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해석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아르케 아카데미 홈페이지 : www.arche.or.kr
아르케 아카데미 다음 카페 : http://cafe.daum.net/archeacademy
종교개혁 시대
16세기 초부터 서서히 시작된 종교개혁은 17세기 초까지 계속되어 중세의 교권 통치시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중세와 근세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은 교황과 교회의 절대적 권위에 의하여 지배하던 시대에 종말을 고하게 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했다는 말이다. 종교개혁 운동 이전에도 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교황과 교회의 절대적 권위가 억압하고 또한 사회적 지지를 충분히 얻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고한 희생만 치르면서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마르틴 루터를 위시로 한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문예부흥으로 인권에 대하여 자각하게 되고 이성적 신앙이 강조되면서 중세의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의 강요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되었으며, 문화와 사회적으로 다방면에 걸친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1445년 구텐베르크(Gutenberg)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후에 많은 번역성경이 대량으로 인쇄되어 쏟아져 나오면서 성경해석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중세 천 년 동안 교회가 정치화, 권력화, 제도화되면서 기독교에서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복음은 변질되고, 진리는 왜곡되며, 신학은 교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민중에 대하여 교회 정치의 억압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순수한 믿음과 경건한 헌신을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교권으로부터 해방되고자 열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종교개혁의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으로 하여금 최고의 유일한 권위를 회복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성경이 있어도 일반 성도가 그것을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정확한 뜻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더욱 허락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접하지도 알지도 못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지만, 중세교회는 자신의 부패성을 감추고자 비겁하게도 성경을 신자들로부터 철저히 격리시켰다. 성경에 대한 해석은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었고, 교황무오설을 주장하여 심지어 교황이 성경의 내용을 바꾸어도 상관없다고 하였다. 카톨릭 교회가 십계명 중에서 제 2계명인 우상숭배 금지를 없애고 대신에 제 10계명을 두 개로 나누어 억지로 십계명을 고쳐 만든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신학을 비롯해서 교회의 모든 행동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사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수많은 신학과 그에 따른 교파들이 나타난 것 아닌가? 성경을 교회가 해석한다고 할 때 그 교회가 완전하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다. 주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셔도 신자들은 불완전한 인간이므로 얼마든지 변질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된 교회의 획일적 해석이 지배했던 중세의 기독교는 권한을 움켜쥔 성직자들이 부패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통하여 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교회의 터무니없는 해석의 허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교회의 일방적 해석'은 점차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해석은 종래의 전통적 해석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즉, 다중적 의미를 배제하고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중시하였고 교회 전통보다는 성경 그 자체를 매우 강조하였다.
교회전통을 중시하던 라틴 교부들의 사상이 지배하던 시대가 가고, 안디옥 학파 헬라 교부들의 학풍이 천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되살아난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었으며, 이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새로운 신념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교권 수호를 위한 신학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어졌으며, 참된 신앙을 위한 새로운 신학의 정립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시대적 사명으로 부여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로마 카톨릭이 인정하던 외경(Apocrypha)을 정경에서 제외하여 현재의 66권으로 정하였으며, 또한 중세의 대표적인 성경인 불가타 라틴번역본을 사용하는 대신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원어 성경을 직접 연구하고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원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기 시작하고, 원어 문법책과 원어 성경이 출판됨으로써 원어 연구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Erasmus)는 종교개혁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중세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경의 복음 정신으로 복귀할 것을 역설하여 종교개혁에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던 마르틴 루터가 성공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469년 네덜란드에서 사생아로 출생하여 9살 때부터 수도원에서 양육되었다고 한다. 20살쯤 되어서 정식 수도사가 되었고 주교의 비서도 하면서 파리대학에서 신학과 라틴 고전을 연구하였다. 생활을 위해 라틴어 개인교수를 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토마스 모어 등의 인문학자와 알게 되었다. 그후 파리로 돌아와서 헬라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절부터 카톨릭 교회 제도에 대하여 서서히 비판적인 경향을 띠었다.
그가 런던에 있을 때 모어의 집에서 쓴『우신예찬(Encomium Moriae)』에서는 '어리석음의 여신'이 등장하여 세상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 많은가를 열거하여 어리석음에 놀아난 세상을 비웃는다. 여기서 그는 여신의 승리를 자랑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공허한 논의와 성직자들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서술하였다. 또한 그는 1516년에『헬라어 신약성경』의 인쇄본을 처음으로 출판하였다. 이를 계기로 초기 사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자 불가타 라틴역 성경의 오류가 많이 드러나면서 교회의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비판은 할지언정, 교회를 떠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1517년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격화되었을 때, 루터의 세력들이 그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지나치게 정열적인 실천행동에는 함께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그가 맹렬히 비판을 가한 가톨릭교회와 좀처럼 한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신교도들 모두에게 미움을 삼으로써 곤경에 처한 적도 많았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에서 광산업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낙뢰로 인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하고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어 12년간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후 수도회와 대학에서 교수로서 중책을 맡다가,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시므로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시는 분임을 재발견하고, '오직 믿음(Sola Fide)'이란 교리를 확정하게 된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 현실은 그의 믿음과는 너무나 달랐다. 당시에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팔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벌써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분위기가 돌고 있었다.
루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1517년에 교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를 자신의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이후에 그는 교황으로부터 받은 파문칙령을 불태워 버렸고,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喚問)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마침내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후 작센 지방의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경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후부터 그는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100여권에 이르는 많은 저서와 수많은 강의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교황과 교회의 전통은 신적 권위가 없다고 하였다. 중세는 라틴 교부들에 의해 교회 전통이 최고로 여기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여 장장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지도자들이 교리와 전통을 정하고 교권을 전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하였던 교회 전통과 교권 중심의 중세 기독교에 루터는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던진 셈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중세의 성경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세월을 풍미한 풍유적․다중적 해석을 배척하면서, 성경 본문은 하나의 단순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먼저 발견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본문의 역사적 상황 하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법적 해석 원리에 따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성경에 영적 의미가 없지 않으므로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루터에게서 영적 의미란 다중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즉, 다중적이고 풍유적인 의미는 해석자의 교묘한 언어 유희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영적 의미는 본문의 심층적 의미로서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의미를 발견하려면 언어학, 역사, 신학 연구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성령의 조명하심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균형의 원리는 현대 성경해석학에서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는 또한 신구약 전체를 기독중심론적으로 예표적 해석을 하였는데, 이는 약간 주관주의적 해석으로 될 소지가 없지 않아서,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러한 본문들을 경시하거나 무시하였다.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혹평한 것도 그러한 오류 중의 하나였다. 그가 성령의 조명으로 바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은 옳으나, 그러면서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성경에만 집착한 것은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사상은 루터파 교회를 형성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게하르트와 후터 등에 의해 계승되어져 갔다.
(쯔빙글리)
쯔빙글리(Zwingli)는 1484년 스위스 태생으로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를 추종하여 인문주의적 교양을 쌓다가, 취리히 대성당의 사제가 되고 성경을 강해하여 명성을 쌓으면서 점차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후 계속적인 강해설교를 통해서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취리히 시(市) 당국을 설득시켜 종교개혁에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특히 형식적인 신앙을 철폐하는 일에 앞장섰다. 금식의 계율을 부정하고, 성화상을 폐지하며, 심지어 십자가와 단상 그리고 오르간의 폐지까지 제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은 성경을 철저히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금식 철폐는 주님께서 무의미한 금식을 경계하신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였고, 각종 성물과 기구를 폐하자는 주장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제 2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는 또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의심하여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재세례파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쯔빙글리의 이러한 운동의 영향은 스위스는 물론 다른 나라 도시에까지 번짐으로써 독일의 루터파와 의견이 대립되어 정치적으로 고립된 적도 있었다. 스위스 내에서 신교를 따르는 주(洲)들과 가톨릭교를 견지하는 주(洲)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때 취리히시의 종군목사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으며, 그의 사후에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블링거에 의해 계속되었고, 그 다음에는 칼빈에게로 넘겨졌다.
(윌리엄 틴데일)
틴데일(William Tyndale)은 1494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루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다.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이루었다면 틴데일은 영국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킨 사람인데, 단지 루터처럼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그는 종교개혁가라기 보다는 성경번역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헬라어를 배우고 에라스무스의 인문학회 그룹에 참가하였으며, 영국에서 루터주의 보급의 산실이었던 케임브리지대학에서도 수학하였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한참 진행되던 1521년경 성직자가 되면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 말씀이 밝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일반 백성들이 읽을 수 있는 영어로 된 번역 성경을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헬라어 성경(표준 원문)에서 직접 번역을 착수한다. 그러나 런던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독일로 가서 신약성서의 영역본을 인쇄하여 보름스에서 이를 완간하였다. 이때 루터를 만나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의 영역본은 후에 발간(1611년)되는『흠정영역성경』의 기초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영국에 보내자 주교들이 불태워버렸다. 그밖에 구약 성경『모세오경』등도 영역을 하였는데, 그의 힘차고 깨끗한 문체는 성경뿐만 아니라 영어 산문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여 루터처럼 이신칭의를 역설하였고, 츠빙글리의 주장에도 많이 동조하였다. 그는 많은 강해서를 통해 자신의 성경해석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루터보다 더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의 경향을 띄고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전통과 해석보다 높으며, 국왕은 교황보다 세속적으로 그 권위가 높다고 주장하여 한때 헨리 8세의 호의를 얻기도 하였으나, 국왕의 이혼에 반대하여 신임을 잃게 되었다. 그후 영역본 성경의 제작 배포 등이 문제가 되어 이단자로 지목되어 수배를 받고 마침내는 종교재판을 받고 순교하였다.
(멜랑톤)
멜랑톤(Melanchthon)은 1497년 독일 태생으로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다. 후에 비텐베르크대학에서 헬라어 교수를 하면서 루터의 사상에 공명하여 친분을 맺었고, 라이프치히 논쟁(루터와 카톨릭 교회측의 에크와의 신학 논쟁)에서 루터를 적극 지지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조직신학서라고 할 수 있는『신학강요』를 펴내서 교의신학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그후 신학과 철학 교수를 하면서 성경의 독일어 번역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종교개혁운동에 표면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새로운 교육제도와 일반 중고등교육의 학제 개혁에 앞장서며 특히 김나지움(Gymnasium) 설립에 이바지하는 등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였다.
(불링거)
1504년에 스위스에서 출생한 불링거(Bullinger)는 교부들의 신학을 공부하다가 쯔빙글리에게 영향 받고 종교개혁에 눈뜬 후 완전한 개혁주의자가 되었다. 쯔빙글리를 도와 교회 개혁에 힘쓰다가 그가 전사한 후에 후계자로서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끌어 갔다. 그는 성경 주석과 설교집 등의 많은 저서를 내었으며, 해석의 입장은 종교개혁 시대의 조류에 따라 문자적인 해석을 선호하였다. 그는 루터에게도 영향 받기는 했지만 몇 가지 신학적인 문제로 루터파와는 논쟁을 벌였고, 칼빈과는 친화적으로 지내면서 스위스에서 칼빈이 종교개혁을 성공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칼빈)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더불어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던 칼빈(Jean Calvin)은 1509년 프랑스에서 소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신학을 하고 부친의 소원대로 오를레앙 부르주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23~4살 때 벌써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는데,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연구를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스위스 바젤로 피신하였다. 그 곳에서 약관 27세의 나이로 복음주의 고전이 된『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 책의 목적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내용은 기독교에 관하여 많은 것을 조직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깊은 사상과 풍부한 논리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흠이라면 독설적인 표현이 많다는 것이다.
그의 종교개혁가로서의 출발은 쯔빙글리의 후배인 파렐(Farel)로부터 스위스의 수도인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종교개혁의 꿈을 스위스에서 펼치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는 루터와 쯔빙글리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고 철저하게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정정치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설교자와 신학교교수로 있으면서『로마서 주해』등을 저술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수행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엄격한 '교회규율'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이단을 강하게 척결하였다. 그러나 유니테리안(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오직 성부의 신성만을 인정함)이었던 세르베투스를 분살(焚殺)한 것은 그의 급격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일면을 보여준 것으로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는데, 그 과정에서도 어떤 패륜아를 돌로 처 죽이는 형벌을 집행하기도 하는 등 그에게는 중세의 잔재로 여겨지는 과격한 면이 있었다.
아무튼 제네바는 그후 종교개혁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즉, 칼빈의 사상은 영국에서 낙스에게 영향을 끼쳐 영국의 퓨리터니즘(청교도주의) 형성에 배경이 되었고, 스위스와 프랑스에서는 그의 후계자인 베자가 종교개혁을 이어갔다. 칼빈주의와 존 낙스의 사상으로 후에 장로교파가 형성되었으며, 장로교는 나중에 다시 독일, 화란, 미국으로 나뉘어 성향이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칼빈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는 예정론 등 많은 부분을 어거스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인『기독교강요』에서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나중의『주석집』등에서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다중적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어거스틴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초기에는 어거스틴의 영향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신학 체계를 세우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을 평가할 때 흔히 신학자와 종교개혁가로서 그의 업적을 언급하게 되지만, 사실 그의 진면목은 성경해석자로서이다. 그의 대표작품도『기독교강요』를 꼽고 있지만, 그가 더 심혈을 기울이고 쓴 것은 중년 이후의 작품인『성경 주석집』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과 구약 몇 권이 제외된 성경 전문(全文)에 대하여 자세한 주석을 통해 그는 성경해석자로서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그는 다중적 해석이나 애매모호한 영적 해석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하였는데, 그렇다고 영감과 조명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칼빈 주석은 간결하고 명쾌한 해석을 한 것이 특징이며, 오늘날의 현대 성경해석자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베자)
베자(Theodorus Beza)는 1519년 프랑스 출신으로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인데, 청년기에는 문학가로 이름을 날리고 법률과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칼빈의 종교개혁이 성공하자 뜻을 품고 제네바로 갔다. 그 후 로잔 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저작활동에 힘쓰는 한편, 칼빈의 협력자 겸 후계자로서 활약하다가. 칼빈이 죽은 후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성경 수집과 사본 연구에도 힘을 쏟았는데, 대문자 사본을 발견하여 베자사본(Codex Bezae)으로 명명된 것이 있으며, 또한 베자판(版) 신약성경 필사본을 10판 이상 출판하였고, 신약성서 라틴어 번역판도 만들었는데 현재까지도 판을 거듭할 정도로 유명하다. 그밖의 저서로는『칼빈전』과『프랑스 개혁파 교회사』등이 있다.
(알미니우스)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는 1560년 네덜란드 출신인데,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서 칼빈주의자 베자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후 귀국하여 암스테르담에서 설교자로서 인기를 얻으며 레이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신학적으로는 처음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 섰는데, 특히 같은 대학의 동료 교수와 예정설 해석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그는 칼빈의 예정설을 온건하게 해석하여 예지예정을 주장하였는데, 알미니우스설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많은 지지자를 얻었고 이들은 알미니우스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교회로는 영국에서는 웨슬리안파, 미국에서는 메소디스트파, 홀리네스파, 그리고 구세군(救世軍) 등이 있다.
(존 낙스)
존 낙스(John Knox)는 1514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종교개혁가로서 청교도주의(Puritanism)를 창시한 사람 중의 하나이며 장로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 졸업 후에 카톨릭 신부가 되었으나, 루터파에 영향으로 종교개혁자가 되었고, 루터파가 박해를 받은 후에는 개혁주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프랑스군이 쳐들어와 살던 지역을 점령했을 때 2년 가까이 프랑스 군함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석방되자 귀국하여 에드워드 6세의 궁정목사가 되었다. 당시 영국은 선왕인 헨리 8세 때부터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조성되어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열렬한 구교(舊敎)주의자로서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 1세가 즉위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메리는 구교를 부활시키려는 스페인 출신의 남편에게 협조하여 부왕 헨리와 이복 오빠인 에드워드의 종교개혁을 중단하면서 신교에 대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가한다. 이때 낙스 역시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유럽 대륙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때 제네바로 가서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종교전쟁에서 개혁파가 승리하자, 에든버러에서 개혁파 교회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주저인『저항권신수론』은 개혁파 교회의 이론적 지주가 되었고, 그밖의 저서에『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등이 있다.
(영국 청교도)
청교도(淸敎徒)는 16~17세기 영국 및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칼빈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일컫는 말로서 순수함을 지킨다는 뜻에서 퓨리턴(Puritan)이라고 한다. 이들의 초창기 지도자였던 존 낙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신정정치가 성공하자 영국에서도 카톨릭을 개혁하여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함으로써 장로주의와 청교도주의가 성립되었다.
이들은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 국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로마가톨릭적인 제도와 의식 일체를 배척하였다. 또한 경건한 삶을 추구하면서 철저하게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후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에 비국교도로서 심한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갔다. 그 중에서도 신대륙의 플리머스에 식민지를 개척한 메이플라워호의 '필그림 화더스(Pilgrim Fathers)'는 유명하다.
영국의 청교도는 점차로 절대왕정에 대한 정치적 요구와 결부하여 의회에서 유력해지고,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회파가 왕당파에게 승리함으로써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됨)의 주체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교도 내부에서도 크게 장로파와 독립파로 분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청교도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크롬웰과 밀턴이 있는데,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 당시 정치가로서 의회파의 지도자로 왕당파와 싸워 이김으로써 영국에서 처음으로 군주제와 귀족제를 폐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후에 왕정이 복고됨으로써 그의 꿈이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밀턴은 문학가였지만 크롬웰을 옹호하여 도왔으나 왕정복고 후에 좌절하고 실명까지 한 상태에서 말년인 1667년에 대표작『실락원』을 남겼다.
청교도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은 1643~47년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이다. 이 고백서는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개혁을 위하여 1643~47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신교의 교회 회의에서 장로주의에 입각하여 제정, 채택한 신앙고백으로 전체 33장, 1만 4천여 단어의 장문으로 되어있다. 이는 제일 먼저 성경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성서의 권위'를 교리해석의 중심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전적 신앙고백서로서는 최후의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참신하여 기존 신앙고백서의 전형에 구애됨이 없는 점이 특색이다.
이 신조가 성립되기까지에는 상당히 많은 논란이 거듭되었는데, 의회 승인은 1648년에야 이루어졌다. 고백서의 내용은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교회의 영향을 받아 정통적 칼빈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일랜드 성공회의 신앙고백의 영향도 커서 그 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의 장로파 교회에서 기본적인 교의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
(재세레파의 성경해석)
재세례파(再洗禮派)는 영어로는 Anabaptists라고 하는데, 다시 세례(침례)를 받는다는 뜻의 헬라어에서 온 말이다. 재세례라는 개념은 유아세례와 관련해서 발생하였다. 쯔빙글리가 유아세례의 비자각적(非自覺的)인 점에 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비성경적으로 보게 되었다. 즉, 유아세례는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효력이 없으며, 성인으로서 자각적인 신앙고백을 한 후의 세례만이 유일한 세례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아세례를 받았더라도 성인이 되어 스스로 회개와 신앙을 결정하게 될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상이 결국 재세례파를 형성하였고 16세기 중반부터 유럽 각국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개인의 구원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성경의 가르침(겔 18:19-20)으로 볼 때 일견 이들의 생각이 그럴듯하지만, 바울 사도가 고전 7:14에서 부모가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하여지면 자녀도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게 되어 깨끗해진다고 가르친 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즉, 자녀가 아무 의식 없이 단지 부모의 믿음에 따라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그 자녀는 자신이 참다운 회심을 하기까지는 부모의 믿음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다는 영적 원리를 간과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성경의 세례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반드시 침례의 형식이 되어야 하며, 침례는 구속에 깊은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세례만 받은 자들은 반드시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또다시 받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 역시 잘못이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인 증거로서의 상징적 표징일 뿐 그것 자체가 구원에 효력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어떠한 외적 의식을 통해서도 좌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세례파는 극단적인 문자주의의 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이 파는 다시 내부적인 교리의 문제들로 인하여 여러 파로 나뉘어 졌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극단적인 문자주의자들로서 사상적으로는 대개 지상 천년왕국 등을 주장하며, 행동은 매우 과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모든 국가권력의 간섭을 부정하며 투쟁 일변도로 나가는 등 지나치게 과격하여서 가톨릭만이 아니라, 나중에는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도 배격당하였다. 재세례파의 탄생은 성경해석에 따라 수많은 교파가 나뉘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성경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일면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