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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전후해서 가끔 야당 정치인들이 구설수에 오르는 사건 중 하나가 노인 폄하 발언이다. 50대 이상의 고령층이 주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40대 이하는 야당을 지지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진 현상이다. 표가 생명인 정치판에서 고령층의 여당 지지가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이해는 하지만 공인들이 할 말은 분명 아니다. 60대 이상의 고령 세대가 공유하는 아픔이든 욕망이든 분명 정치성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다가가서 소통하거나 그분들의 의식을 바꿀 정치력을 행사하지 못한 책임은 야당 스스로 져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이 일찍이 돌아가셔서 세대간의 갈등을 크게 느껴본 적은 없다. 평생 농꾼으로 살아오신 80대의 장인, 장모님이 계셔서 간혹 정치 이야기를 할 때도 있지만 캄캄한 절벽 앞에 선 느낌이라 깊이 있는 대화를 피하는 편이다. 답답하기 그지 없는 마음이야 이심전심일테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염화미소로 통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 토론은 무엇인가? 인간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한 것인가? 개인적인 내 대답은 야속하게도 ‘그렇다!’ 이다. ‘이런, 한 평생 토론을 강조한 사람이?’라고 돌을 던질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욕망의 회로 속에 갇힌 상태에서는 솔직히 소통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한계 내에서의 고민을 하는 것도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멈추지 않는 설국열차 속에서 밖으로 나갔을 때, 그 과정에서 모두가 죽고, 살아도 겨우 둘 정도만 살아서 끔찍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면? 아직은 계속 더 달리면서 새로운 길을 계속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태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소통불(가)능에 대해서 쓰려는 글은 아니므로 그 논의는 잠시 접어두고 노인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자 한다.
갑자기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노인 생각이 난 것은 ‘토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한 강의에서 코맥 맥카시가 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코헨 형제가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까닭이다. 두 가지를 먼저 말해보자.
이 강의가 이루어진 시간과 공간이다. 2014년 11월 늦가을. ‘경기도교과토론교육연구회’(회장 위창대) 주최의 <2014 전국 토론교육 페스티벌>이 열렸다. 지난 몇 년 동안 진정성을 가지고 교육 현장의 토론수업에 대한 고민을 풀어보려는 노력의 결실로 이루어진 이번 페스티벌은 지역 단위의 토론교육에 대한 고민과 실천에 대한 공유를 넘어 전국적인 확산과 평가를 시험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는 자리였다. 토론의 전사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다니면서 토론의 가치와 필요성, 방법과 기술, 철학과 한계 등을 같이 공유해온 나에게는 매우 뜻 깊고 의미 있는 자리였으며, 우리나라 토론교육의 한 축을 형성해갈 들보를 마련하는 좋은 행사였다.
여는 마당과 닫는 자리에는 그동안 우리나라 토론교육의 초석이 되어오신 백춘현 선생님, 박보영 선생님, 조슈아 박 선생님 등이 나서서 토론교육의 큰 방향 속에서 생각해볼 여러 가지 요소들을 짚어주셨고 오전 오후 두 번의 섹션에서는 현장에서 교과 시간이나 학급, 학교 차원에서 토론교육을 실천해오신 분들의 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오전에 하브루타 수업을 아이들과 열심히 실천하시는 범계중 최선순 선생님의 발표를 흥미롭게 들었다. 하브루타를 통해 교육을 받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그렇게 괴롭히는 사유가 궁금했지만 그런 본질에 대한 고민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처럼 아직 우리 현장으로부터는 너무나도 먼 문제다. 지금은 졸거나 자는 아이를 깨우고 학생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감격해야 하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오후 섹션중의 하나인 제주대 진희종 선생님 강의였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초반부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앉는다. 나는 어느새 남(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以北)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 一五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詩人)은 두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四年) 동안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强者)다.
4년 동안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시인의 강성을 김수영은 위의 시처럼 표현했는데, 내가 진희종 선생님을 만나면서 떠오르는 싯귀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지난 가을 광주 518재단에서 주최하는 토론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처음 만났는데 몇 번의 술자리나 회의를 통해서 느낀 나의 주관적 감상이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가까이서 체험하셨고 4.3 제주 항쟁의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제주에서 토론을 무기 삼아 교육현장과 사회현실에서 꾸준히 길을 걷고 계신 모습에서 받은 인상이다. 전체 강좌에서 사회자가 소개하기로는 제주를 토론의 메카로 만들어가는 분으로 소개하셨는데 허언이 아니다.
이날 진희종 선생님은 ‘토론교육과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셨다. 이명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거의 파시즘 초입 단계로 한국사회가 타락했다고 여기는 나로서는 관심가는 주제가 아닐 수 없었기에 고민없이 선택한 강좌였다. 진희종 선생님의 강의 내용도 다 전해주고 싶지만 원고로 대신하고(궁금하시다면 경기도교과토론교육연구회 카페를 방문하시길) 서두에서 언급했던 노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도 올해 나이 오십, 노인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대다수의 원로나 노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노인의 이미지는 ‘꼰대’와 겹치는 순간이 많다.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사회구조, 웃 사람이 아랫 사람을 훈계하는 계몽의 패러다임 시대를 살아온 까닭이다. 꼰대는 사실 아버지나 선생님을 가리키는 속어인데 그러고 보면 나이든 선생은 이중적으로 꼰대의 숙명에서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대학 졸업 이후 지금까지 학교현장에서 몸담고 살아온 나도 삶의 목표 중 하나가 ‘꼰대되지-않기’이니 꼰대는 그리 만만히 볼 화두는 아닌 것이다. 들뢰즈 말대로 무엇-되기, 예컨대 동물-되기, 동성애자-되기, 소수자-되기, 장애인-되기 이런 수준의 긍정적 되기가 아니라 꼰대-되지않기, 이런 고민을 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삶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인=꼰대’라는 등식을 갖게 된 데에는 우리 시대의 노인들이 보여준 행태에도 책임이 없지 않다. 정도 차이가 있어서 모든 노인을 싸잡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노인=꼰대의 등식을 확산한 최대 공헌자로 ‘어버이 연합’을 들고 싶다. 가스통을 들고 온갖 민주의 현장을 휘젓는 고엽제 전우회와 더불어 자율적이고 평등한 의사소통 자체를 억압하는 만행이 어버이의 이름으로 횡행하는 비극이 곳곳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론교육 페스티벌이 벌어진 이날, 청년의 이름으로 한국사회를 사수하자는 명분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속해 있었던 ‘서북청년단’이 재건 창립 총회를 열었다. 그 어버이에 그 청년들이다. 미친 놈들! 아니 실수다, 친미 놈들!)
몇 해 전인가, 성조기를 들고 나온 그 노인들을 보면서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패러디 해서 쓴 시가 생각 났다. <수구,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인데 이 시에서 수구를 노인으로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십년 전 노무현 정권 아래서 국보법 폐지를 두려워하는 노인들이 시청앞 광장에 나온 걸 보고 쓴 나의 시다. 같이 읽어보자.
수구, 잔치는 끝났다
- 국가보안법 56년의 생도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2004년 10월 4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량 학살하던 그 날.
파란 하늘 아래
햇빛 부끄러운 줄 모르는 노구(老軀)들이 시청앞 광장에 섰다.
식민의 세월일랑 아랑곳 않고
양 손에 가득 성조기를 움켜쥔 친일파의 후예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성에 몸을 떤다
사립학교법과 국가보안법이
백성을 속이고 국민을 협박해온
최대의 무기였기에
이제 그 마지막 무장해제 앞에서 두려워진
자신들의 공포를 속이고자
마지막 남은 힘으로
힘없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쳐든다
월간조선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먹기 위해
다시 무기를 들자는 조갑제의 선정적인 선동과
북한인권과 자유를 위장해온 황장엽의 선전지가
쓰레기 되어 날리는 21세기의 거리에서
보안법과 사학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목사님의 눈도장을 찍으러온
신도들이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가고
점점 어두워지는 시청 앞 하수구 아래로
색깔의 거품은 서서히 힘을 잃는다
보안법의 마지막을 선연히 보여주는
수구의 잔치판이여
그대들의 기도가 하늘에 오르는 동안
겨레와 민족을 위해 피흘려온 우리의 영령들이
참된 조국의 미래와 진실을 알려주리니
그래, 물론 우리도 알고 있다.
수구들이 국가보다도 기득권을
자유보다도 돈에 눈 먼 자본주의를 더 좋아한다는 걸
그리고 진짜 열받을 땐, 멋있는!으로 시작하는 군가가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각목과 총칼을 휘둘러왔다는 걸······
국가보안법 56년
수구, 잔치는 끝났다.
물론, 박근혜 정권에 와서 수구들의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일베의 악행을 넘어 그들을 능가하는 서북청년단이 다시 발족되었으니 피의 잔치는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왜? 노인들은, 꼭 어버이 연합이 아니더라도 독재자의 딸이자, 새로운 불통정치의 길을 열어가는 박근혜를 지지할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모르다가도 알 것 같기도 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속으로 가보자. 한 남자, 루엘린 모스(조시 블로린)가 있다. 오랜 시간 잠복해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동물에게 총알을 날리는 사냥꾼. 사냥감은 보이지 않고 저 먼 고원 위에 불길한 죽음의 정령이 까마귀처럼 떠돈다. 그 아래는 물론 시체투성이다. 시체와 시체 사이, 돈가방이 있다. 뒤늦게 돈을 찾으러온 악당들으로부터 겨우 도망쳐온다. 이제부터는 살고 싶어도 살기 힘든 도망의 레이스가 펼쳐진다. 잘못되고 이상한 돈 곁에는 가까이 안가는 게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상책인데, 그는 이미 늦었다. 그러니 살기 위해 도망갈 수밖에.
악당이라고 다, 급이 같은 악당은 아니다. 악당들 가운데 진짜 고수는 하찮은 악당들을 벌레처럼 죽여버리고 악당의 진수를 보여주는 진짜 악당은 안톤 쉬거(하베이르 바르뎀)이다. 그가, 그를 쫓는다. 돈가방을 들고 사라진 사나이, 그가 표적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든, 어느 주유소 옆의 가게 주인이든 혹은 보안관 사무실의 여직원이든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죽을래 살래? 살고 싶으면 동전을 던질 테니 알아맞춰 봐,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은 누구인가? 자기 관할 지역에서 대형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찾아야 하는 사명을 띤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이다 그는 살인마를 잡을 능력이 있는지 영화를 통해서 알 수지만 어쨌든 사명감을 가지고 악당을 추적한다. 그는 노인 가운데 제대로 된 노인이다. 뒷북 수준이긴 하지만 그도 돈가방과 악당의 냄새와 흔적을 쫓는다. 도대체, 왜, 이런 알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가?
영화는 돈가방의 비극적 말로를 보여주고 악당의 아픔과 한계 또한 놓치지 않는다. 평생 돈가방을 지고 사는 이가 어디 있으며 악당도 밥은 먹고 살아야하는 인간 아닌가. 그래도 질긴 악당인지라, 사고를 당해도 살만큼 강하다는 게 악당의 특징이기는 하다.
이 영화는 2008년,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이다.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말은 영어 ‘No Country for Old Men’의 번역인데 원래는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따온 구절('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로, 정확히 말하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즉 노인을 돌봐주지 않는 나라가 원래 뜻에 더 들어맞는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국가가 노인을 위해 해주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좀 더 덧붙이자면, 제목의 노인이란 "오래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생각의 소유자"다. 만약 노인의 경험과 지혜대로 예측가능하게 흘러가는 사회라면 그 곳에서 노인들은 대접받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지혜로운 노인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인이 늘 우대받는 것도 아니다. 우연을 통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누군가 선한 의도로 행한 일이 곧 악몽이 되어 찾아오는 곳. (노인들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매일 일어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의 이치를 이 영화는 매우 담담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이 정도의 철학과 인생담이면 참 좋으련만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노인에게는 이런 지혜와 깊음이 없다. 너무 불신하는 건지 모르지만 식당이든 이발소나 사우나든 가는 곳마다 종편에 넋을 놓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진희종 선생님은 왜 이 영화를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언급했는가? 이 영화에 나오는 악당 안톤 쉬거의 살인 선택법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데 동전을 활용한다. 마주친 사람들에게 동전 선택을 강요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스산한 장면을 회상하자.
인적 드문 시골의 한 편의점이다. 오가는 사람 없고 주인 홀로 가게를 지키는데 살인마 안톤 쉬거가 나타난다. 묵직한 분위기의 기분 나쁜 손님, 주인은 손님이 물건을 샀으면 돌아가기를 바라는데, 손님은 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 동전을 던지고 주인에게 앞뒤를 맞춰보라 하는데 이거 왜 엉뚱한 짓을 하시나 하던 주인. 손님이 바로 죽음의 사자라는 예감이 팍 들면서 긴장하기 시작한다.
“동전을 던진다. 선택해. 앞인가, 뒤인가?”
이유 없다.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는다. 선택과 결과만이 있을 따름이다. 무작정 던져진 질문 앞에 가게 주인은 사색이 된다. 말 한 마디, 잘못된 대답에 따라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주인은 동전에 무엇이 나올지를 알아맞히어 목숨을 건진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안톤 쉬거와 마주쳐서 목숨을 건진 드문 사람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잊을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이 장면은 선택으로 강요된 민주주의의 한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이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으로 선택의 기준을 삼고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나라가 현재 민주주의를 잘 실현하는가와 연계해서 물음을 던져보자는 것이 진희종 선생님의 영화 소개 취지였다.
우리는 선거라는 제도와 방식을 통해 대표를 선출한다. 그나마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선택 방식은 과연 타당하고 합리적인가? 우리가 선택하는 그 기저에는 ‘권력에 대한 선망, 자본에 대한 욕망, 관료주의의 폐해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그릇된 습관’까지가 보이지 않는 손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이런 권력과 욕망과 관습에 의한 선택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은 악마같은 안톤 쉬거가 동전을 던져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문제의식이 현재 토론없이 흘러가는, 외피만 민주주의인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영화는 소개되었다. 그 뒤로 이어진 교수님의 강의는 대략 이렇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후퇴(최장집) 현상을 몇 가지 현실적 사례를 통해 제시했다. 수족관에 갇힌 고래 제돌이를 한 시민의 설득력 있는 제안과 공감, 여론 형성으로 바다로 돌려 보낸 사례를 먼저 소개했다. 바람직한 토론과 연론 형성의 긍정적인 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가뭄에 콩나듯 드물다.
세월호 사건 앞에서 침묵한 청와대, 종편인 JTBC가 언딘에 대해서 보도한 내용에 이의가 들어와 반론을 보도한 사례, 감사원의 4대강 발표의 허구성, 이명박 정부 시절 정연주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배임 혐의로 몰아냈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선고를 받은 사건. 이런 사건들을 통해 토론 없는 민주주의의 현실과 한계를 제시했다. 이런 일에 버금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마지막으로 토론의 윤리성을 강조한 글에서는 토론 교육에서 윤리성의 함양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했다. 사실에 대한 확인 없이 종편에 나와서 518 광주시민항쟁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남발하고(나와서 떠드는 사람이나, 방송사나, 방통위나 다 한통속이다!) 세월호 유족들의 단식 현장에서 폭식으로 인간을 조롱한 일베 현상에서 더더욱 책임있는 토론문화와 민주주의의 실현이 갈급함을 호소했다. 글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민주사회에서는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으면 ‘악마’를 숭배한다고 해서 제재를 가할 수 없다. 성숙한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나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한 의사표현의 수단이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 토론의 장에서 한 손에 칼을 쥐고 발언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진희종, 토론 교육과 한국의 민주주의
영화를 돌이켜보면 이 영화의 주제가 주는 마지막 외침은 그것이다. 아마도 냉혹한 살인자에 의해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을, 돈가방을 들고 도망친 사나이 모스의 부인이 살인마로부터 동전을 던지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던진 말이다.
“동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렇다 민주주의는 (마치 동전던지기와 다를 바 없는) 투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후보들 나왔으니 누구를 찍을래라고 던져지는 질문인 투표는 그 자체가 하나의 허구인지도 모른다. 자유당 시절부터 최근 국정원 댓글 사건까지 숱한 부정 선거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대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을 남에게 맡기는 대의제 자체가 실은, 가진 자와 힘센 자를 위한 제도로 전락한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무엇으로 밝힐 것인가. 바로 토론이다. 동전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 나의 말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 그게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일찍이 시인 나희덕은 이 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노인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새로운 악의 출현과 그 징후에 관한 영화다. 늙은 보안관 벨이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자장을 드리우고 있는 인물은 살인청부업자 안톤 시거다. “영혼을 결한 듯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들의 화신”이라는 한기욱의 표현처럼, 시거는 악의 실행자로서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의식도 없이 단호하고 냉철하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동기는 개인적 원한이나 순간적 충동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원칙이나 논리에 있다.
그런데 현실의 상식이나 도덕을 초월하는 이 원칙이라는 것이 철저히 우연성과 익명성에 기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자신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을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행위만 보더라도 시거의 살인 행각은 사이코틱하다. 모스의 아내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요?”라고 묻지만, 그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살인을 감행한다. 그것이 자기가 정한 게임의 룰이라는 듯, 무고한 사람들의 이마에 구멍을 내는 살인자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과연 이것이 미국만의 현실일까.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흉악범죄들을 보면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범죄의 표적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옛날에 복면을 쓰고 집안에 침입한 강도는 차라리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엘리베이터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이 갑자기 성폭행범이나 살인범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평범한 시민의 얼굴 속에서 언제 짐승의 얼굴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우연성과 익명성이라는 토양 속에서 악인의 얼굴은 선인의 얼굴과 구별되지 않는다.
<나희덕, 미친 소와의 싸움>
우연성과 익명성이 폭력적으로 던져지는 사회, 거기에 과연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파괴와 연관지어 보자, 시인이 언급한 안톤 시거의 자리에 누가 떠오르는가? 답은 생략하기로 하자. 슬픈 일이지만,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진짜 시거는,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윽!)
새삼스럽지만 링컨을 돌아본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나라는 이 땅에서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지구상에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국가가 만들어진 적이 있었는가? 사실 ‘국민을 위한’ 나라는 ‘국민에 의한’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국민에 의한 국가는 무엇일까? 4.19와 87년 민주항쟁 같은 시민혁명으로서만 가능한 것일까? 21세기인데? 오바마가 등장하고, 동성애자 결혼을 합법화하는 주가 늘어나는 미국을 보아도 그 나라는 아직도 흑인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 하물며 우리 나라에랴.
구태여 우리나라의 고령 노인 복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까? 비단 노인 뿐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아래 하루 두세 명씩 스스로 몸을 던지는 학생들, 각종 사건 사고 속에서 피의 생명을 잃어가는 무수한 죽음의 그림자가 대한민국을 덮고 있다. 과연 국민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대한민국은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나라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이 강의를 듣는 내내 이어졌다. 흥분을 말자. 성토가 민주주의를 불러오지는 않는다.
놀랍게도! 강의의 결말은 의외로 낙관적이었다. 토론 없는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의 현주소가 지금이라면 우리 세대가 토론을 교육하고, 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성장한 이십년 뒤에는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을 거라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었다. 물론 의문과 반박도 있었다. 무슨 근거로? 아마 거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를 명징하게 알 수 있다면 그는 신일 테니까. 내 생각은 그랬다. 누구 말대로 교수님은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는 거’로구나 하고 말이다.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토론이 가지고 있는 로고스와 에토스. 그 이성과 윤리의 힘으로 세상은 나아질 수 있다는 단단한 희망을 가지고 계신지도 모른다.
강의 말미에 다양한 문답이 오갔다. 토의와 토론의 차이에 대한 여러 견해, 국민들의 분별력은 있을까 없을까에 대한 지적 등등. 그 가운데 토론교육 활성화가 민주주의의 초석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왜 토론교육 활성화에 제동을 걸지 않을까에 대한 우스운 질문도 있었다. 사회자의 위트있는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그녀가 무식해서 토론의 힘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과연 그럴까?
박근혜 자서전에 보면 유럽에서 유학생으로 보내던 젊은 시절, 그 나라 토론 교육과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폭력과 사고로 점철된 군인과 학생 문제 해결을 위해 토론과 인문학을 강조한 적도 있다. 물론 유체이탈 화법의 그녀가 한 말 속에서 진정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문제는 여전히, 아니 한 번도 근대 역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 한 순간이라도 ‘노인을 위한 나라’가 만들어진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의 대답을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은 결코 단 한 번도 ‘국민을 위한 나라’이거나 ‘시민을 위한 나라’인 적이 없다. 국가는 국가 자체만을 위할 뿐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국가라는 국민 통치 기구를 만든 자본과 권력의 본심이고 속성이다.
토론의 발전을 위한 논의는 뒤풀이 자리로 이어졌다. 그날 토론회에 대한 다양한 소감과 평가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교육사에 남을 뜻깊은 행사라는 칭찬이 많았다. 동의한다. 그리고 이 행사를 치르기 위해 애쓰신 선생님들의 노고에 손뼉을 쳐드리고 싶다.
하수정 선생님의 질문에 진희종 선생님이 답한 질문이 하나 있다. 토론 교육의 네트워크에 대한 질문이었다. 교사들이 현장에서 노력하고 발로 뛰면서 만들어진 성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게 매우 더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시였다. 오바마의 예를 들었다. 뉴욕 시장 한 사람의 힘으로 순식간에 교육이 바뀌는 걸 보면서 자기가 나서기로 했다고, 만약 우리나라 토론교육도 누군가가 같이 끌어준다면 변화 속도가 빨라지지 않겠느냐는 문제제기였다. 박보영 선생님께서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을 하셨다. 상명하복의 대한민국에서 위로부터 강제된 개혁은 늘 실패해왔기 때문이라고. 진희종 선생님의 답은 이랬다.
“큰 빌딩을 세우려면 땅을 넓게, 그리고 깊게 파야한다. 토론 교육이 더 크게 진정으로 발전하려면 토론 교육의 영역이 더 넓어지고, 토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더 깊은 고민과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연대가 필요하다. 수직적 조직과 기구보다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힘에 기반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져야 토론교육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
모두가 공감하면서 마음 속에 하나의 숙제와 작은 희망의 불씨를 키웠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로 이 글의 막을 내리자.
버드 비숍여사(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追憶)이
있는 한 인간(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김수영, 거대한 뿌리
버드 비숍여사 대신에 ‘토론’을 알게 된 뒤로는 우리들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을까! 토론을 알게 된 뒤로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과 추락하는 민주주의가, 더러운 역사와 전통이 두렵거나 미워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토론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교육도 그렇다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괴기영화(怪奇映畵)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거대한 뿌리)‘이라는 상상력으로 민주주의를 꿈꾼 김수영의 정신이 그립다. 그런 날이 올까? 토론이 한국 교육을 바꾸는 거대한 뿌리가 되는 날이? 낙관도 비관도 말자. 우리는 단지 묵묵히 걸을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들의 노력과 실천으로 토론이 한국 사회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면 20년 뒤의 한국사회에 민주주의가 꽃필 거라는 진희종 선생님의 낙관은 현실이 될 것이다. 토론을 사랑하는 우리는 지금 바람에 날리는 민주주의의 씨앗이다. 황사와 박토를 두려워말고 한 걸음 더, 한 걸음!
- 이날 경기도교과토론수업연구회 선생님들의 토론교육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노력이 거대한 뿌리의 앞길을 예감하는 알찬 자리였음을 20년 뒤의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가 기억하고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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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손님으로서 첫 글을 올려 송구합니다만, 토론을 사랑하는 전사의 한 사람으로 인사 겸 올립니다. 더불어 함께 나누는 토론과 수업에 대한 고민들이 고독한 학교에 소통의 인터스텔라를 만들어나가는 교육의 블랙홀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경기도교과토론수업연구회가 우리나라 토론교육의 메카로 발돋움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으며, 좋은 자리 마련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 자~ㄹ 읽었어요^^ 유동걸 샘이랑 만난 지가 오~래 됐지만 그 내면의식은 잘 몰랐는데, 이 글로 알게 되었네요. 그 의식이 나하고 같네요, 정말로. 그런 점은 진희종 교수와도 같고. 서로가 잘 알게 된다는 것이 정말 세월이 필요하네. 스웨덴 총리 Tage Erlander가 국민들을 20여년간 설득하여 복지국가를 만들 것이 생각나네요. 토론도 그렇게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 듯. 좋은 글 잘 읽고, 감명이 큽니다! (김배홍)
유동걸 선생님이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애린 닉네임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평소 부드러운 '말'과는 달리 이번 '글'을 통해서 어떤 성찰과 고민들을 그동안 해오셨는지 알겠습니다. 역시 '토론의 전사'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진희종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과 글로서, 논리 언어로서, 폭력을 막아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토론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언어로서 소통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언어의 한 형태인 토론에 대해서 특히, 토론이 가진 정신에 대한 깨달음이 가슴을 울립니다. 함께 나가는 연대의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감사합
유동걸 선생님이 느끼시는 소통 불가능의 시대에 대한 아픔을 함께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긍정적인 낙관주의자, 유연한 창의성을 가진 자가 세상과 사회를 바꾼다'는 말에 토론과 함께하는 유쾌한 서사적 인간, 돈키호테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꿈꿔봅니다. 김수영의 세상을 향한 예리한 비판력을 온몸으로 휘감싸안으면서도 나를 비출 수 있는 상대, 이쪽 편과는 다르게 저쪽에 서 있는 그대들! 그 또한 인정해 나가며 소통해 나가는 민주주의를 꿈꿉니다. 학교의 혁신을 꿈꿔봅니다. 유동걸 선생님! 더욱 자주 뵙게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