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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군
[ 延白郡 ]
연백
황해도 동남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예성강을 경계로 금천군과 경기도 개풍군, 서쪽은 벽성군, 북쪽은 평산군, 남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며, 경기도 강화군과 마주 대하고 있다.
동경 125°55′∼126°59′, 북위 37°36′∼38°06′에 위치하며, 면적 935.61㎢, 인구 20만 3598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19개 면 175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연안읍 연성리이다.
자연환경
군의 북부는 멸악산맥(滅惡山脈)의 남쪽과 접하고 있어 대개가 산악 지대이며, 중남부는 평야 지대이다. 북쪽에 황의산(黃衣山, 478m)·운두봉(雲頭峰, 307m)·목단산(牧丹山, 304m)·마명산(馬鳴山, 300m)·치악산(雉岳山, 361m) 등이, 중앙에 용각산(龍角山, 365m)·비봉산(飛鳳山) 등이 있다. 산은 많으나 대부분의 산이 200m 내외의 완만한 산들다.
중남부는 언진산(彦眞山)에서 발원하여 운산·유곡·해월면을 흐르는 예성강(禮成江), 금산면 황의산에서 발원하여 화성·은천·유곡·운산면을 흐르는 한교천(漢橋川), 평산군 성불산에서 발원하여 목단·괘궁·용도면의 서쪽을 흐르는 화양천(花陽川), 용각산에서 발원하여 석안·도촌·호동면을 흐르는 나진포천(羅津浦川), 역시 용각산에서 발원하여 봉북·봉서·해룡·송봉면을 흐르는 풍천(楓川)에 의해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예성강은 수운으로도 이용된다. 황해에 면한 남쪽은 수심이 얕아 민족 항일기에 간척 사업으로 농경지화되었다.
1930년 수리 관개 사업 이전에는 중남부 지방보다는 오히려 북부 산간 지방의 농업 기반이 월등하였다. 그러나 화양천·풍천·한교천 등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간척지에 수리 관개를 하면서부터 중·남부 지방은 전국 3대 평야의 하나인 연백평야를 이루게 되었다.
8개 면이 해안을 끼고 있어, 해안선의 총길이는 168㎞에 이르나, 지형이 완만하여 섬이 많지 않다. 군내에는 증산도(增山島)·반이도(盤伊島)·경말도(京末島)·역구도(驛驅島) 등의 12개 섬이 있는데, 모두 규모가 작고, 썰물 때면 육지와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배천온천·연안온천 등의 온천맥이 형성되어 있으며, 지질은 화강편마암·화강암 및 신생대 제4기 층의 암석이 대부분이다. 토양은 사질양토·양토·식양토·식토 등이다.
연평균 기온 11.6℃, 1월 평균 기온 -5.2℃, 8월 평균 기온 26.3℃이며, 연 강수량은 1,099㎜이다. 첫서리는 10월 12일경, 마지막 서리는 4월 5일경에 내린다.
역사
[고 대]
이 곳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봉북면 소성리와 화성면 운곡리의 신석기 유적에서 마제석촉·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고, 유곡면 금곡리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으며, 석산면 용동리의 토광묘에서는 청동기 시대 후기 유물과 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이 혼합되어 발굴되었다. 이들 사실은 신석기 시대 이후 계속 사람이 생활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 있다가 4세기 말을 전후하여서 일시적으로 고구려 세력권에 편입되었으나, 고구려 영토로 확정된 것은 6세기 중엽부터이다.
삼한 시대에 유염성(有鹽城)이라 부르던 연안과 혼미성(渾彌城)이라 부르던 배천은 백제 치하에서는 시염성(豉鹽城)과 치악성(雉岳城)으로, 고구려 지배하에서는 동음홀(冬音忽) 또는 동삼홀(冬三忽)과 도랍현(刀臘縣)으로 호칭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대개 고구려 때의 지명이 사용되었으며, 경덕왕 때 동음홀은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치고, 도랍현은 구택현(雊澤縣)으로 고쳐서 해고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행정구역상 782년(선덕왕 3) 이전에는 한산주(漢山州)에, 그 뒤로는 패강진(浿江鎭)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 려]
898년(신라 효공왕 2) 무렵부터 궁예(弓裔)의 세력권에 편입된 뒤 해고군은 염주(鹽州), 구택현은 백주(白州)로 개칭되었다.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함으로써 그 강역이 되었는데 유상희(劉相睎)·윤선(尹瑄) 등의 호족과 학자인 태평(泰評)이 이곳 출신으로 왕건을 돕고 있었다.
염주는 1012년(현종 3)부터 감무가 부임하다 공신 배출로 영강현(永康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수령의 격도 높아졌으며, 1310년(충선왕 2) 연안으로 지명이 정착됨과 동시에 도호부로 정리되었다.
백주는 1159년(의종 13) 이곳 출신의 태사(太史) 유원도(劉元度)의 건의로 배천 귀산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한 것을 계기로 개흥부(開興府)로 승격된 일이 있으나, 1259년(고종 46) 충익현(忠翊縣)으로 개편됨으로써 처음 공식적으로 현이 되었다.
뒤에 다시 복흥군(復興郡)으로 고쳐졌는데, 1369년(공민왕 18) 당시의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의 이름을 피하여 백주로 환원되었다. 일찍이 1303년(충렬왕 29) 연안향교가 설립되었으며, 배천향교도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다.
[조 선]
백주는 1403년(태종 3) 배천(白川)으로 개칭된 뒤 1413년부터 현령이 부임하였다. 15세기 중엽의 연백 인구는 총 2,579호에 6,885명이었다.
연안읍성은 1591년(선조 24) 증축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서 조정으로부터 초토사(招討使)로 임명된 이정암(李廷馣)이 1,000여 명의 일본군을 맞아 이곳에서 연안대첩(延安大捷)을 거두었다. 이를 기려 1608년에 세운 연성대첩비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뒤 금산에서 700의사와 함께 장렬히 전사한 조헌(趙憲)도 이곳 출신이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이 크게 늘어난 데다가 해월면을 중심으로 경기·강원도 지역은 물론 충청·전라도 지역과의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져 물산이 많이 모이는 한편 인구도 증가하였다. 1759년(영조 35)의 인구는 총 1만 3427가구, 4만 7903명이었다.
[근 대]
1895년 연안군과 배천군으로 개편된 뒤 1914년 두 군이 합쳐져 연백군이 되었다. 1895년 연안의 유림을 중심으로 하여 유인석(柳麟錫) 또는 최익현(崔益鉉)과 연결되어 활동하던 이곳 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평산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돌격장 김창호(金昌浩)의 부대는 배천 군청을 점령하고, 연안읍을 습격하는 등 활약이 두드러졌다.
근대 인물로는 여기자로 활약한 최은희(崔恩喜)가 있으며, 만주에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약한 편강렬(片康烈), 1921년 동경에서 친일 단체인 국민협회의 회장 민원식(閔元植)을 암살한 양근환(梁槿煥) 등 여러 인사가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35년 당시 1읍 19면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호구는 1942년에 총 3만 5953가구, 19만 9942명으로 황해도에서 가장 많았다.
유물ㆍ유적
이 군은 고려의 왕도 개성과 거리가 가까워 고려 시대의 유물·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해월면 토현리 반월강(半月岡)으로 불리는 곳에 있던 중흥궁지(重興宮址)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158년(의종 12)에 태사감후(太史監候) 유원도(劉元度)가 왕에게 “백주(白州:지금의 배천) 토산의 반월강은 우리 나라가 중흥할 수 있는 땅으로, 그곳에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북쪽 오랑캐를 병탄하게 됩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에 의종이 그곳의 풍수지리를 조사하게 한 결과, 지리가 산조수순(山朝水順)하여 궁궐을 지을 만하다고 판단하여, 그해 9월 최윤의(崔允儀), 지주사(知奏事) 이원응(李元膺), 내시 박회준(朴懷俊)을 보내 궁궐을 짓게 하였다.
서해도(황해도)의 장정들을 징발하고, 밤낮으로 일하여 한 달 만에 완공하였다. 왕은 궁궐 이름을 ‘중흥’이라 하고 정전의 편액을 대화(大化)라고 하였다. 그해 10월에 이곳에 왕이 행차하여 대화전에서 군신들의 하례를 받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1945년까지도 이 산 남쪽에는 동서로 큰 돌을 쌓은 5단의 대지와 토성의 유지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는 그때의 유물인 기왓장·옹기 등의 조각이 발견된다.
연안읍에는 임진왜란 때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중무장한 5,000여 명의 대병력을 5일 만에 격파하여 진주대첩·행주산성대첩과 더불어 우리 나라 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는 연성대첩(延城大捷)의 전승비와 연안읍성의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전투와 연관되는 숭훈사(崇勳祠)·현충사(顯忠祠)가 있었다.
이 군은 우리 나라 3대 곡창의 하나인 연백평야가 있어 예로부터 주민들의 생활이 풍요하였다. 그리하여 옛 읍치(邑治)인 연안에는 누(樓)·정(亭)·대(臺) 등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연안읍 연성리에 있는 취원루(聚遠樓)는 1357년(공민왕 6)에 안렴사 이방(李昉)과 연안부사 김인백(金仁白)이 창건하였다.
1522년(중종 17)에 시학(侍學)이었던 김계우(金季愚)가 연안부사로 있을 때, 중종이 어제시를 보냈는데, 그 뒤 선조 때 부사로 부임한 윤두수(尹斗壽)가 이 시를 금자(金字)로 새기고 붉은 비단으로 싸서 취원루에 걸어 놓아 더욱 유명하여졌다. 어제시는 다음과 같다.
“연안부 동쪽 뜰에/취원루 좋은 다락/천 년을 지난들/그 이름 변하리/봄철에 꽃 피고/가을에 달 밝아/경치 하도 좋은데/나비 춤추고 꾀꼬리 노래하니/수심이야 있을 줄 있으리/춘초호(春草湖) 언덕 앞에/참새 떼들 뛰놀고/금련포(金蓮浦) 저 멀리/푸른 물결 흐르네/전당호(錢塘湖) 좋은 경치/모두 다 여기 있는데/태수(太守)는 한가로이/낚싯배만 구경하네.”
목단면 목단산에는 탁영대(濯纓臺)와 용정사(龍井寺)·해운사(海雲寺)·망월사(望月寺)·쌍암사(雙庵寺)가 있었고, 운산면 천등산에는 호국사(護國寺)·여흥사(麗興寺)·선정사(禪定寺)·등암사(燈巖寺), 그리고 백마산에는 강서사(江西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폐사(廢寺)가 되어 그 터만 남아 있다.
연백군은 남쪽에 해안선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치악산에는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전하여지는 둘레 1만2600척의 산성터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 성이 배천산성(白川山城)이다.
연안읍의 진산 비봉산(飛鳳山, 또는 鳳勢山)에도 산성터가 있으며, 역시 ≪동국여지승람≫ 연안부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하여 읍민들이 모두 교동도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서 쌓은 성이다.
이 밖에도 ‘연안부사 못자랑’으로 이름이 난 우리 나라 3대 저수지의 하나인 남대지와 배천임수가 있다.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고 역사가 흐름에 따라 중건을 거듭한 연안향교(延安鄕校)는 8·15광복 때까지 연안읍에 남아 있었다. 이 향교 서쪽에 있던 보인재(輔仁齋)를 1596년(선조 29) 비봉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비봉서원(飛鳳書院)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예성강의 어귀인 해월면 벽란리는 고려 시대 국제적인 항구였던 벽란도(碧瀾渡)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봉북·봉서·해룡면과 은천·유곡·도천면 일대는 학의 도래지이며 연압읍과 호남면 지역은 학의 번식지로 알려져 있다.
교육ㆍ문화
1303년(충렬왕 29)에 연안향교, 비슷한 시기에 배천향교(白川鄕校)가 설립되어 연백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향교에서는 지방 세력가나 평민의 자제가 수학하였고, 상류층 자제들은 개성의 12공도(公徒)라는 사학에서 수학하였다.
연안향교는 연안읍 연성리 비봉산록에 있으며, 1394년(태조 3)에 교수 정달몽(鄭達蒙)과 부사 정이(鄭易) 등의 노력으로 대성전·명륜당·교관실·제기청(祭器廳)·동무(東廡)·서무(西廡)·동재(東齋)·서재(西齋)·남루(南樓) 등의 건물을 갖추고 향교로서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 배천향교는 은천면 연동리 용청동에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졌으나, 1603년(선조 36)에 중수되었다.
서원으로는 비봉서원·문회서원·현충사 등이 있다. 비봉서원은 연안읍 연성리 연안향교 서쪽에 있다. 원래 보인재를 창건하여 최충(崔冲)·이이(李珥)·김굉필(金宏弼)을 봉심하고 후학을 교육하였으나, 1596년에 이를 비봉산 아래 무우대(舞雩臺) 동쪽으로 옮기고 비봉서원이라 하였다. 그 뒤 성혼(成渾)·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봉심하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1871년(고종 8) 서원 정리 때에 철폐되었다.
문회서원은 은천면 치악산 남쪽 산록에 있으며, 1597년에 창건되었다. 이이를 비롯하여 성혼·박세채·조헌·안당(安瑭)·신응시(辛應時)·오억령(吳億齡)·김덕함(金德諴)을 봉심하였으며, 서원 정리 때에 끝까지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또한, ≪연백군의 군세일반(郡勢一班)≫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후 군내에는 많은 서당이 있었으며, 1938년에는 64개의 서당이 있었다고 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연안공립보통학교·배천공립보통학교가 있었으며, 1929년 1면1교제의 실시로 각 읍·면에 모두 20개의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2년제 초등 교육기관으로 간이학교 5개교가 있었으며, 중등 교육기관으로서의 실업학교는 1934년 연안농업학교가 개교하였고, 1944년에 배천공립농업학교와 연안공립여자중학교가 개교하였다.
사립학교로는 1925년 송봉면 도룡리에 박기서(朴基緖)가 육영학교(育英學校), 1912년 은천면에 최병규(崔秉奎)가 창동학교(彰東學校), 1927년 해남면에 박제근(朴濟根)이 동명학교(東明學校)를 각각 설립하였다. 이 밖에도 괘궁면에 도성학원(陶成學院), 용도면에 동신학원(東新學院)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938년 현재 20개의 국민학교와 간이학교 4개교, 공립실업학교 3개교가 있으며, 각 읍·면에 많은 사립학교가 있다.
종교 상황은 1939년 현재 강서사(江西寺)·호국사(護國寺) 등의 불교 사찰이 50개 있으며, 천주교는 불당골공소(公所)·해성공소·구산리공소 등의 10여 개 공소가 있고, 개신교 교회 19개소가 있다. 군내에 연안·배천온천이 있고, 육로 교통뿐만 아니라 수로·해상 교통도 발달하여 외국에 유학한 지식층이 많아 문화면에서도 단연 앞서고 있다.
연성구락부(延城俱樂部)·연안백호단·배천청년회·신간회배천지부(新幹會白川支部)·배천의법청년회(白川懿法靑年會) 등이 조직되어 광범위한 사회·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연백 지방의 고유 음식으로는 인절미·찰떡·메밀국수·보쌈김치·게장 등이 유명하다.
산업ㆍ교통
이 군의 농업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농업의 중심이 북부 산간지대(괘궁·목단·봉서·봉북·석산·금산·은천·유곡)에서 남부의 평야 지대(용도·해룡·송봉·연안·호남·해성·호동·온정·해월)로 이동되면서 연백평야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곡창 지대를 이루며, 농업이 주산업으로 부상되었다. 이 평야를 관개하는 남대지가 있어 더욱 편리하다.
전체 경지면적은 570.97㎢이며, 이 가운데 논이 337.44㎢, 밭이 233.52㎢(1937년 현재)이다. 농가 호수는 전체 가구 수의 80.4%에 해당되는 2만 4694호로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팥·조·피·메밀·기장·감자·고구마·돼지감자·배추·무·파·미나리·상추 등이며, 이 밖에 오이·가지·호박·참외·수박 등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면화·대마·아주까리·왕골·참깨·들깨·마늘·고추·토종꿀 등이 생산되며, 특히 배천온천이 있는 은천면 영천리에서는 온천수를 이용한 온실에서 화훼 및 소채류를 속성 재배하여 서울·평양·만주 등지에 판매한다. 호동면 일대에서는 각산(角山)마늘이라 불리는 마늘이 유명하다.
또한, 풍토가 경기도와 비슷하여 배·은행·복숭아·앵두 등과 같은 많은 과일이 생산되었으나 전국적으로 과수 재배가 기업화, 단지화되면서 지역 내 일반 농가는 자급적으로 재배하는 데 그쳤다.
어업은 송달면의 증산도와 호남면의 백석포가 중심지이며, 홍어·조기·갈치·민어·농어·은어·조개·바지락·굴·뱅어·새우·가오리·밴댕이·황석어 등이 어획, 채취된다. 특히, 연평도 근해의 조기잡이가 유명하다. 또한 해성면 해남리의 연백염전은 60만평의 대규모 염전으로 유명하다.
광산물은 금·은·토탄이 대표적이며, 금광으로 해월면 금산리에 국근광산(菊根鑛山), 문산리에 율포광산(栗浦鑛山), 은천면 비봉리에 은봉광산(銀峰鑛山)이 있다. 연안읍 연백평야 지대의 지하 1m 내외의 땅속에는 양질의 토탄이 광범위하게 매장되어 연료로 사용되며, 일부는 서울·인천 등지로 반출된다.
상업은 조선 후기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 붕괴로 인한 상업의 발달로, 예성강의 하구인 벽란도가 상업의 중심 기능을 하였다.
≪조선산업지 朝鮮産業誌≫에 의하면, 1910년대 군내에는 해월면 초양장(草陽場), 은천면 배천읍내장, 금산면 성두장(城頭場), 해룡면 풍천장(楓川場)이 1·6일에, 연안읍 연안서문장, 연안동문장, 해성면 염전장(鹽田場)이 2·7일에, 온정면 연안온천장이 3·8일에, 용도면 천태장(天台場), 석산면 괸돌장이 4·9일에, 목단면 탁영대장(濯纓臺場), 유곡면 홍현장(紅峴場) 등이 5·10일에 장시가 이루어져 주로 곡류·은·목면·마포·잡화·해산물·우마·잎담배 등이 거래되었다.
공산품은 왕골돗자리가 유일한 것이었으나 농업의 발달과 함께 민족 항일기에는 이와 관련된 공업이 발달하였다. 공산품으로는 농기구·도자기·무명·우마·목제품·명주 등이 생산된다. 순곡주인 ‘연안약주’는 유명하다.
군내에는 해주에서 연안과 배천을 통과하여 토성에 이르는 토해선(土海線)이 통과하며, 연안온천역·연안역·봉서역·풍천역·천태역 등 10개 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개성∼해주간의 국도가 토해선과 나란히 동서로 나 있으며, 연안읍을 기점으로 연안에서 해주로 가는 도로가 연안읍서문-풍천-용도면-화양천-청단(靑丹)을 통과하고, 개성으로 가는 도로는 연안읍동문-도촌면 금산리-유곡면 용현리-금곡리-벽란도-예성강-토성 등을 지난다. 이 밖에도 배천·평산군·금천군 등지로 가는 도로가 나 있어 군내의 교통은 편리하다.
해운으로 군의 남쪽이 서해에 접하고, 연안읍을 제외한 각 면에 강·하천 등이 잘 발달되어 있어 포구와 나루터가 많다. 포구와 나루터로는 한교천의 감촌포(甘村浦)·대교포(大橋浦), 예성강의 대학포(大鶴浦)·전포(錢浦)·금곡포(金谷浦)·벽란도, 나진포천의 나진포, 풍천의 풍천포 등이 있으며, 보기 드물 정도로 수로 교통이 발달하였다.
명승지로는 배천온천·연안온천·연안읍성·연성대첩비·지석묘·학도래지 등과 우리 나라 3대 연못인 남대지가 있다. 또한 언진산에서 발원, 서해로 흐르는 예성강은 10대 하천의 하나이다.
읍ㆍ면
[연안읍延安邑]
군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21.64㎢(1937년 현재), 인구 2만2468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관천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과 배천군을 통합하여 연백군이라 하였다.
이 읍은 연안군의 동부·남부면과 서부면의 일부를 합하고, 용봉면이라 개편하여 연백군의 관내에 들게 되었다. 1917년 용봉면을 연안면으로 개칭하고, 1937년 7월 읍으로 승격되었다.
서북쪽에 진산인 비봉산이 솟아 있고, 남쪽에 자봉산(雌鳳山)이 있다. 동서로 장곡·미산·단산평야를 이루며, 동남쪽에 남대지가 있고, 남쪽에 산양·오주평야를 이룬다.
따라서, 시가지는 비봉산록 밑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중앙에 남산이 있다. 비봉산에서 발원한 치제천(致齊川)이 남대지를 거쳐 나진포천으로 유입된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이 잘 발달되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다. 전체 경지면적 12.40㎢이며, 이 중 논 6.45㎢, 밭 6.00㎢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밀·보리 등이며, 특산물로 연안약주가 있다. 광산물로는 토탄이 장곡·산양·미산·오주·단산·자양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매장되어 있다. 관천·봉남·모정리에는 농기구 제작소가 있다.
토해선이 연안읍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으며, 산양리에 연안역이 설치되었다. 국도는 동쪽으로 개성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도로와 서쪽으로 해주를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2등도로가 토해선과 병행한다. 북쪽의 박영리에 3등도로가 통하고, 연안읍을 중심으로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나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연안읍의 진산인 비봉산(일명 鳳勢山)은 연안읍의 시가지와 넓은 평야, 그리고 남대지가 한눈에 보이는 명산으로 연안팔경의 하나이다.
정상에 무운대(舞雲臺)가 있고, 기슭에는 봉하루(鳳下樓)가 있다. 홍복암(弘福庵)·기우단(祈雨壇)·사직단(社稷壇)과 서민들이 복을 빌던 북신당(北神堂)이 있으며, 비봉산성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비봉산성은 연암읍성보다 훨씬 오래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안읍지≫에 의하면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을 갔던 읍민들이 돌아와 성을 쌓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좌우 봉우리를 따라 유지만 남아 있으나, 성터 부근에서 발견되는 큰 돌과 기와 조각으로 보아 규모가 큰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안에는 군창과 인가의 흔적도 있으며, 흩어져 있는 기와 조각의 모양이 신라와 고려 시대의 것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이미 신라 때부터 있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유적으로는 비봉서원·연안읍성·연성대첩비가 있으며, 옛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학 도래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4개교가 있다. 관천(館泉)·연성(延城)·모정(模井)·장곡(長谷)·미산(美山)·산양(山陽)·봉남(鳳南)·자양(紫陽)·오주(梧珠)·봉무(鳳舞)·단산(丹山) 등 11개 이가 있다.
[괘궁면掛弓面]
이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8.97㎢(1937년 현재), 인구 8,14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번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궁하면(弓下面)과 방하면(方下面)을 합하고 용도면과 해주군 화양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괘궁면이라 하였다.
동북쪽의 약산(藥山, 273m)과 해룡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임해산(臨海山, 155m)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낮은 평지이며, 대체로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룬다.
벽성군과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화양천이 구암저수지를 거쳐 연해수리조합 제1저수지를 지나 서해로 유입되며, 이 군의 젖줄 구실을 한다.
또한, 금산면·봉북면계의 선운봉(禪雲峰)을 발원지로 한 양지천이 약산에서 발원한 구탄(龜灘)과 함께 한정리 하누멀에서 합류하여 구암저수지(鳩巖貯水池)로 흘러간다. 하천 유역의 평야는 토지가 비옥하여 이곳에서 산출되는 쌀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밀·기장·메밀·콩·팥 등이며, 특산물로 누에고치·명주·담수어와 산나물이 채취된다. 서울에 가려면 용도면의 천태역이나 벽성군의 청단역을 이용해야 하며, 연안∼탁영대 간의 도로가 고포리와 관동리를 지난다. 이 밖에도 우번리-해룡면-봉서면-연안읍에 이르는 도로가 있다.
명승지로 구암저수지와 해월산 냉정(冷井)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우번(羽翻)·도성(桃城)·갈암(葛巖)·생금(生金)·화천(華川)·구암(鳩巖)·봉현(鳳峴)·산두(山斗)·한정(寒井)·관동(冠洞)·고포(古浦) 등 11개 이가 있다.
[금산면金山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74.42㎢(1937년 현재), 인구 7,69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선암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상금산면(上今山面)과 하금산면(下金山面)을 합하여 금산면이라 하였다.
서부 군 경계에 운두봉(雲頭峰, 307m)·금산봉(金山峰, 341m)을 비롯하여 북쪽에 국수봉(菊水峰, 445m), 동남쪽에 호국산(護國山, 405m) 등의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 상의 저지대이다.
운두봉에서 발원한 거인천(巨仁川)·귀밀천(貴密川)과 국수봉에서 발원한 춘교천(春橋川)이 예의저수지(禮義貯水池)로 흘러 들어간다. 산간 지방에 위치하여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다.
주요 농산물은 콩·조·밀·메밀·쌀 등으로 쌀보다 잡곡이 많이 생산되며, 특히 콩이 유명하다. 또한, 배·사과 등의 과수재배도 활발하며, 특산물로 선성리 문성 마을에서 솥이, 장현리 구변 마을에서 옹기가 생산되었다.
배천을 기점으로 성두시장을 거쳐 평산군 온정원에서 해주와 남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난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선암리 성두동-선성리-운산리 간의 도로, 서쪽으로 석천리-거인천-목단면 간의 도로, 성두리-봉북면-연안읍 간의 도로가 있다. 기차를 이용하려면 연안이나 배천 또는 남천·금천으로 나가야 하므로 교통이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대아리 황의암동(黃衣巖洞)과 은산리 소일동(素日洞) 경계 부분과 일곡리에서 고인돌이 발굴되었으며, 대아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석관묘가 발굴되었다. 이 밖에 성두리 토성과 예의사(禮義祠, 또는 明庵寺)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선암(仙巖)·화양(花陽)·석천(石泉)·대아(大雅)·은산(銀山)·장현(長峴)·일곡(日谷)·예의(禮義)·선성(仙城) 등 9개 이가 있다.
[도촌면道村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6.60㎢(1937년 현재), 인구 6,93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괴암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지촌면(芝村面)·도하면(道下面)과 무구면(無仇面)의 일부를 통합하여 도촌면이라 하였다.
동북쪽에 석굉산(石筐山, 70m), 동남쪽에 마식령산맥에 속한 토미산(兎尾山, 250m)이 솟았을 뿐이며, 이들 산에서 발원한 감촌천(柑村川)과 오산천(鰲山川)이 각각 나진포천과 한교천으로 유입된다. 전 농경지가 수리안전답이며, 군내 손꼽히는 곡창 지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콩·조·면화 등이며, 농가의 부업으로 양잠이 성하고, 특히 누에고치의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철도는 토해선이 면의 중앙부를 지나고, 홍현(紅峴)·무구(無仇)역이 설치되었다. 개성∼해주간의 국도가 마천·토월·괴암·금산리를 동서로 통과하며, 마천리 홍현동-신월리-화성면 포운리-금산면 성두리 간의 도로가 있다.
명승고적으로 토미산 북쪽에 학 도래지가 있으며, 마천리에 속칭 ‘당다지’라는 고성곽지(古城廓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괴암(槐巖)·지산(芝山)·무구(無仇)·마천(馬泉)·신월(新月)·오산(梧山)·금산(琴山)·토월(兎月) 등 8개 이가 있다.
[목단면牧丹面]
이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3.93㎢(1937년 현재), 인구 7,09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탁영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궁상면(弓上面)과 방상면(方上面)을 합하여 목단면이라 하였다.
북쪽 군계에 목단산(牧丹山, 304m)·운두봉 등이 솟았고, 운두봉의 지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나와 약산이 되었으며, 이들 산맥의 여맥이 면내 전역에 미쳐서 도처에 크고 작은 구릉이 발달하였다.
특히, 화양천과 그 지류인 궁하천(弓下川)의 유역 평야는 토지가 비옥하여 이 면의 주요 곡창 지대가 되며, 두 하천이 합해지는 곳에 구암저수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메밀·피·콩·팥·귀리·녹두·땅콩 등이며, 청과류도 많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인삼·참깨·잎담배·대마와 특산물로 왕골·대추·밤·잣 등이 있으며, 화양천과 구암저수지에서 담수어가 많이 잡힌다.
탁영리에서 연안·해주로 가는 지방도로가 있으며, 벽성군 동운면 주산리-청단장, 괘궁면-용도면 천태장 간, 덕양리-금산면-온정원, 아현리-창덕리-괘궁면 간의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명승고적으로 목단팔경과 탁영대가 있으며, 아현리 다의현에 있는 의현사(義峴祠)는 고려 말 현사 72명 중의 한 사람인 채귀하(蔡貴下)가 종신을 거처하던 곳으로 그 유허비가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탁영(濯纓)·아현(雅峴)·의현(義峴)·정동(井洞)·성주(聖周)·창덕(彰德)·동운(東雲)·봉덕(鳳德)·덕양(德陽) 등 9개 이가 있다.
[봉북면鳳北面]
이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0.00㎢(1937년 현재), 인구 8,66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소성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북부면(北部面)·홍장면(洪長面)을 합하고 봉북면이라 하였다.
면의 동쪽에 용각산이 솟았으며, 그 주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 중앙에 건지산(乾支山, 238m)이 솟았다. 서북쪽에도 해월산(海月山, 220m) 및 100m 내외의 구릉이 연달아 솟았으며, 동서 산지 사이에 평야가 전개된다. 이들 산에서 발원한 심동천(深洞川)·안정천(安定川)·도당곡천(桃堂谷川) 등이 각각 풍천과 나진포천의 상류가 되어 흐른다. 건지산의 동쪽과 나진포천의 유역은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밀·보리·메밀·콩·기장 등이며, 목화 재배와 양잠·양돈·양계도 활발하다. 특산물로 산나물이 나며, 원동리에서는 옹기가 생산된다.
광산물로 토탄과 북부의 백봉광산(白鳳鑛山)에서 금·은이 채굴된다. 연안을 기점으로 한 지방도로가 풍양리 도당동-소성리-목단면 탁영대-금천·남천, 풍양리 도당동-용남리-금천·남천, 원동리 원우동-석산면-금천 간의 도로가 있다.
명승고적으로 풍양리 도당동에 냉정골이 있으며, 오성리 등현 마을에 장렬사(壯烈祠)가 있다. 면내의 각 하천은 학 도래지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소성(韶成)·산정(山井)·송전(松田)·오현(梧峴)·용남(龍南)·원동(院東)·광동(光東)·풍양(豐陽)·오성(梧城) 등 9개 이가 있다.
[봉서면鳳西面]
이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5.81㎢(1937년 현재), 인구 8,06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정촌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정촌면(亭村面)·영달면(永達面)·서부면(西部面)의 일부를 통합하고, 비봉산의 서쪽에 있다 하여 봉서면이라 하였다.
면의 남동단에 비봉산(飛鳳山, 282m)이 솟았고, 동쪽 봉북면과의 경계에 해월산(海月山, 220m), 북쪽 괘궁면과의 경계에 해월산(海月山, 150m)이 있으며, 명천·월파·소아·번계리는 50∼60m의 구릉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지세는 동쪽과 북쪽이 높아 하천이 북에서 남으로, 또는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북쪽의 해월산에서 발원한 장서랑개, 비봉산에서 발원한 도룡천(渡龍川), 용각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나탄천(羅灘川)을 이루며, 서류하여 풍천에 유입된다.
1930년 이후 현대적 수리 시설로 인하여 면 일대가 전천후 곡창 지대로 변모하였으며, 미산리 일대에 넓은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밀·콩·면화·과실 등이며, 현죽·미산·봉서리 등에서 토탄이 채굴된다.
정촌리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봉서역-현죽리-미산리 국도, 북쪽으로 번계리-소아리-월파리-명천리-괘궁면-벽성군 간의 도로가 있다. 특히, 봉서역에서 현죽·정촌·번계·소아·월파·명천리를 거쳐 벽성군에 이르는 도로는 면의 남북을 종단하는 면내 동맥구실을 하는 교통로이다. 정촌리 봉서국민학교 부근은 학 도래지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정촌(鼎村)·현죽(玄竹)·봉황(鳳凰)·미산(美山)·번계(磻溪)·소아(小雅)·월파(月波)·명천(鳴川) 등 8개 이가 있다.
[석산면石山面]
이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5.11㎢(1937년 현재), 인구 5,95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동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석산면(石山面)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에 이른다.
서북단에 용각산, 북쪽에 해월산이 있으며, 대체로 구릉성 평야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산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하천이 구릉성 평야 사이를 서남류하며 나진포천의 상류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밀·조 등이며, 특히 쌀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부업으로 양잠·양돈·양계 등이 활발하며, 광산물로 토탄이 채굴된다.
면내에 철도는 없으나 토해선의 연안역과 홍현역이 가까이 설치되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 용각산에 활인봉이 있으며, 산록에 운암사지가 있다. 용동리·월암리·문창리에서는 수십 기의 고인돌과 토광묘가 발견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용동(龍東)·월암(月巖)·문창(文昌)·묵화(墨花)·구산(九山)·수복(壽福) 등 6개 이가 있다.
[송봉면松逢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3.18㎢(1937년 현재), 인구 1만52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계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송청면(松靑面)·봉촌면(逢村面)과 미산면(米山面)의 일부를 합하여 송봉면이라 하였다.
연안의 진산인 비봉산맥이 서남으로 뻗어 내려 동북부에 석봉산(石峰山, 112m)·와룡산(臥龍山, 79m) 등의 야산을 이룬다. 이들 산에서 흐르는 중소 하천은 풍천을 통하거나, 또는 직접 연해수리조합 제2저수지, 혹은 석벽저수지(石壁貯水池)로 흘러들어간다. 따라서 이 면은 해변에 접한 중서부와 풍천 유역 북부가 주로 평야 지대이며, 간척 사업으로 조성된 논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밀·대마 등이며, 서쪽 앞바다에 구증산도·증산도·경말도(京末島) 등의 부속섬이 있어 석우포(石隅浦)·증산포를 중심으로 어업이 활발하다. 연안에서 조기·굴·게·새우·민어·패류 등이 어획 및 채취된다. 광산물로 노정·청송·운계·송현리 일대에서 토탄이 채굴된다.
연안읍을 기점으로 한 3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나며 청계리에 이르고, 이곳에서 분기된 도로가 봉서면 미산리 국도와 연결된다. 송현리에서 분기된 도로가 해변과 석벽저수지 수문에 이른다. 운계리 장재동에서 남쪽으로 호남면·해성면에 이르는 도로가 있다.
해로로 정기 여객선은 없으나 청계리에 석우포가 있어 이곳을 드나드는 어선과 화물선을 이용하여 외부와 내왕하였다.
유적으로는 운계리 청화동 도당산 기슭에 유석동(劉錫東)을 모신 운계사(雲溪祠)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운계(雲溪)·대룡(大龍)·도룡(渡龍)·노정(老亭)·청송(靑松)·송현(松峴)·청계(淸溪)·증산(增山) 등 8개 이가 있다.
[온정면溫井面]
이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3.81㎢(1937년 현재), 인구 9,29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성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각산면(角山面)·지척면(紙尺面)과 무구면(無仇面)의 일부를 통합하고 온정면이라 하였다.
북동쪽에 토미산, 서쪽에 천대산(天坮山, 55m)이 솟아 있을 뿐 평야 지대이다. 큰 하천은 없으나 토미산에서 발원하여 향정리·아양리를 흐르는 동천(東川), 창동리·아양리를 흐르는 여막리강·평야 지대의 남부를 흐르는 학교천이 있어 유역 평야의 관개에 큰 몫을 한다. 군내에서 가장 농경지가 많으며, 쌀의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 등이며, 특산물로 인삼·마·면화 등이 생산된다. 창동리와 아양리는 포구 마을로 동성호포(東星湖浦)를 중심으로 조기·새우·뱅어·굴·조개·곤쟁이 등을 어획 및 채취한다.
배천∼해주 간의 도로가 면의 북단을 지나며, 지방도로로 금성리 온천동-연안온천역, 금성리 온천동-모례리 국도, 향정리-해월면 국근동-벽란도, 향정리-동성호포, 창동리-낙선리-호동면 나진포 간의 도로가 있다. 또한, 동성호포를 통한 해상 교통도 발달하였다.
명승고적으로 연안온천이 있으며, 온정면 금성리에 고려 태조가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천대산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금성(錦城)·모례(慕禮)·상운(祥雲)·향정(杏亭)·창동(昌東)·아양(峨洋)·낙선(樂善) 등 7개 이가 있다.
[용도면龍道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5.76㎢(1937년 현재), 인구 1만385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태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용천면(龍天面)·도륭면(道隆面)을 합하여 용도면이라 하였다.
산지는 거의 없고 기름진 평야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서쪽에 연백군과 벽성군의 경계가 되는 화양천이 흐르고, 중앙에 천태천이 흐르며, 남쪽은 황해에 접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콩·피·감자 등이며, 수산물은 조기·새우·굴·장어·조개류 등이다.
철도는 토해선이 동서로 횡단하며 천태·심계역이 있다. 국도가 토해선에 병행하며, 삽다리를 중심으로 괘궁·목단·해룡, 그리고 벽성군 청룡면에 이르는 도로가 있다. 원모루와 거래포(去來浦)는 고려 이후 조선 말까지 어항과 조운(漕運)의 두 기능을 갖고 있었으나, 육로가 발달되면서 어촌으로 변모하였다.
유적으로 현암리 원모루 뒤에 있는 소래산 봉수대지(烽燧臺址)와 옥야리에 99칸 고가(古家)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천태(天台)·청계(淸溪)·운중(雲中)·안정(安井)·송학(松鶴)·옥야(沃野)·대평(大坪)·심계(深桂)·현암(玄巖)·발산(鉢山)·난계(蘭溪) 등 11개 이가 있다.
[운산면雲山面]
이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72.49㎢(1937년 현재), 인구 5,39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호산리이다. 1875년 면이름을 발산방(鉢山坊)에서 운산방(雲山坊)으로 바꾸고, 1906년 운산면으로 변경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백군의 관내가 되었다. 1916년 금천군 서북면(西北面)과 동촌면(東村面)상칠리(上七里) 일부가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은천면과의 경계에 후정산(後井山, 120m)·국사봉(國師峰, 225m)·형제봉(兄弟峰, 290m)을 잇는 산맥이 있고, 금천군과의 경계에 마명산이 있으며, 면내 곳곳에 크고 작은 산들이 산재한다. 면의 북쪽 경계에 애동천(艾洞川), 서쪽 경계에 호국천이 있으며, 동쪽 경계에 예성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그 지류가 구릉 사이를 곡류하여 여러 곳에 분지상의 평지가 발달하였다.
임야가 많아 논보다 밭이 많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메밀·콩·팥·밀·면화 등이며, 광산물로 파릉리 금야동에서 사금이 생산된다.
토해선 철도와 해주 간의 국도가 강서리를 지나고 있으나 역은 없다. 지방도로로 배천을 기점으로 김천에서 개성·남천에 이르는 주도로가 있으며, 이곳에서 분기하여 호산리-주암리-도태리-금산면 선암리 간 도로와 양천리∼발산 간의 도로가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주암리의 천등산에 등암사(燈巖寺)가 있으며 산기슭에 천등암(天登巖)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이 바위 아래에서 탄생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절터에 큰 미륵상만이 남아 있다. 강서리 백마산(白馬山) 남록에는 고려시대 시인·문객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았던 강서사(江西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호산(虎山)·강서(江西)·우포(牛浦)·파릉(巴陵)·석산(石山)·대야(大也)·도태(都台)·주암(舟巖) 등 8개 이가 있다.
[유곡면柳谷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2.80㎢(1937년 현재), 인구 1만128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식현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금곡면(金谷面)과 유천면(柳川面)을 합하여 유곡면이라 하였다.
서쪽 면계에 토미산과 석굉산, 남쪽에 미라산(彌羅山, 203m)·진병산(榛屛山, 160m) 등이 있으며, 북쪽은 한교천 하구에서 중류까지 면하고, 동쪽은 예성강을 면하고 있다. 따라서 남서쪽이 높고, 야산 지대이며, 중앙부와 동부·북부가 저지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밀·메밀·피·면화 등이며, 이 밖에도 잎담배·약초 등이 생산된다. 또한, 축산에 적합한 환경 조건으로 소·돼지·닭 등이 많이 사육되며, 양봉도 많이 한다. 광산물로는 금곡리·용현리·화성리에서 금이 생산된다.
토해선이 극소 부분 통과하나 배천역·성호역이 가까워 이곳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많다. 서울∼개성∼해주 간의 국도가 영성리를 지난다. 배천∼벽란도 간의 지방도가 옥산포·이포리·금곡리를 지나며, 용현리에서 분기되어 화성리·유천리를 지나 온정면 국도와 연결된다. 홍현장과 식현리를 기점으로 각지에 연결되는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금곡조창(金谷漕倉)이 있으며, 식현리에 학 도래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식현(食峴)·금곡(金谷)·용현(龍峴)·계화(桂花)·이포(梨圃)·화성(花城)·유천(柳川)·충무(忠武)·영성(永成) 등 9개 이가 있다.
[은천면銀川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2.04㎢(1937년 현재), 인구 1만279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연남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서촌면(西村面)·동촌면(東村面)을 합하여 은천면이라 하였다.
면의 동북부에는 후정산(後井山)·대이산(大耳山, 210m)·천등산(天燈山, 264m)·국사봉·형제봉 등 낮은 산이 위치하나, 서남부에는 성천(星川)·한교천(漢橋川)·호국천 등이 있어 배천평야를 이루며, 군내 곡창 지대로 손꼽힌다. 중앙에 치악산(雉岳山, 361m)·비봉산(飛鳳山, 201m)이 솟았다.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시설이 잘되어 있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팥·밀·대마·조 등이고, 특히 쌀과 콩의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특산물로 연천리 온천동의 온천수를 이용한 화훼 및 소채류가 있으며, 비봉리 은봉광산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된다.
토해선이 면의 남부를 동서로 횡단하고 성호·배천온천역이 있다. 개성∼해주 간의 도로가 토해선과 평행으로 면의 중남부를 지난다. 배천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온정원∼남천, 남쪽으로 해월면 벽란도, 북쪽으로 개성·남천에 이르는 지방도가 있으며, 이 밖에 각 주요 취락에 이르는 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옥산동에 옥산포구(玉山浦口)·단산동에 창곶포구(倉串浦口)·시구포구(柴口浦口) 등이 있어 해상 교통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명승고적으로 영천리에 조선 세종 때에 발견된 배천온천이 있다. 온천수는 알칼리성의 단순천이며, 온천 뒤에 치악산이 있고, 그 둘레에 배천산성이 있다. 산록에는 문회서원·기운정 등의 명소가 있으며, 고읍리는 구 배천의 구기(舊基)로서 지금도 향교·객사·군량고 등의 옛터가 남아 있다.
산음리의 밭 가운데에는 고려 초에 건조된 높은 석탑이 있어 당시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 고읍리·산음리에 높이 1. 8m가 되는 문인석상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연남(蓮南)·영천(穎川)·구암(龜巖)·고읍(古邑)·정촌(亭村)·홍곡(鴻谷)·산음(山陰)·양청(兩請)·비봉(飛鳳)·성호(星湖)·옥산(玉山)·연동(蓮東) 등 12개 이가 있다.
[해룡면海龍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1.00㎢(1937년 현재), 인구 7,92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천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용암면(龍巖面)·금암면(今巖面)을 통합하고 해룡면이라 하였다.
북쪽 멸악산맥의 지맥에 임해산과 망림산(望林山, 91m)이 솟았고, 서쪽 면 경계를 따라 야산들이 이어져 내려와 남쪽 끝에 봉황산(鳳凰山, 85m)이 솟았다. 동쪽 면 경계에 풍천과 석벽저수지를 끼고 있다. 대체적으로 평야 지대이며 용남·금산·맹산평야와 간척지인 부현평야가 전개되어 군내 곡창 지대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콩·밀 등이며, 주요 수산물은 조기·조개류 등이다. 풍천역이 있는 금천리 신대동을 중심으로 북쪽에 용남리-대흥리-괘궁면-목단면 탁영대, 남쪽으로 맹산리-송봉면-해성면 해정리 해변, 용도면 천태리-흥운리-부사리 간의 지방도가 있다.
명승고적으로 경관이 아름다운 연해수리조합 제2저수지와 임해산이 있으며, 흥운리 금곡동에서는 청동기 시대 비파형 단검이 발굴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금천(琴川)·대흥(大興)·용남(龍南)·금산(錦山)·맹산(孟山)·흥운(興雲)·부사(富士) 등 7개 이가 있다.
[해성면海城面]
군의 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9.74㎢(1937년 현재), 인구 1만604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초양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안군의 유창면(楡倉面)·대산면(大山面)·병성면(並城面)의 3개 면을 합하여 해성면이라 하였다.
아주 낮은 야산으로 동쪽에 호동산(虎洞山, 30m)·수역산(水逆山, 40m), 남쪽에 봉대산(烽坮山, 60m)·마항산(馬項山, 20m)이 있다. 1930년 연해수리조합(延海水利組合)이 있기 전에는 토지에 밴 염분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낮은 평야였다. 따라서 산이나 하천이 없다. 해남리에는 남북 약 4㎞, 동서 약 6㎞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연백염전이 있다.
이 면의 농경지는 모두가 수리안전답으로 전체 경지면적은 35.54㎢이며, 이 중 논 23.03㎢, 밭 12.50㎢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조·보리 등이 있다.
어업도 주민의 주요 산업으로서 신포(新浦)·불당포(佛堂浦)·수래포(水來浦)·반이포(盤伊浦)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4월의 조기잡이가 유명하며, 새우·뱅어·숭어·곤쟁이·가오리 등이 어획된다. 특산물로는 천일염·신발짝굴[土花] 등이 있으며, 토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연료원으로 큰 몫을 한다.
도로는 연안을 기점으로 초양리 오암동에 이르는 중앙 간선도로가 있으나 교통은 다소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무릉리 호동산(虎洞山) 정상에 임꺽정(林巨正)이 축성한 성터가 있고, 매정리 수래포 연안 바위에는 금덕당(金德堂)이라는 신당이 있으며, 고생대 화석이 남아 있다.
해남리 봉대산에는 임진왜란 때 축성한 봉화대가 있으며, 마을 입구마다 500년 이상 된 거목이 많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초양(草陽)·화양(華陽)·매정(梅井)·해남(海南)·구룡(九龍)·무릉(武陵)·일신(日新) 등 7개 이가 있다.
[해월면海月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21㎢(1937년 현재), 인구 1만246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산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여의면(如意面)·궁월면(弓月面)·용해면(龍海面)의 3면을 합하여 해월면이라 하였다.
토미산·오봉산(五峯山, 100m)·미라산 등이 토미산맥을 형성하여 면의 북쪽 경계를 이룬다. 중앙에는 비룡산(飛龍山, 147m)·봉재산(鳳在山, 220m) 등이 솟았다.
예성강은 면의 동쪽 개풍군과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흘러드는데, 하구에 벽란도가 위치한다. 면의 남부는 연백평야의 일부로서 수리 시설이 좋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메밀·콩 등이며, 벽란도를 중심으로 한 포구 일원의 주민들은 상업 및 어업에 많이 종사한다. 수산물로 조기·새우·굴·조개·곤쟁이 등이 어획 및 채취된다.
광산물로 금산리 국근동, 문산리 율포동, 환성리 환촌동에서는 사금과 석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한때는 전국 4대 금 산지로 유명하여 해월의 땅은 쌀 나고 금 나는 고향이라 일컬어졌다.
지방도로로 벽란도-유곡면 용현리-배천, 유곡면 용현리-토현리-도촌면 괴암리-온정면 모례리, 벽란도-용봉리-금산리 국근동-송계리-토현리 국도, 환성리-운산리-연안온천-연안온천역 간의 도로가 있으며, 금산리를 기점으로 각 이간 도로가 있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하다.
명승고적으로 전원과 강·바다를 일컫는 해월팔경이 전하여지며, 벽란도는 개경의 관문으로서 많은 일화와 문학 작품을 남긴 유명한 포구이다. 토현리에는 반월강이라는 고려 의종 때 축조한 중흥궁의 옛터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금산(金山)·송계(松溪)·토현(兎峴)·운산(雲山)·환성(環城)·해월(海月)·용봉(龍鳳)·벽란(碧瀾)·문산(文山) 등 9개 이가 있다.
[호남면湖南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18㎢(1937년 현재), 인구 1만80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소정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백군으로 편성될 때, 연안군의 김포면(金浦面)을 중심으로, 개현면·미산면(米山面)과 신성면의 일부를 합하여 호남면이라 하였다.
북쪽에 자봉산·대산(碓山, 127m)·국봉(菊峰, 100m) 등의 구릉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아 평야 지대이다. 소사강이 자봉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흐르며, 개현·석천리를 거쳐 나진포천에 유입된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이 잘되어 군내 유수의 곡창 지대이다. 전체 경지면적은 35.02㎢이며, 이 중 논이 24.04㎢, 밭이 10.97㎢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대마 등이며, 바다에 접하고 있어 신포(新浦)·백석포(百石浦)·소야포(蘇野浦)·석포(石浦)를 중심으로 어업도 성하다. 어획물은 조기·민어·숭어·새우·뱅어·밴댕이 등이다. 광물로서 토탄이 많이 채굴되어 임야가 적은 이 면의 연료 해결에 많은 기여를 한다.
연안을 기점으로 자봉리·개현리 및 석천리 백석포에 이르는 도로와 송야리를 거쳐 신포·장현장을 경유하여 해성면 해남리에 이르는 도로가 있다.
또한, 소정리를 중심으로 호서리를 지나 파항리에서 분기되어 해성면 매정리에 이르는 도로, 파항리 북단에서 해성면 초양리 오암동에 이르는 도로, 백석포에서 호동면 나진포를 거쳐 연안온천과 연안읍에 이르는 도로가 있다. 백석포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 정기 여객선이 강화·인천 등지를 내왕한다.
유적으로는 석천리에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연안읍 일대의 지역과 함께 1935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학 도래지가 있다. 또한 개현리에는 5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소정(素井)·자봉(雌鳳)·개현(蓋峴)·석천(石泉)·송야(松野)·호서(湖西)·읍동(邑洞)·파항(把抗) 등 8개 이가 있다.
[호동면湖東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약 40.03㎢(1937년 현재), 인구 9,51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나진포리이다. 봉화리 앞바다의 역구도는 이 면에 속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백군이 편성될 때 연안군의 신성면(薪城面)의 일부와 복현면(福峴面)·식현면(食峴面)을 통합하고, 면 이름을 대호(大湖:남대지)의 동쪽에 있다 하여 호동면이라 하였다.
동쪽 남단 봉화리에 각산(角山), 서쪽에 남당산(南塘山, 90m) 등의 낮은 구릉이 솟아 있을 뿐이며, 면의 대부분이 평야 지대이다. 나진포천이 면을 동서로 가르며, 남쪽으로 흘러 황해로 유입된다.
각산은 높은 산봉우리 2개가 나란히 솟아 있어 자봉(雌鳳)과 웅봉(雄鳳)이라고 하는데, 이 봉우리가 소뿔처럼 뾰족하다 하여 각산이라고 한다.
웅봉 위에는 성지와 봉화대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해문(海門)이 있고, 사신암으로 불리던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고려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배를 탔다고 한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이 발달되었다. 전체 경지면적은 28.33㎢이며, 이 중 논이 24.84㎢, 밭이 3.48㎢로 농경지의 대부분이 논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대두·대마 등이며, 특산물로 가마니를 생산한다.
토해선이 개안·거안리를 통과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연안역이나 연안온천역을 이용한다. 개성∼해주 간의 이등도로가 철도와 병행하며, 연안을 기점으로 나진포에 이르는 도로와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유정리를 거쳐 봉화리 포구에 이르는 도로, 호남면 백석포에 이르는 도로 등 나진포를 중심으로 5개 도로가 나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온정면과 경계에 있는 천방산(天邦山)에서 200년 된 김해식토기가 출토되었고, 면내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토탄층에서는 여러 종류의 석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각산 기슭에는 성혼이 우거하던 유적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나진포(羅津浦)·남당(南塘)·개안(開安)·거안(居安)·추정(楸井)·봉화(烽火)·용산(龍山)·유정(留亭) 등 8개 이가 있다.
[화성면花城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2.71㎢(1937년 현재), 인구 8,70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봉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천군의 도상면(道上面)과 화산면(花山面)을 합하여 화성면이라 하였다.
동북부에 호국산, 남서부에 용각산(龍角山)이 있으며, 동쪽을 제외한 3면은 구릉들이 연달아 솟아 있다. 이들 산을 발원지로 한 대·소하천이 예의저수지로 흘러 들어가고, 사경교계(四卿橋溪)·가리천(加里川)·호국천 등을 이루며, 예성강의 지류인 한교천에 유입된다.
용각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생왕방 지형(生旺方地形)이라 하여 길지(吉地)로 전하여져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이곳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봉우리 이름이 활인봉(活人峰)으로도 불린다.
논보다 밭이 많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조·밀·피·콩·면화 등이고, 산전리·용전리에서는 복숭아·배 등이 많이 생산된다.
배천을 기점으로 송천리-오봉리-금산면-평산온천-해주-남천에 이르는 주도로가 있으며, 오봉리에서 홍현역과 홍현국도에 이르는 도로가 있다.
연안을 기점으로 석산면-산전리-용전리-금산면 간의 도로와 오봉리를 중심으로 동쪽에 주도로와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또한, 하저(河底)가 낮아 예성강∼한교천을 거쳐 포운리 감촌동 감호포구(甘湖浦口)까지 선박이 내왕하였다.
유적으로는 호국리의 호국산에 공민왕이 창건한 호국사(護國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경내에 호국사사적비만 남아 있다. 송천리에는 고려 시대의 유현 안향(安珦)을 봉사하는 사당인 안자묘(安子廟)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오봉(梧鳳)·포운(浦雲)·운곡(雲谷)·화장(禾場)·송천(松川)·호국(護國)·화산(花山)·금계(金鷄)·산전(山田)·용전(龍田) 등 10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광복 당시에는 이 군의 일부 지역이 남한 지역이었으나 휴전협정으로 군 전체가 북한 지역으로 넘어갔다. 1952년 호남면·해성면·화성면·금산면·은천면·석산면·도촌면·유곡면·온정면·해월면·호동면이 신설된 배천군에 각각 편입되었다.
1954년 황해도가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분리되면서 연안군·배천군은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67년 온정면의 행정리와 호동면의 추정리 일부가 각각 분리되어 배천군 역구도리로 바뀌었으며, 해월면의 금산리 일부는 호동면의 봉화리와 합쳐졌다. 1974년 5월 용도면 대평리·심계리 일부는 청단군에 들어갔다.
연안 지역에서는 연백평야의 유명한 쌀이 생산되며, 그 밖에 박하·잎담배 등의 특용작물이 생산된다. 공업 제품으로는 피복·기와·도자기·비단·초물공예품·수지그릇 등이 생산되며, 특히 초물의 생산품은 수출되고 있다.
수산업은 연안 쪽의 해안에서 전어·새우·멸치·대합·조개 등이 어획, 채취되며, 연안의 염전에서는 소금이 생산된다. 철도는 광복 전의 토해선(토성∼해주)이 배천선으로 바뀌어 해주∼은빛(광복 당시 운산면의 신설 지명) 간을 운행하고 있다. → 배천군, 연안군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