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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기 상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 원년 (-239) 4월 초 8일 천왕랑 해모수 단제께서는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오우烏羽의 관冠을 쓰시고, 용광의 검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난변蘭邊은 대륙의 청해성 청해호 남산에 있는 오란烏蘭, 도란都蘭이다.
또 청해호에 海心山이 있다.
( 단군조선의 연장선인 북부여는 해모수가 난변에서 즉위를 하고 그 도읍지에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천안궁이라고 했다.)
烏羽(까마귀 깃털)의 관을 쓰신 해모수 천제께서 도읍하신 난변의 궁실- 烏 蘭 都 蘭
한단고기의 기록과 꼭 맞는 지명이다.
우리의 조상님께서 내놓은 퍼즐을 맞춘 기분이다.
청해성은 대륙의 역사 지리를 축소 왜곡 할때 한반도의 황해도 이고,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서해도라고 하고
이 곳에 구월산 과 장당경 그리고 해주가 있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대륙의 청해성 이었던 것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 안서 대도호부 해주는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 <지성池城, 혹은 長池 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폭지爆池군으로 고쳤다.
태조는 이 군이 바다와 같다고 하여 해주<청해성이 바다가 아님에도 청해라고 했듯이>로 불렀다.
대녕서해 또는 고죽이라고 부른다. 수양산, 대수鴨도, 소수鴨도, 연평도, 롱매도등이 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鴨綠강의 비밀이 들어났다. 이 곳 청해성에서 발원한 황하의 상류지역이 鴨綠이었던 것이다.
이 곳 청해성 청해호에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특히 청둥오리들이 떼지어 날으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지금도 철새들의 군무를 촬영 하려는 전 세계의 사진작가 들에게 최고의 명소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인터넷에 청해호를 검색해 보면 알수 있다.
이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지성, 장지, 폭지란 말은 청해성의 지형을 설명하는 말이다. 청해성은 무수한 호수와 늪지와 초원과 황량한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치 바다와 같이 영원한 곳이다. 이 곳은 또한 우리 민족의 첫 고향, 시원과 같은 곳이다. 이 해주를 우리 고려는 대녕 서해라고 불렀다.
즉 서녕西寧 이라고 했다.
지금의 대륙의 청해성의 거대한 호수, 청해호 동쪽의 유서 깊은 고대도시가 바로 서녕시이다.
역사 지리를 이 보다 더 자세히 더 멋지게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우리 조선의 세종때 정인지, 김종서가 편찬한 고려사 지리지의 설명이다.
다음 지도는 대륙의 청해성이다.
청해성에는 청해호라는 내륙의 바다가 있다. 소금이 나오는 진짜 바다와 같은 거대한 호수이다.
이다.
그래서 이 곳의 지명이 옛 부터 염주鹽州 였다. 천연적으로 소금이 무진장 나오는 거대한 호수들이 무수히 많이 있는곳.
마치 바다와 같은곳.
이 곳을 고려때 서해도라 했는데 서해도에는 황주와 해주가 있었다.
그 해주가 지금의 청해성이다.
임신 11년 ;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을 하고 돌아갔다.
이 곳 영주寧州는 북부여의 도읍지 난변를 지키는 북방의 요새로 고려사 지리지의 안북 대도호부 寧州인데 지금의 寧夏회족자치주이다.
고구려의 팽원군이다. 안릉安陵 이라고도 이 주에는 청천강< 옛날에 살수라고 불렀다 >이 있다.
고려사 지리지의 설명은 참으로 정확하다. - 다음 카페; 드디어 찾은 대륙의 우리 역사지명 -를 참조하라.
우리 단군조선과 그 뒤를 이어받은 부여가 언제 만주땅에 있었다고 하는가?
대륙의 우리 역사를 반도에 집어 넣어 놓고 나서 아무래도 부족하니, 만주땅 이곳 까지가 고구려 땅이다, 저곳 까지가 부여 땅이다, 라고 해 보아도 도무지 알송 달송 할 뿐이다.
우리는 대륙의 중앙에서 한수를 중심으로 황하와 양자강을 끼고 역사 활동을 해왔던 것 이다.
대륙의 중원땅,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4천리를 적시는 한수. 우리 고대사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이야기 할 때 한수를 빼고는 역사를 말 할 수 없다. 그 한수가 대륙의 중심에 그 지명 그대로 현재의 지도에 존재 한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는 한수 유역을 서로 차지 하려고 싸웠다. 대륙의 중원땅을....
경진 19년 (-221년) 기비의 아들 기준을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연나라를 대비 하는데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서쪽 변두리를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을 삼게 되었다.
연나라와 북부여의 국경분쟁을 살펴보면 <사기>흉노전에" 연나라에 현장 진개가 있었는데 동호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라고 했으며 동호가 진개를 매우 신임하여 풀어 주었는데 제 나라로 돌아와서 동호를 습격하여 파했으며, 연나라도 조양으로 부터 양평까지 성을 쌓앟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시 기준을 번한으로 임명 하고 번조선을 통치 하도록 한다.
지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번조선은 부여의 울타리 역활을 한다. 위 지도의 연나라 장성을 보라, 조양으로 부터 양평까지 성을 쌓고 또 상곡, 어양, 우북평, 요동,요서의 여러 군을 두었다고 했다. 흉노의 공격을 막기 급급한 모습이다. 지금 북경의 만리장성이 그것이다. 연나라 수도가 지금 북경인 계였다.
신사 20년 (-220)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록하고 7월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이라 하다.
백악산 아사달- 청해성 아랍달택산.
계미 22년 (-219)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시왕 정의 부차를 박랑사에서 박살내다.
( 창해는 부여가 어디에 있었는지 보면 잘 알 수 있다, 단군조선과 부여가 만주땅에 있다고 하는 바람에 여러 고대 지명들이 왜곡되고 있다. 단군조선은 청해성을 중심으로 대륙의 중심에 있었고 연, 제, 노, 오,월나라 등은 전부 우리의 동쪽 변두리에 있던 나라들이다. 즉 창해는 청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청해가 고구려의 남해가 되고 백제의 서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박랑사는 하남성 박랑현의 동남에 있다.
임진 31년 진승이 농민 반란을 이르켜 진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피난하여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다.
( 이 들을 살게 한 상,하의 운장이란 곳이 바로 황하의 만곡부분 즉 오늘날 오르도스라고 부르는 곳으로 섬서성 만리장성 북쪽이다.
자 보라 부여와 번조선과 연, 제나라의 위치를 제대로 알고 보면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이들 피난온 유민들을 번조선의 변두리에 정착시킬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 또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오르도스 지역에, 황하의 북안 왼쪽에 요택이 있다고 한단고기가 밝혀 놓은 것이다.
고구려 본기 태조 융무 3년(서기 55년) "요서에 10성을 쌓고 한의 10성에 대비하다." 고 하였는데
첫째가 안시성- 개평의 동북 70리.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
세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네째- 겅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일곱-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여덟-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옛 요동국이라 함).
아홉-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열째- 요택은 황하 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요서에 10성을 쌓았다고 하고는 요택이 황하의 북안에 있다고 한 것이다. 바로 황하가 요수였던것 이다.
연나라를 시작으로 중원을 도모하려는 수,당은 항상 요동을 공격하는데 그들의 수도인 계, 탁군(지금의 북경)에서 군사를 집결시킨다. 그리고 험준한 태행산맥을 피해서 내몽고 고원을 통해 (평활한 초원의 길 -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로 대군의 치중차량의 이동에 안성맞춤 이다.) 요택을 지나 갈석산을 향하여 공격해 온다.
고조선시대 부터 고구려를 지나 고려시대 까지 북방민족이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경로가 된다.
이 곳 갈석산은 지금 영하회족자치주의 하란산이다.
인터넷-" 하란산 암석지대"을 검색해보라. 회갈색의 석산이 무한히 펼쳐져있다. 이 하란산 암석지대에는 또 암화들이 그려져 있다. 누가 그렸을까? 까마득한 우리 조상들이?...
부여의 모든것을 물려받은 고구려는 천산유역의 국내성(위나암성尉那巖성- 尉犁; 지금의 투루판)에서 도읍하여 다물, 고조선의 땅 대륙의 서안(장안, 평양)을 되찾으려고 한나라와 전투를 벌이고 드디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장안성을 차지하게 된다.
황하를 울타리 삼아 대동강 평양 (패수- 섬서성 위수, 서안)에 도읍하게 되는 것이다.
북부여는 고구려의 모태가 된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군의 둘째 아들인 고진이 도적 위만을 물리친 공으로 고리군의 왕이 된다.
구려하 건너편 요동의 서안평 옛 고리국의 땅에 봉작을 받는 것이다. 지금의 감숙성 평량일대이다.
그의 손자 불리지 고모수는 옥저의 후가 되며 그가 유화부인과 만나 고주몽을 낳았다.
유화부인은 불리지와 살다가 그가 죽으니 웅심산으로 돌아 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황하의 상류 청해성지역 유화부인의 친정인 하백의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이 서란이었다. 오늘날의 오란 도란이다.)
고주몽은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에서 살았다. 관가의 미움을 받아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졸본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고 한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고손자벌이다. 하지만 가섭원부여(동부여)에서 관가의 말지기를 하다가 도망하여 후기 북부여의 도읍지 졸본으로 가는데, 북부여는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를 동명(단군조선 47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한 고두막 단군이 고우루 단군을 동부여(가섭원 또는 분릉이라고 함)로 추방하고 북부여를 계승했는데, 다음대인 고무서 단군때 사위인 고주몽에게 제위를 넘겼다.
졸본은 홀본이라고도 하는데 신강성을 회홀 즉 회회족 이라고 한다. 고려의 특산물인 송골매의 고향이 이 곳 신강 위구르의 오국성 지역이다. 오국성을 당나라때 북정(베시 바르크)이라고 불렀는데 고려와 금의 경계에 있었다.
북송의 휘종, 흠종을 가둔 곳이다.
송골을 송홀, 회홀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이 곳 신강 위그루 지역에서 건국한다.
고주몽은 건국하여 제일 먼저 비류국왕 송양에게 항복 받고 영토를 넓혔으며, 두번째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을 빼앗고, 세번째로 북옥저를 멸한다.
기해 38년 (-202) 연나라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서 국경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이다.
병오 45년 (-195) 연나라 노관이 친구인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하니, 그의 무리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청해왔다.
단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 실수로 그를 박사로 모시고 상, 하운장을 떼어 봉해 주었다.
(이 곳 상,하운장이 요택 주변의 오르도스 지역이다. 이제 이 곳에서 해성<청해성>을 향해 위만과 그의 뒤를 이은 우거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부여를 공격해 온다.
이들을 물리친 공으로 고진과 불리지가 고구려 후가 되며 고주몽이 그의 후예이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35년
정미 원년(-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 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 가더니 돌아 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이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르켜 중마한이라고 한다. 이에 이르러 변,진한의 두 한도 각각 자기들의 각 영토를 가지고 도읍를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오래도록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도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이 기사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첫째, 번조선의 위치가 어디인가?
지금의 서안이다. 평양이며, 장안인 섬서성 장안이다. "정미 원년(-194년) 번조선왕이 수유를 떠난뒤 다음해 무신 2년(-193) 상장 연타발은 평양을 탈환하여 성책을 설치하고, 기유 3년(-192)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며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하다." 는 내용을 보아 번조선의 세력이 떠난곳을 지키려 하였고 신유 원년(-120)까지 70여년간은 서압록을 수비하고 성책을 설치하여 위만과 우거를 대비한 공으로 고진은 고구려 후가 된다. 고진은 섬서성 평양에서 고구려후가 되는것이다.
( 번조선왕 기준과 탁의 무리들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가는데, 기준은 양자강 이남 동정호 부근의 익주 <고려사 지리지의 금마군 익주 - 지금의 장가계>에서 마한국을 건국하는데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 망한다.
또한 한 무리 의 오가들은 대장군 탁의 고향인 월지로 가는데 이 곳이 대륙의 감숙성 돈황 지역이다. 이 월지는 마한이란 이름으로 고구려에 복속되는데 일부는 다시 아프카니스탄과 우즈벡 지역으로 이동해 가서 대월지국을 세우는데 이 대월지국이 후에는 쿠샨왕조가 된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하면 (쿠샨왕조-서기 105년-250년경 카스피해에서 아프카니스탄, 타지키스탄을 지나 인도 갠지즈강 상류까지 대제국을 이루는데 월지민족이 건국하였다.)라고 나와있다.
또 다른 마한과 변한의 무리들은 천산유역과 청해성, 내몽고등에 여러 군소 국가를 이루는데 옥저, 낙랑, 말갈, 숙신, 여진, 읍루, 물길, 오손, 쿠차, 고창, 거사, 훈, 강거, 색, 사카등으로 동 서양의 학자들이 부르고 있다.)
무신 2년 (-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 하였다.
(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수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를 칠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때(다물33년 을미 -146)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랑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이 기사는 많은것을 알려준다, 남 북의 갈사란 곳은 신강 위구르지역 준가르 분지를 말한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수를 하였다고 했으니 청해성 염주에 소금으로 된 호수가 있으며 이 지역이 황하의 상류지역으로 구려하라고 불리운 것을 보면 그가 청해성에 와서 고기잡이와 소금장수를 했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고주몽 성제 당대에 눌현 으로 옮겼다가 유리명제 19년에는 국내성으로 옮긴다.
이 연타발은 고주몽이 태어난지 7년후 (-193년, 무신년)에 벌써 상장군으로 큰 공을 세운다 (62세때). 나이 80에 죽으니 다물 34년 병인 3월이라고 했다.
한단고기 고구려국 본기의 기록에는 고주몽 성제는 22세(다물 원년<-178> 계해년)에 고구려를 건국하고, 다물 32년 갑오<-147> 북옥저 정벌, 다물 33년 을미<-146> 졸본에서 눌현으로 천도한 것이니 최소한 56세 이후에 붕어하신 것인데 , 삼국사기에는 22세(갑신년) 건국하고, 건국한지 19년(계묘년)후에 40세에 승하 하신걸로 되어 있다.
한단고기 고구려 본기 한단고기 북부여기 삼국사기
임인(-199) 고주몽 탄생 임인(-79) 고주몽 탄생
다물 원년 계해(-178) 고주몽 즉위 원년 계혜(-58) 고주몽 즉위
갑신 원년(-39) 건국
32년 갑오(-147) 북부여 정벌 계사 10년(-29) 북부여 정벌
33년 을미(-146) 졸본에서 눌현으로 천도
35년 정유(-24) 유화부인 사망 정유 14년(-24) 유화부인사망
임인 19년(-19) 고주몽 승하
그런데 북옥저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해가 한단고기의 기록은 다물 34년 갑오년이고, 삼국사기에는 건국 10년째인 계사년이다. 돌아가신 해가 똑같이 계묘년이면 한단고기는 건국 40년후이고 삼국사기는 탄생 40년후가 된다..
삼국사기는 결국 고주몽의 생몰기간을 20년정도 축소 기록한 것이고, 고구려를 2갑자 (120년)나 뒤에 건국한것으로 하여 역사기록을 축소하였다.
기유 3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였다.
( 해성이 황하의 상류인 청해성 지역이며, 고리군이고, 옥저이며, 황하의 상류가 서쪽 압록강 일대이고, 이 황하의 지방관 하백의 딸인 유화를 불리지는 만나 고주몽을 낳은 것이다.
옥저는 沮 라고 불리운 족속으로 남옥저는 청해성 지역으로 백제에게 귀부하고 동옥저는 감숙성 지역으로 신라에 항복하며 북옥저는 신강성 지역으로 고구려에 흡수된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임신 원년 (-169) ;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 낙랑국이 고구려 대무신열제의 왕자 호동이 옥저 지방을 유람하다 낙랑왕 최리를 만났는데 바로 감숙성 평량현 일대이다. 후에 이곳 평량현이 고려사 지리지의 북원경 원주가 된다.)
이에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 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더미 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195)의 겨울이다.
(-194) 번조선이 망하기 직전 낙랑왕 최숭은 마한을 찾아간 것이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의 낙랑 평양설을 생각해보자.
평양에는 번조선이 있었을 터이니 낙랑국은 감숙성 평량과 녕하회족자치주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량西凉 또는 량凉이라고 부르던 나라의 전신이 낙랑국이었던 것이다.
계축 42년 단제 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4세 단군 고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120)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 수비를 맡기니 병력을 늘리고 성책을 설치하여 우거를 대비하는 공이 많음으로 고구려후로 삼았다.
( 서압록이 황하의 상류 감숙성 유역이다. 이 곳에서 부여와 우거의 공방전이 벌어 졌다.)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해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우거 땅이 되었다.
해성이북 50리땅은 지금의 감숙성 황하유역이다.
내몽고쪽에 있던 위만의 손자 우거가 황하유역의 북부여를 침범하는 모습이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 살수는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침략군 100만을 격파한 곳이다. 지금 영하 회족자치주의 현재 지명이 청수하이다.
바로 갈석산이 있는 곳이다. 구려하는 이 지역을 흐르는 황하를 그때 불렀던 이름이다. 살수는 황하의 지류. )
정묘 7년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에 두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지도에서 만리장성의 위치를 확인해 보라.
내몽고지역에 있던 우거의 공격을 막는 절호의 위치에 설치 되어 있다.
특히 갈석산이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만리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라고 하는데 이 곳 갈석산이 만리장성의 일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곳에 은천시가 있는데 옛 산해관이다. 이 곳이 고구려때 낙랑군이 있던 곳이다.
<삼한 비기>에서 말한다.
"옛 책에선 <요서에 창요현이 있다.>고 했는데 당나라때 요주라고 개명했다.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밑은 곧 백암성이다. 역시 당나라 때의 소위 암주가 그것이다." 했으니 요수인 황하가 흐르는 이 곳에 갈석산이 있다.
역사의 왜곡은 우리만의 슬픔이 아니란걸 보여주고 있다. 갈석산을 갈석산이라고 하지 못하는 슬픔은 어리석게 역사를 왜곡하는 장본인이 스스로 안타까울 것이다.
계유 13년 (-108)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 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사방으로 병력을 침투 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곳 마다 한의 침략군을 물리쳤다.
평나는 섬서성 서안 , 평양을 말한다.
이때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한나라 유방이 나라를 건국할때 유방의 친구인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중에 위만은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는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내어 위만에게 봉하였다.
이곳 상,하운장이 황하의 만곡부문이며, 요택이라고 부르는 땅으로 지금은 오르도스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이 위만의 손자 우거가 은혜를 원수로 갚아 번조선 땅을 차지하고 위만조선이 되는데 북부여까지 공격해 온다. 이들은 결국 한나라 유철에게 망하고 이때 번조선의 평양 유역을 한나라가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은 결국은 다물을 외치며 한나라를 멸망시킨 고구려의 수도가 되는것이다.
유철은 한무제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무제때 평나는 바로 고조선의 평양유역을 말하는데 지금의 서안이었다.
이곳이 한의 수도 장안이며 고구려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평양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평양을 다물하는 것이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은 고두막한에게 사람을 보내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했다.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이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이때 국상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 합니다.>하여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섭원으로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석가모니의 1대 제자가 가섭이요 2대 제자가 아란불이다.
가섭의 땅에 아란이 있으니 이곳이 천축국이다.
이곳이 신강위구르 준가르분지이다. 또한 마갈국이며 말갈족의 나라이고 마한땅으로 고구려가 마한의 종자라고 했으며 고구려 건국후 제일 먼저 점령한 나라가 말갈국이다.
북부여기 하
5세단군 고두막 재위22년, 제재위 27년
계유 원년 (-108), 단군 고우루 13년 이다. 스스로 졸본에서 즉위하고 동명이라고 하였다.
단군조선 47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천하무적이었다. 한나라 도둑떼를 쳐부수고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 이 해가 한무제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 시킨 해이다.
한나라와의 국경분쟁이 치열하다. 이 때의 기록에 한무제와 흉노의 공방이 심한 시기이다.(-133~ -90)
한나라는 건국초기 유방이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산서성 대동부근의 백등산 전투에서 포위를 당하고 굴욕적인 화맹을 맺고는 많은 공물을 주어 흉노를 달랜다.(-201, 흉노의 산서성 마읍공격)
후에 한 무제때까지 약 70년간 굴욕적인 관계를 지속한다.
이때 북부여의 고두막 단제가 차지한 지역이 요동의 서안평, 요동은 황하유역이고 그 서안평은 감숙성 일수 밖에 없다.
위 지도의 낙랑, 좌원, 남여지방이 요동의 서안평이다. 이 곳이 고리국이고 고진이 고구려 후로 봉해진 곳으로 앞으로 고구려와 한나라가 치열히 서로 차지하려고 엄청난 전투를 벌이는 곳이다.
해모수의 선조도 고리국 사람이라 했으니 이곳 감숙성 기련산과 돈황이 고리국이고 돈황이 옛 임황이다.
갑오 22년 (-87) 단군 고우루 34년,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떼를 쳐부수고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 잡았다.
을미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여, 이를 제후로 삼아 분릉으로 옮기게 하고 도성을 점령했다.
가을 8월에 서압록의 상류에서 한구와 싸워 크게 이겼다.
(서압록의 상류는 청해성과 섬서성의 접경지역이다.
지금 청해성과 감숙성, 그리고 섬서성 접경지역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임인 30년 (-79) 고주몽이 분릉에서 탄생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 백악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한나라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나 여러차례 크게 싸워 이겼다.
(요하의 왼쪽까지 쳐들어 오니 이 시기에는 황하 일대를 한나라 오랑캐들에게 다 빼앗긴 것이다.
계해 2년 제가 영고탑을 순시 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에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가섭원 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원년(-86) 왕은 북부여 때문에 가섭원 혹은 분릉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가 편했다.
이곳은 천산산맥과 우랄알타이 산맥사이의 신강위구르지역이다. 준가르분지이다.
갈曷,갈鞨,갈竭,갈竭,갈碣
임인 8년 (-79)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
(여기에서 고주몽이 태어난 가섭원은 어딜까? 또는 왜 분릉이라고 할까?
일단 청해성은 아니다. 동명성제가 청해성 오란도란에 있던 북부여를 아마도 청해성의 변경으로 보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86년경) 흉노가 한나라와 한창 전쟁을 벌일때니 지금의 한반도의 북쪽인 만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섭원이란 말이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가 가섭존자이니 그 이름을 딴 평원을 가섭원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가섭존자는 마갈국 摩竭國사람이라고 했다. 마갈국은 말갈靺鞨국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또 신강 위구르의 準碣彌盆地가 나온다. 또한 동부여의 대소왕이 망한후 그의 동생은 曷思水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曷思國을 세웠다.
고구려는 개국 하자마자 맨 처음 한일이 말갈靺鞨을 복속 시키는 일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그 지경이 말갈과 연접하여 침구의 해를 입을까 드디어 이를 쳐 물리쳤다."고 했다.
이상으로 보아 가섭원 또는 분릉은 신강의 준갈르 분지와 카자흐스탄 과 키르키스탄 이다.
그리고 고주몽이 그 곳에서 또 부여인에게 쫒겨 도망한 卒本川은 우즈베키스탄(烏玆別克斯坦 ; 검은 까마귀의 땅이란 뜻이다)일대를 말한다. 그 곳이 엄리대수淹利大水가 있는 곳이다.
그 곳에 있던 나라 이름이 엄채奄蔡(아랄해 북쪽에 있던 나라)이다
이상이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 되는 곳이다.
2세 금와 재위 41년
정유 24년 (-24) 유화부인이 돌아 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황태후의 예로서 산같은 릉을 만들었다.
3세 대소 재위 28년
계유 19년 (13) 왕은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학반령 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 28년 고구려가 전력을 다해 침범해 오자 왕이 몸소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에 빠져 있을떄 고구려 대장군 괴유가 살해 하였다.
여름 왕의 동생이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백성을 취하였다.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취해 나라를 세워 왕이라 하였다. 갈사는 태조무열제 융무16년 도두왕이 고구려의 강대함을 보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라 부르고 훈춘을 식읍으로 동부여후에 봉했다.
가을 7월 왕의 친척동생이 옛 도읍의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 하였는데 낙씨의 성을 하사했다.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494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치내 제사마저 끊겼다.
삼국사기에 태조무열제 70년(122)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니 부여왕이 원병을 보내 현도를 구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까지 부여는 지금 북경유역에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연나부가 연나라 땅을 차지한것을 말해준다. 지금의 북경지역이다.
북부여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