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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진리와 상황진리의 분별
안유섭 목사 (아르케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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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의 까다로운 문제
성경의 어떤 말씀은 그 자체로 진리임에 틀림없지만, 오늘날에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 하나님께 드린 제사와 유대인들이 지키던 모든 절기는 오늘날 아무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 규례 역시 마찬가지다. 또 노예제도에 관한 언급이 있지만 오늘날은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예들을 보면 성경 본문에 있는 어떤 내용들은 당시의 역사와 문화로서는 당연하였지만, 오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런 것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도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럴지라도 성경은 모두 진리이므로 무리해서라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이처럼 성경 본문을 현재적 삶에 적용하는 강해에는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는 까다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성경 본문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자신의 현재적 삶에 적용하는데 무리가 없으면 진리로 알고 그대로 적용한다. 그러나 적용할 수 없을 듯이 보이는 것은 과거 성경 시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슬그머니 피하는 경향이 있다. 한 마디로 적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바른 강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분별력을 가지고 잘 결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편적 진리와 상황적 진리
성경 말씀은 진리로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속성상 항구불변성을 가지고 있지만, 획일적으로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에 따라 보편적 진리와 상황적 진리의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성경 본문의 어떤 내용이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해야 할 것이라면 그것을 보편진리 또는 보편적 진리(Universal Truth)라고 한다. 한편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비교하여 여러 가지 달라진 상황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대신에 본문에서 가르치는 어떤 정신을 배워야할 것이 있다면 상황진리 또는 상황적 진리(Situational Truth)라고 한다.
상황진리는 성경 기록 당시의 역사적 특수성(Historical Particularity)으로 인하여 보편적인 적용을 요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지라도 그 안에 진리로서 깨달아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상황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어떤 내용이 보편적 진리인지 또는 상황적 진리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을 성경을 읽는 사람 자신의 실행가능 여부로 결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보편적 진리
보편성(Universality)이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모든 것에 다 통하는 성질로 예외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해석에서 말하는 보편적 진리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성경 말씀들이다. 그렇다면 교파나 교리에 따라 좌우되는 주관적인 내용은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보편진리는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고 동의하는 객관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으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등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진리에 대해 의심하는 자는 없을 것이며, 그런 말씀은 확실하게 보편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편진리는 절대진리라고도 하는데 풍습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이는 많은 것들이 서로 달라진 상황에서도 역사적 특수성을 초월하여 영원한 규범적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보편적 진리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규범(Norm)처럼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누구나 알 수 있는 분명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곧 어떤 말씀이 규범은 아니지만 성경을 기록할 당시의 특수한 사정에 국한된 교훈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을 때 보편진리가 된다. 이는 성경 시대와 오늘날 상황이 서로 유사하여 적용하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을 때 보편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규범의 보편성)
보편적 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범(Norm)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함으로써 역사적 선례가 되는 것을 규범이라고 한다. 따라서 규범은 성경 내용 중에서도 원초적(原初的) 진술을 통해 명시적 교훈으로 제시된다. 원초적 진술이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 되는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도리 등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뜻한다. 또 명시적 교훈은 기독교 신앙에서 분명한 명제로 주어진 것들과 그 명령으로부터 유추되어 의심없이 교리로 삼을 수 있는 말씀을 가리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는 식의 표현으로 시작되는 가르침은 대부분 원초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은 명시적인 교훈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렵게 해석하고 어렵게 적용할 필요 없이, 쉽게 이해하고 또 쉽게 적용하면 된다. 원초적 진술로 이루어진 명시적 교훈은 모든 교회가 시대를 초월하여 그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범적 진리는 역사적 특수성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게 주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교훈이다. 즉, 모든 시대와 관련된 공시성(共時性)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이를 모범적 선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만찬을 시행하는 것은 틀림없는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마 26:19-28, 막 14:22-25, 눅 22:19-20, 요 13:3-21) 또 직접 명령(고전 11:23-25)하셨으며, 성경 곳곳(행 2:42-46, 행 20:7-11, 고전 11:23-26)에서 주님의 명령대로 이를 시행하였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모든 교회가 시행하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명백한 원초적 진술로 된 것이 규범이다.
또 세례를 베푸는 것도 규범으로서 시행하는 것이다. 세례 역시 주님께서 직접 받기까지(마 3:13-17, 막 1: 9-11, 눅 3:21-22, 요 1:29-34) 하셨고, 주님께서 세례를 주라고 명령(마 28:19-20, 막 16:15-16)하셨으며,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시행한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수없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언급은 원초적인 진술이며 명백한 교훈으로 모든 교회가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규범을 결정하는 것은 성경에 어떤 내용을 진리라고 하면서 모든 교회가 무조건 그것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규범은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성경에서 명령한 그대로 지켜야할 기준으로서 본질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유사한 상황의 보편성)
어떤 경우에 규범이 아니면서도 보편적 진리로 적용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성경 본문에 나타난 삶의 정황이 오늘날과 유사할 때, 그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별한 역사적 특수성을 발견하지 못할 때는 그것을 보편적 진리로 삼고 모든 교회에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 13:1-3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방으로 1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안디옥 교회가 금식하고 기도하며 그들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보내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성경이 항상 그렇게 해야한다고 명시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때나 오늘날이나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모습은 동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한 것은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선교사를 보낼 때 온 교회가 금식과 기도로 많이 준비하는 것을 보편적인 진리로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다.
또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와 비교할 때 전혀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교회 내에서 분파하는 문제, 성도끼리 세상 법정에서 소송하는 일, 혼인과 이혼에 관한 문제,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오해하여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바울 사도가 교훈하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규범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교훈들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주는 교훈은 보편진리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오용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그러한 문제는 초대 교회 당시나 오늘날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비슷한 상황 속에서 항상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은사의 목적을 오해하여 받은 은사를 서로 자랑하고, 교회 내에서 남용되어지며, 은사 받은 자를 부러워하여 같은 은사를 받고자 헛된 노력을 하는 일 등은 모든 인간들의 동일한 약점이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방언 은사에 대한 교훈은 고린도 교회만의 특수한 사정에 국한된 교훈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적용해야 하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도 그 말씀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상황적 진리
성경에는 누구나 따라야 할 보편적인 진리가 있지만, 아무나 그대로 따를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을 가진 진리도 포함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라도 오늘날의 상황과 많이 다른 경우는 보편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문화와 지리적 환경 등 역사적 특수성이 많이 개입된 내용은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해 우리는 상황진리로 다루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행 2:44-45에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하였다. 또 행 4:32-35에도 믿는 모든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므로 제 재물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행 5:1-11에는 자기 재산을 모두 내어놓지 않고 일부를 숨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성령을 속인 죄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모습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나니아 부부보다 더 욕심 많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멀쩡한 것인가? 초대교회와 지금은 하나님의 간섭과 역사(役事)가 다른 것인가? 아니면 과연 우리도 성경에 있는 그대로 행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대로 할 수 없다면 그 근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공산주의 이론이 어느 정도 이 구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것은 무조건 규범으로 여기고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한편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우리가 풀어야할 당면과제이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구약 시대 아간의 사건과 관련이 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처음 정복한 성(城)이 여리고였는데, 이때 하나님의 명령(수 6:21)대로 여리고의 모든 남녀노유와 짐승까지 모조리 멸절시키고 은금과 동철 그리고 재물은 여호와의 장막 곳간에 두었다. 그러나 유다지파의 아간이라는 자가 그중 일부를 탐내어 감춰두었다가 다음 정복지인 아이성(城)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결국 아간은 제비뽑기로 발각되고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그가 죽은 곳이 괴로움이라는 뜻의 아골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불리게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아간은 지은 죄에 비하여 지나치게 끔찍한 벌을 받지 않았는가? 아간보다 더 죄를 지은 자도 그만한 심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죄를 지었어도 시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악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 땅에는 아모리 일곱 족속이 살면서 악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의 도구로 삼아 그들을 심판(신 7:1-5)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이스라엘은 정결하고 거짓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아간은 하나님을 속였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에 범죄를 저질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될 때 추호의 거짓과 악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고자 아간의 범죄를 중하게 벌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거룩성을 훼손시킨 아간의 범죄를 상징적인 사건으로 삼아 백성들을 교훈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아간에 비하면 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죄를 지은 자들이다. 어찌 보면 죄라고 할 수도 없는 죄이다. 그러나 부부가 한 자리에서 죽음을 당한 것은 아간만큼이나 비참한 운명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애절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예표이며, 아간의 죽음은 추악한 죄악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할 때 어떠한 악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을 예표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하므로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성이 드러나야 중요한 시기였다. 그때 이들 부부가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거룩을 훼손한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고, 만대에 성도들의 교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는 교회의 시작이라고 하는 특정한 시기에 적용되는 상징성이 있는 사건이므로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거룩이 보존되고 성도에게 속임 없는 진실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상황진리는 모든 교회가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을 가진 진리로서 오늘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도 좋은 말씀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상황진리를 통해 어떤 정신을 찾고 배우게 된다. 아나니아 부부 사건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짓 없는 삶을 원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 상황진리가 보편적 진리와 함께 기록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차적 진술)
상황진리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대개 부차적 진술로 기록된다. 부차적 진술이란 원초적 진술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규범처럼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고, 부수적으로 암시하거나 선례를 통해 유추가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암시적 교훈을 얻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성만찬을 시행하라는 것은 원초적 진술에 의해 규범으로 준수되어야 함을 알 수 있지만, 성만찬의 횟수와 장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부차적 진술에 의해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종합하면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할 때마다 떡을 떼었다는 표현이 나오고, 또 고전 11:25에서 주님께서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는데, 이를 거꾸로 말하면 주님을 기념할 때마다 성만찬을 시행하라는 뜻이 되므로 모든 예배 때마다 성만찬을 해야한다고 추론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명령은 아니다. 다만 그런 정신을 버리지 않은 채 교회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시행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부차적 진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세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례를 베푸는 것은 원초적 진술에 따라 규범으로 시행하는 본질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세례의 방법이나 횟수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세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반드시 침례의 형태로 베풀어야 한다든지 혹은 상징적인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서 장로교식의 세례의 형태로 베풀어야 한다든지 서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이다. 즉, 구원을 이루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 얼마나 자주 시행하여야 하는가에 관한 것도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아디아포라)
성경이 모든 것을 다 명문적(明文的)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때로는 성경에서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지만 성도의 삶에서 문제로 등장하는 것들이 있다. 음주, 흡연,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성경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고 방치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은 상황진리에 속한 문제로서 특별히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부른다. 라틴어에서 온 말인데, 성경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아디아포라는 흑백(黑白)간에 명확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회색지대(Grey Zone)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쪽 같기도 하고 저쪽 같기도 하다는 말이다.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디아포라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맡기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상황진리에서는 획일적인 규칙을 정하지 말고 어떤 정신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성경이 어떤 경우에는 술을 금하고있지만(레 10:9, 민 6:2, 잠 31:4, 롬 14:21, 딤전 3:8), 어떤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금하지 않는 듯한 표현(마 11:19, 요 2:3, 딤전 5:23)을 하므로 기독교인이 술을 먹어도 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흑백간에 명확하게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술을 금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십계명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상황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성경은 술에 대하여 명시적 규범으로 교훈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경우를 통해서 어떤 정신을 암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술을 허용하는 경우는 음식의 재료(신 14:26)나 약재(딤전 5:23)로 쓰일 때며, 신약 시대에 포도주가 음료수로 잠시 사용된 것은 비위생적인 식수환경 때문에 그렇게 것이다.
술에 대해 성경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앞에서처럼 여러 곳에서 술을 금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술의 추태에 대해 성경 곳곳(사 28:1-8, 잠 23:29-35, 시 75:8, 렘 13:12-14, 렘 25:15-18)에서 말씀하고 있으며, 포도주는 심판의 상징(시 60:3, 렘 25:15, 계 14:10, 계 19:15)이기도 하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나실인과 제사장에게 술이 금지되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나실인처럼 구별된 자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다. 따라서 술을 마시지 말라는 명령이 없더라도 우리의 양심이 술을 멀리 하게 되는 것이다. 술 취하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몽롱한 정신으로 거룩하신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상황진리의 역사적 특수성)
상황적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보통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적 특수성을 벗어날 수 없는 본문은 상황적 진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풍습과 관련된 것이다.
고전 11:4-15에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한다. 그 말씀이 규범이라면 카톨릭교회처럼 모든 여성도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고 예배드려야 하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고 예배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규범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는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문제는 당시의 풍습을 이해해야만 해결된다. 당시 헬라 반도 남쪽 아가야의 수도였던 고린도 지역은 해외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풍부하였지만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풍기가 문란하였다. 그래서 정숙한 여인들은 맨머리로 다니지 않고 항상 무엇을 쓰고 다니는 것이 상례였으며, 몸을 팔거나 천한 여자들만 그냥 다녔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에서 여인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이 당연하였다. 이는 당시의 풍습에 근거하여 성도에게 경건한 예배를 드리라는 암시적인 교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이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오늘날도 머리에 무엇을 쓰고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성경말씀을 크게 잘못 해석한 것이다.
또 하나는 특정 시기에만 해당하는 내용도 상황적 진리일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고전 7:8-9에서 바울 사도는 미혼자들과 과부들에게 혼인하지 말고 그냥 지내라고 하였고, 7:25-28에서는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처녀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결혼하는 것이 죄짓는 것은 아니지만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잘못 해석하면 기독교인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손을 남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의 씨가 말라버릴 것이다. 실제로 카톨릭의 신부들과 수녀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결혼하지 않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창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맞지 않으며, 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여주신다는 약속과도 상치된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임박한 환난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으므로 특수한 시기에 적용된 상황진리인 것이다.
AD 55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당시에 예루살렘은 몹시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다. 로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저항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의 수위를 높였고, 백성들은 점점 더 살기 힘들게 되어져 갔다.
그 때 많은 기독교인들은 어렵고 힘든 당시 상황을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마 24:1-3)와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끝(마 24:3)에 대한 여러 가지 징조들로 이해하면서 주님의 심판의 날이 임박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요 14:18)을 기억하며 주님 오시기만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환난 때에는 마 24:19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기 밴 자와 젖 먹이는 자들이 쉽게 도망가지 못하고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가정을 이루기보다는 독신으로 지내면서 환난을 넘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의 경우처럼 특수한 시기에 있었던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모든 성도가 따라야하는 규범처럼 적용한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상황진리의 비본질적인 면)
둘째로는 비본질적인 내용 중에서 상황진리인 것이 많다. 비본질적인 것은 신앙의 핵심은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하나님의 존재와 이신칭의의 도리 같은 신앙의 핵심에 속하는 것이라면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므로 상황에 따라 적용이 달라진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어떤 내용은 진리임에는 틀림없지만 상황에 따라 적용을 좀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고전 8:4-13에서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에 대하여 지식이 있는 자는 거리낌 없이 먹지만(10절), 그렇지 못한 자가 따라서 같이 먹다가 양심을 다치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상의 제물을 원칙적으로는 먹을 수도 있지만 형제가 실족할까 두려워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롬 14:1-4에서도 같은 가르침으로 권면하고 있다.
즉,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는 본질에 속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고사떡 같은 우상의 제물을 절대 먹을 수 없다면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조상이나 우상에게 제사지내는 행위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로서 절대 금해야 하지만, 제사지낸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음식 자체가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딤전 4:4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모두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약한 형제가 그것을 보고 양심이 다칠 우려가 있을 때는 자기의 먹는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또 롬 14:5-6에 보면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므로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였고, 날을 중히 여기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 주께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갈 4:10-11에서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 때문에 바울 사도가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도 하였다.
또한 날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 역시 비본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주일 성수를 주장하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한다. 주일날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식적인 신앙이 된다. 주일날 오락을 하거나 쓸데없이 외식을 하면 안되겠지만, 생명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든지, 도둑이 들어서 경찰에 신고한다든지, 주일날이라도 만일 불이 났다면 그 불을 끄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의사, 소방관, 경찰, 군인과 그밖에 국가 기관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일날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꼭 주일날 예배드리지 못해도 다른 날 예배드릴 수 있다는 뜻이다.
또 교회가 무슨 절기를 그렇게 많이 지키는 것도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구약시대를 사는 유대인도 아니면서 성경에 있다고 해서 히브리인들의 절기를 그대로 따라 지키는 예가 많다. 한편으로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율법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절기를 지키려면 제사도 부활시켜야 한다. 절기 보다 중요한 것은 제사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에서 만일 제사가 빠지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잔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는 노예에 관한 언급이 많다. 물론 노예를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예에게 잘 대해주라고 하더라도 이미 노예제도를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하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과연 노예제도는 성경에서조차 허락하는 제도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근세로부터 서구(西歐)의 많은 기독교 국가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제국주의를 건설하면서도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졌던 기독교 국가인 미국도 오랜 세월 노예무역을 하였고 노예제도를 합법화하였던 역사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선적으로 성경 기록 당시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므로 노예제도에 대한 언급은 그들의 문화가 그대로 반영된 것뿐이다. 그것이 오늘날 기준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성경 말씀은 그 자체로 진리인 것이다. 성경이 노예에 관해 말씀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인 가르침이 아니며, 당시 문화가 반영된 비본질적인 내용이다. 이는 절대적 규범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유추하여 기도교인이 서로 사랑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어떤 기본 정신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나 날을 지키는 문제, 또는 노예제도에 관한 언급 등은 모두 명시적 교훈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문제인 것이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된 양심을 따라 지혜롭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을 비본질적 교훈으로서 상황적 진리라고 한다.
보편진리와 상황진리의 관계
그러면 어떤 성경 본문을 모든 시대에 적용해야 하는 보편진리로 여기고 모든 교회가 성경에 있는 그대로 실천해야하는가 아니면 시간적, 공간적, 역사적, 문화적 차이 등을 인정하여 현재적 환경에 맞게 상황적으로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강의 기준은 있다. 우선 성경의 어떤 본문에서 특별하게 역사적 특수성을 발견할 수 없을 때는 보편적 진리로 삼고 모든 교회가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곧 역사적 특수성이 발견되지 않는 모든 내용은 보편적 진리로서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반대로 역사적 특수성이 있는 것은 상황진리로 보면 된다.
이상을 종합하면 다시 세 가지 유형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즉, 원초적 진술로 이루어진 명시적 교훈으로서 규범으로 적용할 것이 있고, 또 어떤 것들은 명시적 교훈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하여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를 상황의 유사성이라고 하며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여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또 성경 기록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 도저히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는 상황진리로서 이해하여 그 내용으로부터 어떤 정신을 배우는데 주력하면 된다.
성경 말씀을 보편적 진리와 상황적 진리로 구분하는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상황진리를 원초적 진술이 아니고 명시적 교훈도 아니라고 해서 보편진리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명시적으로 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한다고 해서 덜 중요하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암시적 교훈 속에서도 분명히 가르치는 어떤 정신이 있으므로 그것을 반드시 찾고 깨달아서 삶에 적용해야만 바른 강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