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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구술 전사(상권)
<별첨:제5중대장의 전투 수기>
안케패스 작전시 제5중대의 전투
기갑연대 제5중대장 대위 안영소
1. 안케패스 작전에 참가
당시 제5중대는 한손산과 빈케군(군청 소재지) 그리고 사이콘강이 동서쪽으로 흐르는 지역일대의 4개의 촌락을 책임지역 내에 두고 있었다. 1972년 4월경, 지역 내에서는 지방 베트공은 중대주변 P.F와 밀고 밀리는 전투를 하고 있었으며 기지 주변상황도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중대장은 F.O로 하여금 포지원 요청하여 한손산 하단 적 은거지역 및 예상 은거지역에 산발적으로 포사격을 가했으며 중대원들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하여 야간에 1일 2~3회씩 비상 훈련과 병행 실사격 훈련을 실시하며 주간에는 충분한 휴식과 오락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돋았으며 소대장, 선임 하사관은 앞으로 있을 상황에 대비 전투력 점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있었다.
이때쯤인 4월초 제5중대는 번개25호 작전을 위하여 출동했으나, 안케패스 지역의 상황이 악화되어 출동하다말고 중간에 복귀하여 제6중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So Do산의 기지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날이 D-1일인 4월 14일이다. D일(4월 15일)을 기해 출전하도록 명령받은 나는 부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불러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고, 잔류 병력과 기지경계에 대해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D일(4월 15일) 10:00시에는 기지 잔류 병력을 제외한 출동 전 병력의 군장검사를 막사별로 실시하였다. 그런데 출동 명령 시간이 늦어져 13:20분경에야 헬기가 도착하였다. 선발대로 지정된 제2소대(중위 김성곤)로부터 소도산 렌딩지점으로 출발시켰다. 중대장은 본부와 함께 2진 헬기에 탑승하여 소도산에 렌딩하였는데, 렌딩 직전 적 57㎜ 무반동총의 포탄이 헬기 밑으로 수없이 날아왔다. 조종사는 불의의 기습에 놀란 듯 부대를 지휘해야할 중대장을 태운 채 푸캇 비행장으로 회항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시간이 지체하여 3진과 4진이 소도산에 렌딩한 것은 16:20분이 넘어서였다.
2. 제6중대 구출작전
소도산에 도착 완료하였음을 보고하자, 곧 공격을 개시하라는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제5중대는 390고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16:30시경에 소도산의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여 390고지까지의 중간목표인 무명고지를 향해 선두 제2소대, 제3소대 본부 및 화기소대, 제1소대 순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17:00시경 제2소대장은 경미한 적(1~3명:분견대로 판단)의 저항을 물리치고, 아무런 피해 없이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대대장에게 중간목표 점령상황을 보고하면서 지금이 너무 늦은 시간임으로 390고지는 명일 오전에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에 따라 제3소대장(중위 이강열)에게 390고지를 향해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18:00시경 제3소대는 390고지 5부 능선에 도달하였으나, 적의 저항은 없었다. 즉시 제1소대장(중위 권성진)으로 하여금 390고지 우단에 위치한 무명고지를 제3소대와 병행 공격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당시에 중대장인 본인은 제2소대가 탈취한 중간목표(목표인 390고지와 직선 거리 약 800m)에 위하고 있었다. 제3소대 제1분대가 약 7부 능선에 도달했을 때,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적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육안으로 식별). 적의 저항은 완강했다.
즉각 제3소대장과 제1소대장에게 4~5부 능선의 은폐 및 엄폐 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여 피해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함과 동시에 공격대형을 재정비하여 계속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을 즉시 대대장에게 보고하였으나, 대대장은 390고지를 즉시 점령 완료한 후 보고하라는 명령뿐이었다. 19:00시경 중대는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역시 헛수고였다. 첫 번째 공격에서 병사 1명이 전사하였다. 당시 적의 규모는 390고지에 2개 분대, 그 우측 무명고지에 1개 분대로 판단되었다. 시간상으로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는 대대장에게 명일 공격할 것을 다시 건의하였다.
이때는 어쩔 수 없었던 대대장이 나의 건의를 승인하고, 명일 여명에 다시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각 소대장에게 매복에 적합한 지형을 선정하여 크레모아를 충분히 설치함으로써, 적의 야간역습에 대비하고,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두었다. 중대가 매복을 완료한 것은 거의 21:00시경이었다. 중대장은 소대장들에게 명일 전투에 차질이 없도록 지시하고, 고립되어 있는 제6중대장과 무선교신으로 제5중대가 바로 옆에서 너희 중대와 손을 잡을 찰나에 있으니, 대원들을 안심시키라고 하였다.
D+1일 4월 16일에는 새벽 04:00시, 대대로부터 독촉이 시작되었다. 중대는 04:30분을 기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06:00시부터 적과 접전은 계속되었다. 예상외로 적의 저항은 더욱 완강한 듯 하였다. 적은 어제보다도 약간 증강된 듯 하였다. 09:00시경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4월에 내려 쬐는 햇살은 아침부터 뜨겁게 작렬했다. 목이 타고 온몸은 땀이 비오듯했다. 10:00시경 중대장은 제3소대, 제1소대를 휴식시키면서 제2소대장에게 제3소대와 임무 교대를 명하였다.
12:00시경에는 휴식중인 제1소대에게 제2소대 병진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어서 13:30분경에는 제1소대가 390고지 우측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으나, 제2소대가 공격하고 있는 390고지의 상황은 진척이 없었다. 당시 연대장은 390고지 점령이 늦어지고 있다고 성화가 빗발치듯하였다. 목표를 앞에 두고 점령 못하고 있는 중대장의 입장은 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중대가 보유한 탄약도 바닥이 나고 있었다. 중대장은 탄약 보급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헬기 추진 보급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화기소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소도산으로부터 도보로 운반해 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후까지 전투는 계속 되었으나, 상황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포병의 지원을 요청한 후 제2소대와 제1소대를 390고지로부터 충분히 이격하여 고지의 하단부로 철수시켰다. 이때 제1소대가 점령한 390고지 우측의 무명고지는 포목선상에 위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350고지로부터 약 5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원들의 안전상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병의 TOT는 시작되었다. 350고지와 무명고지를 목표로 동시에 실시하였다. 16:30분경 포병의 지원사격이 끝나고 제3소대로 하여금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2소대는 만일에 대비 무명고지에 지원사격 및 의명 공격 준비를 시켰으나, 무명고지에서는 아무런 저항을 발견할 수 없었다. 18:20경 공격 중이던 제3소대장(중위 이강열)이 전사하였다. 제2소대로 하여금 제3소대와 즉시 임무를 교대를 시켰으며 제1소대는 제2소대 임무를 수행케 하였다.
그러나 제2소대의 공격 역시 전사자만 1명을 냈을 뿐 별 성과가 없어, 19:00시경 병력을 철수시켰다. 포병의 지원사격은 밤을 새워 390고지와 무병고지에 계속되었다. 제6중대장은 견디기가 매우 힘든 모양이었다. 당시 제5중대도 제6중대도 물 보급이 전혀 없어서 병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는 듯 하였다.
파월 전 제3사단 제23연대에서 나는 제5중대장을 제6중대장 정태경 대위는 제7중대장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연대와 사단에서는 그림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사이였다. 이때 제6중대장은 나에게 무전기를 통해 유언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제5중대장이 살아서 귀국하거든 나의 부인과 딸에게 ‘아빠는 전장에서 비겁하지 않았으며,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노라’고 전하여 달라”면서 군가 ‘진짜 사나이’를 불러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제6중대장에게 “내일은 제5중대가 너희들을 틀림없이 구출할 것이다”고 위로는 하였으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였다.
D+2일, 4월 17일이 되었다. 작전 3일째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무거운 마음으로 제2소대장에게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하루 종일 공격을 하여도 별 효과가 없었다. 이때 연대장(대령 김창열)으로부터 최후의 통첩을 받기에 이른다. “만약 이번에 목표를 점령하지 못 할 경우,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면서 어떤 지원이던지 요청하라기에 재빨리 항공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항공지원 문제는 사단으로부터 쾌히 응낙을 받았으나, 잠시 후 주월사 작전통제본부에서의 회신은 “적과 제5중대간의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지원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중대의 모든 안전대책은 중대장이 책임을 지고 충분한 대책을 강구하겠으니, 지원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17:00시경 항공지원을 해주겠다고 통보를 받자마자, 팬텀기 2대가 중대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G-3 Air로부터 중대위치에 연막을 피우라 하여 적색 연막을 피우자, 390고지의 적은 청색연막을 터트렸다. 이때 적들이 사용한 청색연막은 제6중대로부터 노획하였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선회 중이던 항공기는 색깔을 잘못 오인하고 적색연막을 피운 제5중대 고지로 내려꽂기 시작하였다. 나는 급히 G-3Air를 호출하였으나, 교신이 잘 안 되었다. 순간 비행기는 네이팜을 중대상공에 떨어뜨리고 상공을 이탈하였다. 병사들에게 “능선 반대 방향과 호 속으로 신속히 피신하라”고 명령 후 나 자신도 피신하였으나, 다행히 폭탄은 중대 OP 우측 하단 150m 지점에 낙하되었기 때문에 피해는 경미한 화상을 입은 병사가 몇 명 나오는데 그쳤다. 이때 상공에서 항공기를 유도하던 G-3 Air는 이를 즉시 간파하고 2번기에 공격중지 명령을 하달하였는지, 그대로 상공으로 이탈하면서 날개를 좌우로 흔든다. 1번기 역시 미안하다는 듯 날개를 좌우로 휘저으며 중대 상공을 지나갔다. 다시 진입한 2번기는 적진지 하단부 50m 지점을 정확히 강타하였다. 17:00경에 1번기와 2번기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갔다.
이제 연대장이 나에게 공격을 독촉해왔다. 특공소대를 편성하여 공격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특공소대장에 제1소대장(중위 권성진)을 임명하고, 특공소대 선임하사관으로 제2소대 선임하사를 임명하였으며, 각 소대에서 1개 분대씩을 차출하여 특공소대를 편성하였다. 이어서 소대장과 선임 하사, 그리고 분대장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부여해 줄 것을 연대장에게 건의하여 특공대원들이 듣는 자리에서 허락을 득 하였다.
특공소대원들에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시하였다. “적은 이제 아군의 집중포화와 우리들의 집요한 공격. 그리고 항공기의 폭격으로 거의 전멸되었거나 도주하였으며, 있다 하더라도 며칠간의 고립전투로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다. 잘만 하면 생포마저 가능할 것이다. 너희 특공소대가 목표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제 마음놓고 공격을 감행하라. 아울러 전장에서 용감한 자는 살아남을 수 있되, 비겁한 자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목표를 점령하면 너희들은 390고지 및 안케 전투의 영웅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중대도 물 보급이 없어 굉장한 곤란을 느끼고 있을 때였음으로, 중대장은 전 중대원의 물을 수거하여 특공소대에 공급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다소나마 북돋아 주고, 일일이 악수를 청하면서 무운을 빌었다.
D+3일 4월 18일 새벽 05:00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08:30분경 특공소대는 5부 능선까지 진출하였다. 09:30분경 소대는 7부 능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적의 저항은 없다. 소대가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보인다. 수류탄을 일제히 투척하면서 돌격을 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선다. 대대와 연대에서는 독촉이 성화와 같다. 소대는 일부의 저항을 받는 듯 하였다. 소대장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며 일일이 무엇인가 대원들에게 지시하는 듯 하는 모습이 보인다. 소대장을 무전으로 호출하여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공격을 위해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수류탄을 일제히 투척하면서 공격할 듯 하더니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1시간 여가 흐른 뒤, 내가 소대장에게 ‘중대장 직접 가겠노라’ 하면서 호통을 쳤다. 내가 출발하려고 장비를 챙기고 화기소대의 일부를 지휘하여 떠나려 할 때, 고지에서는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고 소대장과 선임하사를 선두로 목표정상을 향하여 돌격을 감행하면서 무전기에서는 목표 점령을 알리는 소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때가 11:00시경이었다.
제2소대를 390고지에 위치시킨 후, 전 중대를 390고지로 이동시켜 진지를 강화하게 한 후, 목표 점령을 대대에 보고하였다. 이어서 특공소대장에게 제6중대와 연결을 명령하고 중대원들에게는 적의 역습 포격에 대비하여 호를 구축하고 경계에 임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제6중대장과 교신으로 ‘390고지에 제5중대가 있다’고 전하면서 “특공소대가 통로를 개척하면서 제6중대가 있는 낙타봉으로 갈 터이니, 임무는 제5중대 특공 소대장에게 인계 후 390고지로 올라 오라”고 협조하였다.
목표 점령 30분쯤 지났을 때, 별안간 적의 82㎜와 122㎜ 포탄이 정확하게 390고지정상에 10여 분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낙하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전 중대가 이미 호를 구축 완료하고 대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피해는 전무하였다. 이때야 비로소 야전축성의 중요함을 알았다. 목표점령 후 확인결과 고지의 정상 8~9부 능선에는 원형 철조망(아군용)을 겹겹이 설치 돌격부대의 장애물이 되었으나, 수많은 수류탄의 세례 및 집중포화로 산산이 끊겨져 있었다. 그리고 특공조가 공격할 때에 있었던 적의 저항은 단도사격조에 의한 최후의 발악인 듯 하였다. 여러 구의 시체는 매장하여 주었고, 노획된 문서는 대대로 후송 조치하였다. 이어서 제6중대와 연결함으로서 제6중대의 구출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제6중대장은 부상으로 후송하였고 잔류병력 2개 소대는 제5중대가 작전배속을 받아 지휘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간간이 적의 포탄이 낙하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OP에 청취병을 배치하였으며, 포 소리를 파악하고 동시에 고함을 질러 호 속으로 피신하게 하였다. 중대의 방어 배치는 390고지를 중대 OP로 하여 화기소대를 배치하고, 제6중대가 고립되었던 낙타봉의 2개의 무명고지는 제1소대와 제2소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390고지의 우측 무명고지는 제6중대 1개 소대로 점령, 경계에 임하면서 휴식과 전장정리 및 재편성에 들어갔다.
3. 제2중대의 후속지원과 무명고지 공격
D+4일인 4월 19일이 되었다. 우리중대가 점령한 390고지는 638고지를 한 눈에 환히 볼 수 있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638고지의 상황을 수시로 관측하여 상급부대에 보고하면서 상황을 전개해 나갔다. 14:00시경 별안간 수없이 많은 포탄이 떨어져 중대 F.O가 참호 속에서 직격탄을 맞아 전사를 했다. 포탄의 파편으로 한쪽 눈을 실명할 뻔했으나, 다행히 눈썹 바로 위에 박혀 자국만이 얼룩져 있다.
D+5일인 4월 20일은 제26연대 제2중대가 390고지에 렌딩하여 638고지와 390고지 계곡의 적을 섬멸하기 위해, 제2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임한다는 연락을 받고 390고지에 렌딩한 제2중대장과 손을 잡았다. 그때의 시간이 16:00시였다. 제2중대장에게 그 기간의 작전 상황을 세밀히 말해 주면서 전투의 양상을 설명하였다. 제2중대장은 17:00시경 대대장으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았다. 이때의 명령은 제2중대가 낙타봉 계곡을 경유, 무명고지 “다”로 공격하며, 제5중대는 제2중대와의 긴밀한 협조로 작전을 엄호하며, 대대와의 무선교신을 중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워낙 깊은 계곡이라 대대와 제2중대간에는 무선교신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전이 개시된 19:00시경, 계곡에서는 간간이 총성과 수류탄 폭발하는 광음이 울렸다. 몇 명의 적과 교전 중이었으나 별 피해는 없었다. 20:00시경 요란한 총성이 그칠 줄 모르며, 계곡하단이 요란하였다. 제2중대장을 호출하였으나 무전병만이 응답할 뿐 중대장의 위치를 분간할 수 없다고 한다. 얼마 후 중대장의 긴박한 목소리가 나온다. 상황을 분간하기 어렵다고 한다. 대대장은 제2중대와 연결 안전한 위치까지 끌어내라고 하여 중대는 30여 분만에 제2중대 선두를 만나 낙타봉 중턱(5~6부 능선)에 매복진지를 선정하여 밤을 새웠다. 제2중대는 명일 다시 “다” 고지로 공격 점령할 임무를 띄고 작전에 돌입한다. 중대 OP에 수없이 포탄이 작렬하여 2소대장(중위 김성곤)과 분대장 1명이 부상을 당하여 후송된다.
D+6일인 4월 21일 오후 제2중대는 무명고지 “다”를 점령한 후, 계곡의 잔적을 계속 소탕하였다. 그러나 다시 강력한 적과 조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명에 의해 기지로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때 제5중대는 대대로부터 다시 제2중대의 임무를 인수받아 작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90고지는 제6중대의 2개 소대에 임무를 인계한 후, 신임 소대장 2명을 보충 받았다. 나는 중대가 수색할 계곡과 제2중대가 점령하였던 “다” 고지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상황을 판단한 결과, 소규모의 적이 은신하고 있음을 간파한 후 충분한 포병사격을 지원 받았다.
D+7일인 4월 22일 제5중대는 전투경험이 있는 제1소대장을 “우”, 고참인 제2소대장을 “좌”, 제3소대를 예비로 하여 무명고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2:00시경 적과 교전 끝에 목표를 점령하였으며, 많은 문서를 노획하여 후송하였다. 당시 638고지를 점령했던 제4중대(중대장 대위 박영희)가 다시 고지하단 계곡을 수색을 하면서 우리 중대와 연결작전을 실시하여, 작전 개시 4시간만에 잔 적을 소탕하면서 작전을 성공시켰다.
중대는 무명고지 점령 후 3일간 계속 주변계곡을 수색하면서 아군의 시체(제2중대 병력으로 판단)를 이용하여 수많은 부비트랩을 설치하였으나, 제5중대의 노련한 병사들이 여기에 말려들지 않고 한 사람의 피해도 없이 이를 조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부비트렙을 슬기롭게 조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피와 땀을 흘리면서 쌓은 훈련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작전중 소대장과 FO, 2명의 병사가 전사하였으나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중대가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들의 영혼의 명복을 빌며, 2명의 부상한 장교 및 전 장병의 값진 노력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별첨:제3대대장의 전투 수기>
안케패스 19번도로 개통 작전
기갑연대 제3대대장 중령 최승철
1972년 맹호사단 기갑연대 제3대대장으로서 월남전에 참가시 그 치열하였던 안케패스의 638고지 탈환 작전에서 19번 도로 개통의 임무를 띠고 참가하였던 전투 경험을 그로부터 만 12년이 지난 지금 기억을 더듬어 하나의 수기로 남기고자 한다. 다만 10여 년간의 세월이 지났으므로 작전 상황 전개의 정확한 시간은 분명치 않으나 오로지 그 당시 직접 겪고, 듣고, 느꼈던 일들을 기억을 되살려 거짓 없이 솔직히 기록함을 부언한다.
1. 안케패스 작전 개시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한 후 7년이 경과한 1972년 4월 11일 아직 날이 밝기 전인 05:00시경 한국군 전술지역의 최일선 경계선에 위치한 맹호사단 기갑연대 제1중대 전술기지에 월맹정규군 1개 분대가 세이파 공격을 감행하여 왔다. 이들은 제1중대 기지 주변에 3중으로 설치된 전술철조망 중 제1선 및 제2선 철조망을 은밀히 통과한 후, 농도 짙은 안개 속에서 마지막 제3선 철조망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 마지막 제3선 철조망만 은밀히 통과하면 적은 기지 내로 잠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의 후속 특공병력이 속속 제1중대 기지 내로 잠입한다면 제1중대 기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 긴박한 순간이었다.
때마침 기지 내에서는 선임하사가 손전등을 손에 들고 초소를 순찰 중에 있었으며, 바로 적 특공침투조 바로 앞에 있는 벙커에 도착하여, 초병이 졸고있는 것을 발견하고 초병을 깨운 후 주의를 주다가 벙커 전방에 이상한 느낌이 있어 손전등으로 총안구 전면을 비쳐보았으나, 짙은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후 얼마 있다가 다시 미심쩍은 감을 느껴 또다시 손전등을 총안구를 통해 전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짙은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움직이는 물체와 함께 설치되어 있던 조명지뢰가 터지면서 주위가 순식간에 대낮같이 밝아지자, 벌거벗은 3명의 적이 우왕좌왕하고 있음이 목격되었다.
동시에 이를 발견한 초병의 M16 소총이 즉각 불을 뿜었으며, 이로서 제2선 철조망까지 뚫고 침투한 적병 3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다. 그리고 제1선 철조망 직 전방에 그리 크지 않은 암석이 있어서 바로 그 뒷부분이 평소 벙커에서 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직사화기의 사각 지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는 항상 크레모아를 설치하여 놓고 있었는데 그 암석 뒷부분이 의심스럽게 생각된 경계병이 그곳의 크레모아를 폭파시킨 후 날이 밝기를 기다려 탐색을 실시하여보니 그곳에서도 암석 뒤에 은신해 있다가 폭파한 2명의 적 시체를 발견하였다. 이로
19번 도로 개통작전
서 벌거벗고 침투해 온 적 5명 전원을 사살하는 것을 시초로 그 치열하였던 안케패스 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적은 이전에도 아군기지에 대해 세이파 공격을 가할 때는 흔히 벌거벗고 무기만 휴대한 체 침투하여 왔는데, 그들이 이와 같이 벌거벗고 침투하는 이유는 침투 중 물체나 장애물에 부딪쳐도 소리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피부의 감각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으며, 또한 아군이 발견하기 힘든 장점 때문이었다. 적의 기도는 특공침투조를 제1중대 기지 내로 침투시켜 내부 교란을 일으킨 후 일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기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침투조의 실패로 기습공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단 주춤한 듯하더니 수 시간 후부터 화력에 의한 공격을 제1중대 기지에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15일간이나 지속된 그 치열하였던 안케패스 작전으로 불리는 638고지 탈환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638고지는 제1중대 기지 바로 뒤쪽에 위치한 보다 높은 고지로써, 제1중대 기지로부터 약 200m정도 떨어져 있고, 또한 제1중대 기지보다 불과 약 50m정도 약간 높은 고지였으며 제1중대 기지를 감제 관측할 수 있는 동시에 주변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였다. 이어 따라 제1중대는 오래 전부터 그곳에 약 반개 소대 규모를 파견하여, 진지를 구축함으로써, 638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주월 사령부의 소대훈련 강화지시에 따라 중대장이 소대훈련 점검에 대비할 목적으로 약 1개월 전에 638고지에 파견하였던 병력을 중대로 철수시켰으며, 철수시 그곳에 구축하였던 진지를 파괴하고 공사자재는 그대로 방치한 상태로 638고지의 경계를 등한히 하였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월맹군은 작전개시 훨씬 전에 이미 638고지를 은밀히 점령하여, 며칠을 두고 그곳에서 아군이 사용하다가 파괴 또는 매몰한 공사자재를 이용하여 638고지를 요새화하고 작전개시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배치된 적은 월맹군 제3사단 제12연대의 일부였으며, 이들은 특수 부대로 증강된 연대규모로 안케패스에 출현하였고 19번 도로를 완전 차단할 목적으로 아군에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2. 19번 도로
19번 도로는 월남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국도로서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으며, 항구 도시인 동쪽 퀴논에서 월남군 제2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중부 고원 지대 프레이크를 거쳐 북쪽 콤툼으로 뻗어있는 한편 프레이크 직전에서 분리되어 인접국인 캄보디아의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영토로 뻗어있는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로였다. 이 때문에 월남군 제2군단의 사활이 걸려 있는 주 보급로로서 피아간에 19번 도로의 확보는 전승에 직결되는 큰 의의가 있었다. 적이 기갑연대의 제1중대 기지를 공격한 이유는 제1중대 기지를 장악함으로서 안케패스 고갯길의 정상부분을 장악할 수 있으며 안케패스를 넘어가는 19번 도로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경우에는 프레이크지역의 월남 제2군단 병력을 완전 고립시킬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 때의 시기는 월맹의 춘계공세로 월남군이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해안지대의 북쪽 후에 지역에서 계속 월맹군이 남하하고 있었으며, 중부 고원지대의 콤툼 지역 북방에서 월남 제2군단이 심각한 압력을 받고 고전 중에 있을 때였다. 프레이크에 위치한 월남 제2군단에 이르는 보급로는 오직 19번 도로 하나뿐이었으며, 월남 제2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식량, 탄약, 유류, 장비 등 각종 보급품을 적재한 차량이 매일 130대 내지 150대가 수송제대를 형성하여 19번 도로를 통해 안케패스를 거처 프레이크로 넘어가고 있었다. 퀴논항에서 적재된 각종 보급품은 안케패스 산록까지는 평범한 저지대의 연속이어서 적으로부터의 대대적인 기습은 없으나 안케패스 산록에 이르러서는 중부 고원 지대로 이어지는 고갯길의 능선과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무성한 수풀 사이로 해발 500m를 넘는 높은 지대까지 계속 올라 가야하는 긴 애로이어서 적의 대대적 기습이 가능한 대단히 취약한 곳이었다. 이 안케패스의 산록에서 산정까지의 굽이진 고갯길이 바로 안케패스이며 베트공 및 월맹 정규군의 매복공격이 수시로 발생하는 위험 지역이다. 따라서 매일과 같이 통과하는 군수물자 수송제대에는 선두, 중앙, 후미에 상당수의 경계병이 호송임무를 띠고 이동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전술 지역이 동으로는 바닷가에서부터 서로는 안케패스의 정상까지로 되어있어 취약한 안케패스가 한국군의 책임 하에 있음으로 평소 안케패스 경계를 위해 19번 도로에 연해서 안케패스 하단부에 1개 소대의 기지가 있고, 중간 부분에 또 하나의 소대기지가 있으며, 그리고 안케패스 정상에 제1중대 기지가 있어 안케패스 경계임무는 바로 제1중대 책임 하에 수행되었다. 우리는 이들 소대기지를 기억하기 쉽도록 하단부의 소대기지를 백두산 기지로 불렀고, 중간의 소대기지를 지리산 기지로 부르고 있었으며, 안케패스 정상의 중대기지를 소도산 기지로 부르고 있었다.
3. 월맹군의 19번 도로 폭파
적은 1972년 4월 11일 제1중대 기지에 대한 세이파의 공격개시와 때를 같이하여 안케패스의 7부 능선 정도에 위치한 19번 도로상의 계곡을 돌아 나오는 구석진 곳을 강력한 도로대화구로 폭파하여 도로를 완전 차단하고 그 부근에 진지를 구축한 후 은거하고 있었다. 이는 전투지역인 아군 제1중대 기지로 병력의 투입 및 각종 추가 보급품의 수송을 차단할 목적에서였으며 따라서 적은 이곳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지리산 기지와 제1중대 기지로부터 대략 중간쯤 되는 곳이며, 양쪽 기지에서 공히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이고, 강우시 도로 위쪽 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물이 도로 밑에 매설한 암거를 통해 도로 아래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곳이다. 여기에는 강우시 많은 계곡 물을 처리하기 위해 대형 암거 2개가 약 30m간격을 두고 매설된 곳인데 적은 그중 하나의 암거 속에 강력한 폭약을 넣어 폭파시킴으로서, 그 위에 있던 흙이 전부 날아가 도로 절단에 성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번 도로는 길이 약 3m 폭 약 5m 정도로 절단되고 말았다.
이곳이 지리산 기지에서 바라볼 때 위쪽이 되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곳을 서쪽 강점이라 불렀고 여기에 월맹군 약 1개 중대가 그 주변에 포진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지리산 기지와 백두산 기지 중간쯤 되는 구석진 곳에서도 적 약 1개 소대 규모가 포진하여 19번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이곳 역시 지리산과 백두산 양 기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이며 도로는 폭파하지 않고 다만 병력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리산 기지에서 볼 때 아래쪽이며 동쪽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를 동쪽강점이라 불렀다. 따라서 동쪽강점 및 서쪽강점 공히 아군의 기존 기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이며 적은 이러한 아군의 취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19번 도로를 상하에서 차단하고 있었음으로 지리산 기지는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육로에 의한 병력 보충이나 보급 추진을 전혀 받을 수 없게되어 오로지 헬기에 의한 공중 보급에 의존하게 되었다.
4. 제11중대 출동
4월 11일 안케패스의 19번 공로가 폭파되어 제반 교통이 두절되자, 연대는 안케패스 정상 19번 도로 변으로 연대 수색중대를 헬기로 급파하여 19번 도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하향식 주간수색을 실시케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연대 장갑차 1개 소대로 하여금 19번 도로를 따라 안케패스를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수색케 하였다. 이에 따라 연대 수색중대는 증강된 수색소대로 하여금 도로 폭파지점을 향해 약 800m가량 내려가던 중 19번 도로가 긴 능선 끝을 돌아 내려가는 지점까지 전진하여, 바로 그 능선 끝을 돌아 내려가는 찰나 부근에 매복 중이던 월맹군의 일제 사격을 받고 교전하였다. 이 때의 교전에서 연대 수색중대는 첨병소대장 및 소대원 약 1개 분대가 전사하고 수색중대장까지도 부상당하자, 전사자를 구출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안케패스 정상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한편 연대의 장갑차 소대는 안케패스에 산록으로부터 진입하여 도로를 따라 백두산 기지 앞을 통과한 후, 계속 지리산 기지를 향해 올라가던 중 도로가 계곡을 돌아 나오는 동쪽강점부근에 도달했을 때 그 부근에 매복중인 적으로부터 B-40 적탄통에 의한 직격탄을 맞고 격파당했으며 이때 후속하던 나머지 APC로 잠시 응전하다가 원대로 철수하여 버렸다.
이와 같이 양쪽 수색부대의 피습으로 사태가 긴박하여짐에 따라 수색중대 규모로는 작전이 불가함을 판단한 연대는 드디어 제3대대 예비인 제11중대에 출동명령을 하달하게 되었다. 이에 제11중대는 4월13일 오전 주둔지인 방칸으로부터 CH-47 시누크에 의해 소대단위로 안케패스 정상 19번 도로변으로 공수되어 공수 완료와 동시 즉각 연대 수색 중대가 피습된 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피습 현장까지 정면 공격 형태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는 수색중대 전사자의 유해만 산재하여 있었다. 이때 벌써 태양은 서산 위에 떨어지기 시작하였음으로 제11중대는 전사자를 후송하기 위해 그날 밤 그 부근에서 야간매복으로 들어가 적의 역습에 대비하였으나, 그날 밤 적의 도전 없이 날이 밝았다. 적정이 조용하므로 전사자를 수습하기 위한 고무 제품의 영현 주머니가 공수되어, 제11중대 병력이 전사자 수습 작업에 임하였다. 이어서 전사자를 전부 헬기로 후송시킨 제11중대는 그 지점으로부터 철수하여 다시 안케패스 정상을 거쳐 제1중대 기지에서 바라볼 때 19번 도로 건너편 고지 7부 능선 부근으로 이동하여, 그 부근에서 급편방어 편성을 하여 차후 명령을 대기하였다.
5. 월남군 APC 피습
안케패스를 넘어서면 바로 해발 500m 이상 되는 중부 고원지대가 시작되는데, 이 고원은 멀리 프레이크까지 이어진다. 안케패스에서 약 4㎞ 서쪽으로 가면 안케읍이 있고, 이곳에는 미군이 건설하여 놓은 간이 비행장이 있으며, 미군은 오래 전에 철수한 후, 월남군 제47연대 본부가 바로 이 비행장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연대는 안케패스 작전이 개시되기 약1주일 전쯤 그 예하 부대가 안케패스 정상 북쪽에서 산악 수색작전을 실시하던 중 월맹 정규군의 중화기 중대와 조우하여 교전 끝에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82㎜ 박격포를 포함하여 다수의 포탄 및 소화기를 노획함으로서 혁혁한 전과를 수립한바 있었다.
그 후 제11중대가 수색중대 전사자를 수습하고 안케패스 정상으로 이동하여온 바로 그날 월남 제47연대 소속 APC 1개 중대와 보병 1개 중대가 협동하여 안케패스 정상으로부터 19번 도로를 따라 위력수색을 실시하며 내려오다 도로폭파 지점 부근에 도달했을 때, 매복 중이던 월맹군의 B-40 적탄통의 기습을 받고 두 번째 APC가 피격되어 그 자리에서 파괴되었으며, 선두 APC 1대는 전속력으로 철수하여 버렸다. 지리산 기지로 대피한 이 APC는 적 매복으로 인하여 원대로 복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속 지리산 기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안케패스 작전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월남군은 이때 안케패스에서 피격된 이후 안케패스 작전이 종료된 때까지 안케패스 작전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이로서 우리는 동쪽강점 부근과 서쪽강점 부근 안케패스 지역에 적의 강력한 매복부대가 은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월맹 정규군의 대병력이 이미 안케패스 작전이 개시되기 10여일 전부터 안케패스 일대에 집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6. 제3대대의 작전지역 투입
안케패스의 적정이 단순한 베트공이나 소규모 월맹군의 준동이 아님이 명백하여졌다. 이에 따라 아군의 작전규모도 작전개시 7일 후인 4월 18일을 기해 제1대대 작전에서 연대작전으로 전환되었으며, 제2대대 투입에 이어 제3대대도 예하 제9중대 및 제10중대가 동시에 안케패스로 이동을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제9중대 및 제10중대는 4월 18일 오전 소대단위로 헬기에 분승하여 대대 주둔지인 방칸으로부터 안케패스 정상으로 공수되었다. 이어서 대대본부는 오후에 인사, 군수, 민사장교 및 군의관, 정훈장교 등을 대대 주둔지에 잔류시켜 후방 근무지원을 실시하도록 하고 작전, 정보, 포병 연락장교, 통신장교 및 무전병 등을 대동하고 헬기에 의해 일단 제1대대 주둔지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연대장으로부터 작전지시를 받은 뒤 다시 제1대대 주둔지로부터는 2대의 헬기에 분승한 후 건쉽(무장헬기) 2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안케패스로 이동하였다.
제3대대 지휘부는 안케패스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리산 기지로 공수되어 지리산 기지에서 제3대대의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대대가 지리산 기지에 도착즉시 제1대대에 배속되었던 제11중대가 배속해제와 동시에 제3대대로 복귀되었고, 이미 작전지역에 투입되어있던 기갑연대 제8중대가 제3대대로 배속되었다. 따라서 제3대대는 4개 중대로서 안케패스의 19번 도로 개통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작전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7. 적 위협하의 지리산 기지
막상 대대 지휘부가 지리산 기지에 도착하여보니, 기지 남쪽에는 울창한 수목과 더불어 넓은 계곡이 멀리 눈 아래 내려다보이고, 그 건너에는 638고지를 정점으로 하여 길게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긴 능선이 횡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능선은 적의 장악 하에 있었고, 적은 이 능선에서 지리산 기지를 손바닥에 놓고 보듯이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은 이 능선 끝에 75㎜ 무반동총을 아군의 지리산 기지를 향해 설치해 놓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격을 가해옴으로서 우리로서는 대단히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기지로부터 적 무반동총까지의 거리가 도상거리로 정확히 2,000m나 되어 거리가 먼 것이 천만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적의 무반동총 사격술이 감탄하리 만큼 정확하여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적들의 포탄추진은 밀림 속 호지명 루트를 통해 2천여 리를 갖은 역경을 겪어가며 힘들여 운반하여 온 귀중한 한발 한발이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무모하게 사격하는 일이 없었고 매 발 사격 할 때마다 신중을 기하는 것이 역력하였다. 대대가 투입되기 며칠 전에는 기지 정상에 설치된 관망대 하단부에 적 75㎜ 포탄이 정확히 명중되어 그 파편이 관망대 기둥에 무수히 박혀 있는가 하면 남쪽으로 향한 기관총 진지의 방벽에도 명중되어 총열이 파손되기고 하였다. 또한 81㎜ 박격포의 탄약고가 남쪽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아군이 박격포 사격을 실시할 때마다 탄약고에서 포탄을 꺼내오는 것을 보고 이 탄약고를 파괴할 목적으로 사격을 가하여 왔으며, 그 중 1발이 탄약고 벽 중앙에 명중되어 벽두께의 약 1/2가량이 뚫린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사격을 가한 적은 거의 같은 위치에 제2탄을 명중시켜 탄약고 벽이 거의 뚫린 위험한 고비도 넘겼었다.
이 같은 적 75㎜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대는 105㎜ 포 사격 지원을 수 차례 요청하여 파괴를 시도하였으나 두터운 엄체호로 인함인지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 하였다. 그리고 적은 이 75㎜ 무반동총을 이용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아 기지에 사격을 가해오는 바람에 탄약 및 식량, 기타 보급품을 수송해 주는 미 헬기가 지리산 기지에 착륙시 피격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드디어 지리산 기지의 착륙을 거부하고 저속으로 기지 위를 통과하면서 보급품을 기지 내에 쏟아 붇고 돌아가기를 몇 일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일체의 보급 추진을 중지하고 말았다.
이러한 무보급 상태가 3일간 계속되고 보니 대대는 특히 박격포 사격을 통제하였으나 동서 강점 지역 공격을 지원하느라 81㎜ 포탄이 점차 고갈상태에 이르렀다. 다행이 식수는 기지 밖 계곡에서 획득이 되었으나, 식량인 레이션이 점차 소모되어가자 기지에서는 조급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대대는 연대에 계속하여 적 75㎜진지에 대해 항공 폭격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폭격의 우선권이 638고지에 있음을 강조하고 항공 지원의 승인이 없다가 기지에 대한 무보급 4일째 되는 날 드디어 팬텀기 1개편대의 폭격이 승인되어 적 75㎜ 진지에 항공 폭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 1차 폭격은 투하된 폭탄이 목표로부터 약 150m나 빗나감으로서 적 진지에 전혀 손상을 주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항공 폭격을 요청하여 그 다음날 2차 폭격을 실시하였으나 이번에도 약 100m나 빗나가 실패로 돌아갔다. 다시 폭격 요청을 하니 두 번이나 지원하여 주었으므로 더 이상 지원은 곤란하다 하여 그 다음날은 항공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다급하게 된 대대는 재 폭격을 계속 간청하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지원하고 더 이상은 못 한다는 무전 연락과 함께 3차 폭격이 승인되었다.
이리하여 대대는 또 다시 폭격이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여 초조한 마음이 앞서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 마지막 항공 지원이라는 통보와 함께 팬텀기 편대의 제3차 폭격 시간이 무전으로 수신되자, 전원이 긴장된 마음으로 폭격시간을 기다렸으며 폭격광경을 다 같이 지켜보았다. 드디어 동쪽에서 진입한 팬텀기 4대가 축차적으로 급강하하면서 적 75㎜ 진지에 폭탄을 퍼부었다. 천만 다행으로 적진지가 화염으로 휩싸여 시야를 가렸으며 폭격 성공을 연대에 송신하였다. 폭격을 마친 팬텀기가 한번 고공을 선회한 후 동쪽 하늘로 사라질 때 참으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잠시 후 폭연이 바람에 날리어 적진지 일대가 시야에 들어왔으므로 쌍안경을 꺼내 적 진지를 주시한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쌍안경에 보이는 적 진지에는 여전히 까만 둥근 원의 75㎜ 포구가 이쪽을 향하여 조준되어 있었고 그 위에 덮인 두터운 엄체호가 전과 다름없이 화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폭탄이 진지 가까운 곳에 폭발한 것은 틀림없으나 화기 진지를 명중시키지 못한 모양이다. 폭격이 끝나자 대대의 요구에 따라 우선 급한 것이 박격포 포탄의 보충이었으므로 4일만에 처음으로 박격포 탄을 적재한 헬기가 기지에 착륙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헬기가 착륙한 후 불과 3-4분만에 적 75㎜ 무반동총이 다시 불을 뿜었고 그 탄환이 "쉿"하는 불쾌한 음을 내면서 기지 상공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 기지 북쪽 산중턱에서 작렬하였다. 당황한 헬기는 추진하여 온 박격포 탄을 급히 밀어 내린 후 기지를 떠났고 적은 그 후에도 기지에 대해 사격을 가해왔는데 전과는 달리 포탄 낙하 지점에 정확성이 사라졌으며 엉뚱한 곳에서 폭발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제3차 폭격시 틀림없이 적 75㎜ 사수가 사망 혹은 부상하였으며 대신 부사수가 사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를 연대에 보고한 후 보급 헬기는 계속 기지에 보급품을 추진하여 주기는 하였으나 착륙하지 않고 저속으로 비행하면서 기지 내에 보급품을 쏟아 붓는 식의 보급 추진이 계속되었다.
8. 동쪽 강점 공격
대대 지휘부가 지리산 기지에 투입된 당일은 현지 상황파악과 작전계획 수립으로 작전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그 다음날인 19일부터 동․서 양개 강점에 대해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동쪽 강점은 적의 규모가 비교적 적은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대대에 배속된 제8중대만으로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제8중대장에게 19일 오전 동쪽 강점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하였다. 그 일대의 지형은 동쪽 강점 북방에 19번 도로로부터 약 150m 가량 높은 봉우리가 있고, 이 봉우리는 안케패스를 향해 위로 19번 도로와 병행하여 더욱 높은 능선으로 길게 연하여져 있는가 하면 아래로는 역시 19번 도로와 병행하여 긴 능선이 점점 낮아지며 멀리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봉우리로부터 또 다른 한줄기의 능선이 완만하게 19번 도로 쪽으로 뻗어 내려와 19번 도로에서 단애를 형성하여 끝이나 있었다. 따라서 강점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지형상 이 한줄기의 능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음으로 제8중대는 봉우리로부터 능선을 따라 하향식 공격을 실시하여 19번 도로의 강점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은 오전에 시작되어 길게 뻗어있는 이 한줄기 능선을 연해서 점차 도로를 향해 아래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능선일대는 나무가 없고 풀로 덮여있는 부러쉬우드(Brushwood)지대였음으로 적의 접근이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강점에 접근하는 접근로는 그 부근의 지형상태로 보아 그 보다 유리한 곳이 없었음으로 부득이 그 능선을 연해 공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적이 강점 부근에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을 뿐이지 적이 전혀 목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 침묵을 지키고 있으므로 사실상 적 배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아군의 공격은 사격과 기동의 연결에 의한 공격이 아니고 수색 형태의 은밀 접근식 공격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격속도가 빠를 리 없었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오후 중반에 접어들었으며, 공격 부대는 능선 중간 정도까지 전진하여 있었다. 그로부터 좀더 도로 쪽을 향해 전진하여 내려가는 순간, 비로소 적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고, 아군과의 교전이 전개되었다. 적의 사격밀도로 보아 적은 약 1개 소대 규모였으며, 그들은 기관총, B-40 적탄통, AK 소총 등으로 사격을 가해왔으며, 아군은 M60 기관총, M79 유탄발시기, 60㎜ 박격포 및 M16 소총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적과의 교전이 개시되자 마땅한 엄폐물이 없는 부러쉬우드 능선상에서의 전진은 아군의 희생만 자초할 뿐 유익할 것이 없었음으로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사격전이 계속되었는데 이 사격 전에서 분대원 1명이 전사하고 중대장이 적의 소총탄에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헬기에 의해 긴급 후송되었으며, 그 후 간헐적인 사격전이 계속되었으나 서산에 해가 기울자 총성이 멎었다. 지형 조건이 주간공격을 실시할 경우 적에 노출되어 아군의 많은 희생이 예상됨으로 야간 공격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8중대장이 부상하여 후송되었기 때문에 3개소대장 중 선임소대장을 중대장 대리 근무토록 무전으로 명령하고 나서 야간공격으로 전환하여 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나서 야간공격 상황을 무전 감청을 통해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무전상으로 계속 적진을 향해 작전을 실시중인 것 같았으나 중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고 나니, 심리적으로 사기에 영향을 미쳤음인지 야간공격의 효과는 없었다.
다음날 오전에 후임 중대장이 즉각 헬기에 의해 보충이 되었음으로 다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하고 정오가 조금 지나서 백두산에 배치된 중박격포 2문과 지리산 기지에 배치된 81㎜ 박격포 2문으로 공격 준비 사격을 실시케 한 후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이날 공격시에는 박격포에 의한 공격준비사격의 효과가 있었음인지 전날과 같은 조직적이며 완강한 저항은 없고 다만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제8중대는 오후 16시 30분 경 목표지역인 19번 도로까지 내려올 수가 있었고, 강점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작전이 끝난 제8중대에는 만 22일간의 작전으로 탄약도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휴대식량 및 식수도 고갈되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보고였으며 또한 바로 야간매복을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탄약, 식수, 식량 등을 긴급히 추진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왔다.
동쪽 강점은 지리산 기지로부터 19번 도로를 따라가면 도보로 불과 15분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리산 기지에서 1개 분대를 차출하여 지난 14일 지리산 기지에 대피하여 온 월남군의 APC에 보급품을 적재하고, APC를 선두로 보급품을 추진토록 명하였다. 따라서 분대병력은 도로 양측을 따라 도보로 전진하고 APC는 분대의 선두에서 강점으로 접근하여 갔다. 이들이 기지로부터 약 600m가량 전진하여 가던 중 기동력이 있는 APC가 분대원 향군 속도에 맞추어 전진하다보니 지루하였음인지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도보부대와 APC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여 드디어 APC는 분대원의 약 300m 앞을 달리고 있었다. 북쪽으로부터 뻗어내려 온 능선이 끝나는 단애 지점 앞에 APC가 도달한 순간, 느닷없이 도로 남쪽계곡으로부터 B-40을 비롯한 기관총 및 AK의 일제사격이 APC에 집중되었으며, B-40의 작열음과 더불어 기관총 및 AK총성이 계곡일 때의 산야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APC는 우리들 모두가 다같이 내려다 보고 있는 눈앞에서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있었으며, 불의의 기습사격을 받게된 APC는 다급한 나머지 전속력을 내어 도로를 따라 아래로 질주하여 내려갔다. 무수한 총탄과 함께 B-40 7~8발이 APC 주변에서 요란하게 작렬하였으나 다행히도 APC에 명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APC는 무사히 빙케 지역의 기갑연대 기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APC에 후속 하던 분대원은 이 돌발 사태로 즉각 지리산 기지로 복귀하여 피해를 면할 수가 있었는데 이때 우리는 APC가 분대원보다 앞서 달린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만일 최초 대형으로 APC와 분대원이 함께 단애 지역까지 도달하였더라면 분대원의 대다수가 비극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적 사격 규모로 보아 적은 소대 규모가 넘는 매복 병력이었으며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사고였다. 왜냐하면 총성이 나고 있는 그 계곡은 지리산 기지로부터 불과 800-900m 정도밖에 되지 않고 근거리일 뿐 아니라 지리산 기지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평평한 계곡형 개할지였던 까닭이다. 더군다나 그 개할지 일대에는 잔목이 약간 있을 뿐 부러쉬우드 지대여서 그러한 곳에 수많은 적이 아군 기지로부터 감제 당하면서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날의 제8중대 공격시 적의 저항이 산발적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적은 강점에서 저항을 포기하고 도로 남쪽 계곡으로 이동 배치한 후 시기를 보아 아군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기도하기 위하여 은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APC에 대해 적이 기관총, AK소총 그리고 B-40까지 동원하여 무수히 집중 사격을 가하고 있을 때 그 총성이 바로 눈 아래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계곡에서 들려오고 있어 적병의 움직임이나 화염이 보일 만도 하였으나 쌍안경으로 면밀히 훑어보아도 전혀 적군이 보이지 않고 다만 총성만 요란하게 나고 있었던 점이다.
또한 월맹군의 전법은 결정적인 시기에 기습적인 일제사격을 불과 몇분 실시한 후, 다시 침묵을 지키는 전법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군이 기습사격을 받고 나서 적이 사격을 멈춘 후에 보면 적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번 APC에 대한 기습 사격은 불과 2~3분의 집중사격이었고 그후 총성 한 번 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 후 계곡일대에 많은 적이 은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나는 즉각 포병의 지원사격을 요청한 후 우선 백두산의 4.2ʺ 중 박격포와 지리산의 81㎜ 박격포를 즉각 계곡일대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박격포 탄의 제한으로 박격포에 의한 사격을 충분히 실시할 수 없었고 다만 포병의 지원사격을 연대에 긴급히 요청하였으나 638고지에 대해 사격을 하고 있지 않는 때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약 30분 후에야 초탄이 작렬하게 시작하였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포병의 지원사격이 너무 늦어 적에게 피해를 주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포병 지원사격이 끝남과 동시에 제8중대로 하여금 포 사격을 가한 그 계곡 및 개할지 일대로 내려가 즉각 수색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제8중대장으로부터 그날은 강점 부근에서 매복하고, 다음날 계곡을 수색토록 해 달라고 건의하기에 시기를 놓치지 말고 즉시 계곡 수색을 실시토록 강력히 명령하였으나 제8중대장은 계곡 수색의 애로를 계속 송신하며 명일로 연기 할 것을 간청하여왔다. 제8중대장이 중대장으로 긴급히 부임한 당일이었음으로 예하 소대장 및 부하들에 대한 명령의 권위가 확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한 만 2일간의 계속된 작전의 피로와 탄약, 식량, 식수의 결핍도 부하들의 반응을 둔하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으므로 제8중대장의 건의를 승인하였다.
이리하여 강점을 탈취하게 된 제8중대는 그날 밤 강점 주변 및 북쪽 능선 일대에서 매복을 하게 되었고 다음날 도로 남쪽 계곡 일대에 대한 탐색 작전을 실시하게 되었으나 이미 적은 타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 부근에 없었으며 적의 유기물은 찾아내지 못한 채 계곡 수색 작전을 종료하였다.
계곡 수색작전이 종료되자, 즉시 강점을 완전히 확보하기 위하여 1개 소대로 하여금 강점 주변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케 하고, 또 다른 1개 소대는 도로부터 약 150m 정도 높은 북쪽 봉우리에 진지를 편성케 하여 능선 너머의 저지대까지 통제토록 하였으며 이 소대 기지를 호랑이 기지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중대(-)는 강점 북쪽에 발달된 능선이 19번 도로와 병행하여 낮게 뻗어 내려가다 강점으로부터 약 500m정도 떨어진 지점에 그 부근 일대를 감제할 수 있고 동시에 그 주변 19번 도로도 통제할 수 있는 양호한 봉우리가 형성되어있어 그곳에 중대(-)를 배치하여 19번 도로 경계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로서 동쪽 강점에 대한 작전이 종료되었으며, 제8중대는 안케패스 작전이 끝날 때까지 또 다시 적이 붙지 못하도록 그 위치에 배치되어 도로 경계에 임하였다.
9. 서쪽 강점 공격
서쪽 강점 부근의 지형은 도로 위쪽인 북쪽은 도로보다 약 250m가량 높은 산이 능선을 형성하여 우뚝 솟아있고, 도로 아래쪽인 남쪽은 깊은 계곡과 더불어 저지대가 멀리 넓게 펼쳐져 있었다. 서쪽강점 지역은 비가 내릴 때 도로 위쪽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도로 밑을 통해 도로 아래 계곡 쪽으로 흘러내려 갈 수 있도록 큰 암거가 도로 밑에 매설되어 있었는데, 적은 분명히 이 암거를 중심으로 그 부근에 은거하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총 한방 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전혀 동정이 없어 마치 적이 없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폭파된 지점이 분명히 적에 의해 점령 내지는 엄호되고 있을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제10중대 및 제11중대를 도로를 내려 볼 수 있는 북쪽 고지에 배치되도록 하고 제10중대는 강점으로부터 서북쪽 산허리에 배치하여 양개 중대로 하여금 하향식 공격 작전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제1대대의 전황은 제1중대 기지 바로 위쪽에 위치한 638고지를 향해 공격할 때마다 적의 치열한 저항에 공격이 저지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격부대의 진출이 저지되면 일시 후퇴한 후 다시 맹렬한 포병에 의한 공격준비사격 및 팬텀기 편대에 의한 항공폭격을 실시한 후 다시 공격을 시도하는 것이 매일과 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또한 제2대대의 전황은 안케패스 남쪽으로 멀리 연해있는 여러 개의 작은 고지들을 따라 638고지를 향해 공격 중에 있었으나, 638고지 훨씬 남쪽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당면하여 공격이 저지된 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제3대대는 서쪽 강점에 대한 작전을 실시하게 되었으나, 적의 정확한 규모와 배치상황을 확실히 알지 못하였음으로 우선 안케패스 정상 부근의 임시 진지에서 대기 중이던 제11중대로 하여금 19일 새벽 강점에 대해 탐색적인 공격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제11중대는 다음날에 실시할 여명 공격을 위해 18일 밤 임시진지를 출발하여 은밀히 강점 부근으로 내려와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 날이 밝기 직전에 여명공격을 개시하여 강점을 향해 더 한층 접근해 갔다. 그리고 얼마 가량 전진하였을 때 선두소대가 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적의 갑작스런 일제사격을 받고 분대원 2명이 전사하였으며, 부상자도 몇 명이 발생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로서 개략적인 적 위치와 규모를 파악할게 되었으며 적의 사격규모로 보아 제11중대 공격방향에 배치된 적은 약 1개 소대 정도로 추산되었다. 선두 소대에서 갑작스런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자 중대도 일단 공격을 멈추고 사상자 수습을 하고 나서 차기 공격을 위해 북쪽 산의 5부 능선 부근까지 철수하였다.
이미 적은 사전에 유리한 지형 지물을 점령하여 교묘히 위장을 하고, 아군의 접근을 은밀히 지근거리까지 유인한 후에 기습적인 일제사격을 불과 몇 분 동안 가한 후, 침묵을 지키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적 B-40 적탄통의 포탄이 아군 주변에서 폭발할 때에 발생하는 섬광과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작렬음이 아군 병사에 적지 않은 심리적 영향을 주고 있었다. 따라서 적의 일제사격이 멈춘 후의 보고에 의하면, 주변에는 무성한 수풀뿐이며, 적의 위치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의 작전에서도 이런 보고는 자주 있었다. 그만큼 적의 사격 통제와 위장술은 훌륭하였으며, 아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따라서 나는 11중대가 공격하는 서북쪽에서의 공격방향이 수월치 않음을 판단하고, 제10중대로 하여금 동북쪽에서부터 강점을 향해 공격토록 하였다.
강점 부근의 지형은 애당초 도로공사를 할 때 산허리를 깎아 도로를 구축한 지역이어서 도로 북쪽면은 도로에 연해서 4-5m의 절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도로의 남쪽 역시 도로에 연하여 급경사가 형성되어 있는가 하면, 강점부근은 도로가 U자형으로 구부러져 돌아 나오는 지점인데다가 암거 위 아래로는 깊고 협소한 계곡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암거 아래쪽으로부터의 강점에 대한 공격은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형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강점에 대한 공격은 불가피하게 북쪽에서부터 하향식 공격을 하거나 아니면 19번 도로를 따라 동쪽에서부터 공격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19번 도로를 따라 서쪽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공격하는 방법뿐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제10중대로 하여금 동쪽에서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제10중대의 공격시는 1개소대로 하여금 동쪽에서부터 도로를 따라 강점으로 공격하고, 중대(-)는 강점 동북쪽으로부터 강점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도로를 따라 공격하는 소대가 도로와 연하여 있는 절벽과 도로아래로의 급경사로 인해 부득이 도로 양가를 따라가며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로를 따라 공격하다보니, 강점에 접근도 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적에게 완전 노출됨으로서 완강한 적의 집중 사격을 받게되어, 공격이 저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방향의 공격도 매우 곤란함을 알게 되었다. 이때 중대(-)는 도로를 따라 공격중인 소대를 엄호하거나, 아니면 동북쪽에서부터 병행공격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도로 자체가 4~5m의 절벽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도로 북쪽에 위치한 중대 쪽에서는 도로 및 강점 지역이 사각이 되므로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소대의 공격을 전혀 관측할 수 없었고 동시에 소대의 공격을 엄호할 수도 없었다. 한편 중대(-)는 동북쪽에서 강점을 향해 하향식 공격을 실시하면, 이 역시 엄폐 및 은폐된 적으로부터 맹렬한 사격을 받아 공격이 용이치 않았다. 즉 아군의 공격기동은 적에게 노출되는 반면 적의 위치는 그들의 교묘한 위장술로 인해 아군이 발견해 내기가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군의 공격방향이 변경될 때마다 적은 강점 주변에서 그들의 배치를 적절히 재조정하여 응전하고 있음이 분명하나, 우거진 수풀로 인하여 그 배치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다시 말해서 강점 주변 도로가 단애로 형성되어 있음으로 인해서 제10중대 지역에서나 제11중대 지역에서나 다 같이 강점 주변이 관측이 안 되는 데에 큰 애로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 다음날인 20일에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제10중대 및 제11중대로 하여금 하향식 공격을 동시에 실시할 것을 결심하고, 연대에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638고지의 탈환작전이 치열하다보니, 포병 화력은 오로지 638고지에 집중되었고, 강점에 대한 포병 지원사격은 전혀 승인되지 않았다. 결국 대대는 지리산 기지에 배치된 2문의 81㎜ 박격포와 백두산 기지에 배치된 4.2ʺ 중 박격포 2문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였으나 탄약의 제한으로 충분치 못한 사격을 실시한 후, 13:00시경 2개중대로 하여금 동시 공격을 실시케 하였다.
이에 따라 제11중대는 제3소대를 강점 서쪽 도로 쪽으로 우회시켜 도로에 연해서 강점을 향해 내려가며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제10중대는 어제 시도하였던 도로를 연한 공격이 불가하기 때문에 다만 산중턱에서 강점을 향해 하향식 공격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제10중대의 공격은 부진하였다. 반면 도로 쪽으로 우회한 제11중대 제3소대는 도로 바로 아래쪽을 따라 강점으로 접근하여 갔으며 강점 약 100m 전방까지 접근하였다. 그곳 도로변에는 고장 차량이 대피할 수 있는 널찍한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 밑은 단애로 형성되어 있어 공터를 우회하여 전진할 수 없고 오로지 공터위로 돌격하여 강점으로 돌진하는 방법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무렵 제11중대 제2소대도 강점 서 북방 산쪽에서 역시 강점 약 100m전방까지 전진하였으나, 노출지역으로 더 이상 전진이 곤란한 형편이어서 제11중대는 제2소대로 하여금 엄호사격을 실시케 하고, 제3소대는 돌격을 감행하도록 하여 제3소대 일부병력의 엄호사격 하에 일부병력이 ‘돌격 앞으로’하는 함성과 함께 공터위로 올라서서 강점을 향해 용감히 돌진하여 갔다. 그러나 불과 몇 m돌진하는 순간, 적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적은 최후 저지사격의 일환으로 기관총을 위시해서 B-40 및 AK소총의 집중사격을 맹렬히 가해왔다. 이때 진두 지휘하던 분대장이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 쓰러졌으며 적의 치열한 사격으로 인해 계속적인 돌진이 불가하게 되자, 기타 분대원은 다시 후사면으로 물러섰다. 부상당해 쓰러져 신음하는 분대장을 구출하려 2, 3차례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적의 맹렬한 사격이 가해져오는 바람에 도저히 분대장에 접근할 수가 없었으며 드디어 소대장이 몸소 구출하러 접근하다 소대장(이상호 중위)마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 후 분대원의 비장한 노력으로 간신히 소대장을 구출해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좀더 앞에 쓰러진 분대장을 구출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던 중 얼마 안 있어서 처음으로 적 82㎜ 박격포탄이 공터 및 제3소대 주변에 낙하하기 시작하였으며 불행히도 부상당한 분대장은 동료들의 결사적인 구출 노력에도 보람없이 바로 동료들의 목전에서 적 박격포의 직격탄을 맞고 애석하게도 산화하고 말았다. 이때 대대 전술 지휘소가 위치한 지리산 기지에서도 적 박격포 발사음을 분명히 들을 수가 있었고 그 발사음은 지리산 기지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로 남쪽 저지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 저지대는 적의 장악하에 있는 지역으로서 적의 박격포는 82㎜ 박격포 2문 정도로 판단되었으며 이는 멀지도 않은 눈 아래 저지대이므로 정확한 위치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그 저지대가 638 고지에 연하여 있는 긴 능선과 강점 북쪽에 동서로 연하여 있는 능선, 그리고 지리산 기지 등으로 에워 쌓여있는 넓은 분지로 되어 있어 박격포의 발사음이 주변 일대의 산으로 울려 퍼지는 관계로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아도 포성만 울려 퍼지고 있을 뿐 적 포진지를 정확히 찍어낼 수가 없었다. 다만 막연하게 예상되는 적 박격포 진지에 지리산 기지의 박격포로 하여금 제압사격을 가하였으나 여전히 적 박격포 사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우거진 수목으로 인해 적이 포탄을 발사할 때 생기는 포연도 전혀 목격되지 않아 적 박격포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제11중대는 이러한 상황하에서의 계속 공격은 아군의 희생자만 속출하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일시적인 철수를 요청하게 됨에 따라 이를 승인하였고 제11중대의 양개 소대가 안전거리까지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고, 대대 보유 81㎜ 및 4.2ʺ 박격포로 하여금 강점에 대해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서쪽 강점 공격이 이와 같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다보니 예하 부대로부터 병사들의 사기와 관련하여 포병 지원사격을 강력히 호소하여 왔고, 대대 역시 연대에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연대에 대한 포병 지원사격의 계속적인 요청에 따라 그 다음날 비로소 처음으로 포병 지원 사격이 승인되었으며, 이로서 서쪽 강점에 대한 포병의 지원사격을 처음으로 제공받게 되었다. 다음날 포병 사격지원을 위해 그 이전 강점 부근으로 압축 배치되었던 제10 및 제11중대를 아군포탄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안전지대까지 철수시킨 다음 상당량의 공격 준비 사격을 실시하고 나서 다시 양개 중대로 하여금 주간공격을 실시케 하였다. 이때는 충분한 포병 사격을 실시한 관계로 작전중인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져 있었다.
제10 및 제11중대는 다시 강점을 향해 압박을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강점 가까이 접근해 가자 제11중대 지역에 적 박격포탄이 낙하하기 시작하였고 적은 역시 전일과 같이 도로 남쪽 저지대쪽에서 발사하고 있었으나 지리산 기지의 대대 전술 지휘소 전 요원이 기지 위에 올라가 적 박격포 위치를 발견하려 예의주시 하였으나 정확한 위치를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개략적인 위치를 연대에 보고하여, 포병의 집중사격을 요청하고 상당량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적은 포병사격 중에는 박격포가 침묵을 지켰을 뿐 포사격을 끝나면 또 다시 박격포 사격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중에서도 양개 중대는 계속 강점을 향해 압박해 들어갔으며 제11중대는 공격지점까지 도달하여 제10중대와 병행 공격하기 위하여 제10중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제10중대의 기동이 완만하여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추측컨대 제10중대는 대대에서 지정한 산중턱의 철수선에서 대기하지 않고 멀리 능선 윗부분 까지 철수하여 있었던 것 같았다. 따라서 제10중대에게 신속한 기동을 독촉하였으나 결국 4-50분이 경과한 후에야 공격대형이 갖추어졌으며 공격 개시 얼마 후 요란스러운 총성과 함께 피아간 치열한 사격전이 전개되었다.
공격전 상당량의 포사격을 실시하였는데도 적에게 피해를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10중대장으로부터의 무전은 제11중대가 제10중대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다고 다급하게 송신하여 왔으며 제11중대의 사격을 중지시켜 달라면서 제10중대장의 정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따라서 제11중대장을 긴급 호출하여 이 사실을 전달하니 그런 일이 없다는 보고였다. 제10중대 지역에서 B-40이 작렬한 것을 보아 적의 사격이 틀림없다하니까 적으로부터도 사격을 받았으나 제11중대도 제10중대 쪽으로 사격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양개 중대의 배치 상황을 미루어보니 제11중대는 강점 가까이 서북쪽에 위치하고 제10중대는 강점 가까이 동북 방향으로 제11중대보다는 높은 위치에 산개하고 있어 착각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극한 상황의 전투지역에서는 본의 아니게 의외의 장소에 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제11중대로 하여금 일체의 사격을 하지 말고 대기하라고 지시하고 나서 제10중대에게만 재 사격을 실시토록 하여 사격을 재개하니 적도 응사 하였으며, 잠시 동안 사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제10중대 보고를 들으니 처음 보고와 같은 보고였다. 그래서 제11중대장에게 사격하지 말라 지시하였는데 사격하였는가 물으니 전혀 사격하지 않았다는 보고였다.
이와 같이 강점의 적은 암거를 중심으로 하여 암거 상하 내지는 동서로 아군 공격 방향에 적절하게 수시로 진지 변환하면서 지형의 특성을 기술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반면에 아군의 공격 방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가 하면 도로변의 닫는 강점 점령에 지대한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작전이 종료된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적은 도로 밑의 암거를 아군 포사격시 대피호로 이용하고 있었으며 그 속에 들어가 있는 한 아무리 치열한 포사격을 실시할지라도 적에게는 전혀 피해를 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은 암거 양단 출입구를 사낭으로 절반 정도 막아놓고 포사격이 가해지면 전원이 그 속에 대피하고 있다가 포사격이 멈춰짐과 동시에 신속히 외부로 나와 아군 공격 방향에 .따라 재배치한 후 기습 공격을 가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암거는 체구가 외소한 월남인 정도는 400-500명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히 큰 암거였고 적은 이 암거를 통하여 도로 위 아래로 은밀히 이동하면서 진지 변환을 하며 저항했었다. 이상 기술한바 데로 이날 작전은 묘하게 전개되었으므로 공격을 중지하고 차후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을 약간 뒤로 철수시켰다.
이와 같이 강점 탈환 작전이 예상외로 지연되자 강점 주변 일대에 대해 화공을 실시하여 우거진 수목을 소각한 후 공격할 목적으로 강점 일대에 대해 항공력에 의한 네이팜탄 투하를 건의하였으나 화공은 월남 정부의 금지 사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실시할 수 없다는 통보여서 화공을 실시할 수 없었으며 야간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심하였다. 야간 공격에 앞서 도로남쪽 저지대로부터 강점으로 투입되는 적의 증원병력을 저지하고 또한 강점의 적이 도주시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대대 예비로 있던 제9중대를 강점쪽 계곡 부근으로 이동케 하여 강점에 대해 완전 포위 형식으로 배치케 하였으나 남쪽 저지대는 적 장악하에 있었으므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적에게 역포위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제9중대장 생각도 같은 생각이었음인지 도로 남쪽 전체에 대한 완전 포위는 곤란하다는 보고였고 제9중대는 도로 남쪽 적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역에서 주야간 매복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9중대 배치 지역에서 강점을 향해 57㎜ 무반동총을 사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제9중대장 보고에 의하면 암거 아래쪽으로 암석 절벽이 보이는데 그 절벽 하단부에 적진지가 보인다하며 여러 발 계속 사격을 가하면서 명중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약 10여 발 사격을 가하고 있을 무렵 적 박격포가 또 다시 사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포탄은 57㎜진지 부근에 낙하하기 시작하므로 아군의 57㎜ 사격은 계속할 수가 없어 사격을 중지하였다. 그 후 제9중대는 주야간 매복에 들어가 적 증원 및 퇴로 차단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강점 공격시 포사격 종료와 동시에 즉각 공격을 개시해야 목표 점령이 용이하겠으나, 안전 지대까지 철수하였다가 다시 강점으로 접근하는 시간이 오래 소요됨으로서 적으로 하여금 재배치의 여유를 주는 결과가 되어 사실상 포사격의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강점 지근 거리에서 엄폐하여 대기하다 공격준비사격 직후 즉각 공격을 해야만 공격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동식 벙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반원형으로 된 두터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암거 구축용 대형 칼바이트를 헬기로 제11중대 지역에 고수하였다. 따라서 제11중대는 강점에서 멀리 철수하지 않고 강점 주변에서 칼바이트 속에 들어가 아군포 지원 사격에 대비하여 공격준비 사격이 끝나는 데로 즉각 공격하여 목표를 조기 점령한다는 굳은 결의를 굳히고 칼바이트를 이용 임시 벙커 구축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11중대장으로부터 다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아직 칼바이트 벙커 작업 중인데 왜 포사격을 실시하였느냐는 내용이었다. 고로 대대에서 포사격을 청한 일이 없다하고 긴급히 연대에 포사격 실시 여부를 문의하니 포사격을 실시하지 않았다는 답변이었다. 제11중대 지역에 낙하하는 포탄의 위력이 박격포탄보다 훨씬 강한 포탄이었으므로 적 122㎜ 로켓포 사격으로 판단되었으며 다행히 수발 낙하로 끝이 나서 아군의 피해는 없었다.
대대는 19번 도로 개통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작전 중에 있으나, 예상외로 날짜가 하루 이틀 점점 지연되며 여러 차례의 주간 공격에도 성과가 없었음으로 22일 밤에는 야간 공격을 실시하여 기필코 강점을 탈취할 것을 결심하고 야간 공격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번 야간 공격에는 화염 방사기 및 최루성 가스도 사용할 것을 계획하고 연대에 화염 방사기의 지원을 요청하니 연대 화학지원소대로부터 2대의 화염 방사기가 사수와 함께 헬기에 의해 지리산 기지로 공수되어 왔다. 따라서 이를 제10중대에 배속지시하고 하사관 1명을 차출하여 제10중대 지역으로 투입시켰으나, 얼마 후 보고에 의하면 화염 방사기의 압축 공기가 방출되어 사격할 수 없다는 보고를 접하고 이것이 웬일이냐 하고 연대에 항의하니 연대에서는 출발 전 세부 점검을 필하였으며 그때는 이상이 없었다는 회신이었다. 이는 틀림없이 헬기로 공수도중 화염 방사기 사수가 고의로 화염 방사기의 압축 공기를 방출 시켰을 것으로 단정하고 화염발사기 사수를 군법 회의에 회부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 때문에 화염 방사기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각 중대에는 5갤런 휘발유통 크기 만한 최루 가스 발사통을 2~3개 가량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제10중대에게 이 최루 가스를 발사하여 적들이 눈을 못 뜨고 당황할 때 즉각 공격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별첨:제9중대장의 전투 수기>
안케패스에서 제9중대의 전투
기갑연대 제9중대장 대위 안영소
1. 제9중대의 안케패스 전투 참전 상황
1972년 4월 11일부터 시작된 안케패스 지역의 전투는 그 동안 기갑연대의 여러 부대들이 속속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으며, 인접중대들의 고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드디어 우리 중대에도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1972년 4월 17일이었다. 이로써 중대는 출동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는데, 작전에 참가하게된 중대의 소대장들은 제1소대장 중위 정한영, 제2소대장 중위 김만석, 제3소대장 중위 박병섭 등이었으며, 화기소대는 중대에 잔류하기로 하였다.
이윽고 1972년 4월 18일 09:00 경 중대는 차량으로 기지를 출발하여 10:00 경 연대 헬기장에서 헬기를 타고 이륙하였으며, 10:20 경 638고지 후사면 19번 도로상 랜딩 지점에 착륙함으로써,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당시 현장의 상황은 미 처리된 시체와 1개 중대 규모의 부상자가 방치된 상태로 있어 이를 보는 순간부터 중대원들의 사기가 저하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작전 명령이나 행동지침이 없는 상태 하에서 나는 서둘러 대대 통신망 가입하여 현 위치를 보고하였더니 “적당한 장소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고, 19번 도로 만곡 부분의 고지까지 남하하여 산개한 후 집결지 편성하고 1박하였다.
2. 4월 19일의 상황
19번도로의 차단지점 부근까지 도로를 따라 수색정찰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15:00시경 사격시의 포연으로 적 박격포 진지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 박격포 사격을 유도하여 적의 박격포 진지를 제압하였다. 18:00시경 “19번도로의 차단지점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수령하였다. 이에 따라 중대는 19:00시경 공격대기지점으로 부대를 이동시켜 지휘정찰 후 숙영하였다.
3. 4월 20일의 상황
08:30분경 작일 수령한 명령에 의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09:00시경 제10중대가 교전 중 “적 지뢰 지대 봉착하여, 진출이 곤란하다” 는 상황을 접수 후 우리 중대도 적과 교전이 시작되었다. 09:10분경 제1소대를 선두로 한 중대 종대대형 공격하여, 적 진지에 접근했으나 적 진지는 식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50m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제10중대 식별하여, 의심지역에 대한 사격을 지원하였다. 이어서 10:00경 제10중대 철수에 따라 사격을 중단하고, 현 위치에서 적정을 관측하였다. 11:00경 “최초 집결지로 철수 후 차후 명령 대기하라”는 지시를 접수하고, 13:00경 최초 집결지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다시 “도로의 하단부에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접수하였다.
4. 4월 21일의 상황
09:00시에 제1, 2, 3소대장과 공격통로 합동정찰, 상황판단결과, 적 진지의 전방 150m 공간은 은폐물이 없는 20도 상향의 개할지이며, 적 진지의 직 전방에 19번 도로가 가로놓여 있었다. 적 진지는 암석, 자연적 지형 기복, 수목 사이에 교묘히 구축 위장되어 식별할 수 없었다. 공격개시선까지의 부대 이동로는 수목에 은폐되어 접근이 용이하나, 공격 개시선 통과 후에는 은폐물이 없어 완전한 적의 감시하에 공격해야 하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이에 나는 정면 공격의 무모함을 건의, 19번 도로를 연한 능선을 따라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되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시작된 전투는 공격개시 10분만에 신속히 도로까지 진출하고, 제2소대가 먼저 도로 위로 오르자마자 제2소대를 향하여 적의 일제 기습사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적의 사격 통제 능력이 지극히 훌륭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제1소대가 도로 사면에서 머리만 내밀고 소총, M72 LAW 등으로 제2소대 정면의 적진을 향해 사격을 가하고, 공격선 부근 사전 배치된 지원 화기(기관총)가 맹렬한 지원 사격을 가했으나 교묘히 위장된 적을 식별할 수 없는 상태여서 그 효과는 의문이었다.
이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제2소대의 피해는 급증하고 사태가 호전될 전망이 없어 현 위치에서 응사하다가 완전히 어두워진 후 대대장에게 현 상황을 보고한 후 재공격 건의하여 직후방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대대장은 야간공격을 지시했으나 부대의 손실과 사기 저하, 야간 공격 경험부재 등을 이유로 불가함을 건의하여 대대장의 명령을 취소시켰다. 이어서 공격대기 지점에서 가면으로 들어갔으나 전, 사상자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5. 4월 23일의 상황
동일한 방법의 무모한 공격을 회피하고, 손실을 더 이상 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57㎜ 등 직사 화기 사격으로 적을 무능화시킨 후 재공격을 하겠다는 계획 하에 08:00경 57㎜ 2정, 탄약 400발, 마대 200매 긴급 수송 요청하였다. 이어서 13:00경 적 진지로부터 60m 이격된 지점에 유개 총상을 설치 후, 사계 상의 수목을 제거하여 사계청소를 완료했다.
14:00경 작일 확인된 의심스러운 지점을 일일이 표정, 제2소대장 지휘하에 2정의 57㎜ 무반동총 사격을 개시하였다. 20여 발 정도를 사격하자 적의 박격포 사격과 기관총 사격이 57㎜ 총상에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사수들은 사격을 중단하고, 엄폐하거나 안전 지역으로 대피했다가 재투입하는 등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계속 사격 80여 발 사격하자 적진지는 완전 침묵하였다.
15:30경 19번 도로 차단지역 회복 전투 중 대대장으로부터 “9중대는 현재 시간부로 제1대대로 작전 배속된다. 중대를 철수시켜 집결시키고 중대장은 명령 수령차 제1중대 기지로 16:00한 출두하라”는 지시를 무전으로 수신하였다.
16:00경 제1중대에 기지에 도착하여 연대장에게 도착보고 및 제3대대장에게 작전경과를 설명하였다. 당시 제1중대 기지는 적 포격을 받고 있었으며, 전사자를 처리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방치하고 있는 참상이었다. 이때 연대장 김창열 대령으로부터 638고지 전투에 대한 상황 설명을 청취후 구두 작명을 수령하였다.
이때의 작명 요지는 “638고지에는 수색중대를 포함한 3개 중대가 공격이 저지된 상태에서 고착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모든 수단 방법을 망라했으나 작전이 진전되지 않고 있다. 내일까지 작전을 종결시키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서 새로운 2개 중대를 투입하여 이 고지를 탈취코자 하는 바, 제9중대는 명일 03:00에 집결지를 출발, 적 배후를 공격하며(조공인 듯) 제4중대는 06:00에 적의 정면을 공격한다. 누구든지 638고지에 먼저 올라가는 사람에게는 태극무공훈장이 약속되어 있다”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제4중대와 제9중대가 추가 투입된 이유는 고위층으로부터 조기에 작전을 종결하라는 독촉이 빗발치고 있었기 때문에 기지에 보유하고 있었던 제4중대와 비교적 전투력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도로개통 작전을 통하여 전투경험을 축척하고 부분적 승리로 사기가 유지된 제9중대를 투입했다고 한다.
당시 연대장이나 연대참모들에게 638고지 후사면의 적정에 대하여 문의했으나 답변해 주는 참모는 없었으며, 배후 공격을 시도한 일도 없었다고 했다. 중대 집결지로 복귀 후 638고지 작전 투입 경위를 설명해 주고, 예상되는 적 배치선까지 제3, 1, 2소대 순으로 종대대형으로 접적전진을 한 후, 적진 직전방에서 제3소대를 좌, 제1소대를 우로 제2소대를 예비로 한 대형으로 전개, 638고지를 향하여 적 진지를 돌파해 나간다는 개념의 단편 명령 하달하였다. 집결지에는 부상자를 잔류시키도록 하였다.
6. 4월 24일의 상황
03:00경 간단한 전투식량을 취식 후 시간을 다투어 638고지 배후로 전진했다. 전진로는 전형적인 잡목 정글지역으로 최초로 시도하는 작전으로서 심야의 통로 개척은 시간을 다투는 중대의 진출을 극히 더디게 했으며, 진로상의 주간 포화로 인한 산불은 중대의 기도를 그대로 노출시켜 주었다.
05:30경 60° 경사의 638고지 배후에 근접하자, 소대규모의 적 진지에서 박명 상태의 어두움에도 맹렬한 총격을 가해오면서 산발적인 B-40, 60㎜ 박격포 사격을 가해왔다. 어둠이 걷히기 전에 적진에 육박해야만 적의 포화를 피하고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부대 기동 속도를 재촉했으나, 험준한 지형, 잡목, 적의 사격 등은 큰 장애 요인이었다.
제3소대가 적진 100m까지 접근했을 때는 완전히 날이 밝았고, 적 포격이 중단된 대신 적의 기관총과 소화기가 맹렬한 불을 뿜고 있었다. 적 진지는 우뚝 선 급경사 상부에서 중대를 완전히 감제하고 적 진지 전면은 개할지로서 적은 화력 발휘에 극히 용이한 지형을 점령하고 있었다. 완전히 감제 당한 제3소대는 앞으로 더 기동하기도 어려웠으나, 소대장의 과단성 결여로 고착된 상태에서 계속 손실만 발생하고 있었다.
현 상황 타개책으로 소대장에게 소수인원을 선발(특공대)하여, 진로상의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도록 명령했다. 특공대 자원자 중 조계표 상병이 소대의 사격지원을 받으면서 수류탄만 휴대, 적 기관총 진지로 포복으로 접근 후 약 20m 전방에서 수류탄 3발을 계속 투척했으나 워낙 교묘하게 협소한 총안구인지라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번번이 바깥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좌우측 진지에서 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은 조계표 상병은 그 자리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정면돌파가 도저히 불가함을 판단한 나는 후속 하던 제1소대장 정한모 중위에게 명하여 제1소대를 적의 허리를 치면서 적 배후를 공격토록 지시했다. 타 지역 전투에서도 곧잘 용맹을 떨치던 정 중위는 그 독특한 함성으로 소대를 질타하자, 소대원들은 험준한 지형을 기민하게 기동하면서 적 사격을 받아가면서 적 측면의 2개 진지를 제압하고, 순식간에 적과 대등한 표고의 배후 지형을 점령했다.
앞과 뒤에서 협공 당하는 적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적과 대치하에 사격으로 응사하면서 오전을 보냈다. 주간에 이루어진 돌격작전의 무모함을 판단한 나는 제1소대로 위치를 옮긴 후 지원화력으로 적 진지를 파괴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대공포판을 T자로 설치하여 건쉽을 요청하자 놀랍게도 적 진지에서도 동일한 대공포판을 깔고 기만 작전을 시도했다. 작전 중 의 보급시에도 적은 대공포판을 사용하여 일부 물자를 보급 받는 기현상이 있었다.
무장 헬기의 식별 착오로 오인 사격이 있었으나, 즉각 사격 중지 요구로 다행히 피해는 없었으며 무장 헬기의 공격이 진지에 엄폐된 적에게 큰 효과는 없어 선회중인 팬텀기의 폭격을 요청했다. 이를 위해 중대를 적 진지로부터 638고지 쪽으로 300m 이격 후 팬텀기 편대의 최초 폭격이 시작되자, 요망지점으로부터 500m 이상의 편차가 생기면서 인접 중대에서 다 죽는다고 아우성이어서 점 표적 폭격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항공폭격을 중단시켰다.
15:00경 궁여지책으로 105㎜ 포격을 유도하기로 결심하고, 아군의 안전을 우려한 관측장교의 반대를 무시하고, 포병 통신망에 가입하여 제9중대장임을 확인시키고, 포병 대대장을 호출하여 사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요구하는 데로 지원하겠다는 응낙을 받고 포병 정밀사격으로 들어갔다. 약 30분간의 정밀사격 후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확인한 결과, 5~6구의 시체와 박격포 B-40, 포탄, 식량 등의 다량의 물자가 어지러이 흩어진 것을 확인했고, 일부 생존 병력은 집요한 중대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서남향으로 도주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적 진지를 탈환 후 제1대대장이 현지를 답사했으며, “제9중대의 공격 지연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장을 보고 나서는 제9중대의 격전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작전 후 아쉬웠던 점은 전투 손실을 고려 백병전을 감행하지 않고, 지원화력으로서 제압함으로서 적에게 도주 기회를 제공한 점이었다.
7. 작전결과 및 교훈
이때의 전투에서 중대는 적 사살 6명과 B-40, 기관총, 소총 등의 장비를 노획하고, 다수의 포탄 및 수류탄과 식량을 노획하였다. 또한 아군 역시 전사 2명, 전상 7~8명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작전의 교훈으로는 작전 지도의 미숙으로 병력을 축차 투입함으로서 과도한 전투력 손실을 초래되었다. 또한 협소한 지역에서 장기간의 작전을 치루었음에도 적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적이 638고지 정상에만 배치된 것으로 인식하여 대등한 서남부 고지 적정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시간과 피해를 자초하였다는 점이다.
초급 지휘자(소대장)의 과단성이 소대의 전투의지를 좌우하기 때문에 전투 기술보다는 담력이 긴요하였다. 또한 가능한 모든 적에 대하여 기만작전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과 특공대 편성시 조직성 결여, 638고지 탈환 즉시 전과확대 추격을 실시했어야함에도 전과확대의 기회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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