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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釐王元年, 秦抜我両城. 二年, 又抜我二城, 軍大梁下, 韓來救, 予秦温以和. 三年, 秦抜我四城, 斬首四萬. 四年, 秦破我及韓、趙, 殺十五萬人, 走我将芒卯. 魏将段干子請予秦南陽1)以和. 蘇代謂魏王曰:「欲璽者段干子也, 欲地者秦也. 今王使欲地者制璽, 使欲璽者制地, 魏氏地不尽則不知已. 且夫以地事秦, 譬猶抱薪救火, 薪不尽, 火不滅.」王曰:「是則然也. 雖然, 事始已行, 不可更矣.」対曰:「王独不見夫博之所以貴梟者, 便則食, 不便則止矣. 今王曰『事始已行, 不可更』, 是何王之用智不如用梟也?2)」
안희왕 원년에는 진나라가 위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켰다. 2년에는 또다시 위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켰고, 대량성(大梁城)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한(韓)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왔고, 온성(溫城)을 떼어주고 평화협상을 맺었다. 3년에는 진나라가 위나라의 4성을 함락시켜, 4만 명의 목을 베었다. 4년에는 진나라가 위나라와 한(韓), 조(趙) 나라를 연파하고, 15만 명을 죽였으며, 위나라의 장수 망묘(芒卯)를 쫓아버렸다. 위나라의 장수 단간자(段干子)가 진나라에게 남양(南陽)을 주고 휴전을 청했다.
소대(蘇代)가 위나라 왕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작위(爵位)를 노리는 자는 단간자요, 땅을 탐내는 자는 진나라입니다. 지금 왕께서 땅을 탐내는 자로 하여금 작위를 노리는 자를 장악하게 하고, 작위를 노리는 자로 하여금 땅을 탐내는 자를 장악하게 하면, 이것은 위나라의 땅을 완전히 잃지 않는 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땅을 바치면서 진나라를 섬긴다면, 이는 마치 장작을 안고서 불을 끄러 가는 것이니, 장작이 모두 타버리지 않으면 불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사실인즉 그러하오. 그러나 일이 이미 행해졌으니, 다시 바꿀 수는 없소”라 했다.
소대가 대답해 말하기를 “왕께서는 박국희(博局戲)에서 효(梟)를 중시하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유리하면 말을 먹어버리고, 불리하면 멈춥니다. 지금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이 이미 행해졌으니, 다시 바꿀 수는 없다’라고 하시면, 이는 왕께서 지혜를 쓰심이 효(梟)를 사용하는 지혜만도 못한 것 아니십니까?”라 했다.
九年, 秦抜我懐. 十年, 秦太子外質於魏死. 十一年, 秦抜我郪丘.3)
9년에는 진나라가 위나라의 회(懷) 읍을 함락시켰다. 10년에는 진 태자가 위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죽었다. 11년에는 진나라가 위나라의 처구(郪丘)를 함락시켰다.
秦昭王謂左右曰:「今時韓、魏與始孰彊?」対曰:「不如始彊.」王曰:「今時如耳、魏斉與孟嘗、芒卯孰賢?」対曰:「不如.」王曰:「以孟嘗、芒卯之賢, 率彊韓、魏以攻秦, 猶無柰寡人何也. 今以無能之如耳、魏斉而率弱韓、魏以伐秦, 其無柰寡人何亦明矣.」左右皆曰:「甚然.」中旗馮琴4)而対曰:「王之料天下過矣. 當晉六卿之時, 知氏最彊, 滅范、中行, 又率韓、魏之兵以囲趙襄子於晉陽, 決晉水以潅晉陽之城,5) 不湛者三版. 知伯行水, 魏桓子御, 韓康子為參乗. 知伯曰:『吾始不知水之可以亡人之国也, 乃今知之.』汾水可以潅安邑,6) 絳水可以潅平陽.7) 魏桓子肘韓康子, 韓康子履魏桓子, 肘足接於車上, 而知氏地分, 身死国亡, 為天下笑. 今秦兵雖彊, 不能過知氏;韓、魏雖弱, 尚賢其在晉陽之下也. 此方其用肘足之時也, 願王之勿易也!」8)於是秦王恐.
진 소왕(秦昭王)이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한과 위 나라가 초기와 비교해 볼 때 언제가 더 강한가?”라고 하자, 대답해 말하기를 “초기가 더 강합니다.”라 했다. 왕이 묻기를 “지금의 여이(如耳), 위제(魏齊)와 예전의 맹상군, 망묘는 누가 더 현명한가?”라고 하자, 대답해 말하기를 “예전만 못합니다.”라 했다. 왕이 말하기를 “맹상군, 망묘가 현명함을 가지고서, 강한 한과 위 나라 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한다 해도, 과인을 어찌하지 못했소. 지금 무능한 여이, 위제가 약한 한과 위 나라 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한다면, 과인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오.”라 했다.
측근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라고 했는데, 중기(中旗)가 거문고에 기대어서 대답해 말하기를 “왕의 추측은 천하의 형세를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지씨(知氏)가 가장 강해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를 멸하고, 한, 위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서 진양에서 조 양자(趙襄子)를 포위해, 결진수(決晉水)로서 진양성을 잠기게 하니, 잠기지 않은 곳이 세 판(版) 넓이뿐이었습니다. 지백(知伯)이 수세(水勢)를 순시했는데 위 환자(魏桓子)가 수레를 몰고, 한 강자(韓康子)가 동승했습니다.
지백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는 물이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이를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분수(汾水)는 안읍(安邑)을 잠기게 할 수 있으며, 강수(絳水)는 평양(平陽)을 잠기게 할 수 있습니다. 위 환자는 한 강자를 팔꿈치로 치고, 한 강자는 위 환자를 발로 밟으니, 팔꿈치와 발이 수레에서 서로 마주치자 지씨는 그 땅은 나뉘고,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진나라 군이 비록 강하지만 지씨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며, 한, 위 나라가 비록 약하나 진양성의 아래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들이 연합해 진나라에 공격할 때로서, 청컨대 왕께서는 그들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진나라 왕이 두려워했다.
斉、楚相約而攻魏, 魏使人求救於秦, 冠蓋相望也, 而秦救不至. 魏人有唐雎9)者, 年九十余矣, 謂魏王曰:「老臣請西説秦王, 令兵先臣出.」魏王再拝, 遂約車而遣之. 唐雎到, 入見秦王. 秦王曰:「丈人芒然乃遠至此, 甚苦矣!夫魏之來求救數矣, 寡人知魏之急已.」唐雎対曰:「大王已知魏之急而救不発者, 臣窃以為用策之臣無任矣. 夫魏, 一萬乗之国也, 然所以西面而事秦, 称東藩, 受冠帯, 祠春秋者, 以秦之彊足以為與也.10) 今斉、楚之兵已合於魏郊矣, 而秦救不発, 亦将頼其未急也. 使之大急, 彼且割地而約従, 王尚何救焉? 必待其急而救之, 是失一東藩之魏而彊二敵之斉、楚, 則王何利焉?」於是秦昭王遽為発兵救魏. 魏氏复定.
제와 초 나라가 연합해 위나라를 공격하니, 위나라는 사람을 시켜서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오가는 사신이 이어졌다. 허나, 진나라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위나라에는 당저(唐雎)라는 나이가 90여 세 된 사람이 있어, 그가 왕에게 이르기를 “늙은 이 몸이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 왕을 설득해, 신보다 먼저 진나라의 구원병이 출발하게 하겠습니다.”라 했다. 왕이 거듭 인사를 하고, 수레를 준비해 당저를 진나라에 파견했다. 당저가 도착해 진나라 왕을 알현했다.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노인장께서 아득히 멀리 이곳까지 오시느라 심히 고생하셨구려! 위나라에서 구원요청이 수차례 있었는데, 과인은 위나라의 다급함을 잘 알고 있소.”라 했다.
당저가 대답해 말하기를 “왕께서 이미 위나라의 다급함을 아시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것이, 신의 소견으로는 왕을 위해 정책을 행하는 신하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저 위나라는 만승(萬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서도 서면(西面)해 진나라를 섬기며, 동쪽의 속국으로 칭하고, 관제(官制)를 받아들이고, 봄가을로 조공을 바치는 까닭은 진나라가 강대해 족히 혈맹국이 될 만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초 나라의 군대가 이미 연합해 위나라의 근교에 모였는데 진나라의 구원병이 이르지 않는다면, 다급하지 않다고 핑계삼을 뿐입니다. 위나라가 아주 화급을 다투게 되면 위나라는 땅을 떼어주고 협약을 맺을 것인데, 왕께서는 무엇을 구하시렵니까? 끝까지 다급할 때를 기다려서 그들을 구하시려면, 이는 동쪽의 속국인 위나라를 잃고, 두 개의 적이라 할 제와 초 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이니, 그때는 왕께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 했다. 이리하여 진 소왕이 바로 군대를 보내어 위나라를 구원했다. 위나라는 다시 안정을 찾았다.
趙使人謂魏王曰:「為我殺范痤, 吾請献七十里之地.」魏王曰:「諾.」使吏捕之, 囲而未殺. 痤因上屋騎危,11) 謂使者曰:「與其以死痤市, 不如以生痤市. 有如痤死, 趙不予王地, 則王将柰何? 故不若與先定割地, 然後殺痤.」魏王曰:「善.」痤因上書信陵君曰:「痤, 故魏之免相也, 趙以地殺痤而魏王聴之, 有如彊秦亦将襲趙之欲, 則君且柰何?」信陵君言於王而出之.
조나라에서 사람을 시켜서 위나라 왕에게 이르기를 “저희 나라를 위해 범좌(范痤)를 죽여주신다면, 사방 70리의 땅을 왕께 헌상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위나라 왕이 말하기를 “좋다”라 했다. 사람을 시켜서 그를 잡도록 해 그의 집을 포위했으나 죽이지는 않았다. 범좌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타고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죽은 범좌를 가지고서 교역을 하느니, 차라리 살아 있는 범좌를 가지고서 교역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조나라는 왕께 땅을 떼어주지 않을 것인데 왕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땅을 떼어받은 연후에 저를 죽여도 됩니다.”라고 하니, 위나라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라 했다.
범좌가 신릉군(信陵君)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저는 본디 재상에서 면직된 사람인데, 조나라는 위나라 왕에게 땅을 주고서 저를 죽이려고 하며, 위나라 왕은 이를 들어주었으니, 만약에 강력한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답습해 군(君)을 죽이려고 한다면, 군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라 했다. 이리하여 신릉군이 왕에게 진언해 범좌를 석방시키게 했다.
魏王以秦救之故, 欲親秦而伐韓, 以求故地. ■忌謂魏王曰:
위나라 왕은 진나라가 구원해 주었기 때문에 진나라와 가까이하고자 했다. 이어 한(韓)나라를 공격해 전에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했다. 무기(無忌)가 위나라 왕에게 말했다.
秦與戎翟同俗, 有虎狼之心, 貪戻好利無信, 不識礼義徳行. 苟有利焉, 不顧親戚兄弟, 若禽獣耳, 此天下之所識也, 非有所施厚積徳也. 故太后母也, 而以憂死;穣侯舅也, 功莫大焉, 而竟逐之;両弟無罪, 而再奪之国. 此於親戚若此, 而況於仇讎之国乎? 今王與秦共伐韓而益近秦患, 臣甚惑之. 而王不識則不明, 群臣莫以聞則不忠.
진나라는 융족(戎族), 적족(狄族)과 풍습이 같고,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잔폭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며, 신용이 없으며, 예의와 덕행도 모릅니다. 만약 이익이 있다면 친척이나 형제도 돌보지 않을 것이며, 금수와 같음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로 그들은 후덕한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왕의 어머니이신 선태후(宣太后)가 이를 우려하다 죽었으며, 진왕의 외삼촌인 양후(穰侯)는 공로가 지대한데도 결국에는 쫓겨났으며, 두 동생은 무고하게 그들의 봉읍(封邑)을 빼앗겼습니다.
그가 친척에게도 이와 같은데, 황차 원수의 나라에게는 어떠하리오! 지금 왕께서 진나라와 함께 한(韓)나라를 공격하면 진나라의 화(禍)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니, 신은 그것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왕께서 이를 모르신다면 이는 곧 명석하지 못한 것이요, 신하들이 이러한 이치를 왕께 설명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불충인 것입니다.
今韓氏以一女子奉一弱主, 内有大亂, 外交彊秦魏之兵, 王以為不亡乎? 韓亡, 秦有鄭地, 與大梁鄴,12) 王以為安乎? 王欲得故地, 今負彊秦之親, 王以為利乎?
지금 한나라는 한 여자가 나약한 왕을 보좌하고 있으니, 안으로는 큰 내란이 있고, 밖으로는 강력한 진(秦), 위(魏) 나라의 군사와 교전하고 있는데, 왕께서는 한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한나라가 망하면, 진나라가 정(鄭) 땅을 차지하고, 대량(大梁)과 인접하게 되는데, 왕께서는 안전하다고 여기십니까? 왕께서 옛 땅을 찾고자 하시면, 지금 강력한 진나라와의 친분에 의지하면 이익이 된다고 여기십니까?
秦非無事之国也, 韓亡之後必将更事, 更事必就易與利, 就易與利必不伐楚與趙矣. 是何也? 夫越山踰河, 絶韓上党而攻彊趙, 是复閼與之事,13) 秦必不為也. 若道河内, 倍鄴、朝歌, 絶漳滏水, 與趙兵決於邯鄲之郊, 是知伯之禍也, 秦又不敢. 伐楚, 道渉谷,14) 行三千里.15) 而攻冥阨之塞,16) 所行甚遠, 所攻甚難,17) 秦又不為也. 若道河外, 倍大梁,18) 右(蔡左)[上蔡]、召陵,19) 與楚兵決於陳郊, 秦又不敢. 故曰秦必不伐楚與趙矣, 又不攻衛與斉矣.20)
진이 섬길 만한 나라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반드시 다른 일을 찾을 것이고, 다른 일은 바로 가장 쉽고 가장 이로운 것인데, 쉽고 이로운 일은 분명 초나 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어째서입니까?
대저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한나라의 강한 곳을 뚫고 지나서 강력한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연여(閼與)의 일을 답습하는 것으로, 진나라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내(河內)를 지나 업성(鄴城), 조가(朝歌)를 등지고, 장수(漳水), 부수(滏水)를 건너서, 조나라 군과 한단(邯鄲)의 교외에서 교전하는 것은 지백(智伯)의 화(禍)를 재연하는 것으로, 진나라는 이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 나라를 공격하려면 협곡을 지나서 3천 리를 행군해, 명액의 요새를 공격해야 되는데, 가야 할 길이 매우 멀고, 공격할 곳이 매우 어려우니, 진나라는 이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외(河外)를 지나 대량을 등지고, 우측으로는 상채(上蔡), 소릉(召陵)을 끼고서 초 나라 군과 진읍(陳邑)의 교외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도 진나라는 감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분명 초와 조 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요, 또한 위(衛), 제(齊) 나라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夫韓亡之後, 兵出之日, 非魏無攻已. 秦固有懐、茅、21)邢丘,22) 城23)垝津24)以臨河内, 河内共、汲25)必危;有鄭地,26) 得垣雍,27) 決熒沢水潅大梁, 大梁必亡. 王之使者出過而悪安陵氏於秦,28) 秦之欲誅之久矣. 秦葉陽、昆陽與舞陽鄰,29) 聴使30)者之悪之, 随安陵氏而亡之,31) 繞舞陽之北, 印臨許, 南国必危,32) 国無害(已)[乎]?
대저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 진나라 군이 출동하는 날에는 반드시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나라는 본래 회(懷), 모(茅), 형구(邢丘) 등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궤진(垝津)에 축성했다가 또다시 하내(河內)까지 핍박하니 하내의 공(共), 급(汲) 읍도 위태롭습니다. 진나라가 정(鄭) 땅을 차지하고, 원옹(垣雍)을 얻었으며, 형택수(熒澤水)를 몰아서 대량성을 수몰시키면, 대량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왕의 사신이 진나라로 향해 진나라에서 안릉군(安陵君)을 중상(中傷)하니, 진나라가 안릉군을 죽이려고 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진나라의 섭양(葉陽), 곤양(昆陽)은 위나라의 무양(舞陽)과 인접해 있으니, 사신의 중상을 듣는다면 안릉씨는 망할 것이고, 무양 이북을 돌아서 동으로 허(許) 땅에 이르면 남쪽 지역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니, 위나라에 해가 없겠습니까?
夫憎韓不愛安陵氏可也, 夫不患秦之不愛南国非也. 異日者, 秦在河西晉, 国去梁千里,33) 有河山以闌之, 有周韓以閒之. 従林郷軍34)以至于今, 秦七攻魏, 五入囿中,35) 邊城尽抜, 文台堕,36) 垂都焚,37) 林木伐, 麋鹿尽, 而国継以囲. 又長駆梁北, 東至陶衛之郊,38) 北至平監.39) 所亡於秦者, 山南山北,40) 河外河内,41) 大県數十,42) 名都數百.43) 秦乃在河西晉, 去梁千里, 而禍若是矣, 又況於使秦無韓, 有鄭地, 無河山而闌之, 無周韓而閒之, 去大梁百里, 禍必由此矣.
대저 한나라를 증오하고 안릉군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방하나, 진나라가 남방의 나라를 아끼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은 잘못입니다.
전에 진나라가 하서(河西)의 옛 진(晉)나라 땅에 있을 때는 대량과 천리나 떨어져 있었으며, 산하가 막고 있었고, 주(周)와 한(韓) 나라를 사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임향전(林鄕戰) 이후로 지금까지 진나라가 위나라를 일곱 차례 공격해, 5차에 걸쳐서 그들은 위나라의 유(囿) 안까지 들어왔고, 변경 지방의 성읍들을 모두 함락시켰고, 문대(文臺)도 부수었고, 수도(垂都)도 불태웠으며, 산림을 벌채했고, 산 짐승을 모두 잡아갔고, 수도 대량도 포위했습니다. 또한 빠른 속도로 대량성 북쪽을 지나 동으로 도(陶), 위(衛)의 근교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평감(平監)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진나라에게 잃은 땅이 화산(華山)의 남북, 하외·하내로 큰 현이 수십 개이고, 명도(名都)가 수백 개입니다. 진나라가 하서의 옛 진(晉) 땅에 있으면서, 대량과 천리 길을 떨어져 있을 때에도 화가 이와 같았습니다. 또 하물며 진나라를 섬기고 한(韓)나라가 없고, 정(鄭) 땅을 진나라가 가지고 있으며, 산하의 가로막음도 없는 상황에서 주, 한 나라의 간격도 없고, 대량으로부터 백리 길 떨어져 있으니, 화는 반드시 여기서 올 것입니다.
異日者, 従之不成也,44) 楚、魏疑而韓不可得也. 今韓受兵三年, 秦橈之以講,45) 識亡不聴,46) 投質於趙, 請為天下鴈行頓刃, 楚、趙必集兵, 皆識秦之欲無窮也, 非尽亡天下之国而臣海内, 必不休矣. 是故臣願以従事王,47) 王速受楚趙之約, (趙)[而]挟韓之質48)以存韓, 而求故地, 韓必效之.49) 此士民不勞而故地得, 其功多於與秦共伐韓, 而又與彊秦鄰之禍也.
일찍이 합종(合縱)이 실패한 것은 초와 위(魏) 나라가 서로 의심하고 한나라가 참여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지금 한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3년이나 받고, 진나라가 한나라를 꺾으며 협상을 요구하나, 한나라가 망할 줄을 알면서도 이를 듣지 않고, 조나라에 인질을 보내어 천하의 제후들과 합종해 진나라에 대항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초와 조는 반드시 군대를 모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 진나라의 욕심이 무궁해, 온 천하를 다 멸망시키고, 중원이 진에게 속국이 되지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합종의 책략으로 왕을 섬기고자 하니, 왕께서는 빨리 초, 조 나라의 맹약을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인질을 잡고서 한나라를 살려두어, 옛 땅을 요구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이를 돌려줄 것입니다. 이는 군민을 힘들이지 않고 잃은 땅을 되찾는 것으로, 그 공은 진나라와 더불어 한나라를 공멸해, 강력한 진나라와 이웃하는 화를 초래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夫存韓安魏而利天下, 此亦王之天時已. 通韓上党於共、甯,50) 使道安成,51) 出入賦之, 是魏重質韓以其上党也. 今有其賦, 足以富国. 韓必徳魏愛魏重魏畏魏, 韓必不敢反魏, 是韓則魏之県也. 魏得韓以為県, 衛、大梁、河外必安矣. 今不存韓, 二周、安陵必危, 楚、趙大破, 衛、斉甚畏, 天下西郷而馳秦入朝而為臣不久矣.
한나라를 지키고 위나라를 안정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에는 지금이 왕께 주어진 절호의 기회입니다.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지나 공(共),영(寧) 읍에 이르는 길을 개방해, 그들로 하여금 안성(安城)을 지나게 하고, 출입세를 받으면, 이는 한나라의 상당을 저당잡는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은 세수(稅收)가 있으면 우리는 한나라와 함께 족히 부국이 됩니다. 한나라는 반드시 위나라에 감격하게 되어 위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위나라를 존중하게 되며, 위나라를 두려워하게 되어, 감히 위나라를 배반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한나라가 위나라의 속현(屬縣)이 되는 것입니다. 위나라가 능히 한나라를 속현으로 삼으면 위(衛), 대량(大梁), 하외(河外)는 분명 안정될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동주(東周), 서주(西周)와 안릉(安陵)이 위태롭습니다. 초와 조 나라를 대파하면 위(衛)나라와 제(齊)나라가 심히 두려워할 것이고, 천하의 제후들이 서쪽으로 진나라에 달려가서, 진왕을 알현하고 속국이 될 날도 멀지 않습니다.
二十年, 秦囲邯鄲, 信陵君無忌矯奪将軍晉鄙兵以救趙,52) 趙得全. 無忌因留趙. 二十六年, 秦昭王卒.
20년에는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해 신릉군 위무기가 왕명을 가탁해 장군 진비(晉鄙)의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해 조나라가 온전할 수 있었다. 위무기가 이에 조나라에 머물렀다. 26년에는 진 소왕(秦昭王)이 죽었다.
三十年, 無忌帰魏, 率五国兵攻秦, 敗之河外, 走蒙驁. 魏太子増質於秦, 秦怒, 欲囚魏太子増. 或為増謂秦王53)曰:「公孫喜54)固謂魏相曰『請以魏疾撃秦, 秦王怒, 必囚増. 魏王又怒, 撃秦, 秦必傷』. 今王囚増, 是喜之計中也. 故不若貴増而合魏, 以疑之於斉、韓.」秦乃止増.
30년에는 위무기가 위나라로 돌아와서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해, 하외(河外)에서 진나라를 격파하고 몽오를 쫓아버렸다. 위 태자 증(增)이 진나라에 인질로 있었으므로, 진나라 왕이 노하여 위 태자 증을 가두려고 했다.
어떤 이가 증을 위해 진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공손희(公孫喜)가 일찍이 위나라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위나라 군을 신속하게 파견해 진나라를 공격하십시오. 진나라 왕이 화가 나서 반드시 태자 증을 가둘 것입니다. 위나라 왕은 또 이 때문에 화가 나서 진나라를 공격할 것이고, 진나라는 반드시 태자 증을 해칠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지금 왕께서 증을 가두는 것은 공손희의 음모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을 환대해 위나라와 화약을 맺고, 위나라로 하여금 제, 한 나라의 의심을 받도록 하십시오.”라 했다. 진나라 왕은 비로소 증을 가두지 않았다.
三十一年, 秦王政初立.
31년에는 진왕(秦王) 정(政)이 새로이 즉위했다.
三十四年, 安釐王卒, 太子増立, 是為景湣王.55) 信陵君無忌卒.
34년에는 안희왕(安釐王)이 죽고 태자 증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경민왕(景湣王)이다. 신릉군 위무기가 죽었다.
각주
1 集解徐広曰:「在脩武.」
2 正義博頭有刻為梟鳥形者, 擲得梟者合食其子, 若不便則為余行也.
3 集解徐広曰:「郪丘, 一作『廩丘』, 又作『邢丘』. 郪丘今為宋公県.」 索隠郪, 七糸反, 又音妻. 正義郪, 七私反, 又音妻. 地理志云汝南郡新郪県. 應劭曰:「秦伐魏, 取郪丘, 漢興為新郪, 章帝封殷後, 更名宋也.」
4 索隠按:戦国策作「推琴」者, 春秋後語作「伏琴」, 而韓子作「推瑟」, 説苑作「伏瑟」, 文各不同.
5 正義括地志云:「晉水源出并州晉陽県西懸壅山. 山海経云懸壅之山, 晉水出焉, 東南流注汾水. 昔趙襄子保晉陽, 智氏防山以水潅之, 不没者三版. 其涜乗高西注入晉陽城, 以周潅漑, 東南出城注於汾陽也.」
6 正義安邑在絳州夏県, 本魏都. 汾水東北歴安邑西南入河也.
7 正義平陽, 晉州, 本韓都也. 括地志云:「絳水一名白水, 今名弗泉, 源出絳山. 飛泉奮湧, 揚波北注, 県流積壑二十許丈, 望之極為奇観矣.」按:引此潅平陽城也.
8 索隠易音以豉反.
9 索隠七余反.
10 索隠與謂許與為親而結和也.
11 集解危, 棟上也. 索隠上音奇. 危, 棟上也. 礼云「中屋履危」. 蓋昇屋以避兵.
12 索隠戦国策「鄴」作「鄰」字為得.
13 索隠复音扶富反. 謂前年秦韓相攻閼與, 而趙奢破秦軍.
14 索隠道猶行也. 渉谷是往楚之険路. 従秦向楚有両道, 渉谷是潟, 河内是東道.
15 正義劉伯荘云:「秦兵向楚有両道, 渉谷是潟, 河外是東道. 従褒斜入梁州, 即東南至申州攻石城山, 険阨之塞也.」
16 集解孫検曰:「楚之険塞也.」徐広曰:「或以為今江夏鄳県.」 正義冥音盲. 括地志云:「石城山在申州鍾山県東南二十一里. 魏攻冥阨即此, 山上有故石城. 注水経云『或言在■』, 指此山也. 呂氏春秋云『九塞』, 此其一也.」
17 索隠攻, 亦作「致」, 戦国策見作「致軍」, 言致軍糧難也.
18 正義従河外出函谷関, 歴同州南至鄭州, 東向陳州, 則背大梁也.
19 集解徐広曰:「一無『左』字.」 正義上蔡県在予州北七十里, 邵陵故城亦在予州郾城県東四十五里, 並在陳州西. 従汴州南行向陳州之西郊, 則上蔡、邵陵正南面, 向東皆身之右, 定無「左」字也.
20 正義衛、斉皆在韓、趙、魏之東, 故秦不伐也.
21 集解徐広曰:「在脩武軹県, 有茅亭.」 正義茅, 卯包反. 懐州武陟県西十一里故懐城, 本周邑, 後属晉. 左傳云周與鄭人蘇忿生十二邑, 其一曰攅茅. 括地志云「在懐州獲嘉県東北二十五里」也. 獲嘉, 古脩武也.
22 集解徐広曰:「在平皐.」 正義括地志云:「平皐故城在懐州武徳県東南二十里, 本邢丘邑也, 以其在河之皐地也.」
23 索隠按:戦国策云邢丘、安城, 此少「安」字耳.
24 索隠在河北. 垝音九毀反. 正義垝音詭. 字誤, 當作「延」. 括地志云:「延津故俗字名臨津, 故城在衛州清淇県西南二十六里. 杜預云『汲郡城南有延津』是也.」
25 集解徐広曰:「汲県属河内.」 索隠汲, 亦作「波」. 波及汲皆県名, 倶属河内.
26 集解徐広曰:「成皐、滎陽亦属鄭.」
27 集解徐広曰:「垣雍城在巻県, 巻県属魏也. 巻県又有長城, 経陽武到密者也.」 正義雍, 於用反. 括地志云:「故城在鄭州原武県西北七里.」釈例:「地名巻県, 理或垣城也.」言韓亡之後, 秦有鄭地, 得垣雍城, 従熒沢決溝歴雍潅大梁是也.
28 集解徐広曰:「召陵有安陵郷, 征羌有安陵亭也.」 正義括地志云:「衝陵県西北十五里. 李奇云六国時為安陵也.」言魏王使者出向秦云, 共伐韓以成過失, 而更悪安陵氏於秦, 今伐之, 重非也.
29 正義括地志云:「葉陽今許州葉県也. 昆陽故城在許州葉県北二十五里. 舞陽故城在葉県東十里.」此時葉陽、昆陽属秦, 舞陽属魏也.
30 索隠上平声, 下去声.
31 正義随猶聴也. 無忌説言使者悪安陵氏, 亦聴秦亡安陵氏. 然繞舞陽之北印臨許, 許必危矣. 秦有許地, 魏国可無害.
32 正義南国, 今許州許昌県南西四十里許昌故城是也. 此時属韓, 在魏之南, 故言南国. 括地志云:「周時為許国, 武王伐紂所封. 地理志云潁川許県古許国, 姜姓, 四岳之後, 文叔所封, 二十四君, 為楚所滅.」 三卿背晉, 其地属韓.
33 集解徐広曰:「魏国之界千里. 又云河南梁県有注城.」 正義河西, 同州也. 晉国都絳州, 魏都安邑, 皆在河東, 去大梁有千里也.
34 集解徐広曰:「林郷在宛県.」 索隠劉氏云「林, 地名, 蓋春秋時鄭地之棐林, 在大梁之西北」. 徐広云在宛陵也. 正義括地志云:「宛陵故城在鄭州新鄭県東北三十八里, 本鄭旧県也.」按劉徐二説, 是其地也.
35 集解徐広曰:「一作『城』也.」 索隠囿即圃田. 圃田, 鄭薮, 属魏. 徐広云一作「城」. 而戦国策作「国中」. 正義括地志云:「圃田沢在鄭州管城県東三里. 周礼云予州薮曰圃田也.」
36 索隠文台, 台名. 列士傳曰「隠陵君施酒文台」也. 正義堕, 許規反. 括地志云:「文台在曹州冤句県西北六十五里也.」
37 集解徐広曰:「一云『魏山都焚』. 句陽有垂亭.」 索隠垂, 地名. 有廟曰都. 並魏邑名.
38 正義陶, 曹州定陶也. 衛即宋州楚丘県, 衛文公都之, 秦兵歴取其郊也.
39 集解徐広曰:「平県属河南. 平, 或作『乎』字. 史記斉闞止作『監』字. 闞吊平須昌県.」
40 正義山, 華山也. 華山之東南, 七国時鄧州属韓, 汝州属魏. 華山之北, 同、華、銀、綏並魏地也.
41 正義河外謂華州印至虢、陝, 河内謂蒲州印至懐、衛也.
42 集解徐広曰:「一作『百』.」
43 集解徐広曰:「一作『十』.」
44 索隠従音足松反.
45 索隠橈音尼孝反. 謂韓被秦之兵, 橈擾已経三年, 云欲講説與韓和.
46 索隠識猶知也. 故戦国策云「韓知亡猶不聴」也.
47 索隠従音足松反. 従事, 言合従事王也. 戦国策亦然.
48 索隠言韓以質子入趙, 則趙挟韓質而親韓也.
49 索隠效猶致也, 謂致故地於趙也. 正義無忌令魏王速受楚、趙之従. 趙、楚挟持韓之質以存韓, 而魏以求地, 韓必效之, 勝於與秦伐韓又與秦鄰之禍殃也.
50 集解徐広曰:「朝歌有甯郷.」 正義共, 衛州共城県. 甯, 懐州脩武県, 本殷之甯邑. 韓詩外傳云「武王伐紂, 勒兵於甯, 故曰脩武」. 今魏開通共甯之道, 使韓上党得直路而行也.
51 正義括地志云:「故安城在鄭州原武県東南二十里.」時属魏也.
52 正義括地志云:「魏徳故城一名晉鄙城, 在衛県西北五十里, 即公子無忌矯奪晉鄙兵, 故名魏徳城也.」
53 索隠按:戦国策作「蘇秦為公子増謂秦王」.
54 索隠戦国策作「公孫衍」.
55 索隠系本云:「安釐王生景湣王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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