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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명 : 문명을 보는 다양한 시점
임 관 수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 문명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사회조직적 발전”으로 정의되어 있다. 라틴어 ‘civis'(시민)과 civitas(도시)에서 유래된 것으로 특별히 도시문화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말 타일러는 문명을 문화와 동의어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은 물질을 문화는 정신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문명과 사회를 동일시했으며, T. 홈스도 문명과 사회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아 문명은 물질문명과 사회조직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에는 변화만 있고 발달이라는 개념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중 누가 우수한가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은 발달한다. 몇 개월마다 새롭게 출시되는 휴대폰들이 이를 입증해준다. 문명은 나날이 빠르게 발전하며 계량화도 가능하다. 인류 역사 이래 1900년까지 발달한 문명의 총합은 1900년부터 1950년까지 발달한 문명의 양과 비슷하다고 한다. 문명은 편리함과 경제적 이익이라는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오늘날 자전거와 자동차, 배와 비행기 등은 보다 빠르고, 편리한 방향으로 발전한 문명의 결과물들이다. 이러한 문명이 시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문명의 변화에는 그에 따른 댓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대문명에 필수적인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역이 수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것이다. 고향의 상실은 편리함과 경제논리로 측정할 수 없는 情이기에 무시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국민들은 실의에 빠져 있을그 때 나라에서는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 때 전국적으로 각자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하나씩 적어내라고 했으며, 사람들은 “어머니”라는 단어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나라에서는 이를 고려하여 고향찾기 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실의에 빠졌던 사람들은 고향에 가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전후 재건에 노력할 수 있는 활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향은 인간이 어떤 댓가를 치르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현대문명이 편리함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탓할 것이 못되지만 어떠한 댓가를 치러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는 것들은 비판해야한다. 인간으로서 잃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을 되돌아보고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곳에서 현대시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을 빼앗아가는 문명은 길에서 시작된다.
문태준의 ‘배꽃 고운 길’에서 길은 똥장군을 진 아버지가 걷던 길이다. “똥장군을 진 아버지가 건너가던 배꽃 고운 길이 자꾸 보이는 것이었다 / ---중략---/ 아버지는 봄볕이 붐비는 오후 무렵 예의 그 기다란 냄새의 넌출을 끌고 봄밭으로 가는 것이었다 / 그리곤 하얀 배밭 언덕 호박 자리에 그 냄새를 부어 호박넌출을 키우는 것이었다 / 봄이 되면 세상이 술렁거려 나는 아직도 봄은 배꽃 고운 들길을 가던 기다란 냄새의 넌출 같기만 한 것이었다”
그 길에는 화자인 ‘나’가 있고, 그리하여 가족이 있고, 똥장군이라는 진한 냄새와 호박넌출이 있다. 시각적 이미지와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계절이 생동감을 지니고 있는 이 시의 길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가족이 있는 공간 내에 존재하는 길이다.
그러나 배꽃 고운 길이 발달하면 2차선이 되고 더욱 발달하면 4차선이 된다. 이러한 길로 나서면 사람들은 자신의 입신양명과 이익을 위해 호박넌출로 대변할 수 있는 자연과 가족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길 위에서 사람들은 정든 사람 곁을 떠나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과도 또 쉽게 헤어지고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사람들은 만날 때부터 이별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길이 발달하지 않아서 함께 정을 나누던 고목과 같은 인간관계는 언제든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묘목과 같은 인간관계로 변하게 된다.
김주태의 “터미널”에서는 길이 만든 숙명적인 이별의 모습이 나타난다.
큰 가방을 들고 훌쩍거리던 아이가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자
늙은 여자는 달려가 까치발을 하고
아이 앉은 쪽 차창에 젖은 손바닥을 댄다
횟집 수족관 문어처럼 달라붙은 하얀 손바닥들
부슬비 맞으며 떠나는 버스를
늙은 여자가 따라 뛰기 시작한다
손바닥에 붙은 손바닥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리움의 넓이』「터미널」
큰 가방은 가방이 크다는 것보다 아이가 작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가방의 주인이 어린아이임을 시사해준다. 훌쩍거림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아이의 반응이다. 아마 중학교 1학년이면 적당할 것 같다. 늙은 여자는 어머니라기보다 할머니이며, 이 둘은 조손가정의 할머니와 손주로 추정된다. 할머니라고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늙은 여자라고 한 것은 서사적인 거리를 통해 이 시의 화자가 무정해보이면서 대상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미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시적 거리는 독자라도 그들의 감정에 호응을 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동시에 이 사건에 진실성을 높여준다. ‘손바닥에 붙은 손바닥’은 길에 도달하기 전에 떨어질 것이고 이러한 이별은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생활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서서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행은 일생 동안 계속된다. 이것을 문태준은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에서 “긴 세월 몸을 담아오느라 닳아진 / 한 켤레의 신발이 있다 / 아, 길이 끝난 곳에서도 적멸은 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실 속의 나와 참된 나 사이의 괴리가 일어난다. 손택수의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에서 이러한 괴리를 “걸어오는 동안, 길이 / 이 지긋지긋한 길이 / 나를 들어올리고 있었나보다 / ---중략--- /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문명으로서 길에 대한 비판은 손택수에 이르러 경부고속도로와 대운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는 “곰을 위한 진혼곡-대운하”에서 경부고속도로와 대운하를 건설한 것이 겨울잠을 자는 곰의 배에 구멍을 뚫고 쓸개즙을 마시는 것처럼 비인간적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오늘날 국가발전의 근간이 되었다는 평을 듣는 경부고속도로를 비판하는 것은 시인의 정치적 경향이 아니라 문명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인은 길을 떠나기 이전의 자기 즉 인간과 자연으로 돌아오는 노력을 한다. 이재무의 “먼 길”은 이 과정을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 /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 ---중략--- / 허황된 것들로 /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 어느날 문득 내게로 돌아가는 날 / 길의 초입에 서서 나는 또, / 태어나서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 분홍빛 설렘과 푸른 두려움으로 / 벌겋게 상기된 얼굴” 시인은 문명의 상징인 길을 떠나 자신을 잊고 세상사람의 잣대로 황홀하고 괴로워 하다가 길을 떠나기 전 즉 고목과 같은 인간관계를 지니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던 때로 돌아오고자 하는 것이다.
문명은 도시와 기계문명 속에서 완결된다.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은 서정시인 손택수의 연작시 “나무의 수사학”에서 잘 나타나 있다.
나뭇잎과 푸른 물고기에 대한 비유를 더는 쓸 수가 없다
나무줄기와 강줄기에 대한 비유도 그저 진부하기만 하다
여기 하수도관을 뚫고 들어간 나무가 있다
잇몸이 가려운 시궁쥐 이빨처럼
드릴 구멍을 낸 뿌리들
만년필로 검은 잉크를 빨아들이듯
관에 들러붙은 오물을 빨아들인다면
내다버린 아기와 죽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폐수를 따라 올라온다면
광기로 부글거리는 늪을 품고 구토하는 나무들아
걸러내고 걸러내어 지쳐 게워내는 고통의 초록들아
버릴 수 없다 가지와 가지를 물들이고
가지와 가지 사이 여백까지 푸르스름
번져가기 위해 덧나는 잎이 내 욱신거리는 수사들이라면
나무야 나의 시는 조금만 더 낡아야겠구나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쳐가는 만년필 속
폐수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푸른 물고기가 있어
“나무의 수사학 4”
“나무의 수사학 4”에서 시인은 일반인들이 보는 나무의 외형이 아니라 나무가 뿌리를 뻗은 도시의 지하에 있는 “내다 버린 아이, 죽은 고양이 울음소리”를 보고, 듣고 있다. 지하에 있는 이것들은 하나의 대유법이다. 내다버린 아이는 아직 세상에 때가 묻지 않은 순진무후한 인간이다. 그의 죽음은 도시의 향락과 부도덕이 빚어낸 인간성의 말살을 초래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고양이 울음소리에서 이러한 인간에 대한 애정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으로 확대된다. 시인은 인간과 생명을 경시하는 도시를 “광기로 부글거리는 늪”으로 표현하고 있다. 광기로 부글거리는 늪에 뿌리내린 나무는 그곳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숙명성을 지니고 있다. “나무의 수사학 1”에서는 도로변 시끄러운 소음과 가로들 때문에 신경증과 불면증을 느끼는 나무가 치욕으로 푸르고, “나무의 수사학 2”에서는 간판을 가린다고 잘려나간 나무가 팔이 잘린 사람의 옷자락처럼 애처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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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사람들에게 20평, 40평, 50평짜리 집을 놓고 아무거나 골라 가지라고 한다면 누구나 50평짜리 집을 선택할 것이다. 자동차도 소형차, 중형차 중에 골라 가지라면 누구나 중형차를 선택할 것이다. 이처럼 개성이 없이 누구나 같은 것을 고른다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사람의 뒤에서 무엇인가가 조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사람들의 내면에 비싼 것들을 고르게 조종한 것은 물질주의이다. 나의 용도보다 금전적인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세상이 된 이유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과잉생산 때문이다. 필요한만큼 물건을 생산한다면 광고를 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사람이 찾아와서 그 물건을 사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물건을 생산했기 때문에 이것을 팔기 위해 불필요한 사람도 물건을 사도록 광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유홍준은 “우리 시대의 부적”에서 묘사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 문을 열면 / 부적들이 또 / 외출했다 돌아오면 부적들이 또 우리 집 현관문에 잔뜩 나붙어 있다 / 거참 감사하다 / 현관문에 붙은 / 이런 저런 광고지들을 며칠 떼지 않고 내버려두었더니 / 서낭당 같다 / 무당집 같다 / 우리 집 현관문이 온통 부적 투성이다” 우리 시대의 부적인 광고물들은 소비자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현대인들은 쓸데없는 물건을 사는데 돈을 쓰고, 이 돈을 벌기 위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아더 밀러의 “세일즈 맨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평생 동안 집값을 갚고 나니 이제 그 집에는 살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물질문명을 비판하면서 자동차는 10년 내지 15년을 쓸 수 있으나 그렇게 하면 회사의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소비자들이 3-5년마다 바꾸게 한다. 이것을 위해 해마다 성능개선도 별로 없는 신모델을 내놓고, 3-5년이 지나면 자신의 차가 구식이 되었다고 느끼게 만들어 새 차를 구입하도록 유혹한다고 하였다. 새로운 차, 새로운 냉장고, 새로운 집들을 사다보면 평생 돈을 벌고 물건을 사는데 인생을 소비하고 만다. 이러한 물질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차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타는 것이다. 유홍준은 이러한 지혜를 “열번을 쓰는 일회용 면도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일회용 면도기로 아홉 번째 턱수염을 미는 저녘 ---중략--- / 한번 더 / 사용하려고 나는 세면대 모서리에 면도기를 턴다”. 이렇게 열 번째 쓰려고 일회용 면도기를 터는 이유는 빨간 립스틱 바른 입술과 턱수염 민 입술이 포개지는 밤 한 번 더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이 시는 물질적인 것에 투자하는 비용을 인간관계형성에 투자하는 것이 참된 인생이라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좋은 차로 바꾸는 것보다 가족과 외식이나 여행을 하면서 정을 나누고 친구를 만나는 것 혹은 시인처럼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의 여자와 키스를 하는 것이 물질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반면에 리얼리즘 시인들은 기계문명을 통해 문명을 바라본다. 기계문명의 시작은 망치이다. 망치는 낫과 함께 공산주의 소련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하는 국기로도 사용되었다. 최종천은 “망치에게”에서 “망치야 미안하다 / 망치는 것은 없는 너를 / 망치라고 불러서 민망하구나 / ---중략--- / 망치는 나의 연장. 내 몸이다 // 예술로는 자연을 볼 수가 없다 / 노동을 통해서만 자연은 보인다”에서 기계문명의 도구인 망치를 자연과 동등하거나 보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자연 그 자체도 노동을 통해서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에는 댓가가 주어진다. 하나의 제품을 생산하는데 드는 인건비의 비중이 50%(업종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정도라면 공장주는 노동력을 싸게 공급받고자 하며,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을 하도록 한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공장에서 돌아가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게 된다. 최종천의 “나사들”에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삶이 나타나 있다.
일을 하다말고 김형과 박형이 싸운다
종두도 덕형이도 얽혀든다
최씨도 이반장도 얽혀든다
나는 고장난 그라인더나 뜯어 말리자
네 개의 고정나사를 푼다
커버를 벗기고
또 네 개의 고정나사를 푼다
모터와 베어링을 뜯어 말린다
엉켜있는 기어와 접속기어를 뜯어 말린다
차분히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동안
부품들은 서로 떨어져서 반성중이시다?
어이? 김형 이리 와 봐, 풀 때는 풀었는데
이거 어떻게 조립하는 거야?
박형 이 베어링 새 거 있나?
박형은 베어링을 찾으러 창고로 가고
김형은 나에게 오고 있다
그라인더는 다시 조립되고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간다
저마다 하나의 나사가 되어
조여지고 있다
(『나의 밥그릇이 빛나고 있다』 「나사들」)
김형과 박형이 이름이 없음은 개성이 없음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종두, 덕형이로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작품 속의 인물들에 개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곧바로 등장하는 사람은 최씨로 개성을 상실하고, 이반장에서는 인물보다 직책을 앞세움으로써 개성을 박탈시킨다. 이 인물들은 공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활동함으로써 “저마다 하나의 나사가 되어 / 조여지고 있다” 인간이 아니라 공장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부속품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멈포드는 이러한 사회를 거대 기계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공장주나 자본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과거의 자본가나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자신들은 여유있는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자본가나 공장주는 노동자들보다 더 바쁘다. 그렇다고 특별한 혜택을 누리지도 못한다. 과거에는 돈이 있는 사람은 가지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같이 가지고 있다. 똑같이 하루 세끼 밥을 먹고, 똑같이 자가용을 굴린다. 그 차이는 있고 없고가 아니라 좋고 나쁘고의 차이이다. 과거에는 있는 사람은 하루 세끼를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못먹었고, 있는 사람들은 자가용을 타고 가난한 사람들은 못탔다. 이런 점에서 공장주나 자본가도 노동자처럼이 거대기계 속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본가든 노동자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여유가 없이 조직의 부분으로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것은 현대인의 비극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시인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다 같은 거대기계의 부속품으로 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종천은 “돈”에서 “너와 내가 피땀으로 만든 돈이 얼마인지 / 아는 건 일급비밀이다 요컨대, 저차원에서는 국가안보의 문제이며 / 고차원애서는 문화발전과 결부된 거다 / 재주는 원숭이가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 ---중략--- / 노등계급의 발언은 발언이 아니며 / 노동계급은 인간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니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최종천은 “파업 보름째”에서 파업을 하고 있는 자칭 ‘공돌이’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은 이데올로기로 변모된다. 이데올로기는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으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없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취향의 문제라는 것을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취향의 문제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나 붉은 색을 좋아하라거나 푸른 색을 좋아하라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여기에서 붉은 색 대신 좌파를 푸른색 대신 우파를 대입시켜도 공식은 똑같이 성립된다. 이재무의 “팽이”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격화된다. “오늘 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 저 낯익은 사내에 대해 다시 노래하련다 / ---중략---회초리는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며 / 가학의 쾌감에 전율한다 / 저 현기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 오, 저것은 얼마나 지독한 / 자본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자본주의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나쁜 지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좌파든 우파든 이데올로기의 한계이다. 여기에 어떤 논리가 있더라도 반대논리가 똑같이 성립된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보다 편리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문명의 발달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 문명의 발달은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생활양식의 변화는 사고방식의 변화를 가져오며, 생활양식의 변화는 장르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연장선상에 실험시들이 존재한다. 실험시에서는 문명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이라는 손택수의 “꽃단추”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문명에 대한 편견이 없어진다. “꽉 다문 입 없는 말 / 주루룩 뱃가죽 찢으며 지평선을 열어젖힌다”(강희안, 물고기 강의실“ ‘지퍼의 전횡사’)에서는 서정시인이 기피하던 지퍼가 시로 승화된다. 그리고 리얼리즘에 나타난 이데올로기도 보이지 않는다. 최종천의 ”돼지머리“에서 나타난 ”돼지만큼 배가 부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돼지머릿고기를 나눌 때면 그들을 용서하고 식사를 즐거워하는 이데올로기의 편린도 보이지 않는다. 강희안의 ”맛있는 라면 조리법“에서 패스트 푸드의 상징이자 바쁜 현대문명의 사생아 취급을 받고 있는 라면을 ”구불구불‘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뽀글뽀글, 냄비의 파열음과 비등점이라는 청각적 이미지, 꼬들꼬들이라는 미각적 이미지, 그리고 강희안 특유의 언어유희를 통해 맛있게 끓여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시를 읽으면 군침이 돌게 만든다. 실험시에서 현대문명은 시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를 외면하고 산으로 들로 나가면서 인간의 비인간화를 비난하거나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다는 문제점을 비난하는 시도 필요하다. 그리고 기계문명이 빚어낸 사회적 구조의 모순에 항거하는 시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발달은 멈출 수 없다. 문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시에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근래에는 배아줄기세포 개발로 인한 도덕성 문제 즉 (의학적으로나 법학적으로 볼 때, 수정하는 순간부터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하는데, 수정란을 연구대상으로 하거나 그것으로 줄기세포를 만드는 것은 한 인간을 죽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행위가 아닌가? 이것이 도덕적인가?), 인공두뇌 컴퓨터가 인간세계를 통치하는 것(빌 게이츠는 전에 이것은 불가능한 상상이라고 했으나 최근에 가능하다고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음)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핵전쟁에 의한 지구의 종말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 등 많은 숙제를 가지고 있다.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현행법이나 자연과학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인간미가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들의 지혜가 쓰일 수 없을까? 시와 문명은 실험시에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가까워져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시와 시학 2014년 가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