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절대적인 것)〕
라틴어 : absolutus ⇒ 불어 : absolu / 독어 : absolut / 영어 : absoluteness
‘절대’라는 표현은 현대철학에서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 용어 이지만, 고ㆍ중세 철학과 근대철학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철학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절대라는 용어는 ‘절대적’ ‘절대자’ ‘절대이성’ ‘절대자아’ 등의 파생용어를 가지면서 어떤 사상에서는 중심 되는 개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절대’라는 개념은 어떤 문맥에서 쓰이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하며 이를 분명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상대적인 것’과 대립되는 의미의 ‘절대적인 것’에 대해 설명하면 이 절대적인 것은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첫째, ‘절대자’로서 ‘신’을 지칭할 수 있다. 이 경우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 존재’이므로 ‘절대자’가 무엇인지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설명이란 어떤 기준이 되는 척도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이 절대자는 모든 상대적 기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철학자들은 ‘절대자의 존재함’은 증명할 수는 있지만 ‘절대자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물론 ‘신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와 같은 곳에서는 ‘覺者’가 곧 ‘절대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道家에서는 ‘道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이 경우 역시 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창시자인 키엘케고올은 '오직 절대자 앞에선 단독자로서 만이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진리라는 말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절대적인 것’의 개념은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물(水)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물은 H2O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물은 ‘유동적인 것으로 일정한 모양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 물이란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물의 어떤 측면을 말하는 것이지 ‘물’을 ‘있는 그대로’ 고려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칸트 같은 철학자는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한 인간을 절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판단하지 말라’ ‘실존은 고독이다’는 등의 표현은 모두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것’ 즉 ‘절대적인 것’은 이해가 불가능하고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세 번째, 절대적인 것이란 ‘순수한’ 혹은 ‘결백한’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즉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순수한’ ‘결백한’의 의미를 지칭하고 있다. 법정에서 증언자들은 증언에 앞서 선서를 한다. 서양인들은 성경이나 코란 혹은 탈무드에 손을 얻고 선서를 하고, 동양인들은 주로 가슴에 손을 대고 선서를 한다. 이러한 선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맹세’라는 의미이다. 즉 그 어떤 절대적인 것에 비추어 ‘절대로 거짓이 없음’을 약속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약속이 상대적인 어떤 것에 대고 한다면, 언제나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증언을 자신의 친구가 참이라고 ‘보증하거나’ 자신의 부모님이 참이라고 ‘보증하거나’ 아니면 무슨 저명인사가 참이라고 ‘보증한다’고 해서 그 ‘참됨’의 진정성이 보증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 특수한 문화, 특수한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인 존재’나 ‘자신의 양심’에 대고 자신의 결백함을 보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맹세’의 행위 자체가 사람에 따라서는 거짓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이러한 절대적인 것에 대한 ‘가정’이 없다면 ‘맹세’란 그 자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언제 거짓이 되어버릴지 알 수 없는 것은 결코 맹세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백한 것’ 그것은 곧 ‘절대적인 것’인 것이다.
프랑스의 쟌 라베끄(JEAN LEVEQUE)는 그의 <철학입문, Abecedaire de la Philosophie>에서 “우리들의 의식의 진보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항상 절대적인 것이 현존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무슨 말일까? 마치 대나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매듭(마디)을 형성하듯이 우리 역시도 우리자신에 대해서 삶의 어느 순간에 ‘절대적으로’ ‘있는 그대로’ ‘총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자신에 대한 이해가 ‘순수하게’ ‘결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럴 때에만 우리자신의 의식이 보다 진보하고 보다 높이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중세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이라는 것을 쓴 적이 있다. 당시까지의 자신의 전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에누리 없이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자 하였다. 물론 우리는 “진짜 ‘있는 그대로’ 즉 ‘절대적으로’ 바라보고 '결백하게' 평가 했을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 질문에 정답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 그러한 그의 작업이 위대한 철학자로 도약하도록 한 근원적인 동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에로의 추구’이는 여전히 철학함이란 것에서 중요한 것이며, 진정한 철학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러한 절대에로의 추구를 감행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