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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1:1~4절
제목 : 앎에서 삶으로
누가복음은 “누가”가 저술하였으며, 사도행전도 누가가 저술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은 A.D. 85년에 쓰여졌습니다.
데오빌로에게 증정하였다.
누가복음은 아름다운 문체와 어휘를 사용하였고, 역사성과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데오빌로가 배운 것을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이 책을 써 보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복음서를 단순히 데오빌로를 위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방인 개종자를 위해서 쓴 것이 틀림없습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말씀이 년대순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거룩한 의사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은 곳에서도 그는 묘사 면에서 논리적이며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주와 구속자로 높이기 위해서 “믿음에서 믿음을”기록되었습니다.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우리 중에-본절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수님에 관한 나름대로의 산 체험과 증거들을 보호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저자 누가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로 '누가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문의 '우리'와 접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적잖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니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하거나 사건을 임의로 축소, 확대하기도 하며 또한 특정 종파의 교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새로운 기사를 꾸며내어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들의 기록은 모두 객관성과 정확성이 매우 부족해 '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저서들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개연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여기서 '우리'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기록에 객관성과 정확성과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예수의 목격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뒤이어 나오는 2절과 함께 연결해 본다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증인들임이 분명합니다.
이루어진 사실(톤 페플레로포레메)-이미 '성사된 일','성취된'일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어진 일'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말은 '벌써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취된'(딤후 4:5, 17) 그리고 '확인된'(롬4:21;14:15;히 6:11;10:22)으로 사용됨으로써 위의 사실을 더욱 확증시켜 줍니다.
실로 예수의 생활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서두에서부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KJV는 이 부분을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들'이라는 것으로서 앞으로 소개될 이 누가복음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실로 본서를 통해 누가는 사료(史料)들과 정확한 날짜를 비교적 소상히 언급함으로써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프 아르케스' 중 '아르케'란 말은 '모든 일의 시작'에 대해 또는 '말해진 일들의 시작'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라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라는 의미, 또는 '침례 요한의 활동의 시초에서부터'(3:1, 2;행 1:21, 22;10:37)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다.
말씀의(투 로구) - 여기서 이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말씀'은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 됩니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제공하고 있는데 그가 기술한 요1:14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으며(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있고 또 사람들의 빛이 된다고 설명합니다(요1:4).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요 1:14).
이에 비해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복음입니다.
사실 고대 헬라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그에 걸 맞는 행동을 연관시켜 그 중요성 강조했었습니다.
행 1:1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기술할 때 '행하시며'와 '가르치시기를'이라는 말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그 복음의 말씀은 1절의 '이루어진 사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격자와 말씀의 일군 된 자들(아우토프타이 카이휘페레타이) -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격자되고 일꾼되었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은 사도적 증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목격자'에 해당하는 '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아우토스'와 '보다'의 뜻을 가진 '호라오' 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는 곧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가능케 했던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자들로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그분의 활동상을 목도한 산 증인입니다. KJV는 이 부분을 '말씀의 일꾼'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실로 예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대 및 예수를 수종들던 여인들(막 15:40, 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복음의 권의와 내용상의 완벽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1절의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입니다.
전하여 준 그대로 -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 것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즉,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자신에게 전해진 구전(Oral tradition)과 기록이 신빙성 있고 정확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전하여 준'(파레도산)은 제2 부정과거 복수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서 어김없이, 확실히 건네주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여기서 '구전'(口傳)을 가리킬 수 있으나(고전11:23;15:3)
반드시 구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24:20;행 1:20;3:13).
즉 이것은 구전과 기록 문서를 포함한 일종의 '전승'(파라도시스)으로 봄이 좋을 것입니다.
실로 누가는 최초 목격자와 일꾼들이 전해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 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기에 복음에 있어서 만은 직접적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최초 증인의 확실한 보증 등의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력을 저술하려고 - '저술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태사스다이'는 '차례로', '잇달아'라는 뜻을 가진 '아나'와 '고정된 곳에 놓다',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타쏘'의 합성어인 '아나타쏘마이'가 원형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임의대로 복음을 기록함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차례대로 순서에 따라 편찬함을 의미합니다.
붓을 든 - 이 단어는 '손을 대다', '착수하다', '시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에피케이레오'로서 흔히 히포크라테스 등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실패나 비난에 유념치 않고 무엇을 시도하다'로 이해되곤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이 일을 착수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누가가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기록된 자료들이 부실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누가는 자기 앞의 다른 기자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경쟁자적 입장에서 붓을 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에 관한 증인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의도했습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내용들을 본서에서는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기존의 기록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이나 각 기록들을 통해 확대되거나 모방된 외경들이 이단 교파나 특수한 종파 가운데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예:히브리인 복음서).
결국 이 부분은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담은 당시의 각 기록이 나름대로의 독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다른 기자들과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자신도 감히 기록하겠노라는 복음서 기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은지라 -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분명히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의 기록된 자료를 참고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4복음서를 비교하여,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빼고 다른 부분을 놓고 본다면, 누가복음의 초반부는 누가가 독톡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1절의 '우리'와 연결하여 본다면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집니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누가가 '우리'와 많은 곳에서 여러 활동을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렌스키는 누가와 마가가 바울의 첫 투옥 중에 서로 접촉을 했고,
2차 투옥시에도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우사이가 되었고,
따라서 둘 중 먼저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그 내용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볼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서의
'우리'와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저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은 많은 기록들 가운데서 특별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크레다너스도 여기에 마태는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후 마가는 생각되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또한 캐드베리느 여기 "많은지라"라고 한 말은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가는 의사였다고 합니다(골 4:14).
따라서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여기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합니다.
먼저 '그 모든 일'(파신)은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던 모든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근원부터'(아노덴)는 '처음부터', '맨 시초부터' 또는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2절의 '처음부터'란 말과 직접 연관은 없으나 의미상 유사성을 지닙니다.
'자세히'(아크리보스)는 원래 '첨단' 또는 '극점'을 의미하는 '아크론'에서 나온 말로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가리킵니다. 본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정확하게', '엄밀하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차례대로'(카데크세스)는 '순서에 맞추어', '연속적으로'라는 뜻으로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시간순을 존중하여 연대기적 기술 방법을 택했다고 소개합니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각 사건들을 시간적 배열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신중히 체계화, 조직화 했음을 밝힌 것입니다.
사실 9:51-18:8은 주제에 의해 사건과 교훈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따라 본 복음서를 기록해 나갔음이 밝혀집니다.
즉 첫째, 역사성, 둘째, 정확성, 셋째, 논리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누가복음 전체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루어 살핀(파레콜루데코티) -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따르다', '집요하게 무엇을 탐구하다'는 등의 뜻으로서 고대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되던 동사의 완료 능동태 분사형입니다.
이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언급한 말로서, 누가는 복음서를 기술하기에 앞서 주도 면밀하고도 심층적인 연구와, 정확하고도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록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나도(카모이) - 이는 '붓을 든 많은 사람'(2절)과 짝을 이루는 말로서 누가 자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집필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데오빌로 각하(크라티스테 데오필레) - 누가가 기록한 두 책(본서,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되고 있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전하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혹자에 따르면 누가가 자신의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로 사용한 것이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로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였을 것으로도 추정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이며 특히 누가가 그의 이름에 붙여 사용하는 '각하'라는 명칭을 통해 볼 때 그가 실재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이라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리펠드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학우이거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데오스'('하나님')와 '필레오'('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이를 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실로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었는데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4절).
한편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비록 본서는 데오빌로가 그 대표적 수신자로 밝혀져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데오빌로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헌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어떤 책을 권위 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하는 경우는 당시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은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본문의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줄 알았노니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또한 인간들에게도 큰 기쁨입니다. 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실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부터의 모든 일들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귀절은 누가가 이 글을 기록하는 이유를 보인다. 예수님에 관해여러 사람들이 기록했지만 누가 자신만큼 자세히 기록할 수 없는고로 그가 붓을 든다는 것이 이 귀절이 의미이다. 누가는 복음을 기록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 몇가지를 생각하였으니
(1) 모든 일을 알았고 (2) 근원부터 알앗으며 (3)자세히 미루어 알았음이다.
"미루어 살핌"은 헬라원어로 파레콜뤼데코티라고 하는 데, 어떤 사실을 연구함에 있어서 연구자가 그 생각을 미루어서 그 곁에 가까이 연접하여 알아봄으로 명백한 지식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누가는 이와 같이 자세하게 살펴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 에수님에 관한 기록이 도합 170부분이 있는 48부분은 독특히 누가복음에만 있다. "데오빌로"란 이름은 이방인들중에 많고 유대인들 중에는 이 이름이 예디이야로 불려진 것이다. "각하"란 말은 벼슬의 지위있는 자들에게 붙여준 말이다.
1:4
“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
이로 미루어 데오빌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전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가에게 이 복음서 기록을 의뢰하였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누가가 기록한 이 책을 출간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함'이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않고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믿고있는 복음은 우리를 견고히 세우고 온전케 하며 확신을 같게 합니다(딤후 3:15-17).
사실 분명하지 않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누가는 진리에의 확신과 예수께 대한 '확실함'을 간직하게 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있습니다.
한편 이 책을 받아 볼 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구전을 통해 믿음이 성장한 그는 많은 이단 사상에 도전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는 유대교의 박해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협하는 영지주의와 이단자들이 성행했습니다.
혹시, 데오빌로 역시 이런 영향에 위협을 느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누가가 기록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복음 기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 기사가 이단 사상들의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고, 또 때로는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엡6:11-18).
그리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복음의 확실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알게 하려 함이로라(에피그노스) - 이 단어는 '...을 철저히 알다', '정확하게 알다'라는 뜻이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더하려고 하였습니다.
기존의 지식에 완벽함을 더하는 것은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교육자의 위치로, 또는 증인의 위치로 이끌어 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