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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김정화
'나마스테', 탈식민주의적 경계 허물기
1. 디아스포라, 그리고 저항하기
문학은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것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인정한다면 이 시대의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소설에서 작가의 시각과 의식반영이 독자에게 미치는 파장은 클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8세기 이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인종적, 문화적 차별과 정치적 억압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유럽 중심의 백인 우월주의가 만들어 낸 제국주의적 수사학을 식민주의라 이른다면, 역사적 사건을 피지배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탈식민주의다.
즉, 작가가 지배자들에 의해 왜곡된 사실을 고발하고 파헤쳐 나가려는 시선이 바로 탈식민주의 담론이 가지는 속성이라 하겠다. 이런 까닭으로 탈식민주의적 글쓰기와 글읽기는 저항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시키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인종문제, 계급문제, 성차별 등 피지배자들에게 노출된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언술행위이다.
따라서 박범신의 장편소설 '나마스테'(한겨레출판, 2005)를 통해서, 작가가 당대 사회구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주노동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적 저항방식은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 탈식민주의적 문화이론을 대입시킬 필요가 있다.
고국을 떠나 타국에 정착한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 것이며 다원성의 차별성을 인식하고 깨닫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인식은 당대 문화와 사회를 진단하고 모순을 성찰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최근에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한국에 와서 일을 하다가 죽음으로 항의하는 이주노동자의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주노동자의 경우 글로벌리즘이 만든 21세기 노마드이자 이 시대의 비참한 추방자이다.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은 대다수가 불법체류자들이다. 그들은 경제적 궁핍에서 막 벗어난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종사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임금을 받으며 각종 수탈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온 지 15여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에 대한 정책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가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입장은 한국 경제 구조 안에서 필요 노동력만을 충당한다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급성장을 이루어 노동력 수출국에서 노동력 유입국이 되었지만 동일한 아시아계 유색인종임에도 불구하고 유색 아시아계 이주노동자의 차별이 더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순을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마스테'의 주인공 카밀과 같이 전체 이주노동자의 70%는 현재 미등록자이다. 그들은 법적 테두리 밖에 존재하며 차별과 위협적 조건들이 뒤따르지만 뚜렷한 해결방안을 갖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임금체불, 감금노동, 인권유린 등의 문제를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재현의 주체와 그 주체들을 지배하는 담론을 통해 문학 속의 탈식민지적 경계 허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친밀하고도 낯선 이웃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문제와 한국인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다룬 작품으로 ??나마스테??는 주목된다. 작가가 지닌 이주노동자에 대한 파편화된 시선은 '카밀', '신우', '사비나'라는 인물 개체를 통해 드러난다. 특히 주인공인 네팔 출신 노동자 카밀을 통해 "권리를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으로 자아를 추방당한 이주노동자들의 억압된 삶을 재현하고 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소외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과 '피부색깔로 점수를 매기는' 비참한 삶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 작가의 집필동기라고 볼 수 있다.
2003년 불법체류자들의 강제추방령이 내려진다. 카밀 역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들은 삶은 매순간 공포와 불안이 도사리고 있으며, 심지어 죽음의 위협도 멈추지 않는다.
가진 자의 횡포와 억압 속에서도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설산만큼 투명하고 선한 카밀을 통해서 과거를 태연히 잊고 사는 우리들 마음속의 식민지 근성을 들추어내고 타자의 문화적 이질성의 장막을 벗길 필요가 있다.
"한 청년이 달려오는 전철을 향해 부나비처럼 뛰어드는 장면이 텔레비전 9시 뉴스에 그대로 방영됐다. … … 2003년 11월 11일의 일이다. … … 그 청년은 서른한 살의 크리켓 선수 출신으로 코리안 드림을 쫓아 한국에 온 스리랑카 사람 다르카였다. 영안실로 찾아갔다. … … 그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해서 도무지 찾아가지 않고 배겨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95쪽)
"자본주의 세계통합 국면에 놓여진 우리의 삶이 미치광이 삶은 아닐까하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미 너무도 독종이 돼서 신으로 가는 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도 우리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없는 참혹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398쪽)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희생되어진 이주노동자의 모습에서 작가적 소명의식이 드러난다. "그(다르카)를 죽음으로 내몬 수많은 '코리안'으로서의" 반성을 요구한다. 만연한 물신주의 속에서 신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의 허상을 흔들고,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계급적 층위로 바라보는 거리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되고 있다.
주인공 카밀과 사랑에 빠진 한국 여성 신우를 통해, 사랑의 베풂 행위의 주체로서 하위주체에 대한 우월감의 시선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40년 전의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설움을 겪었던 우리의 모습을 들추어보는 일이며 우리 안에 내재된 편협과 잘못된 시선을 드러내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해외 식민이 되어 그들의 물질적 충족과 문화적 개척을 꿈꾼다. 그러나 그 꿈은 환상이며 신기루임을 곧 깨닫게 된다. '나마스테'속에 드러나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한국인의 비하적 태도와 우월감은 식민주의 수사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 과장님은 물어봐요. 어제도 물어보고 오늘도 물어봐요. 네팔에도 해가 뜨냐, 니네 나라에도 달이 뜨냐, 니네 나라 여자들도 애를 낳냐 ……."(56∼57쪽)
어이 촌놈……. 하고 그는 나를 불렀지요. 한국에 와서 배운 첫 번째 말, 촌놈이 됐습니다. 나는 네팔 사람이라는 뜻의 한국말이 촌놈인 줄 알았어요.
어이 촌놈 니네 나라 택시 있냐.
운전사가 묻는 것이었어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으나 나는 못 알아들은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나를 비웃는 질문이었으니까요. 내가 대꾸해주면 그런 사람 또 묻도 또 물어요.
니네 나라, 텔레비전도 있냐.
니네 나라, 비행기 있냐.
그런 한국 사람들은 한 가지 생가밖에 안 해요.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요. 세상에 더 부자와 더 가난한 사람, 두 종류밖에 없고, 네팔은 거지의 나라이니, 거지들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100∼101쪽)
식민주의자들은 그들 눈에 미개하게 비친 이주노동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함으로써 자신들 문명의 우월함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배계층은 주체라고 생각하는 자신들과 차별하기 위해서 주변인들을 의도적으로 배척한다. 파농이 언급한 것처럼 원주민들이 개인으로 취급된 적이 없고 그들은 항상 함께 고통 받는 존재였듯이 이 땅의 이주 노동자들 역시 개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여전히 문화적으로 제3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제3세계의 문화나 인종에 대해서 냉대적이다. 이는 서양에서 싹튼 인종주의가 해방이후 여과 없이 수입되어 그대로 한국인의 의식 속에 내면화된 까닭이다.
한국의 집단적 문화 성격은 다른 집단을 살펴보는 방식에도 편견을 가진다. 이주 노동자들과도 다양한 문화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문화가 중심이라는 의식은 다른 문화들을 흡수하거나 배타하는 방식으로 결정한다. 그동안 서구 선진국을 바라보며 느꼈던 열등감을 오늘날 이주노동자를 통하여 역차별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부정이며 그들은 야만과 무지라는 동일성에서 비롯된 이분법적 폭력이다.
박범신은 나르시즘적 권위에 고착한 채,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사유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주노동자들은 처음 그들이 배운 비속어나 욕설을 다시 지배자들에게 되돌려주어 역공하고 교란시켰더라면 교활한 교양(civility)을 가지고 어느 정도 저항 방법에 접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십대를 미국 땅에서 이민생활로 보낸 신우는 자신을 '무적자'라고 생각하며 본질적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와 오빠를 1992년 LA흑인폭동 사건으로 잃었고, 귀국 후 6개월 동안의 짧은 결혼은 강요된 섹스와 폭력으로 유린당했던 상처받은 삶이었기에 신우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나는 무적자였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걸었던 아메리칸 드림이 박살날 때 나는 젊은 날도 박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무적자니까……아,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어."
나는 울면서 말했다.(중략) 나는 타고 남은 재 같은 여자였다. 적어도 카밀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135∼136쪽)
그러한 포기와 절망 끝에서 무시당하고 학대 받는 외국인 노동자 카밀에게 여자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새로운 빛을 만난다. 신우는 카밀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바라본다. 그리고 카밀을 위해 그 세계에 뛰어든다. 그리고 힘겹게 만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이 부서져라 헌신한다.
신우는 카밀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한다고 믿었지만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고 본질적으로 내가 속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카밀이 결정적으로 상처받은 것은 "니네들……그렇게 가증스러운 인간인지 몰랐어."라고 부르짖는 신우의 말 때문이었다. 신우는 "니네들과 우리……사이엔 건널 수 없는 피부색의 강, 민족의 강, 그리고 우열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암시하며 서로 배타적일 수 없음을 강조했다.
평정심으로 잘 숨겨졌던 내면은 어느 순간 수면으로 올라와 카밀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신우 안에서 갈라진 인종과 나라,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 결국에는 철저하게 구분되는 삶이었다. 이러한 신우의 행동은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신우의 헌신적인 모성만으로 디아스포라적 현실 문제를 접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신우의 양면성은 대다수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이중적 태도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뺨 맞고 걷어채이고, 매일 밤 야간작업까지 해도 꿈꾸던 대로 돈은 잡히지 않을 때, 코리안 드림이 뭔지, 생각하게 돼요. (중략)
한국에는 법, 없어요. 한국 사람 지켜주는 법만 있어요. 미국 사람, 불란서 사람, 영국 사람, 지켜주는 법 있어요. 그러나 네팔 사람, 스리랑카 사람, 필리핀 사람, 방글라데시 사람 지켜주는 법 없어요.(83∼84쪽)
부르조아들은 법률로 개체화가 되는데 이주노동자들은 개체가 없다. 오늘날 우리는 글로벌이라는 이름 아래서 마치 국가 간의 경계를 뛰어넘고 시간의 장벽을 부수며 커다란 원을 그리는 듯하지만 그 안에 주역들은 누구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희생자 없이 누구나 승리자가 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신우가 무의식적으로 한국과 네팔을 분리한 것처럼 작가 박범신도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더욱 식민화시키는 담론을 만들어 내고만 것이다.
3. 재현의 비틀림과 응시의 결핍
외국인 근로자 고용법이 발효되면서 한국 정부는 고용허가제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법 시행 전 4년 이상 된 불법체류자들을 강제출국 시킨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농성과 자살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카밀은 거센 탄압에 맞서서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른 저녁 뉴스를 방영하는 중이었다.
"신원 미상의 외국인 노동자가……."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중략) 시청 앞과 광화문 일대를 비롯해 도심의 불빛이 화려하게 내려다보여서 가끔 사람들 눈을 피해 깊은 밤이나 새벽에 밤고양이처럼 옥상에 들른다고 했던 바로 그 호텔 건물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클로즈업되어 화면 가득히 담긴 '더 이상 죽이지 마라'라는 검은 글씨였다.(359∼360쪽)
카밀은 불빛이 화려한 수십 층 건물 옥상에서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를 들으며 많은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지상으로 뛰어내리며 장렬히 산화한다. 분명 카밀은 이전의 전태일보다는 스펙타클해졌는데 전태일의 죽음에서 느낄 수 있는 숭고함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느껴질 뿐이다.
전태일이 노동환경개선을 주장하며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저항방법은 1970년 11월로 이미 30년 전의 방식이다. 그때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당대 사회의 거름이 되었고 한국노동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고 지향이 가능했다. 이러한 저항 방식은 1970년대 우리의 노동자 문제와 2000년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똑같이 생각한 작가의 오류라고 지적할 수 있다.
카밀은 자신의 몸을 버릴 정도로 한국을 증오하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사비나라는 옛 사랑을 잃었지만 신우와 애린이라는 새로운 사랑을 찾았고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다.
나 한국 역사, 배웠어요. 역사 배우고 한국 교포들 얘기 듣고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지요.
아, 한국 사람들은 우리들 심정 잘 알겠구나.
그렇지 않은가요, 누나? (중략)
미안해요, 누나.
한국 사람 욕하고 싶어한 말이 아니니 이해해주세요.
저는 한국 싫어하지 않아요. 정 많은 좋은 사람 많이 만나봤어요. 또 싫어한다고 해도 그래요. 여기 와서 몇 년 지나면 다 정들거든요.(중략) 한국 사람들 그것만은 알았으면 좋겠어요. 여기 온 외국인 노동자들, 어디서 살든 한국 사람편 된다는 거요. (84?85쪽)
다른 자살한 이주 노동자는 돈이라는 현실적 동기가 있었지만 카밀은 자신이 번 돈을 사비나에게 다 줘버리고도 아무렇지 않다. 그는 네팔의 카펫공장 아들로서 한국에 와서 고생할 필요도 없고 또한 죽을 동기도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가족을 포기하고 분신이라는 결말을 택하게 되는 것과, 당연한 과거 운동권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이 소설이 가진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주변인들은 결코 온전하게 한국인이 될 수 없는 존재이며 주체가 되지 못함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로서의 삶의 방식은 그 사회의 규범과 관습을 인지하고 순응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주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소멸하는, 도태되는 하위계층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구도에서 죽음은 욕망의 종결을 의미한다. 주체가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이 어긋남을 깨닫는 순간은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이며 타자가 살아나는 순간이다. 이러한 타자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환상과 욕망을 끝까지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욕망의 종결, 즉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인공 카밀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역동적인 삶의 실천이 결여된 점이 무엇보다도 아쉽다. 작가는 이주 노동자들의 힘들고 고달픈 삶만 작품 속에 삽화로 나열시켜 놓은 결과가 되고만 것이다.
탈식민주의의 이론에서 식민 주체의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된다. 탈식민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서 식민 주체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사이드는 식민주체가 갖는 정체성이 서구 담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과정에 대하여 '오리엔탈리즘'으로 명명하였다. 이것은 서구에 의한 동양의 대상화 타자화의 경험과 그에 따르는 가치체계가 동양에 대한 정형성을 낳게 되고 선과 악, 강함과 약함, 밝음과 어두움 등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사이에 고정된 대립항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은 동양의 이미지가 열등한 타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되어 식민지 유색 인종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 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이 논문의 화두로 삼았던 '하위주체(subaltern)는 말을 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의 결론은 "하층민, 혹은 하위 계급을 의미하는 하위주체의 말은 남들이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대표할 수 없으며, 타인에 의해 대표되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즉, 하위주체를 주체나 계급이 되지 못한, 한마디로 재현으로부터 계속 미끌어져 나가는 존재로 개념화하게 된다.
즉, 식민의 상황 아래서 피식민 주체는 순응을 통해서 지배자와 같은 모습을 모방하지만 약간의 비틀림, 의도된 역치 등으로 저항을 도모하려 하는데 결국 지속적으로 말없음의 빈공간으로 남게 되고 만다.
'나마스테'에서도 스스로의 입장에 목소리를 부여할 수 없는 하위적인 여주인공 신우를 대표하여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말하려고 한 박범신이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지고 만 것이다. 주인공 카밀은 잉여자질들을 보여주지 못한 채 서발턴(subaltern)까지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공장 프레스기에 손가락을 잘리고도 산재처리를 받지 못한 채 강제 추방당했으며, 불법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가 다치거나 죽었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계급 이하의 계급(underclass)'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밀은 한국의 노동자 속에 감금되고만 것이다. '나마스테' 속에는 오로지 작가의 동정적 시선만 있고 이주노동자들의 응시가 없다. 응시가 결여된 채 나타나는 시선은 결국 권력 속으로 이동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인 노무자와 조선족 다방 종업원 등의 주변부적 타자들을 소재로 배치한 이명랑의 소설 '나의 이복형제들'에서는 적어도 응시가 나타고 있다. 외부에서 유입된 비주류적 인물들은 주류에 의해 집중적으로 수난을 당하는 피해자들이지만 이명랑은 계몽주의적 어법으로 이들을 고난 받는 민중의 전형처럼 그리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주변부적 타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당당하게 인식하면서 강렬한 '생의 의지'로 주어진 현실을 넘어서려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마스테'에서 카밀이 보여준 저항방식과는 크게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4. 매끄러움과 얼룩, 기억하기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The Wretched of the Earth)을 통해 탈식민 저항전략으로 폭력적 저항론을 제시했다. 피지배자들에게 있어 폭력과 저항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러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진정한 민족문화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즉 파농은 식민지인이 저항하고 투쟁하며 도전하는 것을 의식 있는 인간이 되려는 열망, 의식 있는 인간으로 대접받으려는 몸부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폭력적 저항은 식민지 민중의 의식각성을 중요시하는 진보를 지향한다.
그러나 바바는 라캉에게서 빌려온 '흉내내기'(mimicry)로 저항의 전략을 설명하기도 한다. 흉내내기는 적을 이겨내기 위한 닮음이요 위장이다. 전쟁에서 흔히 적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잠입할 때 적과 똑같이 위장하는 것처럼, 겉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내심으로는 바로 그 매끄러움에 저항하는 얼룩을 지니게 된다. 즉 효과적인 저항을 위해서 모방은 끊임없이 그 미끄러짐?초과?차이를 생산해야 한다.
또한 호미바바는 모든 권위들이 이미 해체된 것으로 보이는 혼성성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현실 세계의 저항의 공간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바바는 혼성성이 단지 식민주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인 저항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바는 재현을 차이와 혼성성이 생겨나는 자리로 본다.
'혼성성'(hybridity)이란 완전히 하나는 아니면서 빼 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재현물과 재현 대상의 관계의 속성, 즉 재현의 거리를 암시한다. 그 거리에 의해 재현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왜곡시키고 전위시킨다.
바바는 혼성성의 예로 전도사 아눈드가 인도의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재구성한다. 식민지 원주민들은 성서의 권위를 영국인의 책과 연결시키려는 아눈드의 재현을 거부하고 고기를 먹는 야만적인 영국 사람이 그 책을 주었을 리 없다고 부정하면서, 성서의 권위를 자기들의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재현물과 대상 사이에 끼어드는 이러한 왜곡과 전위는 바로 바바가 말하는 혼성성의 문화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 된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타자,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듯하나 실제적으로는 당대의 사실주의적 묘사, 그리고 도덕적 경험 및 일탈 등 다양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산업사회의 소비 상품의 유형적 특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카밀은 한국 안에서 자신 스스로 응시를 보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결국 욕망을 포기해버리고 마는 아쉬움을 남기며 소설은 끝맺음을 맺었다.
이에 박범신은 탈식민 작가들처럼 지배자들에 따르는 척 하는 '사실적 모방'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교란시키고 전복시키려는 전략인 '흉내내기'(mimicry)의 소설쓰기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주 노동자 문제를 구체적 현실에 대입하여 분석하고 성찰하지 못했다. 등장인물들이 생생한 캐릭터로서 고유한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다면 아바타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그러므로 지배자의 시선에서 피지배자를 말살시키거나 침묵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문화가 혼합되는 상호관계를 유지시켰어야 한다. 이러한 상호관계는 서로의 문화가 충돌하여 새로운 가치와 관습을 만들어내는 통합의 과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이 소설을 쓴다면, 피지배자(이주노동자)들은 이제 카밀처럼 1970년대 전태일식의 죽음의 저항 방법이 아닌 혼성적 저항과 양가적 저항의 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주노동자들이 이 땅에 상륙하는 순간부터 이미 신화적 순수성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지배자들은 이러한 주체의 '혼성성'을 먼저 인정하고 '양가성'의 전략으로 식민자(이주노동자)들의 저항전략을 앞질러 교란할 때, 비로소 탈식민적 저항은 성취될 수 있다.
'나마스테'에서 혼종적 주체들은 탈식민지적 경계를 넘지 못했다. 결국, 이 땅의 '카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주노동자들의 역사는 계속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 할 것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우열'이나 '틀림'이 아닌 차이(difference)로 바라보는 상생관계를 실천해야 한다.
[신춘문예 평론] 당선소감 / "평범한 날들이 모여 특별한 날"
그날도 평범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하고 편집 일을 하고 점심 후 커피 잔을 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때였다. 낯선 번호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평론부문 당선 소식이 순식간에 그날을 '특별한 날'로 바꾸어버렸다.
긴 시간 동안 문학과 씨름했다. 시를 읽고 소설을 공부하고 수필을 썼다. 비평도 문학적 글쓰기라는 신념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비평의 높은 벽 앞에서 수없이 주저앉았다. 비평이라는 산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나의 필사적인 그러나 분별이 얕은 사유적 감각은 논리적 문턱에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기다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석수장이가 내리친 백한 번째 망치질에 돌이 금 가는 것은 백 번의 망치질이 모여진 결과라는 것을 안다. 마침내 보답을 주듯 '평범한 날'들이 모여 '특별한 날'이 되었다.
맨살을 드러낸 층층나무 뿌리를 본 적이 있다. 예전에는 나무의 초록 잎과 그늘이 좋았는데 이젠 빈 가지를 받들고 있는 민낯의 뿌리가 좋다. 문학비평도 한 그루 나무를 보는 일이라 생각한다. 무성한 잎사귀 속에서 줄기를 찾아내는 손, 그 몸피에서 사계절의 색을 보는 눈, 비탈을 딛고 선 뿌리에서 꼭대기의 우듬지 소리를 듣는 귀. 그것이 나무와 소통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작가의 글 노동이 담긴 작품을 온몸으로 안을 때 비로소 소외된 자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사는 부산항 주변에는 이 시대의 대표적 노마드라고 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가 많다. 그들의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저항하지 못하는 잉여자질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가야트리 스피박의 "하위주체는 말을 할 수 있는가?"에 답을 찾아 나서는 일이며, 실패가 많은 내 삶의 흔적을 봉합하는 방편일는지도 모른다.
힘든 비평의 문을 열어준 심사위원님과 광남일보에 감사드리며, 비평의 길에 등을 밝혀준 내 문학의 지도교수님께 고개 숙인다. 아울러 남경 양의 응원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약력
ㆍ 1964년 경남 김해 출생
ㆍ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
ㆍ 2006년 '수필과비평'지로 수필 등단
ㆍ 월간 '문학도시' 편집장
ㆍ 신곡문학상, 천강문학상, 부산문학상 수상
ㆍ 수필집 '새에게는 길이 없다', '하얀 낙타'
[신춘문예 평론] 심사평 / "작품해석과 논조 차분하게 전개"
2015년 광남일보 신춘문예의 평론부분을 심사한 결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편의 글이었다.
우선, '나마스테, 탈식민주의적 경계허물기'는 박범신의 장편소설 '나마스테'를 분석한 글이다. 탈식민주의 문화이론이란 분석의 틀로 작가가 우리사회를 어떻게 이해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주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를 밝히고 있다. 특히 대상으로 한 작품이 우리 삶의 문제적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적절했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과 논조 또한 차분하게 전개되고 있다. 중간에 작가의 세계관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결론부분에서 언급할 문제라는 점을 지적해 둔다.
'상실된 나의 pathetic한 계보학'은 정용준의 '어느 날 갑자기 K에게'에 대한 작품론이었다. 이 글은 문학비평이 대상 작품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했다. 비평의 문장이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어휘의 조합이 아닌 비평언어의 적절한 이해와 운용으로 이루어져야 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운명의 당위성과 실존적 의지에 대하여'는 영화 '관상'에 대한 작품분석이었다. 유려한 문체와 자신의 논리를 설득력 있게 펼쳐가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작중인물들 사이의 갈등구조, 운명과 현실 사이의 길항관계 등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적인 판단과 감상이 뒤섞이면서 대상과 평자 사이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부분이 자주 눈에 띠었다.
이에 선자는 오늘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반성을 형상화한 작품선정, 작품분석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간 '나마스데, 탈식민지주의적 경계 허물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신덕룡 광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