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강갑영(姜甲永(姜顯永))
출신지: 경남 산청
훈격: 대통령표창(1995)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 갑 영(姜甲永) 1907. 6. 7~1945. 7. 19 이명 : 顯永
경남 산청(山淸) 사람이다.
그는 평소 일제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여 민족 의식을 길러 오던 중 1931년 8월 26일 부산의 전영진(田永鎭) 집에서 박귀선(朴貴先)・이인형(李麟炯)등과 함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인쇄・배포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혁명적 노동자가 선두에 서서 농민・소시민 등과 조직적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내세우고, 이를 위해 일반의 의식을 각성하기 위해 등사판에 그와 같은 내용을 담은 격문을 인쇄하여 노동자에게 배포・선전하다가 동년 9월 24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로 인하여 1931년 11월 1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32년 3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출옥 후 그는 노동조합(勞動組合) 운동에 참가하여, 김상혁(金相赫)과 함께 전남지방의 노동조합 건설에 힘을 쏟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21.
註・判決文(1932. 3. 22. 大邱覆審法院)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東亞日報(1933. 11. 22)
이름: 강경근(姜京根)
출신지: 평북 정주
훈격: 애국장(1995)
운동계열: 만주・노령방면
강 경 근(姜京根) 미상~1924. 5. 10
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20년대 중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강경근이 활동한 참의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 중대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한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는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였으며, 창설 당시의 주요부서와 주요 간부는 다음과 같다.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대(金蒼大), 훈련대장 박응백(朴應伯) 등이다.
참의부는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제1중대장 백광운과 제2중대장 최석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백광운이 피살된 후에는 최석순이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사활동을 주도하였다.
강경근도 참여한 참의부의 군사활동은 국내진격전으로 대표된다. 참의부는 압록강유역과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독립신문 1924년 7월 26일자에 실린 통계만 보더라도 참의부군대는 1924년 4월부터 7월 16일까지 20차례 정도 국내에 진격하여 군자금 모금 및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물론 계절적으로 독립군이 자연을 이용하여 대일투쟁을 하기 가장 좋은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상당히 많은 숫자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 통계에 따르면 독립군들은 평안도 의주군・초산군・강계군・선천군・영변군・위원군・태천군・용천군・자성군 등 평안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적으로 평안도지역이 많은 것은 압록강 대안이 평안도지역이라는 지역적인 이점 외에 참의부의 주민과 독립군 병사들 가운데 평안도 출신이 많아 이곳 지리에 밝았으므로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참의부원으로 활동하던 강경근은 1924년 5월 10일 집안현(輯安縣) 옥석하(玉石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친일적인 중국 보갑대(保甲隊)와 충돌하여 계동화(桂東化)와 함께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21~23.
註・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4卷 128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492面
・韓國獨立史(金承學) 全卷 355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468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36面
・獨立新聞(1925. 5. 5)
이름: 강경진(姜景鎭)
출신지: 전북 남원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경진(姜景鎭) 1893. 5. 4~1940.12. 8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1919년 7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후 김재구(金在九)·한태현(韓泰鉉) 등과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조직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서울의 대동단 본부로부터 교부받은 각종 선전물을 배포하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동단 본부에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대동단은 1919년 3월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처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또 동단에서는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강경진 등이 활약한 남원지단에서는 주로 청년단원을 근간으로 조직활동을 벌였다. 또 이들은 자금을 수합하여 서울의 대동단본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도 자연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20. 4. 15 대구복심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44·445·44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81·982면
이름: 강경희(姜敬熙)
출신지: 충남 예산
훈격: 대통령표창(1995)
운동계열: 학생운동
강 경 희(姜敬熙) (1913)~미상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1930년 2월 충남 예산군 대흥면(大興面) 손지리(遜支里)에서 김만복(金萬福)으로부터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휴교와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지시받았다. 이에 따라 동년 3월 대흥면 동서리(東西里)에서 대흥공립 보통학교 학생 윤소현(尹召鉉)・배덕근(裵德根)・신화균(申和均) 등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3월 11일 오후 4시경 동서리(東西里)에 있는 산에서 학생 20여 명과 함께 일제의 편파적 조치를 비난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의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23.
註・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648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53・1546~1548面
・朝鮮日報(1930. 8. 14)
이름: 강계대(姜啓大)
출신지: 전북 임실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3・1운동
강계대(姜啓大) 1884.11.29~1971.1.24
전라북도 임실(任實)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2일 서울로부터 전해받은 독립선언서를 임실 읍내의 관공서 게시판에 게시하였다.
그는 이날 운암면 지천리(雲岩面芝川里)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에서 교구장인 한영태(韓榮泰)로부터, 박판덕(朴判德)·한준석(韓俊錫)·최양옥(崔養玉)·우성오(禹成五)·황성진(黃成 )·김영원(金榮遠)·박성근(朴成根) 등의 교도와 함께 독립선언서 9매를 전해 받았다.
이에 그는 이날 밤 독립선언서를 학교·경찰서·면사무소·장터 등의 관공서 게시판에 게시함으로써,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이 지역 주민들에게 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3월 12일의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정신적 배경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이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0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489면
이름: 강공흡(姜公洽)
출신지: 제주
훈격: 애족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공흡(姜公洽) 1917. 1. 8~1974. 6.25
제주(濟州) 사람이다.
1933년 1월 제주도(濟州島) 한림면(翰林面) 협재리(挾才里) 홍경옥(洪卿玉)의 집에서 장용진(張瑢珍) 등과 함께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輪讀)하여 사회주의사상을 함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구우면(舊右面) 소재 구우공립보통학교(舊右公立普通學校)의 이전문제(移轉問題)에 관해 무산농민(無産農民)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하여 이전반대진정서(移轉反對陳情書)를 만들어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1934년 7월 하순 장용진·홍경옥과 함께 협재리에서 무명(無名)의 비밀결사(秘密結社)를 만들어 소년부(少年部)를 담당하였으며, 동지규합(同志糾合)에 힘쓰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37. 4. 12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제주도사연구(제주도사연구회, 1991. 11. 1) 160면
이름: 강구원(姜龜遠)
출신지: 충북 음성
훈격: 대통령표창(2007)
운동계열: 3・1운동
강구원(姜龜遠) 1890. 11. 12~1956. 6. 30
충북 음성군(陰城郡)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0일 맹동면(孟洞面) 소재지 쌍정리(雙呈里)에서 시작된 시위는 4월 초에 면 전체로 확대되었다. 강구원은 4월 3일 맹동면 마산리(麻山里) 와우형산(臥牛形山)에서 강대길(姜大吉) 등과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강구원은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公州地方法院:1919. 5. 13)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66면
이름: 강귀손(姜貴孫)
출신지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의병
강귀손(姜貴孫) ~1909. 7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였고, 특히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강귀손은 이 같은 시기에 무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활동 중 1909년 7월경 연천헌병분파주재소(漣川憲兵分派駐在所)에 피체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大韓民報(1909. 7. 29)
이름: 강규언(姜圭彦)
출신지: 제주
훈격: 대통령표창(1993)
운동계열: 3・1운동
강 규 언(姜圭彦) 1898. 4. 17~1927. 4. 15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5일 당시 그는 전북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에 있는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학생으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李斗悅) 박연세(朴淵世)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3월 1일부터 학교 내에서 약 7,000매의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는 등 거사준비를 하였으나 주동인물들이 사전에 검거되자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群山) 장날을 이용하여 합세한 주민 500여 명과 함께 군산경찰서 등 시내 각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아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서 모슬포(摹瑟浦)에 광선학교(光鮮學校)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면서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PP.13~14.
註・判決文(1919. 4. 30. 大邱覆審法院)
・判決文(1919. 6. 12. 高等法院)
・濟州百年(姜龍三編著, 1984. 11. 15.) 259~266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524・525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83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498~1503面
이름: 강규진(康奎鎭)
출신지: 함남 덕원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규진(康奎鎭) 1905.10.28~1942. 3.26
함남 덕원(德源) 사람이다.
1924년 3월 1일 원산 보광학교(保光學校) 재학중 3·1독립운동 5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군중들과 함께 학교와 원산역전 번화가에서 격문을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24년 5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았다.
출옥후에는 조선일보 원산지국을 경영하면서 민족정신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1927년 12월 26일에는 함남기자연맹 주최로 함남기자대회를 개최하게 됨에 일경이 이를 금지시키자, '경찰탄핵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시위행진을 하다 피체되어 1928년 12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금고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도 계속 조선일보 원산지국장으로 있으면서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24. 5. 7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28. 12. 12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29. 2. 20 고등법원)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7권 327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93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40·14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683면
·동아일보(1924. 5. 8, 1928. 10. 21, 12. 14)
·조선일보(1936. 6. 15, 1937. 3. 15)
이름: 강규찬(姜奎燦)
출신지: 평남 평양
훈격: 애족장(2006)
운동계열: 3・1운동
강규찬(姜奎燦) 1874~미상
1919년 2월 평남 평양(平壤)에서 한국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계획하고 3월 1일 숭덕학교(崇德學校) 운동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무죄 방면되었던 강규찬은 1919년 2월 선우혁(鮮于爀) 등과 연락을 하며 독립운동을 계획 중에 있었다. 마침 천도교 측에서 합동운동을 교섭해와 평양에서도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협동하여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일 숭덕학교 교정에서 고종 봉도식(奉悼式)이 열린 후 독립선포식을 거행할 때 강규찬은 조선의 독립을 연설하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큰 거리로 진출하였다. 상인들도 철시하고 시위행진에 가담하였다. 평양경찰서 앞에서 천도교구당과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등에서 행진해 온 군중이 합세하여 도청, 재판소, 평양역 광장, 평양부청, 평양형무소 등 시가지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7시경에는 시위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 투쟁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고 수백 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밤에는 학생들이 다시 행진하며 만세를 부르는 등 만세운동의 열기는 계속되었다.
강규찬은 체포되어 1919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2. 9. 28)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3. 3. 20)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8. 21)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9집 194면,제14집
760,762,766~767면
이름: 강극모(姜極模)
출신지: 함남 풍산
훈격: 애족장(2008)
운동계열: 만주・노령방면
강극모(姜極模) 1891. 6. 21~미상
강극모는 1920년 음력 9월 단신으로 중국 길림성(吉林省) 장백현(長白縣) 17도구(十七道溝)로 이주하여 군비단(軍備團)에 가입한 후 동년(同年) 음력 10월 군비단의 윤덕보(尹德甫)와 이동백(李東白)의 권유로 함남(咸南) 풍산(豊山)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한의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어 군비단의 군의(軍醫)로 러시아령 이만에 파견되었다가 1922년 음력 7월 27일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上海)에 파견되었다. 동년(同年) 음력 8월 다시 노령(露領)으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1927년 3월 7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7. 3. 7)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咸鏡南道誌(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21면
·北靑郡誌(북청군지편찬위원회, 1970) 397면
이름: 강근호(姜槿虎)
출신지: 함남 정평
훈격: 애국장(1990)
운동계열: 만주・노령방면
강 근 호(姜槿虎) 1888. 11. 3~1960. 2. 24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사람이다.
1916년 함흥중학교(咸興中學校) 2학년 재학시에 학생사건으로 일경에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19년 3월 만주 용정촌(龍井村)에서 3・1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에 만주 군정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신흥무관학교에 근무하였으며, 1920년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참가하였다.
또한 1921년에는 서백리아(西佰利亞)「쥬유시」전투에 참전하는 한편「이르크추크」고려혁명군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이르크추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 그후 다시 만주로 복귀하였다. 1943년에는 만주 명월구(明月溝)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愛國同志會靑年軍事訓練) 교관으로 청소년의 군사 훈련에 전념하였다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4卷, 國家報勳處, 1987年, p.495.
註・大地의 星座(朴啓周著) 664面
・安椿生, 柳忠成의 證言
이름: 강금종(姜金鍾)
출신지: 제주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금종(姜金鍾) 1917.12.27~
제주도 제주(濟州) 사람이다.
그는 일본 대판전문학교의 야간부에 재학중인 1940년 4월에 김봉각(金奉珏)·김병목(金丙穆)·고봉조(高奉朝) 등과 함께 재대판 조선인학생의 단결을 도모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동년 5월 초순, 대판부 소재 김봉각의 집에 모인 이들은 독립운동에 관한 근본방침을 의논하고 먼저 조선인 대중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계몽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를 위한 실천단체로서 홍아연구회라는 독서조직을 결성하였다. 동회는 조선독립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연구를 목적한 항일결사였는데 동년 5월 중순에 그 명칭을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정치·사상·문예·종교 등 각 방면의 전문연구를 통하여 당시의 국제정세를 면밀히 분석하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한편 연구발표회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쌓았다. 이때 그는 사상이론연구부를 책임 맡아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2월 25일 동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피체되었으며, 그는 1942년 10월에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1944년 4월 2일 출옥시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註·판결문(1942. 10. 12 대판지방재판소)
·재소증명서(대판형무소)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박경식) 제4권 626·627·629·74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755·766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762·763·76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078·1226·130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322·325면
이름: 강기동(姜基東)
출신지: 서울
훈격: 대통령장(1962)
운동계열: 의병
강기동(姜基東) 1884~1911 본명:강기주(姜基周)
강기동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도 장단 고랑포(長湍 古浪浦)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과 군대해산이 일제에 의하여 단행되자 뜻있는 많은 인사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고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은 정규군인 관군과 일군에 의하여 속속 체포・사살 당하였다. 이때 강기동이 근무하던 장단에는 의병투쟁을 하다가 체포된 인물들이 다수 투옥되어 있었다. 그가 옥문을 열어주어 많은 의병들을 구출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의거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의병 대장이 되어 각지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강기동의 의진은 주로 양주(楊州)・포천(抱川)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일대 특히 경기도의 양주・포천을 위시하여 삭령(朔寧)・마전(麻田)・황해도의 토산(兎山)・금천(金川)・재령(載寧) 등지에서는 연기우(延基羽)・전성서(田聖瑞)・이한경(李漢京)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중에서 강기동은 연기우의 의진과 서로 비밀 연락 아래 밀착된 전략을 전개하였다. 연기우는 군인 출신 의병장으로서 군대 해산 직전 강화도 진위대(鎭衛隊)에서 봉기하여 가장 장기간 투쟁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들은 이미 현상금이 걸린 사람들로서 밀정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대를 소수 정예부대로 편성하였다. 1908년 이은찬(李殷瓚)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고 6월에 강기동은 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과 함께 격문을 띄우고 병사를 모아 대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맹서하였다. 10월 22일 포천으로 들어가서 1910년 2월 포천에서 왜병과 접전하였다. 이 시기에 강기동 의진의 좌군인 전성서(田聖瑞) 휘하의 한인수(韓仁秀)와 김순복(金順福)은 포천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았다. 3월 6일 강기동은 이용규 등과 더불어 영평(永平)으로 들어가 활약하니 일인들은 현상금을 천금으로 올렸다. 4월 29일 강기동은 전성서와 함께 양주(楊州)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5월 16일에는 양주 노원(楊州 盧原)에서 교전하였다.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순사를 넘어뜨리고 피신할 수 있었다. 이 즈음 강기동은 강두필(姜斗弼)과 함께 병력 1백여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강원도 일대를 넘나들었다. 1910년 8월 29일 소위 한일합방 후 일제는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걸쳐 임시 파견대 1개 대대와 헌병・경찰대의 연합 병력으로 경상도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安東)・예천(醴泉)・영춘(永春)・봉화(奉化) 일대에 대한 포위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10년 9월 하순에서 11월 초순에 이르는 40일간에 걸쳐 황해도내 1개 여단(旅團) 병력을 집중하여 대살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의병부대에 대한 작전으로 아울러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소속 애국 계몽운동가들의 거점을 소탕하였다. 일이 이렇게 급진전되어 가자 상당수의 애국지사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북간도로 이동하였다. 이즈음 강기동은 계속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그 후 북간도로 이동해 가던 중 1911년 2월 원산(元山)에서 체포・압송되어 서울 용산(龍山)에서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437~438.
註ㆍ梅泉野錄 498・513・524・526・531・533・535面
ㆍ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289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566・685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5卷 151・155・662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1卷 83・142・144・148・152・161・172・175・540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1面
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8・37・55・57・492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輯 11~54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3輯 97・98・101・106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4輯 331・339・351・352・936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3輯 105面
ㆍ中央日報(1924. 3. 10)
ㆍ朝鮮日報(1926. 1. 12, 1. 13, 1. 14, 1. 22, 1928. 12. 2, 1933. 12. 8)
이름 강기수(姜琪秀)
출신지 경남 산청
훈격 건국포장(2000)
운동계열 3・1운동
강기수(姜琪秀) 1898. 11. 26~1946 이명: 琪秀
경남 산청(山淸)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읍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금융조합 서기로 재직하던 그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차,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거주지인 함안면으로 돌아왔다. 서울의 시위에서 크게 자극받은 그는 곧바로 조한휘(趙漢輝)・이찬영(李讚榮) 등 유지인사들과 모임을 갖고 함안에서의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대산면(大山面) 한문교사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다량 등사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19일 정오 경, 주도자들은 봉성동(鳳城洞)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후 2시가 되자 시위군중은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마산경찰서와 현지 일경들이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더욱 사기가 오른 시위군중은 등기소・우체국・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긴급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의 총검을 앞세운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이와 같은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보안법으로 징역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1920년 8월 산청군 단성읍에서 개최된 단성청년회(丹城靑年會)의 창립총회에 참가하여 사교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총무 등의 직책을 맡아 청년회를 이끌며 청년계몽운동 등에 종사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1922년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4卷, 國家報勳處, 2000年, pp.23~24.
註・判決文(1919. 5. 19.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判決文(1922. 6. 7 大邱地方法院)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3・1運動實錄(李龍洛, 1969) 727面
・함안항일독립운동사(李圭석, 함안문화원, 1998) 191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97・298面
・東亞日報(1920. 8. 29)
이름: 강기운(姜基云)
출신지: 함북 회령
훈격: 독립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기운(姜基云) 1897. 4. 24~1944. 9. 5
함북 회령(會寧) 사람이다.
1920년 음력 4월 간도 화룡현(和龍縣)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제1남부지방 경호부장(警護部長) 장성순(張成順) 휘하의 송언지회(松堰支會) 경호원(警護員)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7월말 경에는 장성순 이하 함경준(咸京俊)・장여극(張汝極) 등의 동지들과 함께 화룡현 사대사(四對社) 증봉동(甑峰洞) 부근 야산에서 일제의 밀정 이덕선(李德善)을 처단하였다. 한편, 같은해 음력 7월말 무렵에는 두만강을 건너와 회령군 화풍면(華豊面) 무심동(無心洞) 김형섭(金亨涉)의 집에서 동민들로부터 군자금 1백원을 제공받았으며, 이날밤 같은 마을의 허육(許六)으로부터는 별도로 120원의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도 벌였다. 이어 같은 해 음력 8월 중순경에는 동료 고진홍(高鎭洪)・신언규(申彦奎) 등과 함께 사대사 증봉동 부근에서 일제 헌병 보조원을 지낸 것으로 믿어지던 남성률(南聖律)을 심문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밀정 단죄와 군자금 모집활동에 주력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1922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2월 7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pp.14~15.
註ㆍ判決文(1922. 4. 24 京城覆審法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0輯 1246~1250面(張成順의 判決文)
ㆍ東亞日報(1921. 12. 17, 1922. 1. 20)
이름: 강기준(姜祺俊)
출신지: 강원 철원
훈격: 대통령표창(1992)
운동계열: 3・1운동
강 기 준(姜祺俊) (1891)~1954. 9. 12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철원군 내문면(乃文面) 독검리(篤檢里)에서 천도교인인 최재명(崔在明)・최재청(崔在淸)・이주붕(李周鵬)・박용득(朴龍得)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동년 4월 8일 철원군 내문면 오동리(梧洞里)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마을 사람들을 규합, 태극기를 들고 내문면사무소로 향하며 만세시위를 펴고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이 해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13.
註・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539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923・924面
이름: 강기팔(姜基팔)
출신지: 평남 강서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3・1운동
강기팔(姜基팔) 1896. 9.11~1936. 9.17
평안남도 강서(江西)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 차명건(車明鍵)·김병선(金炳善)·김기준(金基濬)·김자지수(金子支洙)·박종권(朴鍾權)·윤태빈(尹泰彬)·최재은(崔在殷) 등과 함께 함종(咸從)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출신 의사로서, 서창림(徐昌林)·김정현(金鼎鉉)·이정연(李鼎淵) 등과 만나 3월 8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8일 정오경 공립보통학교에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일장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을 인솔하여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미리 헌병출장소장인 복영(福永) 상등병에게 시위계획을 통고하여 무력으로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시위군중에게도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일관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들은 시위행렬을 보고 무력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주동자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마치고 군중이 해산하려 할 때, 일본 헌병들은 돌연히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파악해 둔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이때 그도 가족들과 함께 헌병출장소로 연행되어 가서 철야 심문을 받았는데, 헌병은 그의 머리에 오물을 퍼붓고 시계를 찼던 그의 왼손을 구둣발로 짓밟아, 깨진 시계유리 파편이 동맥을 파열시켜 실신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는 이해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407·40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26면
이름: 강기형(姜琦衡)
출신지: 충남 천안
훈격: 애족장(2006)
운동계열: 3・1운동
강기형(姜琦衡) 1868. 1. 25~미상
1919년 3월 20일 충남 천안군(天安郡) 입장면(笠場面) 양대리(良垈里)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광명학교(光明學校) 교사 강기형은 학생, 주민과 함께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전에 양대리에서 시작한 시위행렬은 다시 하장리(下場里) 입장시장(笠場市場)으로 향하였고, 출동한 천안헌병대와 일대 충돌을 빚어 남자 40명, 여자 10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입장시장에 이르러 시위군중은 7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강기형은 체포되어 1919년 6월 9일 경성복심법원, 1919년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6. 9)
·判決文(高等法院:1919. 7. 17)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1165~1166면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117~11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