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창 신씨(居昌 愼氏) 시조(始祖) : 신수(愼修)
신수(愼修) 그의 아들 신안지(愼安之)도 문종(文宗) 때 지수주사(知水州事)를 지냈으며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고 특히 한어(漢語)에 능통(能通)하여 중국(中國)에 보내는 공문서(公文書)를 많이 썼다. 고종(高宗) 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던 신집평(愼執平)은 시조(始祖)의 8세손이다.
2. 거창 신씨(居昌 愼氏) 유래(由來)
신씨(愼氏)는 중국(中國) 천수(감숙성 위천도)에서 시작(始作)된 성씨(姓氏)이다. 우리나라 신씨(愼氏)는 송(宋)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인 신수(愼修)가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사신(使臣)으로 와서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라 한다. 그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수사도(守司徒)와 좌복야(左僕射)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歷任)하였으며, 1101년 사망(死亡)하자 숙종(肅宗)이 공헌(恭憲)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6세손(世孫) 신집평(愼執平)이 강화도 천도 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몽골에 대항(對抗)하다 전사(戰死)하였다. 그의 아들 신성(愼成)은 군기감사(軍器監司)를 역임(歷任)하였으며 아버지가 사망(死亡)하자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창(居昌)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 신씨(愼氏 申氏)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3. 거창 신씨(居昌 愼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거창(居昌)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서부(北西部)에 위치(位置)하는 지명(地名)으로 동부(東部) 지역(地域)을 가소, 서북부(西北部) 지역(地域)을 임례(稔禮) 혹은 남내(南內)라 하였다. 본래(本來) 거타(居陀)‧거열(居烈)이라 불리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 가소를 함음현(咸陰縣)으로, 남내를 여선현(餘善縣)으로 개편(改編)하여 거창군(居昌郡)으로 통합(統合)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여선현을 감음현으로, 함음현을 가소현으로 고쳤다가 1018년(고려 현종 9) 합주(陜州: 陜川)에 통합(統合)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거제현(巨濟縣)과 합(合)하여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 1496년(연산군 2)에 거창군(居昌郡)으로 승격(昇格)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다시 현(縣)으로 강등(降等)되었다. 1658년(효종 9) 안음(安陰: 安義)에 편입(編入)시키고, 1739년(영조 15)에 거창부(居昌府)로 승격(昇格)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거창군(居昌郡)이 되었고, 1937년 거창면(居昌面)이 거창읍(居昌邑)으로 승격(昇格)되었다.
4. 거창 신씨(居昌 愼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참판공파(參判公派), 서령공파(署令公派), 양간공파(襄簡公派) 감사공파, 참의공파, 동중추공파, 통례공파, 군수공파, 학생공파, 현령공파, 대헌공파, 장성공파 등으로 나뉘어졌다.
5. 거창 신씨(居昌 愼氏) 항렬표(行列表)
세(世) | 26 | 27 | 28 | 29 |
항렬자(行列字) | 필(必) | 구(九) | 병(炳) | 종(宗) |
세(世) | 30 | 31 | 32 | 33 |
항렬자(行列字) | 성(晟) | 범(範) | 용(鏞) | 재(縡) |
세(世) | 34 | 35 | 36 | 37 |
항렬자(行列字) | 중(重) | 규(揆) | 택(澤) | 상(相) |
세(世) | 38 | 39 | 40 | 41 |
항렬자(行列字) | 환(煥) | 기(基) | 호(鎬) | 영(泳) |
세(世) | 42 | 43 | 44 | 45 |
항렬자(行列字) | 근(根) | 연(然) | 규(圭) | 현(鉉) |
세(世) | 46 | 47 | 48 | 49 |
항렬자(行列字) | 원(源) | 동(東) | 영(榮) | 재(載) |
6. 거창 신씨(居昌 愼氏)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조선초(朝鮮初)에 판이주현사를 지낸 이충(以衷)이 숭록대부로 의정부 우찬성에 증직되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거창신씨의 백파(제1파), 중파(제2파), 계파(제3파)의 파조가 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이충의 아들 중 장남 기(畿)는 충청도사와 이조정랑, 성주목사를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로 호조참판 겸 보문각제학에 추증되었고, 차남 언(言)은 서령을 지냈다. 한편 셋째 아들 전(詮)은 예문관 직제학, 호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순충보조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거창부원군에 추봉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딸과 혼인한 승선(承善)은 거창신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익대삼등공신으로 거창군에 봉해졌으며, 성종 때 좌리삼등공신에 올라 동지돈령부사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에 책봉되면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나 사위인 연산군의 폭정을 개탄하여 병을 핑계로 여러 번 관직을 사퇴하였고, 크고 작은 모든 기밀의 정무는 동료 재상들에게 일임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로 정국에 임하여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능하다고 희롱하였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수근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영의정 승선의 아들 수근(守勤), 수영(守英), 수겸(守謙) 3형제는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의 정치일선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중종반정 주역들의 보복으로 모두 피살되는 불운을 맞았다.
수근의 아우 수영(守英)도 형조판서에 이르러 중종반정에 화를 입었고, 막내 수겸(守謙)은 당시 개성 유수로 있다가 박원종이 심복을 보내 거사할 것을 권유했으나 "우리 형제의 마음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내형에게 물어보라" 하였다가, 반정 후에 박원종이 보낸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예조참의 후갑(後甲)의 아들 자건(自健)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교하로 내려가 서예에 전심하여 필명을 떨쳤으며, 특히 왕희지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였고, 창덕궁의 <요금문> 3자를 썼다.
회의 현손 천익(天翊)과 해익(海翊)은 쌍둥이 형제로 유명했는데, 그의 어머니 이씨의 태몽에 학 한 쌍이 날아와 팔에 안겼다가 한 마리는 하늘로 올라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날아갔다고 하여 쌍둥이의 이름을 천익(天翊)과 해익(海翊)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중 천익은 효종때 부제학과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한성부윤으로 치사했으며, 해익은 광해군때 알성시에 장원한후 예조좌랑을 역임하여,[상보민편]을 저술하고 학행이 뛰어났던 후손 무(懋)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7. 거창 신씨(居昌 愼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와 인구수(人口數)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
-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금릉리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거창신씨는 13,623가구 총 43,89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첫댓글 상큼하네요. 울 모두에게 필요한 정보이고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