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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강역
고구려의 강역은 북부여의 강역에서 시작된다.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 부터 나오니 해모수의 어머니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선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웅심산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 한다. "
임술 원년 (-239) 4월 초 8일 천왕랑 해모수 단제께서는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빈에 쌓았다.
오우烏羽의 관冠을 쓰시고, 용광의 검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난빈蘭濱은 대륙의 청해호 남산에 있는 오란烏蘭, 도란都蘭을 말하는 것이다. 또 청해남산이 웅심산임을 알 수 있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공을 세워 봉함을 받았다.
대진국 본기에 말하기를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이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대진국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다.
여기서 남경은 청해성 서녕인것을 알 수 있다. 대진국 본기에 "해주 岩淵 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瓮津 이다."라고 하였는데 고려사지리지 안서 대도호부 해주의 옹진에 속한 長淵 현은 長潭 이라고도 하는데 이 곳은 청해성의 호수이다.
그러면 남경이 대륙의 청해성이면 서경은 거란과 서쪽 경계를 이루니 "오주목烏珠牧 의 동쪽 10리에서 황수를 굽어본다." 라고 대진국 본기에서 말 하였으니,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가 있는 트란스 옥시아나 (서압록)가 거란과의 경계라고 한것 이다.
고구려에는 서압록과 동압록이 있는데 서압록은 트란스옥시아나 이고 동압록은 황하의 상류를 말한다. 고구려의 영역의 광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대진국 수도 상경 용천부는 오르콘강 상류인 카라발가순으로 동서의 학자들은 위구르 제국( 745~ 840)의 수도라고 했으나 실은 대진국 발해의 수도였다.
대진국 4대 세종 광성문황제 대흥 원년(738)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 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기다.
中京 현덕부 까지 5경을 두었다.
해동성국(689~926) 대진국 발해는 15세 259년을 누리면서 서쪽 경계는 모란의 동쪽을 철리(지금의 카자흐스탄)라고 하고, 동쪽으로는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대흥안령), 장령의 동쪽을 동평(동북평원), 남쪽으로는 서남쪽은 청해성 아랍달택산이 된 구월산 아사달 에서 서녕시가 된 암연현까지, 산서성에서는 강릉의 북이하(태원)까지, 동남은 등주와 래주까지(산동성)였고, 북으로는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남, 북우르(연해주에서 흑룡강 북쪽 알란고원까지)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었다.
땅의 너비 9000리로 5경 60주 1군 38현이었다.
고구려의 선조국인 북부여와 그 후예가 세운 대진국 발해의 위상을 보면 고구려의 영역을 가늠해 볼수 있다.
고구려국 본기에서 보면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즐겨 고주몽을 낳았는데
이 때가 곧 임인(-199) 5월 5일 한나라 불능 원봉2년이다.<한단고기 259쪽>
북부여기 하 에서 보면 5세단군 고두막 재위 30년 임인(-79) 5월 5일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한단고기 137쪽>
한단고기에 두가지의 탄생시기가 기록된 이유가 무었일까?
또한 5월 5일 단오날이 고주몽 성제의 탄신일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 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웅심산에 주변의 지명이 두개가 나왔다.
난빈과 서란이다.
역사서 상의 지명 - 난빈蘭濱, 서란西蘭과
현재 지리적 지명 - 오란烏蘭, 도란都蘭과 난주
대륙의 청해성 서녕(해성)이 있는 청해 남산(옛 웅심산) 곁에 있는 지명과
한단고기의 기록에 보이는 북부여의 해모수와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살았던
난빈과 서란이 이천년만에 이 곳에서 만나고 있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쓴 해모수가 도읍한 까마귀 오 오란, 도읍 도 도란.
해모수는 난빈에 궁실을 쌓았다고 했으니 난빈이 오란도란의 강변 이었음을 증명 하는 것이다.
그곳이 지금의 청해성 西寧이니 西蘭이라고 부른 것이다.
감숙성 황하를 건너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난주蘭州라는 도시가 있고, 바로 곁에 고란皐蘭시도 있다.
북부여 2세단군 모수리 기유 3년(-192)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해 왔다. (지금도 서녕시는 청해성의 중심인 성도이다. 해성을 장악해 군사를 주둔 시키니 청해성 일대가 중부여 였음을 알수있다.)
왕오천축국전에 중천축국이 청해성일대에 있었다고 했다. 나머지 동,서,남,북에 사천축국이 있었듯이 북부여의 오가들이 다스리던 남부여, 동부여, 서부여, 북부여가 바로 오천축국을 의미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세 단군 고우루 신유 원년(-120) 우거를 토벌하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많은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을 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수리 단군 재위시 동생 고진은 수비 장군으로 활약하니 (-192)에 20세 였더라도 4세단군 신유 원년(-120)에는 벌써 92세이다.
고주몽이 고진의 증손이니 임인년(-79) 탄생이 더 맞는것 같다.
해모수도 웅심산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건국하고 난빈에 도읍하고, 유화도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오니 지금의 서란이다.
熊心山, 舒蘭, 蘭濱
유화부인의 고향이 웅심산이고 이곳이 서란이니 지금의 청해성 오란도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관가의 말지기가 되었다. 얼마후 관가의 미움을 받고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북부여의 고무서 단제는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고 한다.
일찌기 주몽은 오이 , 마리, 협보와 함께 엄사수를 건너 갔다.
주몽이 드디어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 사람은 납의를 입고 한 사람은 수조의를 입었다. 마의를 입은 사람은 극재사, 납의를 입은 사람은 중실무골, 수조의는 소실묵거라고 하였다.
이 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다.
다물 원년 (-178)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사방에서 주몽의 건국을 듣고 내부하는 자가 많았다.
우선 말갈부족과 인접하여 그를 쳐 물리쳤다.( 말갈국은 마갈국으로 가섭존자의 고향인 가섭원이다. 이 곳이 가섭원 또는 분릉이라고 한 신강위구르 지역 준가르분지이다.)
왕은 비류수변에서 사냥을 하면서 비류국을 찾아가 그 국왕 송양과 자웅을 겨루었다.
다물 2년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 하니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그 곳의 주로 삼았다. 다물은 구토를 회복함을 뜻하는 고구려 말이다.
다물 6년 왕이 오이와 부분노를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다물 10년 10월 왕이 부위염을 시켜 북옥저를 쳐 멸하고 그 땅에 성읍을 두었다.
옥저에 관한 기록을 모아보았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53년(5) 동옥저의 사자가 와서 좋은말 2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남한에 성인이 나심을 경축했다.
-.백제 시조 온조왕 43년(24)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등 20여호가 부양에 이르러 귀의하니,왕이 이를 받아들여 한산의 서쪽에 안치 하였다.
-.고구려 태조 융무 4년(56) 동옥저를 벌하여 그땅을 빼앗고 성읍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에 다다랐다.
-.동천왕 20년(246)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니 왕이 출분하였다. 위장 왕기가 추격하여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려 죽령에 이르니 주위의 군사가 다 흩어졌다. 오직 동부의 밀우가 혼자 곁에 남아있어 왕에게 이르기를 "신이 죽기로서 막겠사오니, 왕은 도망하소서" 하여 왕이 사이길로 이리저리 옮기면서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군은 추격을 늦추지 않았다. 동부인 유유가 계책을 세워 계교로 위장을 찌르고 함께 몰진하니 위군은 그만 어지러워져서 낙랑방면으로 물러갔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사를 볼것 같으면 고구려는 건국초기에 북옥저를 멸하고 태조무열제 융무3년 요서에 10성을 쌓는다.
태조무열제 (53~146) 부터 중원 대륙은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제대로 정복활동을 통해 대륙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단계이다.
이 때의 북옥저는 카자흐스탄 일대이며, 동옥저는 감숙성에서 내몽고 를 지나 한반도 북부까지, 남옥저는 섬서성과 청해성 동부지역 이었다.
대륙의 황하유역은 유방이 세운 전한(-206~ 8년)이 멸망한후 후한이 건국 (25~ 220년)한지 얼마 되지않아 혼란기인데, 후한 광무제 30년간 정도가 조정의 위신이 섯을뿐 내내 어린 황제와 외척의 횡포와 내시의 위세로,
220년 동탁과 조조가 한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혼돈속에 빠져 있었다.
이 시대에 위대한 제국이 있었으니 바로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오천축국이다.
이 나라는 신독국이라는 나라이다.
신독국은 전한(-206~8 ) 무렵에 있던 나라로 무서운 힘을 가진 부족이란 뜻이다. 몸이 날쌔고 재빠르며 기마술에 능하고 활과 창 칼을 잘 사용하는 용맹스런 부족이란 뜻이다.
한나라때 신독국은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중원대륙 전체와 서역지방까지 방대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그 지역 전체의 넓이는 약 3만리였다.
워낙 강역이 넓은 탓으로 후한( 25~220 )때에 와서 다섯 제후국으로 갈라지기 시작 하였다.
이 나라들은 불교의 발상지라고 불가사서에 천축국이라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했는데, 다섯 천축국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나라가 중천축국 이었다.
중천축국은 대월지국 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강역은 곤륜산 남쪽과 서장성 서북에서 부터 청해성을 중심으로 지금의 감숙성 돈황까지로, 불교의 발상지라고 할수 있는 돈황지방과 곤륜산을 지나 티벳지방까지 총령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남쪽이었고,
서천축국은 계빈과 파사국과 인접해 있었다고 하는데 대하국이 그것으로 대하국은 신독국과 같은 나라라고 하였다.
동천축국은 사천성과 운남으로 부터 광동을 지나 복건성까지 이며, 부남과 임읍에 인접해 있다고 했다. 부남은 베트남이요, 임읍은 태국 북부이다.
특히 남천축국은 서장성과 인도 북부지방으로 남쪽으로 큰 바다가 연이어져 있다.
북천축국은 설산이 있으며 사방으로 산이 벽이 되어 있다. 그러나 북천축국은 남쪽으로 계곡이 있어 나라간에 통하는 문으로 이용했다. 북쪽으로 오손과 접하고 있었다. (오손은 카자흐스탄 지방과 알타이 산록 주변으로 신독국과 같은 의복을 입었다고 했다.)
제왕은 스스로 수행을 하면서 맑아 계율을 지키면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아니했다.
감숙성 북쪽에서 부터 남쪽으로 뻗어 있는 기련산이 바로 석가가 득도한 설산이다.
참으로 이 시기는 바로 천왕랑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해서 단군조선을 재건한 시기와 같은 때이다.(AD 239~ )
북부여에는 오가 제도가 있었는데 북부여의 번조선이 망한후 오가의 무리들이 대장군 탁을 받들어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으니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 이라고 한다는 북부여기의 기록이다.
이 윌지국은 부처의 나라 쿠샨왕국을 세우는데 지금 우즈벡에서 파키스탄을 지나 인도 북부까지의 제국으로 불교를 장려하여 간다라 미술로 서방세계에 잘 알려진 나라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이들의 나라는 5명의 수령들 또는 흡후들로 나누어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의 중심이 청해성이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고열가 단제께서는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셨다고 하니 불가에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처의 나라로 기록하지 아니 할 수가 없겠다.
북부여도 마찬가지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는 동명왕 고두막한이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 하니 병을 얻어 붕어 하시고 아우인 해부루가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이 여전히 위협을 하매 국상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옮길만 합니다." 하고는 나라를 옮기는데 이런 모습은 부처의 나라가 아니고서는 전쟁도 하지않고 나라를 넘겨주는 경우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과연 부처의 나라로 기록될 만 한것이다.
게다가 해모수, 해부루, 아란불, 가섭원등 부처의 나라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명칭이 어디에 있겠는가?
오천축국이 있었다고 한 곳에 그 시기에 그 곳에 부여국이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 대 부여국이라고 불렀으며, 사실은 그 곳에 수천년 동안 단군조선으로 존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 곳이 청해성이다.
다른것도 아닌 부처의 나라가 전통도 연륜도 없이 전한(-206 ~ 8년)시기에 생겨 났다고 하는 기록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시기의 천축국의 임금들은 백성과 함께 화합하며 아래 위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구가 하였다니 드디어 전설의 제국 신화의 나라 단군조선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당나라때 중천축국이 멸망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멸망을 말하는것이다. 나머지는 신라로, 고려로 계속되는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보면 왕은 황궁에 있는 시간 보다는 사찰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으며, 도성안에 수십개의 거대한 사찰을 지어놓고 황궁과 사찰간에 비단 장막으로 통로 를 만들고 그리로 임금이 왕래를 했다고 하는 불교국가로 임금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전부 스님이 되었으며, 수백개의 절을 지어 놓고도 모자라서 야외에 불단을 설치해 놓고 밤낮없이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나라가 고려이다. 야단법석은 야외에 설치된 불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천축국이 부여이며 고구려, 백제와 신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의 강역이 북천축국과 서천축국 그리고 중천축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고구려 본기를 통해서 관찰해보자.
다물 14년(-24) 왕모 유화가 동부여에서 돌아가니, 부여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 장사를 하고 신묘를 세웠다.
다물 19년(-19) 왕이 승하 하시니 나이 40세이다.
한단고기 고구려 본기에는 다물 32년 북옥저 정벌의 기사가 삼국사기에는 재위 10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고주몽의 생몰연대가 20여년 차이가 난다.
제2대 유리명제 재위 37년
2년 (-18) 왕이 다물후 송양의 딸을 들이어 비로 삼았다.
3년 7월에 홀천에 이궁을 지었다.
이 곳 홀천이 회홀이다, 즉 신강 위구르 지역으로 송골매가 나는 곳이다.
송골이 숑홀, 회홀로 변하여 회회족으로 불리게 된다.
10월에 왕비 송씨가 돌아가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취하니 하나는 화희로 홀천인이요, 하나는 치희로 한인의 딸이 었다.왕이 기산으로 전렵을 행하는 동안 두 여인이 다투어, 화희는 치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으로 무례함이 어찌 그리 심하냐?" 고 하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도망하였다. 왕이 쫒아 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어느날 나무밑에 쉬다가 꾀꼬리가 모여 드는 것을 보고 황조가를 불렀다.
" 꾀꼬리는 오락가락, 암놈 수놈 놀건만은, 외로운 이내 마음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거나." 하였다.
(이 기사에서 회홀족 홀천인 화희가 오랑캐 출신이라고 한인를 비하해 부르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위구루지역의 터주대감 임을 알 수 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에는 한나라 침략자들을 한구漢寇( 오랑캐) 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여기 왕이 전렵한 기산은 감숙성 기련산을 말한다)
11년 4월에 왕이 군신에게 이르기를 " 선비가 험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니 걱정이로다."하였다. 부분노가 나와 계책을 말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선비가 항복을 하고 속국이 되었다.( 권 제13 고구려 본기 제1 -삼국사기 334쪽-)
선비는 지금 몽골의 시라무렌강 유역이고 그 지역을 고구려가 점령 하였으니 고구려의 영역은 신강성에서 대흥안령까지 미치게 되었다.
5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종군하였다. 그 곳에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싸우다가 괴유가 진흙에 빠진 부여왕 대소를 살해했다.
대소의 아우는 사냥을 하다가 압록곡에 이르렀는데 황룡국왕이 나와 사냥을 하는것을 죽이고 그 나라를 빼앗아 갈사국을 세웠다.
갈사는 태조무열제 융무16년 도두왕이 고구려의 강대함을 보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라 부르고 훈춘을 식읍으로 동부여후에 봉했다.
가을 7월 왕의 친척동생이 옛 도읍의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 하였는데 등에 문자가 있다하여 낙씨의 성을 하사했다. (하도 낙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 기록이다, )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494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 마저 끊겼다.
삼국사기에 태조무열제 70년(122)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니 부여왕이 원병을 보내 현도를 구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494년)까지 동부여는 지금 북경유역에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연나부가 연나라 땅인 것을 말해준다. 지금의 북경지역이다.
10월 북명인 괴유가 죽었다. 왕은 그가 큰 공을 세웠으므로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9년 10월에 왕이 개마국에 친정하여 그 왕을 죽이고 그 땅을 군, 현으로 삼았다.
12월 구다국왕이 개마의 멸망을 듣고 나라를 들어 내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땅을 점점 널리 개척하게 되었다.
이 때( 서기 26년)는 전한이 멸망한후 후한 건국초기로 중원대륙과 몽골대륙과 서역일대를 크게 개척한 고구려가 절대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 적수를 찾기 어려울 때였다.
11년 7월에 한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치므로 왕이 신하에게 방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기를 "지금 한나라는 몇년째 흉작이 계속되고 도적이 봉기함에도 까닭없는 군사를 일으키니 이는 중앙 정부의 정책이 아니요 필시 변경의 장수가 무단 침입한 것이므로 험한곳에 의지하여 기습을 하면 성공할것 입니다." 라고 했다.
좌보 을두지는 "대왕은 성문을 닫고 적의 피로함을 기다려 나가 치는것이 좋겠읍니다." 했으므로 왕이 따랐다.
이 때의 성은 위나암성으로 그 험고하기가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그 산위에 또 성을 쌓고 그 곳에 머물렀다.
한나라 장수는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갔다.
13년 7월 매구곡인 상수가 그의 아우 위수와 당제 우도등과 더불어 내투하였다.
<밀기>에서 전한다.
개마국은 일명 웅심국이라 하니 북개마 대령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으로 부터의 거리가 2백리이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이라 칭했고 북개마 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이다. 월독국은 그 북쪽 500리에 있고 직구다국 혹은 매구여국은 옛 오난하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으로 옮겨 그곳에 살았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었다. 쑥은 다려서 복용함으로서 냉을 치료하고 마늘은 불에 구워 먹음으로서 재앙을 다스린다.
고구려 3대 大武神 열제 때 얼마나 그 무력이 막강했는지 그 이름에서 나타난다.
이때 우리민족을 신독국이라 불렀다. 무서운 힘을 가진 나라라는 뜻이다.
얼마나 무서우면 개마국을 멸망시키니 구다국이 항복 해오고 매구여국이 투항해 오겠는가?
매구여국이 있던곳이 금산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다. 금산은 우랄 알타이 산맥이다.
지금 카자흐스탄을 지나 러시아 중서부지역이다.
이때 독로국이 신독국이고 신독국이 오천축국이 된다고 하였다.
그중 중천축국이 고구려인 것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대무신 열제의 정복활동을 더 확인해 보자.
15년 3월 대신 구도, 일구, 분구등은 비류부의 장이었는데 그 바탕이 탐욕스럽고 비천하여 남의 처첩과 우마와 재화를 마음대로 빼앗고, 혹 주지 않으면 마구 매질을 하여 원한이 많았다. 왕이 듣고 세 사람을 죽이려 하다가 동명의 구신인 까닭에 극형을 가하지 못하고 퇴출 시키고, 남부의 사자 추발소를 비류의 장으로 삼았는데 그 발소는 덕으로써 구신들이 감화시켜 개과 천선하게 되였다.
이에 제는 발소에게 대실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대무신 열제는 무서운 정복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치도 신하들을 감복시키는 큰 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로 고구려가 신독국이면서도 천축국으로 불린 평화의 시대 였음을 말해준다.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지방을 유람하였는데 마침 낙랑와 최리가 호동을 보고 " 군은 보통사람이 아닌데 혹시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로 삼았다. 그후 호동은 귀국하여 비밀히 최씨의 딸에게 " 무기고의 고각을 부수어야만 너를 내가 맞아 들이겠다고 하니 최씨의 딸이 그리 하였다. 최리는 고구려의 공격에도 고각이 울리지 않자 방비가 없다가 성아래 군사가 닥친 후에야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그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
11월 호동이 자살하니 그는 제의 차비, 즉 갈사왕의 손녀의 소생이었다. (갈사는 태조무열제 융무16년(58) 시조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 하고는 그의 여동생은 열제의 차비가 되었다.)
이 갈사국이 있던 곳이 지금 갈석산( 대소의 아우는 사냥을 하다가 압록곡에 이르렀는데 황룡국왕이 나와 사냥을 하는것을 죽이고 그 나라를 빼앗아 갈사국을 세웠다.고 했으니 압록곡 즉 황하유역임을 알수있다. 내몽고와 영하회족자치주 경계, 황하의 중 상류 유역으로 고비사막 동쪽에 있는 산)이 있던 지역이다.
12월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후한 광무제에게 보냈다. 이 때가 후한 건무 8년이었다. (기원후 32년으로 새로 건국한 후한의 내정을 살핀것이다.)
20년 왕이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 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이 때의 동압록은 황하의 상류로 대륙의 감숙성 지역을 말한다. 낙랑국이 있던 곳이 지금 영하회족자치주와 감숙성 평량현 일대였다.
만리장성 북쪽이 온통 대 고구려의 영역임을 지도로 확인해 볼수 있다.
이 시기에 중원 대륙에서 고구려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
만리장성이 고구려와 후한의 경계였다는 것을 다음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이 증명한다.
27년 9월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가 점령한 낙랑을 쳐 그 땅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이 한에 속하다.
살수이남이 한나라에 속하니 살수의 북쪽은 고구려라는 뜻이다.
고구려는 북쪽 황하의 북쪽에 있고,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황하의 남쪽에 있다는 기록이다.
바로 우리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낙랑을 두고 고구려와 한나라가 서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이 낙랑의 위치를 고증해 줄 수 있는 지명중의 하나가 갈석산이다.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이 곳에서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다는 <진 태강지리지>의 기록에 만리장성이 요수를 끊고 산해관 서쪽에서 일어났다. 는 것이 바로 이 곳이다. 위 지도의 후한 의 북쪽경계에 있는 푸른색 장성이 만리장성이다. 이 중에서 황하 만곡내에 있는 부분이 진나라때 쌓은 성벽으로 갈석산에서 장성이 시작 되는 것을 지도에서 볼 수 있다.
이 것으로 진나라 장성이 있던 곳이 낙랑군 수성현이며 이 만리장성이 있던 낙랑 땅을 고구려와 한나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지도를 보면 이 때의 요수는 황하를 가리킨다. 요수(황하)를 끊고 만리장성이 지나 간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고, 이 곳에 지금은 하란산이라고 부르는 석산이 있다. ( 하란산 암석지대- 인터넷참조 )
황하를 요수라 한 것은 고구려 태조대왕 융무 3년(서기 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다음지도는 요택과 갈석산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이다.
내몽고 지역을 보라색으로 표현하였다.
북경 바로 위로 만리장성이 지나간다.
이 중에서 검은색 장성이 진나라때 쌓은 장성이다. 갈석산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붉은 색이 조나라 장성이다. 노란색이 연나라 장성이다.
춘추전국시대 이들이 쌓았다고 한다.
한단고기의 고구려 본기에 고구려 "태조대왕 융무 3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의 10성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10개의 성은
첫재, 안시는 개평의 동북 70리에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세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네째,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째,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째,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일곱째,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여덟째,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옛 요동국이라함)
아홉째,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열째,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또, 5년 봄 정월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고 했다.
드디어 고대 지명의 핵심 비밀이 밝혀졌다.
고구려때 수나라 양광과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할때면 항상
요택을 지나는데 그 요택이 바로 황하의 만곡부분이었던것이다.
고구려사를 보면 수隋의 양광(양제)이나 당나라 이세민은 탁군涿郡에서 군사를 모아 고구려로 출발 하는데, 일군은 육로로 항상 요택을 지나 요동성을 공략한다. 또한 한편의 군사는 동래(등주)에서 해로로 패수로 들어온다.
그 탁군은 지금의 북경으로 그들의 본거지인 하북성 에서 산서성에 가로막힌 태행산맥을 우회하여 내몽고 요택이 가장 가까운 거리이며, 또 한 길은
동래로 부터 황하를 거슬러 올라 패수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단고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명을 설명 하였다.
바로 갈석산의 위치이다.
갈석산은 요택의 서남에 있다 했으니 바로 지금 녕하 회족자치주의 하란산을 말한다.
하란산옆에 석각산시가 있다. 이곳이 바로 석성이었던 백암성이 있던곳이다.
바로 지금 황하가 휘감아 돌아가는 녕하회족자치주와 감숙성 남부와 섬서성이 요동이고, 낙랑군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묘한것은 이 곳이 요서도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황하가 요철을 이루어서 이다. 즉 황하의 만곡 부분안은 요서도 되고 요동도 된다. 지도를 보면서 생각해보라.
분명 고구려 초기 3대 대조대왕시 이곳에 요서 10성이 위치 했는데, 고구려말 수, 당이 침입하면서 공격한 요동성과 안시성도 이곳 요하를 건넌곳, 즉 황하의 만곡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황하가 요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4대 민중제 재위 5년
휘는 해색주니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태자가 어려 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이에 즉위하였다.
4년 제는 민중원에서 전렵을 하였다. 한 석굴이 있음을 보고 좌우에게 부탁하기를 " 내가 죽거든 이 석굴에 장사해 주고 달리 능묘를 만들지 말라" 고 하였다. (이 곳 민중원이 돈황 석굴 부근이 아닐까? 그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9월 동해인 고주리가 고래를 잡아 바쳤는데 그 눈이 밤에 광채가 있었다.
(이 동해는 지금 소련 연해주의 동쪽으로 고래가 지금도 많은 곳이다. 이 곳에서 고래를 잡아 신강 위구르의 고구려 수도까지 그 큰 고래를 어떻게 싣고 갔을까? )
10월에 잠우부락의 대가 대승등 1만여호가 낙랑으로 가서 귀부하였다. 이때 낙랑은 다시 고구려의 소속이므로 낙랑에 귀부한 이들은 결국 고구려에 귀속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음 모본왕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더욱 동쪽으로 한을 공략하여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차지한다.
유방이 세운 전한 무렵 일시적으로 한무제는 장안( 고구려의 평양으로 지금의 서안 )을 도읍지로 삼는다. 이 때를 서한이라고 하는데 고구려에게 서한(전한)은 멸망 당한다.
후한의 광무제는 동쪽으로 쫓겨가서 지금의 낙양에 도읍을 하고 동한 이라고 한다. 서한이 200년 동한이 200년으로 고구려 900년의 제국에 비해 보잘것 없지만 그들의 역사중에는 가장 길었던 왕조이다.
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대륙의 중원 땅 한수유역을 두고 서로 공방전을 벌일때 그 천년의 기간 동안에 우리 민족의 국가는 세 나라로서 하나의 왕조가 유지하는 동안에 그들의 역사는 워낙 잡다한 족속으로 25개 왕조가 바뀌므로 통칭 25사라고 하는데 춘추 전국이 끝난 이후로 진, 한이 멸망하고 위,촉,오 삼국이 겨우 40년을 존속 하고는 다 음 왕조는 사마씨의 서진으로 약 50년간 이며 이 때의 진나라는 정말 한심한 나라인데, 황제가 둘 씩이나 연속해서 북쪽에서 침략해 온 흉노의 궁실에 잡혀 가서는 그 궁실에서 술잔을 씻는 시종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것도 모자라 8왕의 난이라며 같은 사마씨끼리 내분이 벌어져서 서로가 황제가 되려고 싸우다가, 결국은 북쪽의 선비족들을 용병으로 불러 들이는데 이 북방 선비족 출신의 장군들이 오히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저마다 나라를 세우는데 이들이 5호 16국이다.
다섯 족속의 오랑캐가 16개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인데, 316년을 시작으로 유연이란 자가 전조를 건국하고, 479년에 북위가 이 들을 통일할 때 까지 고작 150년 간 인데, 이 기간에 발생한 나라들이 성한, 대, 전조, 후조, 전진, 후진, 남연, 북연, 전량, 후량, 서연, 서진, 남량, 북량, 서량, 전구지, 후구지, 하 등의 수 많은 잡다한 나라들로서 황하유역을 무대로 이합집산을 거듭한 후 이들은 북위로 통일 되는듯 하다가 다시 동위, 서위, 북제, 북주로 갈라진다.
이들은 전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제후국이며 위성국가로 지금의 대륙의 산서성 하북성 일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남쪽으로 도망간 서진의 사마씨 하나가 양자강 하구에서 동진을 건국 한다. 이 것도 고작 200여 년간 송, 제, 양, 진으로 4개 나 왕조가 바뀌는데 이들은 양자강 하구 강소성 일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즉 백제의 속국이 된다. 아래 위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울타리 안에서 존속했던 나라들이다.
이들 오호 16국 시대에 실질적으로 대륙을 지배한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이다.
이때 대륙을 호령한 천년 제국이 바로 고구려이다.
5년 제가 돌아가니 유명에 의하여 석굴에 장사하고 묘호를 민중제라 하였다.
제 5대 모본제 재위 6년
2년 봄에 모본제는 장수를 보내 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략하여 요동태수 채동을 업박하였다. ( 요동태수 채동은 이때 그들의 기록에 요하 상류의 오환과 대흥안령의 선비를 선동하여 외몽골 오르콘강의 북흉노를 무마시켰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이들 오환이야 말로 고구려를 칭하는 말이며, 선비와 흉노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이들 우북평과 어양, 상곡, 태원의 위치를 알아보자.
이 지역들을 모두 고구려가 차지하고 나니 한나라는 그야말로 황하의 하류에 조그만하게 쪼그라져 버린 후한 말기의 형편없는 꼴이다.
대륙의 중원땅 황하와 양자강 사이를 삼천리가 넘게 흐르는 강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한수....
이때 대륙을 지배한 고구려의 위상을 보라.
역사에 기록된 후한은 한마디로 환관이 정권을 휘두른 나라이다.
환관이란 내시가 어마어마하게 벼슬을 하고는 임금을 가지고 노는 경지를 말한다. 이 때의 한나라 황제들은(실제로 황제라고 했을지 의심스럽다. 후대의 장난이다.) 겨우 열살 전후에 황제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다.
심지어는 2살 먹은 황제도 탄생하는데 외척의 횡포에다가 모후의 수렴청정으로 겨우 청년이 된 이들은 자신들을 키워준 내시가 가장 가까운 심복이 된다. 이 들의 권력투쟁 속에서 백성들은 견디다 못해 결국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동탁과 조조같은 간웅들이 나라를 말아 먹는데 이때 생긴 위,촉,오의 삼국지는 온통 혼란의 역사 이다.
결국은 조조는 참모였던 사마의중달의 후예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사마씨가 세운 진나라는 유총이라는 흉노족에게 낙양을 두번씩이나 점령당하며 그 진나라의 황제는 흉노의 왕국으로 끌려가 연회에서 술잔을 씻는 시종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런 나라들이 중원을 지배하고 힘이 남아서 고구려를 공격하고 한사군을 두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고 그것을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삼국지를 읽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얼빠진 민족이다.
이 시기에 대륙에는 무서운 나라가 있었다.
바로 신독국이라는 나라이다. 몸이 재빠르고 날쌔며 활과 창을 잘 사용하는 민족을 말한다.
그 나라는 넓이가 3만리였다. 바로 전한시기(-206 ~8) 였는데 너무 그 강역이 넓어서 후한 시기에 와서는 다섯 제후국으로 갈라지기 시작 하였다.
이 다섯 제후국들을 불가 사서에서 오천축국이라고 기록하기 시작 하였다. 사실 이 시대 이후로 주변의 모든국가는 불교를 절대적으로 숭상하기 시작했으며 사서에 기록된 오천축국은 다음과 같다.
다섯 천축국중에서 가장 불교가 성했던 나라는 중천축국이다. 중천축국의 강역은 곤륜산 남쪽이며 서장성 서북과 청해성지역이며 감숙성 돈황을 중심으로 석가가 득도한 기련산이 그 중심이었다.
그런데 같은 천축국이라도 서쪽에 있는 천축국은 바라문(婆羅門)교의 성지였다. 특히 바라문교가 성행하던 유럽 일부와 신강성 서부에는 광범위하게 미신적인 종교가 성행하던 지역이다.
통전(通典)의 천축국전(天竺國傳)을 보면 후한 때부터 천축국으로 불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한(前漢)시대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며 장건(張騫)이 서역에 갔을 때 대하(大夏)라는 제후국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 공(邛)이라는 곳에서는 죽장(竹杖)을 보았고, 촉(蜀) 땅에서는 포목이 거래 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대하(大夏) 사람들 말에 의하면 대하국(大夏國)도 신독국(身毒國) 사람들과 함께 오고가며 왕래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다 천축국(天竺國)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마가타(摩伽陀)라 하고 또는 바라문(婆羅門)이라 했다고 되어 있다. 이들은 총령(蔥嶺) 남쪽이라 했다. 총령 남쪽이라면 곤륜산(崑崙山) 바로 아래이며 서장성 서쪽 지금의 청해성지역이다.
월씨국(月氏國) 東南으로 1천리이며, 전체로는 3만여 리(三萬餘里)라 되어 있다. 이들이 나뉘어져 오천축(五天竺)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왈(一曰) 중천축(中天竺), 이왈(二曰) 동천축(東天竺), 삼왈(三曰) 남천축(南天竺), 사왈(四曰) 서천축(西天竺), 오왈(五曰) 북천축(北天竺)이며 각 지방마다 수천리(數千里)이며 성(城)과 읍(邑)은 수백 개라고 적고 있다.
특히 남천축국(南天竺國)은 남쪽으로 큰 바다가 연이어져 있다. 그리고 북천축국(北天竺國)은 설산(雪山)이 있으며 사방으로 山이 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북천축국 남쪽으로는 계곡이 있어 나라 간에 통하는 문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동천축국(東天竺國)은 동해(東海)와 연결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월남인 부남(扶南) 임읍(林邑) 등이 인접해 있다. 지금의 대만해협과 해남도(海南島)를 말한다.
서천축국(西天竺國)은 계빈(罽賓)과 접해 있었다. 계빈은 중국 서부와 유럽으로 이어져 있는 접경지대이다. 그리고 파사(婆斯)도 함께 인접해 있었다. 파사는 지금의 파키스탄 접경지대이다.
중천축국(中天竺國)을 거점으로 하여 사대(四大) 천축국간의 사이에 나라들이 서로 병립하여 국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한(漢)나라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라 했으며 서안(西安)으로부터 9,800리 떨어져 있었다. 중천축국은 도읍지를 중심하여 2,800리의 강역이었으며 남쪽으로 뻗어있는 곤륜산(崑崙山)인 총령을 서로 연결하고 있었다.
이들의 시기에 청해성의 오란 도란을 중심으로 부여가 건국하고 천산 파미르 고원에 영고탑을 세웠으며, 이 부여의 족속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동부여 이렇게 오천축국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 후한시대 였으니 우리의 역사와 일치한다.
부여는 그 시조 해모수 부터가 부처님이다. 천왕랑 해모수가 부여를 건국한 날이 사월 초 팔일인데 이 날을 우리 나라만 부처님 오신날로 기념하고 있다. 동남아의 다른 나라는 5월몇일을 부처님 탄신일로 기념하고 있으니 묘한 일이다.
가섭원 부여의 시조 해부루는 국상 아란불의 권유로 가섭원으로 나라를 옮긴다. 부처님의 1대 제자 가섭의 고향인 가섭원 으로 2대 제자 아란존자가 등장하는 가섭원 부여가 천축국이 아니라면 어디서 천축국을 찾을수 있겠는가?
또한 그 부여는 나라를 빼앗기고 도읍을 옮기는 이유 부터가 남다르다.
고두막한인 동명성제가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 라고 하니 해부루 단제는 하는수 없이 가섭원으로 옮겨간다.
도대체가 나라를 빼앗는 자도 그렇고 나라를 내어 주는자도 부처의 경지가 아닐수 없다. 이러한 나라를 부처의 나라 천축국이라 역사는 기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그대로 물려받은 고주몽 의 고구려, 고주몽의 아들 온조의 백제 그리고 불국을 이루겠다는 신라의 불국사. 이러한 터전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아예 처음부터 스님이었다.
이들은 오천축국이 성립되고 사라져간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때에 신라의 혜초스님이 천축국을 방문한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인데 이 기록물이 돈황석굴에서 발견되었다는것은 돈황이 신라의 땅이었다는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6년 11월에 두로가 왕을 시하였다.
제6대 태조무열제 재위 94년 (연호는 융무隆武)
제는 휘는 궁이요 아명은 어수니 유리왕자인 고추가 극재사의 아들이며, 어머니 태후는 부여인이다. 모본왕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사람이 궁을 맞아 세웠다.
이 사람 克再思는 麻衣를 입고 주몽을 만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타크라마칸 사막의 한자어가 塔克拉瑪干이고 克拉瑪依(마의를 입은 사람이 극재사라는 뜻)라는 도시도 있다. 克이란 지명이 이 지역의 특성이다.
융무 3년 2월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을 방비 하였다.
그 10개의 성은
첫재, 안시는 개평의 동북 70리에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세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네째,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째,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째,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일곱째,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여덟째,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옛 요동국이라함)
아홉째,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열째,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또, 5년 봄 정월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고 했다.
위에 지도와 함께 설명했다. 이 요하가 황하임을 증명하였다.
융무 4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성읍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에 다달았다.
이곳 창해는 한반도와 연해주 동쪽으로 우리민족의 영원한 동해이다. (지금도 동해니 일본해니 싸우고 있다.)
이때 남쪽 경계인 살수는 한나라와 국경 분쟁을 치루고 있었는데, 황하의 상류인 오르도스 지역으로서 현재의 지명은
寧夏회족자치주인데 우리 고려사 지리지에 분명히 寧州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 곳에서 황하에 합류하는 지류의 이름이 살수이다.
현재 지명은 청수하로 불리우며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한 갈석산을 지나 흐르는 강이다.
역사 지명 -고려사 지리지- 참조 .
융무 7년 4월에 제가 고안연孤岸淵 에 가서 어조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달린 백어를 얻었다.
융무 10년 8월 나라 남쪽에 비황이 생겨 곡식을 해쳤다.
이 기사는 고구려가 대륙에 존재하였다는 증거중의 하나 인데 한반도는 황충의 피해가 있을수 없는 지형이다.
이 孤岸淵 은 어느 곳의 호수일까? 석가가 설 하셨던 孤獨園에 있던 호수일까?.
다음은 조선중기 선비인 권필의 시집 석주집 7권에 나오는 귀절이다.
바위 가에 작은 그물을 물속에 던지니
가을이 오매 자린이 살찐게 참으로 좋아라 자린 ; 붉은 물고기의 비늘
돌아올 때는 언제나 석양이 다 질 무렵이라
안개낀 물가의 길에 옷은 비에 흠뻑 다 젖는다.
만다화 꽃비가 급고원에 내리니 급고원 ; 기수급고독원
그중에 선가의 불이문이 있어라
어이하면 일신의 일 떨쳐버리고
산사에서 향피우고 조석을 보낼꼬
융무16년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내항했다.
20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쳐 그 왕을 사로잡았다.
22년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쳐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조나는 藻나라, 주나는 朱나라 이다.
연나는 연나라 이다. 이 기록은 한나라 이전의 춘추전국시대의 조나라 땅, 주나라 땅을 점령했다는 기록이다.
한나라의 땅이 점차 좁아지고 있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다음 지도는 춘추 전국시대에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 졌을때 열국들이 생겨나와 혼란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그들을 통일했다는 진시왕의 나라 영역이다. 진시왕은 한의 장량의 공격을 받는등 쫒기다가 2대만에 멸망하고 초나라 항우에게 승리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지만 그 영역이 고구려의 막강한 무력에 밀려 춘추전국시대보다 형편없이 줄어 드는 것을 볼수 있다.
다음 지도는 춘추전국시대 지도이다.
융무 46년 제가 동쪽으로 책성을 순수할때, 책성의 서쪽 계산에 이르러 백록을 잡고, 책성에서는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를 포상했다. 드디어 산석에 공을 새기고 돌아왔다.
50년 8월에 사람을 보내어 柵城을 안무하다.
산상제21년 기록에 " 한의 평주사람 하요가 백성 1000여호를 이끌고 의탁해 오니, 제는 이를 책성에 안치하였다." 는 기록을 보아
平州는 晉나라때 幽州 였다 하니, 유주는 지금의 북경부근으로 옛 우북평이 그 곳이다.
53년 제께서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에 들어가 6현을 탈취하였다.
한의 요동태수 경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이 시기는 후한 4대 화제 (88~ 105년)때로 그는 10세에 황제가 된 인물인데 이때부터 후한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55년 9월 제가 質山 남쪽에서 사냥을 하여 자색 노루를 잡았다.
57년 정월 한나라 안제(105~ 106)의 원복 대착식에 사신을 보내다.
안제는 후한 5대왕 유융으로 2년도 채 왕위에 앉지 못한 위인이다.
59년 3월 제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를 쳐 이를 군현으로 삼았다.
62년 8월 제께서는 남해를 순수하시고 10월에 남해에서 환도 하셨다.
이때 고구려는 동쪽으로 한반도 북부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고, 지금의 훈춘지역인 책성에 기공비를 세웠으며 남으로는 청해성일대를 장악하고 고구려의 남해라 불렀으며, 백제와는 한수를 경계로 하였고, 동남으로 후한을 압박하여 하북성 일대인 현도를 장악하고 후한을 황하 이남으로 꼼짝도 못 하도록 눌러 놓은것을 알수있다.
< 한원>에 의하면 " 현도는 무제 원봉 4년(BC107)에 열렸다. 유주에 속한다. " 고 하였으니 지금의 북경유역을 말한다.
사실 이 시기에 한나라는 고구려의 후원아래 연명하던 한낫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기 부터 수나라, 당나라가 등장 할 때까지 대륙은 온통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판도였던 것이다.
이때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생기는 나라가 바로 신라이다.
66년 6월에 왕이 예맥과 더불어 한의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이곳 화려성의 위치는 지금 북경일대를 華北지방이라고 하니 북경인 현도군을 지나 더욱 남쪽으로 한나라를 밀어 부친것을 알수 있다.
8월에 소사에게 명하여 현량( 올바른 선비 )과 효순 ( 효자) 을 천거하고. 환(홀아비), 고(고아), 독(무자식)과 연로자로 무능한 이들을 탐방하여 의식을 베풀었다.
69년 봄에 한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왕이 아우 수성을 시켜 군사 2천을 이끌고 풍환과 요광을 영격할 때, 수성은 거짓항복으로 한군의 진영을 속인후, 험한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한편, 군사 3천을 보내 그들의 본거지 현도, 요동 2군을 우회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획하였다.
4월에 열제께서 선비 8천명을 데리고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서 싸우다 죽었다. 이때 그의 수하 공조연 용단과 병마연 공손포는 스스로 풍을 위하여 막다가 함께 몰진하고 죽은자가 100여명이었다.
이 상의 기사에서 이때의 고구려의 무력의 막강함이 들어 난다. 고구려의 계속된 압박에 한나라는 전력을 다해 반격을 해 보았지만 도리어 그들의 성이 불타고 그 성주까지 몰진하고 말았다, 또한 고구려는 선비를 수족같이 부리고 있음을 알수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다.
濊貊의 渠帥 - 유라시아 제국사의 기사에 의하면 이때의 거수를 신강 위구르의 고성과 투루판의 王이었다고 고증해 주고있다.(유라시아 유목제국사 92쪽, 96쪽-사계절출판-)
유라시아 제국사의 기사를 옮겨보면,
서기 74년 후한의 경병과 두고가 투르판을 공격할때 그 곳은 두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동일한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투루판 인근의 남거사와 천산 건너편 기슭의 고성 방면에 있던 북거사였다.
" 북방의 몽골리아에서 두헌과 경병이 북흉노에 대하여 큰 승리를 거두자 북과 남의 거사(고성과 투르판)의 두 왕은 즉시 중국과 관계를 재개했다. (서기 89~ 90년)
이 기사에서 한의 유주자사 풍환등이 공격했던 예맥의 거수가 신강위구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신강지역의 고구려는 즉시 왕의 아우 수성을 시켜 반격한 것 을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있다. 고구려는 신강위구르 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을 형성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주는 기사이다.
(권제 15 고구려국 본기 제 3 -삼국사기 363쪽- )
10월에 열제께서 부여에 행행하시어 태후묘에 제사하고 곤궁한 백성을 위무하였다.
열제의 모후가 부여인 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제 26년(서기 667년) 고구려가 마지막 전투를 벌일때 당장 이적이 고구려의 서변 요새인 신성을 공격할때, 또 다른 당의 장수 고간은 金山에서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다음해 ( 668년) 또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당의 장수 이적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공격할때, 설인귀도 고구려군을 금산에서 격파하고 그 기세로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강 주위의 40여성이 항복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곳 金山이 바로 우랄알타이 산맥을 말한다. 지금 지도에 우랄 알타이 산맥을 阿爾泰山, 기련산 서쪽에 있는 산을 阿爾金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의 서쪽 강역이 신강 위구르임을 증명하는 지명이다.
이 곳이 고구려때 부여성이 있던 곳이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저호의 구( 자색 여우털 의복) 와 백응, 백마를 바치니 잔치를 하여 보냈다.
12월에 열제는 마한, 예맥등과 함께 1 만여기를 거느리고 가서 현도성을 에워 싸니 북부여 왕이 아들 위구대를 시켜 군사 2만을 데리고 한을 도왔다.
북부여는 대무신열제5년(22년) 대소왕이 괴유의 칼에 죽은후 고구려에 항복,
도읍의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 하였는데 등에 문자가 있다하여 낙씨의 성을 하사했다. (하도 낙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 기록이다, )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494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 마저 끊겼다.
고 했으니 이 시기에 한나라를 도와 고구려를 견제 하려 했음을 알수 있다.
70년 열제는 마한 예맥등과 더불어 요동을 공략하니 부여왕이 원병을 보내 현도군을 구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마한은 다음기사에 나오는 중마한이다.
정미 원년(-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 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 가더니 돌아 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이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르켜 중마한이라고 한다. 이에 이르러 변,진한의 두 한도 각각 자기들의 각 영토를 가지고 수도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오래도록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도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 번조선왕 기준과 탁의 무리들은 서로 다른곳을 향해 가는데, 기준은 양자강 이남 동정호 부근의 익주 <고려사 지리지의 금마군 익주 - 지금의 장가계>에서 마한국을 건국하는데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 망한다.
또한 한 무리 의 오가들은 대장군 탁의 고향인 월지로 가는데 이 곳이 대륙의 감숙성 돈황 지역이다. 이 월지는 마한이란 이름으로 고구려에 복속되는데 일부는 다시 아프카니스탄과 우즈벡 지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을 세우는데 후에는 쿠샨왕조가 된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하면 (쿠샨왕조-서기 105년-250년경 카스피해에서 아프카니스탄, 타지키스탄을 지나 인도 갠지즈강 상류까지 대제국을 이루는데 월지민족이 건국하였다.)라고 나와있다.
또 다른 마한과 변한의 무리들은 천산유역과 청해성, 내몽고등에 여러 군소 국가를 이루는데 옥저, 낙랑, 말갈, 숙신, 여진, 읍루, 물길, 오손, 쿠차, 고창, 거사, 훈, 강거, 색, 사카등으로 동 서양의 학자들이 부르고 있다.)
90년 9월에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의 유적지를 발굴한 것을 보면 지진에 의하여 묻혀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우리 고구려의 유적도 이 곳 신강 위구르지역의 땅 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94년 8월 열제는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부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의 처자를 약득 하였다.
이 시기의 기사를 보면 한은 부여와의 도움으로 서안평현의 대방군, 낙랑군등을 회복하여 국력이 신장된것을 보여준다.
제 7 대 차대제 재위 20년
20년 ( 165) 3월 태조무열제가 119세로 돌아가시다.
10월에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백성이 견디지 못함을 이유로 차대왕을 시해 하였다.
제 8 대 신대제 재위 15년
휘는 백고이다.
2년 (166)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삼고 벼슬을 더하여 패자로 삼아 중외의 병마사를 맡게하고 겸하여 양맥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때 명림답부는 연나부의 조의로서 양맥을 거느리게되어 막강한 군사를 보유한 최대의 군벌이었음을 알수 있다.
4년 (168) 한의 현도군 태수 경림이 침략해와 군사 수백을 죽였다.
5년 (168) 왕은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토벌하였다.
8년 11월 한이 대병을 이끌고 공격해왔다. 이에 명립답부가 말하기를 " 지금 한은 강병을 이끌고 멀리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이 만만치 않으므로, 그들이 천리원정으로 양식을 운반하기가 쉽지않으니 우리가 만일 깊은 못을 파고 성루를 높게하고 들을 비워 기다리면 그들이 순, 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져 철군할 터이니 그때 날랜 군사로 육박하면 가히 뜻을 이룰 것 입니다." 했다.
왕이 그리하여 답부가 수천명의 기병으로 뒤쫒아가 좌원에서 싸워 한군이 대패하여 한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 질산의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이 곳 좌원은 과거에도 소서노의 부친 연타발에게 봉하였던 곳이다.
고구려와 한나라의 공방전이 벌어진 감숙성 돈황일대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 곳이 월지국 중마한이 있던 곳이다.
다음은 칠언시 한구절을 읊어 본다.
천리밖 옥관에서 불빛을 전해오니 옥관 ; 감숙성 돈황에 있는 옥문관
저물녁 구름 저편에서 작은별이 깜박인다.
뉘라서 알랴 시골노인 고개 돌리는 곳
바로 봉래에서 말세우고 바라보리란 것을
두보의 시 < 석봉 夕烽>에
저녁에 봉화가 멀리서와, 매일 편안함을 알리었지,
변방에 작은 불빛이 전해오니, 구름가에 쇠잔하게 가물대었네,
秦 땅에 비추어 위급함을 통고하니, 적병이 이미 농서를 지났다네, 진 ; 진시왕이 세운 나라, 농서 ; 감숙성의 실크로드 요충지
듣건데 봉래전에서는, 천문에 말을세워 바라본다지. 봉래전 ; 왕궁의 전각
고구려가 공격해 올까 전전 긍긍하는 한족의 모습이다.
제 9 대 고국천제 재위 19년
휘는 남무 혹은 이이모이니 신대제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왕은 신장이 9척이요, 자표가 웅위하고 힘이 큰 솥을 능이 들어 올리며, 관용으로 청취하시고, 용단이 위맹하였다.
2년 妃 우를 황후로 세우다. 후는 절노부 우소의 딸이다.
6년 한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키니 장수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여, 황제가 친히 정기를 이끌고 좌원에서 한병을 대파하였다.
12년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은 황후의 친척으로 권세를 믿고 교만하여, 그행패에 나라 사람의 원한이 먾았다.
황제가 노하여 그들을 주살하려 하니, 좌가려등은 4연나와 함께 모반하였다.
13년 4월 좌가려 무리들이 왕도를 치므로, 드디어 이들을 토평하고 제부에 고하여 현자를 구하였다.
이에 서압로곡 좌물촌의 을파소를 천거하여 국상으로 맏기고 전권을 위임했다.
19년 (서기 197년) 후한 말기에 대란이 발생하여 피난오는자가 무수히 많았다.
이때는 동탁과 조조가 후한의 환관들의 혼란을 틈타 난세의 간웅으로 등장 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있었다.
제 10 대 산상제 재위 31년
휘는 연우 혹은 위궁이다. 고국천제의 아우이다.
고국천제는 후손이 없으므로 제의 후가 연우와 공모하여 발기를 내쳐두고 황위에 올렸다.
발기가 처자를 데리고 요동으로 달아나 태수 공손도에게 의탁했다.
발기가 한병을 얻어 난을 일으키자. 제는 동생 계수를 시켜 막게하니 한병이 대패 하였다.
발기는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산상제 원년 (서기 197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 시켰다.
이 때는 후한 말기로 고구려는 다시 황하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한나라를 멸망의 길을 재촉하였다.(220년 한나라 멸망)
결국 한나라는 고구려가 멸망시킨 것이다.
2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3년 9월에 왕이 질양에서 전렵을 하였다.
앞에 명림답부는 좌원과 질산을 얻었다. 좌원이 감숙성 남부지방의 남여, 농서부근의 낙랑군이 있는 평량시 일경우 이 근처 陽의 도시는 慶陽현 밖에 없다. 그 곳 영하 회족자치주와의 경계에 징기스칸이 고려군에 살해당했다는 육반산이 있다.
이 곳에서 한나라의 국경을 염탐하며 전렵을 행한 것이다.
13년 3월 황제는 교시를 통해 소후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
10월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겼다.
이제 이곳 환도성은 평양( 지금 대륙 섬서성 서안)에 가까운 곳이다. 평양성으로 도읍 하는것이 고구려의 다물이다.
막조선의 수도, 번한의 도읍지였던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이다.
21년 (서기 217년) 8월 한의 평주사람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이끌고 의탁해 오니, 책성에 안치 하였다.
28년 왕손 연불이 탄생하다.
31년 제께서 돌아가시니 山上陵 에서 장사하고 山上帝 이라 호 하였다.
어느곳의 산일까 아마도 감숙성이나 천산산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제 11 대 동천제 재위 22년
휘는 우위거또는 위궁이요, 어릴때 이름은 교체이니 산상제의 아들이다.
8년 (237) 위(조위)가 사신을 보내왔다.
이것은 명백한 조공이다. 건국한지 300년된 제국의 황제에게 한나라가 망하고 생긴 신생국이 신고를 한것이다.
10년 오왕 손권이 사자를 보냈다.
위와, 오나라가 서로 경쟁하듯 사신을 보내고 있다.
16년 제는 장수를 보내 요동의 西安平현을 공격하였다.
이곳 이 지금의 西安이다, 또한 平陽이다.
한단고기에 서안평현, 서안평현을 수없이 강조한 까닭이 드디어 밝혀 진 것이다.
이제 곳 평양성을 쌓고 평양 천도를 단행한다.
19년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변을 침략하였다.
드디어 신라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라는 대륙의 하남성에 있었다.
유방의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신라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된다. 하남성 낙양이 신라의 도읍지가 되는 것이다.
20년 8월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군사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침범하니 왕은 보,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영전하여 이를 깨뜨리고 3천의 목을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양맥의 입구인 골짜기에서 다시 싸워 또 3천을 베었다. (大戰 梁口)
이에 황제는 관구검을 몰살시키려 철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격하니, 관구검이 방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싸워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황제는 겨우 1천의 기병과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10월 검이 환도성을 쳐 무찌르고 장군 왕기를 보내어 황제를 추격하게 하였다. 제는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에 이르니 군사가 다 흩어졌다. 오직 동부의 밀우가 곁에 있다가 " 신이 죽기로서 싸울 터이니 그 틈에 달아나소서" 하여 제는 사이길로 달아나 흩어진 군사를 모아 자위하며, 능이 밀우를 데려오는 자에게 후한 상을 주리라 하였다.
하부의 유옥구가 가서 밀우가 땅에 쓰러져 있는것을 업고 돌아왔다.
제는 사이길로 전전하여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군의 추격이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이에 동부사람 유유가 계책으로 항복을 청하여 위장과 함께 몰진하니 위군이 흐터져 드디어 낙랑방면으로 퇴거 하였다.
이에 제는 해빈海濱에서 돌아왔다.
이 싸움에서 위장 모구검은 숙신의 남계에 이르러 공을 돌에 새기고,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이라고 새기고 돌아갔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불내성은 국내성이니 그 성은 돌로 쌓아 만들었다. 이는 국내성과 환도산이 상접한 까닭이다.)
처음 모구검이 공격한 환도성은 신강위구르의 투루판에 있는 고구려 수도이다.
해빈海濱은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 난빈蘭濱이다.
梁貊의 골짜기가 梁口이다. 감숙성 기련산의 冷龍嶺이 竹嶺이다.
동천제는 감숙성 냉룡령(죽령)을 넘어 청해성 해빈으로 도피한 것이다.
이곳까지 쫒아온 위군이 감숙성 난주를 지나 평량(낙랑)으로 철군한것이다.
21년 2월에 제는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거기로 옮겼다.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드디어 고구려 평양시대가 시작 되었다.
대륙의 장안, 지금의 서안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264쪽 기록에 -
"책성에 태조무열제의 기공비가 있다.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 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다.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의 중간 기슭에 동천제의 조천석이 있다.
삭주 거문산의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무덤이 있다.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고 했다.
제 12 대 중천제 재위 23년
12년 12월 제는 두눌곡에서 전렵하였다.
위장 위지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치므로 제는 정기 5천명을 택하여 양맥의 곡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8천의 목을 베었다.
제 13 대 서천제 재위 23년
7년 (262) 제가 신성에 행행하여 사냥을 하였다.
11년 (266) 숙신이 침범하여 변민을 살해했다.
제는 왕제 달가를 보내 불의에 적을쳐 檀盧城을 빼앗고 숙신의 추장을 죽이고 적 6백여호를 부여 남쪽 烏川으로 옮기고 적 부락 6, 7개소를 항복받아 부용으로 삼았다.
이에 달가를 안국공으로 삼아 양맥과 숙신 여러부락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곳 부여가 있는 곳이 우랄알타이산맥이고 남쪽 오천이 신강 위구르와 우즈베키스탄이다.
이 시기 아프카니스탄과 간다라, 펀잡을 지배하던 쿠샨 왕조는 스스로 월지인이라고 하면서 223년부터 253년까지 불경을 번역하여 고구려에 전파한 인물이 지겸이란 자이다.
바로 오천축국중 서천축국인 쿠샨왕조에서 중천축국인 고구려와 동천축국인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것이다.
다음대에선 구마라즙(344~ 413)이 불경 번역활동을 했다.
19년 4월 신성에 행행하였다.
해곡태수가 경어의 눈을 헌상하다. 눈이 밤에 광채가 있었다.
민중제 4년 (249) 동해인 고주리가 고래를 잡아 바쳤는데 그 눈에 광채가 있었다. 고 했는데 이때 또 고래의 기록이 있는것을 보아 이때 위 촉 오 삼국이 멸망하고 사마씨의 진나라가 서면서 몽고와 만주일대의 통치력이 강화되어 동해의 고래 진상이 이루어 진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신성에서 돌아오다.
신성에 자주 가는 것으로 보아 지금 감숙성 남여, 농서지역인 신성이 고구려의 국경으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제 14대 봉상제 재위 9년
원년 3월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2년 (279) 8월에 선비족 모용외가 내침하였다. 제는 신성에 가려다가 곡림에 이르렀다. 신성재 북부소형 고노자가 기병 5백을 거느리고 왕을 맞으러 가다가 모용외의 군사를 격퇴 하였다.
5년 선비 모용외가 내침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제의 능묘를 파헤쳤다.
제가 북부대형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임명하니 모용외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이 시기에 신성(감숙성 평량 부근)이 연나라와의 경계에 있던 고구려의 영토인 것을 알 수 있다.
제 15 대 미천제 재위 32년
3년 제는 군사 3만을 이끌고 현도군을 공략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빼앗앗다.
14년 (313) 10월에 낙랑군을 공략하여 2천명을 사로 잡았다.
15년 (314) 9월 남쪽의 대방군을 공략하였다.
이 곳 대방 땅은 대륙의 양자강을 넘어 지금의 남창시가 있는 남원땅이다.
남창은 남원과 순창이 있던곳에 역사를 외곡해 두이름을 합친도시로 지금 양자강 남쪽의 강소성 에 있는 지명이다.
이 남원을 "후한 건안 년간에는 대방군으로 하였고, 위나라 때에는 남대방군으로 하였으며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자 당나라 고종은 류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였다"고 고려사지리지에는 기록 되어 있다.
즉 이때 고구려의 미천제는 위나라가 있었던 땅을 점령한것을 말한다.
16년 현도성을 공략하여 차지했다.
< 한원>에 의하면 " 현도는 무제 원봉 4년(BC107)에 열렸다. 유주에 속한다. " 고 하였으니 지금의 북경유역을 말한다.
이곳 현도는 태조무열제(53~146)때 점령했던 곳으로 위,촉,오 삼국때 일시 빼앗겼다가 지금 다시 찾아온것이다.
20년 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왔다.
최비는 고구려와 단씨와 우문씨를 연합시켜 극성의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모용외는 극성을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황하 이북 산서성 섬서성 하북성과 양자강 이남까지 전 대륙의 중심부를 다 장악하였다.
이때 대륙은 진나라 (265~ 316)가 멸망하고 하남성 일대는 신라가 차지했다. 이때 부터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제후국 이었다.
21년 12월 요동을 공격했으나 모용인이 막아 내었다.
31년 (330)후조왕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고시를 주었다.
후조(330-350)는 하북성 업(창덕)을 수도로 삼고 20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후조왕 석륵을 왕에 봉한다는 의미이다.
이 시대의 대륙의 하남성 북부와 산서성은 하루 건너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시대인데 북쪽은 고구려가 건국 4백년의 연륜으로 황하의 중류 섬서성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백제는 한수 이남과 양자강 남부지방을 온통 차지하고 동으로는 복건성까지 동진을 제후국으로 삼았고, 서쪽으로는 청해성 남부와 서장성 티벳을 넘어 아프카니스탄을 차지했고, 남으로는 월남과 인도네사아를 넘어 필리핀과 보르네오 섬까지 진출하는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제 5호 16국 시대의 고구려의 제후국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위촉오를 통일했다는 사마씨의 진나라는 지방 제후의 자리를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믿고는 전부 사마씨로만 임명하는데 이들이 도리어 서로 황제가 되려고 싸우는데 이것이 팔왕의 난이다. 이 들은 북쪽 선비족을 용병으로 끌어 들이는 데 도리어 이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먼저 흉노의 일족으로 유연이라는 한나라식 이름을 가진 자가 전조前趙를 세우고 태원에 수도를 정한다.(304)
그의 후계자인 유총은 서기 311년 진의 수도인 낙양을 공격한다. 왕궁을 불태우고 황제인 희제는 포로로 잡혀 산서성 평양에 끌려가 313년 처형 될때까지 시종으로 살았다.
그 다음의 민제는 또 한번 쳐들어온 흉노의 포로가 되어 연회에서 술잔을 씻는 시종으로 살다가 처형 되었다.
(진나라멸망 265~316년)
유총이 죽은후 그의 부하인 석륵이 하북성 연을 수도로 후조後趙를 건국한다. (서기 329년)
이 석륵의 후계자 석호는 냉혈한 이었는데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계집을 불에 구워 식탁에 내오도록 한 방탕한 자였다. 석호가 죽자 혼돈에 빠진채 어지러워 졌는데, 북쪽에서 기회를 노리던 몽골 선비족의 모용 준이 북경인 연(이 곳이 원래 연나라가 있던 곳이다.)을 업으로 고치고 수도로 삼았는데 전연(349~360)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한때 잠시 낙양까지 점령하지만 흉노족인 석호의 부하인 부흥이 세운 전진의 부견에게 쫒겨 낙양과 태원과 업을 차례로 빼앗기고 결국 포로가 된다. (서기 370년)
부견은 한때 불교를 숭상하며 번영을 누리는듯 했지만 383년 회수를 따라 동진을 공격하다 치명적 타격을 받고 또다시 선비족의 모용수가 반란에 성공하여 후연을 세운다. (384 ~ 407 ) 후연의 수도는 중산으로 하북성 보정시 남쪽의 지금의 정주이다.
이 들의 수도를 보면 하나같이 현 대륙의 하북성 북경유역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후한의 멸망(220)이후 위,촉,오(220~265)45년간, 진나라(265~316) 고작 50년간, 5호 16국이후 수(581~618)38년간, 당태종(618~649)31년간, 하나같이 하루살이 왕조이다.
이때 대륙의 중심부 섬서성 서안과 호북성 한수유역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시기 고구려의 제왕들의 활약상을 알아보자.
제 16 대 고국원제 재위 41년
휘는 사유, 미천제 15년 태자로 책립 되었다가 이에 즉위 하였다.
2년 (331) 2월 제가 졸본에 행행하여 시조묘에 제사하다.(졸본은 홀본으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홀은 회홀로 회회족인 지금의 신강위구르지역이다.)
4년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이제 대륙의 서안인 평양을 점령하고 황하의 주인이 되었다.
이 서안을 서안평이라고 하는데 바로 서안西安, 지금의 서안에 있는 평양이란 뜻이다.
5년 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이 곳 신성은 감숙성 농서에 있었다.
6년 사신을 진에 보냈다.
9년 전연왕 모용황 (모용외의 아들)이 신성을 침범해 왔다. 제가 화맹을 청하니 이내 돌아 갔다.
12년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제가 환도성으로 이거하였다.
10월에 연왕 황이 국도를 극성에서 용성(조양)으로 옮겼는데, 입위장군 한( 모용황의 형)이 권하기를 " 먼저 고구려를 취하고 다음에 우문씨를 없애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남북으로 두 길이 있는데 그 북쪽길은 평활하고 남쪽길은 험하고 좁으므로 고구려는 대군이 북쪽으로 오리라고 북쪽의 방비를 중히여기고 남쪽의 방비를 가볍게 여길 것이므로 왕은 그때 정병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여 불의에 일격을 가하면 북도(환도성)는 애써 취할것도 못된다. 따로 한 소대를 북쪽으로 보내면 설령 실수가 있더라도 그의 중심부는 무너지게 되므로 사지는 힘을 쓰지 못할것이다." 하니 황은 그 말에 따랐다.
지금이 기록은 고구려가 북경지역인 현도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북경지역의 극성이 수도였던 연나라는 수도를 동북쪽 조양으로 옮기고 쫒겨 간것으로 다시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절치부심 하는것을 볼 수있다.
11월에 황이 친이 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길로 나아갈때 따로 장사 왕우 등은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길로 고구려를 침범해 왔다.
고구려 황제는 아우 무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북쪽길을 막게하고 자신은 약졸을 거느리고 남쪽길을 방어했다.
모용한이 먼저 싸움을 하고 모용황이 대군으로 뒤따르니 우리군사가 대패 하였다.
이 말의 내용은 고구려가 황하의 만곡부 안에 위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뿐이 아니고 항상 고구려를 공격해오는 수, 당나라는 북쪽길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대군의 치중차량은 북쪽길 내몽고의 초원지대를 통하지 않고는 대량의 군수물자를 이동시킬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지도는 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수 당과 마찬가지로 연나라의 모용황의 도읍지도 지금 북경인 탁군의 동북쪽인 용성인데 지금의 조양이다.
이 조양에서 황하를 울타리 삼고있는 고구려를 공격하는 가장 좋은 길은 내몽고를 지나는 평활한 길이다.
하지만 남쪽길은 태행산맥을 넘어야 하는 좁고 험한 길이다.
이들이 겨울에 공격해오는 까닭은 황하의 상류 오르도스지역이 겨울에 얼어붙어 기마대가 강을 건널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지방인 고구려의 동북쪽에 있고, 고구려는 지금 서안인 장안성에 있어 연나라의 서남쪽에 있었다.(한원의 기록에
대륙의 중원을 도모하려면 고구려를 지나가야 하는 까닭에 변방의 오랑캐인 연나라( 선비족인 모용황은 고구려를 도모하다가 결국은 멸망한다.)는 황하를 건너야 고구려를 공격할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를 향해 황하를 건너려면 두가지 길이 있는데 북쪽길은 몽고초원의 길로 평탄하지만 자칫 시기를 놓쳐 황하가 범람하는 계절이 되면 요택이라는 지역으로 진흙탕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데 이 요택이 지금의 황하의 북안 오르도스지역으로 봄이 되면서 남쪽인 상류가 먼저 따듯해지면서 얼음이 녹고 하류인 북쪽은 얼어붙은 강물이 녹지않아 매년 홍수가 되풀이 된다는 황하의 북안 오르도스지역으로 과거 수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홍수가 되풀이 되고있다. (인터넷 -황하의 북안 오르도스지역을 검색해보라-)
이곳은 남쪽으로 부터 밀려 올라오는 강물이 범람하여 광범위한 지역이 진흙벌판으로 변해버리는 곳이다.
하지만 한겨울이 되면 얼음벌판으로 변해 기마군단을 이끌고 황하를 건널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이 수나라 양광과, 당나라 이세민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할 때면 항상 지나던 요택이란 곳이다.
또한 남쪽길은 산서성 태행산맥이 가로질러 있음으로 좁고 그 길이 험하여 군대가 진격하기를 꺼린다고 하였다.
13년(342) 7월 제는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겼다. 성은 지금의 서경(서안)동쪽의 목멱산속에 있다.
동진에 사신을 보냈다.
15년(344)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을 시켜 우리의 남소성을 쳤다.
19년(348) 제는 전 동이호군 송황을 연에 돌려보내니 연왕 모용준은 그를 사면하여 이름을 송활로 고쳐 중위 벼슬에 임명하였다.
25년 왕자 구부를 책립하여 왕태자로 삼았다.
39년 (368) 9월에 제는 군사 2만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40년 진秦(전진;357~385)의 왕맹이 연을 쳐부수니 연의 태부 모용평이 우리에게 도망쳐 왔다. 그를 잡아 진에 보냈다.
41년 10월 백제 근초고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치니 제는 군사를 내어 막다가 유시에 맞아 이달 23일에 돌아갔다. 고국원에 장사 하였다.
제17대 소수림제 재위14년
원년 휘는 구부니 고국원제의 아들이다.
2년 6월 전진왕 부견이 사절과 부도(승) 순도를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다.
대학을 세우고 자제를 교육하였다.
3년 율령을 반포하다.
4년 승려 아도가 왔다.
5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설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고 , 또 이불란사를 개창하여 아도를 두니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였다.
7월 백제의 수곡성을 침공하였다.
6년 백제의 북경을 침범하였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은 대륙의 한수와 양자강이었다.
대륙의 중심 중원땅을 적시며 흘러가는 한수는 무한시에서 양자강으로 합쳐진다.
이 합쳐지는 부근이 홍수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홍주라 불리우는데, 고려시대에는 운주도 단련사를 두었고 백제시대의 혜군 이었던 혜성군과 백제의 임존성 이었던 대흥군이 여기에 있다.
7년 10월에 눈이 오지않고 때아닌 우뢰가 있었으며, 역질이 성하였다.
백제가 군사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침범하였다.
11월에 남으로 백제를 치고 사신을 부진(부견의 전진)에게 보내었다.
8년 가뭄이 있어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9월에 거란이 북변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이 함락 되었다.
14년 제가 돌아가니 소수림에 장사하다.
제18대 고국양제
휘는 이련으로 소수림제의 아우이다.
2년 6월 제는 군사 4만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후연왕 모용수는 대방왕 모용좌로 하여금 용성(조양)으로 진군하여 수비를 맡겼는데, 모용좌는 우리군사가 요동을 습격하자 사마학경을 시켜 요동을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은 이를 격파하고 드디어 요동과 현도를 함락하고 남녀 1만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11월에 후연왕 모용수의 아우 모용농이 군사를 이끌고 침범하여 요동, 현도 2군을 회복해 갔다.
처음에 유주, 기주의 유민이 고구려에 많이 항복하므로 농은 범양의 방연으로 하여금 요동태수를 삼아 유민을 위무하였다.
3년 정월에 왕자 담덕을 태자로 삼았다.
8월에 군사를 일으켜 남으로 백제를 침범하였다.
7년 9월 백제가 달솔 진가모를 보내어 도압성을 쳐부수고 200명을사로 잡아갔다.
9년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수호하니 신라왕이 조카 실성을 보내어 볼모를 삼았다.
5월 왕이 돌아가니 고국양에 장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