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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동쪽은 대구광역시 서구·달서구·남구·수성구, 경상북도 경산시,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경계로 고령군·성주군, 남쪽은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상북도 청도군, 북쪽은 경상북도 칠곡군과 접한다.
1995년 3월 1일 전국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화원읍·다사읍·논공읍 3읍과 가창면·구지면·옥포면·유가면·하빈면·현풍면의 6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청소재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금포리 1313번지에 있다.
지형은 화원읍·옥포면을 거쳐 유가면까지 내려오는 비슬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산지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저지로 나누어진다. 비슬산맥에는 주봉인 비슬산(琵瑟山:1,084m)과 함께 주암산(舟巖山:846m)·청룡산(靑龍山:794m)·산성산(山城山:653m) 등의 산이 있다. 가창면에는 최정산(最頂山:886m)·상원산(上院山:670m)이 있고, 현풍면에는 대니산(戴尼山:408m), 다사면에는 와룡산(臥龍山:300m)이 있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퇴적암과 이를 관입한 불국사화강암이 주로 분포한다.
군의 서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낙동강은 지류인 금호강(琴湖江)과 다사읍(多斯邑) 남단에서 합류하여 총 7개 면의 서단을 흐른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왕선들·옥공들·현내들과 같은 넓은 평야가 펼쳐져 곡창지대를 이룬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도 미곡생산지인 강창벌이 형성되어 있다. 낙동강 본류의 구간은 하빈면(河濱面) 묘리(妙里)에서 구지면(求智面) 대암리(臺岩里)까지 길이가 55km에 이른다.
기후는 대구지역의 특수기후형과 유사한 내륙성기후로 기온차·연교차가 크다. 연평균기온은 12.6℃ 내외이고, 1월 평균기온 -1.6℃ 내외, 8월 평균기온 25.9℃내외이다. 연평균강수량은 979mm 정도로 적은 편이다. 식생은 소나무·단풍나무·분비나무·자작나무·잎갈나무 등이 자란다.
사회형성 현황 |
□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금포리 1313번지(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달성군청로 33)
동단 : 가창면 상원리(동경 128˚42´)
서단 : 구지면 도동리(동경 128˚21´)
남단 : 구지면 대암리(북위 35˚37´)
북단 : 하빈면 대평리(북위 35˚56´)
□ 지역특성
역사적 특성
선사이래 유구한 역사와 유·불교 문화가 살아 숨쉬는 전통적인 충효의 고장
문화적 여건
현대와 전통, 천혜의 자연이 어우러진 문화관광 위락도시
지리적 여건
대구의 관문도시로 구마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 국도5호선 등이 관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
환경적 여건
비슬산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잘 보존된 녹지 등 대구권 광역녹지축 형성, 대구테크노폴리스 및 대구경북과학기술연구원(DGIST) 조성등 첨단과학기술중심도시 조성을 통한 대구발전의 중심역할 수행
□ 면적
426.98㎢
□ 인구 및 세대
총 178,477명 (남 :91,432명, 여 : 87,045명)
세대수 : 61,955 세대
□ 행정조직
군본청 : 3국 2실 17과 2직속기관
읍 면 : 3읍 6면 (248개리 1,769반)
군의회 : 1과 2전문위원
공무원수 : 658명
□ 역사
선사시대에 달구화->달구벌->달불->달성으로 도읍이 형성되어 신라시대에 서기 757년(경덕왕 16년) 수창군(수성군)의 한 현으로 대구현으로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1018년(현종 9년) 대구현(달성) 팔거현(칠곡) 하빈현(다사, 성서,하빈) 화원현(월배, 화원, 옥포)이 경산부(성주)에 이속되었고 서기 1143년(인종21년)에는 현령관으로 승격하여 하빈현, 화원현을 영속하였다.
조선전기 1419년(세종원년) 군으로 승격하여 하빈, 수성, 해안현을 직할하여 달성으로 칭하였으며 조선말기 서기 1895년(고종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에 속하였고 1914년 3월 부,군, 면의 폐합에 따라 대구부 외곽지와 현풍군을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칭하고 수성면 등 16개면을 관할하였다.
1938년 10월 1일 대구부의 행정구역 확장으로 수성, 달서, 성북 등 3개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어 해안(동촌)면 등 13개면을 관할 하였으며,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대구시로 개칭하였다.
1958년 1월 1일 동촌(해안), 공산, 가창, 월배, 성서의 5개면이 대구시로 편입 되어 8개면을 관할하였다.
1963년 1월 1일 공산, 가창, 성서, 월배 4개면이 환원되어 12개면을 관할하였고,
1979년 5월 1일 1979년 5월 1일 월배면, 1980년 12월 1일 성서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10개면을 관할하였고,
1981년 7월 1일 대구직할시 승격으로 성서읍, 월배읍, 공산면이 시 지역에 편입되어 9개면 관할하였고,
1992년 3월 1일 화원면이 화원읍으로 승격되어 1읍 8개면 관할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로 편입
1995년 4월 20일 화원읍 구라리 일부(2.5㎢)가 달서구로 편입
1996년 9월 1일 논공면이 논공읍으로 승격되어 2개읍 7개면을 관할
1997년 11월 1일 다사면이 다사읍으로 승격되어 3개읍 6개면을 관할
□ 지명유래
달성군은 선사시대에 달구화,달구벌,달불이라는 성읍으로 형성되었으며 신라시대에는 달구화현 또는 달불성이라 칭하였고 1914년에 달성군이라 불리웠으며 16개면을 관할하였다. 달성군의 행정구역이 경상북도에 속해 있었으나,1995년에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으며 현재 3읍6면을 관할하고 있다.
문화자원 |
□ 설화
△ 달성 부자
이 고장이 달성이라고 이름지어진 데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옛날 이 곳에 나무꾼 달성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좋지 않은 꿈을 꾼 달성이 아버지에게 문밖 출입을 삼가도록 권하였다. 이를 듣지 않은 아버지가 약초를 캐러 나갔다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몸져 누웠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 달성은 묘자리를 잘 쓰기 위해 절에 들어가 10년을 공부한 끝에 풍수지리에 통달하게 되어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 시체를 지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어느 집 장독 밑에 묻었는데, 이를 눈치 챈 집주인이 자기 아버지 시체로 바꿔 묻고 말았다.
그 묘자리는 3년 안에 후손들이 벼슬을 하게 되는 명당인데 3년이 지나도 아무 좋은 일이 없어 그 집으로 가보니 그 집은 번성하여 대갓집으로 변모하여 있었다. 달성은 시체가 바뀐 줄도 모른 채 장독 밑의 주인집 시체를 파내어 그 날 밤으로 일 년 안에 부자가 되는 다른 명당에 묻었다. 다음해 추석에 성묘하러 갔다가 그 집주인이 자기 아버지 묘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야 그 때까지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이에 주인남자는 자기 재산의 반을 나누어 드릴 터이니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달성은 또 다른 명당에 아버지 시체를 묻었다. 그러자 그는 과연 벼슬을 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니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달성영감이 유명해졌으며, 영감이 사는 마을을 달성골로 부르게 되었고, 뒤에 지명화되었다고 한다
△ 사효굴전설 <四孝窟傳說>
유가면에 살던 곽노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네 아들을 데리고 비슬산 중턱의 사효굴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 기침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곽노인은 쉴 사이 없이 기침을 했는데 왜병이 굴 앞을 지날 때도 기침이 터지고 말았다. 왜구들이 굴속에 있는 사람은 빨리 나오라고 호통을 치자, 맏아들이 대신 나가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런 일이 네 번이나 거듭되어 마침내 곽노인만 남게 되었다. 다섯 번째는 곽노인이 직접 나가 왜병에게 아들 넷을 잃은 사연을 말하였다. 잔악한 왜구도 감동하여 곽노인의 등에 ‘효자의 아버지’라고 써 붙여 누구도 노인을 다치지 못하게 보호하라 하였다. 그 뒤 이 굴을 사효굴이라 하였으며 효자비를 세워 이들의 효성을 칭송하였다.
△ 베틀바위
하빈면의 베틀바위에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은 여인의 애타는 심정이 얽혀 있다. 병자호란 때 남편이 의병으로 나가 소식이 없자 부인은 큰 바위 위에 베틀을 설치하고 남편을 기다리며 베를 짰다. 어느 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던 날 남편이 손짓하는 환영을 보게 되었다. 부인은 남편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뛰어가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낙동강에 빠져죽고 말았다. 그 뒤 이 바위를 베틀바위라고 하였다.
□ 유형문화재
△ 도동서원 강당 사당 (부)장원
도동서원은 조선 5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향사한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8) 지방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는데 창건 5년 뒤인 선조 6년(1573)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 후 선조 38년(1605)에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불렀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선조 40년(1607)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도동서원은 고종 2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 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원은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있으며, 통로와 계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軸)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구성과 배치형식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으로서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물들의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구성 및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石物)들도 그 기법이 우수하다. 현재 하사제기(下賜祭器)와 경현록(景賢錄) 판각이 보관되고 있다.
△ 용연사 석조계단
용연사 석조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이곳에 봉안된 사리는 신라 선덕왕 때 고승인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는 길에 2과(二顆)를 가져와 두 함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괴하고 사리를 도굴 했으나 유정대사가 격문을 보내어 송환 받았다. 이에 송운대사가 받들고 금강산에 가서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태백산 보현사와 통도사에 안치코자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송운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봉안하여 오던 것을 청진스님 등이 현종 14년(1673) 5월 5일에 이곳 용연사에 사리탑을 건조하고 안치하게 되었다.
계단은 석조로 된 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중앙에 안치한 형식으로 상층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을 양각하고 하층기단의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했다.(사천왕상은 도난 우려로 별도 보관중임)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나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 구조에 균형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그 수법이 상당히 우수하다.
△ 태고정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이 건립한 정자인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하였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하며 장방형의 축단위에 세워진 건물은 원래는 정면 3칸 규모였으나 좌측에 1칸을 증설하여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평 30평 건물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태고정은 박팽년 등 6명의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六臣祠)와 한울타리 내에 있다.
△ 현풍 석빙고
현풍면 상리 동산 밑 구천변(龜川邊)에 있는 현풍석빙고는 조선시대의 석축 얼음 창고로 깊은 계곡의 물이 얼면 그 얼음을 떠다가 저장하던 곳이었다. 석빙고의 입구는 개울이 흐르는 쪽에 설치하지 않고 능선쪽(남향)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며 외기를 막기 위해 옹벽을 쌓았다.
석빙고의 천정과 벽에는 4개의 잘 다듬어진 화강석을 사용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사이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태의 내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돌을 깔았고 여름에 얼음이 녹지 않도록 통풍과 배수가 잘 고려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얼음창고의 축조방법이나 시설 등은 경주, 안동, 창녕 등 조선후기의 석빙고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당시 고을마다 석빙고를 둔 것도 아니었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현풍고을에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석빙고의 축조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982년 11월 석빙고 주위 보수 작업 때 건성비가 발견됨에 따라 1730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경주ㆍ안동ㆍ창녕 석빙고보다 10여년 정도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후기 석빙고의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달성비슬산 암괴류
비슬산 암괴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10만년 전인 주빙하기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생대 백악기의 화강암 거석들로 구성되어 특이한 경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발달규모가 대단히 큰 것으로 화강암 지형에서는 보기 드물고 가치가 매우 높은 지형이다.
암괴류 상부는 비슬산 대견사지(大見寺址) 근방, 하부는 고도 450m 부근인 소재사(消災寺) 남쪽 근방이다. 토르가 잘 발달한 대견사지 부근에는 부처바위 등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분포하고 있고 칼바위는 애추(崖錐,talus 혹은 scree)(풍화된 암설(岩屑)이 중력의 작용으로 급사면에서 떨어져 내려가 퇴적한 반원추형(半圓錐形)의 지형)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비슬산 암괴류와 그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지형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중요한 학술적 연구대상이 된다.
△ 달성 삼가헌
이 집은 살림채와 별당채로 구성되어있는데, 살림채는 박팽년의 12대손인 박광석이 1809년 초가를 헐고 정침을 지었으며 1827년 사랑채를 건립하여 삼가헌이라 했다. 이 건물의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앞이 사랑채이고 이를 거쳐 안채에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조선시대 관아 양식과 비슷하며 사랑채는 ㅁ자형으로 이루고 있으나 두 동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문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곳간 2칸, 대문칸 1칸, 마구간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사랑 대청 4칸, 온돌방 2칸을 두었으며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여기에 1칸의 방이 있다. 사랑대청 안쪽으로는 1칸의 마루방이 있고 그 뒤로 1칸의 온돌방이 있다. 안채는 두 칸의 안방과 2칸의 대청을 가운데 두고 우측으로는 부엌을 두었는데 이 부엌의 상부는 다락을 두어 이곳에서 주로 건어물을 비롯한 음식물을 두고 있다. 대청 좌측에는 건넌방을 두었는데 이곳은 이집 며느리의 거처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사랑으로 돌출된 부분은 한 칸의 마룻방을 건너 갓방이라고 부르는 방이 있는데 이곳은 안손님들이나 출가한 딸들이 해산을 하러 친정에 왔을 때 주로 사용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사이 서쪽에는 장독대, 곳간채, 안변소가 자리 잡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초가로 된 중문채다. 사랑채에서 몇 번의 꺾음을 해야 진입이 가능하도록 안채와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방아실 등과 같은 헛간채의 일부가 중문이다. 별당채인 하엽정(荷葉亭)은 손자대인 1874년에 조성되었는데, 원래 파산서당(坡山書堂)으로 쓰던 ‘ㅡ’자형 집에 ㄱ자로 돌출된 누마루를 부설하였다.
△ 달성 조길방 가옥
이 건물은 약 290년 전에 지은 집으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라고 한다. 안채, 사랑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아래채는 나중에 고쳐 지은 것이다. 안채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서향으로 앉혔다. 안채는 2칸 마루의 왼쪽에 큰방과 부엌을, 오른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자연석 주초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방 주위에는 흙벽을 쳤으며, 마루의 앞면 가운데 기둥만 둥근 기둥을 세웠다.
3량집의 간소한 구조인 이집은 싸리기둥에 칠기봇장(칠기나무로된보)집임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초가로는 드물게 보는 오래된 건물이며 안채의 창문도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 명심보감 판본
인흥서원(仁興書院)에 소장되어 있는 이 판본은 노당(露堂) 추적(秋適)이 편저하였다. 노당 추적은 원종 2년(1261)에 문과에 올라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명심보감은 공자 등 제자백가의 경서와 저술, 시부 가운데서 쉬우면서 생활에 기준이 되는 내용만을 골라 엮은 것으로 천자문에 버금가는 교육의 기본도서로서 유전되어 왔지만 추적이 당초 편 할 때는 국학제생에게 심성수양교재로 삼기 위함 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고종6년(1869) 추세문이 출판한 인흥재사본이 전수되어 국역 출판됨으로서 가정, 학교에서 교육용으로 널리 쓰여왔고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도 보급되어 있고 영문으로도 번역되어 한국학 연구의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명심보감 판본은 총31매의 목판으로 본 인흥서원의 판본이 유일본이다.
△ 곽재우 장군 묘
구지면 대암리에 소재한다.
자는 계수요, 호는 망우당인 곽재우 장군은 조선 명종 7년(1552)에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천리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때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고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귀향하여 낙동강변에 망우당을 짓고 유유자적하시다 조용히 생애를 마쳤으며 유택을 이곳에 모시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역에는 봉분과 망계석과 묘비가 있는데 묘비는 1732년에 세워졌으며 조현명이 찬하고 이덕수가 글을 썼으며 비신은 높이1.33m, 폭50cm, 두께17.2cm 이고 비대석은 높이1.5m 가로 90cm, 세로 45cm이다.
△ 달성 용봉동 석불입상
비슬산(琵瑟山) 일원에는 신라시대 이래의 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는데 용불동석불입상이 있는 곳도 그 중의 하나로서 석불과 기와조각만이 산재할 뿐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석불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한쪽 면에 광배와 양각의 서있는 불상을 조성했던 것으로서 왼손에 약호를 든 약사여래이다.
불상은 약식화 된 연화대 위에 조각한 것으로 하부의 표현은 빈약하나 머리는 소발에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가 있는 풍만한 상호가 나타나 있다. 양 어깨에 모두 옷을 걸친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다. 주형광배는 원형의 두광과 가는 타원상의 신광을 도드라진 선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불상과 광배의 이러한 조성기법은 통일신라 하대의 수법을 계승한 것이다.
□ 무형문화재
△ 하향주
유가면 음리에서 제조되고 있는 이 술은 주향이 은은하고 향기를 실은 듯하여 하향주라 이름 지어진 술인데 원래 유가주(瑜加酒), 음동주(陰洞酒), 백일주(百日酒), 하향주(荷香酒)등 4개의 이름으로 불리어 왔으나 유가주, 음동주는 음동일대에서 빚어지는 막걸리(동동주)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백일주라는 명칭은 숙성 기간이 그만큼 많이 소요되는 고급술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또한 재료가 국화, 찹쌀, 누룩, 비슬산의 맑은물 등을 사용하여 빚어 술의 맛이 연꽃향기가 나기 때문에 하향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중엽 비슬산(琵瑟山) 중턱에 위치한 도성암(道成庵)이 병란으로 전소되었는데 성덕왕(聖德王)때 도성암(道成庵)을 중수할 때 인부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임시로 토주를 빚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한다. 그 후 조선 광해군때 비슬산이 천년요새로 군사가 주둔하고 있을 때 주둔대장이 왕에게 이 술을 진상하였더니 독특한 맛과 취향이 천하약주라 칭찬받았다. 그 후 10월 상달에는 조정에 진상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조선중기(1680년경)부터 유가 음동 밀양박씨(密陽朴氏) 집성촌인 박씨 종가집에서 가양주로 전승되어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 즉 고부전승으로 100여년이상 4대째 전승되고 있음을 각종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 풍속
△ 혼인의례
전통적인 혼인의식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것이어서 육례에 의거한다. 육례라 함은 문공가례에 나오는 의혼,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의 여섯 가지이다.
의혼이라 함은 지방에 따라 납체라고도 하는데 '납기채택어녀씨야'로서 신랑 집에서 신부집에 혼인을 구하는 의례로서 납폐란 용어로 사용하는 곳도 있다.
둘째 문명은 '문기여씨지명(혹운문기생년월일즉사주)'이라 하여 혼인을 정한 여자의 장래 운수를 점칠때 사주와 연길을 한다. 생년월일과 그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 것을 이른다.
셋째 납길이라 함은 '귀복어묘득길비복이이자왕고혼인지사'라 하여 신랑집에서 혼인 날짜를 받아서 신부집에 통지하는 일이다.
넷째 납징은 '징성야이지납폐이성혼기야'라 하여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예물로 흔히 푸른 비단과 붉은 비단으로 한다. 혼서를 함께 보내는데 보통 밤에 보내는 것이 통례이다.
다섯째, 청기라 함은 '청성혼지기야'라 하여 신랑집에서 날을 택하여 그 가부를 묻는 편지를 신부집에 보내는 것이다.
여섯째, 친영이라 함은 '친왕영귀지가야'라 하여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음을 이른다. 이러한 육례에 따르는 혼인은 복잡하여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졌으나,구식혼인이라하여 향리에서는 간혹 이에 따르는 집안도 있다.
혼례식에는 여러가지 절차가 따르는데 혼례를 올리기 위해 신랑이 신부집에 가는 것을 초행이라 한다. 동행자로서는 신랑집을 대표하여 신랑의 부친, 또는 조부, 백부가 가며 이를 상객이라 한다. 그리고 혼례날이나 전일에 납폐를 하는데 함이라 하여 많은 예물을 보내는 경우가 있는데 예전에는 보통 신부 치마 저고리감 두벌 정도와 예장서라는 혼서지를 넣어 보낸다. 신랑 일행이 신부의 부락에 도달하면 신부집에서 대반 또는 인접이라 부르는 안내원이 나와 이들을 "정방"으로 안내한다.
정방이란 신랑이 신부집에 가기전 쉬는 곳으로 신부의 친척집이 보통이다. 여기서 요기를 한 후 사모관대를 입어 성장을 하고 함진애비는 납폐시에 맞추어 신부집에 들어간다. 신부집에서는 납폐에 대한 준비를 따로 멍석을 깔고 상을 놓고 병풍을 쳐 놓으면 함진애비는 함을 벗어 상위에 놓는다. 이 때 신부쪽에서는 다복한 여자가 이를 받아 안방으로 가져가 깔고 앉으며 "복많이 왔네!"하고 소리치면 신부 어머니는 함에 손을 넣어 처음 잡히는 옷감의 색이 무슨 색 인가를 본다. 납폐가 끝나면 곧 혼례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신부집 마당에 대례상을 마련한다. 이상을 친영상또는 교배상이라 한다. 신랑이 입장함으로써 이때 식순을 알리기 위해 많이 배운 노인이 홀기를 부르는 일이 많다.
대례가 끝나면 신랑은 사모관대를 벗고 신부집에서 만든 옷으로 갈아 입는다. 신부가 혼례를 치는 당일 시가로 가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당일우귀라 하고 삼일 신방을 치르고 가는 것을 삼일우귀라 한다. 신랑이 신방에 들어가면 주안상이 들어가고 신부의 쪽도리와 예복을 벗기고 잠자리에 드는데 이때 "신방엿보기"라 하여 그 폐해는 극심했다. 그리고 삼일이 지나면 신부가 시가로 가는데 이를 신행이라 한다. 신랑이 앞장서고 신부는 가마를 탄다. 신부가 시가에 와서 드리는 인사가 곧 폐백으로 구고례라고도 한다. 다음날 신부가 아침 문안을 드리는데 이는 보통 3일에 끝난다. 이로서 혼례는 끝이 나고 부부가 탄생되는 것이다.
오늘날 혼례는 많은 변화를 거쳐 간단한 의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이와 같은 혼례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 세시 풍속
㉠ 설날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이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라는 굴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곧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에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즐거운 시기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 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 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 차례: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상 뒤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에는 설음식[歲饌]을 갖추어 놓는다. 조상의 신주(神主), 곧 지방(紙榜)은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일 경우에는 제상 위에 세워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상을 차리는 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차례상 앞 첫째 줄에는 과일을 놓는다. 이때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둘째 줄에는 채(菜)나 나물류를 놓는데, 포(脯)는 왼편에 식혜는 오른편에 놓고, 또 마른 것은 왼편에 젖은 것은 오른편에 놓으며, 나물류인 김치·청장(淸漿)·숙채(熟菜)는 가운데에 놓는다. 세째 줄에는 탕(湯)을 놓는데, 다섯 가지 맛을 갖춘 탕으로 단탕(單湯)·삼탕(三湯)·오탕(五湯)·칠탕(七湯) 등이라 하여 어탕(魚湯)은 동쪽에 육탕(肉湯)은 서쪽에 소탕(蔬湯)은 가운데에 놓는다. 네째 줄에는 적(炙:불에 굽거나 찐 것)과 전(煎:기름에 튀긴 것)을 벌여 놓는데, 어류는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이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놓는데,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또 떡은 오른쪽에 면(麵)은 왼쪽에 놓는다.
세배: 설날 차례를 마친 뒤 조부모·부모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는데, 이를 세배(歲拜)라 한다.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설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하러 온 사람이 어른일 때에는 술과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이나, 아이들에게는 술을 주지 않고 세뱃돈과 떡, 과일 등을 준다.
설빔: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歲粧]이라고 한다. 이 설빔은 대보름까지 입는 것이 보통이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원일(元日)조에 따르면 남녀노소가 모두 새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陰)[설빔]'이라 한다 하였다.
덕담: 덕담(德談)이란, 설날에 일가 친척들과 친구 등을 만났을 때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빕니다." 등과 같이 그 사람의 신분 또는 장유(長幼)의 차이에 따라 소원하는 일로 서로 축하하는 것을 말한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원일(元日)조에도 설날부터 사흘 동안 시내의 모든 남녀들이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길거리에 빛나며,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새해에 안녕하시오?" 하고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한다. 예컨대 아들을 낳으시라든지, 승진하시라든지, 병환이 꼭 나으시라든지,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을 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원일(元日)조에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의 말을 하는데, 서로 축하하는 이 말을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문안비: 설날에 여자는 세배를 하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기 대신으로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 에 보내어 새해 인사를 전갈(傳喝)하는데, 이때 새해 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일컬어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 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준다.
설그림[歲畵]: 조선조 말까지의 풍속에, 설날 도화서(圖畵署: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에서 수성(壽星)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서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이를 '설그림(歲畵)'이라고 한다. 이는 축수(祝壽)하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수성이란 장수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말하는 것이고, 직일신장은 그날을 담당한 신인데, 이는 모두 도교의 신이다.
한 사람은 도끼를, 한 사람은 절월(節鉞)을 들고 황금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 (畵像)을 한 자 남짓 되게 그려서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설그림이라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검은 사모를 쓴 형상을 그려 대궐의 겹대문에 붙이기도 하며, 종규(鐘 )가 귀신 잡는 형상을 그려서 문에 붙이고, 또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니, 이것들은 다 사기(邪氣)와 역신을 물리치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궁가(宮家)와 척리(戚里:임금의 內戚·外戚) 집 문짝에도 붙이니,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받아 그림을 문에 붙였던 것이다.
복조리: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서 만든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한다. 전국에서 조리 장사가 이것을 팔기 위하여 초하루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인가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러한 풍속은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설날에 1년 동안 사용할 조리를 그 수량대로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 두고 하나씩 사용하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 신앙도 있다.
야광귀 쫓기: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니,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청참: 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로써 그해 1년 중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치는데, 이것을 청참(聽讖)이라고 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歲 酒]'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흰쌀을 빻아서 가는 체로 치고 그 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찐 후 안반에 쏟아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서 찰지게 한 다음, 한덩어리씩 떼어가지고 손으로 비벼 그것을 굵다란 양초가락만큼씩 길게 만든다. 이것을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이고, 쇠고기·꿩고기로 꾸미하여 후추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 제사 때에 제물(祭物)로도 차리고 또 손님에게도 낸다. 설날의 떡국은 지금은 쇠고기나 닭고기로도 끓이지만 옛날에는 꿩고기로 많이 하였다.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양의 둥근 것을 상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 술을 마시는데,《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정월 대보름
정월(正月)은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로서 그 해를 설계하고, 일년의 운세를 점쳐보는 달이다. 율력서(律曆書)에 의하면 "정월은 천지인(天地人) 삼자가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인 것이다.
정월 대보름날을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의 하나로, 삼원이란 상원(1월 15일), 중원(7월 15일), 하원(10월 15 일)을 말한다. 도가에서 이 날은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정월 대보 름(1월 15일)·7월 백중(7월 15일)·8월 한가위(8월 15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명일 (名日)은 보름을 모태로 한 세시풍속들이다. 대보름은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우리 문화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달은 생생력(生生力)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의하면 태양을 '양(陽)' 이라 하여 남성으로 인격화되고, 이에 반하여 달은 '음(陰)' 이라 하여 여성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여신-대지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 모신(地母神)으로서의 출산력을 가진다. 이와 같이 대보름은 풍요의 상징적 의미로 자리매김한다.
정월의 절일로는 설과 대보름이 있다. 태고적 풍속은 대보름을 설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대보름에도 섣달 그믐날의 수세하는 풍속과 같이 온 집안에 등불을 켜 놓고 밤을 세운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대보름을 8대 축일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겼던 명절이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대보름을 소정월(小正月)이라 하여 신년의 기점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는 대보름날을 신년으로 삼았던 오랜 역법의 잔존으로 보이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보름의 풍속은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고대사회로부터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겠다.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군들은 휴식을 취하며 농사준비를 한다. 예컨대 가마니짜기·새끼꼬기·퇴비만들기·농기구의 제작 및 수리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휴식으로만 일관되지는 않는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간의 창조를 위한 신성의례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제의(祭儀)와 점세(占歲) 및 놀이가 행해진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농촌에서는 마을공동제의로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하여 동제(洞祭)를 지낸다. 가가호호 성의껏 제비를 갹출하여 제비(祭費)를 마련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제관을 선출하여 풍요로운 생산과 마을의 평안을 축원하는 것이 바로 동제인 것이다. 또한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놀이로 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줄다리기는 줄당기기라고도 하며 주로 농촌에 전승되어온 점세적 농경의례(農耕儀禮)이다. 볏짚을 이용하여 암줄과 숫줄을 만든 후에 마을단위 혹은 군단위로 양편으로 나뉘어 줄을 당기게 되는데, 암줄이 승리를 해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 도 풍농을 기원하는 풍속으로 지신밟기가 있는데, 지신밟기는 정초부터 대보름 무렵에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흥겹게 놀아주고 축원해는 주는 것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 마당밟기·매귀(埋鬼)·걸립(乞粒) 등으로 불리운다. 이와는 달리 개인적인 의례로서,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스럼 깬다'하여 밤·호두·땅콩 등을 깨물며 일년 열 두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축원한다.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보면 상대방 이름을 부르며 '내 더위 사가라'고 한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 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아침 식사 후에는 소에게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이 오곡밥과 나물을 키에 차려주는데, 소가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아이들은 대보름날이 되면 '액연(厄鳶) 띄운다'고 하여 연에다 '액(厄)' 혹은 '송액(送厄)' 등을 써서 연을 날리다가 해질 무렵에 연줄을 끊어 하늘로 날려 보냄으로써 액막이를 한다. 주부들은 단골무당을 청하여 가신(家神)과 여러 잡신들을 풀어먹임으로써 가내의 평안을 기원하는데, 이를 안택(安宅)이라고 한다. 대보름날 밤에는 달맞이 풍속이 있다. 달맞이는 초저녁에 높은 곳으로 올라서 달을 맞는 것을 말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고 한다. 아울러 달의 형체, 대소,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달집태우기 풍속도 대보름날 밤에 행해지는데, 횃불싸움과 쥐불놀이 등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짚이 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위에서 쌓아 놓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른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을 맞이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볏가릿대세우기, 복토(福土)훔치기, 용알뜨기, 다리밟기, 곡식 안내기, 사발점, 나무그림자점, 달붙이, 닭울음점 등이 있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며,
복토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용알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을 기원하며,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다.
다리밟기는 12다리를 밟으면 액을 면하고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한다. 곡식안내기는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정초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이는 이시기에 곡식을 내게 되면 자기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속신 때문에 행해진 풍속이다.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아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종자를 담아 지붕위에 올려놓은 다음, 이튿날 아침 종자들의 행방을 보아 남아 있으면 풍년이고 날아갔거나 떨어졌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나무그림자점은 한자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자정무렵 그 나무 비치는 그림자의 길이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달붙이는 대보름 전날 저녁에 콩 12개에 12달의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묶어서 우물 속에 집어넣어 콩알이 붙는가 안붙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닭울음점은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이 우는 소리를 기다려서 그 닭울음의 횟수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대보름날에 행해지는 놀이로는 사자놀이, 관원놀음, 들놀음과 오광대 탈놀음, 석전, 고싸움, 쇠머리대기, 동채싸움 등이 있다.
대보름날의 절식(節食)으로는 햅찹쌀을 찌고, 또 밤·대추·꿀·기름·간장 등을 섞어서 함께 찐 후 잣을 박은 약반(藥飯)을 준비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조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가 왕을 깨닫게 하여, 우리 풍속에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하는 날로 정하여 찹쌀밥을 지어 까마귀 제사를 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 한 것으로 보아 약반절식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풍속이다. 이 약반은 지방에 따라 오곡밥·잡곡밥·찰밥·농사밥 등을 그 대용으로 즐기기도 한다.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타성(他姓)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 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 번 먹는다. 또 대보름의 절식으로 복쌈이 있는데, 이는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잎 등에 싸서 먹는 풍속을 말한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보름에 귀밝이술이라는 풍속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 이것을 귀밝이술이라 한다. 생각컨대 섭정규(葉廷珪,中國 宋代人)의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춘분 전후의 무일(戊日)에 귀밝이술[治聾酒]을 마신다고 했으나 지금 풍속에는 이를 보름날에 행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 영등맞이
영등은 바람을 일으키는 신으로, 천계에 살고 있다가 2월 1일에 지상에 내려와서 20 일에 다시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영등할머니는 딸 혹은 며느리를 데리고 2월 초하룻날에 내려 왔다가 3일, 15일 또는 20일에 하늘로 올라간다고 각기 다르게 믿고 있는데, 영등신앙은 주로영남 지방과 제주도에 분포되어 있다. 영등할머니가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 딸을 데리고 오면 일기가 평탄하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올 때에는 비바람이 몰아쳐 농가에 피해를 입힌다고 한다. 이는 인간관계에 있어 친정어머니와 딸은 의합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는 불화와 갈등이 있는데 그에 비유해서 일기의 변화를 짐작한 결과이다.
일기가 불순하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일기가 순조로우면 풍작을 바랄 수 있으니 영등할머니는 바람과 농작의 풍흉과 관계되는 농신(農神)의 성격을 가진다. 또한 영등할머니가 지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거센 바람이 일어 난파선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어부들은 이 기간 동안은 출어를 삼가며 일을 쉰다. 이와 같이 영등할머니는 농신이자 풍신(風神)이어서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농촌이나 어촌에서는 풍재(風災)를 면하기 위해 영등할머니와 그 며느리에게 풍신제(風神祭)를 올리는데 이를 '바람 올린다'고 한다. 특히 바람이 심한 제주에서는 '영등제'를 지내는데 '영등할망'이라고 불리는 여신이 섬 주변의 해산물을 증식시켜 준다고 믿고 있다. 영등할머니가 인간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금속(禁俗)이 있다. 즉 영등할머니를 맞이하기 위하여 황토를 파다가 문 앞에 뿌려 신성하게 하며, 대나무에 오색 헝겊을 달아 사립문에 매달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며, 창도 바르지 않고 고운 옷을 입는 것도 삼간다. 또 논밭 갈이는 물론, 땅을 다루거나 쌀을 집밖으로 내지 않는다. 한편 영등할머니가 하늘로 오르는 날비가 오면 풍년이 들고, 조금 흐려도 길하다고 한다.
㉣ 삼월 삼짇날
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옛말에 '삼질'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상사(上巳)·원사(元巳)·중삼(重三)·상제(上除)·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쓴다. 삼짇날은 삼(三)의 양(陽)이 겹친다는 의미이다. 최남선에 의하면 삼질은 삼일의 자음(字音)에서 변질되어 파생된 것이며, 상사는 삼월의 첫 뱀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삼짇날이 언제부터 유래하였는지 자세히 전하는 바는 없다. 최남선에 의하면 신라 이래로 이날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며, 이 풍속은 조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또 옛사람들은 3월의 첫 뱀날[巳日]을 상사(上巳)라 하여 명일(名日)로 여겼으나, 그후 상사일이 들쭉날쭉함을 불편히 여겨 마침내 3월 3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또한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 하는데, 경북 지방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좋다고 하고, 또 흰나비를 보면 그 해 상을 당하고 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집안 수리를 한다. 아울러 농경제(農耕祭)를 행함으로써 풍년을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 각처에서는 한량들이 모여 편을 짜 활쏘기를 하기도 하며, 닭싸움을 즐기기도 한다. 사내 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놀이를 즐기고, 계집아이들은 대나무쪽에다 풀을 뜯어 각시인형을 만들어 각시놀음을 즐기기도 한다.
각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시절음식을 즐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이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 둥근 떡을 만들고, 또 그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진달래 꽃을 녹두 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로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가루에 붉은색 물을 들여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하며 이것들은 시절음식으로 젯상에도 오른다."라고 하여 화전과 국수를 시절음식으로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시절음식으로 흰떡을 하여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속에 팥을 넣고, 떡에다 다섯 가지 색깔을 들여, 다섯 개를 이어서 구슬을 꿴 것같이 하는데, 작은 것은 다섯 개씩이고, 큰 것은 세 개씩으로 하는데, 이것을 산떡이라고 한다. 또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은 고리떡이 있다. 또한 이날에는 부드러운 쑥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쑥떡이라 한다.
㉤ 한식(寒食: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
한식의 어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자의(字意)대로 풀이하면 '찬밥을 먹는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한식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한식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의 여러 세시기(歲時記)에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삼월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산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올리는 풍속은 설날 아침, 한식, 단오, 추석 네 명 절에 행한다. 술, 과일, 식혜, 떡, 국수,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명절 하례 혹은 절사(節祀)라 한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풍속을 쫓는 가풍에 따라서 다소간 다르지만 한식과 추석이 성행한다. 까닭에 사방 교외에는 사대부 여인들까지 줄을 지어 끊이지 않았다.
상고하면 당 나라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儀)의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에 관한 기록된 문헌이 없었다. 그런데 공자가 묘를 바라보며 때에 따라서 제사지내는 것을 채택했으므로 이른바 묘제는 이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한식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이 신라시대에 우리나라로 전래되어 우리의 풍속에 맞게 사대명절에 속하게 되었다. 한식은 글자 자의대로 더운 음식을 피하고 찬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속신(俗信)이 있어, 한식 또는 한식날이라 하였다. 한식의 유래에 대해 중국에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중국 고사에 이 날은 비바람이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개자 추전설(介子推傳說)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진(晉)나라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간신에게 몰려서 면산(綿山)에 가서 숨어 있었는데, 진 문공(文公)이 개자추의 충성을 알고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도리없이 면산에 불을 놓았으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 날은 불을 쓰지 않기로 하고, 찬 음식을 먹었다."
경칩(驚蟄)과 춘분(春分)을 지나면서 음력 삼월(三月)이 되면 동장군(冬將軍)이 물러가고 겨우내 얼었던 대지는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한다. 봄은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이며 겨울 동안의 움츠림을 풀어헤치는 계절이다. 삼월의 절기로는 청명(淸明:양력 4월 5일, 6일), 곡우(穀雨:양력 4월 20일, 21일)가 있다. 이 무렵이 되면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농번기에 접어들어 농사일을 서두른다. 이 시기의 농사일로는 가래질, 논 둑 다지기, 논갈이, 못자리 만들기 등을 들 수 있다. 청명 무렵이 되면 논농사의 준비작업을 하는데, 겨우내 얼었던 논둑으로 논물이 새지 않게 가래질을 한다. 가래질을 마치고 쟁기로 논갈이를 하여 못자리를 만들면 곡우 무렵이 된다. 그 사이 볍씨를 일주일가량 물에 담가서 싹을 틔우고 가래질과 못자리를 장만하면 논농사는 반은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숨을 돌리게 된다. 한식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며, 어느 해나 청명 안팎에 든다. 한식은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들기도 하는데,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늦다고 한다. 이에 대해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어도 3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전하여 온다. 이 날 비가 오면 '물한식' 이라고 하여 그해에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또 한식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 아니라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매우 꺼려한다. 한식의 유래와 관련하여 이 날은 더운 밥을 피하고 찬밥을 먹는다고는 하나 잘 지 켜지지 않았다. 한식은 조선시대에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사대명절(四大名節)에 속했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제사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절사(節祀)라고 한다. 또 한 여러 가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성묘를 하기도 한다. 이때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떼를 다시 입히고 봉분을 개수하기도 하는데, 이를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그러나 한식이 음력 2월에 들면 사초를 하지만, 음력 3월에 한식이 들면 사초를 하지 않는것이 관례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한식날이 되면 내병조(內兵曹)에서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고 그 불을 홰에 붙여 각 관아와 모든 대신집에 나누 어주는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신화(新火) 를 만들어 쓸 때에 구화(舊火)를 일체 금지하던 예속(禮俗)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어서 한식은 조상을 위한 제례와 환절기 불조심을 위한 금화(禁火)의 의미가 강하다.
㉥ 사월초파일
전통적인 불교의식으로 조선조에 와서 많이 누그러졌다. 이날에는 남녀노소가 원근의 절을 찾아가서 축원을 하며 저녁나절 해가 지면 수박등, 연등, 마늘등, 친설등 잉어등, 거북등 갖가지 등을 켜 문 앞에 걸어놓고 축원을 한다.
㉦ 단오날
음력 5월 5일 연중 4대절의 하나로서, 우리말로서 '수릿날'이라 한다. 부녀자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몸에 좋다고 하여 창포물을 마신다. 또한 물맞이를 하면만병이 통치된다 하여 백가지 풀을 뜯고 또 먹으며 익모초 등 약초를 캔다. 머리에는 궁궁이를 꽂으며 그네뛰기를 한다. 또한 남자들은 씨름을 하며 많은 놀이와 굿도 한다.
㉧ 유두
음력 6월 15일로 동국세시기에 보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상한 것을 없앤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용신제 농신제를 지낸다 또한 떡을 해서 논가에 뿌려 놓는데, 이는 물이 논에서 새지 말라는 기원이다.
㉨ 칠석
음력 7월 7일 농가에서는 으례 비오는 날로 알고 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 하여 사람들은 밤에 은하수를 바라보며, 두 사람의 해후를 기꺼워하고 밤을 새우는 풍습이 있다.
㉩ 추석
음력 8월 15일로 중추절, 가배, 가윗날이라 한다. 우리 고유의 명절 중 가장 규모가 큰 명절로서 결실을 기뻐하며 햇곡식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추석에는 줄다리기, 그네뛰기, 강강수월래 등을 하며 보름달을 보며 기원한다.
㉪ 중양절
음력 9월 9일 일명 중구일이라 한다. 9가 양수이기 때문에 양수가 겹친 날이다. 이 날은 제비가 가는 날이라고 하며 이날 성묘도 한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국화를 따서 국화전을 하는데 이 지방에도 이런 풍습이 있다.
㉫ 시월상달
음력 시월을 "상달"이라 하여 집집마다 백과를 마련하고 시루떡을 해 나눠먹는다. 또한 "성주"단지를 모시고 "삼신쌀"을 모셔 놓는다.
㉬ 동지
팥죽을 끓여 재앙을 없애며 팥죽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이날을 아세라 하여 적두죽을 먹는다고 되어있다. 또한 불교 신도들은 원근 절을 찾아가 동지불공을 올린다.
㉭ 납일
섣달에 납일이 있어 저육을 먹는 풍습이 있다. 또한 참새를 잡아 아이들에게 먹이면 마마를 않지 앓지 않는다고 한다.
□ 축제
△ 비슬산 참꽃제
기 간 : 매년 5월 하순경
장 소 : 비슬산 자연휴양림 일원
관광예상인원 : 12만 명 정도
주 최 /주 관 : 달성군 / 달성문화원
주 요 행 사 : 기념식, 산신제
행 사 내 용 : 민속놀이마당, 한지·도예체험
모형항공기대회, 천연염색·비누체험, 꽃꽂이전시회, 사진전시회 및 각종 일일문화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