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도군의 상징(象徵) ♣
○ 군 기(郡 旗)
세계 유일의 사장교와
신비의 바다길등을 형상화 함으로써
세계로 뻗어가는 문화관광 진도를 의미한다.
○ 군 화(郡 花) 동백꽃
남해안 지대에만 자생하는 꽃으로
진도군의 산야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꽃잎이 붉어 여심화라고 불리우는데
군민의 순박한 마음과 일치한다.
○ 군 목(郡 木) 후박나무
연중 푸르른 상록 활엽수로
진도군의 해안지대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나무 껍질은 귀중한 한약재로 쓰인다.
관매도의 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212호로
지정 되어 보호하고 있다.
○ 캐 릭 터 ○
진도개는 주인에게 충성심이 강하고 민첩하며 슬기롭다.
천연기념물 53호인 진도개의 친근한 이미지를 상징화함.
○ 군 조(郡 鳥) 백 조
온 몸이 순백색으로 상서로운 새로 불리운다
해마다 진도군을 찾아 풍년을 기약하며 한 겨울을 지낸다.
♣ 진도군 일반현황 ♣
기본현황
○위치 : 대한민국의 최서남단 진도~목포 56km, 광주 132km, 서울 452km
○기후 : 연평균 13℃의 따뜻한 기온
○면적 : 430.7㎢(행정구역 1읍 6면 2출장소, 242개 마을, 753개 반)
- 농경지 126.7㎢(29.4%), 임야 254.6㎢(59.1%), 대지 6.7㎢(1.5%)
기타 42.7㎢(9.9%)
○인구수 : 15,580세대, 34,181명(외국인 250명 포함)(2009.12.31 기준)
○도서수 : 230개(유인도 45, 무인도 185), 해안선 : 602.95㎞(전남의 10%)
문화재
○ 유형문화재 : 28종(국가지정 10, 도지정 18)
○ 무형문화재 : 10종(국가지정 4, 도지정 6)
○ 향토문화유산 : 7종(유형 5, 무형 2)
※ 진도의 3보 : 진도개, 구기자, 돌미역
※ 진도의 3락 : 진도민요, 서화, 홍주
재정규모
○ 재정규모 : 2,454억원(2011년 2,338억원, 116억원 증)
○ 회계별
- 일반회계 2,384억원, 특별회계 70억원
○ 재정자립도
- 11.42% ( 1인당 부담세액/수혜액 : 191천원/7,323천원 )
♣ 진도군 연혁 및 유래 ♣
선사시대
신석기시대 이전의 유물ㆍ유적은 발견된 것이 없으나, 고인돌ㆍ석부ㆍ선돌 등 청동기ㆍ철기시대의 것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 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 백제시대에는 인진도군(因珍島郡)이라 칭하여 관부는 현 고군면 고성에 있었 으며 영현(領縣)으로 현 고군면 일대와 군내면 방면에 도산현(일명 抽山․ 猿 山)과 현 임회면 방면에 매구리현(買仇里縣)이 있었다. 의자왕 20년(서기 660년) 7월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게 되어 원산현은 당나라가 현 나주에 설치했던 대방주의 도산현(徒山縣)에 속했다.
○ 신라시대에는 경덕왕 16년(757년)에 인진도군은 진도현으로 바꾸고 도산현 을 뇌산군(牢山郡)으로 승격 독립하여 매구리현을 첨탐현(瞻耽縣)으로 바꾸어 뇌산군(牢山郡)에 따르게 하였다. 이때 이미 무안군 영현이 되었다는 고려사 지리지 기록이 있다.
○ 고려시대 태조 23년(940년) 3월 전국에 행정구획과 주․군명을 고칠때에 뇌산 군(牢山郡)을 폐지하고 뇌산군은 가흥현, 첨탐현은 임회현, 진도현을 두되 나 주에 소속시켰다. (물론 이시기를 현종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찬기록인 「옥주지」에는 진도의 치소를 용장으로 옮기고 옛진도현을 외이현이라 했다는 기록 이 있다.
○ 원종 11년(1270년) 6월에는 삼별초 배중손이 왕족 승화후온을 왕으로 추대 하고 이해 8월 용장사를 도읍으로 정하고 몽고군에 저항하였으나, 9개월만인 1271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의 장군 김방경이 몽고 원수 혼도 등과 함께 침 입하여 삼별초를 토벌함에 진도가 함락되어 주민의 대부분은 몽고로 잡혀가 고 진도는 거의 빈터가 되었다. 그 후 설상가상으로 충정왕 2년(1350년) 7월 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왜구의 침입으로 모든 주민의 불행과 고난이 겹쳐 내 륙으로 피난을 하여 월악(현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명산(현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과 제3차로 금산(현 해남군 삼산면)으로 피난을 하여 본도에 돌아오지 아니함으로 금산에 관부를 두어 80년간 진도에 행정기관을 설치하지 아니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태종 9년(1409년)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으로 칭하여 오다가 세종19년(1437년) 해남현과 분리하여 다시 진도군으로 되었으며, 그해 6월 29일에는 초대군수 양경이 부임하여 고성 부근에 성을 수축(修築) 치소를 삼고자 하였으나 지리적 여건이 현 군청 소재지만 못하여 이곳에 관부설립공사를 추진 완공, 경신년(1440년)에 지금의 진도읍으로 관부를 옮겼다. 그 후 수차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본군에 예속된 육지부의 삼촌면(현 해남군 삼산면), 명산면(현 영암군 시종면)과 본도 내 군내면(古 도산현), 고군면(古 외이현), 의신면(古 의신향), 임회면(古 임회현), 읍내면(읍 성내외리), 목장면이라 하였다.
○ 1666년(현종3년) 향교의 전패를 잃어버린 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만에 복구되었다.
○ 1866년 진도군은 진도부로 승격, 4군 9진을 거느리고 해남 화원면을 복속시 켰으며 읍내면은 부내면이 되었으나 1873년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 1896년 진도군이 전라남도에 속하면서 3등군이 되었다. 군내면을 군일․ 군이 양면으로 고군면을 고일ㆍ고이 양면으로 의신면을 명금․의신 양면으로, 임회 면을 임일․임이 양면으로 목장면을 지산면으로 가사도면과 조도면을 각각 신 설하고 영암의 명산면과 해남의 삼촌면, 무안군의 도초, 안창, 기좌면을 합쳐 전체17개면이 되었다.
○ 광무10년(1906년)에는 육지부의 명산면과 삼촌면이 영암, 해남군에 각각 이속되었다.
조선시대 이후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을 단행하여 도초를 무안군에 이속 본군을 진도면(前 부내면), 군내면(前 군일ㆍ군이면), 고군면(前 고일ㆍ고이면), 의신면(前 명금․ 의신면), 임회면(前 임일ㆍ임이면), 조도면(前 가사도면 ․ 조도면), 지산면(前 목장면)으로 존치시켜 7면 101리를 두었다. (안창, 기좌의 환원 기록이 명확 치 않다.)
○ 1963년 1월 1일 조도면 마진도리가 신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
○ 1973년 7월 1일 군내면의 수역, 수유, 해창, 산월 리가 진도면으로 편입되었다.
○ 1975년 1월 1일 군내면 녹진리에서 대야리를 분리 226개리가 227개리로 되었다.
○ 1979년 5월 1일 진도면이 진도읍으로 승격되어 1읍 6면 227개리가 되었다.
○ 1980년 2월 2일 진도읍 산월리에서 내산리, 고군면 가계리에서 용호리, 의 신면 접도리에서 수품리가, 지산면 봉암리에서 상봉암리가 각각 분리되어 227개리에서 231개리로 구분되었다.
○ 1982년 1월 1일 의신면 구자도리(狗子島里)를 구자도리(九子島里)로, 침계리 의 수용소리를 진설리로 개칭하였다.
○ 1983년 2월 15일 조도면 만재도리와 가사도리 중 고사도와 평사도 및 부속 도서를 신안군에 편입시키고 231개리를 229개리로 개편하였다.
○ 1986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도읍 사정리를 사정1리, 사정2리로 전두 전두리를 전두1, 전두2, 청용으로 임회면 석교리에서 고방, 구분실로, 지산면
관마리를 수양, 마사로 조도면 창리에서 어류포가 각각 분리되어 229개리에서 236개리로 되었다.
○ 1987년 1월 1일 임회면 염장리가 진도읍으로 편입되었다.
○ 1990년 8월 1일 신안군에서 저도 외 5개 섬이 진도군으로 편입되었다.
○ 1992년 5월 9일 의신면 도목리가 도목리, 도항리로 접도리에서 원다리, 임회면 죽림리에서 동헌리, 지산면 소앵무에서 백연동리 심동리를 상심동리, 하심동리로 분리되어 236개리가 241개리가 되었다.
○ 2005년 군내면 월가리에서 정거리가 분리되어 241개리가 242개리가 되었다.
첫댓글 소상한 기록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