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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주제별 예화모음)
▣ 통일과 평화
한 세대 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공통된 마음의 소원이 있었다. 바로 통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애국가처럼 불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노래가 들리지 않게 됐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지켜본 뒤부터가 아닐까 싶다. 동독을 흡수통일한 뒤 서독이 치른 대가는 참으로 엄청났다. 서독은 지난 20여년간 낙후된 동독 경제를 살리기 위해 1조4000억 유로(약 1820조원)를 투입했다. 세금 부담과 실업, 지역갈등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다시 울려 퍼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대부분 남북 분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기도하며 마음의 소원을 담아 통일을 노래해야 한다. 분단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성진 목사 (거룩한빛광성교회) <국민일보/겨자씨>
▣ 갑자기 닥칠 통일
지난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날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년 후인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독일은 통일되었다. 우리가 알듯이, 이 역사적인 사건의 발단은 옛 동독 라이프치히에 있는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기도운동이다. 10년간 지속된 작은 기도의 불씨는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성령의 불이 되어 동서독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다.
후일 동독 비밀경찰의 고위 간부 진더만은 실토했다. “통일을 막을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교회에서 일어난 기도운동이다.” 이처럼 인간은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조차 당신의 경륜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동독 정치국원 귄터 샤보스키가 기자회견 중 “오늘부터 서독 왕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뱉어버린 말실수도 이런 경우다. 오! 지상의 마지막 분단국인 우리 대한민국. 남북통일도 한국교회의 기도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오리라.
/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국민일보/겨자씨>
▣ 통일에 대비하는 교회로…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로 제목을 써놓고 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표현은 마치 교회가 통일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통일의 결정권자가 아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공식 수행원 중 기독교를 대표한 개신교 대표(KNCC 총무)는 원불교를 포함한 4대 종교에 대한 균등 예우 차원으로 포함되었을 뿐이다. 제목을 수정하는 것이 좋겠다. 통일에 대비하는 교회로.
통일은 대비되어야 한다. 천문학적 비용이 들기 때문에 독일식 흡수 통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민족 통일의 염원을 무작정 연장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통일 문제는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남북 정상이 남북화해의 큰 보따리를 국민 앞에 펼쳐 놓았지만, 남쪽은 재정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의 문제로 주춤거리고, 북쪽은 추가 개방이 자칫하면 정권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며 망설이고 있다.
남북의 지도자들이 미적거리고 있는 동안 남한의 기업가들은 점진적 통일의 수단으로 남북경협을 주장한다.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보겠다는 논리는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낙관론이다. 북한의 체제수호 논리는 인민의 경제적 안녕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남한의 저임금 근로자들은 북한의 노동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냉혹한 경제 현실을 쉽게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국면에서, 한국 교회는 어떻게 통일에 대비할 것인가. 북한교회를 접수하고, 그 진공상태에서 교단별로 선교 지역을 할당하여 교회를 재건하겠다는 계획은 신중하지 못하다. 지금 한국 교회가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은 선교지 분할이나 교회 재건과 같은 하드웨어적인 것이 아니다. 흡수통일이 되든 연방제 통일이 되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정신적 충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신봉해왔던 사회주의나 주체사상이 붕괴하면서 많은 북한 주민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작금의 많은 탈북자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정신적 박탈감을 메워가는 것을 통해 이러한 유추가 가능하다.
통일 과정에서 파생될 개인의 심리적 현상을 예견하며 정신의학적 대비책을 제시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 전우택 교수의 연구결과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통일이 되었을 때 발생할 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충격을 신앙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인 대비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는 주체사상에 대한 신학적 연구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김상근 교수(연세대)
▣ 통일을 위한 기도
사랑의 주님. 오늘 저희들은 주님의 전에 나아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분단의 고통으로 신음한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 주님의 은혜 아니고는 아무도 통일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6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었고, 수많은 이론이 등장했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 않고는 이 일이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인간이 억지로 이루는 통일이라면,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일 수 있음도 고백합니다. 주여,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룁니다. 한반도에 평화로운 통일을 허락하옵소서. 이 일을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뜻대로 사용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굽어 살피시사, 이산가족의 고통을 헤아려 주옵소서. 분단의 고착화로 인한 민족의 고통을 하감하옵소서. 엎드려 구하오니, 주여 한민족에게 평화통일을 허락하옵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분단'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주여, 구하옵나니 주님의 뜻 안에서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음을 아오니, 주여 우리의 사욕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 한 마음되게 하옵소서.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는 예배 되기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평화 통일
1918년부터 시작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1930년 유명한 소금 행진으로 정점을 이룬 후 47년 8월15일 드디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종교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며 간디는 오히려 '조문을 해야 할 일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열정과 기질'에서 간디를 다룬 하워드 가드너는 인도의 독립이 간디의 노력이기보다는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물자가 바닥나 영국 내부에는 더 이상 인도의 독립 의지를 꺾을 만한 의지나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평화통일기도주일이 지났다. 독립은 됐어도 통일이 요원해보이는 한반도…. 오히려 평화 통일의 기대보다 이념적 양극화로 분단이 더 고착화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평양을 걸어들어가 억류된 두 기자를 데리고 나온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모습에서 평화 통일에 대한 새 희망을 발견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다(민 14:8).
/조경열 목사(아현감리교회) <국민일보 겨자씨>
▣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2월 10일 북한 외무성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이 선언에 대하여 여러 나라가 여러 가지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먼저 우리 대통령께서는 깊은 우려와 북한에 핵을 허용할 수 없다는 발언을 하셨고, 영국은 북한이 다시 한번 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자신들도 모르게 핵폭탄을 만든 것이 괘씸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일본의 분위기는 이제는 자기들도 핵무기를 만들고 무력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분위기를 높여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외교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반응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김정일 정권이 핵문제로 인하여 붕괴하게 될 것이라 예측한다. 경우는 다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죽게 된 원인 중에 한 가지는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핵무기 완성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죽게 되었다. 북한의 경우도 핵으로 인하여 김정일이 권력의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기 무덤을 자기 스스로가 파서 그 속으로 들어가 묻히게 되는 셈이다. 우리 남한 국민들은 이제부터 통일한국시대를 제대로 준비하여야 한다. 독재자 김정일이 무너진 뒤에 북한이 중국 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통일한국시대를 열어나가게 되도록 뜨겁게 기도하며 준비하여야 할 때이다. 통일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오게 될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그날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를 못하면 당황하게 되고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1장 10절과 2장 14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통일을 말해 준다. 1장 10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하나 되는 이치를 말해 준다. 이를 신학에서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의 극복이라 부른다. 교회와 세상, 하늘과 땅, 거룩함과 속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이치이다.
그리고 2장 14절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화평의 시기에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놓인 담을 헐어버리신다고 하였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죄의 담을 헐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헐고, 지난 날 동독과 서독 사이의 베를린 장벽을 헐었듯이 남한과 북한 사이의 휴전선 벽을 허물어 버리신다는 말씀이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우리들 각 자가 죄와 허물의 벽이 허물어지는 체험이 있어야겠다. 이웃과의 불화의 벽이 허물어지는 사건이 있어져야겠다. 이 일이 통일한국시대를 열어나가는 첫 출발이 될 것이다.
/김진홍 목사
▣ 하나 하나가 합해져
아무 일도 안된다 싶을 때면 나는 해머질 하는 석공을 찾아가 구경한다. 백 번을 내리쳤는데도 돌덩어리는 금 하나 보이지 않다가 백한 번째 내리치면 둘로 갈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백한 번째 때린 것 때문에 돌덩어리가 쪼개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때린 횟수 하나 하나가 합해져 돌덩어리를 쪼갠 것이다.
- 제이콥 리이스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한 겨울, 지방 소도시 시외 버스 정류소. 사람들이 차에 오릅니다. 박카스 사세요, 오징어 땅콩 사세요, 따끈한 커피 사세요 하는 잡상인들을 내려놓고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험상궂은 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한 남자는 버스 기사에게로 가고, 다른 두 남자는 밍크 코트를 입은 어떤 여자의 돈 가방을 빼앗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버스 승객들을 향하여 다들 꼼짝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여자는 안 된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좀 도와 달라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나 버스 승객 어느 누구도 도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겁에 질려 내 몰라라 창밖만 내다 볼 뿐이었습니다.
그 때 검정 색 작업복에 파리하게 보이는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멈추시오, 백주 대낮에 이 무슨 짓이오, 어서 그 여자를 놔주고 내리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세 남자는 같잖다는 듯 빙글빙글 비웃으며 그 청년에게 다가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 오늘 죽고 싶어! 하며 주먹질 발길질로 그 청년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마구 때렸습니다. 몰매를 맞으면서 그 청년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이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수적으로 이 사람들보다 우세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이 사람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의 공포심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 사람들의 단련된 주먹질이나 발길질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가 그래도 사람 아닙니까? 이런 꼴을 보고도 내 몰라 라 하는 것은 결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버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채 엎드려 있는 이 파리한 청년의 외침이 버스 안에 소용돌이 쳤습니다. 그 외침이 겁에 질린 버스 승객들 가슴속에 벼락 같이 울렸습니다. 버스 승객 중 한 사람, 한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잠시 후, 버스 승객 모두가 일어섰습니다. 일어선 버스 승객들의 눈엔 그 험상궂은 세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심 같은 것은 이미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상황은 오히려 역전되었습니다. 그 세 남자의 눈엔 당황과 공포의 빛이 역력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이 한 두 사람이면 몰라도 버스 승객 전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버스 기사는 허리를 쭉 펴고 가까운 파출소 앞에 버스를 댔습니다. 그 세 남자는 꼼짝없이 감옥으로 향하였습니다.
<참고: 조해일, 심리학자들>
▣ 둘이서 힘을 합치면
어느 궁궐에 아주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신기한 나무가 있었다. 임금님은 두 사람의 경비원을 채용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소경이었고 한 사람은 난쟁이였다. 두 사람은 신비의 열매를 따먹고 싶었으나 너무 높은 곳에 과일이 열려 있어 따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은 골똘한 연구끝에 묘안을 짜냈다. 소경이 난쟁이를 무등태우고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쪽으로 이동하며 실컷 열매를 따먹었다. 임금님은 열매가 없어진 것을 알고 두 경비원을 문책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각각 울부짖으며 호소했다. “앞을 못보는 제가 어떻게 열매를 훔치겠습니까” “난쟁이가 어떻게 저 높은 곳의 열매를 따먹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님은 두 사람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비록 옳지 않은 일이라도 둘이서 힘을 합하면 묘안이 나오는 법이다. 하물며 좋은 일을 위해 여럿이 힘을 모으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까. 협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사람이 역경을 만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가족들의 협력이다.
/임한창
▣ 중도 통합을 이룰 때다
어느 사회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이다. 여기서 목소가 크다는 표현은 강경파를 일컫는다. 좌파든, 우파든 강경파가 대세를 잡는 사회는 균형을 잃은 사회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목소리 큰 사람들, 즉 강경파가 사회와 국가를 주도하여 왔다. 남녘에서만 그러하였던 것이 아니다. 북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한은 극우에 가까운 사람들이 힘을 얻고 대세를 이끌어 왔는가 하면, 북녘에서는 극좌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권을 맡아 왔다. 우파가 힘을 얻었던 남녘에서의 좌파는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서만도 수만 명이 죽었다. 반면에 좌파가 세력을 잡았던 북녘에서의 우파는 반공 빨치산이 되어 구월산에서 수만 명이 희생당했다. 이제 이런 역사는 극복되어야 한다. 어느 사회에나 좌파와 우파가 당연히 있어야 되겠지만 그 사회를 이끄는 중심 세력은 좌와 우를 통합할 수 있는 상상력과 유연성을 지닌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 나라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좌우를 수렴하고 극복하는 중도 세력이 등장하여 국민 통합을 이루어 나가야 할 때다. 이런 시대의 요구에 우리들 크리스천들이 응답하여야 한다. 성경은 거듭거듭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치우치고 있는 때에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을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시대정신이 바뀌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겨레의 장래를 염려하며 불안해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좌와 우를 하나로 통합하는 중도 통합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김진홍
▣ 한 사람의 영향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비텐베르크 시는 마르틴 루터 시로 개명된 지 오래다. 오늘날 독일 전 국민의 98%가 루터교인이다. 하나님이 함께한 종교개혁자 한 사람의 영향은 시대를 초월한다. 독일 학교의 방학은 모두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 매년 10월1일부터 두 주간은 추수감사절 방학이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부활절에도 각각 두 주간 방학을 한다. 모든 국민은 교회를 위해 종교세를 낸다. 목사는 정부 공무원이며 모든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고 13세가 되면 1년간 매주 두 시간씩 100시간 이상 성경을 배워서 14세가 되면 입교식을 한다. 이 날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다 모여 축하잔치를 연다.
독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 되는 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손에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자.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새 역사를 만든다.
/최낙중 목사(관악교회)
▣ 민족이 하나되는 비전
정치하는 사람들은 통일의 문제를 민족적 차원보다는 정략적으로 해석하고 사람들은 자신 모르게 감정적으로 한 쪽 편들기를 하며 국민간의 갈등이 확산되어 지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견해를 가졌던 민족 통일에 대하여 대 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 방식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상호 합의 통일 방식이요. 둘째는 어느 한쪽의 붕괴에 따른 일방적 흡수 통일 방식이요. 셋째는 전쟁에 의한 무력 통일 방식입니다. 이 방법 중 대부분 사람들은 상호 합의 통일 방식을 원합니다. 남. 북한 당국자들도 합의 통일 방식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릅니다. 북한의 경우 `남반부 인민의 해방'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통일의 당위를 찾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에 따른 민족적 고통 및 불이익 해소'라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통일의 당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이나 남한의 현실주의적 차원보다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차원에서 통일의 당위성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규범에 대한 순종입니다(창1:28).
북한 동포에 대한 사랑, 나아가 해외동포와 우리의 후손까지 포함한 민족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의 이웃사랑(요15:12)에 대한 순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을 돕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고, 그들에게 전쟁 물자를 제공하는 자살 행위라고 말하여 영구 분단이 났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2,000만 동족 가운데 핵심 공산주의자는 많이 잡아도 200만이 못됩니다. 북한 백성들도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사랑의 대상이고 1,000만 이산 가족은 만남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모세와 바울도, 예수님도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분단 55년 동안 남한의 성도들은 끊임없이 남북의 통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북에 있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는 세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조선 기독교도 연맹 산하에 있는 교회입니다.
1988년 건립된 봉수교회와 1990년에 건립된 칠골교회와 같은 교회입니다. 또 하나는 가정교회입니다. 이것도 조선 기독교도 연맹 산하에 있습니다. 1998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6차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회의에 참석한 북한의 김현철 지도위원의 말에 따르면 가정교회는 전국의 도와 군에 흩어져 있으며, 목사는 30명이고 교인은 1만 4천 명쯤 된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지하교회입니다. 북한 당국의 종교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눈을 피해 지하에 숨어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지금도 이들은 7-8명 많게는 20명씩 남의 눈을 피해 산에서 다락방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들은 남몰래 울부짖으며 통일을 위해 기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픈도어 선교회(96년 7월)에 의하면 지하교회에서 신앙을 보존하고 있는 신자는 14만 명 정도라고 하고, 패트릭 존스턴 박사는 북한에 최대 9만 2천 여명의 교인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이 시대의 민족적인 과제입니다. 그렇다고 상대적 가치인 민족 통일을 절대적 가치인 하나님 나라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통일 비전은 `이기는 통일'이 아니라 `함께 사는 통일'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 할지라도, 평화(shalom)와 공의를 파괴하며 이루어지는 통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적 생활양식의 확산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통일 한국은 하나님 중심의 사회, 예수님께서 범사에 인정받으시는 사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국가가 되도록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중립화로, 베트남은 공산주의 폭력 혁명에 의해, 독일은 서독의 우세한 경제력에 의해 흡수 통일하였습니다. 남북 예멘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상극적인 체계를 국력의 비례에 따라 통합 정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적 가치가 대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개체를 강조하고, 공산주의는 전체를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개체주의(individualism)가 아닌 인간주의(personalism), 집단주의(collectivism)가 아닌 공동체 주의(communalism)를 강조합니다.
북한 사회는 철저히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결국 종교적 우상화된 주체사상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대안일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진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잘 적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겔 37:19)"라고 말씀하신 이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설날이 되어도 고향에 갈 수 없는 이웃을 보며 신앙을 통해 민족이 하나되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민족이 하나되는 비전/김필곤 목사
▣ 장벽이 무너지도록 기도한 사람들
독일이 통일국가가 된 이후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 성도가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그는 이 말씀에 의지해 베를린 장벽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다. “무너져라!” 하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는 낙심했다. 그러나 곧 그에게 깨달음이 왔다. 예수님은 분명히 “네가”가 아닌 “너희가”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그는 믿음의 동료들을 모아서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장벽 앞에서 함성을 질러 보았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실망한 채 다시 말씀을 묵상했다. 말씀에는 “당장 옮겨질 것이요”가 아니라 “옮길 것이요”라고 미래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때와 기한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구나!’ 그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드디어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하나님이 조국의 통일을 위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박상훈 목사(승동교회)
▣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한때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베르디가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오페라 <나부꼬>부터였다. 베르디는 첫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로 호평을 받고, 다음 작품 <왕국의 하루>를 작곡할 무렵 부인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을 겪었다. 낙담한 베르디는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주인 메렐리는 재능있는 작곡가의 좌절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작곡의 의욕이 솟을 만한 대본을 구했다. 메렐리는 <나부코>의 대본을 마련하여 베르디의 책상 위에 슬그머니 두고 왔다. 어느 날 베르디는 낯선 대본을 펼쳐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전체 내용은 구약성경 열왕기하편에 나오는 것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간 유대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속에서 조국을 그리며 자유를 구가하는 가사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붙여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 비탈과 언덕에서 날개를 접어라 그곳은 부드럽고 온화한 공기 조국의 공기가 향긋한 곳 맞이하라 요르단 강둑과 무너진 탑 오, 내 조국, 빼앗긴 내 조국…”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된 <나부코>는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압정 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포로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노예들의 합창’을 국가처럼 불렀던 것이다. 그 노래는 절망과 우수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독립과 통일을 바란 국민들은 베르디를 애국적인 우상으로 삼고,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열광을 아끼지 않았다.
▣ 6ㆍ25와 김구 선생
지난달 6월 25일은 6ㆍ25 동란 54년째의 날이자 김구 선생이 피살된 지 55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김구 선생이 피살된 날이 민족의 비극이 일어난 6ㆍ25와 같은 날이라는 사실은 퍽 뜻 깊은 바가 있다. 선생은 살아생전에 조국의 분단을 못내 슬퍼하면서 이르기를 “차라리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남북이 갈라지는 단독 정부 수립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말을 했던 선생이 분단 60년에 가까운 오늘에도 분단의 슬픔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채로 있는 현실을 알면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말년의 선생에 대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다름 아니라 선생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상해 임시 정부의 주석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선생은 자신의 거처였던 경교장에서 새벽마다 기도회를 열었다. 김치선 목사를 새벽마다 모시어 기도회를 열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선생은 날이면 날마다 기도회가 열릴 때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민족 분단의 슬픔을 극복하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곤 하였다. 1948년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갔을 때에도 ‘장대제 교회’를 찾아 강대상 아래 무릎을 꿇은 채 통일의 길을 열어 주시기를 여호와 하나님께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던 선생이었다.
선생이 가신 지 55년째, 6ㆍ25 전란이 일어난 지 54년째를 보내며 하루속히 분단 조국의 통분함을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무릎 꿇고 기도드린다. 그리고 그 통일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바른 통일이 되기를 하늘을 우러러 간구한다.
/김진홍
▣ 하늘 문 열기
평양과학기술대학이 지난달 16일 100만㎡ 대지에 연면적 8만㎡ 규모로 준공됐다.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 정신을 기리는 기념교회가 있었던 곳이다. 하나님의 뜻에 김진경 총장의 비전이 쓰임 받았다. 간첩 혐의로 42일간 억류되기도 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목회자와 교회 성도들의 협력도 있었다.
평양과기대에 거는 기대가 있다. 위로는 하늘문을 열며 민족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샘물이 될 줄 믿는다. 또 한반도의 미래를 아름답게 하고 세계 평화에도 기여하리라 믿는다. 성령에 감동된 운영위원과 교수진이 구성되길 기도하자. 믿음과 사랑, 그리고 헌신으로 지펴진 모닥불이 큰 불로 살아나게 하자. 성경의 진리를 실천해 헐벗고 있는 동족의 영육을 돕자. 복음으로 통일되는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의 손을 모은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잠 3:19∼20)
/권태진 목사 (군포제일교회) <국민일보 /겨자씨>
▣ 꾸준한 화해 통일교육이 필요합니다
여러 해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저는화해와 통일에 대해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해 왔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에는 에베소서 1장7-10절을 본문으로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게'란 제목의 설교를 몇 교회에서 했습니다.
(이 설교원고는 <이야기방> 예배자료/설교원고에 스물 한 번째로 실려 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또 설교를 한 뒤 그 설교를 들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대부분의 경우에 받는 느낌은 안타깝게도, 화해와 통일의 문제가 청중들에게는 그리 절실하게 않다는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좋은 것이지만, 안 되어도 별 문제가 없다는 식입니다.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삼사십대 청장년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겉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하지만 그렇게 노래하는 만큼 진심으로 통일을 바라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교역자들에게조차 화해나 통일보다는 다른 일들이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는 지난날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통일은 절대로 안 된다는 식의 인상을 주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러다가는 하나님이 우리 겨레에게 통일의 날을 주신다해도 우리는 준비 없이 통일을 맞이하여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끈질지게 반공 교육을 했듯이 앞으로는 꾸준히 평화 통일 교육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북한 동포들을 다시 만나 화해하고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두고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준비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힘쓰면서, 화해와 통일의 연습을 끊임없이 하고 평화 통일의 훈련을 부지런히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동현 목사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초등학교 시절에 불렀던 노래다. 통일은 우리시대의 명제요 온 겨레의 소원이다. 그런데 왜 통일은 그렇게 요원한 것일까? 남북이산가족이 금강산에서 만나 또 이별하고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는 고통을 안고 다시 살아야 하는 광경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통일은 우리 시대에는 못하는 거라고, 언젠가는 해야 하는데 아마도 자손대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아예 통일을 체념해 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우리 한민족은 9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일본의 불법강제병합과 강대국의 노략질에 의하여 둘로 나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지금까지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하고 언제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우리시대에 남과 북이 갈라졌으므로 통일도 우리시대에 이루어 져야 한다. 우리에게 그것을 추진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후손에게 미루는 일이야 말로 자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럴까? 통일은 일정한 희생과 부담이 따르는 일이므로 그러한 희생과 부담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의식이 깨어있어야 하고 그 문제를 정치인에게만 맡겨두어서는 일이 안 된다. 국민이 당당하게 요구하여야 한다. 이 시대에 통일을 이룩하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그렇다고 통일을 졸속으로 추진하여서는 안 된다. 서두르되 여유를 갖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우리시대에 통일을 끝내고 통일된 조국을 내 자식들에게 물려주자! 그것이 자손들에게 떳떳하게 사는 길이다.
▣ 통일에 관한 성경 말씀
0 (호1: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0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0 (에베소서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한태완 목사 360 주제별 예화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