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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연재
지공 큰스님의 풍수답사기 제1화
서산대사 비전 풍수 계승자 지공스님과 함께 인간과 풍수의 함수관계, 그 현장을 찾아가본다
류재응 합천경찰서장, 거창 학림서원에 온 까닭은?
수승대 거북바위를 보면 장수를 누릴 수 있다?
지공스님 소장본 <서산대산 풍수비기>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땅은 그 몸을 기를 뿐 아니라 뜻을 키우고 마음도 닦아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 그 사는 땅이 어질면 아름답다(里仁爲美)라 했다. 공자는 슬기롭기를 바란다면 어진 곳을 골라 살라(擇不處仁 焉得知)라고 가르쳤다.
덕유산 남쪽에 위치한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 황산마을은 청정한 개울이 마을을 안고 흐르는 빼어난 자연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또 고풍스런 돌담과 전통한옥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 사계절 운치있는 한옥 민박체험이 가능하다.
인근 명승 수승대에는 매년 거창국제연극제 개최시기에 맞춰 많은 관광객들이 황산마을을 찾고 있다.
덕유산 아침풍경 거창학림서원
황산마을 뒷편 대정리 239에 학림(鶴林)서원이 있다. 서기 1780년에 세워 삼괴당 권시민(三槐堂權時敏) 죽헌 조숙(竹軒曺淑) 박약재 강위용(博約齋姜渭龍) 금천 류세홍(金川柳世泓) 원암 곽인(猿岩郭訒) 난곡 우석일(蘭谷禹錫一)등 육 선생을 병향하였다.
위에 열거한 6선생은 그옛날, 어진 땅 황산마을에 둥지를 틀고, 선비로서의 뜻을 키우고 마음을 닦았다. 삼괴당 권시민은 조선 성종 계묘년(성종 14,1483)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했다. 그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게 배웠으며,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세마(稅馬) 벼슬을 주었으나 무오사화 후에는 초야에 은둔하면서, 학문과 수양에만 힘썼다.
죽헌 조숙은 1504년(연산군 10) 경상도 안음현 황산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고모부 이연(李蓮)에게 학문을 배웠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는 밤낮으로 간호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삼년상을 정성껏 치러 고을 사람들이 조숙의 효성을 칭송했다고 한다. 이후 조숙은 임득번(林得蕃)과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박약재 강위용(博約齋 姜渭龍)은 전라도 나주에서 출생하여 함양에서 자랐다. 처향인 거창 서마리로 와서 살았다. 명문출신으로 서기1558년인 명종무오에 성균 진사가 되었고 학문이 깊었으며 도덕이 장하였으나 불과 40세의 나이로 1575년에 세상을 떠났다.
금천 류세홍(金川 柳世泓)은 황석산 전투때 두 아들을 데리고 가 왜군과 일전을 겨룬 애국지사로 이름 높다.
원암 곽인(猿岩郭訒)은 서기1563년에 삼가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종숙인 곽회성의 양자로 안음 원학동에 왔다. 천품이 준수하였고, 효성이 남달랐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늙은 양친을 보살피고 봉양하는 그의 효행에 감복함을 금치 못하였다. 특히 양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여러 해를 앓아눕자 주야를 불문하고 그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으며 하늘에 대신하기를 빌었고 상분(변을 맛보아)으로 치료에 정성을 다 하였다. 급기야 상을 당하자 3년간을 피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1650년(효종 1)에 어머니의 병환을 효행으로 낫게 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일찍이 과거 시험장에 갔다가 동료들이 명리에 급급하여 급제에 혈안이 돼 경박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들을 하는 것을 보고서 그 자리에서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귀가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평생을 전력하였다.
1649년(인조 27) 음공(蔭功)으로 장사랑(將士郞)에 오르고, 영조(英祖) 때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난곡유고(蘭谷遺稿)』 3권 1책이 있다.
학림 서원은 대원군 시절 서원 철폐 국령에 의하여 훼철됨에 본당과 사우 등은 파옥되고 전사청만 남아 있다가 뒤에 문간채를 새로 세워 현존한다. 훼철과 동시 향사는 드리지 아니하고 매년 음력 3월13일에 후손들이 모여 회집을 한다.
지난 음력 3월 13일(丁丑, 양력 4월 17일) 6선생들의 후손들이 학림서원에 모여 6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제를 올렸다. 초헌관 권재석, 아헌관 조화영, 종헌관 강진희, 집례 강원석, 축 조광환.
황석산 전투의 영웅 금천 류세홍의 후손 류재응 합천군 경찰서장의 모습도 보인다. 류재응 합천군 서장은 학림 서원의 역사적 가치를 이렇게 말한다. "학림 서원 6선생은 실로 덕행과 청절유풍(靑節遺風)을 몸소 실천한 큰선비님들이었습니다. 6선생의 눈부신 학문적 업적을, 후손인 우리는 길이길이 보전하고 숭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한 시대를 떨쳐 울린 조상님들의 삶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데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말이다. “황산마을 학림 서원은 실로 좋은 터에 위치해 있습니다. 웅위와 품자(稟姿)를 지닌 덕유산과 마을을 가로지르는 수승대 계류는 선비로서의 뜻을 키우고 마음을 닦는 데 더나위 없는 도량이 되었을 겁니다.” 학림서원 6선생 황산마을은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로 수승대국민관광단지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1540년(조선 중종35년)에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1540년 '구연재'을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했던 이후로 거창 신씨의 집성촌 마을이 되었다. 이 '구연재'는 1573년 신권선생이 죽자 사림에서 '구연서원'으로 개칭 하고, 석곡 성팽년과 함께 배향 하였다. 이후 황산마을은 18세기중엽 조선 영조때 노론계 학자인 황고 신수이 선생이 입향을 하면서 번창하게 되었다.
이 곳 황산전통한옥마을의 가옥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 강점기 시대의 지방 반가의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남아 있는 한옥은 약 50여호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고, 모두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씨족 부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담장은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한 토석담으로 약 1.2Km에 걸친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전통고가와 잘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높이 15m, 수령 600년에 이르는 '안정좌'나무라 부르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황산신씨고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1927년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건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이 가옥은 경상남도 민속자료 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사랑채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꾸며져 있어 당시 큰 지주였던 집주인의 재력을 엳볼 수 있다. 안채는 많이 개수되어 전통한옥의 격식에서는 많이 벗어난 모습을 보여 준다.
학림 서원이 위치한 거창군 위천면 풍수를 답사해보자.
이곳은 조선조시대때 <원학동>이라고 불렀다. 원학동은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알려진 ‘안의삼동’ 중의 하나다. 안의(安義)는 오늘날 함양군과 거창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소백산맥 줄기의 동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은 매우 험준한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원학동은 위천을 따라 월성계곡의 아래 지역에 위치한 동천이다. 조선시대에 동은 오늘날과 같은 행정지명이 아니라 동천을 의미하는 글자로 맑은 계류가 흐르고 산수가 아름다우며 경치가 좋은 계곡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러한 원학동천의 중심에 바로 수승대가 자리하고 있다. 수승대의 계곡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이루면서 흐르는 물길이 조형해놓은 비경이다.
수승대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가운데 위치한 거북바위(龜淵岩)가 중심이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요수정, 계곡의 진입부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는 요수정의 반대쪽에 마주하고 있다. 요수와 관수는 모두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풍류의 멋을 음유하는 말이다. 요수정과 관수루에서는 거북바위가 위치한 수승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승대에는 유독 거북과 관련된 명승지(거북바위, 구연서원 등)가 많다.
수승대 거북바위, 구연서원은 덕유 금원산을 바라보는 형국에 위치해 있다. 물에 사는 거북이는 강변이나 해변에 알을 낳으나, 산에 사는 거북이는 산에 알을 낳는다. 구연서원 건물 머리가 산을 향하고 있다. 이는 풍수에서 산은 인물을 주관한다[山主人]고 하였다. 구우녀서원과 거북바위가 산을 향해 위치해있는 이유는 좋은 인물을 많이 배출하라는 염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거북은 중국에서 용, 봉황, 기린과 더불어 네 영물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었다.
거북점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낼 수 있나는 믿음이 있고, 이런 믿음은 사방신 신앙으로도 연결되었다.
거북은 지신 혹은 수신을 상징한다. 거북의 네 다리는 세계의 4구석을 나타내며 땅과 물을 자유로이 오가며 세상을 지배한다.
한편 거북은 힘과 인내 뿐만 아니라 장수를 상징한다.
한국인 뿐만 아니라 동양인에게 있어서 거북은 경외(敬畏)의 대상이다. 예로부터 거북은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이자, 기린(麒麟), 봉황(鳳凰), 용(龍)과 함께 사령(四靈) 중의 하나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거북의 등이 갈라져 있음을 보고 하늘의 이치를 알아내는 영물(靈物)로 여겨 왔다. 가야의 건국신화인 구지가(龜旨歌)에 등장하는 거북은 새롭고 신성한 군주의 출현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뜻을 알리는 존재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금와왕의 군사에 쫓겨 달아날 때 다리를 놓아 구해 준 신의 사자(使者)가 바로 거북이었다.
민간신앙에서의 거북은 장수(長壽)를 의미한다. 일상의 도구나 기구, 공예품 등에 거북 무늬를 놓으며, 명(命)이 긴 사람에게 귀령학수(龜齡鶴壽)라는 글귀를 써 보내는 것도 거북이 장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산과 마을의 지명(地名)은 풍수의 형국(形局 : 산과 땅을 사람, 동물, 식물, 문자, 사물 등에 빗대어 표현한 것)에서 차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북구의 구포(龜浦)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이다. 지명이 거북 '구(龜)'자로 시작되기 때문에 인근에 거북모양을 한 산이나 상징물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공스님 친견=010-8508-6357 거북이 형상를 한 대한민국 국새.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왕위의 계승 또는 국가권력 이양의 징표로 썼다. 국새는 외교문서에 쓰는 것과 국내에서 쓰는 것으로 나누어 사용했다.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국새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타나는 부여의 '예왕지인'이다. 조선은 1403년 명나라에서 '조선국왕지인'이라는 금인을 받았다. 이것을 대보라고 하여, 1636년까지 중국과 관련된 외교문서에만 썼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대보를 없애고 '대조선국보'·'대조선대군주지보'를 만들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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