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진 전투일까?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때 신라 김유신 장군과 백제의 계백장군이 싸웠던 황산벌은 어디였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우리는 지금도 지도상에 황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많은 한국인이 여행하고 있는 대륙의 양자강하구에 우뚝 솟아 있는 황산을 생각하게 된다.
양자강은 우리 고려사에 양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주땅을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
양진이 양쯔라고 발음이 변하여 또 다시 강이라고 강조 되어서 양쯔강이 되었다.
당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을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유백영등 수륙군 13만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게 하였다. 5월 26일에 태종은 유신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래주를 출발하여 1000 리를 잇는 축로를 따라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定方發自來州, 舳艫千里, 隨流東下)
소정방은 한반도로 온 것이 아니라 양자강 하구 황산을 향하여 내려온 것이다.
이곳 황산에서 이성계는 왜구를 물리친 것이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오늘 가입하엿습니다. 백제가 제,노의 옛 땅에서 부흥하엿고, 중국사서에 진평 2군이 그 시작이라고 하였던바 그러면 백제의 웅진성과 마지막 사비성의 위치 비정이 맞아야 여기 황산이 맞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황산은 래주만에서 내려오면동평이 있고 동명이 잇습니다. 여기가 사수가 시작되는 곳이며 황하의 물줄기가 되는 것이지요, 백제의 사비성은 사수근처에 있어야 하고, 백마강도 잇어야 하는데 카페지기님의 생각은 ???
태산 옆의 황산이 황산전투이지요, 산동 북부에 황산이 잇습니다.당의 수군을 막기 위해서 계백을 북족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수를 통해 당의 수군이 남하하면 밑에서 신라의 합동작전으로 전멸당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백제의 올바른 경계 비정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황산벌전투라 하지만 대군을 5천 결사대로 들판에서 맞는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옛부터 벌판에서의 싸움은 패배이므로 병가의 기본이엇습니다. 태산 옆에 황산이 있고 그곳에 책성이 있으므로 당의 수군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신라의 첫 수도는 감숙성에서 시작 되었으며(금성)나중에 금관가야(김수로)를 복속하게 됩니다. 금관가야는 한반도가 아닌 사천성 성도로 밣혀졋으며 허왕후는 곤명에서 성도로 오게 되는 것이며, 곤명에 있는 호수를 곤명호라 하는데 여기서 김해란 어원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김해 김씨의 족보는 사천성 성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가 감숙성에서 시작되었기에 지도가 달라져야 한 다는 것이지요 원래 신라의 조상인 김일제는 흉노*(스키다이)족 투국에서 시작 되었는데 신강지역으로 보고 잇습니다. 그러므로 차츰 남하하여 감숙에서 신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중국 고지명대조표에' 보면 금성이 감숙성에 있다고 되어 잇습니다. 초기 수도는 금성으로 일명 서라벌이라 하엿습니다.
서라 라고 하는것은 서쪽에서펼쳐 일어난것'으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그러므로 서쪽에서 펼쳐 일어난 국가란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300수십군데를 모른다 하고 공란을 비워 두었고 지명이나 기술에 많은 혼돈이 있엇습니다.
올바른 사가가 아니 것이지요, 그래서 금관(錦官)가야를 금관(金官)가야로 기술하여 한반도에서 고작 김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김해엔 성이 한곳도 없습니다.김수로부터 9대까지 이어진 왕궁터와 성이 없다는 것은 허구이며 금관가야는 사천성 성도가 맞습니다.
사천성 성도에서 시작된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나중에 하남성 정주(鄭州)에 있는 관산성 (管山城)전투에(법흥왕) 신라에 이미 복속된 제9대 구해왕의 둘째아들인 김무력이 신주(新州)의 군주로서 군대를 통솔하여 나중에 백제의 성왕을 전사시킵니다. 사천성 성도가 금관가야의 수도인데 신라로 부터식읍으로 다시 돌려받게 되는 것이며, 강력한 사천성의 군대로 신라는 하남성 정주를 가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