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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안동:신 김씨)
본관(本貫): 안동(安東) 신안동(新安東)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
유래(由來):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원년(918) 8월 辛亥일에 고려 건국에 결정적 역할을 공신을 포상하고 당시 고창(古昌) 성주였던 휘(諱) 선평(宣平)을 安東金씨의 始祖로 공신에 정하고 고창(古昌)을 안동부(安東府) 승격시켰다.
태조13년(930) 12월 겨울에는 신흥사(新興孝)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功巨堂)을 설치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동서벽에 도화하였는데(壁上公臣) 그 수는 29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그 명단에 시조 太師公의 초상화가 배치되었다.
신라 말엽 당시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떼가 성했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는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우고 옛 고구려(高句麗) 땅에서는 고려(高麗)가 일어나 날로 세력이 강성하였다. 927년(경애왕 4년) 포악한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경주(慶州)까지 쳐들어와서 왕을 자살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며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新羅)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군사 5천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 동수싸움에서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갔다.
고려 태조 12년 견훤은 승승장구한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안동(安東)을 공격하여 왔다.
10년전 대구 공산싸움에서 패한 이후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고려 태조도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두 군사는 생사를 건 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1월 예안(禮安)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은 안동 북쪽의 병산(甁山: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후백제군은 맞은편의 석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한 견훤의 군대는 병력도 많고 사기도 충천하였으나 고려 태조의 군대는 그렇지 못하였으니 대상(大相) 홍유 같은 이도 전쟁이 불리하면 후퇴할 길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태조에게 진언할 정도였다.
당시의 고창(안동의 옛이름) 성주이던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돌아가신 경애왕(景哀王)의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로 알고, 또 포악무도한 견훤(甄萱)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에게 협조하기로 결정 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크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 고장 지리에 밝은 세 분 태사(太師)는 강대하고 사나운 견훤의 군사와 정면 대결을 하여서는 승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고을민을 이끌고 고려 군대와 힘을 합하여 저수봉(猪首峰:현 안동시 뒷산)으로부터 밤중에 견훤의 군을 뒤에서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김선평(金宣平)공은 안동(安東) 김씨(金氏)로 사성(賜姓)박고 안동 김씨의 시조(始祖)가 된 것이다.
안동김씨는 태사공 宣平이후 습돈(習敦)을 1세조로 하여 世系를 이어오면서 10世원손(遠孫) 계행(係行10世)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계행(金係行)
1431(세종 13) ∼ 1517(중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득우(得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혁(革)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삼근(三近)이며, 어머니는 김전(金 乷 )의 딸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 · 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豊山 盧 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 보백당(寶白堂) ’ 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 ·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 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김영(金瑛)
계행(係行10世)의 증손 영(瑛)은 중종(中宗)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케 했다.
김번
1479(성종 10) ∼ 1544(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서(文瑞). 삼근(三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권(係權)이고, 아버지는 장령 영수(永銖)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로 현령 박(博)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 · 예조좌랑 · 병조좌랑 · 경기도사 · 헌납 · 이조정랑 · 병조정랑 · 예조정랑 · 제용감첨정 · 평양서윤 · 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 때 관북지방에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뽑혀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양서윤이었던 1523년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쓰고 민식(民食 : 백성들을 위한 식량)과 창름(倉 鹿 : 관곡을 쌓아두는 창고)을 넉넉히 하며 군졸에게 잡다한 세(稅)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뒤에 요승(妖僧) 학조 ( 學祖 )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서 당시 사림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극효(金克孝)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던 극효(克孝)는 번의 손자로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다.
김상용(金尙容)
일찍이 석학(碩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상용(尙容)은 인조(仁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이르기를 " 네가 만일 살거던 이 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 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 수전(壽全)의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하며 가지 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이하 민족대백과사전의 기록>
1561(명종 16) ∼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 풍계(楓溪) · 계옹(溪翁). 서울 출신. 번( 韜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생해(生海)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 ( 鄭惟吉 )의 딸이다. 좌의정 상헌(尙憲)의 형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江華仙源村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으로 피난했다가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 ( 鄭澈 )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로 공을 세워 1598년 승지에 발탁되었다.
그 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 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했으며, 성절사 ( 聖節使 )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좌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우윤 · 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하였다. 인조반정 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 · 예조 ·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30년(인조 8)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바로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 ·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 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에게서 고문 ( 古文 )과 시를 배웠다. 그리고 성혼 ( 成渾 )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 ( 黃愼 ) · 이춘영 ( 李春英 ) · 이정구 ( 李廷龜 ) · 오윤겸 ( 吳允謙 ) · 신흠 ( 申欽 )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 鄭經世)와도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 초에 서인이 노서(老西) · 소서(少西)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2왕(二王 : 晉의 王羲之 · 王獻之 父子)의 필법을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다. 작품으로는 평양의 숭인전비 ( 崇仁殿碑 ) 및 풍덕군수(豊德郡守)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남긴 전액(篆額)이 있다. 시조로는 〈 오륜가 五倫歌 〉 5장, 〈 훈계자손가 訓戒子孫歌 〉 9편이 전한다.
한 때 그의 죽음을 놓고 스스로 분신한 것이 아니라 실화(失火) 때문이라는 이설도 있었다. 그러나 박동선 ( 朴東善 ) · 강석기(姜碩期) · 신익성 ( 申翊聖 ) 등의 변호로 정려문 ( 旌閭門 )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 ( 忠烈祠 ),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 ( 鳳鳴書院 ), 안변 옥동서원 ( 玉洞書院 ), 상주 서산서원 ( 西山書院 ), 정평 모현사 ( 慕賢祠 )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 선원유고 ≫ 7권이 전하고, 판본은 안동 봉정사 ( 鳳停寺 )에 보관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 ∼ 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 석실산인(石室山人 : 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 · 서간노인(西磵老人 : 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 출생.
번( 韜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생해(生海)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 ( 鄭惟吉 )의 딸이다.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관직 활동〕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수찬 ( 副修撰 ) · 좌랑 · 부교리 ( 副校理 )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한 뒤 교리 · 응교 ( 應敎 ) · 직제학을 거쳐, 1611년(광해군 4)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언적 ( 李彦迪 )과 이황 ( 李滉 )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 ( 鄭仁弘 )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 ( 七庶之獄 )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 金悌男 )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내( 油 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 · 이조참의 · 도승지 · 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 · 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 ( 元宗 )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 대로(大老) ’ 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 ( 金堉 )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 ( 金集 ) 등 서인계 산림 ( 山林 )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학문 활동〕 1585년(선조 8) 윤근수 ( 尹根壽 )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 ( 成渾 )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이정구 ( 李廷龜 ) · 김유(金 背 ) · 신익성 ( 申翊聖 ) · 이경여 ( 李敬輿 ) · 이경석 ( 李景奭 ) · 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 ( 鳳鳴書院 ), 개성 숭양서원 ( 崧陽書院 ),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 ( 顯節祠 ), 상주 서산서원 ( 西山書院 ), 종성 화곡서원 ( 華谷書院 ),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 ( 慕賢祠 )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 · 남사록(南 笑 錄) · 청평록(淸平錄) · 설교집(雪 暠 集) · 남한기략 ( 南漢紀略 ) 등으로 구성된 ≪ 청음전집 ≫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광현(金光炫)
1584(선조 17)∼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할아버지는 극효(克孝)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상용(尙容)이며, 어머니는 권송(權悚)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판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재로 뽑혀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을 제수받았다. 1625년(인조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및 홍문관부정자, 검열·정언 등을 역임했다.
이괄 ( 李适 )의 난 및 유효립 ( 柳孝立 )의 역모사건 때 영사공신 ( 寧社功臣 ) 1등에 책봉되었으나 뒤에 개훈(改勳) 때 삭제되었다. 1626년 수찬·교리·암행어사 등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 호조판서 심열 ( 沈悅 )의 종사관으로 기읍(畿邑)에 파견되어 기민구제에 힘썼다.
사간·응교·대사헌·대사간·예조참의 등을 거쳐, 1634년 부제학이 되었다. 이 때 대사간 유백증 ( 兪伯曾 )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을 옹호함을 임금에게 아부한다 해 탄핵하다가 삼수(三水)로 유배당하였다. 다음해 재이(災異)가 빈발함을 이유로 방면되어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아버지 상용이 강화로 피난했다가 강화가 함락당해 그 곳에서 자살하자, 그도 홍주의 오촌동(鰲村洞)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호종(扈從)의 공을 수록하고 대사간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청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든 문서에 청나라 연호 쓰기를 거부하고 단지 간지만 씀으로써 파직당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을 배수했으나 사직하였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이 일어나 강씨가 사사되자, 강빈의 오빠 문명(文明)이 사위였던 까닭에 순천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그 곳에서 울분 끝에 죽었다.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글씨로는 홍천에 있는 〈홍양청난비 洪陽淸難碑〉 및 통진에 있는 〈민기신도비 閔箕神道碑〉와 〈영상이탁묘비 領相李鐸墓碑〉가 있다. 시문집으로 ≪수북유고≫ 4권이 전한다.
김수증(金壽增)
1624(인조 2) ∼ 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 성리학자.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상헌(尙憲)이다.
1650년(효종 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 ( 洗馬 )가 되었다. 그 뒤 형조 정랑 · 공조 정랑을 거쳐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670년(현종 11년)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 살만한 곳을 가려져 정함)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년)에 성천 부사로 있던 중, 동생 수항(壽恒)이 송시열 ( 宋時烈 )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하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면서 화가인 조세걸 ( 曺世傑 )을 시켜 〈 곡운구곡도 〉 를 그리게 하는 등 글씨와 그림에 관심을 기울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 ( 華嶽山 )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 : 중국 북송의 유학자 邵雍을 그 시호로써 일컫는 이름)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 蓬 )와 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 태극도 〉 · 〈 하도낙서 河圖洛書 〉 · 〈 선후천팔괘도 先後天八卦圖 〉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 인문석(人文石) ’ 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 · 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을 하였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성리 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 곡운집 ≫ 이 있다.
김수흥(金壽興)
1626 인조 4 ∼ 1690(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생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광찬(光燦), 양부는 동부승지 ( 同副承旨 ) 광혁(光爀)이고, 양모는 광산김씨로 동지중추부사 존경(存敬)의 딸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형이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 ( 司馬試 )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역시 병과로 급제한 뒤 부교리 · 대사간 · 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666년(현종 7)에 호조판서, 1673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남인에게 몰려 부처될 뻔하였고, 그해 8월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양주로 물러가 살았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에 이어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장기(長 垢 )에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송시열 ( 宋時烈 )을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하여 그의 뜻에 따랐고, ≪ 주자대전 朱子大全 ≫ · ≪ 어류 語類 ≫ 등을 탐독하였다. 역대의 왕에게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백성의 편에서 정치하기를 힘쓰고 정치의 혁신을 여러 번 건의했다. 저서로는 ≪ 퇴우당집 ≫ 5책이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김수항(金壽恒)
1629(인조 7) ∼ 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극효(克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관(尙寬)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광찬(光燦)이며, 어머니는 목사 김래(金 瀉 )의 딸이다.
〔관직 활동〕 1645년(인조 23) 반시(泮試)에 수석하고, 1646년 진사시와 1651년(효종 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 ( 典籍 )이 되었다. 이어 병조좌랑 · 사서 ( 司書 ) · 경기도사 · 지평 ( 持平 ) · 정언 ( 正言 )을 거쳐, 165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 정시 문과에 5등으로 급제해 효종으로부터 말을 받았으며, 이듬 해 부수찬 ( 副修撰 ) · 교리 ( 校理 )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어 중학(中學) · 한학교수 ( 漢學敎授 )를 겸하였다. 1655년 호당 ( 湖堂 )에 사가독서하고 수찬이 되었다가, 응교 ( 應敎 ) · 사간 · 보덕 ( 輔德 )을 지냈으며, 중시에서 을과로 급제, 형조참의 · 승지 · 부제학을 지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릉비의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오르고, 도승지 · 예조참판 ·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662년 왕의 특명으로 예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그 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특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명사들을 조정에 선임하는 데 힘썼다.
1672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좌의정에 승진해 세자부 ( 世子傅 )를 겸하였다. 그러나 서인 송시열 ( 宋時烈 ) 등이 왕의 경원을 받고 물러남을 보고 남인 재상 허적 ( 許積 )을 탄핵한 대간을 힘써 변호하다가 도리어 판중추부사로 물러났으며, 사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해 영의정이던 형 수흥(壽興)이 쫓겨나자, 대신 좌의정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숙종 즉위 후 허적 · 윤휴(尹 頊 )를 배척하고, 추문을 들어 종실 복창군 정(福昌君楨) · 복선군 남(福善君 灸 )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고 1678년(숙종 4)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로 복귀, 영의정이 되어 남인의 죄를 다스리는 한편, 송시열 · 박세채 ( 朴世采 ) 등을 불러들였다. 이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1687년 영돈녕부사 ( 領敦寧府事 )로 체임되었다.
1689년 태조 어용(太祖御容 : 태조의 영정)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고 장령 ( 掌令 ) 김방걸(金邦杰) 등이 탄핵해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뒤이어 예조판서 민암(閔 睦 )을 비롯한 6판서 · 참판 · 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 인의 공격과 사헌부 · 사간원의 합계(合啓 : 함께 계문을 올림)로 사사되었다. 이는 경신 이후의 남인 옥사를 다스릴 때 위관으로 있었고, 특히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 재상 오시수 ( 吳始壽 )를 처형했기 때문에 입게 된 보복이었다.
〔학문 활동〕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 ( 金長生 )의 문인인 송시열 · 송준길 ( 宋浚吉 )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 ( 騈儷文 )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 · 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사후에 세상의 평가는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였다.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어 기강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 주장을 말함)을 일삼아 흉당(凶黨 : 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인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 ( 尹拯 )의 죄를 통렬히 배척해 선비의 갈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판은 물론 그가 속한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측에서는 그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 ( 鹿洞書院 ), 영평의 옥병서원 ( 玉屛書院 ) 등에 제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문곡집 ≫ 28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창집(金昌集)
1648(인조 26) ∼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 · 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자 과거 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 ( 正言 ) ·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 ( 永平 )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 · 참의 · 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 · 예조참판 ·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 · 이조 · 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 · 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 · 소론이 대립하였다.
이 때 영중추부사 이이명(李 蓬 命), 판중추부사 조태채 ( 趙泰采 ), 좌의정 이건명 ( 李健命 ) 등과 함께 연잉군(延 艀 君 : 뒤에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해, 김대비(金大妃 : 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이에 경종의 비 어씨와 아버지 어유구 ( 魚有龜 ), 사직 ( 司直 ) 유봉휘 ( 柳鳳輝 ) 등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실행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 ( 金一鏡 ) · 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 ( 四忠書院 )을 세워 이이명 · 조태채 · 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 ( 盤谷書院 )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 ≫ · ≪ 몽와집 ≫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 ∼ 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 경기도 과천 출신.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성두(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의 아우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해 전적에 출사한 뒤, 병조좌랑 · 사헌부지평 · 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 · 이조좌랑 ·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 이조정랑 · 집의 · 동부승지 · 대사성 · 병조참지(兵曹參知) · 예조참의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 ( 宋時烈 )의 ≪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 ≫ 를 명에 의해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 경기도 포천군)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 · 예조참판 · 홍문관제학 · 이조참판 · 대제학 · 예조판서 · 세자우부빈객 ·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지만 의리를 분별해 밝힐 때는 목소리를 높여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또한 후학을 순순히 교화해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해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그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학문은 이황 ( 李滉 )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 ” 이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라고 해 이황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였다.
인심도심설 ( 人心道心說 )에서도 그는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도한 그는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 성악론변 性惡論辨 〉 에서 그는 “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 ” 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기설에서 대체로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 김숭겸표(金崇謙表) · 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 ( 鹿洞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농암집 ≫ · ≪ 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 ≫ · ≪ 논어상설 論語詳說 ≫ · ≪ 오자수언 五子粹言 ≫ · ≪ 이가시선 二家詩選 ≫ 등이 있고, ≪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 ≫ · ≪ 문곡연보 文谷年譜 ≫ 등을 편집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창흡(金昌翕)
1653(효종 4)∼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학자.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서울 출신.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성두(星斗)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창협(昌協)이다.
15세에 이단상 ( 李端相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해, 1673년(현종 14)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1년(숙종 7)에 김석주 ( 金錫胄 )의 천거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영평(永平 : 경기도 포천)에 은거하였다.
≪장자 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해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유학에 전심하였다.
1696년에 서연관 ( 書筵官 )에 초선(抄選)되고, 1721년(경종 1)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는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 ( 李滉 )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하는 형 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정(善情)이 청기(淸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 ( 四端七情 )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하는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그는 ≪중용≫의 미발(未發)에 대한 연구도 깊이 하였다. 또한 인품(人品)을 6등으로 나누어 성인 ( 聖人 )· 대현 ( 大賢 )·군자(君子)·선인(善人)·속인(俗人)·소인(小人)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 ( 楊根 )의 미원서원 ( 迷源書院 ), 덕원의 충곡사(忠谷祠),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양구의 서암사 ( 書巖祠 ),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포천의 요산영당(堯山影堂), 한성의 독충당(篤忠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집≫·≪심양일기 瀋陽日記≫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창업(金昌業)
1658(효종 9)∼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老稼齋). 17세기에 활약한 노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인 수항(壽恒)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창협(昌協)·창흡(昌翕) 등 형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특히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 ( 金萬重 )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681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 지금의 성북구 장위동)에 은거하였다. 1689년에 기사사화가 일어나자 포천에 있는 영평산(永平山) 속에 들어가 숨어살다가 1694년 정국이 노론파에 유리하게 되자 다시 송계로 나왔다.
이 때 나라에서 내시교관 ( 內侍敎官 )이라는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응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노가재라 부르며 세상일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향리에 사창 ( 社倉 )을 설치하고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중국 산천을 보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여기다가 1712년 연행정사(燕行正使)인 창집(昌集)을 따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 때 보고 들은 것을 모아 ≪가재연행록 稼齋燕行錄≫을 펴내었다.
이 책은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 제도와 이때 만난 중국의 유생, 도류(道流 : 도교를 믿고 그 도를 닦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 연행록 중에서 가장 좋은 책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젊어서도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므로 아버지로부터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학업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니 손을 떼라는 충고를 받았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인 〈추강만박도 秋江晩泊圖〉(간송미술관 소장)나 후인이 모사한 〈송시열 77세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같은 작품으로 보아 그림 솜씨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취향은 서자인 윤겸(允謙)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에 유행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김제겸(金濟謙)
1680(숙종 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창집(昌集)이며, 어머니는 박세남(朴世楠)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창흡(昌翕)에게 수학하였다. 1705년 진사가 되고, 1710년 세마 ( 洗馬 )로 기용되었으며, 고양군수를 거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재직중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 ( 正言 )이 되었다.
그 뒤 헌납 ( 獻納 )· 집의 ( 執義 )· 응교 ( 應敎 )· 교리 ( 校理 )·사간·예조참의·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 아버지가 노론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소론의 김일경 ( 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에 의해 사사되자 울산에 유배, 뒤에 부령(富寧)으로 이배되었다가 사형당하였다.
조성복 ( 趙聖復 )·김민택(金民澤)과 함께 신임사화 때 죽은 삼학사 ( 三學士 )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725년(영조 1) 관작이 복구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죽취고≫, 편서로는 ≪증보삼운통고 增補三韻通考≫가 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이소(金履素)
1735(영조 11)∼1798(정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 영의정 창집(昌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제겸(濟謙)이고, 아버지는 부사 탄행(坦行)이며, 어머니는 한백증(韓百增)의 딸이다.
1764년(영조 40) 병자호란 때의 충신 후손들만을 위해 시행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0년부터 교리 ( 校理 )· 헌납 ( 獻納 ) 등을 지내고, 1776년에 대사간·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북쪽에 흉년이 들어 영남의 곡식을 수송했는데, 조운 ( 漕運 ) 감독을 잘못해 파면되었다.
1778년(정조 2)부터 승지·도승지· 부제학 ( 副提學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780년에는 대사헌이 되어 홍국영 ( 洪國榮 )의 관작 삭탈을 주청했고, 1781년에는 ≪영조실록≫ 편찬청 교수당상(校讐堂上)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참판·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비변사도제조(備邊司都提調)·한성부판윤을 거쳐, 1783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채제공 ( 蔡濟恭 )을 탄핵하다가 잠시 파면되었다. 이 해에 책봉부사(冊封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대향(大享 : 큰 제사) 준비를 소홀히 하여 다시 파면되었다.
1784년부터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형조판서·병조판서·선혜청도제조·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88년 호조판서를 지냈고, 1791년에는 동지사 ( 冬至使 )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우의정에 올랐다.
1793년 사옹원도제조를 거쳐 좌의정에 승진했고, 진하사 ( 進賀使 )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796년 사역원도제조를 역임하고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동지사로 다녀왔다.
지조가 있어 옳은 일은 끝까지 추진해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외교에 뛰어나 청나라에 다섯 번이나 다녀왔고, 문학과 재주가 비상했으나 잘 드러내지 않았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김조순(金祖淳)
1765(영조 41)∼1832(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달행(達行)이고, 아버지는 부사 이중(履中)이며, 어머니는 신사적(申思迪)의 딸이다. 순조의 장인이다.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 檢閱 )이 되고 초계문신 ( 抄啓文臣 )으로 발탁되어 강원도·황해도·함경도 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겸사 ( 兼史 ) 1명을 두어 그 지방의 민요와 풍속을 채록해 시정기(時政記)에 수록하자는 의견을 건의, 실시하였다.
1788년 규장각의 대교 ( 待敎 ) 때 당시 시·벽파(時僻派) 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 검교 ( 檢校 )· 직각 ( 直閣 )을 거쳐 1800년 보덕 ( 輔德 )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 ( 副提學 )·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가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혜청제조로 있을 때 수효가 적은 친위병을 철폐된 장용영 ( 壯勇營 )의 군사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1814년 금위대장, 1826년 양관 대제학이 되고, 1827년 왕의 관서 지방 목욕 행차를 호종했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민간 실정을 은밀하게 보고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형정(刑政)· 인사 ( 人事 )·대동미 등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 뒤 실권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비명·지문·시책문·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로 ≪풍고집 楓皐集≫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의 현암서원 ( 玄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김홍근(金弘根)
1788(정조 12)∼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의경(毅卿), 호는 춘산(春山). 달행(達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경(履慶)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명순(明淳)이며, 어머니는 신광온(申光蘊)의 딸이다.
위수(衛戍)로서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안동김씨의 세도를 배경으로 부교리에 특진되고, 우권독을 거쳐 1831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승지·대사성·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 등을 지내고, 1839년(헌종 5)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조·공조·병조의 판서와 홍문관제학·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듬해 대사헌으로서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세력다툼에 대한 시폐의 상소를 올리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의정부좌참찬으로 기용되었다. 1841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김응근(金應根)
1793(정조 17)∼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경(溪卿), 호는 의석(宜石). 아버지는 참판 명순(明淳)이고, 형이 홍근(弘根)이며, 동생이 영의정 흥근(興根)이다.
1816년(순조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822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그 뒤 외직으로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1857년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1860년 공조판서, 이어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개인적인 능력보다는 안동김씨의 세도에 힘입어 판서직에까지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써서 평양의 의열사비(義烈祠碑)를 썼다. 편서로는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할 때에 ≪공산지 公山誌≫를 편찬한 바 있다. 시호는 청헌이다.
김흥근(金興根)
순조(純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흥근(興根)은 홍근(弘根)의 아우로 헌종(憲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철종(哲宗) 때는 좌의정(左議政)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김조근(金祖根)
1793(정조 17)∼1844(헌종 10). 조선 후기의 척신. 자는 백술(伯述), 호는 자오(紫塢). 우의정 수항(壽恒)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소(履素)이며, 아버지는 목사 지순(芝淳)이다.
1816년(순조 16)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의령· 광주 ( 廣州 ) 등지의 판관을 거쳐 1837년(헌종 3) 승지에 이르렀다. 같은 해 그의 딸이 헌종비에 책봉되자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에 올랐다. 이어 호위대장·어영대장·주사대장(舟師大將) 등 무반의 중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순조 때 김조순 ( 金祖淳 )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이 대두한 풍양조씨의 세도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형성한 안동김씨의 중심인물이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김좌근(金左根)
1797(정조 21)∼1869(고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영의정 창집(昌集)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중(履仲)이고,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이며, 어머니는 심건지(沈健之)의 딸이다. 순조비 순원왕후 ( 純元王后 )는 그의 누이이다.
1819년(순조 19)에 생원이 되고 부수(副率)·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을 거쳐 1838년(헌종 4) 판관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 ( 副校理 )· 직각 ( 直閣 )·대사성·이조참의·공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병조판서·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우참찬·제학 겸 지실록사를 거쳐 총위영(總衛營)을 총융청(總戎廳)으로 개편, 총융사(總戎使)를 맡고 이어 금위대장 등 무직(武職)의 수뇌부를 관장하여 당시 혼란한 사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훈련대장·공조판서·호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세 번씩이나 보직되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62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발생한 각지의 민란을 진정해보려는 의도에서 설립된 이정청 ( 釐整廳 )의 총재관(總裁官)을 맡기도 하였으나,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이 실권을 장악하자 실직에서 물러나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영돈녕부사로 1866년 기로사에 들어갔다.
인품은 정량(貞亮 : 곧으면서 맑음)하고 공평하였으나, 안동김씨 세도정치시기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역사에 끼친 영향이 컸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문근(金汶根)
1801(순조 1) ∼ 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노부(魯夫). 아버지는 인순(麟淳)이며, 이순( 蓬 淳)에게 입양되었다. 형이 이조판서 수근(洙根)이며, 사위가 철종이다.
1841년(헌종 7) 음직으로 가감역(假監役)이 된 뒤 현감을 지내다가 1851년(철종 2) 딸이 왕비로 책봉되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책봉,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제2차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또, 금위대장 · 총융사 · 훈련대장 등의 군사요직을 거쳤다.
1860년 대사헌 서대순 ( 徐戴淳 )이 상소하여, 철종이 죽은 뒤 왕위계승의 가장 유력한 인물이던 경평군 호(慶平君 珍 )가 판중추부사 김좌근 ( 金左根 ) 등과 그를 비난한다고 하며 경평군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에 철종은 경평군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보내고, 한편으로 종정부 ( 宗正府 )에 명하여 속적(屬籍)을 끊어 경평군의 작호를 환수하였다.
김좌근 · 김병국(金炳國) · 김병기 ( 金炳冀 ) 등과 함께 성밖으로 한때 퇴출되었으나 왕명으로 곧 돌아왔다. 1862년에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이하전 ( 李夏銓 )의 역모를 빨리 처분하도록 청하여 왕족을 모해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강화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듬해 죽자 철종은 부기(副器) 일부를 수송하도록 하고, 성복일에는 승지를 보내어 제사지내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며, 예장(禮葬) 등속은 전례를 따르도록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순(忠純)이다.
김원행(金元行)
1702(숙종 28) ∼ 1772(영조 48). 조선 후기의 학자 · 문신.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 · 운루(雲樓). 상헌(尙憲)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창협(昌協), 아버지는 승지 제겸(濟謙)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조판서 권(權)의 딸이다. 당숙인 숭겸(崇謙)에게 입양되었다.
일찍부터 종조부 창흡(昌翕)에게 배웠고, 이재 ( 李縡 )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본가의 할아버지 창집(昌集)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제겸을 비롯해 친형인 성행(省行) · 탄행(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어머니 배소에 따라가 ≪ 맹자 ≫ · ≪ 율곡집 栗谷集 ≫ · ≪ 우암집 尤庵集 ≫ 등을 탐독하였다. 1725년(영조 1) 본가의 할아버지 · 아버지 · 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1740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내시교관 ( 內侍敎官 ), 1750년 위수 ( 衛率 ) ·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59년 왕세손을 교육할 적임자로서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소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1761년 공조참의 · 사성 ( 司成 ), 뒤에 찬선 ( 贊善 )에 임명했을 때도 역시 사양하였다.
조선 후기의 집권 계층에 속한 노론의 혁혁한 가계의 후손으로서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산림을 중시했는데, 그는 유수한 산림의 한 사람으로 나라 안에서 명망을 한몸에 받았다.
당시에 행세학(行勢學)은 송시열 ( 宋時烈 )을 종장(宗匠)으로 받드는 성리학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 학파 자체 내에서도 ‘ 낙론(洛論) ’ 과 ‘ 호론(湖論) ’ 의 대립이 있었다.
대립의 발단은 김창협과 권상하 ( 權尙夏 )의 학설에서 시작되었다. 김창협의 이론을 이어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 ( 李柬 )은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권상하의 이론을 이어 그의 제자 한원진 ( 韓元震 )이 호론의 중심이 되었다.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자연히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활도하였다.
그의 사상은 대체로 김창협의 학설을 답습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학설을 종합해보면, 심(心)을 이(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이와 기의 중간에 처해 이기(理氣)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바로 이황 ( 李滉 )의 주리설과 이이(李珥)의 주기설을 절충한 김창협 학설의 계승이었다.
나라에서 정통적 학자로 추대받아 산림의 지위에 있었던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순수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고, 또한 몇 사람의 실학자도 일부 배출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는 박윤원 ( 朴胤源 ) · 오윤상(吳允常) · 홍대용 ( 洪大容 ) · 황윤석(黃胤錫)과 그의 아들 이안(履安) 등이 있다. 저서로는 ≪ 미호집 ≫ 20권 10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이안(金履安)
1722(경종 2) ∼ 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 · 문신.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 상헌(尙憲)의 후손으로 창협(昌協)의 증손자, 원행(元行)의 아들이다.
당대의 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워 1762년(영조 38)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민이현(閔 紛 顯) · 김두묵(金斗默) · 조림 ( 曺霖 ) 등과 함께 경연관 ( 經筵官 )에 기용되었고, 1781년(정조 5)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1784년 지평 ( 持平 ) · 보덕 ( 輔德 ) · 찬선 ( 贊善 ) 등을 거쳐 1786년 좨주 ( 祭酒 )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 학자 홍대용 ( 洪大容 ) · 박제가 ( 朴齊家 ) 등과 교유를 맺어 실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문하에 출입하던 성리학자 박윤원 ( 朴胤源 ) · 이직보 ( 李直輔 ) · 오윤상(吳允常) 등과의 교유 속에 전통적 성리학자로 더 알려졌으며, 또한 예설(禮說)과 역학 ( 易學 )에도 조예가 깊어 ≪ 의례경전기의 儀禮經傳記疑 ≫ · ≪ 계몽기의 啓蒙記疑 ≫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 ≪ 삼산재집 三山齋集 ≫ 12권이 있다.
김수근(金洙根)
1798(정조 22) ∼ 1854(철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회부(會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 원행(元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직(履直)이고, 아버지는 목사 인순(麟淳)이며, 어머니는 신식(申 ○ )의 딸이다. 1828년(순조 2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蔭仕)로 동몽교관 ( 童蒙敎官 )이 되었으며, 1833년 시제에서 수석하여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5년(헌종 1)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가 된 뒤 1837년 대사성, 1840년 이조참의, 1845년 우윤 ( 右尹 ), 1847년 충청도관찰사, 1850년(철종 1) 이조참판 · 공조판서, 1851년 우참찬 · 대사헌, 다음해에 이조판서와 홍문관대제학 · 선혜청당상, 1853년 병조판서, 1854년 형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 세도가의 출신으로서, 동생 문근(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하여졌고, 두 아들 병학(炳學)과 병국(炳國)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거제의 반곡서원 ( 盤谷書院 )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 삼연선생연보 三淵先生年譜 ≫ 가 있다. 시호는 정문(正文)이다.
김병학(金炳學)
1821(순조 21)∼1879(고종 16). 조선 말기의 문신.자는 경교 ( 景敎 ), 호는 영초(潁樵). 이직(履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순(麟淳)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수근(洙根)이며, 어머니는 조진택(趙鎭宅)의 딸이다. 철종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문근(汶根)의 조카이다. 준근(浚根)에게 입양되었다.
1853년(철종 4) 현감으로 정시 문과의 병과로 급제, 장령 ( 掌令 )·사간이 되었다. 곧이어, 안동 김씨의 세도를 배경으로 대사헌·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할 때도, 고종 즉위에 은밀히 노력한 공로와 딸을 며느리로 줄 것을 약속한 평소의 친분 때문에 1864년(고종 1)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 해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을 편찬하고 조두순 ( 趙斗淳 )·이유원(李裕元) 등과 함께 찬집소총재관으로 ≪대전회통≫을 완성하였다.
보수적인 척화론자로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의 탄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병인양요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흥선대원군을 권고해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던 이항로 ( 李恒老 )를 승정원동부승지로 등용하도록 천거하였다. 영의정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의 체결에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1879년 사망하기 직전에도 판부사 홍순목 ( 洪淳穆 )· 한계원 ( 韓啓源 ), 영의정 이최응 ( 李最應 ), 좌의정 김병국(金炳國) 등과 함께 연차(聯箚 : 연맹으로 왕에게 쓴 건의문)를 올려 일본이 요구하는 인천·원산의 개항 가운데 인천만은 서울의 백 리 안에 있으므로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병국(金炳國)
1825(순조 25)∼190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용(景用), 호는 영어(穎漁). 이조판서 수근(洙根)의 아들이며, 병학(炳學)의 동생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대교 ( 待敎 )를 거쳐, 1853년 대사성에 특진하였다.
1857년 예조판서, 1858년 병조·호조의 판서 등 안동김씨 세도의 물결을 타고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1860년 훈련대장에 이르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더불어 안동김씨 세도는 일단 후퇴하였으나, 그 이전부터 흥선대원군과 관계를 맺어왔던 그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1865년 경복궁 중건 때에는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다. 1867년 정리사 ( 整理使 )·판삼군부사(判三軍府使), 1874년 우의정이 되어 1876년 강화도조약에 대한 고종의 자문에 사태를 보아 정책을 강구하자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였다.
1878년 좌의정이 된 뒤, 1880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에 따라 연미국론(聯美國論)을 주장, 미국과의 수교에 찬성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사태의 수습에 나선 흥선대원군이 통리기무아문 ( 統理機務衙門 )을 혁파하고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함에 따라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가 되었다.
이어 호조판서·총리통리내무아문사무(總理統理內務衙門事務)를 거쳐 12월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었다. 1884년 영의정 세자사 총리군국사무(領議政世子師總理軍國事務)를 역임하고, 같은 해 영돈녕부사 ( 領敦寧府事 )가 되었다가 1885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가 지은 〈예릉지문악장 睿陵誌文樂章〉이 ≪예릉지장 睿陵誌狀≫에 수록되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김달순(金達淳)
1760(영조 36)∼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도이(道以), 호는 일청(一靑). 양겸(養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범행(範行)이고, 아버지는 군수 이현(履鉉)이며, 어머니는 송재화(宋載和)의 딸이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 ( 抄啓文臣 )으로 뽑혔다. 1801년(순조 1) 전라도관찰사, 1803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전직 군수·현감과 유생 등이 순조와 정순왕후 ( 貞純王后 )의 총애를 받던 좌의정 서용보 ( 徐龍輔 )를 제거하고자 소를 올리고 통문을 발하였다.
이에 서용보는 그도 관계되었다고 하여 인책하려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책도중 순조의 동가(動駕) 때에 불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05년 홍문관제학을 거쳐 전 호조판서 이서구 ( 李書九 )가 죄를 쓰고 물러감에 따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서구의 잘못을 밝히지 않고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한 뒤 그 해 특지로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정조실록≫을 바치고 ≪선조보감 先祖寶鑑≫의 편찬을 청하였다.
벽파 ( 僻派 )였던 그는 박치원 ( 朴致遠 ) 등을 추증(追贈)하라고 아뢰었다가, 1806년 형조참판 조득영 ( 趙得永 ) 등 시파 ( 時派 )로부터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공격을 받고, 홍주목을 거쳐 남해안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강진현에 이배되어 사사되었다. 뒤에 다시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김매순(金邁淳)
1776(영조 52) ∼ 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자는 덕수(德 馬 ), 호는 대산(臺山). 아버지는 참봉 이수(履 輪 ), 어머니는 죽산안씨(竹山安氏)로 종주(宗周)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 사인을 거쳐 초계문신 ( 抄啓文臣 )이 되었고, 그뒤 예조참판을 거쳐 1821년(순조 21)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로 홍석주 ( 洪奭周 )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또한, 성리설에 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인물성동이론 ( 人物性同異論 )을 둘러싼 호락논쟁 ( 湖洛論爭 )에 이간(李柬)과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 ( 文淸 )이다.
저서로는 ≪ 대산집 ≫ · ≪ 대산공이점록 臺山公移占錄 ≫ · ≪ 주자대전차문목표보 朱子大全箚目問標補 ≫ · ≪ 궐여산필 闕餘散筆 ≫ · ≪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 등이 있다.
김윤겸(金允謙)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창업(昌業)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신겸(信謙)과 윤겸(允謙)형제가 문장과 그림으로 유명했다.
김병연(金炳淵)
1711(숙종 37) ∼ 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 · 산초(山樵) · 묵초(默樵). 척화대신 상헌(尙憲)의 현손이며, 수항(壽恒)의 넷째 아들 창업(昌業)의 서자로 태어났다. 관직은 진주 동쪽의 소촌역(召村驛)의 찰방을 지냈다.
서얼로서 찰방에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서얼소통(庶 椧 疏通 : 첩의 자식이 과거 응시 자격을 얻거나 관직에 임명되던 일)과 세력 있는 명문 집안 출신이라는 후광을 입었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구체적인 행적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둘째 아들 용행(龍行)의 친구인 박제가 ( 朴齊家 )의 〈 봉별금장진재북유시사수 奉別金丈眞宰北遊詩四首 〉 에 의하면 영조 말년에 중국 북방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정선 ( 鄭敾 )이 이룬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을 이어받아 강희언 ( 姜熙彦 ) · 김응환 ( 金應煥 ) 등과 함께 겸재파(謙齋派)를 형성하였다. 그는 금강산 · 한양 근교 · 단양 · 영남 지방 등 명승을 여행하면서 진경산수 제작에 몰두하였다. 정선이나 겸재파 화가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화풍을 갖추었다. 주로 바다 · 바위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소재로 선택하고 있다. 실경을 대담하게 생략한 근대적 화면 구성이 특징적이다.
또한 수묵과 담채의 가벼운 표현과 바위의 붓질을 중복하여 입체감을 가미시킨 표현은 서구적인 수채화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당대의 대가인 정선이나 강세황 ( 姜世晃 )의 화격( 怜 格)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대표작으로는 〈 동산계정도 東山溪亭圖 〉 (간송미술관 소장) · 〈 금강산화첩 金剛山畵帖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진경산수화첩 眞景山水畵帖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총수산도 升 秀山圖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영남명승기행사경첩 嶺南名勝紀行寫景帖 〉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이 전해 온다.
김명규(金明圭)
1848(헌종 14) ∼ 조선 말기의 문신. 서울 출신.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가 내정에 개입하여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을 납치해 간 뒤 그를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씨정권은 당시 승정원동부승지로 있던 그를 문의관(問議官)으로 톈진(天津)에 파견, 그 반대운동을 벌였다.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89년에 톈진 주재 독리통상사무(督理通商事務)의 직함을 가지고 주로 대외적인 일에 종사하였다. 1892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지냈고, 그 뒤 농상공부대신 · 학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898년 당시 의정부참정 박정양 ( 朴定陽 )이 관민공동회 발기인 윤치호 ( 尹致昊 )에게 정부측 요인들이 관민공동회에 참석할 뜻을 비추자, 이에 동의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들이 관민공동회에 관계한 인사들을 모략하기 위해 이른바 익명서사건을 조작하여, 고종이 독립협회의 해산령을 내리고 관민공동회에 참가하여 ‘ 가(可) ’ 자를 쓴 대신들을 해임시킬 때 함께 면직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되어 임시서리의정사무(臨時署理議政事務) · 학부대신 등을 지냈다.
김종한(金宗漢)
1844(헌종 10) ∼ 1932. 조선 말기의 친일 문신. 자는 조경(祖卿), 호는 유하(游霞). 서울 출신. 판서 계진(啓鎭)의 아들로서 경진(敬鎭)에게 입양되었다. 순종비 윤씨의 숙부이며, 친일파였던 윤덕영 ( 尹德榮 )의 외사촌형이다.
187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그 뒤 홍문관교리 · 승정원부승지 · 이조참의 ·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886년 이후에는 예조판서 ·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판 · 의정부유사당상(議政府有司堂上)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도승지가 되었고, 이 해 6월 8일에 있었던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의 남산 노인정회담에 내무협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6월 11일에 구성된 교정청 ( 校正廳 )의 당상 15인 가운데 포함되었으며, 6월 21일 일본군의 왕궁 점령으로 성립된 김홍집 ( 金弘集 ) 내각에 참여해 군국기무처 ( 軍國機務處 )회의원 17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는 일본측의 추천에 의해 궁내부협판이 되어, 그 뒤 궁내부대신서리 · 시종원시강을 지냈다. 1897년에 함경도관찰사, 1901년에 궁내부특진관, 1904년에는 장례원경(掌禮院卿) · 비서감경( 煉 書監卿)이 되었다.
한편, 1896년에는 독립협회운동에 위원으로서 적극 참여하였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경강상인 ( 京江商人 )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대금업을 하였다.
1896년에 조선은행, 1897년에는 한성은행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899년에는 철도용달회사와 철도회사를 설립하였고, 1912년에는 권업주식회사(勸業株式會社)를 창립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부소장직을 맡았다.
1910년 3월 이완용 ( 李完用 )의 지시로 고희준(高羲駿) · 민원식 ( 閔元植 ) · 정응설(鄭應卨) 등이 조직한 친일 단체 정우회(政友會)의 총재직을 맡고, 그 공로로 일제의 한국 국권 침탈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편저서로 ≪ 경우궁보답수세절목 景祐宮洑畓收稅節目 ≫ 이 있다.
김병익(金炳翊)
1837(헌종 3)∼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좌경(左卿). 이조판서 대근(大根)의 아들이다. 186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고종이 등극한 뒤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안동김씨 일문이 배척당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이 들어선 뒤인 1878년 이조참의, 1879년 이조참판, 1883년 성균관대사성, 1886년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892년에는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후 건양·광무연간에는 시종원경(侍從院卿)·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비서원경(秘書院卿) 등을 역임했다. 1910년 일제가 우리 나라를 병탄하였을 때,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김가진(金嘉鎭)
1846(헌종 12)∼1922. 조선 말기의 문신. 호는 동농(東農). 예조판서 응균(應均)의 아들이다. 1877년 문과에 급제,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이 되었다.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 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 부수찬 ( 副修撰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 ( 掌令 )·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부터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4년간 동경 ( 東京 )에 주재하였으며, 1891년부터 안동대도호부부사를 지냈다.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했고, 병조참의·외무독판서리(外務督辦署理)·전우국총판(電郵局總辦)·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 1896년 중추원1등의관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897년 신구법(新舊法)을 절충하기 위해 설치한 교전소 ( 校典所 )의 지사원(知事員)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중추원의장, 1902년 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 1906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대한자강회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규장각제학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 회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뒤 수여한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가 그 뒤 즉시 반납하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의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 ( 朴容萬 )· 나창헌 ( 羅昌憲 )·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그 뒤 단원들이 붙잡혀 대동단이 해체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한학과 서예로도 유명하였다.
김옥균(金玉均)
1851(철종 2) ∼ 1894(고종 31). 조선 말기의 정치가 · 개화운동가.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 충청도 공주 출신. 병태(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당숙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61년 양부 병기가 강릉부사로 되어 임지에 가자, 양부를 따라 강릉에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뿐 아니라 문장 · 시 · 글씨 · 그림 · 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당시 오경석 ( 吳慶錫 ) · 유홍기 ( 劉鴻基 ) · 박규수 ( 朴珪壽 ) 등에 의해 근대적 개혁을 위한 개화사상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
1879년 개화승 이동인 ( 李東仁 )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신사유람단 ( 紳士遊覽團 )의 파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확장에 진력하였다.
그는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제1차 도일(渡日) 직후에 ≪ 기화근사 箕和近事 ≫ 를 편찬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승정원우부승지 ·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 · 이조참의 · 호조참판 ·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했다.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도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국가 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나 청국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당시 청국은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해 3천 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대원군을 납치해 갔다. 임오군란을 진압하여 민비정권을 재수립한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청군을 그대로 서울에 주둔시킨 채,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 위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자행하였다.
청국은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화정책이 그들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는 것이며, 청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김옥균 등의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극도로 탄압하였다. 청국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비친청 사대수구파들도 이에 야합하여 김옥균 등 개화당을 박해하였다.
임오군란 후 1882년 9월 그는 수신사 박영효 ( 朴泳孝 )의 고문이 되어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갔다.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 ( 徐光範 )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당시 일본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 치도약론 治道略論 ≫ 을 저술하였다.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3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M{{%106}}llendorff, P.G.)와 민비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가 그가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하었다. 이로써 국채 모집은 완전히 실패하고 1884년 4월 귀국하였다.
그는 세 차례에 걸친 도일 과정에서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급박하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다. 그가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국 및 민비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에 그는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 위로부터의 대개혁 ’ 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
청국과 프랑스가 안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 · 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1884년 5월 청국은 조선에 주둔시킨 3천 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에 청군은 1,500명만 남게 되었다. 1884년 8월 마침내 청 · 불전쟁이 일어나 청국은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그는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 1884년 9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 30일 서울에 귀임하여 종래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하였다. 그는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 개입을 막는 데 이용하기 위해 조선군 1,000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호위용의 일본군 150명을 정변에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그날 밤으로 민비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12월 5일 이재원(李載元 : 국왕의 종형)을 영의정으로, 홍영식 ( 洪英植 )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는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그의 주도 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하였다. 6일 오전 9시 경에 국왕의 전교형식(傳敎形式)을 빌려 공포하였다. 이 날 오후 3시에는 국왕도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국정 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 듯 하였다.
그러나 청군 1,500명은 이 날 오후 3시부터 갑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한 무력 개입을 시작해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 공격해 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청국 침략군에 저항하다가 패퇴하였다. 그러자 중위(中衛)를 맡았던 일본군도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사이도 없이 도망하고 철수해 버렸다. 이처럼 청군의 무력 공격을 방어하지 못해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 삼일천하(三日天下) ’ 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망명한 그를 박해하였다.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1888년 북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그 뒤 동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1894년 3월 청국의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민비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 ( 洪鍾宇 )에게 상해 동화양행(東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청국과 민비수구파 정부는 야합하여 시체를 서울 양화진 ( 楊花津 )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
4개월 뒤에 갑오경장으로 개화파정부가 수립되자 이듬 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 ( 金弘集 )의 상소에 의해 죄가 사면, 복권되었다. 1910년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저서로는 ≪ 기화근사 ≫ · ≪ 치도약론 ≫ · ≪ 갑신일록 甲申日錄 ≫ 등이 있다.
김석진(金奭鎭)
1843(헌종 9)∼1910. 조선 말기의 문신·항일 우국지사.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 상헌(尙憲)의 후손이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종친부 ( 宗親府 ) 벼슬을 거쳐 사과 ( 司果 )· 전적 ( 典籍 )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의 관직을 지내고, 지평 ( 持平 )· 장령 ( 掌令 )· 사성 ( 司成 )· 사간 ( 司諫 )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 뒤 호조·형조·병조·이조의 참의에 이어 한성부의 좌·우윤과 호조·이조·형조·공조의 참판, 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광주부유수 및 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지냈다. 1896년 궁내부 특진관에 이어 비서원경(秘書院卿)·장례원경(掌禮院卿)·귀족원경(貴族院卿) 등을 거쳐 190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 해 1월 23일 오적신(五賊臣)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상소문에서 그는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 폐기가 가능하니 외부대신을 불러 여러 외국 공사에게 성명을 내고, 매국 역도들을 죽여서 국헌을 바로잡고 인민을 생지옥에서 구하라고 청하였다.
왕의 승낙이 떨어지지 않고 날짜만 지연되자 다시 상주. 매국노들과 한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줄에 설 수 없으니 의효전향관(懿孝殿享官)의 직을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당시 향관의 줄에 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 ( 李址鎔 )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병세 ( 趙秉世 )가 조약에 반대, 순사하자 조문길에 남대문 근처 한 점포에서 아편을 산 그는,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지 않고 나라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1910년 우리 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 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을 주던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그를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복한(金福漢)
1860(철종 11) ∼ 1924. 조선 말기의 문신 ·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 충청남도 홍주 출신.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 이듬해에는 사서 ( 司書 )에 제수되었으며 성균관대사성 ·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894년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 해 6월에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자정(自靖)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듬해 8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李 律 ) · 안병찬 ( 安炳瓚 ) 등과 같이 홍주목사 이승우 ( 李勝宇 )에게 권유해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승우가 일제와 내통함으로써 일본군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곧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어 성균관장 ·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왜적과 역적들을 토벌하지 못했다 하여 사퇴하고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이지용 ( 李址鎔 ) · 박제순 ( 朴齊純 ) · 이완용 ( 李完用 ) 등 5적의 참수를 간청하는 소를 올리다가 투옥되었다.
1906년에는 민종식 ( 閔宗植 )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7년에도 의병 은닉과 민심 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하고 어렵게 목숨을 건졌으나, 그 후유증으로 평생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로는 일제의 심한 감시 속에 두문불출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문인 박경호(朴敬鎬)를 상경시켜 유림대표들과 협의하게 하였다.
또 영남의 곽종석 ( 郭鍾錫 )과 함께 호서 유림을 대표해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였다.
뒤에 발각되어 모두 일본경찰에 붙잡혔는데, 옥중에서 중병으로 9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인지사(仁智社)를 세워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덕진(金德鎭)
1864(고종 1)∼1947. 조선 말기의 의병. 자는 경명(景明), 호는 낙계(樂溪). 충청남도 청양 출신.
1906년 5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열세에 빠진 민종식 ( 閔宗植 )부대가 재궐기를 위하여 모의할 때 곽한일(郭漢一)·박윤식(朴潤植)·김운락(金雲洛)·황영수(黃英秀)·박창용(朴昌勇)과 같이 참여하였으나,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그해 11월 17일에 일본군과 일진회 회원의 습격을 받아 다수의 동지와 같이 붙잡혀 공주경찰서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였으며, 1907년 종신형을 얻도받고 복역하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金佐鎭)
1889(고종 26)∼1930. 독립운동가.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형규(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 ( 安昌浩 )· 이갑 ( 李甲 )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였다.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 ( 盧伯麟 )·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 ( 朴尙鎭 )· 채기중 ( 蔡基中 )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 ( 大倧敎 )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 ( 徐一 )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 ( 大韓正義團 )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 ( 北路軍政署 )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켰다.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3일간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그 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 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그도 우수리강을 건넜다.
그러나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해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 ( 新民府 )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 ( 城東士官學校 )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종진(金宗鎭)
1901∼1931. 독립운동가. 호는 시야(是也). 충청남도 홍성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홍성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1920년 북만주로 망명하여 동지들의 무기를 국내에 반입하려다가 실패하였다.
그 해 가을 다시 북경으로 망명하여 이세영(李世榮)· 이회영 ( 李會榮 )· 조성환 ( 曺成煥 )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윈난성(雲南省)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김좌진 ( 金佐鎭 )과 함께 신민부 ( 新民府 )에서 활약하였다. 1928년 재만동포의 자치기구인 한족총연합회 ( 韓族總聯合會 )를 조직하여 조직·농무·군무 등의 부장을 역임하였다.
1930년 북경에서 개최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대회에 북만주대표로 참가하여 우리민족의 연합운동에 진력하였다. 1931년 중동선(中東線) 해림역(海林驛) 부근에서 공산당원에게 암살되었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이,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金炳淵(김병연)
한글 지방.
김삿갓이 광주 어는 고을을 지나다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술자리를 벌이고 즐겁게 놀면서 한 가지 일로 서로 목소리를 높여 다투고 있었다.
사연인즉 제사를 지내는데, 한문으로 지방을 써야 한다는 노인과,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많으니 한글로 지방을 써도 주방하다는 사람과 옥신각신 하며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다.
그때 김삿갓이 오자 사라들은 그 옳고 그른 심판을 김삿갓에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양편의 말을 다 들은 김삿갓은 「제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문으로 지방을 써야 한다는 분의 주장도 충분한 근거가 있고, 한글로 위패를 써도 된다는 분의 의견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세상에 어떠한 일을 놓고 꼭 그 어는 한쪽만 옳다고 하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 이치에 합당한 원칙을 따라 마지막 결정은 그 일에 당사자가 주관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양반의 주장은 모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이렇게 판단을 내리자 두 사람 모두 웃으며 연회는 더욱 즐거워 졌다고 한다.
<출전: 광주의 전설>
金尙憲(김상헌) 의 일화.
이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견이 받아드려지지 아니하고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그리고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臥薪嘗膽)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金炳淵(김병연)의 일화.
김삿갓에 관한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이갸기도 있었다.
어느 더운 여름철 김삿갓이 한 곳을 지나노라니 젊은 선비들이 개를 잡아놓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를 짓는다고 마구 떠들어 대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김삿갓이 회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석에 앉아 한 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해서 인지 젊은 선비들은 본 체도 않고 있었다.
김삿갓은 약간 아니꼬운 생각이 들어 ˝구상유취로군!˝하고 일어나 가 버렸다.
˝그 사람이 지금 뭐라고 했지?˝ ˝구상유취라고 하는 것 같더군.˝
그러자 화가난 그들은 김삿갓을 잡아 오라 했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뒤쫓아 온 하인들에게 끌려 다시 선비들 앞으로 갔다.
˝방금 뭐라고 그랬지? 양반이 글을 읊고 있는데 구상유취 라니?˝ 그러면서 엎에 놓고 매를 칠 기세를 보였다.
김삿갓은 태연히,˝내가 뭐 잘못 말했습니까?˝하고 반문했다.
˝뭐라고, 무얼 잘못 말했느냐고? 어른들을 보고 입에서 젖내가 나다니 그런 불경한 말이 어디 또 있단 말이냐?˝
˝그건 큰 오해십니다. 내가 말한 구상유취는 입에 젖내가 난다는 구상유취(口尙乳臭)가 아니라 "개 초상에 선비가 모였다"는 구상유취(拘喪儒聚)였습니다.˝
한문의 묘미라고 나 할까. 선비들은 그만 무릎을 치고 크게 웃으면서,
˝우리가 선비를 몰라보았소. 자아 이리로 와서 같이 술이나 들며 시라도 한수 나눕시다.˝하고 오히려 사과를 한 끝에 술을 권했다는 이야기이다.
金尙容(김상용)의 일화.
충렬사 자리.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淸(청)나라 군사와 싸우다 역부족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원임대신으로서 왕족을 모시고 강화로 왔던 김상용이 어굴하고 원통해서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해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신발 한 짝이 멀리 날아가 떨어졌는데 그 곳이 지금의 충렬사가 위치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金尙容(김상용): 1561(명종 16) ∼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 풍계(楓溪) · 계옹(溪翁).
金係行(김계행)의 일화.
경상북도 안동 땅 길안면 고란이라는 동리에 晩休亭(만휴정)이라 하는 아담한 정자기 있는데 이 정자를 세우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이 고란 동리에 閔氏(민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한 과객이 찾아와서 하루 저녁 묵어 가겠소이다.」하고 재워달라고 했다. 주인은 쾌히 승낙을 하고 과객을 안으로 맞아 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만 묵고 가겠다던 과객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되어도 떠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과객이 민씨집에서 식객 노릇을 한지도 어언 삼년이 되었다.
꼭 삼년이 되는 날 과객은 비로소 짐을 꾸려 가지고 나오면서
「이제 떠나겠소 그동안 신세가 많았소이다」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객은「그동안 신세를 많이 끼쳤습니다. 내가 지내보니 집이 낡아 새로 지어야할 것 같은데 그 보답으로 집터를 하나 잡아 드리고 가겠소이다.]했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 지을 집터를 찾던 중인 민씨는 매우 반가워했다. 이에 주인은 과객을 따라 이리저리 좋은 집터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과객은 한곳에 이르자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좋은 곳이긴 하다만......」과객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얼핏 과객의 말을 들은 민씨가「이곳이 명당이오?]하고 물었다.
「예 썩 좋은 자리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민씨 복에 합당 치 않은 것 같소이다.] 과객은 매우 섭섭한 듯 입맛을 다시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여간 이곳은 명당이기는 하나 민씨 집안에는 합당치 않은 자리오니 다른 터를 찾읍시다」
「아니오. 나는 이곳에 집을 짓겠오」 민씨는 자기가 보기에도 앞이 훤히 터진 것이 명당인 듯하여 과객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세웠다.
이런 좋은 자리를 남에게 빼앗기다니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누가 뭐래도 나는 이 자리에 집을 짓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민씨는 과객을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
「그럼 할 수 없소 주인이 원하시는 일이니 난들 어쩌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과객은 민 씨에게 작별을 고하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그 후 민씨가 그 터에 주춧돌을 놓고 집을 짓는데 하루는 텁수룩하고 눈 토리가 이상한 한 과객이 지나가며 「음... 민씨가 김씨 집을 짓는구나.]하고 지껄이는 것이었다.
민씨는 그 과객의 말이 대단히 기분 나빴으나 계속 집을 지었다. 사흘 후에 또 한 과객이 「김씨 집을 짓는구먼]하고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올리는데 또 이상한 과객이 지나가며 「음 김씨집을 세우나 보군.]하는 것이었다. [흥 별소리를 다하네. 엄연히 민씨 집인데 김씨집이라니 고약한 놈이군.] 민씨는 과객들의 말을 묵살하고 기와를 얹고 초벽을 하였다.
그러자 이때 또 한 과객이 지나가면서「허허 김씨집을 짓는구나.]하고 전번의 과객들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민씨는 못들은 척하고 계속 집을 지었다. 이윽고 집 이 완성되어 새집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런데 새집에서 살게 된 민씨는 차츰 살림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몇 해 안가서 망하고 말았다. 민씨는 할 수 없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으나 망하는 집터라고 사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그 소문을 들은 김씨 문중의 한 하인의 주인인 寶白堂(보백당)에게 민씨 집을 살 것을 권했다.
「그건 안 돼. 망해 가는 집을 샀다간 우리 집안도 다 망해 버리면 어쩔 텐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은 지을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그집을 사면 부귀가 자손만대까지 분명히 번창할 것입니다.」 하인은 주인에게 간곡히 졸랐다. 김씨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하인이 간곡이 조르는 것에 마음이 끌리어 민씨집을 사기로 결정을 내렸다. 김씨는 집을 사서 두 집을 다 쓸 수 없으니 하인에게 거처하도록 하였다.
하인이 그 집에 들어가서 산지 며칠이 안 되어서 김씨가 살던 집이 불이 나 몽땅 타버리고 숟가락 하나 건져내지를 못 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김씨는 할 수 없이 하인에게 준 집으로 이사를 했다.김씨가 새집으로 옮긴 이후는 어찌된 일인지 차차 재물이 늘고 자손들이 많아지고 또한 벼슬길도 많이 오르게 되어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 고장 땅에 晩休亭(만휴정)이라는 정자를 세 워서 그 집으로 처음 이사를 온 寶白堂(보백당)을 받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金佐鎭(김좌진)의 일화.
노비를 먼저 해방시킴.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은 억만장자 집의 주손이다.
그의 집에는 많은 전답과 재산이 있었으며 집안에 노비만도 30여명이나 되었다
.19세 때 나라의 해방(解放)은 자기 집에서부터 먼저 이루어 저야 한다고 생각한 장군은 어머니에게, 노비를 전부 해방 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고하여 좌진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좌진장군은 친구에게 부탁하여 찰밥 3되를 지어 몰래 벽장에다 감추어두고,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근 채, 자기의 듯이 관철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고 어머니를 위협하며 졸라 들어갔다.5일이 지나자 방안에서 꼼짝도 안하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억만금 재산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 자식 하나 잃으면 무슨 소용이있겠는가.」하고 결국 좌진장군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좌진장군은 자기 집 노비들에게 살만큼의 논밭을 띠어주며 독립시키고, 소작인들에게도 경작하던 전지를 주어 살길을 마련해 주었다.
金時佐(김시좌)
하늘도 감통한 효자 金時佐(김시좌)
안동에서 풍산 병면으로 가다보면 풍산 소재지 들어가는 도로면 입구에 시묘동이 라고 쓰인 돌비가 보이고 마을이 있으며 마을 안에 비각이 보인다.
이 마을이 풍산읍 상리리 시묘골이다.
시묘골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전에 金時佐라(시좌라)는 효자가 이곳에서 어머니기 돌아가시자 시묘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영가지에 기록된 그의 시묘에 얽힌 이야기를 옮겨본다.
김시죄는 高麗太師(고려태사) 金宣平(김선평)의 후예이다. 태어나면서 남다른 점이 있었다. 정성스러운 효성을 하늘로부터 타고 나왔다. 어머니 張氏(장씨)를 받들 때는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그 아우인 時雨(시우)· 時良(시량)과 힘께 몸소 사냥하고 고기를 잡았다.
비록 寒暑風雨(한서풍우)에도 괴로움을 꺼리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공양함에 일찍이 넉넉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다년 동안 빗질을 하지 않고 자꾸만 긁어대어 부스럼이 되었다. 시좌가 향상 자기의 머리카락을 섞이게 하여 이가 옮겨 가도록 했다. 또 등에 종기가 난 것이 두려워 주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었는데 곧 신통한 효과를 보았다.
어머니가 天壽(천수)를 누리고 죽자, 시좌는 여막에서 살았는데, 鹽藏菜果(염장채과)를 먹지 않고 죽만 먹으며 3년 동안 한 번도 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하루는 대풍을 만나 여막에서 불이 났다.
불이 賓廳(빈청)(빈소)에 까지 번졌는데, 시좌가 영구를 껴안고 통곡하며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자, 불이 금세 저절로 꺼졌다. 향리의 사람들이 모두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침저녁으로 사당을 살피기를 평생토록 한결같이 했다. 무덤을 찾아 오고갔는데 하루도 그만두는 날이 없었다.
삭망이 되면 제물을 마련하여 반드시 무덤으로 올라가 제를 올렸다.
어버이를 일념으로 사모하기를 몸이 마치도록 줄어들지 않았다. 國忌(국기)를 당하면 반드시 齋戒(재계)하고 소식을 행하기를 부모의 기일에 하는 것과 같이 했다.
國喪(국상)에는 반드시 心喪(심상) 3년을 마치 부모의 상을 만난 것같이 하였다. 그 孝悌忠信(효제충신)이 월등한 행실과 덕행에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가정 경자년에 당시의 수령과 관칠사들이 다투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서 정려가 내려졌는데, 정려문이 풍산현 종송리에 있다.
항렬(行列)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세 |
항렬자 |
22 |
淳(순) |
28 |
東(동) |
34 |
然(연) |
23 |
根(근) |
29 |
顯(현) |
35 |
培(배) |
24 |
炳(병) |
30 |
年(년) |
36 |
銑(선) |
25 |
圭(규) |
31 |
鎰(일) |
37 |
源(원) |
26 |
鎭(진) |
32 |
求(구) |
38 |
榮(영) |
27 |
漢(한) |
33 |
模(모) |
39 |
思(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