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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시조 단군 왕검(재위 93년)
무진 원년(-2333); 지금부터 4344년전 신시개천 1565년 상월 3일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다.(阿斯達 단목터는 어디일까?
대륙의 청해성 중심에 阿拉達澤山이 있는데 이 곳이 아사달 구월산이며 그 곳의 紫達木분지에 단목터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장당경은 티베트에 있었는데 그 곳에 현재 산의 명칭이 唐古拉山과 念靑唐古拉山인데 단군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역사 지리는 대륙의 역사 지리를 축소 왜곡해 옮겨놓은 것으로 그 중에서도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를 말한다.
이 지역을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서해도라 불렀다. 그 서해도에 구월산이 있었는데 이 곳에 단군조선의 도읍지였던 아사달과 장당경이 있었다고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 서해도가 실상은 대륙의 청해성과 티베트 지역 이었다.
이 고려의 서해도는 고구려의 남부이고 백제의 서부지역이다.
다음은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선생의 기록이다.
경세유표 제11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부공제(賦貢制) 5
황해도 지방에 땅이 갑자기 꺼져서 깊은 못이 된 곳이 있는데,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고 그 맛은 쓰고 매우 고약하다. 이것은 모두 염정(鹽井) 지역이건만 조사하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심괄(沈括)의 《필담(筆談)》에, “해주 염택(解州鹽澤)은 사방이 120리이다. 오랜 장마에 사방 산의 물이 모두 못에 쏟아져 들어와도 일찍이 넘치지 않았고, 큰 가뭄에도 일찍이 마르지 않았다. 간수(滷) 빛이 새빨갛고 판천(版泉)의 하류에 있는데 민간에서는 치우(蚩尤)의 피라 부른다. 오직 중간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감천(甘泉)이며, 이 물을 발견한 다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북쪽에 요소수(堯梢水)가 있는데, 무함하(巫咸河)라 이르기도 한다. 매우 짠 물이며, 감천을 섞지 않으면 소금이 되지 않고, 무함수를 넣으면 소금이 다시 엉기지 않는 까닭에 사람들이 무함하(無鹹河)라 부르면서 염택(鹽澤)에 해가 되므로 큰 둑을 쌓아 막아서 도둑을 방비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했다. 그 이치를 궁구하면 무함은 탁(濁)한 물인데 간수 속에 들어가면 해감이 간수 결에 가라 앉아서 소금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여조겸(呂祖謙)은 “소금의 종류가 매우 많다. 바다에서 나고 우물에서 나고 못에서도 나는데, 이 세 가지 외에도 나는 곳이 더 있다. 하북(河北)에는 노지(鹵地 : 소금이 나는 땅)가 있는데 이것은 땅에서 나는 것이고, 영강군(永康軍)에서는 소금이 벼랑에서 나는데 이것은 산에서 나는 것이며, 또 돌에서 나는 것, 나무에서 나는 것이 있어,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하였다.
또 “남방의 소금은 전적으로 바다에서 생산되고 북방은 전적으로 해지(解池)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남방 소금을 관리하는 데에 올바른 사람만 얻으면 그 해가 적지만, 오직 북방 해지 소금은 글안(契丹)과 서하(西夏) 소금이 서로 끼여 들어서 해지 소금의 이(利)를 빼앗는다. 대체로 해지 소금 맛이 서하 소금 맛보다 못하므로 연변(沿邊)에는 은밀히 두 나라 소금을 파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하였다.
해주에 소금 호수가 있다는 기록이다.
한반도 해주에는 소금 호수가 없다. 이것은 대륙의 청해성에 있는 청해호를 말하는 것으로 청해성에는 수많은 소금호수가 존재한다.
다음은 고려사지리지의 서해도 해주에 대한 기록이다.
1. 안서 대도호부 해주: 해주는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지성池城 또는 장지長池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은 폭지군(瀑池郡)으로 바꾸었다.
고려 태조는 이 군을 해주라고 부르고, 성종 2년 처음으로 전국에 12개의 목을 설치 했을 때 그 중 하나가 되었으며, 14년 12개 주에 절도사를 두면서 우신책군 이라 부르고 좌신책군 양주(楊州)와 함께 서울을 지키는 좌, 우 2개의 방어선의 하나가 되었다.
그후 현종4년 안서 대 도호부로 고쳤다가 고종34년 해주목으로 하였다.
대녕 서해 大寧 西海(성종 이 정한 명칭이다.) 또는 고죽孤竹이라 부른다.
이상이 고려사의 기록인데, 이 곳 청해성의 중심지가 서녕西寧 이란 도시이다.
서녕은 대녕서해란 뜻이다. 이 곳이 고려의 해주이었던이 증명된 셈이다.
또 이곳은 신라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을 건설한 곳이다.
장보고 장군은 이 곳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실크로드의요충지를 장악하였다.
이곳은 바로 실크로드 교역의 관문인 것을 지도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황하의 상류의 실크로드 교역의 요충지, 감숙성 난주와 이를 통해 황하를 건너면 만나는 감숙성 회랑지대, 남쪽의 기련산맥과 북의 고비사막 사이로 난 길다란 통로인 실크로드를 장악한 장보고 장군의 청해진은 바로 이곳 해주의 서해진이었던 것이다.
대녕 서해 大寧西海란 서쪽, 청해성 지역의 바다와 같은 넓은 땅의 안녕을 책임 진다는 뜻이고,
폭지 瀑池, 장지 長池, 지성 池城 이란 지명을 보면 폭지, 즉 큰 폭발이 일어난 후 움푹 파인 지형을 말하며 광할하게 넓고 무한정한 불모지대, 황하의발원지인 이 곳은 큰 못과 거대한 호수와 수많은 늪지대 등이 끝없이 펼쳐지는곳으로 마치 바다와 같은 곳으로, 우리 역사의 기록에 큰 강, 사막 등을 즐겨 바다 海로 기록 했음을 볼 때, 청해성이 바다가 아님에도 청해靑海라 한 것처럼, 고려의 서해도도 바다가 아니며 청해성을 서해도라 부른것을 알수 있다.
그것을 증명할수 있는 자료가 있다. 현대 대륙의 청해성에 서녕시 바로 곁에는 서해진이라 곳이 있다.
청해성 에 있는 진의 명칭을 청해진이라고 하지않고 왜 서해진이라고 했을까?
이것은 그들 스스로도 청해도를 서해도로 불렀다는 증거인 것이다.
즉 안서 대도호부 해주가 大寧 西海 , 즉 지금의 청해성의 요충지 서녕인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고조선, 즉 단군조선이 건국하고 존재하였던 곳은 한반도의 황해도 구월산이 아니라 대륙의 티베트, 청해성, 감숙성 지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정사 50년; 홍수가 크게났다. 풍백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였다. 우수주에 그 비석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춘주는 원래 맥국인데 우수주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다. 수약주 (또는 오근내烏斤乃 라고도 한다)라고 불렀으며 삭주, 또 광해주로 고쳤다. 수춘 혹은 봉산이라고도 한다. 이 주에 소속된 군, 현중에 횡천현이 있는데 화전이라고 부른다)
현재 대륙의 산서성 대동시 서쪽에 삭주가 있다. 그 지형이 황하가 횡으로 흐르는 구간이다.
내몽고 남부지방이다. 지금은 오르도스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고조선에서는 상, 하 운장이라고 했던 곳으로 고구려에서는 요택이라고 한다. 이 곳의 지형인 요택(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구택이라고 했다.)은 역사상 중요한 지형적인 특징이 있다.
수, 당의 군사가 고구려를 도발할때 주요 진군로 내몽고 초원지대를 지나서 요택으로 향하는 주요한 이유가 있다.
일단 그들의 본거지 대흥안령산맥의 선비산에서 출발한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와 그의 후예인 5호 16국, 이들을 통일했다는 수, 당나라가 수도는 탁군(오늘날의 북경)이었는데 이곳에서 고구려의 수도인 장안성으로 향하는 공격루트로 내몽골 초원이 고속도로와 같은 역활을 했다.
대규모 치중차량(달구지 같은것들)이 무한대로 대열을 이루고 줄을 이루어 이곳 요택까지는 쉽게 올수 있다. 문제는 이 곳 요택이 평소에는 진흙지대인데 겨울철만 온통 얼어버려 통과하기 쉬운 계절이라는 점이다.
이 지역은 황하가 청해성에서 감숙성을 향하여 흘러가는 지점에서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감숙성 난주에서부터는 북방을 향하여 흘러가기 시작한다. 감숙성을 가로질러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황하의 흐름은 영하회족자치주의 중년시와 은천시를 지나는데 이 지역에 만리장성이 요수를 끊고 일어선다는 바로 그 곳 갈석산이 있다. 황하는 이 갈석산(지금은 하란산)을 지나 겨속 북으로 향하다가 내몽고 임하시에 이르러 드디어 북진을 멈추고 동으로 향하기 시작 한다. 이곳이 바로 요택인데 요택(지금 지명은 오원)에서 부터는 횡으로 흘러 간다.
문제는 이곳 황하의 하류가 추운 내몽고 지역이고 상류가 따듯한 남쪽지방이라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상류에서 강물이 흐러내려오는데 하류에서 먼저 강물이 얼기 시작한다. 상류의 물이 얼어붙은 강을 넘쳐 넓은 지역이 범람 하는 것이다. 드디어 이 지역은 온통 진흙탕이 되는 곳이다. 바로 역사에 그 유명한 진흙벌판, 당태종 이세민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었던 그 유명한 요택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형은 내몽골과 남만주를 통털어 여기 밖에는 없다. 과거 수나라, 당나라가 결국 오고자 했던 고구려의 요동지방은 바로 이 황하의 만곡안 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평양이었던 장안성은 황하를 천연의 방패으로 삼은 관중 땅 바로 지금의 서안이었던 것이다.
무오 51년; 단제께서 운사 배달신에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짓고 제천단을 마리산에 쌓으니 참성단이 그것이다.
(양자강 하구를 江口, 海口郡이라 하며 江都시가 그 곳에 있으데 그 곳이 강화이다.)
강화는 한반도로 그 지명을 옮기면서 강화도라는 섬이 되었는데 본래는 대륙의 강소성 강도江都이다.
이 강도는 강의 도시란 뜻이다. 황하와 양자강의 하구에 위치하여 수많은 수로에 둘러쌓인 곳으로 수호지의 호걸들의 소굴 양산박과 같은 곳이다. 결코 대륙의 말달리는 기마병들이 얼씬도 할 수 없는곳 몽고에 대항하여 30년을 항복하지 않고 버틸수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 이었다.
양자강 하구 진강시 바로 위쪽에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말하기를 강화현은 원래 고구려의 혈구군으로 경덕왕은 해구군으로 고쳤다.
고려초 강화현으로 고쳤는데 고종 19년 (1232년) 왕이 몽고의 침략군을 피하여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자 강도江都라고 불렀으며 37년(1250년)에 주위에 길이가 2천 9백 60여간이 되는 중성을 쌓았고 원종2년 (1260년) 다시 송도를 수도로 하였다.
이에 소속된 현이 3개인데 진강현, 하음현, 교동현등이 있다.
이 강도는 대륙의 강소성 양자강 하구에 지금도 그 지명이 그대로 있다.
강도 뿐만이 아니라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진강시, 하음시도 양자강 하구에서 우리 고려시대의 지명을 지금도 확인 할 수 있다. 결코 강화도가 아님 것이다.
고려를 침입한 원나라 역사기록에 의하면 「홀필열(원,세조)에게 江淮안무사 趙良弼이 말하기를 "고려는 원나라의 침입이 시작된지 20년이 되어도 호락호락히 굽히지 않는다" 고 했으니 이 때는 이미 유럽대륙의 몽고세력도 정착단계에 있었으며 宋은 허울 뿐이었으니 세계 미증유의 몽고 제국에 대항하여 끝까지 남을 세력은 고려뿐이었다.」라고 하였다.
홀필열의 딸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 혼인한다.
강회 안무사는 글자 그대로 양자강과 회수지역을 책임진 관리로 이 지역에 고려의 임시수도 강도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위의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1232년부터 1260년까지 다시 송도 개경을 수도로 하기까지 28년간 강화에서 길이 2천 9백 60여간의 큰 성을 쌓고 버틴 고려의 저력은 그 황하의 하류와 회수와 양자강 하구가 만들어 내는 엄청난 강과 강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지형의 덕분이었다. 북송말기(휘종;1101~1125)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의 아지트인 양산박이 이 거미줄 같은 수로로 이루어진 회수유역이었다.
참고로 고려의 수도 개경의 라성의 둘레는 2만 9천 7백보요, 라각은 1만 3천 간(間)이고, 황성은 1만6백60보 라각2천6백간이며 세종실록지리지의 한성의 都城周回 9천 9백 칠십보 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개경의 크기가 조선의 한성보다 세배나 더 크다. 즉 세종실록지리지가 왜놈들에 의해 왜곡 되었다는 증거이다.
유라시아 제국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금나라가 남송의 수도 양자강 하구의 남경을 공격했을때 송의 고종은 영파로 도망갔다가 절강 남쪽의 온주로 이동했다.
남경에서 금의 장수 올가는 추격을 서둘러 항주와 영파를 점령했다.(1129년말~1130년초) 그러나 완전한 기병으로 구성된 금나라 군대는 중국 남방으로 너무나 깊숙히 들어 갔다. 그 곳에는 범람하는강, 서로 얽히는 강들, 논과 운하가 있었고, 조밀한 인구가 언제 그들을 기습하고 포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라고 하였는데 양자강하구와 회수지역의 거미줄같이 얽혀있는 수로의 위험성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한반도의 조그만 강화도에서 20년을 버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상으로 강화는 한반도의 섬이 아니며 대륙의 강소성에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존재하는 강도이었음을 확인 할수 있다.
다음지도는 대륙의 양자강하구 강소성의 지도이다.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대로 강도시, 진강시, 강음시가 대륙의 지도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곳이 고려의 임시 수도 강도였다.
갑술 67년; 태자 부루를 파견 도산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오행치수의 비결을 전수하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 정했으니 유주와 영주의 두 곳 땅이 우리에 속하였다. 또 회대지방의 제후를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도산은 대륙의 안휘성 회원현 회화의 동쪽 강변이며, 유주는 순임금때 기주라고 불리운 곳의 동북이니 하북성 순천과 영평및 요녕성 금주 서북쪽으로 지금 북경의 동쪽 해안일대 이고, 영주는 연의 수도 계성이 있던 곳으로 북경 서남쪽이다,
또한 회대의 회는 회수이며, 대는 큰 산이란 뜻으로 태산을 의미 하는데 안휘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일대를 말한다.
이 기록으로 볼때 대륙의 동해안 일대,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등지가 단군조선의 강역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자 93년; 단군님의 교화는 멀리 탐랑에 까지 미쳤으며 가르침은 점차로 멀리 퍼져 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
(한단고기 기록에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니 黃部人은 피부가 좀 누렇고 코는 튀어 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은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白部人은 피부는 밝고 빰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고, 赤部人은 피부가 녹 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특하며, 籃部人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깔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 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 하였으니 아시아 대륙의 모든 피부색이 모두 우리 단군의 교화를 받은 한민족임을 알 수 있다.
다음에서 역사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강역을 살펴보면,
삼한관경 1- 마한; 웅백다, 달지국에 도읍, 역시 백아강이라 하고 마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하다.
(고려사에 말하기를 <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로 지금의 대동강이다.)
막조선 마한; 여원홍,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대동강은 패수로 현 대륙의 중원지역 섬서성 장안의 위수를 말한다)
삼한관경 2- 번한; 치우천황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를 평정하니 땅의 넓이가 만리에 이르렀다.
(탁예는 산서성 대동부이다.)
치두남을 번한에 임명하고 우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다.
경자년; 遼中에 12개 성을 쌓았다.
1. 험독 2. 영지 3. 탕지 4. 용도 5. 거용 6. 한성 7. 개평 8. 대방 9. 백제 10. 장령 11. 갈산 12. 黎城
(험독-섬서성 서안, 영지-하북성 천안현, 탕지-산동성 능현,
용도-고려진(북경), 거용-북경시 서북,
한성-섬서성 서안 동북, 蓋平-감숙성 평량현, 대방-강소성 남창; 남원소경,
백제성-양자강 무협, 장령-내몽고 적봉와 조양 경계,
갈산- 갈석산 ; 영하회족자치주 은천시 서쪽 하란산이 옛 갈석산이다.
여성- 섬서성 빈,기의 땅)
번한은 부루태자와 함께 태산에서 삼신을 제사 지내고 나니 이 풍습이 회대지방에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삼신의 단을 탕지산에 세우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다.
(저울추는 오덕지 라 함은 번한의 옛 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가 그곳이다.)
장군 치운을 보내 탕을 도와 걸을 치게하다.(싸움터; 명조- 산서성 하곡부 하현)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가서 북밝을 치니 그 왕 하단갑이 사죄하다.(북밝-하남성 상구)
은나라 왕 무정이 병사를 일으키니 우현왕 고등이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렇다.
서여는 북밝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군사를 탕지산에 주둔케 하다.
(색도는 산동성 임치현 동남 여수의 남에 있는 성)
단군 색부루는 서우여를 번한에 임명하다.
漢水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다.
(漢水는 대륙의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삼천리를 흐르는 강으로 호북성 무한시에서 양자강과 합쳐지는 강이다.)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과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다.
(-895)병인년 주나라 이공이 조공하다.(서주의 수도; 호경-섬서성 서안, 동주의 수도:낙읍- 하남성 낙양))
(-341)번한 해인이 연나라 자객의 시해를 당하다. (연의 수도; 계성-북경)
(-146)마지막 번한 기준은 위만의 난을 피해 남쪽 양자강을 건너 동정호부근 금마군 익주에 마한을 세우고
(호남성 장가계이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中馬韓이라 한다.
이로서 마한이 번한에 합쳤다가 다시 두 곳의 마한으로 거듭나는데, 북쪽으로간 중마한은 월지국으로
결국 고구려의 일부가 되고, 남쪽으로 간 마한은 온조왕때 백제에 병합된다.
( 월지는 지금 감숙성 돈황일대.)
(진한-진조선; 고려사 지리지의 서해도, 안서 대도호부 해주에 소속 군,현 중에 유주는 원래 고구려의 궐구인데
시녕 이라고도 하며 이곳에 구월산(아사달산), 당장경이 있는 곳인데 이곳은 대륙의 청해성과 티벳이다.)
이상을 정리 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한(진조선) - 대륙의 청해성을 중심으로 티베트, 신강성일대,
마한(마조선) - 섬서성 장안을 중심으로 하남성과 사천성, 호북성과 호남성, 그리고 감숙성과 내몽골지역,
번한(번조선) - 산동성을 중심으로 산서성, 하북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일대로 땅의 넓이가 만리.
2세 단군 부루 (재위58년)
신축 원년(-2240); 제순 유우(우나라 순임금)가 유주 영주 두 주를 남국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이을 정벌하여 동무, 도라등을 그 곳 제후로 봉하다.(유주와 영주는 지금 하북성 북경부근)
임인 2년; 단제 께서는 소련, 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계묘 3년;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 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가격을 같도록 하였다.
경술 10년;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임자 12년;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 58년;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고 흙그릇에 쌀과 곡식을 담아 단위에 올려 놓았는데 이를 부루단지라 불렀다.
이를 업신으로 삼고 업주가리라 불렀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 하여 전계라고도 불렀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해 원년 ;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신시의 가르침)의 도를 물으셨다.
7일을 기한으로 삼신께 세번을 비는것으로 3 · 7일을 기한으로 모든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경자 2년 ; 삼랑 을보륵에게 명해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
신축 3년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다.
갑진 6년(-2177);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약수로 유배를 명하다. 후에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되었다.
(列陽의 列은 황하의 하류를 구하지지라 하여 아홉 갈래로 갈라져 바다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생긴말이며, 陽은 <산남수북>을 陽이라 한다는 말대로 북쪽을 의미한다. 즉 지금 하북성 일대가 열양이다. 약수는 흑룡강, 즉 아무르강이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다.
康居는 아랄해 동쪽 시르다리아강 유역으로 키르키즈초원 과 소그디아나 , 사마르칸트와 박트리아, 토하리스탄등 아프카니스탄지역으로 이를 지백특, 즉 티벳과 곤륜산 지역인 대륙의 서장 자치주에서 정벌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이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의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하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었다.
그의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 하며 스스로 천왕이라고 칭했다.
두지주의 濊읍에 대한 위치를 알수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조대왕 69년(105) "한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濊貊의 渠帥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약탈했다. 이에 대왕은 아우 수성을 보내 맞아 싸우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이때 거사는 신강성의 투루판의 북과 남쪽을 지배하던 족장의 명칭으로 고구려의 강역이 신강 위구르자치주와 감숙성 일대이었고 후한의 유주와 영주는 지금의 북경지방이었으니 한의 유주자사 풍환은 동쪽 북경 지방에서 서쪽 요동(황하유역>으로 향하여 공격해 왔음을 알수 있다.
또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는
서기 74년 후한의 경병과 두고 두 장수가 투루판을 공격했는데 그 곳에는 「투르판 인근의 남거사와 천산 건너편 기슭의 오래된 고성방면의 북거사가 있었다.」 고 기록하였는데 고구려 본기의 기록과 비교 해볼때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거사가 지배하던 지역이 천산산맥 유역의 신강성일대 였다는것이 다수 동서양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4세 단군 오사구
갑신 원년(-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지금 몽고족이 그의 후손이라 한다.
무자 5년 ;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 하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갔다.
경인 7년 ;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하다.
(살수의 상류는 황하의 상류로 지금 청해성 지역을 말한다. 청해성과 티벳지역이 단군조선의 진한 강역이다.)
임인 19년 ; 하나라 왕 상이 덕을 잃어 식달에게 명하여 람, 진, 변의 3부 병력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하나라 5대째 군주가 相인데 도읍이 하남성 상구이다. 籃國은 산서성과 하북성지역, 眞韓은 청해성지역, 弁韓은 산동성과 회수유역으로 하나라를 둘러 싸고 있는 형국이다.)
5세 단군 구을
임술원년;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였다.
계해 2년 ;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 온통 밭과 들에 가득찼다.
황충의 피해는 이후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나오는데 한반도는 황충의 발생지역이 될수가 없다.
을축4년 ;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2092) ; 신독인 표류하여 동해안에 도달하다.
정축 16년 ; 제께서 친히 장당경에 행차하여 삼신의 단을 봉축 하시고(티벳 불교의 원형이 이것이다.) 한화를 많이 심다,
7월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사 곧 붕어 하시니 대박산에 묻혔다.
장당경에 대한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이다.
서해도는 본래 고구려의 땅인데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가 멸망시켰으나 그 지역을 지키지 못하였고 신라는 마침내 이 지역을 합하였으며 신라말에 이르러 서는 궁예가 웅거 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이 지역을 다 소유 하였고 성종 14년에 전국을 10개도로 나눌때에 황주, 해주 등 주, 현을 관내도에 소속 시켰다가 후에 서해도로 고쳤다.
이 서해도의 관할하에 대도호부가 1개, 군이 6개, 현이 16개, 진이 1개 있다.
안서 대도호부 해주는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지성池城 또는 장지長池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은 폭지군(瀑池郡)으로 바꾸었다.
-주-지성, 장지 ,폭지는 이 곳 청해성의 수많은 호수와 황막한 자연환경을 설명하는 지명들이다.
고려 태조는 이 군을 해주라고 부르고, 성종 2년 처음으로 전국에 12개의 목을 설치 했을 때 그 중 하나가 되었으며, 14년 12개 주에 절도사를 두면서 우신책군 이라 부르고 좌신책군 양주(楊州)와 함께 서울을 지키는 좌, 우 2개의 방어선의 하나가 되었다.
대녕서해(大寧西海) (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또는 고죽(孤竹)이라고도 부른다.
수양산, 대수압도, 소수압도, 연평도, 롱매도등이 있으며 이 주에 소속된 현이 3개 관할하에 방어군이 1개, 현령관이 1개, 진이 1개 있다.
"수양산이 있고 고죽이라고 부른다고 했다."는 말은 이 곳 청해성이 옛 고죽국이었다는 이야기다.
1) 염주 鹽州 ; 글자그대로 소금이 많이 나는곳이다.
본래 고구려의 동음홀冬音忽(또는 고염성鼓鹽城)을 신라 경덕왕이 해고군海皐군으로 바꾸고 고려초 염주라 고쳤으며, 석주 , 온주목, 연안부로 하였는바 오원(五原) 이라고 부른다.
-주- 염주를 오원이라 했고 백주를 은천이라 하였는데 이 곳이 지금의 영하회족자치주와 내몽골자치주의 접경지대로 은천시와 오원시가 황하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2) 백주(白州): 고구려의 도랍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구택으로 고쳐 해고군 관할로 하였고 의종12년 토산 중흥궐을 세우고 지 개흥부사로 승격 시켰다. 은천(銀川)이라고도 부른다.
-주 -감숙성에 백은(白銀)시가있다.
고려사의 고대지명들이 대륙의 청해성, 감숙성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3)안주(安州); 원래 고구려의 식성군 인데 거란군을 물리친 공로로 재령현령관으로 승격, 안릉 또는 안풍이라 부른다.
4)풍주(豊州); 원래 고구려의 仇乙현 인데 西河 라고도 한다. 여기 소속 군이1, 현이 5개 있다.
ㄱ)安岳군; 원래 고구려의 楊岳군인데 양산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아사나루성초곳(阿斯津省草)과 아사나루도곳(阿斯津桃곳)이있다.
ㄴ)유주는 원래 고구려의 궐구로 시녕始寧 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 구월산(세상에 전하기를 아사달阿斯達산 이라고 한다),
장장평(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고 한다. 즉 장당경이 잘못 전해진 것 이다.)
삼성사(단인, 단웅및 단군의 사당이 있다)등 이 있다.
ㄷ)은률은 고구려의 률구인데 고려초에 바뀌었다,
ㄹ)청송현은 고구려의 마경이인데 고려초에 바뀌었고, 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
(해안현령관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설치되었다.)
-주- 위의 지도를 보면 서녕시 옆에 해안시(고려시대때 해고군)가 있다.
ㅁ)가화현은 원래 고구려의 판마곳으로 고려초 지금명칭으로고쳤다.
ㅂ)영녕현은 고구려의 웅한이이다.
ㅅ)옹진현은 원래 고구려의 옹천인데 고려초에 옹진으로 고쳤고 현종9년 현령을 두었다.
여기에 기린도, 창린도, 어화도, 고도, 모도등이 있으며 소속현이 2개있다.
ㅇ)장연현(장담이라고도한다)은 이곳에 장산곳과 백사정이 있다.
ㅈ)영강현은 고구려의 부진이이다.
ㅊ)백령진은 고구려의 곡도로 고려때 진으로 하였다.
이곳에 대청도와 소청도가 있다.
이렇게 많은 지명이 천년전 고려시대에 존재하였고 그지역이 한반도의 3배가 더되는
거대한 대륙의 청해성이란 사실에 가슴이 뛴다.
한반도에는 해주시 위에 장연長淵 이란 지명이 있고, 그 위쪽에 구월산이 있을 뿐이다.
이 구월산이 옛적에 아사달산이라고 "단군이 도읍한 곳이다,"라고 고려사는 말한다.
위의 고려사에는 안악군에 아사나루도곳과 아사나루 성초곳이 있는데 다 아사란 접두어가
지명에 붙어있다.
대륙의 청해성에서 다음의 지명들과 비교해보자.
아사달阿斯達산
우랄 알타이산맥을 阿彌泰山이라하고 또 곤륜산바로옆에 阿彌金山이있고, 청해성과 서장자치구인 티벳사이에 唐古拉山이있다.
이곳을 靑藏고원이라하고 청해성에 紫達木분지 가 있다.
또한 아랍달택산阿拉達澤山이 있는데 .
천산에 있는 나라 이름에는 -斯坦이라는 말이 붙는다.
타지키스탄(塔吉克斯坦; 탑 의땅 이란 뜻), 아프카니스탄, 우즈백키스탄, 키르키스탄,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지도를 확인하여 우리 민족의 고향 아사달을 찾아보자.
대륙의 티벳고원 일대가 고조선 시대의 장당경임을 알 수 있다.
6세 단군 달문
임자 35년(-2049) ;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하고 신지 발리가 서효사를 짓다.
"성스러운 단군님이 신경으로 나아가심에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앞 뒤가 균형이 잡혀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상춘 주가성자가 구월산에 있으니 지금의 청해성 아랍달택산으로 황하의 발원지이다.)
7세 단군 한율 ; 태평성대 였는지 별다른 기록이 없다. 정미54년 단제가 붕어 하시다.
8세 단군 우서한
무신 원년; 이십분의 일을 세금내는 법으로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다.
9세 단군 아술
정사 2년 (-1984) ; 청해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 궁성을 침범하니 상춘으로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 남쪽 기슭에 창건하다.
우지와 우율 등에게 명령하여 이 들을 토벌하여죽여 버리고 삼년 뒤에야 서울로 돌아오다.
( 청해 욕살 우착- 이 곳 청해가 바로 대륙의 청해성이다. 궁성을 침범 할 때까지 다른 변방의 군의 움직임이 없음은 궁성에서 가깝다는 증거이니 청해성이 단군조선의 중심부 임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10세 단군 노을
신묘 원년; 처음으로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을미 5년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청취하다.
병오 16년(-1955) ; 천하에서 거북이 그림을 지고 나타 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다.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天河는 청해성 양자강의 상류가 通天河이다.)
11세 단군 도해
경인 원년; 단제께서 오가에 명하시어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정묘 38년(-1854) ;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위세를 보였다.(하나라 수도-하남성 상구)
을해 46년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워 배와 관계되는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12세 단군 아한
무자 2년(-1833) ; 외뿔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제께서 나라를 순수하시다가 요하의 남쪽에 이르러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전하게 하셨다.
뒤에 저 창해역사 여홍성이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수를 지었다.
(요하- 지금 황하를 말한다. 창해- 후한서 동이전 "濊君 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을 이끌고 요동으로가 항복하니 무제는 그 땅을 蒼海군으로 삼았다." 했으니 예의 본래 살던곳이 청해성이다. 창해는 청해성이다.)
을묘 29년 ;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다.
(菁莪- 청해성 지역, 서옥저-개마대산 동쪽을 동옥저 라 하였고, 고구려 동천제 20년(246)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내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니 제는 남옥저로 달아나려 하여 죽령에 이르렀다."하였으니 옥저는 신강성과 감숙성, 청해성지역)
13세 단군 홀달
갑오 16년(-1767) ;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고자 신지 우량을 보내 견의 군대를 이끌고 낙랑과 합쳐서 관중의 빈, 기 땅에 웅거하고 관청을 설치하다.(관중은 지금 섬서성, 빈,기는 섬서성 장안 서쪽. 낙랑이 대륙의 섬서성 이었음을 알수 있다.)
14세 단군 고불
을해 56년(-1666) ; 사방의 호구를 조사하니 총계 1억 8천만인 이었다.
(3677년전 단군조선의 인구=중국대륙+만주대륙+몽고대륙+중앙아시아까지의 거대한 제국이었다.)
15세 단군 대음
경진 원년(-1661) ; 은나라 왕 소갑이 조공하다.(은나라 수도; 은허- 하남성 안양시)
신사 2년 ; 홍수가 크게나서 곡식을 창해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을 규휼하다.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 사신이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 ; 우루국 사람이 투항하여 오니 鹽水 근처에 살도록하다.
(청해성은 고려사 지리지의 서해도이며 안서 대도호부 해주는 대녕서해, 즉 서녕이다. 이 해주의 소속 군으로 鹽州가 있는데 이 곳을 석주또는 오원으로 부르는데 지금 녕하 회족 자치주가 있는 황하의 유역이다.)
정미 28년 ; 제께서 태백산에 올라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의 이름과 역대 왕들의 공적을 세우다.
(태백산- 천산 산맥을 말한다. 그 곳에서 꼭 찾아야 하는 비석인데...)
기미 40년 ; 단제의 동생 대심을 남선비의 대인으로 봉하다.
16세 단군 위나
무술 28년(-1583) ; 구한의 여러 한들이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고, 닷새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愛桓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에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영고탑-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이 천산산맥이다. 천산산맥 주변의 온갓 지명이 탑으로 시작된다. 塔里木분지, 塔克拉瑪干사막, 塔吉克斯坦. 나라 이름마저 탑의 땅이니 이 지역이 영고탑의 관할이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塔克拉瑪干사막은 이 지역이 마한이었음을 그 이름에서 역설하고 있다 - 瑪干 즉 마한이며 또한 이 곳에서 고구려가 건국한 것을 말해준다 -고구려는 마한의 종자다.)
17세 단군 여을
갑신 52년(-1501) ; 단제께서 오가와 함께 나라를 순수하셨는데 蓋斯城 근처에 이르렀다.(천산 유역의 나라들은 대부분 斯坦이라접미사가 붙는다. 또한 蓋馬國지역이 또한 천산 유역이다.)
18세 단군 동엄
병신 20년 (-1465) ;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치다.
19세 단군 구모소
기축 24년(-1412) ;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오다. (남상인은 운남성 변두리 섬라국을 말한다.)
20세 단군 고흘
병신 36년(-1345) ;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영고탑은 천산 파미르 고원에 있었다.)
21세 단군 소태
경인 47년(-1291) ;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색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였다.
(귀방- 은나라때 섬서성 서북일대, 색도- 산동성 임치현 동남. 영지- 하북성 천안현)
임진 49년 ; 개사원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 이를 멸망시키더니 많은 군대를 장악하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니 단제께서 마침내 우현왕으로 임명함.
(개사원-천산 서북일대로 지금 카자흐스탄. 귀방과 서북의땅-신강성, 내몽고, 감숙성일대.흉노의 좌현왕 우현왕제도는 단군시대의 법도를 따른 것이다. )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고 손자 색불루가 세습.
단제가 나라를 순수하시다가 남쪽 해성에 이르럿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 보시고 서우여를 섭주로 기수라 부르게 하다.
이에 우현왕은 거역하고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다. 이에 백이 숙제도 고죽군을 버리고 동해의 해변에 와서 살다.
(해성- 청해성 서녕. 이곳을 고죽이라 부른다. 이곳에 살수가 흐르니 황하의 상류를 살수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전기 단군시대의 진한 영역이었던 청해성지방의 아사달에서 마한의 영역인 천산유역의 영고탑으로 나라의 중심이 이동하여 가는것을 볼 수 있다.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겨 가서 결국 북부여가 된다.
22세 단군 색불루
병신 원년 (-1285) ; 녹산( 녹야원: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다. 9월 몸소 구한의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 서울(은허- 하남성 안양)을 격파하고 이를 추격하여 황하 에서 승전을 축하하고 변한의 백성을 회대로 옮겨 살게 하다.
을묘 20년 ; 람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진격하여 엄독골에 이르럿으니 은나라와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빈,기의 땅에 웅거하고 黎라고 하고 서융과 함께 은의 제후들 사이에 차지하고 있도륵 조치하다.(여- 섬서섬 서안 서쪽)
23세 단군 아홀
갑신 원년(-1237) ; 단제의 숙부 고불가를 낙랑골에 봉하고 웅갈손을 보내 籃國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6읍을 설치 하는것을 감독하다가 여의치 않으니 이를 쳐 부수었다.
을류 2년 ; 람국(내몽고,산서성,섬서성)의 임금 금달이 청구(하북성,산동성)의 임금, 구려(신강성,감숙성)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과 합쳐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히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였다.(엄- 산동성 박흥현 동북, 서- 안휘성 사현의 북)
24세 단군 연나
25세 단군 솔나
정해 37년(-1114) ; 기자가 서화에 옮겨 살다.(서화- 하남성 개봉부 서쪽 90리 箕의 땅. 남북조시대 양나라 땅)
26세 단군 추로
27세 단군 두밀
갑신 원년(-997) ;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다.
28세 단군 해모
정묘 18년(-954) ; 빙해의 뭇 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다.
(단군 조선과 배달국을 통털어 4000년동안 전세계 를 지배한 지구촌 최강국임을 알수 있다. 이 후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 강토를 그대로 이어 받았고, 또 대진국과 고려가 전 대륙을 석권하였고, 조선이 한수유역의 한양에 도읍하니 대륙의 중원을 차지하고 양자강 하구의 변두리 명나라를 제압 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무인 원년(-943) ;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치다.( 은나라가 결국 멸망하고, 단군의 제후국들이 춘추전국시대 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서주, 동주-춘추시대)
30세 단군 내휴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 보시고 돌에 치우 천황의 공덕을 새기다. 서쪽으로 엄독골에 이르러 여러 제후들의 한들과 병사를 사열하고 주나라와도 수교를 맺다. (청구는 하북성, 산동성, 회수유역이며 그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엄독골은 지금의 섬서성 장안)
병진 5년 (-905) ;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31세 단군 등올
임인 16년 ;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다.
32세 단군 추밀
갑인 3년 ; 선비산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치다.
계해 12년 ;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초나라 수도; 영-호북성 강릉시)
33세 단군 감물
무자 7년 (-813) ;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제사를 올리다.
34세 단군 오루문
병오 원년 (-795); 도리가를 지어 불렀다.
35세 단군 사벌
무오 50년(-767) ; 장군 언파불합을 보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다. (언파불합 -일본서기에 신무천황의 父. 웅습- 규우수지방)
갑술 66년 ; 조을을 보내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과 임치의 남쪽교외에서 싸워 승리하다.
(연의 도읍,계-북경. 임치- 제의도읍, 산동성 치박시)
36세 단군 매륵
신해 35년(-670); 천하의 나온 용마등에 별무늬가 있었다.
갑인 38년 ;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 삼도를 평정하다.
무진 52년 ;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다. 연이 제나라와 함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 지고는 화해을 구걸했다.( 고죽- 청해성 서녕시)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경오 56년(-591) ; 제께서 남쪽을 순수 하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하시다.( 기수- 하남성 임현)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을묘 36년(-426) ;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겨울이 되자 도성까지 침입 제는 해두로 피난 하시더니 곧 돌아 가셨다. 백민성 욕살 구물이 어명으로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과 동서 압록의 18성이 병력을 보내왔다.
( 고대 우리역사의 핵심 지명이 압록강이다. 鴨綠의 한자기록은 고대어의 크다는 <아리, 오리>의 이두문으로 阿里에서 시작되어 변해오는데 그 근원은 청해성에서 발원하는 황하를 우리 민족은 압록으로 불리어 왔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425) ;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적이 스스로 괴멸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구물이 추대되어 장당경에서 즉위하다. 나라이름을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고쳤다.
해성을 개축하여 평양이라고 부르고 이궁을 짓도록하다.
(해성- 청해성 해주로 고려의 안서대도호부 이며 대녕서해,즉 서녕이다. 고죽이라고도 부른다-고려사 지리지
해성을 평양이라고 불렀다-과연 대륙의 청해성 서녕시에는 平安,樂都란 지명이 붙어 있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신축 17년 (-380) ; 연나라가 침입, 변경의 장수 묘장춘이 이를 물리치다.
병진 32년(-365) ; 연나라 배도가 쳐들어와 요서를 함락하고 운장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 대장군 우문언을 보내 이를 막고 진,막조선의 군대도 보내 연나라 제나라의 군을 오도하에서 쳐부수고 요서의 여러성을 남김없이 되찾다.
단군 조선의 영역은 이 시기부터 회대지방과 하남성일대를 잃고 지금 섬서성 서안인 평양유역으로 번조선 영역이 줄어들면서 동쪽 방어선이 된다.
이 지역의 산서성 태행산맥과 황하가 천연의 방어막이다.
신미 47년(-350) ; 북막의 추장 액니거닐이 조정에 찾아와 말 200필을 바치며 연나라를 칠것을 청하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 상곡을 공격하고 성읍을 쌓다.
무인 54년 ; 상곡 전투 이후 이해에 화해하고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다.
(대륙 전부를 지배한 단군조선이 지금 북경지방의 연나라(계), 산동지방의 제나라(임치), 양자강 하구의 오(고소;강소성 소주),월나라(회계)등의 소국들을 지배하며 2000년 제국을 이루었음을 알수있다. 우리가 대륙의 중앙에 있었고 춘추의 열국들이 변두리 에 있었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한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경진 원년(-341) ; 번조선왕 해인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 당하니 오가가 다투어 일어났다.
무신 19년 ;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자칭 번조선 왕이라 윤허를 구하여 허락, 연나라에 대비하게 하시다.
정사 38년 ; 도성에 큰 불이 나 해성의 이궁으로 피신 하시다.
을축 46년 ; 한개가 수유의 군을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니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키어 이를 쳤다.
(단군조선 말기의 혼란상을 말해준다. 그래도 이천년 제국은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북부여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으로 그 강토를 그대로 아니 더욱 더 발전시켜 나아간다. 고구려는 흉노,월지,오손,사카,강,저를 통합하여 서양 역사서에서는 유연제국 또는 에프탈제국으로 알려진 대국으로 성장하고 돌궐, 위구르, 거란을 복속시키고 지배하게 된다.
백제는 한수와 양자강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오, 월나라까지 서쪽으로는 청해성, 티베트을 넘어 인도 북부와 아프카니스탄까지, 남쪽으로는 운남성, 월남을 지나 말레이지아, 수마트라, 보르네오, 필리핀을 지배한 대제국으로600여년간 번영을 누리게 된다.
신라는 당나라를 이용하여 삼국 통일을 이루고 결국 당이 멸망하자 그 모든 영토를 온통 독차지 해버리고 대 통일시대를
300여년간 누리면서 천년제국으로 실크로드의 주인공이 된다.
대진국 발해와 대고려로 그 강역을 이어간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기유 48년(-252) ;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리다.
임술 57년 ; 4월 8일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내려와 군대를 이르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
계해 58년 ; 오가에게 나라를 맡기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다.
종실의 대 해모수는 수유와 짜고 서울 백악산을 점령하고 천왕랑이라 했다.
수유후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고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다.
단군세기 끝.
첫댓글 마사부님! 이렇게 심오한 진리를 말씀해 주시니 우리 역사에 대해 초보자인 저로서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은 기분입니다...앞으로 많은 도움 주시기 바랍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함께 역사를 바로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