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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현황 |
□ 자연생태환경 특성
소백산맥 南東사면에 위치한 西高東低형의 지형으로 낙동강 본류가 동부지방을 관통하여 산과 물, 자연자원 풍부하고 자연경관 또한 수려하다.
경북 서북부 내륙지방으로,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국도 3호선국도 25호선 교차하는 교통 요충지이다.
동쪽으로 남류하는 낙동강 상류를 따라 분지와 저지가 발달하였고, 서쪽은 소백산을 끼고 있어 서고동저의 지세를 이룬다. 대표적인 산으로 동부에 노음산과 갑장산, 서부에 속리 ․ 형제봉 ․ 팔음산 ․ 포석봉, 남부에 국수봉, 북부에 남산 ․ 작양산 등이 있다. 낙동강이 군의 동부를 남류하는데, 이안천이 군의 북부를 동류하고 북천과 남천이 군의 중앙을 동류하며 위천이 의성 쪽에서 서류하여 각각 낙동강에 합류한다.
석천은 서부산지에서 발원한 후 서남주를 남류하여 영동군 횡간면으로 흘러 들어가 금강에 합류한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농경지로 적합한 넓은 평야가 발달하였는데, 군의 동북부에 사벌평야와 함창평야 등이 있고, 청리 ․ 공검 ․ 낙동 ․ 공성 등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산간지대로 계곡을 따라 좁은 평지가 있다.
경상북도의 서부, 소백산맥의 산록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부산지와 서부산지가 남북으로 뻗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남천과 북천이 이루는 넓은 들판에 위치하였다. 동부에는 갑장산, 서부에는 천봉산이 있다.
시내는 주로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의 지질로 되어 있다. 북부에는 속리산(俗離山:1,057m)과 남쪽에는 백화산(白華山:933m) 등 1,000m 내외의 고준한 산이 솟아 있으나 일반적으로 동남부는 저평하여 경지가 넓고, 특히 동쪽을 흐르는 낙동강 유역은 넓고 비옥한 지대를 이루고 있다.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감편마암류가 주류를 이루며, 이를 관입한 설록암과 그 위를 피복한 제4기의 충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형성 현황 |
□ 역사
경상북도 서북쪽 내륙에 위치한 도농복합형 도시인 상주는 낙동강을 낀 비옥한 토지를 가진 곡창지대로서 물자가 풍부하며, 성읍국가시대부터 사벌국으로, 고령가야국의 부족국가로 번성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전국 9주로, 고려시대 때는 전국 8목의 한 곳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하는 등 웅주거목의 고도였다. 또 낙동강 하류의 각 지역 조창(곡식을 세금으로 거두어 보관하는 창고)에서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뱃길의 종류지였으며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낙동강 700리’의 마지막 지점이었다.
△ 선사시대
상주지역은 구석기 이래로 사람들이 생활하였음이 최근 신상리 구석기 유적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신상리 구석기 유적의 존재는 영남내륙에서 확인된 가장 오랜 유적으로 상주지역이 구석기 이래로 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하였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상주지역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은 지석묘, 입석 그리고 주거지역이다. 지석묘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그릉 사면이나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소하천변에 위치한 평지가 야산과 연결되는 구릉 사면에 군집을 이루어 위치한다. 현재 상주시 헌신동, 부원동, 중덕동 등 약 10개소 이상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대체로 5~10기가 하나의 군집을 이루어 위치하며, 이들 가운데 정식으로 발굴조사된 것으로는 청리 지방공단조성사업 사전조사에서 조사된 15기가 있다.
청리유적에서 조사된 15기는 경사면 위쪽과 아래쪽 2개 군(群)으로 나뉘어져 소규모 군집을 형성하고 있다. 축조 형태는 지석묘의 상석(上石)이 하부 석관(석곽)의 뚜껑 역할을 하는 개석식(蓋石式)이다.
유물은 석검(石劍), 석촉(石鏃) 등 석기류와 홍도, 완(?) 등 토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그리고 입석은 상주시 부원동, 중덕동, 헌신동 등에 다수 분포하는데, 지석묘군과 유사한 분포를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밖에 상주시 남적동, 낙동면 구잠리, 사벌면 금혼리 등 여러 곳의 무문토기와 석기 산포지가 알려져 있다.
△ 삼국시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상주에 사벌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및 열전에 의하면 신라 점해왕(247~261)때에 신라에 속해 있던 사벌국이 태도를 바꾸어 백제에 귀부 하였고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강화 했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므로 석우로 장군을 보내어 정복했다고 적혀있어 사벌국은 백제와 신라의 영토 확장에 눌려 서기 249년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B.C 1세기경 함창지역에 고령가야국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신라 점해왕 때에 신라에 병합된 사벌국은 법흥왕 12년(525년)에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여 이등(伊登)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는 지방구획을 5州로 나누고 지방장관을 군주라 했다. 이때부터 신라에 편입되어 5개州의 하나가 되었다.
‣ 전국 5州 설치 현황
①上州(상주) ②下州(창영) ③한산주(경주) ④실직주(삼척) ⑤비래홀주(안변)
진흥왕 13년(552년)에 군사조직으로 5州에 6정(停)을 두어 상주정(尙州停)에 1개 군단(軍團)을 설치하였다.
진덕여왕 2년(648년)에 김유신장군을 상주행군 총관(摠管)으로 임명하여 신라가 백제와의 싸움에 전방기지로 활용하는 등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태종 무열왕(660년)이 김유신, 품일, 흠춘의 군사를 백제정벌에 출전시키는 등 금돌성(今突城)에 37일간 머물다가 백제의자왕의 항복 보고를 받고 부여 소부리성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금돌성은 현존하는 신라시대 가장 오랜된 石城이다 - 국방유적 사적 30호)
‣ 백제 정벌의 전진기지 역할
문무왕 13년(673년) 상주정을 귀당(貴幢)으로 승격개편하여 삼국통일 이후도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신라의 군사편제는 정(停)과 당(幢)으로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군영(軍營) 군단(軍團) 부대(部隊) 등에 해당되었고. 대당(大幢)은 수도인 경주부근에 귀당(貴幢)은 지방의 중요한 군관구(軍管區)에 두었다.
△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5년(685년) 지방행정을 개편하면서 전국을 9州 5小京으로 편성하였는데 상주는 9州에 속 하여 주치소(州治所)가 설치되었다.
‣ 9州 현황
① 尙州(상주) ② 良州(양산) ③ 康州(진주) ④ 熊州(공주) ⑤ 全州(전주) ⑥ 武州(광주광역시) ⑦ 韓州(경기도 광주) ⑧ 朔州(춘천) ⑨ 溟州(강릉)
신문왕 7년(687년)에 상주성을 축조하였다. 성곽규모는 王山을 중심으로 쌓은 석축(石築)으로 둘레 1,549철, 높이 9척이며, 東門을 공락문(控洛門), 西門을 읍로문(相露門), 南門을 홍치구루(弘治 舊樓), 北門을 현무문 (玄武門)이라 하였으며, 성안에 태평루(太平樓) 사령청(司令廳) 상산관(商山館) 등 22개 공공기관과 21개 우물(井), 2개 연못(池) 등이 소재하였다고 각종 자료에 남아 있다.
경덕왕 16년(757년)에 사벌주를 오늘날의 尙州로 개칭하고 혜공왕 12년(776년)에 1州 10郡 30 懸 을 관할하였다. 상주에 소속된 郡懸은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 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북의 청원·보은·옥천·영동· 황간 일대가 관할에 속하였다.
‣ 주(州)의 長官 명칭은 종래의 군주에서 총관, 도독(都督)등으로 개칭되었는데 오늘날의 道에 해당되었고 郡에 太守, 懸에 令을 두어 중앙관리가 배치 되었다. 신라의 지방제도는 행정적 의의와 함께 군사적인 의의도 매우 중요시 되었다.
진성여왕 6년(889년) 정치문란으로 각지방의 호족세력과 농민의 봉기가 있었는데 상주에는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폭동이 있었다. 이것은 신라몰락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북원의 양길과 궁예, 견훤 등의 후삼국 형태로 발전하였다성(城)은 여러 종류의 명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지리적으로 구분하면 산성(山城), 평지성(平地城) 등으로 나눌 수 있고 형태적으로 보면, 만월성(滿月城), 반월성(半月城), 장성(長成) 등으로 나누며 재료를 중심으로, 토성(土城), 석성(石城), 목책(木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구릉지 등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읍성(邑城)을 이용하였지만, 전투 시에는 주로 산성을 이용하였다. 산성은 대개 도시중심지역 부근의 험준한 산위에 방어벽을 쌓아 병기·군량·연료 등을 저장하거나 사람의 주거 및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우물 등을 확보해야 한다.
견훤산성은 자연암반과 계곡을 이용하여 산 정상부분에 4각형으로 쌓았는데 건물터와 우물형태 등이 남아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속리산 문장대 및 관음봉 일대와 청화산·도장산 등 사방을 관망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효공왕 8년(904년)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상주를 침입하여 30여 성(城)을 취했으며, 경명왕 2 년(918년) 병풍산성에 웅거하던 견훤의 아버지이자 상주의 유력한 호족인 아자개(阿慈蓋)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견훤의 본성은 이씨인데 후에 견씨(甄氏)라 하였다(삼국사기)
왕건즉위 18년(935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의지했고 양주(양산)을 식읍으로 받았다.
△ 고려시대
성종 14년(995년) 오늘날의 도제(道制)를 최초 실시하여 전국을 10道로 나누고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지방장관인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였다. 상주는 영남도(嶺南道)라 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12주 48현을 관할하는 절도사가 위치하였다.
이때 경주는 영동도(嶺東道)라 하여 경남지역 9주 35현, 진주는 산남도(山南道)라 하여 역시 경남지역 10주 37현을 소관하였다.
‣ 전국 10道 영역현황
① 관내도(關內道 : 경기·황해도)
② 중원도(中原道 : 충청북도)
③ 하남도(河南道 : 충청남도
④ 강남도(江南道 : 전라북도)
⑤ 영남도(嶺南道 : 경상도 일부)
⑥ 영동도(嶺東道 : 경상남도 일부)
⑦ 산남도(山南道 : 경상남도 일부)
⑧ 해양도(海陽道 : 전라남도)
⑨ 삭방도(朔方道 : 강원·함경남도 일부)
⑩ 패서도(浿西道 : 평안도)
오늘날 경상도 지역을 일명 영남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千年前 영남도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현종 3년(1012년) 상주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설치하여 경주와 진주를 관할하였고 同 5년 (1014년)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경주로 옮기고 안무사(安撫使)를 설치하였다.
고려시대 왕명 및 공문서 전달, 지방관 및 관원의 파견, 특수물자 수송 등을 위하여 전국에 525개소의 역참(驛站)을 정비하였고 중요 간선도로를 주요지명을 따서 22道로 나누었다. 이중에 상주를 거쳐가는 尙州道의 속역(屬驛)은 유곡(문경), 낙동(상주), 철파·안계(의성), 지보(용궁), 송제(임하), 문거(청송) 등 25역이 있었고 경산부도(京山府道)는 낙산(상주), 김천, 안림(고령), 회동(영동) 등 25역이 있었다.
‣ 역참 : 역말을 갈아타는 곳으로 오늘날의 우정(郵政) 또는 숙박업소 등의 역할을 하였다.
현종 9년(1018년)에 전국을 5道·兩界·4都護·8牧制로 정비하였는데, 이 제도는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 때부터 상주는 목사(牧使)가 설치되었고 상주목(尙州牧)은 관내 7郡 18懸 2知事府를 지휘·감독하는 계수관(界首官)이었다.
당시 상주목 관할은 문경·용궁·개령·보령·함창·영동·해평군(의성·군위 등 17현)의 7개 군과 안동부의 임하·예안·의흥군(봉화등 10현)을 비롯한 경산부의 고령군(대구·칠곡등 10현)이 소속되었다.
‣ 전국 8牧 현황
① 상주(尙州) ② 광주(廣州) ③ 청주(淸州) ④ 충주(忠州)
⑤ 진주(晋州) ⑥ 전주(全州) ⑦ 나주(羅州) ⑧ 황주(黃州)
지방장관인 절도사는 지방관리의 행정을 사찰하고 승진과 면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후에 안찰사, 안렴사, 도관찰출척사등 여러명칭으로 바뀌었다.
고려 고종 41년(1254년) 몽고군의 6차 침입시 몽고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충주산성·상주산성을 공격 하였으나, 상주산성은 은척 황령사 승 홍지(洪之)의 반격으로 과반수를 잃고 남쪽으로 물러갔다.
충숙왕 원년(1314년)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한 이후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러고 있다. 오늘날의 경상도 명칭은 이 때 탄생하였다.
△ 조선시대
경상도 감영(監營)이 고려말에는 경주에 있었으나 태조 원년(1392년)에는 상주목(尙州牧)에 설치하였고, 태종 8년(1408년) 8월까지 4명의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 하였다.
‣ 목사(牧使)
대개 행정구역 명칭이 州로 되어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직급은 정3품이지만 보다 높은 품계를 가진 사람이 임명되는 경우가 있어 정2품이 임명될 경우에는 영목사(領牧使), 종2품일 경우에는 판목사(判牧使)라 하였다.
지방수령 중 가장 품계가 높은 것은 종2품의 부윤으로 관찰사와 격이 같았으며, 관찰사가 부윤을 겸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부윤을 설치한 곳은 평양·함흥·의주·광주·경주 등이 있었다.
군사적인 용도로 설치한 대도호 부사는 안동·강릉·영변·창원·영흥등에 설치하였다.
지방장관인 관찰사는 종2품으로 행정·사법·군사권을 장악 하였고 임기 동안 관찰을 순력(巡歷) 하는 행영체제(行營體制)였으나, 조선중기 임진왜란 이후 유영체제(留營體制)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2년이었다. 보좌관으로 도사(都事)·판관(判官)등이 있었다.
태종 13년(1413년)에는 전국을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함경·평안도의 8道로 나누어 지방체제를 정비했다. 이 때 道 단위간의 구역조정이 있었으며, 오랫동안 상주 관할에 속하였던 청원·옥천·보은·영동·황간 일대가 충청도에 이관되었다.
조선초기의 지방제도가 고려말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지만, 태종때에 이르러 비로소 주명위주 (州名爲主)로 道名을 바꾸어 8道체계를 확립하였다.
당시 상주 관할의 경상도는 오늘날의 부산·대구·울산광역시와 경상남·북도를 포함한 지역으로서 전국 지방제도 중 가장 넓은 면적이었다.
‣ 8道 지방체계 및 감영(監營) 설치 현황
① 경기도(한성) ② 강원도(원주) ③ 전라도(전주) ④ 황해도(해주)
⑤ 평안도(평양) ⑥ 함경도(함흥 또는 영흥) ⑦ 충청도(충주) ⑧ 경상도(상주)
경상도가 타도(他道)에 비하여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어 태종 7년(1407년)에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은 右道, 동쪽은 左道로 구분하여 右道감사는 상주목사가, 左道감사는 경주부윤을 겸한적이 있었다.
조선 세조 3년(1457년) 각 道에 군사조직인 진(鎭)이 설치되어 상주목은 목사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두었다가 곧 진으로 환원되었다. 세종 30년(1448년) 7월에서 단종 2년 7월까지 6년간 4명의 경상감사가 상주목을 겸하였고, 세조 11년 (1465년) 9월 도관찰출척사를 관찰사로 고쳐 부르게 하여 조선후기까지 이어 졌다.
연산군 3년(1564년) 11월 이극균(李克均)이 경상우도 지도(慶尙右道 地圖)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종 14년(1419년)에도 경상도 업무가 과중하다 하여 종전처럼 구분하여 우도감사(右道監司)는 상주 목사를 겸하고 좌도감사(左道監司)는 경주부윤을 겸하게 하는 등 일시적으로 2명의 감사를 두기도 하였으나 곧 환원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도로가 불통하여 左道는 경주, 右道는 상주에 감영을 설치하였 으며, 同 26년(1593년)에 다시 환원하여 星州의 칠곡현(현재의 칠곡군)에 임시 감영을 설치하고, 同 28년 (1595년)에는 다시 左·右道로 나누어 감영을 분리하였으며, 同 29년(1596년)에는 달성군에, 1599년 (선조 32∼33년)에는 안동에 임시 설치하였다가 1601년(선조 34년)에 대구로 옮겼다.
1592년 11월 상주 가판관(假判官) 정기룡이 尙州城을 탈환하였다.
‣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201년간 상주에 설치한 경상감영이 임진왜란 7년을 통하여 수차례 감영을 옮기는 수난을 당한 것은 1592년 4월 북상하는 왜군을 상주에서 맞닥뜨린 이일(李鎰)의 관군이 북천(北川)에서 대패(大敗)하여 상주성이 함락되고 신립(申砬)마져 충주에서 전사하여 서울에서 남쪽으로의 교통이 마비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상주 감영은 대구 감영이 정착되어 韓末(1894년)까지 존속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선조 35년(1602년) 정경세(鄭經世)등이 임란후 만연하는 질병(疾病)을 퇴치할 목적으로 청리면 율리에 민간 최초의 사설의료기관 존애원(存愛院)을 건립하였다.
영조 25년(1749년) 상산지(商山誌)를 증보할 당시 상주목 관할 31懸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동·내서·내남·내북·중북·중동·단동·단서·단남·단북·외동·장천·청동·청남··공동·공서·공남·모동·모서·화동· 화서·화북·은척·외서·외북·영순·산동·산서·산남·산북·대평)
고종 6년(1869년) 10월 임진난(1592년)후 폐허된 尙州城을 목사 남정학이 수축중 이임하자 1870년 후임목사 민치서가 北門등 4대문을 중수하고 1871년 목사 조병로가 계속 수축하였다.
△ 근대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으로 8道 지방제도는 폐지되어 23府 331郡으로 개편되었다. 이것은 大지역주의에서 小지역주의로 전환된 것이며, 道이하의 府·牧·郡·懸을 모두 郡으로 일괄 정비하여 지방행정체계를 단일화하고 府에는 관찰사를 설치하고 郡에는 郡守를 두었다. 이때 상주목은 상주군 (23面 관할)으로, 함창현은 함창군으로 되어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하여 전국 23府를 13道로 정비하였다. 이때 경상도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구분되고, 名郡은 영역의 大小에 따라 구분되어 상주·경주는 一等郡으로, 대구· 성주·의성· 안동은 二等郡, 함창은 4等郡이 되는 등 41개군이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1905년 11월 4일 상주출신 위암 장지연(張志淵)선생이 을사조약의 강제체결과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게재하여 정간처분을 당하였다.
대한제국 고종 광무 9년(1905년) 전국을 8도로 개편하고 상주군은 31면에서 22면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전국은 13道 3,335面, 경상북도는 41郡 507面으로 정비되었고, 상주군은 당초 31面에서 21面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단동·단서·단남·단북의 4면은 비안군(比安郡: 지금의 의성군)에 영순·산동· 산서·산남·산북의 5面은 문경시에 넘겨주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 9월 30일 도의 관찰사를 장관으로 개칭하고 府에 부윤, 郡에 군수, 面에 면장을 두었다. 1912년 시가지 및 도로정비 명목으로 尙州城이 훼철되고 1924년 최종 남아있던 南門마저 없어 졌다.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은 12府 218郡 2,517面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함창군 7面이 3面으로 개편되어 상주군에 편입되었고, 상주군 22面은 15面으로 개편되어 상주군은 18個面으로 정비되었다.
1917년 6월에는 面制가 공포되어 面에서는 교육사무를 제외한 관내의 모든 공공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1919년 8월에는 道의 장관을 도지사(道知事)로 개칭하고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1931년 4월 1일 읍면제(邑面制)실시로 상주面이 邑으로 승격하여 상주군은 1邑 17面을 관할하였다.
△ 현대
1945년 이후 우리지역은 정치·경제·군사 등의 중심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우리지역을 비켜가게 되었고, 낙동강을 이용한 水運 역시 그 역할을 철도에 넘겨 주었으며, 상공업 발달에 따른 농업지역으로서 남게 된 것이 낙후의 요인이었다.
1949년 7월 4일 법률 제32호로 공포되어 같은 해 8월 15일 시행된 지방자치법에 의거 지방행정조직은 특별시, 도, 시, 군, 읍,면, 리, 동으로 하였다.
1966년 7월 1일 모서면 서부출장소등 5개 출장소가 설치되고,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가 문경시 가은읍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상주읍에 중부 등 4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0년 12월 1일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1월 1일 상주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89 년 1월 1일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윤직 2리)가 점촌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4월 1일 화북면 남부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1일 市·郡이 도농복합시로 통합되어 1읍 17면 7동이 되었다. 1995년 7월 1일 민선1기 지방자치가 실시되었고, 1998년 7월 1일 민선2기 지방자치가 출범되었다.
1998년 10월 12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앙동이 동문동으로 편입되어 1읍 17면 6동이 되었다.
□ 행정구역 및 재정규모
△ 행정구역
1邑 17面 6洞 4출장소 488統里 2,057班
△ 행정기구
2국 2담당관 16과 2직속기관 8사업소
△ 공무원
정원 1,155명(본청/의회/직속기관/사업소 735, 읍면동 420)
△ 재정규모
3,136억원(일반회계 2,891, 기타특별회계 139, 공기업 특별회계 106)
→ 재정자립도 : 11.8%
□ 인구 - 12만 2,277명(2001.12)
상주시의 인구는 1999년 12만7천명에서 2005년 말 현재 11만명으로 약0.86%의 인구 감소율을 보이고 있으나, IMF이후 인구 감소세가 약간 둔화 현상을 보이고 있음.
△ 토지이용
상주시의 총면적은 1,254.82㎢ 로 남한면적(99,274㎢ )의 1.3%를 차지하고 경상 북도면적(19,022㎢ )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서울특별시의 2배 크기의 면적으로 전국 기초지방 자치단체 중 여섯 번째로 넓은 지역이다.
면적별 구성요소는 소백산맥의 천황봉, 문장대, 백화산, 갑장산, 노음산을 비롯하여 견훤산성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임야가 840.94㎢ 로서 67%를 차지하고, 논면적이 15%인 188.33㎢ , 밭면적이 7%인 91,05㎢ , 도로 하천등 기타면적이 134.64㎢ 로 11%를 차지하고 있다.
△ 교통
상주시를 경유하는 교통망은 중부내륙고속도로, 국도3호선, 25호선, 지방도6개 노선, 철도가 관통하고 현재 상주-청원간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에 있으며, 상주-영천간 고속도로 건설이 예정되어 있음.
상주시의 도로 포장율은 85.0%로 전국 도로 포장율(76.7%), 경북(73.1%)에 비해 비교적 높음.
고속도로 연계체계는 중부내륙고속도로는 2개의 IC를 통해 직접적인 연결망으로 되어 있고, 영동고속도로 여주 분기점을 통하여 수도권 지역 및 강원도 지역과 연계가능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약2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음.
국도의 연계 체계는 남북간을 연결하는 3호선 국도와 동서간을 연결하는 25호선 국도 그리고 이들과 인접한 37호 및 59호 국도가 있어 물류의 이동이 용이하고, 수도권과 경남․ 북의 연계성을 높이고 있음.
□ 산업
주시 산업별 취업구조를 보면 농림업인구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여 경북도내에서도 농업의 비중이 약 46%로 가장 높음
그러나 광공업이나 도소매업 및 숙박, 운수창고업 등은 경상북도 평균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함.
△ 사회형성의 특징
쌀 누에고치 곶감으로 유명한 三白의 고장으로, 한국농업을 선도하는 농업의 중심지 ⇒ 곶감 육계(전국 1위), 쌀 배 오이(경북 1위), 사과 포도(경북4위)
전국제일의 자전거 도시로, 한방 바이오산업과 더불어 자연과 환경,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생태 환경 도시로 각광
개발 가능지가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기업입주의 적지
지역인구의 점진적인 감소와 고령화 사회로의 진전
문화자원 |
□ 생활문화의 특성
과거 영남을 오고 가는 교통수단 중에서 물류이동의 대표적인 것이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 방법이었다. 낙동강 수운종착지가 상주의 낙동나루터였고, 수운을 통해 발생하는 물류척치, 물물교환 및 판매의 시장, 시장을 통해 형성되는 경제, 경제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사회연동 현상, 역동성이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문화가 이곳에서 생겨났다.
즉, 영남의 대부분 거래문화가 이곳 상주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동,영주,봉화,의성,예천,문경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나 약초들이 여기에 모이고 부산, 구포, 남지, 창녕 등 하류쪽 특산물인 소금, 생산, 농산물 등이 여기에서 나눠진다.
이런 영향으로 상주는 과거부터 교통의 요지였고 낙동강시장의 중심이었다. 나루터 수운문화가 우리를 떠난 오늘에는 도로문화가 옛 상주의 활황성을 밀어냈지만 오늘날 도로교통에서도 김천으로, 속리산으로 제천 ․ 단양으로, 안동으로 사통팔달의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상주는 예부터 ‘삼백문화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 ‘삼백문화의 도시’ 상주
삼백이란 이곳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산물이 흰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연유되었다. 쌀과 곶감과 누에가 그것이다.
현재 누에고치는 함창지역에서 일부 생산되기는 하나 옛모습은 거의 없어지고 명목이 유지되는 정도다. 삼백의 농산품 중에서 곶감은 전국 제일의 양과 품질을 자랑한다. 상주에서 생산하는 곶감이 전국시장의 65%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가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 ‘자전거 도시’ 상주
상주는 주민들의 지역 내 왕래 교통수단이 대부분 자전거다. 대도시 등에서 환경을 논하기 전부터 이곳은 자전거를 통해 환경생활을 실천하였다. 환경파괴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를 구하고자 매연 풍기는 차량보다 건강에도 좋은 유산소기구인 자전거를 권장하는 환경단체들이 세계 안에도 많은데, 상주 사람들은 훨씬 이전부터 이 생활에 젖어 있는 것이다.
△ 축제의 도시
환경시대에 접어들어 2000년부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자전거 생활을 가치 있게 구현하고 세계의 생활환경 추세를 접목시켜 ‘상주전국자전거축제’를 매년 열고 있다. 낙동강 유역 곳곳에서 경쟁적으로 열고 있는 친환경생활체육인 ‘환경마라톤’, ‘인라인축제’ 등과 어울리며 이곳은 낙동강 안에서 생활체육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 낙동강 생태환경복원사업 관련 : 상주보
△ 상주보 디자인 개념
㉠ 오복동 전설 반영, 앤드락(AND樂)'을 컨셉
㉡ 자전거의 도시 상주와 낙동강의 시작, 낙동강의 심장, 행운과 오복, 풍요와 즐거움을 표현
□ 설화 - 경천대
경천대는 수려한 경관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이 젊었을 때 이곳에서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 정기룡 장군의 설화
용마는 경천대 아래, 물이 휘돌아 돌아가는 공간이 '용소'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경천대에서 모래사장 건너편으로 뛰어노는 용마를 발견한 정기룡장군이 이를 잡아서 전쟁시에 유용하게 쓰겠다는 생각으로 잡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허수아비를 백사장에 세워놓고 기다렸는데, 처음에는 말이 거들떠오 안 보다가 나중에는 차츰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나중에는 허수아비 곁에 와서 몸을 부벼대기까지 하자, 이때 허수아비로 분장한 정기룡 장군이 가면을 벗고 그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기룡 장군은 이 용마와 함께 임진왜란 중 금산 싸움에서 단기필마로 혼자서 적을 무찌르고 조경장군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하며, 경천대에는 그때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 구유(말먹이통)가 남아있다.
△ 오복동의 전설
우리나라 설화에서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곳 중의 하나가 오복동이란 곳이다. 우연히 사람에 의해 발견된 오복동은, 다시 그곳을 찾고자 찾아간 사람들에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어떤 사람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쫒아 산 중으로 깊이 들어갔다.
사슴이 어떤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도 이어서 굴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들어 간 곳에서 그는 안전에 사람 사는 일촌락을 발견하였다. 그 촌민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옛날 난을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가 그 촌락을 건설하였으며 그들은 다시 세상과 교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자손손 그곳에서 행복스럽게 생활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 사람이 혹 오복동을 찾아가려고 하더라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 현재의 모습
현재 오복동의 전설을 반영한 상주보는 ‘앤드락(AND樂)'을 컨셉으로 자전거의 도시 상주와 낙동강의 시작, 낙동강의 심장, 행운과 오복, 풍요와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소수력발전소는 수량과 요율이 우수한 카프란 수차를 선정, 유지관리의 편리하게 했고 어도는 100분의 1 경사의 자연형 수로식으로 설치, 환경친화적이다.
△ 낙동강 중류의 경천대
영남의 상징이자 젖줄인 낙동강이 감싸 안은 “삼백의 고장” 상주는 성읍국가시대부터 사벌국, 고령가야국의 부족국가가 번성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전국 9주, 고려시대에는 전국 8목중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하는 등 웅주거목의 고도로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자리해 왔다. 또한 누란의 위급한 국난을 극복할 때에도 충과 효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앞세운 수많은 충신과 지사가 있어 자랑스러운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경천대는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1,300여리 물길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의 칭송을 받아 온 곳으로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일명 자천대(自天臺)로 불리는 경천대와 낙동강물을 마시고 하늘로 솟구치는 학을 떠올리게 하는 천주봉, 기암절벽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울창한 노송숲과 전망대, 조선 인조15년(1637) 당대의 석학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닥던 무우정과 경천대비, 임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용마전설과 말먹이통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명승지와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경천대 관광지내에는 전망대, 야영장, 목교, 출렁다리, MBC드라마 상도”세트장,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및 식당, 매점 등이 갖추어져 있고, 소나무 숲속의 아담한 돌담길과 108기의 돌탑이 어루러진 산책로와 맨발체험장 및 황토길이 있다.
인근에는 “전 사벌왕릉”과 “전 고령 가야왕릉”, “화달리 3층석탑”,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유적지인 “충의사”, “도남서원”등 여러 문화유적지가 있으며, 상주활공장, “MBC드라마 상도”세트장(중동), 상주예술촌 등이 있어 가족과 함께 편안한 휴식과 관광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돌탑과 황토길) 각광받고 있다.
□ 문학 - 경천대(봉산곡)
봉산곡은 조선 인조 때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지은 가사(歌辭)이고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한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인조로부터 호가(扈駕)를 명령받았으나, 칭병(稱病)하고 거절하자 3년간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 후일 임금(인조)이 다시 부르자 감격하여 이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정과 자연에 대한 애착을 읊었다.
가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가노라 옥주봉(玉柱峯)아, 있거라 경천대(擎天臺)야, 요양만리(遼陽萬里) 길히, 머더야 언마 멀며, 북관일주년(北館一周年)이 오래다 한랴마난…." 모두 101구로서 3·4조 또는 4·4조로 되어 있다.
또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후일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도 볼 수 있다.
□ 낙동나루
낙동나루는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을 연결한 곳이다. 낙동강 1천3백 리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수많은 나루 중 한때 최고 최대의 상권을 자랑했고, 조선시대에는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4대 수산물 집산지였을 만큼 큰 나루였다. 낙동강 7백 리라는 말도 여기서 생겼다. 부산에서 상주 낙동나루까지의 거리가 7백 리라고 한다.
낙동나루에서는 낙동강 나루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읽힌다. 이름부터 ‘낙동’임에랴. 1천3백 리의 낙동강 물줄기가 여러 가지 이름(황산하, 황산강 등)으로 불리다 ‘낙동강’이라는 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조 들어서다. ‘낙동’이란 말은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졌다는 설과 ‘가락(가야국)의 동쪽이란 의미라는 설이 있다.
△ 낙동나루의 소멸
낙단교가 개통된 것은 1986년 8월 30일다. ‘낙단’이란 말은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을 잇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 길이 4백 34미터 교폭 10미터의 낙단교는 그렇게 활발하던 낙동나루를 하루아침에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다리의 위력은 나루터를 삼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낙동-낙정을 잇는 또 하나의 다리인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생기고 없어지게 되었다.
△ 낙강시제
낙동나루에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으로 지은 ‘관수루’라는 누정이 있다. 낙동나루 북쪽 절벽에 우뚝서 있는데, 밀양 영남루 그리고 안동 영호루와 함께 낙동강 3대루로 불리던 명루이다.
관수루는 고려 중엽에 처음 지어져 조선조에 몇 차례 중수 중건을 고쳐 고종11년(1843)에 대홍수를 만나 떠내려간 것을 1990년에 지역민들이 현 위치에 복원했다. 원래는 낙단교와 낙정정류소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관수루 누각에 올라서면 솔가지 사이로 낙단교 일원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낙단교 옆의 낙동나루터를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자리기도 하다.
관수루 누각에는 낙동강을 노래한 시 10편이 내걸려 있어 나그네의 시심을 자극한다. 이규보, 주세붕, 안축, 유호인,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이황, 권상일, 허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 일세를 풍미한 문인들이다.
이들은 고려 조선시대에 낙강시제를 열곤 했다. 낙강시제는 경북 상주의 낙동강 일대(퇴강-경천대-관수루 구간 40리)에서 가져온 전통시회를 말한다. 고려 명종 26년(1196)백운 이규보로부터 조선 철종 13년(1862)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간 상주의 도남서원과 경천대, 선상, 누정 등에서 치러진 시회가 무려 51회였다고 한다.
□ 문화재
△ 보물
㉠ 양진당
이 건물은 검간(黔澗) 조정(趙靖)선생의 연거소로 양오진(養五眞)의 뜻을 취하여 당명(堂名)을 삼은 것이라 하겠다. 약간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고상형 건물로 남방 다습 지역의 주거형인 우란과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정면 9칸, 측면 7칸의 규모의 '口'字型 평면을 한 고상식 건물로서 퇴칸 전면에 세운 6개 기둥은 통재를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 하층부분에는 방형으로 치목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다.
지붕은 정침의 툇마루 상부만 겹쳐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하였는데, 겹처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형 서까래에 방형 부연을 얹는데 비해 양진당은 서까래를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을 취하게 했다.
본채의 3칸 온돌방 전면과 3칸 대청 배면에 나있는 창호는 모두 중간설주가 있는 영쌍창이다.
검간 선생의 처가인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에서 있던 것을 이건해 온 것으로 그 때의 규모가 99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여러 번 중수를 거듭하였는데, 1981년 11월 해체하는 과정의 종도리(宗道理)에서, "숭정후(崇禎後) 180년 丁卯 11月 18日 乙卯 상택주(上宅主) 조술겸(趙述謙)(1807년 순조 7년)"이란 기록과 상량문이 발견 되었다. 상량문에는 " 천계 6년 병인(天啓六年 丙寅) 12月 28日 병진(丙辰) 상감훈(上籃薰) 조기원(趙基遠)" 이란 기록이 있는데, 이 때는 1626년(인조 4) 임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소위 고상식 주거에 속하는 것으로 건물 바닥이 지면에서 1미터 이상 높게 마련하면서 고상식 주거에서는 보기 드문 구들을 설치한 점에서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특색이며 기둥은 굵은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모서리를 접어서 투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 성숙도를 보이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된다.
원래 지방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평가되어 2008. 07. 10일자로 보물 제1568호로 승격지정 되었다.
㉡ 조정 임진란 기록
조정(趙靖, 1555-1636)선생의 자는 안중(安仲), 호는 검간(黔澗)이며 본관은 풍양이다. 임란에 창의하여 국토수호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상주.함창은 물론 경상도, 충청도 지역의 의병 및 관료들의 활동, 백성들의 동향과 교통상, 왜적의 갖가지 만행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상주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이 일기의 내용은, 1592년(임진) 4월 14일 일본군의 제1진 1만 8천명은 고니시를 대장으로 배를 타고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한양을 향해 북진하였다.
그 달 19일에는 왜군 제2진 2만 2천명이 가또오를 대장으로 하여 부산에 상륙하고 신령 방면으로 북진하였고, 같은 날 제3진 1만 1천명이 구로다를 대장으로 하여 김해 죽도에서 상륙하고 김해성 및 창원, 영산(靈山), 창녕을 점령하고, 한 패(우종대:右從隊)는 무계(茂溪) 성주를 거쳐 25일에 개령 금산(金山)에 당도하니 이 고장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다른 한 패(좌종대:左從隊)는 창녕에서 갈리어 초계(草溪) 합천 거창 지례(知禮)를 거쳐 금산에 당도하여 우종대와 합류하고, 금산(지금의 김천시 삼락동)에서 대열을 가다듬고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려 하였다.
제3진에 뒤를 이어 제4진 1만 4천명 가운데 모리가 일대를 이끌고 금산에 들어와 제3진고 합류했는데 당시 이 지방(금산)에는 1만 5천의 왜군이 진을 치고 3일간을 머물고 있었다.
4월 28일에는, 방어사 조경, 조방장 양사준, 돌격장 정기룡, 비장 장지현 등이 방위하는 추풍령을 돌파하고 북진하였다.
5월초에는 왜군 제6진이 1만 5천명이 고바야가와를 대장으로 제3진의 뒤를 이어 금산에 머물다가 곧 선산으로 옮아갔고, 금산에는 제6진의 일부인 2천 5백명(대장 다찌바나)과 또 다른 9백여 명이 왜군이 남아 있었다. 6월 12일에는 왜군 제7진 3만명을 이끌고 모오리가 대장으로 상주에 잠시 머물었다가 개령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개령의 왜군 진지는 지금의 개령면 동부동을 중심으로 주위 3km에 걸쳐 2중 목책으로 둘러싸고 목책 사이와 바깥에는 깊은 참호를 파서 아군의 공략을 막았다.
금산과 선산에 머물러 있던 제6진 1만 5천의 고바야가와군은 원래 전라도 점령을 목적으로 한 부대로서 상륙하고 창원에 머물면서 남원을 거쳐 전라도로 침입하려다가 의령에서 곽재우 의병군에게 길이 막혀 성주를 거쳐 금산으로 들어 온 것이다.
금산 선산 성주 지례 등지에 흩어져 머물고 있으면서 전라도 침입을 노리고 있다가, 부대를 둘로 나누어 7월 10일에 1대는 지례를 거쳐 거창으로 가다가 우두령(牛頭嶺:김천시 대덕면과 거창군 웅양면 사이 고개)에서 의병대장 김면에게 패하여 금산으로 퇴각하였고, 1대는 무주를 거쳐 금산(錦山)에서 전주로 향하다가 도절제사 권율에게 패하고 도주한 왜졸은 금산에서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무주를 거쳐 지례에 당도한 고바야가와의 왜군을, 이 고장 충신 의병대장 여대로, 의병장 권응성, 김해부사 서예원, 중위장 황응남 등 의병에게 포위되어 전멸되었다.
7월에서 9월에 걸쳐 개령에는 제3진과 3만군과 제6진 1만군의 4만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이를 본거지로 선산·성주·금산·지례·무주 등지에 출몰하면서 앞서 말한 추풍령전투, 우두령전투, 지례전투, 상좌원전투 등 규모 큰 전투 외에도 상좌원 하로(賀老)·부상고개(扶桑峴)등지에서 소규모 전투는 끊일 날이 없었다.
개령에 주둔한 일본군은 이듬 해 2월 12일 명나라 원군이 들어와 평양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면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기까지 수시로 이 고장의 산간벽지까지 출몰하여 납치 방화 약탈 강간 등 가진 횡포를 부렸으며, 특히 그들에게 잡혀 욕보기에 앞서 자결하여 정절을 지킨 부녀들이 이 고장에만도 수 없이 많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 14만이 재침했는데, 모오리를 대장, 가또오를 선봉장으로 한 5만군병의 소속 일부 부대가 9월 18일 성주를 거쳐 금산에 들어왔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보다 난폭하고 무자비하여 들판과 곡식에까지 불을 지르고 산골짜기에까지 찾아다니며 사람을 해치곤 했다. 봉계 사람은 응급길에 흑운산 밑에 숨었는데 정유한의 부인 영천 이씨도 여기에서 잡혀 욕보이려는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죽었다.
㉢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탱
이 목각탱은 관음전의 주존불인 관세음보살상 좌상 뒷편에 있는 후불탱이다. 다섯장의 목판을 잇고 위아래로 다시 한 장씩 이어 붙였으며 전면에 금박을 하여 찬란하고 장엄하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네보살이, 그 주위로 2대 제자인 아난.가섭과 사천왕(四天王)을 새겼다.
그 위로는 과거3불(過去三佛)을 배치하였다. 목각탱 하단의 대좌는 연지(蓮枝) 형태로 굵은 줄기에서 갈라져 나와 각 줄기 끝에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조각되었는데 이 연꽃이 연화대좌를 이루고 있다.
연잎, 연봉, 줄기 등이 강한 릴리프로 조각되어 있고 중심부의 본존은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 석각 천인상
상주 석각 천인상은 화강암 판석 두 장에 부조된 2구의 천인상이다. 한 상은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주악천인상이고, 다른 하나는 연꽃을 받들어 공양을 연주하는 공양천인상이다. 둥근 얼굴에 정제된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손 등에 나타나는 사실적인 묘사는 균형 잡힌 몸매와 세련된 자태 등과 함께 작품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측면으로 향하고 있는 얼굴이나 동감 있는 자세, 여기에 활달하고 구불거리며 휘날리는 천의의 묘사에서도 역시 운동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신체의 양감이 줄어들고 평판적으로 변한 모습이나 천의를 이루는 각 선에서 조금 경직된 면도 찾아진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들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불상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따라서 이 상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남산공원(신봉동 산2-1번지)에 있었으나 2007.06.20일자로 상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 증촌리 석불좌상
이 불상은 전형적인 형식의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약사여래좌상이다.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는 파손되어 있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나 마모로 인해 선명하지는 못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통견의 법의는 양팔을 걸쳐 무릎을 덮었고 가슴앞으로 'U'자형의 의문선이 간결하게 흐르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놓고 ,왼손은 배 앞에서 보주를 받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판단된다.
뒷면에는 약간의 의문선이 보이고 광배를 부착시켰던 구멍이 남아있다. 다리 앞에는 부채꼴형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유난히 넓고 크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불상의 3단 8각의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중대에는 모서리 기둥 표현 외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고, 상대의 앙련에는 화문장식을 내부에 넣어 더욱 장식적으로 변하고 있다.
광배를 잃었지만 대좌와 불신이 양호한 편으로 신라 하대의 불상양식과 대좌 형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이라 하겠다.
㉥ 북장사 영산회 괘불탱
남장사(南長寺)가 830년 이전에 창건되었듯이 북장사(北長寺)도 거의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본디 北長寺는 극락보전, 화장전, 대향로전, 원통전 등 20여 동의 건물과 상련암 등의 많은 암자를 둔 대찰이었으나, 현재는 명부전, 극락보전, 산신각, 승방 등이 남았을 뿐이다.
북장사 괘불은 영산괘불로, 고운 명주에 채색하여 중앙에 석존을 모시고 좌우에 불보살들의 입상을 배치하였다.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전체의 색채가 생생하다. 1688년(숙종 14)에 조성된 것으로 길이 12m, 폭 8m의 거대한 작품이며, 연대도 비교적 오래고 조성 필치도 주목되는 귀중한 괘불탱화이다.
구전에 의하면, 가뭄이 심할 때 북장사 괘불님이 내려오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믿었으며, 이런 믿음에 의해 1960년(음 7. 1) 한발이 심할 때 실제 상주 뒷내(後川) 모래사장에 북장사 괘불을 내다 걸고 기우제를 지낸바도 있다. 또한 괘불에 얽힌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 당승(唐僧 혹은 異僧)이 와서 이 괘불을 자청하여 그릴 때 3일동안 문을 닫고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셋째 날이 되어 의아심을 가진 승려가 문틈으로 들여다 보니 화승은 보이지 않는데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열심히 탱화를 그리고 있었다.
파랑새는 승려가 엿보는 것을 눈치 채고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불탱을 살펴보니 어깨부분 한 곳이 미완성이었다고 전한다.
△ 천연기념물
㉠ 상주 상현리 반송
상주시 화서면 상현 1리 속칭 창안 마을에는 속리산 정 2품 소나무 모양의 웅장한 자태를 지닌 수령 5백년을 추정하는 소나무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 마을은 신라 경덕왕 때 몇 사람이 마을을 이루었고 고려 때 화령현이라 하였는데 속리산 줄기의 봉황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죽전, 새재골, 창안, 하현, 주양, 당두, 무동 등 7개 자연취락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은 화령현의 요새지로서 죽전은 대장군이 살던 곳이며, 대모골로도 불렀고 봉황산의 봉황새가 대나무 열매를 먹던 대밭이 있었다 하여 대밭골이라고도 불렀다.
새재골은 일명 재골이라 불리고 사찰이 있고, 창안은 화령현의 정부미를 보관한 창고터라 한 하현의 마을이고, 당두는 옛날 당대가 무동은 화령현 당시 군인촌이라 하였다는 옛말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지형적으로 보아 요새지임이 틀림없고, 이러한 요새지 일수록 숲이 왕성하고 깊게 이루어 요새지를 은폐하기에 알맞은 소나무가 많았으리라 믿는다.
이 상현의 노송도 이 때에 어린 소나무로 자라고 큰 나무들은 모두 잘리고 외로이 자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이 15m에 수관이 25m에 삿갓 모양의 웅좌함을 뽐내고 있고 위용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이무기(큰구렁이)가 보금자리를 잡아 안개가 낀 날이나 먹구름이 두텁게 낀 날에 무엇을 뜻하는지 이무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마을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이무기 소리가 들릴 때엔 안개가 노송의 허리를 끼고 덮어 토성의 형태를 이룬다. 동민들은 소나무를 숭상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노송을 해치는 일이 없고 떨어진 낙엽이라도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만일 낙엽 진 솔잎을 쓰면 재앙을 입는다고 한다.
㉡ 운평리 구상 화강암
화강암 특유의 형성 생태를 가진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돌이 운평리 구상화강암이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의 대부분은 동굴이 대부분인데 화석과 희귀종의 나무, 돌의 형태나 질이 특이하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돌은, 상주시청 소재지에서 약 8Km 동남쪽인 낙동면 운평리 마을 안길을 따라 계곡을 끼고 약 500여 미터 지점의 물이 흐르는 좁은 개천에 구상화강암(거북돌)이 보인다. 이 공돌은 가운데 부분인 핵을 몇 겹의 껍질이 양파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어, 옛부터 거북의 등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거북돌이라고도 불러왔다.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겉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원형 모양은 13cm*10cm, 8cm*7cm, 5cm*4cm 정도이고, 적은 돌은 0.6m*0.3m에서 큰돌은 1.3m*0.7m 크기의 돌에 박혀 있으며, 성분도 석영, 장석, 운모, 희석, 자철석 등 잡다하게 구성된 덩어리로 유색광물과 무색광물이 층을 이루고 있다. 학자들은 구상 화강암이 형성된 연대는 1억 6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그 형성 원인은 알 수 없고, 1928년 영국의 지질학자 홈즈[A Holmes]가 처음으로 그 모양에 따라 명명한 것이나 세계적으로 그 생산이 희귀하며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조선 말엽인 1870년쯤으로 전해지고 있다.
△ 사적
㉠ 상주복룡동유적(尙州伏龍洞遺蹟)
복룡동 283-7번지 일원은 주택공사의 아파트 주택건설부지였던 복룡 3지구와 개인 건설업체인 유성에서 계획한 유성 CM지구로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시·발굴조사를 실시한 곳이다.
3지구 건너편의 2지구 역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발굴조사를 하여 청동기시대 주거지 4동, 통일신라~조선시대 건물지 22동, 구상유구 16기 등을 비롯한 총 314기의 유적 및 동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복룡 3지구는 적심 17기, 수혈 48기, 구상유구 6기, 석렬 2기, 와열 1기, 주혈 1기를 비롯한 총91기의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유성 CM지구에서는 건물지 7동, 우물 24기, 구상유구 10점 등 총 569기의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되었다. 땅속에 묻혀 있던 체계적인 계획도시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면서 경주에 이은 고대도시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상주복룡동유적지에는 청동기시대를 포함한 조선시대까지의 생활유구가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상주시 고대도시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며, 당대의 서민생활상을 복원, 연구하는데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생활유적지이기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관광자원
상주시는 전국 7대 문화관광권(한강유역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영남북부권, 영남남부권, 제주권) 중 영남북부권에 해당함. 또한 경상북도 3대 관광권 중 북부자원권(유교문화·자연관광지역)에 속함
자연공원으로는 화북문장대 국립공원이 있으며, 도시공원으로는 어린이공원, 근린공원, 도시자연공원이 각각 13개소, 4개소, 1개소 있음. 그 외 생태관광자원으로 성주봉 자연휴양림과 갑장산, 노음산 등의 산악관광자원 등이 있음.
상주시의 관광명소로는 문장대, 경천대, 성주봉 자연휴양림, 상주 예술촌, 자전거박물관, 상주역사민속박물관, 효자 정재수 기념관 등이 대표적임.
상주시의 공연시설은 총 2개소로 일반 공연장과 영화관이 있음
문화 복지시설로는 상주문화회관, 상주문화원을 보유하고 있음
상주자전거축제, 경상감사 도임순력 행차, 정기룡장군 상주성 탈환 재현 등이 주요 문화축제 이벤트로 개최되고 있음.
△ 관광자원 분포 현황도
□ 향토음식
곶감부추 불고기 |
소화를 돕는 아릴성분을 가진 부추는 활성산소 자체의 발생을 막아주는 좋은 식품으로 쇠고기와 궁합이 매우 잘 맞는 음식임, 옛날 너비아니라고도 했던 불고기에 곶감을 첨가하여 달콤한 맛이 나므로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 음식임 |
곶감 매운닭찜 |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리한 음식으로 고단백식품인 닭과 비타민이 풍부한 곶감을 주로 하고 감자와 당근 등 여러 채소를 넣고 매운 양념을 한 음식이며 칼칼하면서 계속 입맛을 당기게 함 |
곶감 갈비찜 |
찜 요리 중의 하나인 갈비찜에 곶감을 첨가한 음식으로써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쇠고기와 소화효소 아밀라아제가 풍부한 무, 칼슘함량이 높은 곶감 등이 한데 어우러진 요리이며 맛도 좋고 색감이 풍부하여 손님들에게 대접하기에도 좋은 음식임 |
곶감 제육구이 |
돼지고기를 저며서 고추장 양념하여 구운 것으로 돼지고기에 많이 들어 있는 철분과 곶감의 비타민 A가 만나 잘 어우러진 음식임 |
□ 축제
△ 상주 자전거 축제
산악자전거클럽 초청 친선경기, 자전거 묘기 시범팀 초청 공연, 단체, 개인, 가족별 각종 자전거경기
△ 동화나라 상주, 이야기 축제
의성군
문화자원 |
□ 설화
△ 오장군의 검은 돌
의성군에 아주 커다란 묵은 묘가 있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를 오장군묘라고 한다. 이 오장군에 대한 토막전설이 마을에서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에 근처에 30~40개나 되는 큰 절벽 밑에 한 우물이 있었다는데 언젠가 그 곳을 파헤쳐 보니 돌 축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장군은 어릴 때부터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나막신을 신고서도 이 절벽을 오르내리며 여기 우물을 먹고 절세의 용력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힘이 세었다는 놀라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가 마을에서 2km가량 떨어진 복경산위에 산보를 간 동안에 도적들이 떼를 지어 습격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복경산에서 큰 바위를 주먹돌처럼 던져서 팔매질로 도적떼를 선멸 시켰다고들 한다. 그 때의 큰 바위는 아직도 마을 앞들 가운데 있으며 이 고장에서는 이 바위를 '검은 돌'이라고 부른다. 지석묘가 아닌지 모를 일이다.
□ 향토음식
마늘산적 |
마늘과 대추, 은행, 고추 등을 꼬지에 꿰어 기름에 지져먹는 음식 |
고추부각 |
풋고추를 손질해서 찹쌀풀이나 찹쌀가루를 묻혀 시루나 찜통에 찐 후 말려서 기름에 튀긴 것 |
□ 축제
축제명 |
개최일시/ 기간 |
주요내용 |
산수유 꽃 축제 |
매년 2010.03.20 ~2010.04.04 |
농촌 부활 기원제, 지신밟기 농악놀이 어울림 놀이마당, 타악 퍼포먼스, 산수유레크리에이션, 산수유콘서트, 산수유 등산로 등반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