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叅議公 韓 磌(참의공 한 전)13세 조선태종 8년(1408)~세종29년(1447) 贈:嘉善大夫 戶曹叅判 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使 全羅道觀察使(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통정대부 수황해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遺 事 :字 子珣 號 霤岸 建文戊子生, 佐翼原從功臣, 黃海監司歷, 全羅監司歷,戶曹叅議贈戶曹叅判, 世宗二十九年二月十五日卒 墓: 京畿道 高陽郡 碧蹄面 奈遊洞 大乃山 案山 卯坐(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내유동 대내산 안산 묘좌) 配: 貞夫人平山申氏建文壬子生父掌令丁理祖判典農事彛曾祖典理判書諿外祖永禧君開城王玹景奉甲申十一月二十日卒墓與公上下兆 墓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대내산 안산 묘좌) 동영상 *가계도* *국역왕조실록 공(公)은 조선 세종(世宗) 때의 문신이다. 휘(諱)는 磌 이요 ,字는 子珣(자순)이고, 아호는 류안(霤岸) 이다.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 영정(西城府院君)(永矴)의 둘째 아들이고, 녹사(錄事)를 지낸 증 판서공(贈 判書公 寧(녕)의 손자이며, 양절공(襄節公) 確(확)의 차제(次弟)이시다. 공은 태종(太宗) 8년(1408)에 출생하였는데 천성(天性)이 정직하고 형제지의(兄弟之誼)가 돈후(敦厚)하였으며 학덕(學德)을 쌓아 장차 벼슬길에 올랐다. 세종(世宗) 원년(1419)년 01월 17일(임술:壬戌))에 의영고승(義盈庫丞)에 임명, 세종 22년(1440)(경신:庚申) 11월 12일 32세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승진(陞進)되고, 세종 24년(1442)(임술:壬戌) 10월 24일에 (동반외관직 종2품)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로 전임되어 선정(善政)하니 백성(百姓)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 때가 공의 나이 34세 가 되시던 해 이다. 세종 26년(1444)(갑자:甲子)2월 22일에 형조참의(形曹參議)로 옮겼으나,이 해 다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부임, 세종 26년 11월 감목관이라는 직책을 혁파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으며, 세종 27년 4월 전라도내에서 양식의 부족으로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이 시급하자 전라감사 한전은 도내 백성이 먹을 양식 7만석을 청하여 정부의 재가를 받았다. 세종27년(1445)(을축:乙丑) 7월 1일 37세에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전임되었으며. 세종 29년(1447)년(정묘:丁卯)1월 16일 공조참의(工曹參議)로 나갔으나, 다음 달인 2월 15일에 졸하니 향년 39세 이었다. 조정(朝廷)에서는 후(厚)한 부의(賻儀)(쌀과 콩米豆 10석과 관곽棺槨)를 내리고 가선대부 호조판서(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에 증직하였다. 세조(世祖) 3년(1457)8월12일에 원종공신이등(佐翼原從功臣二等)에 녹훈(錄勳)되었다. 배위(配位)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는 장령(掌令) 丁理(정리)의 따님이고,아들은 7명으로 兵使 忠仁(병사 충인), 副正 忠義(부정 충의), 副正 忠禮 (부정 충례),叅議 忠智(참의 충지), 叅判 忠信(참판 충신), 僉使 忠常(첨사 충상), 都正 忠順(도정 충순)이다. 공의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대내산 아래 묘좌원(奈遊洞 大奈山下卯坐原)에 안장(安葬)하였고 배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는 태종6년 (병술:丙戌) (영락:永樂4년)에출생 하시어,세조 (世祖)10년(1464)(갑신:甲申) 11월 20일 향년 59세에 졸하여, 공묘계하(公墓階下)에 안장(安葬) 하였다.시초(始初)에 묘갈(墓碣)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과 난세병화(亂世兵禍)로 비(碑)가 마멸(磨滅)되니 ,후손 魯洙(노수)와 厚福(후복)과 明洙(명수)가 힘을 합하고,魯洙(노수)가 비문(碑文)을 지어 묘비(墓碑)를 수립(竪立)하여 신도비(新道碑)를 세웠다. 永慕齋(영모재)는 참의공 전(磌)과 배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의 향사(享祀) 또는 종친회(宗親會)나 혹은 향학(鄕學)등으로 쓰이며 1963년 4월에 건축(建築)한 목조건물(木造建物)이다.2001年4月30日,叅議公先祖님齊室境內 에서 회의(각)종중에 齋室再建築費獻誠金配定(재실재건축비헌성금배정)하여, 2001년10월 아들일곱분이신(각)종중에서 힘을합하여, 再建築(재건축)하였다. 본당(本堂)은 15평, 부속 건물(附屬建物)이 20여평, 부지면적(敷地面積)은 220평이다. 세일제는 매년 10월5일(음력)봉행한다. 子 女 : 忠仁. 忠義. 忠禮. 忠智. 忠信. 忠常. 忠順. 사위 成 健: 文吏判 父順祖 子成景溫正郞贈副提學
兵使公 (韓 忠 仁)(병사공 한 충 인) 세종15년1433년~연산10년(1504년) 10월 1일(戊午) 嘉善大夫 忠淸慶尙全羅兵馬水軍節度使(가선대부 충청경상전라병마수군절도사) 墓: 京畿道 高陽郡 碧蹄面 奈遊洞 大乃山 配: 貞夫人 安東金氏, 父 知敦寧 仲淹 공 (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무신으로 휘(諱)는 충인(忠仁)이다. 참의공(叅議公) 전(磌)의 큰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永矴(영정)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掌令) 정리(丁理)의따님이다. 세종(世宗) 15년(1433년)에 출생하여 (嘉善大夫 忠淸慶尙全羅兵馬水軍節度使)가선대부 충청경상전라병마수군절도사 벼슬을 지냈다, 세조13년 1477년 7월 6일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고, 성종13년1482년 임인년(壬寅年)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 왔으며, 복명(復命) 하면서 청화집(淸華集).유향신화(劉向新話) 및 설원(說苑).주자어류(朱子語類).분류두시(分類杜詩)책을 바쳤다.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지돈녕(知敦寧) 仲淹(중엄)의 따님이시며 三男三女 를 두시었다. 장남은 증 승지 훈(贈 承旨 訓)과 차남은 첨정 근(僉正 謹), 감역 겸(監役 謙) 이다. 장녀는 이팽령 현감, 차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중종대왕비인 단경왕후의 모후)이시기도 하며 , 삼녀는 성중온이다. 공은 천품(天稟)이 신근(愼勤) 하고 매사(每事)에 신중 하였으며 청렴했다.공의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내유동 대내산(奈遊洞 大奈山下 巳坐)사좌 상조(上兆)에 있는데 부인과상하조(上下兆)이다. 세일제는 매년 10월5일(음력)봉행한다. 참고자료:현재 공의 묘소 우측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 兵馬節度使) 묘비가 있다. 子女: 訓. 謹. 謙. 사위李彭齡. 愼守勤(文在相益昌府院君父領相承善). 成仲溫.집성촌:청양(인양리槿洙041-942-7497).청양(대흥리鳳洙041-942-6218).장성長成(南洙061-393-2210).광산光山(南洙)062-971-9117.곡성(谷城容錫061-363-5700).고창(高敞東燮063-563-3773).고양(高陽東錫031-962-0133).여주(驪州奇宗031-881-0248).양평(楊平晧錫031-772-0533).경북구암(상관011-529-2233)
副正公(韓 忠 義)(부정공 한 충 의) 14세 副正(부정) 공(公)의 휘(諱)는 충의(忠義) 이다. 참의공(叅議公) 전(磌)의 둘째 아들이고,순창 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矴(영정)의 손자이다.공(公)은벼슬을 쌓아 부정(副正:조선 조의 종친부(宗親府). 봉상사(奉常寺), 사복사(司僕寺), 군기사(軍器寺), 내자사(內資寺), 군자감(軍資監) 등에 1명을 두었는데 각각 그부서의 부책임자이다)을 지냈다.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벼슬이 올라 부정을 지냈다.배위(配位) 봉화 금씨(奉化 琴氏)는 목사 이영(牧使 以詠)의 따님이고.아들은 직장 백(直長 白) 이다. 집성촌:金化宗中(宜錫033-458-0598).*국역왕조실록
副正公(韓 忠 禮)(부정공 한 충 례) 14세 副正(부정) 공(公)은 참의공(叅議公) 전(磌)의 셋째 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矴(영정)의 손자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공은 천성이 무예(武藝)를 좋아하여 무속(武屬)의 부정(副正)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고 아들은 판관 담(判官 潭)과 등제 급(登第 汲) 그리고 부장 문(副將 汶)이다.공 과 안동권씨(安東權氏) 양위(兩位) 의 묘는 합조(合兆)로 선영하(先塋下) 에 있다. 집성촌:영광(靈光),扶安宗中(萬洙063-582-9446).*국역왕조실록
叅議公(韓 忠 智)(참의공 한 충 지) 14세 吏曹參議(이조참의) 공(公)은 참의공(叅議公) 전(磌)의 넷째 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 (西城府院君)永矴(영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공은 문관으로 벼슬이 이조참의(吏曹參議) 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숙부인 경주 김씨(淑夫人 慶州 金氏)는 병마사 유속(兵馬使 有粟 의 따님이고 아들은 판관 숙(判官 俶)과 우(佑), 현령 륜(縣令 倫) 그리고 현감 좌(縣監 佐)와 만호 준(萬戶俊)이다. 묘(墓)는 시초(始初)에 광주 해천 고덕리 (廣州 蟹川 古德理 丁坐)에 배 경주김씨(配 慶州金氏)와 합조(合兆)였는데 묘갈(墓碣)이 있었는데 성남시의 도시계획(都市計劃) 으로 충남 공주시 이인면 용성리 인좌(忠南 公州市 利仁面 龍城里 寅坐)에이장(移葬),합조(合兆)되었다. 집성촌:南原宗中(德熙063-634-8319).公州宗中(慶041-857-6775).安山宗中(강031-407-4843). *묘1 2. 3. 4. 5.
叅判公(韓 忠 信)(참판공 한 충 신) 14세 嘉善大夫 參判(가선대부 참판) 공(公)은 참의공 전(磌)의 다섯째 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矴 (영정)의 손자이다,공(公) 가선대부 참판(嘉善大夫 參判)을 지냈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남양 홍씨(貞夫人 南陽 洪氏)는 집의 연(執義 演)의 따님이고, 묘(墓)는 선영 하(先塋下) 쌍조(雙兆)이다.아들은 승지 讚(찬)이다. 집성촌:羅州宗中(判鉉062-222-7525)
僉使公(韓 忠 常)(첨사공 한 충 상) 14세 僉使(僉節制使) 공(公)은 참의공 전(磌)의 여섯째 아들이고, 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矴(영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공은 첨사(僉使:僉節制使의준말)를 지냈다. 배위(配位) 남양 홍씨(南陽 洪氏)는 도사 서(都事 瑞)의 따님으로 묘(墓)는 선영하(先塋下) 상하조(上下兆)이다.아들은 별좌 회(別座 澮)와 참의 결(參議 潔)이다. 집성촌:珍島宗中(炳任061-543-1278).*국역왕조실록 *진도종중 입향조 설단. *충현사. 충현사동영상
都正公(韓 忠 順)(도정공 한 충 순) 14세 敦寧都正(돈녕도정) 공(公)은 참의공 전(磌)의 일곱째 아들이고, 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 (西城府院君) 永矴(영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돈녕도정(敦寧都正: 조선조때 종친부(宗親府),돈녕부(敦寧府)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장단세곡(長湍細谷) 에 묘가 있었다. 아들은 동지 추(同知 樞)와 동(棟) 그리고 친위 기(親尉 機)이다. 집성촌:唐津宗中(昌洙041-363-0450).*국역왕조실록 |
첫댓글 윗글 시초에묘갈이있었는데오랜세월과 난세병화로비가마멸되니후손 노수 (본인조부)와 후복 .명수 (본인 친족인양종중)가힘을합하고노수가 비문을지어묘비를 수립하고신도비를 세웠다 (영묘제건축)분명 인양종중에서 다 이루워 놓은것을항소이유서에 인양 종중은 하위종중으로 지역의이름이라고 기망행위했고. 본인의조부가 세워놓은 신도비가있는종원들에게헌성금을걷어 한양명씨가 또신도비를 세우고본인의숙부 상순씨가 감사공으로 바꾸자고 했다고 허위 문서를 만들어 법원에제출했습니다.본인의숙부는 1998년 취장암에걸려 1999년6월10일사망했습니다. 죽어가는사람이 1998년5월4일종중명의를 바꾸자고 했을까요??말이안됩니다.
본인의조부는1970년도에사망한사람인데1980년10월1일 총친회의에 참석하고 도장을찍었답니다.죽은사람을 불러다 종친회의를 하는 한양명씨와 한근수씨가 이와같이 허위 문서를만들어 항소 이유서를 제출 한사람입니다 이들을 무어라고 해야합니까???????
돌아가신 분까지 참석시켜 허위문서를 만들어 종파명을 바꾸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었인지 궁금합니다.
반드시 원래되로 되돌려 놔야합니다.
고맙습니다 땅을 피고(땅의상속자)가찾지하려고한다고 원고가 몰아세우는데 그런욕심이있었다면50년을무관심으로 있었을까 요
고양시덕양구 내유동 63번자 150평은 1961년도에 한노수외5인이샀고내유동 산107번지와같은108번지는 약4만평을 한노수외21명이 모금하여 사놓은땅을 내유동51번지에사는관리인 한동석씨가61번지와64번지의수익금으로시제를 지내다가 2004년도에인양종종회장 한근수씨가63번지를 팔아주면관리를 한다고해팔아서 전액9억을 기증했는데 기증자의 자손과 상의도없이 한양명씨에게 소송경비로 1억원을 상납하고한양명씨는 소송위원장이되고 한근수씨는감사공 대표가되어 땅을 사놓은사람들의 자손에게 소장을 보내고
소송경비를 피고들이내라고 하며 ,64번지(한후복외4인의명의로된땅)를 감사공종중땅이라고하여 소송을하니 소장이온한달이내에 답변서를 안내 감사공종중에게
빼앗기고 땅값8억8천만원을 가로채고서 한후복외4인의자손들에게는 50만원씩나누워줬답니다 그돈8억8천만원과인양종중에서1억원을들여 공식으로 땅팔아서 재판한다고 하는것입니다.돌아가신 본인의 조부 한노수씨가 명의신탁을 해 놨다고
하고 본인의 숙부 상순씨가 감사공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문서를 작성하여 법원에 제출했어요.
본인의 숙부 한상기씨가 외국에있고 노수와후복 후손들이 종중관심없는것을 알고 이 같은 행위를 해오니 제가 다 알고있는 진실을 가만히있을 수 가
국역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있는것을 발견하고 구암종중의후원을 얻게되어 무한기쁨니다 .
꼭 이길 것입니다.
종파를 바꿧는 뒷 배경에는 공동명의로된 재산을 법인종중으로 소유권 이전에 목적을 두었는가요...?
마음고생이 많겠습니다.
전자 선조님의 직계종중으로 반드시 승소하시길 빕니다.
네 소유권 이전 소송입니다. 장자 한충인의자손도 아닌사람들이 고유 종중이랍니다.
숙부 한상기 박사님만 한국에 계셔도 소송같은것은 없었을것이고 본인의 가족들이 땅에대한 욕심이없고
종중에서 잘관리 할것이라고 믿고간섭을 안한것이 큰 화를 입었습니다.
우리 문중은 대외적으로 여타의 종친회에 소속되거나 교류가 없어 종친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많은 것을 알게되어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소송과 관련한 여러가지 일들이 좋은 결과 있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