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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작은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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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권여선은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땄을까?
-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고……. -
글꾼24기 채수지
권여선이 정원을 만들 때까지
권여선은 1965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수료했다. 1996년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고, 2007년 제15회 오영수문학상 수상하고,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푸르른 틈새(2007)」, 「분홍 리본의 시절(2007)」, 「순수한 영혼 마릴린 먼로(2005)」, 「처녀치마(2004)」 등이 있다. 가장 최근인 2010년엔 세 번째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을 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 「사랑을 믿다」를 포함해 표제작인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빈 찻잔 놓기」, 「당신은 손에 잡힐 듯」, 「K가의 사람들」, 「웬 아이가 보았네」, 「그대 안의 불우」,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 쓰는 수법
“물구멍 없는 화분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모르지?…생략…심지어 이 만두도 말이야. 안에 특별한 흙을 조금 담고 부추 씨를 심으면 훌륭한 미니 화분이 될 수 있지. ”
“그렇다면 방도?”
권여선의 이야기는 항상 음식으로 시작한다는 말이 종종 있다. 그 예로 이상문학상 수상작 「사랑을 믿다」도 포장마차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내 정원의 붉은 열매」역시 내용의 첫 시작은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 현수가 만두집에서 만두와 와인을 먹는다. 그런데 이때 현수가 불현듯 말한 물구멍 없는 화분은 교묘하게 주인공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가 된다. 주인공의 입에서 ‘문득 저런 물음이 튀어나오게‘ 말이다. 이러한 ’문득 떠오르는’ 장치는 주인공이 현수와 헤어져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에도 종종 작용한다. 예를 들어서 택시의 방향이 심하게 흔들렸는데 뜬금없이 “그 방을 지나갑니까?”라던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작품이 마무리 될 때에도 쓰인다는 것이다.
만약 산타가 아니라 P형이 그날 밤, 그 비스듬한 화분 방에서 몸을 살짝 기울여 내 귀를 버찌 열매처럼 빨갛게 물들이며 이렇게 속삭여주었다면 어땟을까.
택시 기사가 보았다시피 한겨울 새벽 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심야 택시의 묵시록적인 관통 속에서 휙 지나가듯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다.
위의 내용은 작품의 끝 마무리 때 쓰여 있는 글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화분이나, 택시의 속도 등의 장치가 작품을 통해서 의미를 가지고 끝맺음을 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에게 있어서 물구멍 없는 화분은 P형의 방인 셈이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는 택시의 속도는 주인공의 사랑의 속도이기도 한 것이다.
몰입하게 되는 이유
「내 정원의 붉은 열매」가 가진 최대의 매력은 눈에 보이는 듯 자세한 묘사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떤 글이든 묘사나 내용이 디테일 할수록 몰입하게 된다. 그 방면에서 이 글은 인공적인 소설이라기 보단 권여선이 직접 겪은 가슴 떨리는 연애 이야기 같다.
P형과 나는 창가 가까운 테이블 끝부분에 마주 보고 앉았다. 창 쪽에서 스며든 햇빛이 창틀 밑에 놓인 커다란 고무나무 화분을 지나 테이블 한쪽 면에 간신히 다다르려 애쓰고 있었다. 창가의 빛이 닿을락 말락하는 타원형 테이블의 둥근 부분과 나와 P형 사이의 선분을 잇는다면 멋진 활이 하나 만들어질 각도였다.
P형의 방은 난곡 입구 주택가를 지나 거의 언덕 꼭대기쯤에 있었다. 방의 한쪽 벽은 두부모를 비스듬히 내려친 듯 천장의 반 넘은 지점부터 급격히 기울어 있었다. 기운 벽면에는 앉은뱅이 책상과 유리문이 달린 찬장, 밥솥 같은 키 작은 가구나 물품들이 놓여 있었다. 다행히 물이 새지는 앉았지만 벽지는 낡고 누덕누덕했다. 그래서 방은 이중으로 기운 듯한 느낌을 주었다. 천장이 기운 쪽에 작은 화분을 놓고 아늑한 다락방의 분위기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을, 그때는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인간이 상상력으로 만든 장면 치곤 지나치게 디테일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광경을 직접 보고 있는 것 같다. 위 글에서 주인공과 P형 사이의 선분을 잇는다면 생길 멋진 활은 둘 사이의 첫 설레임을 장전했을 것이다. 적어도 주인공은 그런 긴장을 느꼈기에 활을 연상한 것 아니었을까. 또한 위에서 묘사한 P형의 방은 실제로 저런 곳이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특히 천장이 기운 쪽에 작은 화분을 놓고 아늑한 다락방의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는 말은 깊은 뜻을 내포하는 듯하다. 화분이 주인공의 사랑을 의미하는 거라면, P형은 자신의 마음 속 방 기운 곳에 그 화분의 자리를 만들어 줌으로써 아늑한 연애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 중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서, 둘은 결국 엇갈리게 된 것 같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더 안타깝게 한다.
폭팔하는 경우와 차분함으로 감정을 숨기는 경우
작품 속 문체는 대체로 담담하다. 이미 주인공의 나이가 30대를 훨씬 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애초에 주인공은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다. 오히려 P형이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아 과거를 추억하며 서서히 인정하는 식이다. 생각해보면 첫사랑을 시작하는 사람 치고 이 감정이 사랑인지 단번에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말 그대로 전혀 경험이 없던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자신도 모르게 내제되었던 감정이 순식간에 폭발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과거의 주인공은 감정이 순식간에 폭발한 경우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를 생각하듯 나는 P형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방을 먼저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곧 P형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걸음이 급해졌다. 나는 헐떡거리며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P형이 그 방에 없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 여기서 자고 갈게요, 형!
이렇게 폭발한 경우, 상대방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작품에서 P형은 앞서 언급했던 사랑을 숨기는 경우에 속했던 것 같다. P형은 후배의 고백과도 같은 당당한 행동을 애써 술버릇을 들먹이며 자신의 평정심을 지키려 한다. 이는 주인공에게 사랑을 거절하는 위악적인 방식, 혹은 잔인한 거짓말로 오해를 사게 된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나는 벼락을 맞은 듯 옆으로 쓰러졌다. 벽이 기울어 방바닥과 예각을 이루는 곳에 머리가 닿았다. 벽에는 아무리 밀어도 머리끝이 닿지 않는 빈 각이 있었고 그곳에 보이지 않는 분노의 뿔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약시 너희도 별 볼일 없는 집단이었단 말이지.
결국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 주인공은 P형의 마음의 방에서 도망치게 된다. P형이 급하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고도 말이다. 이 때 주인공이 느낀 분노는 자신의 고백이 왜곡되었다는 것과, 자신의 이상향에서 뒤떨어진 선배의 행동에 대한 실망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엔 산타처럼 독판 어른인 척 하며 후배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주거나,무조건적인 신뢰와 관용을 가진 사람이 선배의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주인공 보다 P형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도 있다. 분명 P형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대사나 행동은 거의 없지만, 그 감정을 차분함으로 숨기려 애쓴 행동들(사랑이든, 허기든)이 노골적으로 주인공의 눈에 들어오고,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들을 포착할 때 마다 주인공은 관찰을 일관하지만 나중엔 혼란을 느낀다. 어쩌면 너무 혼란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그렇게 사람의 의식의 주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넘겨주기 때문이다.
산타와 현수의 사랑이 대비되는 이유
작품 속에선 유들유들한 선배 산타와 현수의 사랑도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현수는 솔직하며 말을 직선적으로 하는 스타일이다. 약간의 허세와 자존심이 강한, 그런 여성인 것이다. 이에 비해 산타는 주로 주변에게 의지한다. 후배들과 어울리며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같이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다. 후배들의 고민 상담을 들어주는 것을 즐기며 자신이 그렇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란 것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 반대 타입의 사람들이 사귀게 되자, ‘터질게 터지기도 한다’.
터질게 터졌다.…생략… 참다못한 산타가 깐족깐족 대드는 현수의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 맙소사! 실핏줄이 터져 왼쪽 눈자위가 온통 새빨갰다. 현수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더니 정신을 차린 순간 순식간에 술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리고 우리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산타 또한 번개처럼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위 글에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눈치를 보지 않는다. 속된 말로 ‘불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이는 주인공과 P형의 사랑과 매우 대비된다.
“포장마차 할 때 내가 가서 홍합탕도 끓이고 서빙도 하고 그랬지. 손님 없으면 그냥 문 닫고 둘이서 퍼마시는 거야. 산타가 술 하나는 참 맛있게 먹었지. 그걸 보면 악연이다 싶으면서도 왜 그렇게 모든게 용서가 되던지. 그렇다고 뭐 나한테 몹쓸 짓을 했다는 건 아냐. 주변 사람들한테 정말 천하의 몹쓸 짓 많이 하고 다녓지. 그런데 머리는 술술 빠져가는 인간이 좋다고 술 쪽쪽 마시는 걸 보면 그냥 내가 대표로 용서가 되더라고.“
게다가 이렇게 격정적으로 굴던 두 사람은 오히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을 하며 지낸다. 자신이 꾸던 꿈에서 P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전화를 걸어 떠들 정도로 의지하면서 말이다. 이 또한 서로 일절 연락을 끊은 주인공과 P형과 대비되는 점이다. 산타를 바라보는 현수의 마음은 위의 글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악연이지만 용서가 되는 경지다. 이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로써 존재한다. 불은 다 탔지만 잿더미로써 은은하게 연기를 계속 피우는 것처럼 말이다.
음흉한건지 순진한건지
작품에서 현수는 P형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주인공에게 음흉하다는 말을 한다. ‘음흉하다‘라는 말은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하고 흉악하다는 뜻이다. 작중에서 진짜로 음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다들 자신의 사랑에 빠진 순진한 사람들뿐이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건 나이를 먹을수록 힘들어지니까 차라리 음흉해지는 걸까.
사랑이라는 종류의 일이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나의 개인적인 가설이지만 권여선 씨는 직접 겪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속 시원히 말 해 본 것 같다. 그 만큼 이 작품을 읽고 나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사랑은 꼭 이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탈피했다는 것에서 오는 해방감인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읽었다는 포식감인 지는 헷갈리지만 말이다.
알고 보면 우리 주변에도 음흉해보이지만 사실은 순진한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작품을 읽고 나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글을 읽을 많은 사람들도 나와 같은 기회를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