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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①
♥감사
☛감사도 연습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려면 기도를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깊이 알려고 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사도 배우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 좋은 주변 형제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눈여겨보면서 배우고 연습해 보십시오. 그러면 드디어 나에게도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며 나아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배워서 습득한 사람은 훨씬 더 감사가 풍성하고, 깊이 있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1년 중 중요한 명절 3개를 지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매년 몇 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감사의 대상이신 여호와 하나님!(시100:1-5)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그 문이 어떤 문입니까? 성전 문입니다. 그 궁전은 어디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의 집,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문에 들어가면서, 그 궁전에 들어가면서, 성전에 들어가면서, 성전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절<즐거이 여호와를 부르라> 막 외치라는 말입니다. 마치 지난 월드컵 때 우리가 “대한민국!”하고 “와!~”하고 외쳤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외치라고 했습니다.
2절<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 또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가라> 4절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라>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감사와 찬송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하는 성도의 자세는 감사와 찬송, 이 두 가지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1절 <여호와>, 2절 <여호와>, 3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 5절 <여호와>, 시편 100편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감사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이 감사의 대상인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광장에 개 조각상이 있다고 합니다. ‘보비’라고 하는 작은 개가 떠돌아다닙니다. 떠돌아다니니까 얼마나 굶주렸겠습니까? 그래서 아주 말랐습니다. ‘조크’라고 하는 한 노인이 보비를 발견하고 식당에서 저녁 한 끼를 잘 사 먹였습니다. 얼마 후에 노인이 죽었습니다. 문상객들이 노인의 시신을 운구할 때 그 개가 졸졸 그 뒤를 따라다닙니다. 장례를 치렀습니다. 매장하는 인부들이 개를 쫓아내도 가지를 않습니다.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에도 보비는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노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보비가 묘지를 떠날 때는 매일 오후 먹을 것을 찾아서 나설 때뿐이었습니다.
보비의 행동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보비를 위해서 작은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14년을 하루같이 묘지를 지키던 보비도 죽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에게 식사 한 끼 따뜻하게 해 준 친절에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보비를 노인 옆에 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서 에딘버러 광장에 조각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배은망덕 하는 인간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짐승도 따뜻한 밥 한 끼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평생 동안 그 무덤을 지켜내고 감사를 표시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너무 많은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가장 귀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같은 사람은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내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감사하다. 두 번째로는 내가 하고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헬라 사람으로, 그리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참으로 감사하다>고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는 만물들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창조되었으니까 우주만물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존재요, 또 이 땅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되었으니까 사람 중에서도 위대한 사람들 아닙니까?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 성도의 위치인 것입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지혜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가 나귀를 타고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고 가도 집은 없고 해는 저물어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다 묶어놓았습니다.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시간을 알기 위함이었고,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은 성경을 읽고자 함이었습니다. 불을 켜고 성경을 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등불을 넘어뜨려 불이 꺼졌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맹수들이 나귀를 잡아 죽였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잠잔 곳에 가까운 동네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들어갔더니 온통 아수라장입니다. 어제 밤에 강도떼들이 들어와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해 갔습니다. 랍비는 그 자리에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닭이나 나귀가 살아 있었더라면
강도들이 쳐들어와 자기 목숨을 해쳤을 것입니다. 불이 켜 있어도 문제입니다. 생각해보니 잃어버린 게 많다.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좋게 여긴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나의 미래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감사하게 되고 이런 이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노만 필’ 박사는 항상 적극적 사고방식을 강조한 사람으로 어느 날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주변 환경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고 시트가 지저분하고 청소도 제대로 안 돼 있고 승무원도 불친절하다는 등 불평을 했습니다. 이때 부인의 불평을 듣고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들을 소개하기를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필 박사는 “그럼 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제조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웃으며 “제 아내는 불평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부인처럼 불평을 만드는 제조업자가 아니라 감사를 만드는 제조업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충족되는 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배가 고팠다가 배불리 먹게 되면 만족하게 됩니다. 어렵게 살다가 좀 나아지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욕구충족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그러나 이 감사는 지극히 순간적이며 일시적입니다. 다시 배고프고 부족해지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다음은 철학적인 감사입니다. 이것은 생각하는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이를테면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서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헬라의 철학자 ‘탈레스’는 세 가지를 비교하면서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천대받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서 찾는 감사는 그 생각과 판단이 불확실하거나 달라지면 다시 감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은총적 감사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이것은 본질과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환경이나 소유의 조건에 따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무엇이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내가 어떤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할 수 있을 때에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내일이 불확실함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건강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입을 옷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에벤에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앞으로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할/
☛어느 주일날, 그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습니다.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이어서 목사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일어나서 걷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뛰어가야 합니다." 교인들은 너도 나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치며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뛰어가야 합니다!" 목사님은 더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너무나도 넓습니다. 우리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그러자 모두가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목사님께서 흐뭇한 모습으로 교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 시간 구체적으로 작정을 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합시다." 그러자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도 화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이 용기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로 하여금 예전처럼 다시금 앉아있게 하십시다." 여러분! 이것이 행여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한 여자 집사님이 가정을 비관하고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시어머니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집을 치우기가 무섭게 어지러 놓고, 남편도 시들해 졌고, 시어머니는 시시콜콜 간섭만 하고, 그래서 자살을 생각해 봤는데, 자살하자니 구원받지 못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죽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살할 수 없습니다. 나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너무나 고통을 당하고 있구나. 네 기도를 응답하겠다. 너를 천국으로 데리고 오겠다. 그러나 몇 가지만 순종할 수 있느냐?> <네. 몇 가지 죽기 전에 순종하겠습니다. 제 기도만 응답하여 주세요.>
<그러면 네 장례를 치러야하니 네 집을 청소를 깨끗이 하라. 많은 사람이 와서 보아도 정말 깨끗하다는 평을 받도록 해라> 여 집사는 집안을 안팎으로 청소하면서 최선을 다 했더니 집이 몰라보게 좋아져 다른 집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딸아! 다음으로 할 일이 있다. 네 자녀들이 엄마가 죽었다고 슬피 울 것이다. 며칠 안 남았으니 원 없게 흠뻑 사랑하여 주거라>
여 집사는 흠뻑 사랑해 주었습니다. 자녀들이 최고 만족을 느끼도록 해 주었습니다. 안 가던 곳을 데리고 가서 구경도 시켜주고 요리도 만들어 주고 일류 식당도 데리고 가서 맛있게 먹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다음으로 할 일이 있다. 남편이 너를 아쉽게 느끼며 좋은 아내였는데 죽었다고 천추에 한이 되도록 3일만 사랑해 주거라>
그 집사님은 남편은 최상급으로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부탁이다. 네가 죽으면 시어머니가 슬피 울도록 사랑해 주거라>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며칠 후 주님이 오셔서 <딸아! 이제 천국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집사는 마지막으로 집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보았습니다. 행복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남편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너무나 귀중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주님! 조금 더 있다 가겠습니다.>
벧전4: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벌써 2005년도의 달력이 끝나고 2006년도의 첫 날이 밝아오는 새 달력을 우리는 걸었습니다. 태양에 맞춘 양력을 우리가 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달에 맞춘 달력이 있는데 이것을 음력이라고 합니다. 교회에도 달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부활을 중심축으로 한 달력을 교회력이라고 부르는데, 교회력에 의하면 강림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불리 우는 강림절 첫 번째 주가 교회력의 새로운 출발이 됩니다. 강림절은 네 주를 지나는데 성탄절 전 4주를 지나고 12월 25일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강림절은 기다리는 절기이다. 성탄절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라나타”를 고백했습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3;16절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세우시고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지체로 살며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 되어 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으로 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까지도 걸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귀중히 여기고 예배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조만식(曺晩植) 선생(장로)은 3ㆍ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오산학교 교장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로 시무하기도 했습니다.
6ㆍ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조만식장로님이 산정현교회에서 신앙생활 했을 때 장로님의 제자였고, 등록금까지 내 준 학생이었던 주기철목사님이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 지 조만식장로님이 예배 시간에 늦어 주기철목사님이 설교를 하기 바로 직전에 들어오셨답니다. 의자가 없던 때라 신을 손에 들고 신발장에 넣으려고 하는데
“장로님, 거기 신발 들고 서 있어요. 장로가 예배 시간에 늦었어요.”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은 장로님의 제자였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등록금까지 내 줘 공부시킨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가 목사님이 되었다고 “거기 신발 들고 서 있어요”라고 하는데 조만식장로님은 그 자리에 신발을 들고 설교가 끝날 때까지 서 계셨다고 합니다. 설교 후에 주기철목사님이 “조장로님, 앞에 나와 기도하세요”라고 했답니다. 신발을 들고 서 있던 조장로님이 앞으로 나와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여! 장로가 주일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분위기를 파괴했습니다. 회개합니다. 말씀 전하는 목사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주기철 목사님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님 참으로 훌륭한 장로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예배를 귀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당신의 제자가 강대상에서 ‘거기 신들고 서 계시오’하는 그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보여 드리고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으며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한 세상 살다가 떠나게 됩니다. 단 한번 밖에 없는 이 땅위의 삶이기에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느 날 사업하는 사람이 유대 랍비를 찾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매사에 목표의 절반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랍비여 좋은 지혜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뉴욕 타임즈 연감 1970년도 판 930쪽을 찾아보십시오."
이 랍비의 대답을 듣고 서점에 찾아가서 930쪽을 뒤적거려 보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당대의 야구 선수들의 타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돼서 다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찾아보라고 했던 930쪽에는 당시 유명한 야구선수들의 타율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랍비가 하는 말이 "그 중에 누가 제일 잘 쳤으며 타율이 어떤가? 읽어보았습니까?
"예, 타석에 세 번 나가면 한 번 정도 안타가 나오는 사람이 세계 최고 기록으로 나와 있습니다."
랍비가 그 내용을 들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야구와 같은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야구를 잘 하는 사람도 세 번에서 한번정도 밖에 안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사업 중 절반 가까이가 잘 되지 않는다하니 약 5할대의 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항상 모든 일이 잘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성공도 아니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 놓은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기준은 "키소"입니다. 이 "키소"는 돈을 넣는 주머니를 말합니다. 도대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코소"입니다. 이 "코소"는 술잔이며 이것은 향락을 의미합니다. 지금 무엇을 즐기고 있느냐, 지금 무엇에 빠져 있느냐, 지금 무엇이 내 마음을 빼앗아 버렸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하게 기뻐하며 감사하며 즐겼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세 번째 기준은 "카소"입니다. 이 "카소"는 사람의 노여움을 가리킵니다. 인내력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감정이나 분노를 얼마나 억제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 가운데서도 참고 인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자기를 억제하는 억제력과 고통을 참는 인내력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느긋하게 자기를 억제하며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인격의 성장인 것입니다.
▶‘웰링턴’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장군은 불란서의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하고 나폴레옹 장군을 포로로 잡아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정배를 보낸 사람으로 유명해 졌습니다.
그 당시의 나폴레옹은 유럽을 뒤흔든 인물입니다. 그런데 영국의 웰링턴은 하찮은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상을 뒤엎고 웰링턴이 나폴레옹 군을 무찌르고 승리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까닭이었습니다. 도저히 공격할 수 없는 난공 물락이라고 하는 나폴레옹군의 진지를 뚫고 들어가야 승리할 것이 아닙니까?
이때 웰링턴 장군이 특공대를 뽑아 나폴레옹군의 기지를 뒤엎어 길을 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안갈 수 없지 않습니까? 명령대로 복종한 부하들에 의하여 열린 길을 따라 들어가서 그 군대를 뒤엎고 승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특공대원 중에 모두 죽고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때 웰링턴 장군이 '누가 용감한 영국 군인일까?' 용감한 군인을 뽑아 표창을 하려고 합니다. 즉 영국의 용감한 군인상을 세우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 불려 나오는데 한 사람은 키가 장대하고 체격이 좋습니다. 두려움 없이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옵니다. 어제의 싸움을 치르고도 전혀 겁이 없습니다. 모든 군인들이 볼 때에 이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이야말로 영국의 용감한 군인상이다."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사람은 키도 크지 않고 체격도 왜소합니다. 어제의 싸움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겁에 질린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장병들이 생각할 때 "창피해서 못 견디겠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때 웰링턴 장군이 두 사람을 보고 말합니다. 첫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나폴레옹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고 겁 없이 달려 든 것이다."라는 겁니다. 다시 설명하면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덤비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나폴레옹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면서도 달려든 것이다. 지금도 무서워서 떨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진짜 용기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겁이 나지만 달려든 사람이야말로 영국의 참 용기 있는 군인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도 인정받는 자와 인정받지 못하는 자가 이처럼 차이가 납니다. 인정받는 자가 얼마나 복됩니까?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생활, 여러분의 믿음을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은 미완성
하루는 하나님께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이 묻기를 "당신은 빛을 만드시고 빛을 보니 '좋으니라'하시고 땅과 하늘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하셨는데 어찌하여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사람을 보니 좋으니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나는 빛과 땅, 하늘을 만들 때는 완성품으로 만들었으나 내가 인간을 만들 때는 완성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니라."라고 대답을 하였고, "그것을 인간들에게 맡겼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미완성에서 완성품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소와 사자의 이야기
소와 사자가 서로를 죽도록 사랑하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기로 굳게 맹세를 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육식동물인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초식동물인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하지만 참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소와 사자는 크게 다투고 끝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난 최선을 다 했어!”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방의 상태를 헤아리지 못하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상대를 대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최선도 문제가 됩니다.
▶이와 반대로 안데르센 동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농부가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오늘 말을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것으로 바꿔 올께.” 그러자 아내가 말하기를 “잘 생각했어요. 좋은 것으로 바꿔 오세요.” 하고 농부는 말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길에서 소를 가진 사람과 만났는데, 소가 좋다는 그의 말만 듣고 말을 소와 바꿨습니다. 그리고 소를 데리고 가다가 양을 가진 사람과 만났는데, 그가 양 자랑을 하니까 다시 소를 양과 바꿨습니다. 그리고 양을 데리고 가다가 거위를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거위가 좋다고 하니까 다시 양을 거위와 바꿨습니다. 계속해서 거위를 가지고 가다가 암탉을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암탉이 알도 잘 낳고 수입도 좋다고 하니까 다시 거위를 암탉과 바꿨습니다. 이어 암탉을 가지고 가다가 사과 한 봉지를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사과가 맛있다고 하니까 그 사과 한 봉지와 암탉을 바꿨습니다.
농부는 흐뭇한 마음으로 사과 한 봉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몸이 피곤해서 잠시 주막에 들렀습니다. 마침 주막에서 쉬던 한 부자가 이 농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말하기를 “아마 당신 아내는 틀림없이 화를 낼 겁니다.” 하니까 농부가 말합니다. “아닙니다. 제 아내는 틀림없이 ‘잘했어요. 훌륭해요.’ 라고 할 걸요.” 귀족이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금화를 다 주겠소.”
마침내 이 어리석은 농부가 귀족과 함께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하루에 벌어졌던 일을 죽 설명했더니 아내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참 잘했어요. 훌륭해요.” 라고 맞아 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부자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정이라면 내 돈을 다 줘도 아깝지 않다.’ 그는 가지고 있던 금화를 모두 그에게 주고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와 사자는 각각 상대에 대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뒤의 이야기에서도, 부인은 부족한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둘의 차이는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입니다. 소와 사자의 이야기에서는, 무게중심이 자신에게 있습니다. 어리석은 농부의 이야기는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요 신뢰입니다.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따뜻하게 맞아 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상대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그것이 악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선 “잘했어요. 훌륭해요.” 라고 격려와 지지를 해 주어야 합니다.
▶홍성사에서 출판된 <각설이 예수>란 책이 있습니다. 이천우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의 나이 7살 때 어머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12살 때에 우여곡절 끝에 거지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국을 전전하며 거지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어떤 남자에게 이끌려 소매치기 소굴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20여 일 동안 소매치기 교육을 받고 서울역으로 실습을 나갔습니다. 바람잡이가 시골 아주머니를 도와주는 척하면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면 곁에 있던 이천우가 돈주머니를 슬쩍 꺼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 돈 주머니 조심하세요. 저는 소매치기에요.”
그날 이천우는 패거리들에 의해 소굴로 끌려가서 ‘사형집행’ 이란 것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죽도록 때린 후에 2층에서 아래쪽 쓰레기 야적장 유리조각 더미로 던져버리는 벌이었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그는 한참 지난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쳐보았지만 피투성이가 된 그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다시 잃고 쓰러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각설이 한 명이 자기 움막에 눕혀 놓고 온 몸에 박힌 유리 파편을 뽑아주고, 유리가루는 자기의 혀로 핥아주고 있었습니다. 혀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이천우를 각설이가 살려준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금발의 머리를 가진 멋진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눈앞에 있는 각설이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각설이는 바로 자기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에 목사님이 된 뒤에도 눈을 감으면 그에게 각설이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한 가난한 청년이 부농의 집에 머슴처럼 들어가서 헛간 건초더미에서 잠을 자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집 딸과 눈이 맞아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안 주인은 내 귀한 딸을 이렇게 가난하고 쓸모없는 이런 청년에게 줄 수 없다고 그 청년을 쫒아 내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주인은 헛간을 청소하다가 헛간 벽에 있는 낙서를 보니까 “가필드”라는 싸인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한 몇 십 년 전에 쫒아내어 보낸 그 청년이 “가필드”였는데 바로 그 청년이 지금 미국의 20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이 가난한 청년은 그때 쫒겨난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내가 열심으로 노력 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살아야겠다.” 결심한 바를 열 가지 목표를 세우고, 열 가지 좌우명을 만들어서 실천을 해서 드디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열 가지는 이렇습니다. “①게으르지 말며, 수입의 범위에서 생활하자. ②약속은 적게 하고, 진실을 말하자. ③좋은 친구를 사귀되, 끝까지 사귀자. ④남을 나쁘게 말하지 말자. ⑤요행을 바라는 것은 게임이라도 피하자. ⑥맑은 정신을 흐리게 하는 음료는 피하자. ⑦비밀은 나의 것이나, 남의 것이나 지키자. ⑧돈은 마지막 순간까지 빌리지 말자. ⑨행동에 책임지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자. ⑩잠들기 전에 기도하며, 반성의 순간을 갖자.” 이 열 가지의 결심과 실천이 그를 위대한 인생으로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독수리 과에 속하는 ‘뱀잡이수리’라는 큰새는 평소에는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앉았다가 다른 짐승에게 쫓기게 되면 너무 급한 나머지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날지 아니하고 뛰어서 도망가다가 결국 쫒아오던 맹수에게 잡혀서 먹히게 되는 새입니다. 참 어리석고 답답한 새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라는 훌륭한 날개를 주셔서 태산 같은 문제가 내게 온다고 할지라도 날아서 태산을 넘어가게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라도 아무리 넓은 환란의 바다라도 날아서 건너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도의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때로는 뱀잡이수리와 같이 기도의 날개가 있음을 잃어버리고 어떤 큰 문제가 닥치면 오히려 그 역경 앞에서 그만 좌절해 버리는 삶을 얼마나 많이 살아왔습니까? 이제 어떤 역경 가운데서라도 기도의 날개를 우리가 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서 그 위기를, 그 역경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