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상하이 푸동공항으로 다시 호남성 이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이제부터는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크루즈를 탄다.
양쯔강 혹은 장강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양진楊津에서 양찐 양쯔로 변천된 것으로,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양주땅에 흐르는 강의 이름이 양진이다.
이곳 이창에서 크루즈를 타고 출발하여 드디어 삼협댐에 도착했다.
이 댐의 영향으로 천하절경인 삼협이 저수지가 되어 버렸다. 수위가 150m이상 올라갔는데 원래는 200m를 높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을 막아 놓고보니 우기에는 그 물의 압력이 엄청나 댐이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수위를 다시 낮추는 바람에 물에 수몰되었다가 흉칙하게 들어난 훍들이 강변에 붉은 띠를 이루게 되었다.
그 덕에 천하의 절경을 완전히 망쳐 놓았고 수많은 고대 유적들이 물속에 수몰되어서 다시는 회복 될 수 없게 되었다.
크루즈는 댐 아래에서 4개의 수문을 거쳐 댐위로 단계별로 150미터 가량를 올라갔다.
삼협댐을 지나는 동안에 밤이 찾아 왔다.
이 밤에 지나는 협곡이 서릉협이라 아쉬움에 밤이 늦도록 배 갑판에 올라 어두운 협곡을 바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음날 크루즈선이 점심 무렵에는 파동현을 지나 무협으로 들어 섰다.
협곡 양쪽으로 기이한 봉우리들이 늘어서있다.
비록 지금은 편안히 크루즈선을 타고 이 절경을 보고 있지만 예전 같으면 이 곳은 너무 여울이 거쎄어 거슬러 오를 엄두를 못했다고 한다.
댐을 막기 전에는 협곡의 물이 워낙 거세게 흘러서 정크선을 양쪽에 밧줄로 묶어 인부들이 끌어서 이동했다고 한다.
이제 무협 선녀봉에 이르러 작은 배를 옮겨 타고 소선녀 계곡을 따라 들어갔다.
양쪽 협곡에 까마득한 기이한 봉우리들이 어마어마하게 높이 솟아 올라 있다.
어두 컴컴한 기운이 으스스해 두려움 마져 들 정도였다.
작은 배로 깊은 협곡을 구경하고 나서는 다시 크루즈선을 타고 무협을 통과 했다.
무협과 구당협을 지나니 봉절현에 크루즈가 도착 했다.
이 곳에 또 백제성이 있다.
즉 이곳이 백제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양자강을 양진이라 하고 길고 긴 강으로 장강이라고 하고
이 지역의 명칭은 웅진이었다.
이 곳 백제성에서 촉의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후사를 부탁했다는 기록이 삼국지 소설의 줄거리에 들어 있다.
다음 지도는 양자강 유역 호북성의 지도이다.
이곳 호북성은 양자강 동정호를 기준으로 북쪽의 땅이며, 동정호의 남쪽 지방이 호남성이다.
그리고 전주와 라주가 백제의 땅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본래 백제시조 온조왕이 한나라 성제 홍가 3년(기원전 18년) 나라를 창건하고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였다가. 13년에는 한산아래에 가서 살다가 이듬해 광주목으로 수도를 옮기어 남한산성이라고 불렀다. 근초고왕 25년(370년)고구려의 북한산군을 빼앗아 한성이라고 부르고 개로왕(474년)까지 수도로 삼았다.
개로왕 20년 고구려의 자비왕이 한성을 포위하므로 개로왕이 성을 벗어나 달아 나다가 살해 당했다.
이 해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공주는 원래 백제의 웅천으로서 문주왕이 한성으로부터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겼고 성왕때에 이르러 다시 남부여로 수도를 옮겼다. 부여는 원래 백제의 소부리군(사비라고도 한다.)으로서 백제의 성왕이 웅천으로부터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어 남부여라고 불렀다. 이 곳 부여에 천정대 조룡대 락화암등이 있다.
이 천정대 조룡대 낙화암이 바로 양자강 삼협에 있었다. 무협 구당협 서릉협의 현재의이름도 불과 얼마전까지 만해도 우관협곡, 미담협곡, 의창협곡, 무한협곡, 풍상협곡이 있었다.
100년전 이사벨라 버드비숍의 "양자강 저너머"란 책의 기록에 의하면 의창에서 부터 급류와 협곡이 시작된다. 첫번째 급류 지역이 타탄이다. 그 다음날에는 과동이라는 급류 지역이다. 우관 협곡의 거대한 절벽군이 장엄하고 웅대하게 느껴진다.
그 다음에 조금 작지만 훨씬 아름답게 빛나는 절벽을 만나게되었는데 곧바로 신탄 협곡의 입구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했다. 신탄협곡은 겨울이 되면 가장 위험한 양자강의 요충지로서 밀려드는 증기선과 하얀 물거품을 뿜어대는 폭포를 배경으로 뭔가 두렵고 장엄한 분위기에 뒤섞여 온갖 위험과 소란이 밀집되는 곳이다.
신탄의 풍상협곡을 지나 수심이 350미터나 되는 군호보검의 협곡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폭이좁은 급류구간을 지나 갈고리가 달린 장대로 바위틈을 헤집으며 장엄한 미담협곡을 통과하여 강폭이 비교적 넓은 구간으로 들어선다. 이곳엔 험준한 산악 사이로 무시무시해 보이는 모래톱과 암석들이 줄지어 느어서 있고 아주 높은 산등성이 사이에 작은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위위에는 아슬아슬하게 사원이 하나 서있고 그 뒤로 빠르게 해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장관을 바라보며 양자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성벽을 갖춘도시 귀주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이 풍도귀성일까?
그 다음에는 매년 일정한 시기가 되면 그 악명을 드날리는 가장 고약한 급류 악탄과 우구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는 장엄한 무산협곡으로 들어선다 .
이 협곡은 길이 32키로에 폭이 300~5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틈으로 양쪽이 높이 300로 높게 치솟은 절벽으로 둘러쌓여있고 험준한 산봉우리 위로는 간간히 눈이 덮여 있었다.
귀산대곡은 으시시한 신비감을 자아냈고 겨울날의 음산한 구름이 산 정상을 감싸고 있었다. 철관협곡으로 불리는 지점에는 겨울 수면위로 약 15미터 되는 절벽 위에 쇠사슬이 박혀 있어 상류를 향해 가는 정크선들의 안전을 도왔다.
호북성 지도
우리는 이틀동안 이처럼 동굴같은 지형을 항해하다가 사흘째 되는날 호북성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마을 남목원에 도착했다.
남목원도 양쪽으로 우뚝솟은 높은 산악지대를 대동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절벽을 잇는 다리가 가로 놓여 있었다.
이상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그린 양자강의 풍경이다.
양자강에 신탄진이 있다는 놀라운 기록이다.
충청도 신탄진은 대륙에서도 충현 부근이다.
대륙의 지명과 한반도의 지명이 묘하게 일치한다.
크루즈의 마지막은 중경시에서 끝난다. 1년에 한차례 상해에서 중경까지 운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중경은 인구 3천5백만의 대도시이다.
중경시내의 전통문화 거리를 둘러보았다.
대족사 입구
대족사의 조각상을 보니 고려의 연대기와 생활풍속도를 조각해 놓은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각들 바로아래 새겨놓은 문구들을 억지로 지우고 조잡하게 다른 문구를 새겨놓은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왜 원래의 문장들을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이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