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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 400만의 시조 수로왕릉을 찾아서
수로왕릉은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남릉이라
고도하며 원형봉토분으로 능비와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과 숭안전, 안향각, 신도비각
등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를 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의 묘역으로 정했다고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삼국
유사에 능역이평지로 설정되었던 점이
묘역의 현장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김해김씨 시조 수로왕릉
한나절이 되자 김수로왕릉을 관리하시는 분이
도포까지 의관을 정재하시고 묘역으로
들어가시는 틈을 타서
따라 들어가 보았는데 들어가시더니 읍을 한 자세로
묘역을 천천히 한번 둘러 보신 다음
예를 올리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김수로왕은 AD 42년 다른 다섯명의 아이와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하늘이 열린 다음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고 임금과 신하라는
호칭도 없었던 AD 44년에 가야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수로왕비 허황옥은 멀리
아유타국에서 왔는데
부부가 합심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합니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 일본인 까지 드나드는
교통의 요충지인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의 문화가 펼쳐집니다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는 현재
전국적으로 400만이라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라고 합니다
김수로왕릉 묘역 앞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각입니다만
새들의 보금자리로 비각이 훼손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철망이 둘려져 있습니다
신도비각은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된 비각으로
1885년 고종 22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 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다고 합니다
6개의 황금빛 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선진문명을 가진 민족이 북방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김수로왕은 금관가야의 초대 왕이자 400만
김해김씨의 시조인데 A.D.42년 3월,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늘이 열린 다음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있지 않았고 임금과 신하의
호칭 또한 없었다.
다만 9간이 있었는데, 그들이 추장으로서
백성을 통솔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2~3백명의 무리가 그곳에 모여드는 것으로
탄생의 장면은 시작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구지가>라는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구지가는 가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내려가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기뻐 뛰게 될 것이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얼마 뒤에 공중을 쳐다보았더니,
붉은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드리워졌습니다.
그 줄의 끝에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이 나타났는데,
금합을 열어보니 해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 알에서‘처음 나타났다’ 해서 이름을
수로라 지었고 그가 만든 나라를
가야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나머지 다섯 알에서 태어난 아이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가 A. D. 44년이었답니다.
능역은 주위 18,000여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으며, 봉분은 원형 봉토분입니다
김수로왕릉의 규모는 직경 22미터∼21미터,
높이 5미터의 크기라고 합니다
왕릉 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
전사청과 제기고. 납능정문
숭재, 동재, 서재, 신도비각, 신도비,
문무인석과 마양호석,
가락루, 홍살문, 공적비, 숭화문 등의
부속건물 및 석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장사조에 의하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
<능묘>을 지었으며,
높이 일장 주위 삼백장으로 그 곳에 장사를
지내고 수로왕묘라 하였다고 하였으며,
고려 문종대까지는 능묘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였지만, 조선 초기에는 능묘가
황폐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봉유설 권19 능묘조에 의하면, 이 능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하였는데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인조 25년(1647년)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2년(1884년)에는
숭선전이란 당호를 내려 침묘를 개축하였고
이때 안향각과 신도비각, 석수도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김수로 왕릉은 이후 196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를 실시 정화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읍지 납능조의 기록에 의하면 지방민들이
동짓날에 제사를 지냈으며,
능을 지키는 능군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제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능의 내부구조는 지봉유설의 기사에 따른다면
규모가 큰 석실묘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고 합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천신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은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으며.
아들 거등왕이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이 신화는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 신화와 흐름을 같습니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로 계속 받들어졌다고 합니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관리를 위해 위전을
설치하고 능묘의 제례를 후손이
계승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수로왕릉 앞의 문을 납릉정문 이라고 하는데
그 유명한 쌍어문이 이 곳에 있습니다
납릉정문의 윗쪽 목판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 두마리의
흰색 물고기가 탑처럼 생긴것을 대칭으로 보면 신령
스런 물고기라 신어상이라고 하며 두 마리의
물고기이므로 쌍어문이라고도 합니다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09/01/02 22:28전용뷰어 보기
- 김해김씨 삼현파 항렬표는 아래와 같은데,
만약에 할아버지의 '진' 자와 아버지의 '수' 자가 아래(23-71세, 24-72세)와 같은 漢字이고
님의 '지' 자가 木(나무목)가 들어가는 한자(枝...등)라면 님은 25-73세인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것은 친척 어르신들께 여쭈어 보시기바랍니다.
(고종사촌의 항렬자는 님 집안의 항렬자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파) 항렬표 :
(앞의 숫자는 파시조(판도판서 김관)의 ( )세, 뒷 숫자는 시조(김수로왕)의 ( )세)
16-64 : 顯(현)ㅇ
17-65 : 再(재)ㅇ
18-66 : 國(국)ㅇ
19-67 : 昌(창)ㅇ
20-68 : ㅇ斗(두)
21-69 : 容(용)ㅇ
22-70 : ㅇ坤(곤)
23-71 : 鎭(진)ㅇ, 鍾(종)ㅇ
24-72 : ㅇ洙(수), ㅇ泰(태)
25-73 : 相(상)ㅇ, 東(동)ㅇ
26-74 : ㅇ煥(환), ㅇ熙(희)
27-75 : 奎(규)ㅇ, 基(기)ㅇ
28-76 : ㅇ錫(석), ㅇ鎬(호)
29-77 : 洛(락)ㅇ, 永(영)ㅇ
30-78 : ㅇ柱(주), ㅇ植(식)
31-79 : 熹(희)ㅇ
32-80 : ㅇ在(재), ㅇ壎(훈)
33-81 : 錡(기)ㅇ, 善(선)ㅇ
34-82 : ㅇ洪(홍)
35-83 : 東(동)ㅇ
36-84 : ㅇ夏(하)
- 김해김씨 삼현파 파시조 김관 :
1320년생이며 호는 정성이이다.
고려 때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국자사(國子師)에 이르렀고,
충선왕 때 왕에게 간(諫)하여 부도(浮屠 : 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다.
제목: 정변의 역사 2006.4.27.목
김해김씨 삼현파
<삼현파의 삼현은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를 가리켜>
김해김씨 삼현파의 삼현은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를 가리키다.
김극일은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파)의 파조인 김관의 5세손으로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조모가 병으로 눕자 단지로 피를 흘려 넣어 그 병을 낫게 했다. 뒷날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묘막을 지어 시묘의 예를 올렸고 조부상에도 조석으로 성묘하여 정성을 다하니 호랑이가 나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그의 2남 김맹이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에 이르렀다. 맹의 세 아들 준손. 기손. 일손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올라 ‘김씨삼주(金氏三珠)’라는 호칭을 들었다.
김준손은 직제학에 이르렀고, 김기손은 이조정랑을 지냈는데 이 가운데서도 탁영 김일손이 가장 돋보인다.
김일손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17년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에 등용된다. 여러 청환직을 거쳐, 뒤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관리들의 비행을 직필함으로써 관리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는데, 전라관찰사 이극돈에 대한 사초가 문제가 되었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 사초를 살피게 되었다. 그때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말썽이 되었다. 이는 옛날 항우가 초 양왕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글이다. 이극돈, 노사신, 한치형 등이 들고 일어나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 일족은 참수당하거나 유배되고 만다.
탁영은 시가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탁영집’이 전한다. 이 시문집은 초간연대는 미상이나 1669년에 중간되었다. 1-4권에 시문이, 5권에는 습유가, 6권엔 행장. 묘문. 제문. 사향에 관한 기술 등이 실려 있다. 중종반정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목천 도동서원, 청도 자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그의 형 동창 김준손은 호남에 유배되었다. 김준손의 아들 삼족당 김대유는 무오사화로 숙부 김일손이 사형되고,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에 풀려나왔다.
다음해 진사가 되고 전성서직장을 지내다가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 호조좌랑, 칠원현감 등을 역임했다.
이해 칠원군수를 지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없어지자 고향인 청도 운문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시서로 만족했다.
그의 호 삼족당은 60을 살았으니 나이도 족하고 벼슬도 족하고 의식주도 족하다 하여 지어진 것이었다. 뒷날 남명 조식은 묘지에 짓기를 “기개가 세상을 덮을 만하던 영웅이 이제는 없어졌으니 아아 애달프다. 내가 일찍이 남을 보증한 적이 없고 천하의 선비로 인정하는 이는 오직 공뿐이다”라고 했다.
김관 은 판도판서공파의 파조다. 일찍이 벼슬이 판도판서. 국자사에 이르렀는데, 충선왕 때에 누차 부도(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시키자고 상소하였다. 고려말 불교배척에 앞장섰던 유학자 중의 한명인 셈이다.
<김해김씨, 가장 많은 성씨로 2000년 현재 전국에 412만명>
김해김씨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우리나라에서 수가 가장 많은 성씨다. 2000년 현재 전국에 4,124,934명이 있다.
수로왕의 탄생설화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가락국을 창건한 것은 서기 42년 (후한 건무 18년)이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가락의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나 군신의 칭호가 없었다.
다만 여러 부족들의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관. 유수간. 신천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등 9간이었다.
서기 42년 3월 이들의 제삿날에 구지봉 산정에서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2백, 3백여 명이 모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서먹으리”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원을 하던 중 한 줄기 붉은빛이 하늘에서 내려 달려가 보니 해 같은 황금알 여섯이 금합에 담겨져 있었다. 다음 날 여섯 개의 황금알은 동자로 화했고 그 중 먼저 나온 동자 이름은 수로라 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씨로 하였는데, 그가 바로 대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다.
6개의 알에서 화생한 동자 중 첫 번째의 수로는 대가락국(가야국이라고도 함)의 왕이 되었고, 다섯 동자들도 각각 5가야의 국주가 되었으니 아라가야(현 함안지방), 고령가야(현 함양지방), 대가야(현 고령지방), 성산가야(현 성주지방), 소가야(현 고성지방)였다.
대가야(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황산(신라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 남쪽으로는 남해에까지 이르러 지금의 경상도 일원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수로왕은 즉위한 6년 뒤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을 비로 맞이하여 10왕자, 2공주를 두었다.
10왕자 중 장자인 거등왕자가 왕위를 잇고 둘째, 셋째 왕자는 모성을 따라 허씨로 계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옥보선인을 따라 가야산에서 운상원으로 들어가 수도, 부처가 되었으니, 지금도 경남 하남군에 칠불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은 허씨의 모성 계승을 우리나라 고대의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와의 접합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거등왕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바로 김해김씨를 이룬다.
대가야는 532년 구형(구해)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가 망한다. 신라에서는 병합된 대가야 유민들의 민심 수습을 위해 구형왕에게 대등의 위를 주고 본국 김해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즉 가야왕족은 신라의 신골신분에 포함되었다. 구형왕의 셋째 아들(족보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음) 김무력은 신라에서 벼슬이 각간에 이른다. 그의 손자 김유신이 태종무열왕으로 맺어지고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흥무대왕에 봉해짐으로써, 이 집안은 심라의 골품체제 내에서도 최고 가문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김해김씨는 김유신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성한 만큼 후손들에 이르러 나누어진 분파도 1백48개에 이른다.
( 정복규 논설위원 )
김해김씨(金海金氏) | ||
1> 시조 : 김수로[金首露] |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
김해(金海)는 경남 위치하는 고장으로 6가야 중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으나 680년(문무왕 )에 김해로 개칭하였다. . 일찍이 가락국 역사와 함께 문호를 개방한 김해김씨는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왔다. 김해 김씨의 연원은 [삼국유사]와 [가락 국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이름을 대가락으로 정하고 남천축(고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구형왕의 증손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명장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의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해 김씨는 중시조 유신(庾信) 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개 파(派)로 분파되었으며, 그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삼현파(三賢派)·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경파(京派)의 파조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목경의 맏아들 보(普)의 6세손 영견(永堅),·영서(永瑞),·영정(永貞),·영순(永純) 4형제가 빼어났다. 사군파(四君派)에서는 파조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 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를 지냈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일세조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에 숙부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청도의 운문산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시조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다. 가락국은 가야 혹은 6가야라고 하며 오늘날 김해 일대에 해당된다. 김해김씨는 13세조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여 그 뒤에 148파로 갈라진다. 그중에서 고려 때의 김목경(金牧卿)을 1세조로 하는 경파(京派=김녕군파)와 그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1세조로 하는 사군파 그리고 김관(金管)을 1세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가 주종을 이룬다.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은 고려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왕에게 상소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그 뒤 후손들이 김녕군파(金寧君派) 혹은 경파로 삼았다. 시조의 존함을 빌어 목경파라 칭하기도 했다. 김목경의 네 아들이 파를 이루어 횡성공파, 안경공파, 참판공파, 석성공파 등 현재 11개 파로 나뉘었다. 안경공파의 파조는 김영정이다. 그는 조선조 초에 안경(安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안경공파는 김녕군파(=경파)의 지파다.
사군파의 파조는 김익경이다. 그의 손자 김진문은 고려 말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추는 도총관, 넷째 아들 김석은 찬성사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직제학을 역임할 때 장영실과 함께 간의대,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들었다.
삼현파는‘김해김씨 판도판서공 휘관파’의 별칭이다. 김관이 고려 말에 판도판서를 지낸 이후 생겨난 파이다. 김관의 후손 가운데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등 3인을 가리켜‘청도삼현(淸道三賢)’이라 칭했다. 한 집안에서 4대에 걸쳐 3현인이 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 그 후손들을 삼현파라 부른다. 조선조에 김해김씨의 번영을 불러온 사람은 김극일이다. 그는 김관의 5세손이다. 그의 2남 김맹의 세 아들 김준손, 김기손, 김일손은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올랐다. 이중 김일손이 가장 돋보인다. 김종직의 문인인 김일손은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관찰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기록한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다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조의제문(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이 말썽이 된다. 이극돈, 노사신, 한치형 등이 연산군에게 알려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은 처형된다. 김일손의 형 김준손은 아들 김대유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풀려난다. 삼현파의 삼현은 바로 김극일과 그의 손자 김일손, 그리고 증손자인 김대유를 가리킨다. 오늘날 삼현파의 선대들이다. 김극일의 6형제로부터 군수공파, 집의공파, 한림공파, 진사공파, 녹사공파, 진의공파 등 6개 지파로 크게 갈라진다. 그 외 군수공 휘익파, 통덕랑공 휘무파가 있다.
김해김씨의 인물로는 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10왕이 있다. 이 가운데 구형왕의 아들은 3명이 있었다. 첫째가 김세종, 둘째가 김무득, 셋째가 김무력이다. 그중 김무력은 신라의 각간을 역임했으며 그 아들이 김서현이고, 손자가 김유신이다. 김해김씨의 중시조인 김유신은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다. 청나라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25세 나이로 순교했다. 김대중은 경파의 한 갈래인 안경공파의 사람으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되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현대인물은 김종필(국무총리, 자민련총재), 김형오(국회의장), 김기춘(법무부장관), 김성기(법무부장관), 김근수(국가보훈처장, 국회의원), 김상현(국회의원), 김성곤(국회의원, 쌍용그룹창업주), 김영배(국회의원), 김용갑(국회의원), 김무성(국회의원, 한나라당원내총무), 김부겸(국회의원), 김홍신(소설가, 국회의원),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김혁규( 국회의원, 경남지사), 김중권(대통령비서실장), 김종곤(해군참모총장, 국회의원), 김정길(행자부장관, 국회의원), 김활란, 김기창(화백), 김준연(법무부장관, 국회의원), 김원근(청주여고-청주대학설립자), 김광수(대한교과서회장), 김규섭(해군참모총장, 향군부회장), 김기두(법학박사, 서울대명예교수), 김기형(과기처장관), 김상문(기아산업회장), 김노성(신성화학사장), 김덕엽(조선비료회장), 김동기(고려대경영대학원장), 김동하(마사회회장), 김두만(공군참모총장), 김두종(숙명여대총장, 서울대명예교수), 김보현(농수산장관), 김복영(매일우유사장), 김사룡(국회의원, 변호사), 김상영(한국은행부총재), 김성은(국방부장관), 김진배(국회의원), 김수학(국세청장), 김순애(음악가, 이화여대교수), 김영관(해군참모총장), 김영구(민정당총재비서실장), 김영균(법제처장, 변호사), 김영생(국회의원), 김영주(서양화가), 김영준(감사원장, 변호사), 김영택(우석대총장), 김완태(국회의원), 김용성(신한제분회장), 김용식(통일원장관, 적십자사총재), 김용태(국회의원), 김일두(서울지검장, 변호사), 김자경(성악가, 오페라 단장), 김장섭(변호사), 김장훈(체신부장관), 김재호(국회의원), 김점곤(법학박사, 경희대교수), 김정남(국회의원)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집성촌인 전남 완도군 보길면에는 전체 인구 가운데 30.5%인 912명이 있다. 전남 여수시 묘도동에는 전체 인구 가운데 28.2%인 330명이 살고 있다. 충남 논산에는 1995년 현재 논산읍 1,006가구, 연무읍 728가구, 강경읍 494가구, 양촌면 251가구, 광석면 243가구 등 총 3,594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9.69%를 차지한다. 경기도 성남시도 집성촌이다. 수정구 복정동 응달말(음촌=陰村), 중원구 상대원동 사기막골, 수정구 심곡동 양짓말, 수정구 창곡동 창말과 간이골, 분당구 백현동 새말(일명 안궁안), 분당구 판교동, 분당구 금곡동 새터말(신기=新基), 분당구 구미동 앞구미와 오리뜰, 분당구 동원동 샛터 등에 많이 살고 있다. 그밖의 집성촌은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연리, 충북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 충남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경북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경남 함안군 칠원면 장암리, 전북 정읍시 정우면 수금리 등이다.
조선시대에 모두 1,28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이다. 과거 급제자는 본관이 같고 계통이 다른 본관과 구분이 안 된 것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4,124,934명이다. 서울 815,783명, 부산 407,041명, 대구 199,252명, 인천 207,736명, 광주 148,736명, 대전 96,887명, 울산 104,627명, 경기 718,661명, 강원 107,612명, 충북 86,978명, 충남 140,151명, 전북 173,712명, 전남 268,525명, 경북 237,826명, 경남 350,012명, 제주 61,395명이다. 부산과 경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 정복규: 언론인, 성씨 전문기자, 통일교육위원 )
김해(金海) 김씨의 연원은 '삼국유사'와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 18년) 3월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게 달려가보니 금합에 여섯 개의 알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그 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라고 이름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김씨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이신 김수로왕(金首露王)입니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 이름을 대가락으로 정하고, 남천축(고대 인도의 행정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 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습니다. 그 후, 10세 구형왕이 532년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의 작위와 가락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이 각간을 역임했습니다. 구형왕의 증손이고 서현공의 아들 유신은 신라 무열왕과 함게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명장으로 흥덕왕 대에 흥무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였으며, 족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되었고, 그 중에서 금녕군파(경파)와 감무공파(사군파), 판도판서공파(삼현파), 문경공파의 족세가 가장 번창합니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금녕군파의 중조인 김목경이 고려 충정왕 때 금녕군에 봉해졌습니다. 목경의 맏아들 김보는 공민왕이 세자로 연행할 때, 시종한 공으로 충근량절보리공신, 수시중에 이르렀고, 김목경의 6대손 김영견, 김영서, 김영정, 김영순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 때 명신 김우항은 영정의 후손으로 1713년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감무공파에서는 중조인 익경의 손자 김진문이 고려말에 예의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 박자검 등과 함께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추는 도총관을 넷째 아들 김석은 찬성사를 지냈습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협전, 수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을 역임할 때 장영실과 함께 간의대,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진문의 6대손 김완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할 때도 창성, 방어사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3등 공신에 올라 학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김우는 병자호란 때, 벽동성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김우의 아들 김여준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인평대군을 호종한 18장사의 한 사람으로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에서 세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 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판도판서공파(삼현파)의 중조 관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립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극일의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극일의 아들 맹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 기손, 일손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로 일컬어졌습니다. 148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김일손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김굉필, 정여창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 윤필상, 한치여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 권경유, 이목 등과 함께 참수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습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 영의정 남곤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와 같고 나는 계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이를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의 아들입니다. 무오사화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로 살았으며, 3개월간의 칠원현감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 속 삼족당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김일손의 증손 언유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에 능하여 공사와 비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습니다. 언유의 아들 현성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학 ㅔ여생을 마쳤으며, 시, 서, 화에 모두 능했습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 장군과 소전공 김덕승, 예직 홍도 외 '해동가요'를 남기고 '청규영언'을 편찬한 김천택 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습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4,125,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판도판서공 휘관파(삼현파)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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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의 부족장이 백성을 다스리고 있던 시절, 경상남도 김해에 있는 '구지봉'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구지가(龜旨歌)>를 합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