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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手記)란 수표(手票), 명문(明文), 다짐[侤音] 등의 성격을 가지는 사적 문서이다. 흔히 토지나 노비를 매매할 때에는 명문을 작성하여 매매 사실을 증명한다.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써주는 문서이다. 이러한 사적인 거래의 대상은 매우 다양해서 그 대상물이 토지가 되기도 하고 노비, 가사(家舍), 가축, 선척(船隻), 염분(鹽盆), 집기(什器) 등도 대상이 된다. 매도인은 매매 대상물과 거래 가격 등을 명시하고 매도인에게 문서를 작성하여 준다.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라는 의미에서 ‘명문(明文)’이라고 하였다. 매매 명문은 원래 이 문서의 공증력을 위하여 관(官)의 입안(立案)을 받아야 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노비를 매매하는 경우 이외에는 거의 관의 입안을 하지 않았다. 관의 입안을 거친 문서를 관사(官斜) 문기라고 하고 관의 입안을 거치지 않은 문서는 백문(白文) 문기라고 한다. 관사란 관의 책임자인 수령이 비스듬히 관의 사인인 빗기=사지(斜只)를 하여 확인하였다는 증명을 한다. 백문 문기도 증인이나 필집(筆執)이 매도자와 함께 문서 말미에 수결(手決)을 함으로써 문서의 공공성을 보증하였다. 그러나 소송이나 분쟁이 생겼을 경우에는 관사 문기가 백문 문기보다는 더 큰 증거력을 가진다. 어떤 사물을 거래할 때에는 명문을 작성하지만 개인 간의 사적인 채무나 금전 관계의 내용을 보증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흔히 수기나 수표를 쓴다. 수기나 수표도 넓은 의미에서는 명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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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소개하는 보성 양반 임장원의 [문중 과채 수기]는 과채(科債)를 갚겠다고 하는 매우 독특한 내용의 수기이다. 이 자료는 임장원이 아들에게 보낸 삼십 여 점의 간찰과 함께 보관되어 있는 자료이다. 10여 년 전에는 임장원의 후손이 임장원 가의 고신(告身) 류 자료와 임장원의 초상화 등을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하여 전시회가 열린 바가 있다.
임장원(任長源, 1734~1804)은 자(字)가 회일(會一), 호(號)가 규암(葵菴)으로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거주지는 보성(寶城)이다. 1773년(영조49)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생원이나 진사가 되는 소과도 아니고 문과에 합격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보통 향촌의 선비들이 생원이나 진사에 합격하는 것도 대단한 영광일진대 하물며 문과는 말할 것도 없다. 소과는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음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시험이지만 문과는 대과라고 하여 합격과 동시에 관직에 임용될 수 있는 임용시험이었다.
이 문서는 피봉이 있는 문서이다. 겉봉에는 [문중 수기(門中手記)]라고 되어 있어 문중에 보내는 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을 탈초,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수기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말(門末, 문중 구성원의 말석이라는 의미의 겸사)인 제가 등과(登科)하였을 때에 문답(門畓, 문중 소유이 논) 3마지기를 빚을 내려고 빌렸다가 팔았는데, 지금까지도 갚지 못하여 여러 의논이 분운하게 일어났습니다. 금년까지는 유사(有司)가 어떻게든 감당하였습니다만, 앞으로의 걱정은 장치 제향(祭享)을 거르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문말인 저의 부끄러움은 다시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갚는 것은 깔끔하게 할 것이니 명년에는 문중에서 후의를 베풀어 다른 곳에 부표(付標)를 하지만 내명년에도 또 갚지 못하면 문말인 저는 마땅히 유사로서 금년처럼 준비해 와서 저의 논을 가지고 원래의 액수대로 문중에 대납하기로 하고 이와 같이 수기를 씁니다.
갑인년(1794, 정조18) 10월 13일 압각 시향(鴨閣時享) 때에 문말 장원 수서 (수결)
右手記事段 門末登科時 門畓三斗/ 以起債事 貸而賣之 而至今未報 以致/諸議之紛紜 至於今年 有司之搖當是/在果 來頭之憂 將至闕享之境是去乎/ 門末之慚愧 更言可言 而來頭準報 有如/靑山 明年段 門中以厚誼 以他員付標/是遣 至於再明年 而又不準報 則門末當以/有司 如今年備進 而以自己畓 準數代納於/門中事 如是手記爲臥乎事
甲寅十月十三日 鴨閣時享時 門末 長源 手書 (수결)
* 밑줄은 이두, / 는 줄바꿈 표시. 한 칸을 떼어 구두를 대신하였다.
임장원이 문과에 등제할 때에 문중의 논 세 마지기를 기채(起債)하여 빌렸다가 팔아먹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갚지 못해서 문중의 논란이 분분하다는 것이다. 임장원이 문과에 합격한 것은 1773년(영조49)이고 이 수기를 쓴 것은 1794년(정조18)이니 무려 20년이 넘은 채무를 가지고 논란이 된 것이다. 그때 문중의 논을 팔아 써서 장흥임씨의 시향(時享) 제사를 제대로 지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임장원은 내명년까지는 반드시 갚겠다는 다짐과 약속을 하고 이 수기를 직접 수필로 써서 수결을 하고 문중에 주게 된 것이다. 이 문기가 아들들에게 보낸 임장원의 다른 편지들과 함께 임장원의 집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아마 이 채무를 변제하고 이 수기를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임장원이 문중에 진 빚은 다 갚았으리라고 추정된다.
문중의 논을 세 마지기나 팔아서 무엇에 썼던 것일까? 조선시대 양반의 가장 큰 일 중의 하나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양반 선비의 일상은 과장에 출입하는 것이고, 과장에 출입하는 것 자체가 양반이 양반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일이다. 양반의 일생은 과거 시험 준비를 하고 과장에 출입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 과장(科場)에만 출입하고 실제로 소과(小科)나 무과(武科)조차도 합격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대과(大科)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재산이 있는 내로라하는 양반가에서는 소과나 문과에 합격하면 특별히 토지나 노비 등 재산을 별급(別給)하여 그것을 축하하였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삼일유가(三日遊街)를 하고 잔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아마도 추측건대 임장원이 문중의 논 세 마지기를 빌려서 빚을 지게 된 것은 임장원의 문과 합격을 축하하기 위하여 문중의 결의로 지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과에 합격한 임장원은 관료 생활을 하면서 문중에 그 이상의 재정적 지원을 해서 문중의 향사(享祀)가 끊이지 않도록 해야 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채무 관계가 생긴지 20년이 지나서야 이를 갚겠다는 수기를 쓴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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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원의 벼슬살이는 그다지 평탄하거나 영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1734년 옥평 외가에서 태어난 그는 40이 다되어서야 증광시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고 기주천(記注薦)으로 승정원 주서(注書)로 활동을 하다가 2년 후 효릉 별검이 되었다. 승정원의 주서직은 문과에 합격한 사람 중에서 특별히 능력이 있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추천 받아서 다시 시험을 거쳐서 임명하였다. 그러나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영광스러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힘든 직임이어서 모두들 회피하는 자리였다. 1780년 승문원 저작 겸 태상시 직장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문신 제술에서 장원을 하여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이후 영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1781년 11월에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거상을 하고 5년 후인 1786년에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일곱 가지를 강조하는 칠사(七事)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에 대해 정조는 “여러 조항들을 힘써야 하니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대는 새로 들어온 처음인데도 이와 같은 건의가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비답(批答)을 내리고 상소문 중 시폐(時弊)에 관계된 것은 여러 고을에 써서 내리게 특명하였다.그해 9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거상을 하고 다시 관직에 돌아온 것은 1790년(정조14)이었다. 사헌부 장령, 종부시 정을 역임하면서 다음해 2월에 윤대(輪對)에 들어갔을 때, 정조는 그를 기억하였으나 너무 백발로 늙은 것을 보고 나이를 묻기까지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58세였다. 정조는 “나이가 희게 될 때는 되었지만 너무 희다.”라고 하여 소회를 말하게 하였다. 다음해 3월에는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곧 시종신(侍從臣) 중에서 지방관을 차출해 보내라는 왕명으로 충청도 비인 현감에 내려가게 된다. 그해 말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고 다음 해인 1794년(정조18) 정월에는 조참례(朝參禮)에 입시하여 홀서(笏書)도 없이 계언(啟言)하여, 정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여러 적들을 처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정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홀연히 사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해 8월에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입시(入侍)를 하고 화성(華城) 성역(城役) 문제, 사학(邪學)의 괴수를 처단하는 문제, 군덕(君德)을 힘쓰는 문제 등에 대해서 만언소를 올렸다. 그해 말에는 숙천 부사가 되어 지칙(支勅), 농서(農書) 제진(製進) 등 변읍 수령으로서의 임무를 잘 완수하였으나 정조가 죽자 정치적 반대파의 탄핵으로 1801년(순조1) 의금부에 나포되어 고신을 빼앗기고 경상도 단성에 유배되었다. 1803년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와 1년 후에 별세하였다.
이상이 임장원의 문집인 [葵菴集]에 수록된 행장(行狀)을 중심으로 정리한 그의 일생이다. 문집에 나타난 행장에는 조카가 과거에 급제하자 장토(庄土)를 팔아서 축하연을 베풀어주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임장원이 문중에 보낸 수기는 문중의 전답을 팔아서 자신의 등과에 소요되는 비용을 썼고 이를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이를 갚겠다는 다짐을 하는 데에서 과거에 합격하고도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임장원이 문중에 써준 수기는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