 환경올림픽이라고 불리는 2008년 람사르 총회가 개최된 바 있고 자연생태보전구역으로 지정된 우포늪 주변의 토질 및 수질오염의 우려가 없는 청정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으므로 청정지역에서 생산되는 양파로서는 국내최초로 "지리적표시 등록 30호"로 지정되었음 |
□ 축제
축제명 |
개최일시/ 기간 |
주요내용 |
낙동강 유채축제 |
매년 4월중 |
남지읍민의 날 기념식, 낙동강 용왕대제, 개막식, 전시행사, 부대행사, 이벤트행사, 먹거리장터 |
비사벌 문화제 |
매년 10월초 |
전 야 제 : 향토기양제, 청소년한마음축제 등 (만옥정공원 등) 문화행사 : 전국시조경창대회, 한시백일장, 사생대회 및 서예대 회, 연극대회 (문화원, 만옥정공원, 창녕향교 등 ) 전 시 회 : 서예전, 수석전, 시화전, 사진전 (문화원 등) |
화왕산 갈대제 |
매년 9월말 ~10월초 |
산신제 및 의병추모제 노래자랑 통일기원 횃불행진 캠프파이어 |
3.1 민속문화제 |
매년 3월1일 전후 |
민속행사 : 쇠머리대기, 줄다리기 등 14종 문화예술행사 : 시조경창대회 등 9종 체육행사 : 짚공차기 등 3종 |
부곡온천축제 |
매년 10월말 |
온정제, 세계민속 예술공연, 하프마라톤대회, 박미경 미니콘서트, 비보이공연, 난타공연, 문오장굿, 온천수에 삶은계란먹기대회 |
함안 문화권(함안)
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함안은 동쪽으로 창원시, 마산시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의령군, 진주, 진양을, 남쪽으로 마산시와 고성군을 끼고 북쪽에는 낙동강, 남강을 사이에 두고 창녕군 의령군과 접해 있다. 군전체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남쪽에 여항산(744m), 봉화산(649m), 서북산(739m), 광로산(379m), 천주산(640m), 동쪽에 오봉산(623m), 작대산(648m), 무릉산(556m), 중앙부에 자양산(402m)이 솟아 있으나 대체로 낮고 완만한 구릉성 산지이고 북쪽으로 갈수록 낙동강과 남강 연안에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연평균기온이 13℃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인근 북쪽의 의령군과 비슷한 1,295.5mm로 겨울은 따뜻하고 비가 많은 편이다.
함안에는 잦은 범람으로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고, 낮은 구릉지 쪽의 작은 저수지는 습지형태로 발전하는 등, 습지가 발달한 지역이다.
함안의 작은 저수지(소류지)는 칠서면의 신촌 저수지, 신촌 소류지, 창동 소류지, 강태 소류지, 천개 소류지, 신산 소류지, 어령 소류지, 대산면의 대사 저수지, 소사 소류지, 옥열 정수지 등 저수지 및 소류지가 없을 정도로 많다.
함안의 습지 지대는 법수면에 발달해 있다. 대평늪과 질날늪, 옥수늪 법수면의 남강 근유역에 습지식물이 자라고 있어 식물생태학 연구에 중요한 지점 ․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의 대표적 식물군은 가시연꽃, 줄풀, 벗풀, 부들, 질경택사, 가래검정말, 올방개아재비 등이다.
사회형성 현황 |
□ 역사
함안은 삼한시대 변한에 속한 변진 안야국이었다. 가야시대에 들어 6가야 중 1국인 ‘아라가야’국으로 찬란한 문화의 흔적을 남겼으며, 신라 법흥왕때 신라에 병합되고 경덕왕 16년(757)함안군으로 개칭되어 몇 차례 변화속에서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려성종 14년(995) ‘함주’로 다시 개칭되고 명종 2년(1172)현이 설치되었으며 공민왕 22년(1373)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들어 연산군 11년(1504)때 도호부로 승격 되었다.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1906년 칠원군을 편입하여 군세를 넓혔으며 1979년 가야면을 읍으로 승격시키면서(지금의 함안읍)1읍 9면 체제로 지금에 이르렀다.
문화자원 |
□ 천연 기념물
△ 함안층의 새발자국 화석
천연 기념물 제222호. 이 새발자국 화석이 박혀 있는 지층은 중생대 백악기 말(약 8천만 년 전)에 퇴적된 함안층이다. 이 새는 물갈퀴가 없으므로 멧새일 것이며, 발자국 크기로 보아 비둘기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 함안 칠북면의 회화나무
천연 기념물 제 319호. 1482년 성균관 생원과 훈도를 지낸 안여지 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회회나무는 수령 500년, 높이 26m, 둘레 6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