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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관련 예화
130년 간의 동행
1981년 흑인 가운데 가장 장수한 찰리 스미스가 130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주 바토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130년의 세월은 고통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고통 속에서 살았다. 미국의 남부와 서부를 헤매며 매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리고 병들어 죽을 고비를 스무 번도 넘게 경험했다. 한때는 서부 최고의 총잡이 제시 제임스의 마구간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130년 간 고생만 하다가 죽은 스미스씨는 임종하기 며칠 전 자신을 방문한 스티븐스 목사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내가 흑인으로 태어나게 했음에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 생활도 감사합니다. 130년 간 언제나 내 곁에 계셔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스티븐스 목사는 이 기도를 들으며 "이런 신앙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라고 말했다.
같이 가는 길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 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진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같이 타고서도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문학가 안데르센(1805-1875)의 청년 시절의 일화이다. 그는 스웨덴의 여류 소설가 브레멘을 만나볼 계획으로 여객선을 탔다. 선장과 대화를 하다가 자기의 여행 목적을 이야기했더니 선장은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브레멘 여사는 지금 외국 여행중이라는 신문 기사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모처럼의 방문 여행인데 헛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안데르센은 몹시 낙심하였다. 그러나 한 시간 후 선장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안데르센씨, 기적입니다. 당신이 만나려는 브레멘 여사가 바로 이 배에 타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
성경을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변역하기 어려운 것이 '보혜사'라는 단어다.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보혜사(保惠師)'인데, 이는 그 뜻이 매우 풍부하다. 즉 '안위한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훈계한다', '권고한다', '격려한다', '도와 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뜻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하시는 동반자시다.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말에서 생명의 말씀에서 안위를 찾으며 죄와 세상 염려의 와중에서 허덕이는 영혼과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따스함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한다. 근심에 쌓인 마음의 생각은 무감각하고 괴로운 혼란으로 사방에 흐트러진다. 보혜사께서 이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자기 통제 밑에 두신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여러 가지 걱정을 피할 수 있거나 혹은 어떤 정신요법적 마술로 우리 생각을 잊어버리라고 함으로써 걱정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생각을 통제하는 것 즉 꽉 동여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내리는 화평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
엘리자벳 빌타의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가 2층 침실에서 일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잠깐 쉬는데 빨랫줄에 아름다운 파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찬란한 햇빛을 받고 있는 파랑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얼마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다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꾸 그 파랑새가 또 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그 파랑새가 앉아 있나 밖을 내다보다 이번에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처럼 아름답던 파랑새가 누런 암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해가 구름 속에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은 빛과 이토록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빛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더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특히 인간은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여 빛을 발하지 않는 이상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미는 마치 어둠 속에 있는 한 송이의 장미와 다를 바 없듯이 그리스도 없는 삶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돈과 명예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 없는 지식은 교만해지고 그리스도가 없는 과학은 결국 불행한 오점을 찍을 뿐이라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
이탈리아 제노바(Genoa)에 있는 예수 상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동상인데 높은 언덕에 세우지 않고 이 항구도시의 가장 낮은 장소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름을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라고 붙였다. 제 2차 대전 때 제노바 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져 많은 군함이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묻힌 수많은 젊은이들을 회상하며 부모들이 헌금하여 예수 상을 봉헌한 것이다. 이 예수 상은 예수님이 높은 곳에 우뚝 선 예수가 아니라 깊은 곳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고통 당하시고,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어느 젊은이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 하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 나라를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았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모래밭에는 발자국이 두개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따지듯이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내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네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내가 직접
민규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 산은 처음 가보는 산인데다가 친구 중 그 누구도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 헤매다 보니 날이 점점 어두워 왔습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자그마한 산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산장엔 턱수염이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할아버지, 저희가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요, 산 아래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죠?" 민규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너의 힘만으로는 이 산을 내려 갈 수가 없어. 이 산은 키 높은 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길도 험하여 너희들에게는 지도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민규와 친구들은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내가 직접 마을로 데려가 주지. 나와 같이 간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거야." 민규와 친구들은 그 날 밤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는데는 그 산에서 평생을 산 그 할아버지와 동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돌봐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의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다가는 나만 바보 소리들을 텐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때로는 손해도 보고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하늘나라의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보다 더 확실한 삶의 길은 없습니다.
너와 함께 하리라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죽음의 나찌 포로 수용소에서의 일이다. 한 특별한 수용소는 일을 하기 위한 수용소였는데 포로들이 일을 하는 한 그들은 가스실에서 구제될 수 있었다. 솔로몬 로젠버그 가족 중에는 연로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80살이 가까운 할아버지는 비인간적인 조건 하에서의 장시간의 노동과 영양분의 결핍과 불결한 위생시설로 인해 곧 쓰러지게 되었고 이내 가스실로 옮겨지고 말았다. 솔로몬은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스실로 끌려갈 사람은 제일 어린 아들 데이빗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데이빗은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작업량이 점점 더 줄어들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가족들은 각자 다른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수용소로 서둘러 돌아오곤 했는데 이때마다 아버지 솔로몬은 혹시 막내아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과 전율로 몸을 떨어야 했다. 매일 밤 막사에 돌아오면 솔로몬은 재빨리 데이빗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큰아들 야곱과 아내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침내 솔로몬이 두려워하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일터에서 돌아와보니 가족 중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사랑스런 가족의 얼굴을 찾았다. 드디어 큰아들 야곱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와 어린 데이빗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야곱에게 다그쳐 물었다. "얘야 내게 말해다오. 데이빗이 오늘 끌려갔단 말이냐?" "네, 아빠. 오늘 그들이 와서 데이빗을 데려갔어요. 데이빗은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요." "그러면 네 엄마는 어디 있느냐? 네 엄마는 아직 건강하지 않느냐? 그들이 엄마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겠지?" 야곱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사람들이 처음에 데이빗을 데리러 왔을 때 데이빗은 몹시 겁을 냈어요. 그리곤 울음을 터뜨렸지요. 그 때 엄마가 말했어요. 울지 마라, 데이빗. 내가 함께 가서 너를 꼭 붙들어주마. 그리고 엄마는 데이빗이랑 같이 가스실로 가신 거예요. 데이빗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너의 심장 속에 내가 있다
시에나의 성녀 캐더린(Catherine of Siena)에 대한 신비한 전설들이 많다. 캐더린 수녀는 몹시 고통스러운 어느 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던 주님께서 내 심장이 찢어질 만큼 괴로운 이 때에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때 다음과 같은 대답이 들렸다고 한다. "나는 지금 너의 심장 속에 있다."
눈길의 발자국
옛날 북서 아메리카에 한 인디언 추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백인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추장은 그 다음 날 아침에 방문객을 오두막집에서 나오게 한 후 물었다. "당신은 지난밤에 이 오두막집을 통과한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방문객은 눈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한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추장에게 "한 사람밖에 지나간 적이 없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추장은 그에게 그 날 밤 그 오두막집을 수백 명의 인디언들이 다시 말해서 한 부족 전체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추장은 그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인디언들은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를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추장이 제일 선두에 걷고, 나머지 모든 부족이 일렬로 그를 따라가면서 추장이 밟았던 발자국을 정확히 밟고 지나감으로써 하나의 발자국만을 남깁니다. 따라서 수백 명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 지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계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부족의 적들은 그들이 간 길을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장이시다. 그는 생명의 길을 따라 제일 먼저가시면서 우리에게 그의 발자국 즉 그의 모범을 남겨 놓으셨다. 우리는 주님이 남겨 놓으신 이 발자국을 따라야만 한다.
동업자
최고로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알라후에라시 외곽에 있는 구릉지대를 걸으면서 나는 양쪽에 있는 커피농장을 바라보았습니다. 기름칠을 한 듯 반질거리는 검푸른 잎새들이 아열대의 태양을 반사하였습니다. 길을 따라 지은 작은 집들의 현관과 잔디밭에는 가지각색의 꽃과 관목이 가득했고, 화려한 붉은 꽃이 피는 굵은 덩굴이 담벽과 현관지붕을 큰 무늬로 뒤덮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소박한 주택에 붙여서 지은 작은 목공소를 못 볼 뻔 했습니다. 목공소 한쪽이 열려있길래 나는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작업장은 아주 소박하게도 작았습니다. 침대 제작소였습니다. 뒤쪽에는 양쪽에 굵은 나무껍질이 붙은 채로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로부터 목수는 아름답고 멋진 침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침대는 각기 튼튼하고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변했습니다. 목수가 공방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그의 작업을 칭찬했습니다. "여기 일하는 사람이 모두 몇 명입니까?"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둘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있나 둘러보았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손끝을 하늘로 가리켰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여기서 일하지요. 하나님은 나무를 만드시고, 나는 침대를 만들어요."
막대기와 지팡이가 위안이 되는 이유
캐시는 여러 해 동안 막대기와 지팡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라는 속담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엄한 수련 방법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책을 읽다가 의혹을 품게 되었다. 그 책에 보면 막대기는 양들을 때리는 도구가 아니라 목자가 단순히 막대기와 지팡이를 들고 있음으로써 양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고 올바른 곳으로 가도록 부드럽게 인도한 것이라고 하였다. 캐시는 기뻐서 소리치고 싶었다. 예수께서는 그 분의 제자들을 양떼나 어린양으로 비유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결코 매로써 억지로 복종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올바른 방향으로 부드럽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큰 위안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멍에를 같이 한 자
일찍이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면 빙 돌아버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여러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았습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딥니까? 그런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도 보습을 땅에 대고 보니까 막 달아나는 것처럼 빨라 보입니다. 양쪽 소를 번갈아가면서 이쪽으로 몰기도 하고 저쪽으로 몰기도 하는데, 그 모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른쪽 소의 고삐를 탁 채서 빨리 가게 하면 보습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왼쪽 소를 빨리 몰면 이 쟁기는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이며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 4:3에서 표현한 참으로 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자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유기적이며 균형잡힌 공존적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전파에 한마음으로 힘썼다는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종은 건강을 가져다 준다
나이지리아 칼라브르의 위대한 선교사 슬레서는 8년 동안 떠나있다가 다시 역경의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도착은 대단한 흥분을 자아냈으며, 그녀의 체류기간은 그야말로 오랜 리셉션과 같았다. 하루종일 선교사관은 시장 같았다. 가까운 데서는 물론이고 아주 먼 데서도 사람들이 술레서 선교사에게 인사하러 일부러 찾아왔다. 그녀가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시시각각 몰려들었다. 평소 그녀는 이렇게 말해왔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당신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면 당신에게 빵을 주실 것이고 물을 주실 것입니다. 복종은 건강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함께 끝내야 합니다."(G. C. Britton)
본문은 기억하지 못하나
한 가난한 여자가 어느 날 교회에서 부정직에 관한 설교를 듣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그 날 설교의 본문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하자 그 여자는 잊어 버렸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내가 집에 돌아와 한 부셀짜리 되를 태워 버렸다는 것은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설교를 더 많이 하고 계신다.(J. Berrey)
사자의 꾀임에 빠진 네 마리 황소
친한 네 마리 황소가 있었다. 이 황소는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맛있는 풀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떤 위험이 닥쳐오면 네 마리가 힘을 합쳐 위험을 물리쳤다. 이 네 마리의 황소를 노리는 사자가 있었다. 이 사자는 한 마리씩 사냥하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힘을 합한 네 마리의 방어에는 자신이 없어 늘 망설이다가 하루는 꾀를 내어 약간 뒤에 처져있는 황소 한 마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 마리의 황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네 친구들은 서로 불신하였고, 크게 싸우다가 마침내 각기 흩어져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분열을 노린 사자는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마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
마틴 루터가 크게 낙심하고 있자 어느 날 그의 아내는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누가 죽었소?"라고 그가 묻자 "하나님이 죽었습니다"라고 아내가 답변하였다. "괜한 소리 그만 두시오. 하나님은 영원 불멸하시는 분이시오. 지금까지도 살아 계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오"라고 루터가 소리쳤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요?"라고 그의 아내가 되물었다. 그때야 루터는 아내의 뜻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의심이 구름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손자를 위한 기도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스마트 박사가 경험한 이야기이다. 하루는 사고로 눈꺼풀이 크게 찢어진 어린 딸을 아버지가 안고 황급히 응급실로 들어왔다. 스마트 박사는 그 소녀의 상태를 살핀 후 소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찢어진 곳을 몇 바늘 꿰매야 하는데 따님은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스마트 박사는 소녀에게 "내가 바늘로 상처를 꿰맬 때 참고 뛰쳐나가지 않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이때 소녀는 "아빠가 내 손을 붙들어주면 뛰쳐나가지 않을래요." 하고 대답했다. 이 소녀는 아빠가 잡아주는 손에 매달려 상처를 꿰매는 동안 아픔을 참으며 한 번도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그 딸에게 어떤 힘을 준 것일까. 아버지가 손을 잡음으로 상처를 꿰매는 횟수가 줄어들거나 아픔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손을 잡아줌으로 용기를 얻게 되고 참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환난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또한 역경으로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세상을 이기신 능력 있는 주님이 오늘 나와 함께 계신다.
술 취한 친구
루터가 하루는 이런 예화를 든 적이 있다. "술 취한 친구를 말에 태워 집에 보내기는 아주 어렵다. 이쪽에서 올리면 저쪽으로 떨어지고 저쪽에서 말에 올리면 이쪽으로 떨어진다. 방법은 친구 하나가 함께 안장에 앉아 가는 것이다."
엄마가 소개한 친구
어떤 고아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너는 엄마가 없으니 고민 거리가 생길 때 어떻게 하니?"그러자 그 고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나한테 예수님께 가라고 하셨어. 그는 우리 엄마의 친구고 또 내 친구셔."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니. 그는 너한테 신경 쓰기 위해 모든 일을 멈추진 않으실 거야." 친구의 반박에 고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가 들어 주실 거라는 거야. 내겐 그걸로 충분해." 우리에게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에피소드
오래 전에 미국에 윌리암 헐스트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신문편집인, 즉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고미술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신기한 도자기 하나가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그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꼭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힘과 노력을 들이면서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자기는 벌써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 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에피소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나가는 그 귀한 보화를 사서 자기 집의 광속에 두고는 그 보화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 얼마나 어처구니없습니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스의 산문
지난 15일 롱아일랜드에서의 화재로 인해 6명의 아이들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 중 아홉 살 난 엘리스(Allis Shedrick) 양이 죽기 이틀 전에 학교 숙제로 쓴 <나의 가장 좋은 친구>란 산문이 <데일리 뉴스>지에 소개되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하나님이다. 내가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말상대가 되어 주신다. 무엇인가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나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누구든지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은 우선 하나님과 의논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나는 언젠가 하나님의 큰집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영혼의 파이프가 잘 연결되었나
미국의 한 신문사가 어떤 병원의 소방시설에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문에 그 기사를 실었다. 35년 간이나 화재로부터 안전하였던 그 병원의 소방시설이 도시의 주요 수도시설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병원의 소방시설의 수도 파이프가 지하로 4피트 정도 뻗어 나가더니 거기서 끊겼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병원 측에서는 곧바로 예산을 세워서 시의 수도 파이프에 병원의 소방수도 파이프를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기사를 보고서 매우 불안해한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나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던 일꾼들도 아니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의하여 생명수의 물줄기까지 자신들의 영혼의 파이프가 잘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중간에 끊겨 있지나 않는지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오직 우리의 생명수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Pilgrim)
예수님과 동석한 자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한 자들을 천국에서 천사들이 예수님 앞에 아뢴다. "이 사람은 인류생활에 편리한 필수품을 연구 발명한 문명의 혜택을 끼친 발명가입니다." "수고 많았다. 천사장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사물의 근본원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에게 학문을 가르친 철학자입니다." "수고가 많았다. 그 사람을 이성의 천사 라파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국가 수호를 위해 칼 들어 적군을 물리치고 전승의 유공자 군사입니다." "수고 많았다. 무사천사 미가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작사 작곡하여 많은 교회에서 찬양에 수고한 음악가입니다." "수고가 많았다. 기쁜 소식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죄인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시킨 전도인입니다." 천군 천사 모두 환영함과 예수님 친히 기립 영접하여 함께 앉았다. 예수님과 동석한 자는 전도자였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예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사랑이가 맹장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는 아무리 아파도 수술은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사랑이를 억지로 병원에 데려가서 수술을 받게 한 아버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수술이 다 끝나고 아버지가 사랑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수술을 받는 동안 무섭지 않았니?" 사랑이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뇨.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수술하는 게 겁이 난다던 네가 안 무서웠단 말이니?"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처음에는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수술실에 예수님 그림이 걸려 있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의사 선생님들이 수술을 하고 있고 또 예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사랑이의 대답에 아버지는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이가 수술을 받으면서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마음의 근심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려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십니다. 또한 사랑이가 안심하고 수술을 받게 된 다른 이유는 수술을 할 의사 선생님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이러한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행동을 바르게 해야 될 것입니다.
이 더하기 이는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은 경제학자입니다. 그 분은 경제학 박사이며 대학에서 수학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루는 제가 설교를 하다 말고, 그 장로님께 "이 더하기 이가 뭐지요?" 하고 여쭈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바라보시며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문제가 너무 쉽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저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신 얼굴에 잔득 힘을 주고는 뭔가 심오한 것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의 표정도 심각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분은 머리 속으로 2라는 숫자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온갖 방정식을 다 떠올리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모든 회중들이 조용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잠시 후 그 장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줄에 어떤 꼬마가 앉아 있길래 저는 그 꼬마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이 더하기 이가 뭐지?" "넷이요." 그 꼬마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 질문은 경제학박사님이 대답하시기에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그토록 쉬운 질문을 던졌을 것이라곤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너무 간단했기 때문에 그 분은 제 질문 속에서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눈을 뜨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계시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번이라도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그 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과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그 분과 함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삶이라는 것은 대단히 쉬워집니다.
인간의 기술과 하나님의 손길
어떤 유명한 외과의사가 복잡한 수술을 하는 것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정성을 다해 수술 준비를 마친 그의 표정에서 자신감과 함께 조금은 긴장된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준비가 다 되셨습니까?" 하고 로버트가 묻자 "거의 다 됐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잠시 동안 멈추어 서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 긴장을 푼 평온한 모습으로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수술하는 동안 그의 손길은 결코 주저함 없이 능숙하게 움직여나갔다. 수술이 끝난 후 로버트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수술에 임하기 전에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의사들은 자기의 기술에만 의지한다고 생각 했었거든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의사도 인간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기적을 만들 수는 없지요. 저는 인간보다 훨씬 탁월한 어떤 힘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학이 오늘날의 수준까지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의사는 잠깐 침묵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맺는 것이었다. "저는 수술을 할 때문 언제나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것이 나의 기술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손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임재하심의 체험
플라벨이라는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는 칼빈주의자였으며 평신도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말을 타고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감당할 수없는 힘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힘이 점점 강하게 밀려들기 때문에 급기야는 말을 타고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잠잠하니까 말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플라벨이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말을 몰지 않으니까 말이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여기저기 나무에 찔려 플라벨의 얼굴이 찢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내려와서 얼굴을 씻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그 때의 느낌을 플라벨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내가 말등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젖어있던 그 순간이 천국이 아니었다면 설혹 다른 데에 천국이 있다고 해도 내가 체험한 그것만큼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은혜스러운 날 저녁에 플라벨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았지만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임재에 사로잡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그가 기록하기를 "나는 어느 날 밤보다도 그곳에서 잔 그 날 밤만큼 푹 쉰 날이 없었다. 그전에는 생전 알지 못하였던 것들을 내 영혼이 믿음으로 보고들은 밤이었다."라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런 것이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자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추운 겨울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몸을 떨며 말을 잘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추위를 탔으나 다른 한 사람은 별로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한 사람은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제대로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찬바람같이 불어대는 마귀와 눈을 뿌리는 구름같이 떠 있는 유혹 속에서 부족한 인간은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경계하여 머리에는 소망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진실의 띠를 묶고, 발에는 평화의 신을 신고, 손에는 성령의 검을 잡고, 앞에는 믿음의 방패를 세우고, 하늘에는 기도로 무전선을 놓고, 항상 굳게 서서 모든 원수를 다 이기며 하늘을 향해 나아가다가 만일 기진맥진한 경우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무전을 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혜사라는 대장을 속히 파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적군을 무찌르리니 걱정할 것이 없다. 마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람에게는 추운 날이 없는 것과 같다.(홍승한)
조지 뮐러의 일기
5월 7일 내가 매일 해야 할 일 중 으뜸가는 일은 주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많이 주님께 봉사할 수 있는가가 아니고. 나의 내적 자아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영적인 영양 공급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북돋아줄 수 있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도 있고, 또한 나 자신의 다른 면으로 주님의 자녀로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주 안에서 기뻐하지 않고 나날이 나의 내적 자아가 영적인 영양 공급과 힘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사역을 그릇된 정신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해야 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때로는 경고와 채찍질도 받게 되는 것이다. 대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기도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신집중이 안 될 때는 흔히 15분에서 1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곤 했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이런 문제는 없다. 나는 가끔씩 신앙생활의 초창기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에 대해 놀라곤 했다. 외적인 자아가 먹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내적 자아 또한 그렇다. 물이 수도관을 통과하듯이 우리 마음 속을 통과만 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읽는 성경구절을 묵상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어떤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먼저 달려갑니다. 그런데 앞에서 큰 개를 발견합니다. 개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손을 잡습니다. 손을 잡고 뒤로 돌아 미소를 지으면서 개를 봅니다. 그러나 개는 여전히 큰 개입니다. 그리고 개는 여전히 사납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안전합니다. 아버지 손을 잡았을 때 평안을 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평안은 한 인격자와의 관계에서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장소에서 삽니다. 한 장소는 제한된 장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몸과 같이 유한한 곳입니다. 그러나 또 한 곳은 무한한 곳입니다. 하나님만큼 무한한 세계입니다. 한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이며 또한 세계는 신령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똑같이 실제적인 두개의 세계인 것입니다. 환난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실제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세상에서 있게 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셨던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승리의 기도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양로원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왕이 당신을 종종 방문을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나는 몇 번 여왕의 심방을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심방한 일이 있습니까?" 하고 또 한 번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심방을 받지 않습니다. 그 분과 항상 같이 삽니다. 그 분이 여기서 나와 같이 삽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과 같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의사
어느 큰 병원의 유명한 한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놀라운 의술과 수술에 대한 꼭 필요한 침착성은 많은 젊은 의사들로 하여금 이 외과 의사의 성공적인 수술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련의가 용기를 내어 그 외과 의사에게 이 사실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 외과 의사는 "그렇다네. 이 두 가지 사이엔 분명한 관계가 있다네. 내가 아주 까다로운 수술을 집도 할 때도 많고, 수술 후에도 환자의 상태가 예상 못할 지경에 빠질 때도 수없이 많은데 이럴 때 나는 어찌해야 될지를 모른다네. 그렇지만 나는 곧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게 되며 주님께서는 내게 수술을 성공하도록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네. 나는 먼저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수술 칼을 손에 들어본 적이 없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부터 "주님과 함께 수술하는 의사"라는 말이 이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생명의 귀중함을 아시고, 겸손한 의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환자를 치료할 때 먼저 주님께 도움을 구한 다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환자를 돌보는 헌신적인 분들에게 감사를 해야 됩니다.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의 지원병 중에서 독일에 보낼 스파이를 많이 뽑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독일식 음식, 군복, 언어, 이름, 생활풍습에 대하여 매일 맹훈련을 받습니다. 외모도 완전히 독일 군인일 뿐만 아니라 의식구조마저도 독일화되어 독일 사람으로 완전히 변했다고 인정될 때 비로소 스파이가 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한스이고, 고향은 일리노이주 시카고가 아니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바꿔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완전히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훈련 마지막 단계에서 수십 리나 되는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된 행군을 합니다.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든 사이에 새벽 두세 시경 갑자기 낯선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곤히 잠든 훈련병을 깨우면서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제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실격입니다. 그는 제 이름은 "프리드리히 한스입니다."라고 엉겁결에라도 독일말로 대답할 수 있을 때 정식 스파이가 된다고 합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나는 독일 군인이라는 것이 잠재의식에도 깊이 박혔을 때 스파이로서의 교육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어 어디에서 보아도 크리스천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모든 생각이 집중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정과 욕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은 유태인이 방랑하는 외국생활에서 그들의 신앙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딸들에게 철저하게 신앙을 통한 가정 교육을 시키며 말한다. "너희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는 것이나, 숄(shawl)을 걸치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마라. 그것은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전통적인 표시이다. 우리를 지켜 주신 하나님을 떠나 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캐셔 속의 못
런던 시 템플 교회에 70세가 가까워 오는 에밀 메틀러(Emil Mettler)씨가 있다. 그는 알버트 슈바이처 협회(의료 구호 사업)의 간부이다. 그는 40년 동안 작은 식당을 경영해 왔다. 손님들은 요금을 지불할 때 메틀러 씨의 캐셔(현금 보관함) 속에 들어 있는 이상한 물건을 보고 놀란다. 6인치의 큰 못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오는 손님은 질문을 한다. "캐셔 속에 못은 왜 넣어두었습니까?" 메틀러 씨는 심각한 얼굴로 설명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못을 집의 책상 서랍 속에 둘 수도 있으나 캐셔 속에 둔 것은 직업과 내 생활 속에 예수님이 계심을 자주 상기하기 위해서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
중국 선교에 온 정성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1832~1905) 선교사가 전도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몹시 지쳐 있었다. 그는 말씀을 읽다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는 구절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후에 이 때를 떠올리며 "내가 정신적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나는 마치 주님이 나를 떠나신 줄 알고 불신 속에서 살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내 속에 주님이 계신 이상 나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간증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16세기의 카르멜회 수사였던 브라더 로렌스는 오랜 세월 동안 수도원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고 지속적인 사랑과 순종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임재하심을 실생활 가운데서 누리는 것을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번철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하다 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무슨 일에나 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할 때에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좀 더 쉽고 직접적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는 데는 복잡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정직하고 단순하게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브라더 로렌스의 본을 통해 특별히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된 것이 사색적인 많은 책들을 읽거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는 자기의 일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이라면 직장보다 더 좋은 훈련장은 없습니다. 까다로운 상사, 패배감과 부족감, 직장 일에 따르는 큰 압력 등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도구로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압력 하에서가 아니면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를 성격상의 결점들을 다루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극단적인 별난 데를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할 때 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손은 보호를 의미한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녹스는 적들의 사악한 음모로부터 무수히 도피하였다. 그는 그의 집의 식탁머리에 있는 창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왠지 그는 그의 지정석에 앉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을 앉게 하지고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저녁에 그를 죽일 계획으로 창문을 통해서 총알이 날아왔다. 그 총알은 그가 늘 앉았던 의자를 스쳐 지나가 등잔의 밑동에 구멍을 냈다.
하나님의 약속
리빙스턴이 16년 간 아프리카 정글의 고독과 싸우다가 고국에 돌아와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데 한 학생이 물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16년 간을 살 수 있었습니까?" 리빙스턴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이 나로 하여금 신음이나 불평 대신 찬송을 부르며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맡기는 것
중국 오지에 간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로서는 거의 견딜 수 없는 믿음의 시련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 경우마다 한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로 인해 신뢰와 평화가 회복되었다. "내 영혼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친구가 보내온 편지가 우리와 예수가 일치되어 있다는 진실을 나에게 계시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편지 내용을 요약한다면 믿음이란 것은 더 많은 믿음을 가져보겠다고 내 힘으로 애쓰는 데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는 데서 강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 편지를 읽는 동안 디모데후서 2:1의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그는 언제나 신실하십니다."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바라보며 혼자 말했다. "나는 애타지 않으련다. 그가 친히 약속하신 것을 어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1960년 딘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말기의 고통을 겪을 때 찬양이 그의 삶에서 새로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겠지만 이 땅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동안에도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딘은 그의 병실을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몇 달 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 그의 가까운 어느 친구는 "그의 병실은 지성소 같았고, 그가 누웠던 침대는 설교단상 같았으며, 그에게 병문안 왔던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찬양을 했다고 해서 그의 암이 나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찬양과 믿음을 통하여 딘은 고통스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새로운 기쁨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축복 가운데 있을 때나 고난 가운데 있을 때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임재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대적들은 꼼짝 못하고 사탄의 세력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과 영광과 기쁨과 능력 가운데 살게 됩니다. 사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임재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풍성함을 여러 면으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찬양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와 같이
허드슨 테일러 목사는 임종을 몇 달 앞두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그의 절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게, 나는 지금 몸이 너무 쇠약해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고 심지어 기도도 못하고 있네. 단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와 같이 누워 있는 것이라네. 그리고 그 어린 아이가 하나님을 믿듯이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을 뿐이라네."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길을 걸었던 위대한 테일러 목사가 지금은 육체적 고통과 쇠약함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동요 없이 조용히 누워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태도다. 그 분은 당신이 곤경에 빠져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더 강해지려고 애쓰지 말아라. 단지 그냥 그대로 너의 믿음을 지키고 있어라."(제임스 H. 매콘케이)
할머니 교우의 설교
랠프 턴불 목사는 <하나뿐인 교회>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말한다. 양로원에서 심한 신경통으로 오래 누워 있는 할머니 교우를 심방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하고 문안하자 노인은 손을 보이며 말했다. "이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은 평안합니다." 또 노인은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머리에 가시가 박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노인은 다시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옆구리는 창에 찔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심방 갔던 턴불 목사가 오히려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
할인판매
어떤 것을 살 때는 지불한 금액에 상당하는 것만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 교훈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할인 판매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은 돈이 많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문에 실린 백화점의 바겐 세일 광고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나는 싼 김에 원래 계획보다 많은 물건을 헐값에 사서 쓰지 못하고 버리곤 합니다. 반면 어떤 것들은 결정을 참 잘했던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 집 가구는 대부분이 화재로 모든 것들이 불에 타고나서 마련한 것들로 22년이나 묵었습니다. 나는 우리 식탁을 사던 때를 기억합니다. 건장하게 생긴 외판원이 덧판을 펼쳐 보이고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제품의 질은 참으로 뛰어났습니다. 쉽게 닳지를 않아 식사 중에 생긴 자국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네 아이들이 수많은 흠집을 내놓고 자국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 식탁은 지금도 여전히 튼튼합니다. 비싼 만큼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헌신에 있어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싸구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헌신의 질은 그 치르는 값으로 나타납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함께 하고 있는데도
한 남자가 여러 달에 걸쳐 몇 차례고 거듭 사랑하는 여자에게 구애를 했건만 번번이 매몰차게 퇴짜만 맞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 여인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만나러 오라며. 그 때 그 곳에서 그 남자는 마침내 애인 곁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한 무더기 꺼내 놓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썼던 열렬한 연서들로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사랑과 결합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불타는 욕망을 고백하는 내용들이었다. 연인은 그것을 애인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가건만 여전히 그는 읽고 읽고 또 읽고만 있는 것이었다. 결국 여자가 말했다. "별 바보 같은 남자 다 보겠네. 이 편지는 그러니까 모두가 당신이 절 갈망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 아녜요. 그런데 보세요. 여기 당신 곁에 제가 앉았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줄곧 그 멍청한 편지나 읽고 있으니 대체 어찌 된 거냐 말예요." 열렬한 신봉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 여기 네 곁에 내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는 줄곧 머리로 나에 관하여 궁리나 하고, 혀로 나에 관하여 얘기나 하며, 책으로 나에 관하여 읽기나 하는구나. 언제면 고요해져 나를 맛보려느냐."
함께 하는 사랑
신학자 바르트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은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다 주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아야 한다. 나는 그를 보는데 그는 딴 사람을 본다면 그것은 짝사랑이다. 무릇 사랑이란 마주보고 자신의 마음을 주고,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마주보고, 마음을 주고받는 것만 가지고는 온전할 수 없다. 함께 일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일해야 한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에수님의 영혼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본받고 따라야 한다. 요즘 부부들을 보면 이혼하는 쌍도 늘고, 부부간에 크고 작은 갈등으로 여간 시끄럽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함께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함께 사역해야 한다. 함께 하는 사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녀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함으로 아이가 생겨야 하는데 공동 작품인 아이가 없으면 서로 사랑이 식어지기도 한다. 함께 노력함으로 만든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소위 신세대 부부들의 이혼율이 늘어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일하게 되어있는 사회구조가 그것을 부채질한다. 우리네 조상들은 어떠했는가? 남편이 들에 나가서 일하면 아내는 점심을 싸 가지고 들로 나간다. 또 남편이 당을 일구어 놓으면 아내는 그곳에 씨앗을 뿌린다. 타작할 때도 아내는 타작기에 벼를 집어넣고 벼이삭을 모으면 남편은 그것을 가마니에 담아 창고에 들이거나 건조시킬 수 있는 마땅한 장소로 이동시킨다. 이렇게 평생을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에 가끔 부부가 작은 봉고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야채나 과일이나 생선을 팔러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아름다워 보인다. 한 사람은 "수박 사세유" 하고 한 사람은 밖에서 "어서 오세유" 하면서 하루종일 함께 하니 그 사랑이 식어질 리가 없다. 그런데 요즘 많은 부부들은 함께 하는 일이 없다. 모두들 제각기 이다. 어떤 남편은 자기 아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그런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만큼의 월급을 받는지조차도 모르는 아내도 있다고 한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 서로 다르고 이루는 것도 각자가 스스로 이루기 때문에 서로에게는 함께 누리는 보람이 없는 것이다. 함께 하고 함께 모으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것이다. 주께서 마 12: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함께 하는 고난
우리 동네는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곳으로 중산층에 어울리는 좋은 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부근에 오래된 낡은 집이 하나 있는데 방이 열 개나 되었습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 후 최근에는 기독교 단체에서 임대하여 문제 청소년들을 위한 갱생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곳에 수용된 청소년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는 살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약 중독자가 있는가 하면, 전과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갱생원은 지역보호를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네 주민들은 집 값이 하락하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동네 한가운데 문제의 수용소가 생기면 집 값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딸을 가진 부모들은 더욱더 걱정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었고, 어떤 아주머니들은 과민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정부에 진정서를 보냈습니다. 이들을 동네에서 쫓아내고 자신들의 재산과 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주민들은 거의 다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기 자식도 그런 암흑 속을 헤맬 수도 있음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온 탕자들이 다시 하나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힘든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온 탕자를 다시 쫓아내는 일에 서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입니다.
/한태완 목사 주제별 예화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