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전쟁사 (3)...거란의 3차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흥화진에서 소배압의 군대를 막아내자 이를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다음 해 정월에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다가 구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구주대첩이다.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1019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치고, 요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으며, 요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전쟁사 (4)...구주대첩|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구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에 의한 거란의 제1차 침략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江東) 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 곳에서 패배하고 자주(慈州)에서도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구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의 전쟁사 (8)...구주싸움|
구주싸움 (龜州-)
1231년(고려 고종 18) 살리타[撒禮塔]가 이끈 몽골군의 제1차 침입 때 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이 항전한 싸움.
구주는 북으로 삭주(朔州), 동으로 태천(泰川), 남으로 정주(定州), 서로는 선천(宣川)과 연결된 요충지로서 고려시대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이 거란군을 물리친 구주대첩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몽골은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세계제국건설을 목적으로 금(金)나라 정복을 단행하고 살리타에게 동정(東征)을 명하였다. 살리타는 대군을 거느리고 함신진(咸新鎭)·삭주·철주(鐵州)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이어 구주에 임하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박서와 정주·삭주·위주(渭州)·태주(泰州)등 제성(諸城)의 수령과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모여들어 방전(防戰)하였다.
적은 맹공격을 가해왔으나 번번이 패하고 물러갔다.
이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박서와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김경손이었다.
몽골군이 공격기구인 누차(樓車)와 우피(牛皮)로 싼 목상(木床)에 군사를 싣고 성 밑에 굴을 파는 등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박서는 용맹과 기지로 방어하였다.
김경손은 남문으로 공격하는 몽골군을 12명의 결사대와 함께 막아내어 성을 고수하였다.
몽골군은 30일 동안이나 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31년 9월 마침내 물러갔고 다시 북계제성(北界諸城)의 항졸(降卒)을 모아 그 해 10∼12월 수차례에 걸쳐 큰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박서와 김경손은 결사적으로 적군을 격퇴하였다.
이 무렵 개경에서는 몽골군의 권항사(勸降使)를 접견하고 종실(宗室) 회안공(淮安公)을 살리타의 본영인 안주(安州)에 보내 강화를 교섭할 때였다.
살리타는 통역관 지의심(池義深)과 강우창(姜遇昌)을 시켜 회안공의 서(書)를 가지고 박서에게 재삼 항복을 권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더욱 방비하였다.
32년 1월 강화가 성립되자 왕은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등을 구주성에 보내 강화의 성립과 3군 항복의 소식을 전하고 정전(停戰)과 출항(出降)을 권유하였으나 박서는 듣지않았다.
그러나 민희·최임수(崔林壽)의 설득과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마침내 항복하였다.
구주싸움의 전황을 돌아본 몽골의 한 노장(老將)은 “내가 천하에 종군하여 무수한 공성전(攻城戰)을 보았으나, 이와 같이 맹렬한 공격을 받고도 끝내 항복을 하지아니한 사례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