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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세계
김현봉 목사의 설교 세계
1. 생애(약력)
김 현봉 목사(1886-1965)는 서울에서 출생하였다(장로교 목사). 1906년(22세) 동대문 감리교회에 3인과 함께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2년 양정의숙 법과 졸업 후 배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일합방 이후 줄곧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감시를 피해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 들고 중국으로 망명하여(1912-1923) 북간도와 러시아 영토를 두루 다니며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중국어, 러시아어 능통).
1923년 귀국시 서을역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에 누님과 생질이 보증을 서 보석으로 풀려났고, 출옥한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39세).
평양신학교 재학 중(1923-1927) 평북 정주교회, 관악 보리말교회, 시흥 구읍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23회)하고 192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6월 16일 세브란스 간호원 출신의 박천선(朴天善)양과 결혼하였다(사모님은 1924년 진명여학교 졸업, 1944년까지 간호사 일).
그후 경기노회 소속으로 경기도 시흥군에 있는 부림교회에 부임하였고, 경성노회로 이적하여 서울의 공덕교회에서 시무했다.
1932년 3월 30일 성수주일 문제로 공덕교회를 사임하였고, 1932년 4월 20일 7인과 더불어 서울의 아현정(阿峴町)교회(아현에배당)를 창립하고 목사로 취임한 후 38년간 계속 시무하였다.
1964년까지 전국 각처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특 히 총회에서 신학교 문제로 분열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독립교회를 표방하였다(1953년 고려파 38회 총회에서 제명됨). 1965년 3월 12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 313쪽; 자료-안길옹 목사 제공)
2. 목회 방침과 교훈의 특징
1) 찬양대, 학생회, 청년회 두지 않았다(교회 사업주의 반대)
2) 주일성수 강조
3) 자발적 연보 가르침
4) 친목회, 야외예배, 망년회, 찬양새벽송, 어머니주일, 약혼식 폐지
5) 국산품 애용 강조
6) 삼분설 주장
7) 천국은 다 평등이 아니다(천국에서는 큰 자와 작은 자가 있다)
8) 목회, 치리, 재정, 유년주일학교, 심방 전담.
9) 한복을 즐겨 입으심.
10) 밥을 먹으라고 했을 때 먹었다고 하면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11) 하루 7-8시간 기도하셨다(15일을 앉아 계신 적이 있다고 함)
12) 점심은 항상 국수를 하시고, 국수를 대접하셨다.
13) 하루 수면 시간은 3-5시간뿐이다.
14) 오전 시간은 기도, 성경공부, 오후는 심방과 전도와 교회 일을 하셨다.
15) 장례는 리어카로 운반(심지어는 관이 없어도 무방)
3. 메시지
1) 10대 특수 교훈
(1) 삼가하고 조심하라
(2) 양심을 똑바로 써라(양심과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을 가지라)
(3) 일심정력
(4) 구원을 이루라(성화구원)
(5) 명예 영광심을 버리라
(6) 나 하나 만들라
(7)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풍속습관을 버리라.
(8) 지식중심주의를 버리고 믿고 실행하라.
(9)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살라.
(10) 개교회주의
2) 그밖에 강조하시고 가르치신 말씀들
(1)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묵상하라
(2) 예수 믿는 것은 남을 위하여 믿는 것이다
(3) 교회 직원 많이 내지 말라
(4) 참되고 진실되고 정직하라. 옳고 착한 일을 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참고 견디고 덕을 길러라.
(5) 겉 사랑하지 말고 그 영혼에게 참 유익을 주는 참 사랑을 하라.
(6) 물질적 신앙적 자립정신을 길러라.
(7) 교회사업주의를 버리라.
(8) 결혼식 간소화
(9) 물질(돈, 전기, 의복, 음식, 건물)을 절약하고 남용치 말라.
(10)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믿는 도리를 가르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라.
(11) 쉬운 것부터 믿고 실행해 나가라.
(12) 들어오는 대로 종횡으로 열을 맞추어 앞자리부터 앉아라.
(13)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고 고요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라.
(14) 이자놀이 하지 말고 계하지 말라.
(15) 강단을 꾸미지 말라(성경을 올려놓고 강도할 수 있으면 족하다).
(16) 예배시간을 엄수하고 약속을 지키라.
(17) 찬송가를 뜻을 생각하며 불러라.
(18) 혈기를 이겨라.
(19) 극장가지 마라.
(20) 우상의 제물, 피, 목 매여 죽은 짐승 먹지 말라.
3) 목사에 대한 교훈('택함 받은 일꾼의 자격과 신덕', 딤전 4:10-16)
택함 받은 일꾼은 열심과 힘을 드리며, 양을 자기의 뼈와 살과 같이 사랑하여 교인과 목자가 통하게되는 것이다.
참된 일꾼은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이 쏟아져 나오고 피땀이 섞이어 나오는 것이다. 목자를 알아서 따라온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양들에게 보이어야 할 것이니 영혼의 키가 장성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덕이 자라고 선의가 더욱 자라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묵상, 성경 보는 일, 기도, 궁구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일, 잘 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 먼저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며 연단하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강도에 기울여 해야 하는 것이다. 몇 시간 준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은 품팔이 일꾼인 것이다. 교인이 온 것은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왔는데 굶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연구가 부족하고 궁구가 부족하고 정도가 유치해도 일심정력을 기울여 공만 들이면 그 강도(講道)는 하나님이 가르치게 하는 것이다. 강단을 아무나 가르치게 양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 번 이단을 가르쳐 놓으면 여독이 심하다.
일꾼이 되려면 먼저 믿고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가 먼저 실행하고 자기를 만들어 정직하고 진실하고 사람이 되어 가르칠 때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아서 믿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실행치 않고 입으로만 가르치니 마귀의 종이요, 자기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니 못된 것 가르쳐 놓으니 결단날 일만 해놓는 것이다.
일꾼이 된 자는 피땀을 흘리지 아니하고는 못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실행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얼마나 실행하는가? 앵무새와 같이 가르치고 지식으로만 배워서 가르치니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도를 가리우는 것이다.
교인의 사정을 함부로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른이고 인도자인데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나오는 자를 모두 성자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너무 다 잘 만들려다 낙심하기 쉬우니까 교인의 처지를 보아서 차차 잘 인도해야하며, 자라기를 바라고 길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완전하여도 쓰시는 것이다. 쓰되 길러가면서 쓰시는 것이다. 자기가 의로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될 것이며 회개하고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진저.
목자는 파수꾼이요 목자이니 나보다도 양을 위하여 바로 자기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본능이며, 내가 희생하는 것이 교인을 살리는 것이며 즉 나를 살리는 것이다.
교역자는 교회 일을 볼 때에 사람을 의지하여 일하면 안되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배척하고 사람이 교회를 세우려하니 되지 않는 것이다.
교역자는 남의 생명을 맡은 자이니, 육신의 오락을 취하지 말고 희생해야 한다.
자기가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이 은혜가 되고 힘이 된다.
강도를 할 때 은혜를 받아 신자가 좋아한다. 그러면 자기가 잘 한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감동인가, 행위가 변화하는가 보라.
4) 장로에 대한 교훈
장로가 교회를 지어서, 쥐고 펴고 하는 것이면 이는 장로가 할 일이 아니다. 장로가 교회의 주인도 아니며 목사도 주인이 아니요, 주인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금일 장로는 주인이요 목사는 품팔이꾼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만일 장로를 책망하면 받지 않고, 목사를 쫓아내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이다. 현재 장로는 권세를 부리고 교회 주인 노릇하여 일꾼 내쫓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장로가 장로일을 못하면 장로가 교회의 분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5) 전도부인(전도인)에 대한 교훈
이북에서는 권사, 이남에서는 전도사라는 명칭을 교회에서 결정하였다.
현재 전도 일 안 하는 자를 성직 명칭으로 부르지 말라.
가난한 집에는 더욱 자주 가야하며 돕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니되 입이 무거워야 하며 필요 없는 말은 아니해야 한다.
흠점이 보이거든 자기가 권면하여 들을 만 하면 하되 못할 것 같으면 목사에게 말해야 한다.
목사의 흠집을 교인에게 말하면 안 된다.
목사의 잘못이 있으면 직접 와서 목사의 잘못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거든 자기가 거기 있지 말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낳으며, 목사를 추방하는 것이 성공했다 할지라도 후에는 벌받고 자기도 쫓겨나게 될 것이다.
충실히 일하지 않으면, 섭하지만 보내야 한다. 정이나 체면을 못 이겨서 두어두면 그 사람 망하고 교회 망하는 것이다.
전도인은 목사의 신앙 사상과 같아야 되는 것이다. 사상이 같지 않으면 진리의 혼란을 갖게 될 것이니 안될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그 밑에서 전도일을 할 마음이 있으면 신앙적 사상과 은혜를 받고 마음으로 주안에서 심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신자에 대한 교훈
부모는 육신을 기른 자이나 일꾼은 나의 심령을 기르는 자인 줄 알고 영혼의 선생인 줄 알고 고맙고 감사함으로 배워야 한다.
실행하기 위해 배워라, 말씀을 지식으로만 배우게 되면 양심의 자유를 못 누리니, 듣고 실행해야 한다.
예수 믿는 데 폐물된 사람, 아무데 가나 사람 노릇 못한다. 이 좋은 교훈 배우지 못하는데 어디 가서 사람 노릇 하는 것 배우겠는가?
사람 노릇하려면 용서하고 참고 견디고 용납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교회 일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책망과 옳은 말을 해주면, '고맙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지 아니했으면 캄캄한 데 행할 뻔하였는데 가르쳐주시니 참 감사합니다'할 것이다.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 양심 쓰는 마음, 이것 먼저 만들라. 먼저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 만들어 나가는데 힘써라.
자기가 타인에게 좀 났다는 칭찬을 받는 자, 정신 차려야 한다. 잘못 하면 자기의 의(義) 그것만 의지하니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바른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음식을 먹되, 덕을 세우기 위해 먹고 유익하려고 먹는데 해되게 먹으면 안된다. 먹을 때에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식물에 대한 절제, 이것도 선한 싸움이다.
기술과 지식만 배워 가지고는 안된다. 인격이 없으면 그것은 악하기 때문에 자기를 망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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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자료]
아현교회 사경회(1958. 4. 25.- 5.1) 강도집 중에서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계명이다.
그 계명은 생명이다. 따르면 살고 따르지 않으면 죽는, 생사가 걸린 하나님의 말씀이 계명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영원히 사는 것이지요.
계명은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는 말씀을 통해 오는 것인데, 그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요,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는 까닭은 말씀으로 자격자되게 하여 종내에는 예수님 닮아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실행이 되고 힘이 나지요.
[요일 3:5] 말씀을 실행하면 영혼이 자라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니 사랑이 그 속에서 완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씀을 주시는 것인데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은 말씀을 실행할 시, 오는 말씀을 자꾸 실행하니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 근본 영혼이 말씀으로 지음 받았기에 말씀을 실행하면 영혼이 완전해지지요. 자만심을 버리고 은혜 받는데 맘을 두고 회개하고 말씀 받기를 사모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요일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예수 닮아가는 것이 귀중한 줄 알진대 좇아가는 소망을 가지고 일심정력 삼가조심하여 구원을 이룰 것이라.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신력을 가져라. 정확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기억하라!
예수를 믿은 후로는 닮아가게 힘쓸 것이라. 믿으면 증거가 있는데 왜 힘쓰지 않는가?...
예수님을 닮아갈려고 애를 바둥바둥 쓰다가 예수님을 닮아가니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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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교회 대신 가난한 교인 집 마련
김현봉목사 (1884~1965)
◀ 김현봉 목사
서울 마포구 아현2동 354-21 아현교회는 1960년대초까지만도 영락교회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신자가 많았다. 하지만 아현교회는 멋진 예배당도 교육관도 목사관도 없었다. 날로 늘어나는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면 예배당 밖으로 지붕만 얹고 의자를 놓아 예배를 보게 했다. 그렇게 늘리고 늘린 교회는 마치 기운 누더기 같아 그 주변 200여 채의 판잣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현교회의 그런 모습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아현교회는 그 일대 판자촌의 상당수를 소유할 만큼 재정적으로 풍족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신 판잣집을 사들여 집 없는 교인들에게 나누어 살게 했고, 먹고살 길이 없는 교인들에겐 뒷돈을 대줘서 소금이나 고무신, 생선 장사를 해서 먹고살게 했다.
그런 교회를 만든 이는 김현봉(1884~1965) 목사였다. 작은 키, 땅땅한 몸매에 눈매가 매서웠던 그는 언제나 머리를 삭발하고 있었다.
그런 김 목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촌 창광교회와 염천교회?신촌교회 등을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 김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전도사로서 보좌했던 이경자(78) 전도사를 만나러 창광교회를 찾았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 젊은 이 전도사는 김 목사에 대해 “얼굴에서 언제나 사랑이 지글지글 끓었던 ‘사랑의 사도’였다”고 전했다. 김 목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김 목사만큼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오후 6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에 일어나 묵상을 했고, 새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곧바로 연세대 뒷산에 돌로 만들어놓은 기도실로 올라갔다. 그는 그렇게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점심 무렵까지 깊은 황홀경에 잠겨 있었다. 김 목사의 기도의 삶을 따라 그대로 실천해온 창광교회 이병규(83) 목사는 김 목사가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살았다”고 회고했다.
나중엔 아현교회의 수많은 신자들까지 김 목사를 따라 나무 하나씩을 정해 그 밑에서 정좌한 채 명상에 잠겨 연세대 뒷산 일대는 장관을 이뤘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동네에서 방앗간 하나 놓으려고 해도 동민들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못 놓는 법이라면서 기독교인들이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부흥회라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해 이웃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찬송은 하나님과 연락해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지 자기 육체가 흥분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교회 지하방 살며 ‘1식 3찬’…허세 용납 않은 ‘사랑의 사도’
김 목사는 산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교인들에게 심방을 갔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안부를 여쭙는 문전 심방이었다. 대신 살림이 어려운 교인들 집에선 방에 들어가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지 바닥을 만져보고 쌀독을 들여다본 뒤 도움을 주었다. 그는 늘 안주머니에 돈을 가득 담아 갖고 다니면서 즉각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겐 돈을 쓰지 않았다. 평생 교회 지하의 방 한 칸에서 지낸 그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못하게 했다. 옷도 두루마기만 입고, 고무신만 신었기에 달리 돈 들 일이 없었다.
김 목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2살 때였다. 그는 양정의숙 법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일제하 조선의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다가 중국으로 떠나 간도와 러시아 등에서 11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1923년 귀국하자마자 체포돼 투옥됐던 그는 석방된 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44살 때 16살 연하의 세브란스 간호사를 만났다. 얼굴이 얽었던 그의 아내는 병으로 이미 자궁을 적출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으나 그는 그런 아내를 택해 결혼했다.
그가 아현교회를 개척한 것은 48살 때인 32년이었다. 아현교회에선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교회도 그렇거니와 신자들의 사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삭발했고, 여자들은 파마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결혼식도 20명 이상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24시간이 지난 뒤 김 목사가 예배를 올린 다음 손수 시신을 손수레로 끌고 가 화장을 했고, 아이가 죽어도 김 목사가 직접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묻었다.
65년 그가 숨을 거두자 교인들은 그의 뜻에 따라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가 화장했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그의 뜻을 지키는 교인은 없었다. 1200여 명의 교인들은 손수레를 따르며 통곡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목회자를 이제 어디서 다시 찾겠느냐는 눈물이었다.(2007. 8. 2. 뉴스앤조이 / 조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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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yongje/5787186
자료제공자 : 윤사무엘목사, 청암논단, 한국교회 경건인물들(3)
김현봉목사님에 대한 자료는 총공회 연구실에서도 관심을 갖고 많이 확보하고 있지만
이번 자료에서는 총공회에서 제공한 자료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이 있어 한번 참고자료로 올려 봅니다.
7-3 김현봉(1884-1965)8)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김현봉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소천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어 막내로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예배가 마친 후 목사께서 청년 현봉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하고 대답을 한 것이 예수 믿게 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
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돌보게 되었다.
재학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다.
드디어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사상태에 빠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일본, 만주 등으로 흩어지고,
국내에 있던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 ?’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다.
6.25가 발발하자 김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
70의 나이에! 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 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내기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
김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김목사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소천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김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감화를 받고 김 목사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중에 이병규(신촌), 백영희(부산 서부교회), 안병모, 이한영, 안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안길옹 목사(2001년 현재, 85세)는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있는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안정남목사(나성 성약교회)도 김현봉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9)
김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81세의 일기로 김현봉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였다.
장례식은 늘 따르던 이병규 목사(신촌 창광교회, 계약 신학교를 운영함)가 집례했고,
시신은 생전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그 뒤를 1200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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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발굴>
검은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의 -
김현봉 목사 생애와 사상
이 영 호 목 사
(전 현대종교 편집인 겸 편집국장)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단성 여부와 관련해서 손꼽히는 인물들이 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리 주현교부 이 모 씨의 나체춤 사건을 기억하리라고 본다. 나체춤을 추었다는 이모씨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빡빡 머리에 늘 흰 고무신을 신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는 아현동의 김현봉 목사였다. 그런데 이 김현봉이라는 목사가 교분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바로 맨발의 성자라는 이현필 이고, 한국에서는 종교 다원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유영모와 어울리는 사람이 이현필 이였으며, 이들에게 커다란 감화력을 끼쳐 본을 남긴 사람은 이세종이라는 분이었다. 본지는 그동안 유영모, 이현필, 이세종, 전라기인 거두리 이보한의 발자취를 간추려 소개한바 있다. 이글에서는 김현봉 목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특별히 물량주의가 교회안에 팽배한 현실적 상황에서 여기 소개하는 김현봉 목사의 검소한 복음 주의적 삶을 면밀히 살펴 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 김현봉 목사의 생애
김현봉 목사는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태어났으나 성장은 서울 서대문에서 했다. 위로 형님 한분과 누나가 한분 있어 삼남매였는데 형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러시아 영으로 가고 누나도 시집을 가 청년 시절에는 낙원동 무관에 나가서 검도와 유도 등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그러던 중 세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예배후 목사가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 라고 말하자 “예” 대답을 하게되어 그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가게 된 것이 계속 나가게 되었다.1)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과연 내가 이나라를 위해 할일이 무엇인가?” 로 고민 하다가 ‘독립운동’을 결심해서 1912년 당시 Y.M.C.A 총무였던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을 들고 중국의 서간도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학교를 세워 한국인 2세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얼마후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그곳에서도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후 일본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때 그의 복장은 중국복장에 길게 댕기를 내린 상태였다.2)
그는 출감후 러시아 영내의 한인노회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1923년 이었고 김현봉의 나이 40세였다. 김현봉의 신학생 시절은 키도 작고 말도 잘 할줄 몰라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으나 남다른 학생이었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조용한 구석을 찾아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못하는 운동이 없어 신학교 시절의 복장은 정구복장 차림이었다. 그는 재학중이면서도 경기도 시흥군 일대 여러 교회들을 돌보며 공부를 했고, 1928년 제23회 평양신학을 졸업을 한후 서울로 오면서는 남대문교회 오순영 목사의 추천으로 공덕리교회를 맡게 되었다.3)
윤남하 목사가 소개한 이때의 시무교회는, 시흥군 서면 하안교회(현 광명시 하안동), 부림말교회(현 안양시 관양동 동은교회), 삼성교회(현 군포시 부곡1동), 모래말교회(현 영등포구 도림2동 도림교회) 가리봉교회(현 구로구 가리봉동), 군포교회(현 군포시), 학천교회(현 안양시 부림말교회에서 약 3키로 가량 덜어진 곳), 양평교회(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4가) 시흥 구읍교회(현 구로구 시흥1동 시흥교회) 였는데 김목사는 이렇게 주일 하루에 9교회를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했다. 이렇게 하면서 신학교 입학한지 5년만인 1928년에 신학교를 졸업했다.4)
김목사는 6.25 사변때 본의 아니게 39일 간의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6. 25가 터지자 급한 김에 한강을 넘지못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우선 삼각산으로 피난을 갔었다. 김목사도 삼각산을 헤매다가 자그마한 굴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이굴을 자기 피난처로 삼아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양식을 아껴 먹으면서, 솟아나는 샘물을 생명수로 삼아 지내게 되었는데 식량이 다하자 자연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근처에는 인민군의 군화발소리가 들리고 그래서 소리내어 기도할수도 없었고 기침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금식기도를 39일이나 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굴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그의 몸은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미라처럼 되어 부인 박천선 사모 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유엔군의 1.4 후퇴로 대구를 거쳐 창녕교회서 戰時 목회를 하다가 1953년 11월 17일 상경하게 되었다.5)
1995년경부터 김현봉 목사가 1965년 소천해 장례 주례를 하기까지 했던 이병규 목사가 펴낸『김현봉 목사 강도집(설교집)』에 <김현봉 목사님의 이력서>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1884년 출생, 1906년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3인과 함께 집회 출석(입신 22세), 1910년 한일합방때 일제의 감시 받음, 1912년 양정의숙 법과 졸업후 배화학교 교편생활하던 도중 일제의 더해가는 감시를 피해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 들고 중국으로 망명(1912-23년), 1912년-23년 간도 및 북간도와 아라사(러시아 영토)를 두루 다니며 애국운동과 학교 교편잡고 인재양성에 용력(用力). 연해주 해삼위에서 거주했음(망명생활), 1923년 귀국시 서울역에서 체포되어 투옥됨(39세), 누님과 생질이 보증서고 보석함, 1923년 출옥해서 평양신학교 입학(39세), 1927년 43세시 평양신학교 23회 졸업, 1923년-27년 평양신학 재학중 평북 정주교회, 관악 보림말교회, 시흥 구읍교회, 조사시무, 1928년 목사 안수받음(44세), 1928년 6월 16일 16세 연하인 세브란스 간호원 출신 朴天善 양(1924년 진명여학교 졸업. 1944년 간호원직 사면)과 결혼. 1932년 3월 30일 성수주일 문제로 공덕교회 사면, 7인과 더불어 아현예배당(교회) 개척개시(48세), 1953년 고려파 38회 총회에서 제명됨(69세). 이후로 교회 자유의 개교회의 특성을 살려 교회가 부흥됨. 1950년-1953년 삼각산 동굴에서 39일 동안 금식케된일 있음, 영성이 놀랍게 신장되고 영력있는 강도 말씀에 교인의 수가 늘어남(경남지방에서 피난생활), 1964년까지 전국 각처에서 사경회 인도하심, 1965년 3월12일 오전 9시경 자택에서 별세(81세-동년1월 흥암교회 사경회 도중 졸도하셨음) ◎ 유족 및 친척: 형님 김현의, 누님 각1분(3남매) 생질 김창선 등. ◎ 취미 및 운동: 정구, 유도, 격권. ◎ 동지 및 친구: 김도태, 변영태. 어학: 중국어, 러시아어 능통.6)】
2. 아현 예배당 목회
본지에 기고했던 윤남하 목사의 아현예배당 탐방기에 의하면, “김목사의 키는5척 5촌쯤 되는데 먹물들여 해입은 옷이라 여름인고로 중의 적삼 조끼, 게다가 단추단 두루마기를 입었다.” 고 표현하고 있다.7)그 무렵 세브란스병원 간호원 이었던 28세의 처녀 박천선과 결혼을 하였는데 때는 김현봉의 나이 44세였다. 결혼 직후 그는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1932년 3월 31일(수) 그는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아현동 37번지에서 일곱사람을 데리고 아현예배당 개척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를 개척한 아현동 37번지는 소나무가 꽉 들어찬 공동묘지였는데 정부에서는 이나무들을 베어내고 서울 장안의 빈민들을 이지역으로 이주 시켰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새끼줄을 쳐서 땅 10평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곳에 개척한 예배당은 방 2칸, 마루 2칸, 건너방 1칸을 헐어내어 사용하게 되였다.8)
김현봉 목사는 공덕교회에서 약 1년간 목회를 하던중 자기의 뜻을 펼칠수 없어 독립교회를 세우기로 마음 먹은 것인데, 이때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는 일곱 사람들은 김목사 내외, 장모, 그리고 오응렬, 구영식, 김정은 집사 또 경상도 사람 오씨 등이었고, 그때는 1932년 3월 31일 수요일 이었다고 한다.9) 이병규 목사가 기록한 이력서에는 김현봉 목사가 개척한 날이 3월 30일이라고 하는데 윤남하 목사는 31일(수) 이라고 하고 있다. 30일 31일의 차이는 누군가가 잘못 들은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1918년 일제가 우리나라에 신사를 들여오고, 1925년에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고, 그후 전국 각지에도 신사를 세웠다. 1930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게 심각한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인데, 마침내 1938년 제27차 장로회총회에서 심사참배를 가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래서 신사참배 통지서가 배달되면 교인들에게 일체 광고를 하지 않았고 김목사 혼자만 알고 지내는데, 이사실을 알게된 일본 형사가 김현봉을 찾아왔다. 그때 김목사는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 양쪽에 변을 담아 지고가고 있었는데 형사가 부르자 가다 말고 땅만 쳐다 보고 있었다. 형사는 그의 하고있는 일과 누더기 차림의 모양새를 한참동안 쳐다 보다가 말없이 가버렸다고 한다.10)
『좁은길로 간 사람들』의 저자 엄두섭 목사는, 아현교회에는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고 한다. 교회간판, 종각.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도 없었고, 김현봉 목사와 교인들은 사치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들복던 그시절에도 아현교회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한다.11) 이교회에 없는 것 여러 가지를 앞서 말했거니와 다시 덧붙여 말하는 것은 300여명이나 모이는 교회에 장로가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제직도 처음에는 세웠고 제직회도 있었으나 모이면 의논이 백출하여 김목사의 뜻에 맞지 않는 지라 하루는 교회앞에 “나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완전한 집사 자격’ 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대로 있고 그렇지 못한자라고 생각되거든 다 사표를 제출하라”고 하여 전부 사표를 받았다. 그런데 다 사표를 냈는데도 백 모 집사 하나만 사표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후부터 일체 집사라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대신 헌금 걷을때, 주일학교 선생을 반장이라고 불러 그들이 헌금을 걷는데만 수고 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김 목사에게 헌금 일체를 계산도 않고 맡겨 버리고 만다.12)
이교회를 탐방한 윤남하 목사의 탐방기에 의하면, “예배당 안을 휘 둘러보니 기둥만도 스물네개. 교인들은 약 300여명. 남자는 머리를 깍았고 여자들은 쪽을 지어 파마머리는 구경할수가 없었다. 남자들의 옷은 그당시 흔해 빠진 서양 구제품 양복이요 여자들의 옷은 검정치마에 흰저고리 뿐이다. 들러보니 강대상이 없고 피아노도 풍금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의자도 없으니 교인들은 전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강대상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h 형 의자가 하나 놓여있어 그위에 떡하니 두다리를 개여놓고 양반식으로 목사는 앉아 무릎위에 성경을 펴놓고 한손에는 파리채를 들고 앉아 있었다”13) 고 한다.
이집은 본래부터 성전으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집 한 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식구가 늘면 동편으로 늘리고, 식구가 더 늘면 서편으로, 또다시 남편으로, 북편으로 늘려 놓았으니 도무지 성전 같지가 않았다. 이교회 증축공사(?)도 전문가에게 시키지 않고 김목사 자신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틈으로 바람이 몹씨 불어오고 비올때에는 이음새 자리로 비가 새기 때문에 양푼들을 늘어 놓고 물을 받아가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14)
윤남하 목사의 예배 참관기에 따르면 “그날 성경 말씀을 하시는데 문제나 포인트가 있었는지 잘 기억되지 않고 오직 본문 강해 설교를 하시는데 재미있는 곳에 이르면 10분, 15분씩 강의를 하신다. 어린애 우는 소리가 없고 사담하는자 조는자가 신통히도 없다. 그대신 파맇 리 한마리가 날아오면 손에든 파리채로 탁! 하고 때려 잡는다. 또 여름이라 더운때여서 졸음이 오면 눈깔사탕이라도 빨아가면서 졸지말고 예배를 드리라고 권한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신앙적 삶에 초점을 두고 설교와 목회를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15)
윤남하 목사의 글에 의하면 “이교회는 김현봉 목사 혼자의 독자 강단이라 남을 세우지 않는다. 그대신 부흥회가 없으나 1년에 두 번씩 1월 15일부터 5일간. 8월15일부터 5일간 관악산에 있는 벧엘기도원으로 전원 인솔하고 가서 자기 혼자 다 인도, 주장, 지휘해 버리고 만다. 그런때에도 여름이라 더위에 조는 사람이 생길까봐 졸리거든 사탕을 물던지 땅콩이라도 까먹어 가면서 졸지 말고 예배드리라 한다. 또 강해후 헌금까지 하는데만 거의 두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설교중에나 기도중에 일체 ”아멘“ 이나 ”할렐루야“ 가 없고 웃음 소리나 기타 아무 소리도 없이 정숙하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은 두시간여의 예배인데도 지루하지 않는 듯 하다. 참으로 신통하다.”는 것이다.16)
윤남하 목사의 탐방기에 의하면, “오전 예배는 장장 3시간이나 걸렸고 예배 마친후에 가까운 곳에 사는 교인들은 집에가서 점심을 먹고 오고, 안가는 사람들은 그대로 눌러앉아 구수 한 그릇씩 나눠 먹고 오후 2시 예배에 참석한다.” 고 한다. 요사이 도시교회들의 저녁 예배가 거의 오후 예배로 변했으나 그당시 오후 예배는 아현 예배당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듯 하다. 이에 대해 김현봉 목사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려면 하루종일 드려야 될터인데 저녁예배로 드리게 되면 오전 예배후 부터는 맘대로 지내다가 저녁예배 참석이 부실할뿐 아니라 세상에서 오염된 그 정신으로는 거룩하게 예배드릴수가 없기 때문이오” 라는 것이 김목사의 판단이었다.17)
3. 중매와 결혼식
김현봉 목사의 결혼 이야기는 너무도 특별하다. 공덕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사는 되었으나 교회는 총각목사라고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를 공덕교회로 소개한 세브란스 구내에 있는 남대문교회 오순영 목사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조건은 두가지 (1) 간호원 이어야 하고, (2) 얼굴이 못나서 시집가지 못하는 처녀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목사는 적당한 규수가 있어 맞선 보기로 양쪽에 연락을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도록 했는데, 맞선볼 처녀에게는 걱정이 하나 있었다. 혼자 나서 가기 가 여간 쑥스러운 것이 아닌지라 들러리 친구 한 사람을 데리고 가려고 하니까 다 자기보다는 얼굴이 잘생겼는지라 잘못하다가는 혼처를 빼앗길 염려가 있어 고심끝에 자기보다 더 못나 시집 못가는 간호원 하나를 데리고 맞선을 보기로 했다. 이래서 처녀는 친구를 데리고 약속된 장소에 미리나와 있는 김목사를 만났다.
이때 김목사는 같이 따라온 그 못난 처녀를 유심히 주목 하더니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다. “저는 이 간호원 친구예요” 하고 대답하니 “당신은 결혼 했오?” “하도 못생겨서 데려가는 사람이 없어 아직 못 갔어요” 라고 대답했다. 이말을 들은 김목사는 정작 선보러온 처녀는 제쳐놓고 들러리로 따라온 처녀에게 “당신 나하고 결혼 합시다.” 청혼을 해서 결혼을 하게된 것이다.
이 처녀가 사모 박천선(1901-1987)이었는데 얼굴은 빡빡 얽었다. 그는 일찍이 황해도 신천 가난한 과부의 외동딸로 얼굴과는 달리 천성이 착한 이였다. 이때 김목사는 44세요 부인은 28세였다. 김목사 부부는 33년간이나 동거했으나 금욕생활을 굳게 지켰다. 김목사는 늘 성직자의 생활은 성생활을 초월하여 깨끗이 사는 것이 신앙생활에 더 낫다고 가르쳤을뿐 아니라 자신이 이를 철저히 실행했다.18)
윤남하 목사가 벧엘기도원에 가서 한 청년을 간호하는 처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목사님이 적당하게 생각되시면 교회에 광고하기를 결혼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아무날 몇시에 교회로 다 모이라 하신다. 그에 따라 처녀 총각들이 모이게 되면 성경 말씀으로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말씀으로 간곡히 가르치신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 김목사의 명령에 따라 절대 순종 하도록 명하신다. 그리고 모여 앉은 남녀들을 죽 둘러 보고서는 총각과 처녀를 지명하신다. 그리고선 둘이 결혼 하라 명하시면 그것으로 중매는 끝이난다.” 고 한다.
그리고 약혼식은 반대하였고 결혼식만 하도록 가르쳤다. 동시에 위와 같은 약혼은 됐어도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는 결코 따로 만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한번은 자기 교인 결혼식에 어느 목사가 따라 왔다가 “목사님은 뭐하려고 따라왔오” 하여 그 목사는 몹시 무안해 한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어디까지나 허례허식을 멀리했다. 그래서 드레스는 물론 화관쓰는 것 까지도 철저히 배척한 것은 물론 경제적 이었다.19)
윤남하 목사의 이교회 탐방기에 이르면, 김목사가 위자에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광고를 하는데 “우리교회에서 누구든지 결혼식을 하고 내게 주례를 받으려면 그날 결혼할 신랑 신부는 헌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국수 세그릇 준비하여 신랑 신부 주례목사가 한그릇씩 나눠 먹도록 간소히 할것(나중에는 주례자용의 국수 찬그릇 까지도 생략했다.) 그리고 화관이나 너울도 절대 사용하지 말것. 그게 싫으면 우리교회에서는 예식을 말고 다른 곳에서 할 것” 이라고 광고했고, 또 “우리교회에서 장례식이 있어 내게 집례를 원하려 하면 시신을 수례에 싣고 화장터(그당시 화장터는 지금의 벽제가 아니라 홍제동 이었다.) 까지 영구차를 빌리지 않고 걸어가면 내가 가서 집례해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곳에 가서하라”고 까지 광고했다고 한다.20)
4. 그의 일상생활
김현봉 목사의 목회 생활은 남달랐다. 저녁 9시쯤 보따리를 짊어지고 산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다음날 아침 6시쯤에 집에 들어와 냉수 마찰을 하였다. 그리고 8시면 심방을 나갔다. 후에는 저녁 6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1시에 기상해서 바로 식사를 하고 묵상하다가 통금이 해제되자 마자 연세대학 뒷산 봉원사 쪽으로 기도하러 갔다.21)
그의 일상생활은 규칙적인 생활임과 동시에 다른 생활을 해오신 분이다. 윤남하 목사의 탐방기에 의하면, “오후 5시에는 잠자리에 들고 아침밥은 새벽 3시에 먹고나서 오전 4시에(그당시는 밤 12시부터 통행 금지가 시작되어 오전 4시에야 해제가 되었다.) 문밖에 대기 시켜둔 택시를 타고 연세대 뒷산에 올라가 기도와 성경을 읽고 명상으로 근 9시까지 지내다가 집에 와서 9시가 되면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가 되면 저녁을 먹는 생활을 했다.” 고 한다.
그의 생활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윤남하 목사가 기술한바에 의하면, “그의 밥상에는 언제나 팝밥 한그릇(그는 팥밥을 즐겼다.)과 김치 한접시, 된장국 한그릇 외에는 더올려 놓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홍당무가 몸에 좋다고 하여 즐겨 먹었다. 동시에 건강에 좋다는 시금치와 사과도 맛있게 먹었다. 그의 밥상을 봤을때 인도의 간디처럼 철저한 채식주의자임을 알수 있다.” 고 하며 또 사탕도 즐겼다고 한다. 22)
김목사는 교인들이 신앙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완전히 자립하도록 애써 가르치고 힘을 다했다. 그는 남의 도움을 절대로 빌리지 않았다. 자기 일은 끝까지 자기가 하기에 죽을때까지 건강을 유지했다. 매일 냉수 마찰을 했고 자기등의 때를 벗길때에도 남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81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심지어 이발 기계를 사가지고 자기 머리까지도 자기가 해결을 했다.23)
5. 김 목사의 구제생활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이곳은 서울시 공동묘지 이기도 할뿐 아니라 서대문 근처 빈민굴에서 화재를 당한 사람들을 몰아넣고 한 사람에게 10평씩의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한 빈민촌이었다. 생활비는 세브란스 병원 박천선 사모의 수입으로 충당할수 있었으나 김목사 자신도 나무틈 곳곳에 땅을 일구어 거기에다 채소를 심고 호박, 가지 등을 심어 찬거리는 자급할수 있었을뿐 아니라 이웃사람들과도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갔었다. 교인이 하도 없으니 예배시간 전까지 문밖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의 손을 잡고 “한번 듣고 가시오” 하고 강권전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차츰 교인이 늘어가자 벽을 털어 예배당을 늘림과 동시에 작은방 여러개를 만들어 나그네들도 들어와 자고 가도록 했다.
나중에 교인수가 백여명이 넘게되자 헌금은 최소한도로 교회비용을 쓴후에 모으고 모아 방이 여러개 있는 집을 샀다. 그리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방에 기거하게 했는데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1. 생활이 펴질때까지 이곳에 살 것. 2. 돈 만원을 주면 고운소금 장수를 부지런히 할 것. 3. 언제나 주일은 꼭 지킬 것. 4. 수입의 십일조는 꼭 바칠 것. 5. 구제품 우유통에 꼭 성미를 바칠 것. 이래서 서울시내 고운소금 장수들은 거의 아현예배당 신자들이었다. 이같이 하여 사들인 집이 40여호나 되었다. 김목사의 목회방법은 복음 전파와 구제사업이었다. 그는 교회돈을 제직들이 거두어다 주면 그대로 받아 벽장 속에 넣어 두고서 의지할곳 없는 교인들을 살필 집을 사는데와 구제하는 데만 적극 사용하였다.24)
6. 영향을 받은 사람들
김목사로 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특히 김목사의 정신을 이어 그 정신대로 목회를 하는 목사 내외가 있다. 그는 안병모 목사와 정귀실 사모다. 정귀실 사모는 이화대학교 약학대학을 나온 약제사이다. 안목사는 예전부터 다니던 동대문 밖 동신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김현봉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꼭 한번 안수를 받고 싶어서 김목사로 부터 안수기도를 받고나서 부터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에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 김현봉 목사가 “우리교회에 나오시오” 하는 말에 “예”라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남편과 함게 나가게 되었고 마침내는 군목을 사임한후 부부가 충실한 김현봉 목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지금은 이화대학교 입구 건너편에다 신촌예배당이란 간판을 걸고 교회를 인도하고 있다. 안목사도 머리를 빢빡 깎았고 허름한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 사모도 머리는 쪽지고 값싼 무명옷을 입고 김현봉 목사의 신앙정신을 따르고 있다. 이교회 역시 십자가도 없고 피아노나 성가대나 강대상이나 종탑도 없다.25)
윤남하 목사가 말하는 추종자들은 또 있다. 김목사 사망후 1,200여명의 교인중 반수 이상되는 680명을 데리고 창광교회를 세운 이병규 목사가 있고, 150여명을 데리고 신촌에배당을 세운 안병모 목사가 있으며, 150여명을 데리고 염천교회를 세운 이한영 목사도 있으나 본교회에 그대로 남은 교인들도 있다. 그러나 본교회는 김목사 식대로 머리를 까고 검소한 옷을 입고 예배하는 모습은 찾아볼수 없다. 이 네곳중에 가장 양적으로 발전한 곳은 창광교회로 교인 2천여명이 넘는다. 김목사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 숫자상으로 세계제일의 유년 주일학교를 지도하는 부산의 총공회파의 백영희 목사가 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 휘두른 칼에 맞아 새벽예배를 인도하다가 1990년에 순교를 했다.26)
7. 마지막 임종과 장례
1964년 12월에 김현봉 목사는 감기 기운이 있는데도 아현동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면서 뒷머리를 땅에 부딪혔다. 그때 마침 흥암교회로 사경회 인도차 떠나려던 참이라서 식구들이 몸이 불편하니 집회를 연기하도록 전보를 보내려 해도 안된다고 우기면서 예정대로 출발하였다. 당시 흥암교회는 교회노선 대립으로 내분이 일어나 있었다. 김현봉 목사는 그 교회를 맡고 있는 조사로부터 사정 이야기를 밤늦게까지 듣고 김조사를 훈계하고 어려워도 그 교회에 더있으라고 권면하며 함께 부등켜 안고 울었다. 그런데 그이튼날 새벽 3시반에 김조사가 방문을 노크해 봤으나 숨소리는 들리는데 대답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요위에 앉아 벼개를 의지하고 기도하다가 쓰려졌는데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간신이 위기는 넘겼으나 이로부터 3개월후 1965년 3월 12일 9시 50분 김현봉 목사는 주의 부름을 받았다. 장례식은 그를 따르던 이병규 목사가 집례했고 시신은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커에 실어 끌고가 화장 했다.27)
김현봉 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썻다. 신촌 창광교회를 섬기면서 계약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이병규 목사가 있다. 또 동지의 한사람으로 부산의 고 백영희 목사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바지, 저고리를 입고 삭발하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철저히 김현봉 목사를 닮아 보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안병모 목사와 이한영 목사라고 할수 있다. 28)
【참 고 도 서】
1. 이병규 편.『김현봉 목사 강도집(설교집)』염광출판사 간. 2004.(김현봉 목사 사진)
2. 엄두섭 편.『좁은 길로 간 사람들』 소망사 간. 1985. p.185-190
3. 엄두섭 저 『영 맥』 은성 간. 1989. p.103 - 164
4. 엄두섭 저.『호세아 닮은 성자』 은성 간. 1987.
5. 정봉기 《김현봉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장로회신학대학 2001 석사논문.
6. 《현대종교》1991. 10월 김현봉 이야기. p.68 - 82
7. 《현대종교》1991. 11월 김현봉 이야기. p. 188 - 197 (김현봉 목사 사진)
8. 《현대종교》1992. 01월 김현봉 이야기. p. 196 -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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