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즐기는 방법은 교통수단과 여행경비 그리고 동행자에 따라 달라진다고 나는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지구반대편으로 날아가서 넉넉한 경비를 손에 쥐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꿈꾸지 않을까...? 꿈(욕심)많은 피오나 처럼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꿈꾸는 이상적인 여행의 반대로 비행기 대신 두발로 타박타박 걷고 넉넉한 경비대신 최소한의 비용으로 사랑하는 부부와 다니는 여행 이런 여행은 어떨까...? 두발로 걷는 여행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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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2016년 3 월 1.3 일(화.목요일) ◈걸은거리: 15.2 km G.P.S.거리 ◈소요시간:느림속의 여유 ◈날씨:흐림 ◈누구와:마눌과 ◈자가용 이용시 네비주소: 양평역 |
특 징 ↓
『자료모음』
둘레길에서 볼수있는 여러형태의 안내표식들 ↓
1코스개념도 ↓
위성트랙↓
고도는 야산을 2개넘을때 약간 오름길이고 그외에는 거의 오르내림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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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이야기』
오후늦게 승용차로 양수역에 도착한다 ↓
양수역에서 바로나오면 좌측으로 방향을 돌려 올려다보니 이런 도로이정표에 물소리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이고 ↓
안내 리본이 펄럭이는 이길로 드가 삼거리에서 다시 좌측으로 바라보니 ↓
굴다리가 나오고 굴다리에서 다시 우측으로 ↓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조금가니 안내소가 나오더만 ↓
안내소에는 근무자가 없는것같고 펄럭이는 플랭카드의 환영은 웬지 브끄부끄 ↓
이제 13.4키로를 여유롭게 걸어볼까나 ↓
우측 가정천 다리를 건너고 ↓
가정천을 건너자마자 주말에는 많은인파가 청계산 부용산으로 갈것이지만 많은인파 나도 모르게 뒷따라가면은 안됩니다 꿋꿋하게 물소리길로 가야한다 ↓
건너 ↓
마을쪽으로 ↓
아즉 겨울이라고 고드름은 몸부림 치지만 맴속에는 이미 봄이더라 ↓
우측을 조망하니 한강기맥 들.날머리가 조망되고 4.5년전에 들머리로 삼아 오대산까지 흔적을 남긴일이 있어 새로웠고 ↓
둘레길은 이제는 산속으로 드가겠지 미리 예상을 해 봤지만 ↓
어쭈구리 유턴을 하더라 ↓
마을 고급 주택가를 지나 ↓
한강기맥 마루금은 바로 코앞에 있더만 ↓
우찌 산속은 언제 가냐? 조금은 짜증이 날쯤 ↓
내 맴을 알았나 급 좌틀로 산속으로 드가더라 ↓
비록 야산이지만 이제야 맴이 편안하더라 어쩔수없는 산꾼이구나 ↓
마눌 발가락 부상으로 아직은 등산화는 못신고 허름한 운동화로 뒷꿈지는 넣지 못한 상태에서 아슬아슬 가는데 음지에는 아즉 눈이있어 넘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조심조심 또 조심이라 잔소리가 심해지고 ↓
조심조심 약한 내리막을 안전하게 내려오고 ↓
보이는 쩌기는 어디일까? ↓
정찬손 묘지더라 ↓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효중(孝仲),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동래(東來)이며, 중추원사(中樞院事)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세종 8년(1426)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의 저작랑(著作郞)과 교리를 역임하였다. 세종 25년 집현전 응교(應敎)가 되어 한글 창제에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기도 하였고 세종의 불경사업에 반대하여 좌천되기도 하였다. 세종 29년(1447) 문과중시에 등재한 후 집현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 수사관을 겸직하면서 『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때에는 대사헌, 대제학, 병조판서를 지내며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단종 1년(1453) 이조판서, 세조 1년(1455)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했으며,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의 단종복위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올랐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세조 4년(1457)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1468년 예종 즉위후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었으며 1472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종 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고 성종 6년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정창손은 성종 16년(1485)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3대에서 15년간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청빈재상(淸貧宰相)이라하여 부의를 후사(厚賜)하였다. 그 후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론에 참가한 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으나, 중종 1년(1506)에 신원되고, 중종 9년(1514)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정창손의 묘역은 신도비문에 의하면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신도비와 함께 파괴되었다가 중종 반정으로 신원이 복귀되면서 신도비를 제외하고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 방제동에 있었던 것으로 도시개발로 1970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으로 부인묘와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운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묘의 좌측에 부인묘비와 정창손의 묘비가 있고 묘의 좌우에는 2조의 문인석을 배치하였는데 상석과 망부석, 장명등, 동물석상은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
신도비(높이 186.5㎝, 폭 73㎝, 두께 24.5㎝)는 이수가 없는 월두형(月頭形)으로 원래 서거정이 성종 19년(1488)에 지었으나, 파괴되었던 것을 개장(改葬)때 외손 이원익(李元翼)을 중심으로 이시언(李時彦), 심열(沈悅), 최명길(崔鳴吉) 등이 인조 1년(1623)에 재건하였다. 비문은 정창손의 외후손인 한준겸(韓浚謙)이 추찬(追撰)하고 역시 외후손인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고 전(篆)하였는데 정창손의 연대기와 신도비가 파쇄된 후 다시 건립된 사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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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소묘역에서 한참 공부하다 다시 둘레길을 이어가는데 좌측으로 쉼터 점빵이 나오더만 ↓
우측은 부용2리라는 정류소가 자리잡고 ↓
다시 들판으로 나가는디 좌측은 작은 개울이요 우측은 들판과 비닐하우스 딸기 농장지를 지나더라 ↓
어찌저찌해서 진행을 하는데 해는 이제 넘어갈 준비를 하고 ↓
다시 민가와 들판을 지나고 ↓
뭐하는 건물인지는 관심없고 단지 위치파악을 해보려고 담아본다 ↓
농촌풍경이지만 어수선하고 ↓
둘레길은 눈둑으로 안내하더만 ↓
도로 지방도가 나오더라 여기서 시계를 보니 이제는 철수 해야겠더라 단지 들머리 주변이나 확인하자 왔지만 약 4키로를 맛배기로 진행해버렸다 곧있으면 해는 떨어질거고 다음날 정식으로 완주하리라 의논하고 양수역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차량을 회수하고 담날 이어가기로 한다 ↓
그 담날 양수역에 차량을 주차하고 대중교통으로 어제에 마무리했던 곳으로 찾아와 계속 이어간다 ↓
화장실이다 둘레길로 인해 맹그렀는데 양변기로 아즉은 깨끗하고 마눌이 신세를 진다 암튼 고맙습니다 ↓
다시 산길로 갈 분위기지만 ↓
이번에는 한음 이덕형 선상님 묘와 신도비를 지나더라 ↓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본관은 광주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가까운 사이였다. 또한 어렸을 때 이항복과 막역한 사이로 많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패수까지 올라와 화의를 청하자 이덕형은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 대의로서 그들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정유재란시 좌찬성에 올랐고,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뒤의 민심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였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한때 영중추부사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고 이 때 양근에 내려와 국사의 그릇됨을 상소하며 세월을 보내다 53세로 병사하였다. 인조 때 복관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신도비(높이 356㎝, 폭 110㎝, 두께 42㎝)는 효종 4년(1653)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했으며, 글씨는 오시수(吳始壽)가, 전자(篆字)는 정규상(鄭奎祥)이 썼다. 신도비는 장방형 비좌와 이수를 갖춘 형태이다. 귀부는 용과 괴운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현재 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전각 내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영정각은 1977년에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홍살문과 경중문(敬重門), 영정각(影幀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이덕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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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파란 화살 진행표를 따라 ↓
다시 사면을 인위적으로 만든 둘레길을 가다 ↓
이덕형 님의 주옥같은 거시기가 음각되어있는 곳을 지나 ↓
개울을 건너고 ↓
도로따라가다 우측으로 드가면↓
두번째 산길과 이번 코스에 제일높은 능선을 넘어야한다 ↓
이번코스에 제일 높은 샘골고개 정상이다 좌.우는 하계.부용산과 청계 형제봉을 지나가는 길목이다 몆년전에 하계.부용.형제봉을 찍고 국수역으로 하산한적이 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조금만 내려가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
약수터 쉼터다 약수물이 있고 쉼터가 있고 도보인증대가 있다 ↓
약수터의 물을 맛보고 우리는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고 간다 ↓
앞에 버젓하게 취사금지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조심히 라면과 만두와 밤을 넣고 뜨땃하게 조리해묵고 정리할때는 말끔하게 정리하고 자리를 뜬다 암튼 취사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
내려가면서 좌측을 조망한다 형제봉과 청계산이다 청계산은 한강기맥 마루금으로 몆년전에 지났고 형제봉 또한 하계.부용산을 걸쳐 국수역으로 하산한적이 있다 ↓
이제는 이코스 산길에 젤 하이라이트 전나무숲길이다 ↓
심호흡으로 맞이한다 ↓
마음의 힐링이다 ↓
집사람도 그 맛을 안다 조용히 심호흡을 한다 ↓
다만 아쉬운건 넘 거리가 짧더라 ↓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미련에 뒤돌아 다시 담아본다 ↓
작은고개 갈림길을 지난다 역시 하계.부용.청계산으로 갈수있는 갈림길이다 ↓
갈림길 이정표 ↓
샘내고개를 뒤돌아 조망한다 ↓
다시 마을길에 진입하고 ↓
진행해야 할 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
부용산 뒤돌아 보고 ↓
작은고개를 넘으니 ↓
몽양 여운형 생가가 보이고 ↓
생가 밑에 전시관이 있더라 ↓
주위는 잘 꾸며져 있고 ↓
흔적을 곳곳에 음각해놓아 이채롭고 ↓
둘레길은 남한강이 조망되는 곳으로 이어지더라 ↓
경의선 철로 굴다리를 빠져나와 ↓
신원역 지나고 ↓
이제 봄이다 노인네의 봄맞이 가지치기가 우찌 위태위태 하구만 ↓
자전거길과 합류해 ↓
하늘에서 희안한 소리에 고개들어보니 매들의 활공에 먹이라도 찾았나? ↓
잠시후 양서초등학교에서 잠시 헛갈려 육교쪽으로 이탈했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둘레길이라 가던길을 멈추고 다시 초등학교로 와서 자전거길로 쭈욱 직진하니 터널이 나오더라 ↓
터널바람은 쌀쌀하더만 ↓
한쪽은 두발로 한쪽은 두바퀴로 글쎄 나도 가끔은 두바퀴로 댕겨보지만 두발이 최고여 ↓
터널 나오자마자 우측으로 ↓
자전거길로 가도 되겠지만 굳이 우측 제방과 들판으로 유도한다 ↓
저멀리 형제봉과 청계산이 조망되고 ↓
어느덧 1코스 종착지가 육안으로 보이고 ↓
1코스 종착지 국수역이다 ↓
국수역 시간표 확인하고 ↓
양수역으로 두정거장 열차타고 차량회수해서 집으로 귀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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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물소리 둘레길... 이름이 멋지죠 ㅎㅎ
물소리길에 대한 설명과 표시판들 ... 너무 예쁘게 올려주셨네요
그 유명한 우리에 역사적인 인물둘... 정찬소 묘역 , 한음 이덕형 묘비( 그분에 주옥같은 글들)
여운형에 생가를 돌아보며 의미있는 하루로 보냈지요 .
둘레길이지만 볼것도 많고 잔나무 향기가 넘치는 산길도 걸어보고 ~
우리에 선조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하루 였답니다.
모처럼 점심엔 옛추억을 떠올리며 라면도 끓여 먹고 봄냄새 느끼는 버들강아지를 보고~
다양하게 올려준 입체적인 사진들 ... 정말 신기 합니다.
그날에 하루를 뜻깊게 보내게 해준 곰바우님께 감사 하고 ~ 다음 구간도 기대 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