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하지만 스스로 결정하는 삶, 상협이가 자퇴하다
글 오현옥 그림 조상협
집단구타에 시달리는 상협이, 늘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들
우리가 죄인인 모양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역부족이었다. 짱이라는 선배와 친구들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을 주면서 돌보도록도 하고, 아이가 다니는 길가에 있는 상점 주인들을 다 사귀어 아이의 위급한 상황을 알려달라고도 했다. 또 주에 4~5회 학교를 찾아가 감시도 했다. 하지만 순간순간 일어나는 상황들은 엄마로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한번은 아이가 집단구타를 당하고 있다며 흥분한 어떤 할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 할머니는 상협이로부터 내 휴대폰 전화번호를 알아냈다며, 이런 상황을 방관하는 담임선생님과 학교를 고발하겠다고 했다. 학교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개입되어 이 정도의 흥분상태로 불만을 토로하면 학교 측은 우리아이를 문제아로 분류해 퇴학 처분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구타한 아이들을 달래고 먹을 것까지 사주며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담임선생님께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그토록 약자였고, 동정하는 이도 도우려는 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모든 문제와 아픔은 그저 아이와 나의 몫이었다. 철저하고 처절하게도.
그러한 시간을 보내며 상엽이는 자라 어느덧 중학교에 입학했다. 난 상협이가 학교에 갈 때 마다 묻곤 한다.
“상협아, 학교 안 다녀도 괜찮아. 그러니까 학교 다니기 싫으면 언제든 얘기하렴. 하지만 상협아, 학교를 안 다니려면 해야 할 일이 있어. 엄마는 너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널 끝까지 돌볼 수가 없단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없을 때를 위해 그리고 성인이 됐을 때를 위해 너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야 돼. 돈도 벌어야 하고. 알았지!”
“네! 하지만 전 학교 다닐 거예요. 과학자가 되려면 학교에 다녀야 해요.”
상협이는 과학자가 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부족하고 너무나 모르지만 그런 상협이 에게도 꿈꾸는 희망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상협이가 학교에 가는 것을 너무도 열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되는 말들을 한 것은 아이들이 어려서는 힘이 없으므로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좇아하다가 그것이 병증이 되어 힘이 생기는 어른으로 자라면 정신분열증이 동반되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내용을 책에서 접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협이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힘들지만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나쁜 아이들은 상협이가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괴롭혔다. 몇몇 아이들은 방학 내내 앨범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로 상협이에게 전화를 걸어 ‘바보’라고 놀리는 통에 미치기 일보직전이라고 했다. 내가 상협이에게 “그 나쁜 놈들 추적해서 엄마가 혼내줄까?” 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전화번호를 바꿔 버렸다.
이렇게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상협이는 초등학교 때와는 많은 것들이 다른 중학생활을 힘겨워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은 초등학교와 달리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상주하지 않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없는 교실은 학급친구들의 무법천지였다. 놀림과 구타 그리고 남학생들만 있는 교실 안에서의 과격한 상황들이 상협이를 어렵게 했다. 또 교과목마다 다른 선생님들을 대하는 상황이 상협이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어느 날 상협이는 드디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상협이의 학교생활을 정리하는 것을 인정해주었다. 아무런 제지도 없이. 하지만 자퇴하고 난 다음의 일도 상협이 몫이었다. 나는 상협이와 그의 생활에 대해 의논했다. 나는 공부를 할 동안은 엄마가 학업에 필요한 교육비용뿐만 아니라 용돈까지도 모두 지원해 주지만, 학업을 그만둔 상황에서는 사회인으로 적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일러주고 아르바이트를 권했다. 그리고 1년 동안 학교를 다니지 않는 생활을 해보고 1년 후에도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상협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도록 하는 타협점을 일치시켰다. 상협이는 내가 내민 협상에 흔쾌히 동의했고, 중학교 1학년을 마친 뒤 자퇴하고 혼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상협이는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구해왔다. 다른 친구들은 35원씩 받는 일을 10원씩에 받아와서는 좋아라한다. 그런데 전단지를 돌리고 돌아온 어느 날 씩씩거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사장이 400장 붙이라고 하고는 450장을 주어서 50장은 남겨 가지고 갔더니 호통을 쳤다고 한다. 나는 “음! 그랬구나. 우리 상협이 화났겠네!” 하며 마음만 헤아려 주고는 그냥 놔두었다. 그런데 그 뒤에도 그런 상황은 계속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나머지까지 돈을 받지 않은 채 붙여주고 왔다. 그 뒤 4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나는 인사차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은 이상한 집 아이인줄 알았다며 밝고 명랑하다고 칭찬한다. 나의 등장을 통한 묵언의 암시만 사장에게 알렸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전단지를 돌리다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이 삐었다며 병원에 가야한다고 한다. 병원치료비가 12,000원이 나왔다. 사장은 상협이가 번 돈으로 병원비를 계산하게 했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상협이는 오전에는 피아노를 배웠다. 그런데 피아노학원 선생님께 대드는 바람에 피아노학원을 그만 두라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상협이는 오전에는 집에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냈고,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중 주간보호센터 선생님과 연락이 되었다. 선생님은 상협이의 근황을 듣고는 오전에는 주간보호센터에서 지내며 점심도 먹고 오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그해 여름부터 그렇게 지냈다.
어느 날 상협이는 전에 살던 동네 1년 선배를 만났다. 부모가 없던 그 아이는 학교에 안다니며 부랑아처럼 떠돌고 있던 중 상협이를 길거리에서 만나 우리 집에 놀러온 모양이었다. 오후가 되자 상협이가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야 된다고 하자 그 아이가 집에 열쇠가 없으니 우리 집에 있다가 가겠다고 해서 그 아이를 집에 두고 아르바이트를 다녀왔는데 집에 있던 꿀꿀이 저금통에서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 지폐가 다 없어졌다. 상협이는 또 하나의 값진 경험을 한 것이었다. 퇴근 후 돌아온 나에게 상협이는 스스로 이런 상황들은 조심해야겠다고 얘기한다.
여름부터 나갔던 주간보호센터에서도 상협이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선생님들은 너무나 일반 아이 같고 말대답도 잘하는 상협이를 버릇없는 아이로 취급했다. 상협이는 나이어린 언어선생님과 싸우고 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그런 상협이를 직원들은 버릇없다며 미워하고 머리를 쥐어박곤 했다. 그런데 상협이는 그런 상황들을 전혀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을 집에 와서 전달하는 게 상협이에게는 너무나 미숙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께 전화로 안부를 전할 때는 말하지 않던 내용들을 추석에 인사드리러 갔더니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선생님은 아무리 타일러도 고쳐지지 않는다며, 그곳의 생활이 순탄치 못하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상협이에게 선생님께 들은 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렇게 행동하면 지금과 같이 좋지 않은 상황들이 전개된다고 설명하고,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식사도 선생님들과 함께 하고 선생님들께 말대답이나 대드는 것은 삼가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추석이 지나고 일주일 후 전화를 걸어 선생님께 확인했더니, 신기하다며 식사도 함께 하고 말대답도 하지 않으며 말을 잘 듣는다고 한다. 집에서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상협이는 학교에서의 생활과 학교 밖의 생활을 비교평가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1년 동안의 생활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협이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결정하고 있었다. 학교라는 울타리가 미칠 것 같았는데 학교 밖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 1년 동안의 안식년(?)은 아이를 많이 변화시켰고 성장시켰다. 나는 그해 처음으로 어버이날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을 선물 받았다. 나는 그 볼품없어 보이는 카네이션을 당당히 달고 하루를 보냈다. 상협이는 자신의 생일도 어떤 기념일도 알지 못했기에 그 의미는 더 컸다. 그리고 상협이는 스스로 학교에 복학했고, 정말 잘 참아가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견하게도 2009년 3월에는 대학에 진학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