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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치심을 아는 인간
창세기 3장에는 인류의 첫 수치심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다. 그 후부터 인류는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시작했다. 유년 시절에는 거리낌 없던 행동도 성인이 되면서 그만두게 되는 이유는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안다는 것은 동물과 구별되는 사람만의 특징이다. 성숙한 사회는 수치심을 살 만한 행동을 어른들이 하지 않는 사회다.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른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낮은 성숙도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건강한 가치관을 갖도록 지도할 뿐 아니라 스스로 본이 돼야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 고난은 수치가 아니라 기념입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50만 명이 독가스로 처참하게 학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역사의 위인이 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금세기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된 빅토 프랭클(Victor Frankle)입니다.
그가 그 혹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느 날 노동 시간에 흙 속에 파묻힌 유리병 조각을 몰래 바지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 유리조각으로 매일 아침저녁 두 번씩 깨끗이 면도를 하였답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독백으로 반복했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아침이 되면 나치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일렬로 선 유대인들 중에서 그 날 처형자들을 골라내 가스실로 끌고 가는데, 언제나 깔끔하게 면도하여 삶에 의지가 뚜렷이 나타난 이 사람만큼은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수용소에 끌려 들어간 사람의 평균 수명은 6개월이었다고 합니다. 프랭클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기대하며 견뎌내므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심리학자가 되어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처지가 아무리 암담하고 절벽 같은 사면초가라 할지라도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구름만 보지 말고 구름 위에 있는 찬란한 태양을 보아야 합니다. 벽만 보지 말고 벽 너머에 솟아오르는 푸른 싹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체념하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고난을 수치가 아닌 기념의 날로 만드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
열린편지/김필곤목사
▣ 파괴적 수치심의 극복
한 여대생이 대학원생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 내려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치심은 인간의 존재를 옭아매고 있는 감성의 병이며 인간의 존재를 내부로부터 곯아 버리게 하는 인생의 가장 큰 파괴적인 기운 중의 하나입니다. 수치심은 그늘 아래의 화초와 같이 우리의 삶을 피기 전에 시들게 합니다. 죄책감이 내가 한 일에 대한 것이라면 수치심은 내가 어떠한 사람이냐에 대한 느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첩의 딸이었다는 것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의 직업이 부끄러운 직업이었다는 것 때문에 수치심이 생깁니다. 파괴적인 수치심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만들어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할 뿐 아니라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이런 수치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수치심을 극복하려면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수치심의 노예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쓸모없는 존재, 열등한 존재, 거부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부모의 적극적인 학대(구타, 욕설, 희롱, 성적학대), 소극적 학대(무시, 과잉보호, 방치, 비난) 비현실적 기대 등으로 자신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거부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서부터 수치심은 시작됩니다. 자신을 버림받은 존재로 받아들이고 자라서도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을 수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어, 우리 집은 가난한 집이야, 나는 외모가 내 놓을 것이 없어, 나는 이혼한 사람이야, 나는 누구 앞에 말할 수 없는 직업은 가진 사람이야" 등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다른 사람 앞에 내 놓기에 지극히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신앙인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창조적으로 수치심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은폐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최대한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성과 진지성이 없어집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신앙생활도 진실성이 없고 형식적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평생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그 문제에서 자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수치심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고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숨기려 하면 더욱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밝고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우울하게 하고 침체되게 만들고 매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만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그 문제를 은폐하고 살았다면 평생 수치심으로 고통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면 어떤 수치심도 다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수치심을 삶의 유익을 위한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감정엔 힘이 있습니다. 수치심도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파괴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도 있고 창조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하면 도피처를 찾게 되고 그 도피처가 중독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되면 잠깐 수치를 잊을 수 있으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취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알코올을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아 알코올 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아 관계 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증오합니다. 수치심이 있으면 다른 것을 도피처로 삼아 그것에 중독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에너지로 수치심을 활용해야 합니다. 남편 다섯이나 두어 그 수치심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던 여인은 그 수치심 때문에 예수님 만나 수치심에서 해방되어 온 동네에 돌아다니며 메시아를 전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며 수치심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군중 속에서 남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수치심을 주는 그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질이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수치심이 예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을 때 우리의 수치도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2). 우리의 수치를 십자가 상에서 다 당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파괴적 수치심의 극복/섬기는 언어/김필곤 목사
▣ 스스로 잘난체 하면 부끄러움을 당한다
대령으로 갓 진급한 한 장교가 새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자기 어깨에 붙은 대령 계급장을 쳐다보면서 자랑스레 싱긋이 웃으며 으쓱해하고 있었다.그때 마침 이등병 하나가 그의 사무실로 들어와 경례를 한 후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대령은 그 사병의 말을 막으며 먼저 말을 했다. “잠깐만, 사병. 내가 지금 중요한 전화를 해야 하는데 거기서 기다려!” 그리고는 전화번호를 돌리고 전화통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박장군님, 장군님께서 다른 세분의 장군님과 함께 저를 만나기 원하신다고요? 네, 오늘 오후 2시에요? 네, 좋습니다. 장군님! 네,물론이지요.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그는 곧 수화기를 내려놓고 잘난 체하는 표정으로 이등병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자, 사병,무슨 일로 왔는가?” 이등병은 대답했다. “대령님 사무실에 전화선을 연결해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잘난 체하던 신임 대령은 이등병 앞에서 큰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 스스로 잘난 체하면 언제 부끄러움을 당할지 모른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줄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돼라.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린도전서 3:18)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 부끄러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매우 인상적인 그림을 발견하고 그 앞에서 한 시간 이상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사실주의 화가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베드로’라는 작품이었다. 그림 속의 베드로는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데 후회, 부끄러움, 당혹감, 절망감이 슬프도록 짙게 풍겨 나온다. 그의 두 눈에 달린 눈물은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림을 보면서 ‘사람은 저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못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최소한 부끄러워할 줄 알고 후회할 줄 알고 눈물 흘릴 줄도 알아야 사람답다.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서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악습이 안개처럼 우리 안에 스며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 해를 마감하는 계절, 그리고 대림절을 보내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영적 순수함이 우리 영혼 안에 찾아들기를 기도한다.
/손달익 목사(서울 서문교회)
▣ 나사로와 슈바이처
성경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하루하루 호사스런 생활을 했지만, 나사로는 부자의 문 앞에서 구걸하며 하루를 보내는 거지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 모두 죽게 되었고, 나사로는 천국에 가게 되었으나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물 한 방울만이라도 손끝에 찍어달라며 애원하지만, 생전에 자신의 욕심만 채웠던 삶을 책망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내용이 한사람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은 슈바이처는 풍요롭고 명예로운 삶에 젖어있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당시 부자의 삶을 살던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의술을 바쳤고, 평화와 사랑을 아프리카 땅에 심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 했습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소유가 아닌 나눔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모습이 신앙을 가진 이들의 의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류중현 / 사랑의 편지 발행인
▣ 자리에 대한 책임
수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회사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일까요? 정답은 ‘상사가 욕할 때’로 나타났습니다. 취업 전문 포탈 커리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9명 정도는 회사생활을 하다가 수치심을 느꼈으며 ‘상사로부터 욕설을 들을 때’ 가장 큰 수치심을 느낀다고 응답했습니다. ‘업무 실적을 동료와 비교 받을 때’, ‘왕따를 당하거나 자신에 대한 루머를 들었을 때’, ‘외모를 비교 당하거나 심한 성적 농담을 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높은 수치의 부끄러움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같은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참았으며, 비슷한 일을 당한 동료와 상사에 대한 험담을 하거나 술, 담배로 해결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어쩔 수 없이 혼자 삭힌다고 응답한 회사원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잘못된 몇 명의 상사들로 인해 수많은 부하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자기존중감을 잃어가며 받은 스트레스를 안 좋은 방향으로 해소하고 나중에 그 사람이 상사가 된 후에도 다시 똑같은 일들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 높은 자리의 힘을 남용해 일어나는 부작용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상사들은 마땅히 부하들을 격려하고 가르쳐야합니다. 물론 훈계가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남과 비교하거나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고 자기존중감을 심어주며 한 명 한 명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야 합니다. 남을 존중하고 남에게 존경받는 리더, 윗사람이 되십시오.
* 기도: 주님,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하게 하소서.
* 묵상: 하루 동안 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 약점은 희망이다
울창한 숲 속에 사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슴은 물을 마시려고 연못으로 갔습니다. 사슴은 연못을 들여다보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뿔에 스스로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두 다리를 보는 순간 너무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삭 마른 나뭇가지처럼 피골이 상접한 두 다리를 보고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늦은 오후 풀을 뜯던 사슴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사자가 자신을 향해 살금살금 접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슴은 날렵하고 빠른 다리를 이용해서 안전한 곳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가자 뿔이 나뭇가지에 걸리어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뒤 따라 오던 사자는 무시무시한 발톱과 이빨로 사슴을 덮쳤습니다. 사슴은 죽어가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슬프도다. 내가 부끄러워 한 이 다리가 내 목숨을 구했는데, 그토록 자랑스럽게 느꼈던 내 뿔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구나.’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것은 강점이 아니라, 부끄러운 약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약점은 주님 나라로 인도해 주는 황금 문입니다. 불완전할 때가 오히려 최선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 기도: 주님, 모두가 불완전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 묵상: 약점을 부끄럽게 생각합니까?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 은혜로 사는 삶
10여년 전 금식하며 기도하든 때를 떠올려 본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고 뭔가 돌출구가 필요했다. 사흘을 금식했다. 그러나 상황이 사흘 만에 달라질리가 있겠는가. 다시 닷새를 하였다. 아직도 실마리가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아예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3주간을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열흘쯤 지나면서 회개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면 뭔가 어떻게 되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실상 문제는 내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변화되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상황은 내가 바라는 대로 해결되고 내 자신은 달라지기를 원치 않는 모순 속에 갇혀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씨름하다가 터진 것이 회개였다. 내가 회개하였다기보다 성령께서 나를 회개시키셨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지나온 내 모습을 활동사진처럼 떠올리면서 하나하나 통회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거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로부터,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거나 버리기 싫었던 일에 이르기까지 감추어진 나의 추함과 거짓됨이 드러날 때마다 고통으로 몸을 떨었다. 노트에 하나하나 써내려갔다. 내 모습이 너무나 참담하여 실로 가슴이 쪼개지는 아픔을 싸안고 자복하며 몸부림하였다. 막연히 탈출구를 찾으려고 시작했던 기도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처절히 발견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몇 가지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는 나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거짓되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작은 거짓말 하나에 얼마나 깊은 교만과 이기심이 숨어 있는 지를 보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엄청난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죄’는 실체라는 사실이다. 죄는 나를 사로잡고 움직이는 힘이었다. 삶을 내 의지대로가 아니라 죄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었다. 성경에서 바울선생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고백하신다.
셋째 죄는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의 실상을 온 몸과 영혼으로 실감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하고 두려운 체험이다. 죄된 마음이 곧 지옥임을 확연히 보았다. 바울사도의 부르짖음 떠올랐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죽기를 간청하였다. “하나님 저에게 용서하신다는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저를 지금 불러 가 주소서 ”
이제 오늘 내가 이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어인 일인가. 오직 한마디 “은혜”일 뿐이다. 누군가의 말 그대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죄됨을 참으로 깨달은 날이 다시 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해산의 고통이 있듯, 다시 태어남의 고통 또한 죽음처럼 깊고 큰 것이었다.
죽음 같은 죄를 실감한 자는 또한 그처럼 큰 자비를 비는 것 외에 다른 필요를 느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이 때에 다가오는 용서의 음성은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환희요 감격이다. 그야말로 “은혜”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내 인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덤으로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 뿐이다. 그러나 이 덤으로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이전의 천날보다도 귀한 것이 아닌가. 때로 내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둣 살다가도 정신을 가다듬고 보면 나는 또 다시 그분의 은혜로 살고 있음밖에 달리 확인할 것이 없다. 그리고 아직도 내 속에 뿌리 깊이 남아 변화되기 어려운 속성들이 있음을 실감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요즈음 한국은 썩은 부조리들을 있는대로 들춰내어 척결하느라 여념이 없다. 정가에서는 의원들, 장관들이 옷 벗김을 당하고 군가에서는 별 떨어지는 소리가 대지를 놀라게 하고 있다. 과거의 수치들이 드러나는 고통이다. 국민들은 속이 시원하도록 펼쳐지는 개혁의 물결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이런 마당에 자신을 돌아 봄이 마땅하리라.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별반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요 그런 유명한 이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자도 아니다. 그러나 나 홀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은 사람들 앞에 벗겨진 저 분들의 수치나 고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추함과 부끄러움이었다. 비록 사람에게 벗김을 당하여 드러나는 개혁의 대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를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나를 벗기시고 계시다. 아니 내 스스로 벗은 모습으로 그 분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깨우친다. 남의 수치를 벗겨내는 일에 발이 빠른 세태속에서 조용히 그 분 앞으로 돌아가 나의 오만과 죄됨을 내놓고 용서받을 사람임을 인정해 보자. 그리고 새로운 삶의 자리를 부여받기를 여쭘이 마땅치 않겠는가. 바울선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예수님의 첫 메시지였다. 물질욕과 명예욕 뒤에 숨어 우리를 조종하는 ‘죄’로부터, 빼앗긴 영혼을 되찾고 삶을 저 속 깊은데서부터 새로이 하기 위해 그분 앞에 서보자. 때묻은 나를 보는 아픔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길이다. 그리고 만날 것이다. 그분의 넓으신 품, 우리를 새로이 만들어 내시는 사랑의 손을 그리고 용서의 음성을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상진
▣ 장애는 친구다
“손님, 토요일 날 이렇게 혼자 앉아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면 영업에 지장이 많습니다. 나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개인적인 아픔과 함께 목회를 그만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실의에 빠진 서른여덟 살 남자에게 카페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몰려오는 창피함을 뒤로한 채 카페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다가 이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래, 내가 카페를 하는 거야.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카페 마담이 되는 거야!’
다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서른여덟의 나이에 카페를 해보겠다고 결심한 이 남자는, 현재 전국에 20개 지점이 있고 한국 토종 브랜드로서 외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사장입니다. 지승룡 사장은 그의 책 「선배처럼 살아라」에서 민들레영토를 하나씩 만들 때마다 제일 없는 게 돈이었고, 경험과 지식과 도와줄 사람도 없었지만 반드시 따라다니는 것이 장애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동행하는 장애물을 친구로 받아들였을 때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여운학(사랑의편지 발행인)
▣ 사랑의 힘
라이프(Life) 잡지의 어느 기자가 영국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지하철 대합실 식당에 앉아 느지막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바로 앞자리에 연로한 부부가 앉았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정답게 앉아 남편은 비스킷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를 주문했답니다. 옷차림으로 보아 노부부는 퍽 가난한 듯 보였답니다. 두 사람은 그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마주보면서 손을 잡고 조용히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마침내 주문한 비스킷과 차가 나왔답니다. 남편은 천천히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면서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답니다. 비스킷을 먹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동자에는 한없이 고요한 평화가 맴돌았답니다. 그때 남편은 먹던 비스킷의 반을 아내의 테이블 앞으로 밀어놓더니 자신의 입에서 틀니를 뽑아 옆에 놓여져 있는 냅킨으로 깨끗이 닦아서 아내에게 건네었답니다. 아내는 그 틀니를 받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에 넣고는 천천히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고,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맛있게 먹는 아내의 모습을 다정스레 바라보았답니다. 코끝이 찡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 기자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고 합니다. 이들 노인 부부는 비록 각자의 틀니를 가질 만큼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이것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그 어떤 힘보다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가난도 수치도, 창피함도, 수모도 그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버립니다. 소포클레스는 “참다운 사랑의 힘은 태산(泰山)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그 힘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금일지라도 무너뜨리지 못한다.”라고 말했고, 체홉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만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 체면과 형식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23:23)
서양에서 전해오는 재미있는 실화가 있습니다. 스페인 남단에 있는 지브롤터는 영국에서 유럽 대륙 진출의 교두보적인 요새였습니다. 스페인은 무려 4년 동안이나 이 지역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하였습니다. 스페인 여왕은 "지브롤터 성에 스페인 깃발이 나부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억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사령관은 어느 날 아침 성벽에 스페인 국기를 1분 동안 휘날리게 했습니다. 그러자 여왕은 군대를 철수시켰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실리와 체면, 진실과 형식의 기로에서 인간은 진실의 탈을 쓴 체면을 택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목사인데, 혹은 장로인데, 누구인데 .... 라는 인간 유전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헌금은 이 정도 해야 하고, 차는 이 정도를 타야 하고, 예배는 이만큼 참석해야 하고.... 체면과 형식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참된 행위보다 더 위에 둡니다. 오직 거듭나는 체험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외식과 거짓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체면을 중시하고 외식하는 자들은 언젠가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날이 옵니다.
* 기도: 외식과 거짓을 버리고 순수하고 참된 믿음을 갖게 하소서.
▣ 십자가를 내가 지고 (찬송가341장, <통> 367장)
1.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맏고 영생 복을 얻겠네
2.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세상 친구 간사하되 예수 진실하도다
예수 나를 사랑하사 빛난얼굴 뵈시면
원수들이 미워하나 염려할 것 없도다
3. 내가 핍박 당할 때에 주의 품에 안기고
세상 고초 당할수록 많은 위로 받겠네
주가 주신 기쁨외에 기뻐할 것 무어냐
주가 나를 사랑하니 기뻐할 것 뿐일세
아 - 멘
▣ 수치, 창피. 부끄러움에 관한 성경 말씀
0 (시편 22: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0 (시편 25: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0 (시편 25: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0 (시편 35:26) 나의 불행을 기뻐하는 저 사람들은, 다 함께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고 말 것이다. 나를 보고서 우쭐대는 저 사람들은, 수치와 창피를 당할 것이다.
0 (시편 37:19)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0 (시편 69: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0 (시편 70:3) 깔깔대며 나를 조소하는 자들이 창피를 당하고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0 (시편 7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0 (시편 129: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0 (잠언 19: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0 (이사야 45:16)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창피한 일을 당할 것이며, 치욕으로 물러갈 것입니다.
0 (이사야 50: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0 (예레미야 2:26) 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0 (예레미야 48:13)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
0 (로마서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0 (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한태완 목사 주제별 예화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