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인물들
김빈길(金贇吉) 김경현(金慶賢) 김민환(金旻煥)
1. 김빈길(金贇吉)
시호 : 양혜(襄惠) 생년 : 미상 졸년 : 1405(태종 5) 시대 : 조선 전기 활동 : 무신
호 : 죽강(竹岡) 본관 : 고성(固城)
“ 상세내용 ”
미상~1405년(태종 5). 호는 죽강(竹岡).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태조(太祖) 때의 무인으로 낙안(樂安)에서 출생(出生)하였다. 성품이 충직(忠直)하고 근검(勤儉)하였다.
1394년(태조 3) 전라수군첨절제사(全羅水軍僉節制使)로 있을 때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 김문발(金文發) 등과 함께 왜적의 배 3척을 섬멸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투항해 온 왜인이 도망간 일로 인하여 최운해(崔雲海), 이구철(李龜鐵), 김영렬(金英烈) 등과 함께 국문(鞫問)을 당하였는데 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그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여 얼마후 유배되고, 모두 수군(水軍)에 다시 편입되었다.
1405년(태종 5)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을 때에는 도내(道內)의 요해처(要害處)에다 만호(萬戶)를 두고, 병선(兵船)을 나누어 정박시켰고, 또한 여러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비를 비축하게 하여 주는 것만을 바라는 폐단을 없애고, 평소 아랫 사람을 대함에도 한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예로 그가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에도 항상 사졸(士卒)들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 하였고, 또한 도적을 쫓아 행선(行船)할 때에도 분연(奮然)히 몸을 돌보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사력(死力)을 다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상을 받으면 항상 군사(軍士)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비록 외진 백성들이라도 그의 은혜를 입었다.
후에 양혜(襄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김원량(金原亮)이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 집필자 ” 권이태 “수정자” 이재옥
2. 김경현(金慶賢)
생년, 졸년 : 미상 시대 : 조선 전기 본관 : 고성(固城) 활동분야 : 무신
“상세내용”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무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19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 출신에게는 관직을 주지 않는 것과 왕권을 강화 하기위해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것에 대해 분개하며 동생과 함께 반란을 이르켜 역모를 꾀하였다. 이때 반란진압 좌대장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 이에 함길도순무중군(咸吉道巡撫中軍)을 맡게 되었다.
그 무렵 만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무리들이 자주 침범해 오자 강순(康純)과 함께 오랑케들을 토벌하면서,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 강효문(康孝文)과 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과 함께 이만주 부자를 죽였다.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집필자” 박수진
3. 김민환(金旻煥)
자 : 사인(士仁) 호 : 용암(勇菴)
생년 : 1824(순조 24) 졸년 : 1883(고종 20)
본관 : 고성(固城) 시대 : 조선 후기 활동분야 : 학자 / 유학자
“ 상세내용 ”
1824년(순조 24)~1883년(고종 20). 조선 후기 학자. 자는 사인(士仁) 호는 용암(勇菴)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부친 김낙성(金樂聲)과 모친 정희원(鄭喜元)의 딸 광주정씨(光州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완진(朴琓鎭) 0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과거를 단념하고 경사(經史) 연구에 힘썻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를 꺼려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이라 명하고 척사운동을 전개 하였다.
“통사문답(通史問答)”을 지어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알리려 하였으며 “중국학통(中國學統)을 지어 유학의 계통을 밝히고자 하였다. “성설(性說)”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을 대비하여 비판한 글이 있다. 저서로 “용암집(勇菴集)” 7권이 있다.
“참고문헌” 용암집(勇菴集)
“ 집필자 ” 김혜영
※역대 인물들
1. 김윤화(金潤華)
자(字)는 순집(順集) 시호(諡號)는 정렬(貞烈)
1276년(충열왕 2)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고령백(固寧伯)에 봉해졌다.
2. 김만서(金萬諝)
호(號)는 퇴사(退思)
군수(郡守)를 역임.
3. 김문량(金文亮)
자(字)는 응태(應泰) 호(號)는 연파(蓮坡)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부사(副使) 도사(都使)를 거처 여러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와 예문관교관(藝文館敎官)을 지낸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4. 김복광(金復光)
자(字)는 희서(希瑞) 호(號)는 모암(慕菴)
효행(孝行)으로 1718년 효행비(孝行碑)가 세워졌다.
5. 김봉섭(金鳳燮)
자(字)는 순원(舜元) 호(號)는 지촌(芝村)
학문(學文)에 전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6. 김사홍(金仕弘)
호(號)는 월촌(月村)
1592년(선조25) 왜적이 침입하자 군수(郡守) 조응도(趙凝道)와 더불어 왜적을 대파했고 1605년 2등공신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이 되었다.
7. 김세응(金世應)
자(字)는 국량(國良)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북청(北靑)에서 공을 세워 노성현감(魯城縣監)이 되었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8. 김승철(金承哲)
자(字)는 천보(天保)
고려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9. 김우추(金遇秋)
자(字)는 여성(汝成) 호(號)는 이우재(二憂齋)
1705년(숙종3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문과(文科)에 급제, 구례현감(求禮縣監) 평해군수(平海郡守) 순천부사(順天府使)등을 지냈다.
10. 김종윤(金鍾允)
자(字)는 경유(敬維) 호(號)는 성호(醒湖)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11. 김준식(金俊植)
자(字)는 원칠(元七) 호(號)는 절암(節庵)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2. 김중오(金重五)
호(號)는 지헌(芝軒)
1907년(순종1) 이동휘(李東暉), 권태형(權泰亨)등과 함께 강화(江華) 각처에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설립(設立), 민족정신을 고취 시켰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격분함을 이기지 못해 병사했다.
13. 김홍여(金弘呂)
자(字)는 진원(振遠) 호(號)는 송헌(松軒)
진사(進士)를 지냈다.
14. 김희량(金希亮)
자(字)는 명보(明甫)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수원부사(水原府使) 삼도방어사(三道防禦事) 병조판서(兵曹判書)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