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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박현수
시조 월평_밀실의 문법에서 ‘문장의 광장’으로
김정남
시 월평_시의 본령을 묻다
월평_시조
밀실의 문법에서 ‘문장의 광장’으로
박 현 수
지금 촛불의 강물이 융융하게 흐르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정치 현실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흐름에 가장 빨리 반응하는 장르가 시다. 그러나 시인들은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주저하고 있다. 시간의식을 장르 이름에 담고 있는 시조時調도 이 문제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시는 정치현실과 무관하게 시 자체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문학판에 주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그런 시각이 형성된 것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사실이라 한다면 놀랄 시인이 꽤 있을 것이다.
시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시조의 역사적 유래 자체가 시와 현실의 관계를 증언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너무 많아서 혼란스럽다. 필자는 그 많은 논의 중에 조동일 교수의 논의가 가장 설득력이 높다고 판단한다.(이 논의가 시조 시단에 이미 널리 공유된 지식인지 여부는, 필자가 시조에 대한 논의를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반복된다면 독자께서는 이 논의가 다시 한 번 강조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다)
조동일 교수는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지식산업사, 1999)이라는 책에서 우리 시가의 율격 형성 과정을 역사적으로 개괄하고 있다. 이는 중세문학을 새롭게 논의하려는 그의 원대한 시도에 따른 귀한 결론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율격 형성 검토는 결국 시조의 형성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런 시도는 한국 상황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학 전체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동일 교수는 동아시아의 중세 시 형식은 중국의 한시에 대한 하나의 대응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한국의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 만주민족의 만문시滿文詩 등이 모두 한시의 대응 관계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우리 시의 리듬과 한시의 리듬이 일치하지 않아서 그 간격을 두고 상호소통이 계속되었다. 일단 중국에서는 칠언절구, 오언절구의 고정된 형식이 하나의 전범으로 자리 잡았는데, 우리의 율격은 이와 다른 율격을 보여준다. 그것은 두보의 「강촌江村」이라는 시를 옮긴 두시언해의 번역시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淸江一曲抱村流
맑은 가람/ 한 구비/ 마을을 안아/ 흐르나니
7음절로 된 한시의 구절이 우리 번역시에서는 네 토막(4음보)으로 옮겨져 있다. 이런 번역에서 우리 시의 기본적인 율격이 확인된다. 민요, 무가 등에서 확인되듯이 이 “네 토막형식이 한국시의 자연스러운 율격임을 확인할 수 있”(331)다.
조동일 교수는 우리 시가의 기원인 향가도 기본적으로 이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그래서 향가의 완성된 형태인 10구체 형식, 즉 사뇌가詞腦歌의 형식을 규정한 것으로 보이는 ‘삼구육명三句六名’도 기본적으로 네 토막형식의 묶음을 가리킨 표현이 된다. ‘3구’는 시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고, ‘6명’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다시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구: 4 4 4 4/ 4 4 4 4/
2구: 4 4 4 4/ 4 4 4 4/
3구: 4 4 4 4
마지막 3구는 지금까지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오던 대칭성을 비대칭성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이는 “향가가 민요에서 분리되어 ‘노래’가 아닌 ‘시’가 되게 하는 구실을 한다”(336-337)는 것이 조 교수의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시조가 바로 이런 형식을 이어 받았다는 것이다. 이 ‘3구6명’의 향가가 한시 형식에 대응하기 위하여 압축된 것이 시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시에서 율시의 절반 길이인 절구는, 한국시에서 사뇌가의 절반 가까운 길이인 시조와 시상이 더욱 압축되어 있는 단형시인 점이 서로 같다.”(340) 즉 한시에서 율시(8행시)가 형식적으로 절반으로 압축되어 절구(4행시)가 되었듯이, 우리 시에서는 기본적으로 4음보 2행을 기본으로 하는 ‘3구6명’의 사뇌가가 절반으로 압축되어 4음보 1행을 기본으로 하는 ‘3장6구’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동안에 비슷한 논의가 많이 있어 왔기 때문에 그다지 새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형식 변화가 어떤 사회사적 기원과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점을 해명한 데 있다. 조동일 교수는 일본의 화가나 배구 역시 이런 유사한 방식을 통하여 짧고 정제된 형식에 도달한 것을 동일한 점으로 보며, 그럼에도 한국의 시가 민요의 형식을 차용하고 일본의 시가 한시의 형식에 도달한 것을 차이점으로 든다. 이런 차이는 시 형식을 만들어낸 지배층의 사고방식에 있다고 보았다. 즉 “기층민중과 더불어 살아온 한국의 지배층은, 한시를 받아들여 민족어시를 만드는 중세문학 건설 과업을 민중은 동참시키지 않은 채 별도로 진행할 때에도, 민중과 공유하던 민요의 율격을 살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363)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이주민 집단이 상층을 이루어 기층민중과 어느 정도 혼혈을 이루고 동화되는 과정에 들어”선 일본에서는 민요 공유 경험이 축적되지 않아 한시 형식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민족어시를 만드는 상층문인은, 한국에서는 민중과 공감을 확보하고, 일본에서는 한시의 율격을 받아들여 민중에 대해 위세를 갖추는 것을 더욱 긴요한 과제로 삼았다. (…) 한국시에서는 사회문제와 관련된 상하上下의 정情, 일본시에서는 계절감각과 관련된 남녀의 정을 특히 중요시하는 풍조가 그렇게 해서 생겼다. (…) 화가和歌는 백성이 군주를 칭송하도록 하는 예찬시도, 국가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교훈시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한국에 많고, 일본에는 없었다.(363-364)
조동일 교수의 율격 논의는 자연스럽게 사상사적 문제에 도달하였다. 한국의 시가 현실인식을 기본적으로 갖는 이유가 율격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하이쿠가 철저하게 계절감각을 바탕으로 서정적인 범주에 머문 이유, 그에 반하여 시조가 시대의 문제와 언제나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의 기원이 여기에 밝혀져 있다. 이 논의가 세세한 모든 시를 포괄할 수는 없지만 보편적으로 승인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을 지적하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조時調가 ‘시 시詩’자가 아니라 ‘때 시時’자를 가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시조는 형식적으로 정제된 정형시이며 내용상으로 기본적으로 시대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근대에 들면서 문학이 하나의 독립적 범주로 분화되면서 시대의 문제는 문학 외적인 것으로 배제되어 왔다. 우리 근대 문학의 정상에 서 있는 이광수가 초기의 문학론 「문학이란 하오」라는 글에서 문학의 특징을 감정에서 찾고 있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개인적 정서와 개성적인 감정의 가치가 강조되면서 근대문학은 그 이전의 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적, 정치적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문학을 위한 문학, 유미주의 문학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시조가 시대의 문제를 다루던 경향에서 벗어나 대부분 서정시의 범주에 안착한 것도 이런 미학사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적 자율성의 영역에 들어있던 시가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를 지나 1980년대에 완성된 민중시의 전개가 그것이다. 그런 시적 경향이 1990년 들어 다시 미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이런 경향은 현재까지 지배적인 흐름이 되어 있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시인이 바로 1989년 신춘문예로 등장한 김기택 시인일 것이다. 그는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후에 가진 어느 인터뷰에서 민중문학에 대한 반감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내면을 사랑하거나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해서 남을 변화시키려는 민중주의 예술의 작위성을 증오한다.”고 했던 것이다. 신인의 발언으로서 상당히 용기 있는 발언이었으며, 그만큼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종류의 발언이었다. 이를 두고 하재봉 시인이 “89년이면, 민중문학의 거센 파도가 한풀 꺾였다고는 해도 아직도 그 도덕적 정당성은 누구하나 의심하지 않고 있던 때였는데, 이제 갓 등단한 신인의 위와 같은 강력한 발언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하재봉, 「내부에 불을 감추고 웅크린 호랑 이」, 〈문학정신〉, 1992. 2)고 한 것은 문단의 반응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이후 이런 김기택 시인류의 서정시들이 대세가 되었다. 대상에 대한 극사실주의적 묘사나 철저한 서정적 접근이 시의 기본 특질이 되었다. 모더니즘적 경향의 잔혹시 혹은 미래파 시들도 이런 경향의 다른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철저하게 서정적인 시와 철저하게 실험적인 시들이 모두 직접적인 현실 인식의 노출에 거리를 두고 길항하고 있었던 것이 2000년대 시의 주된 흐름이었다.
그리고 최근 10년 정도에 다시 문학과 정치의 문제가 화두로 등장하였다. 랑시에르와 같은 이론가가 각광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논의는 철저하게 미적 자율성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그 결과 문학(특히 시)과 정치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많은 한계를 보여주었다. 물론 표면적으로 시대나 정치 문제에 대한 현실인식이 드러나지 않아도 그 이면에 정치적 무의식 차원에서 현실인식이 잠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미적으로 처리되어 그것을 읽어내는 일이 과장이나 비약으로 비판 받는 사태에 도달하고 말았다.(시와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필자의 서정성과 정치적 상상력 참조)
이때 시조가 역사적 정통성을 바탕으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시조 역시 대부분 미학화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 미학 속에 현실인식을 가장 많이 감추어 두고 있는 갈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상황 자체와 직접적인 방식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학화된 상태에서도 현실의 문제와 연결된 것은 박기섭 시인의 다음과 같은 작품을 하나의 예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어느 한갓진 데 국수틀을 걸어 놓고 봄비는 가지런히 면발들을 뽑고 있다
산동네 늦잔칫집에 安南 색시 오던 날
- 「角北-봄비」 전문, 각북(만인사, 2015)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각북이라는 시골 산동네의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내리는 봄비를 국수가락이라 본 것은 결혼식 잔칫날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늦잔치’인 것은 아마도 안남(베트남)에서 오는 색시의 고단한 여정과 관련된 것이리라. 베트남 색시와 한국 농촌 신랑의 조촐한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하늘도 면발을 뽑아 일조하는, 아름답지만 또 완전히 그렇게 보기만은 힘든,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을 이토록 담담하게 서정적인 언어로 풀어낸 것이 경이롭다. 우리 시대 농촌의 새로운 풍경, 다문화라는 시대사적 현실이 이처럼 시조에서 성공적으로 포착될지는 기대하지 않았던 바이다. 서정적인 시에서 흔히 배제하는 현실적 풍경(이런 것은 대부분 참여시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종오 시인의 다문화 관련 시가 그것이다)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시조時調가 시조인 바, 그 명맥이 이 시인에게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평론가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나 필자는 이 짧은 시에서 이런 현실 문제를 포착하고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대단한 경지라고 판단한다.
최근에 발표된 작품 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가 눈에 띄었다. 시인의 현실인식이 절묘한 언어적 표현과 잘 만난 경우가 아닐까 한다.
문장이 모여들면
두꺼운 노래가 되니
사람이 리듬이 되면
얼마나 거대한가
우리는
범람할 것이다
너울로 갈 것이다
모든 길에 쏟아지듯
모든 길을 터뜨리듯
현실보다 묵직하게
세상보다 시끄럽게
아침에
먼저 도착할 것이다
노래는 힘이 세다
- 김남규, 「문장의 광장」 전문(〈시와 표현〉, 2016. 12)
‘문장의 광장’이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이 작품은 두 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현실 문제를, 뒷부분은 문학의 책무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첫 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를 연상시킨다. 문장이 모여들면 두꺼운 노래가 되듯 사람이 모여 리듬이 되면 범람하는 바다가 될 것이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근래의 촛불시위를 언급하지 않지만, 함축적인 표현으로 그 융융한 흐름을 잘 포착해내고 있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다음 부분은 이런 흐름을 ‘노래’라는 시 자체의 문제로 전환하여 현실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으며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 “모든 길에 쏟아지듯/ 모든 길을 터뜨리듯” 하는 것은 바로 현실의 풍경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것은 현실보다 세상보다 더 본질적인 노래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런 시대에 노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목청을 타고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 자신과 타자의 귀에 닿는 시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이런 노래야 말로 ‘문장의 광장’, 광장의 문법이 아니던가. 문장의 밀실, 밀실의 문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현대시의 치우친 경향에 대하여 어떤 변화의 조짐을 이런 표현에서 읽어내는 것은 비약만은 아닐 것이다.
정수자 시인의 다음 작품도 시인의 현실인식을 배제하고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하나의 대상을 다루면서 자신의 생각과 현실의 문제를 탁월하게 엮어내고 있다.
온몸이 눈이다 또
실핏줄도 파르라니
피 고인 손톱이고
피딱지천지 무릎이다
막 눈 뜬
어린 함성들까지
끌고 안고
이고지고
벽을 넘자 넘자고
비바람쯤 추임새 삼아
기어서 서기까지
시멘트가 울기까지
얄랑셩
서로 업는 어깨들
허공 물고
허공 열 듯
- 정수자, 「그리하여-류연복 화가의 ‘담쟁이-나는 온몸이 길이다’에 붙여」, 전문(〈문학청춘〉, 2016. 겨울)
담쟁이는 도종환 시인의 유명한 시를 통하여 부정적인 현실을 온몸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부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류연복 화가도 이런 생각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류연복 화가의 작품 중에 담쟁이를 다룬 작품이 두 편 발견되는데 하나는 도종환 시인의 시 구절을 모티브로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시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품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한 한 줄기의 담쟁이가 서로 어깨를 엮어 온몸으로 벽을 타고 오르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정수자 시인의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이 작품 행간에 현실의 아우성이 가득 스며들어 있어 담쟁이와 부정적 현실을 타파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겹쳐진다. 가령 “막 눈 뜬/ 어린 함성들까지/ 끌고 안고/ 이고지고”라는 구절에 이르면 그 혼융은 절정에 이른다. 광장의 함성이 곁에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나부끼는 담쟁이 이파리와 군중의 물결 중 이 시가 그리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는 것이다. 또한 “허공 물고/ 허공 열 듯”이라는 구절은 벽을 넘는 일이 결국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발판 삼아 허공을 개척하는 지난한 일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현실인식이 담쟁이를 통해 치열하게 개진되고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품을 보며 현대시조가 미적으로도 최절정에 도달하였으며 현실인식에서도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필자가 시인이고 평론가로서 수많은 현대시를 접하였지만 현실인식이 언어적 표현과 만난 최상의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하였다. 시조 평론을 처음 쓰면서 이런 좋은 작품을 바로 만나게 될 줄 미처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더욱 감동스럽다. 현실인식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 외에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많은 것을 확인하고 시조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런 수준은 시조의 융융한 역사가 바탕에 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1992년 한국일보에 「세한도」로 등단.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외, 평론집 황금책갈피 등.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월평_시
시의 본령을 묻다
김정남
우리 시인들의 상상력이 세계와의 길항력을 상실한 채 자폐적 사유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듯 왜소한 자의식 속에 침잠하는 일은 무심함을 넘어 시의 존립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일이며 하나의 직무유기다. 일일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전 시민사회를 분노케 했던 국정농단 사태를 앞에 두고 서도, 온 문단을 뒤집어놓았던 성폭행 문제를 적나라하게 목도하고서도, 나르시시즘에 빠진 요령부득의 관념이나 교언영색으로 꾸며진 일상의 한담을 늘어놓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언어의 긴장은 풀어지고 관념의 사치로 범벅이 된 한가한 일기 수준의 글들이 행갈이를 했다고 곧 시가 되지는 않는다. 아픈 언어, 가파른 언어, 간절한 언어, 마침내 돌파해 나가는 언어, 이런 시어를 보고 싶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시구를 상투적인 경구인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속에 담겨 있는 시작의 진솔한 고뇌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내가 고른 이 3편의 시는 진흙 속에서 간신히 찾아낸 연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가편이 아니라, 진흙탕과 같은 시대고를 떠안고 그 안에서 힘써 제 무릎을 펴고 일어선 언어라는 말이다.
내 인생은 온갖 물음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물음이 울음으로 끝나지 않게 묻곤 했었지
결혼도 사랑도 하기 고단한 나라에서 우리는 무엇일까
언제까지 서로의 피난처가 못되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밀어내는 눈보라 소리를 낼까
페북, 인스타그램 등 SNS 무대에서
언제까지 나를 알리고, 팔아야 하나
우리는 SNS 무대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생을 살고
쇼핑백무덤에 간편히 누워 장례식을 치르고
명복을 빌어야 할지 모른다
돈이 있으면 예전에는 그냥 부자구나 했는데,
돈이 있으면 이제는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세상이 되었다
8년 일해 번 돈을 잃고
8년째 반지하방을 못 나오는
나를 화살처럼 날려버리고 싶다가도
살기 위한 모진 주먹들이
꿈꾸는 걸음들이
제대로 사랑하기 위한
몸짓이어야 함을 이제는 아네
지구가 회전의자처럼 빨리 돌고,
어느 곳이든 썩은 냄새가 난다
이무리 일해도 나아지는 게 없고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에
내 주머니에 흐린 눈물만 가득하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벼랑 같아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음이 울음으로 끝나지 않게
나대신 비명을 지르는 유리창이 흔들린다
아, 아프다고 외치지도 못하는 저녁에
―신현림, 「물음 주머니」전문( 〈시로여는세상〉, 2016년 겨울호)
시에는 적어도 고통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식론적인 갈망이든,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안간힘이든, 그로 인한 절망이든, 시와 현실의 계면에는 몇 방울의 피가 아교처럼 응혈져 있어야 한다. 사랑과 이념을 상실한 세기말의 내면풍경을 진솔하게 묘파했던 신현림 시인이 지금-여기 우리 삶의 지옥도를 명징하게 드러내면서 그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먼저 화자는 이렇게 묻는다. “결혼도 사랑도 하기 고단한 나라에서 우리는 무엇일까”라고.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를 넘어 9포 세대(연애․결혼․출산․취업․주택․인간관계․희망․건강․외모 포기)로 나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그 사회성원의 존재를 묻는 것은, 곧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 사회, 더 나아가 국가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만남을 통해 “서로의 피난처”가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차라리 혼자이기를 택한다. 1인 가구의 증가는 이를 반영하고 있고 혼밥, 혼술 등의 문화는 접촉성 질병의 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타자와 가장 쉽게 만나고 교류하는가. 화자는 SNS를 지목한다. 우리는 “SNS 무대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생을 살고” 있다. 그곳은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생각과 일상을 노출하고 타자들의 ‘좋아요’를 통해 평가받으며 그를 통해 위안을 얻는 세계다. 그러나 그 접촉이란 타자를 이해하고 관계 맺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도취적 성격이 강하다면, 이는 진정한 만남일 수 없다. 이렇게 인스턴트화된 생의 모습은 죽음까지도 “쇼핑백무덤에 간편히 누워” 치르는 장례식으로 사물화된다.
이 속에서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생의 기반은 지긋지긋한 돈의 문제다. “8년 일해 번 돈을 잃고/8년째 반지하방을 못나오는” 출구 없는 유리천장 사회! 그러나 “살기 위한 모진 주먹들이/꿈꾸는 걸음들이/제대로 사랑하기 위한/몸짓이어야 함을” 화자는 알고 있다. 그 소망마저 없다면 “어느 곳이든 썩은 냄새가” 나고, “아무리 일해도 나아지는 게 없는”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벼랑 같아/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진솔한 표현은 우리 시대의 억눌린 수많은 하위주체들의 생의 절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인 현실과 “꿈꾸는 걸음”이 상징하는 극복의 의지 사이에서 “아, 아프다고”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한 채 질식하고 만다. 생에 대한 물음이 울음이 되지 않기 위한 화자의 악전고투가 헬조선을 견디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깊은 공감을 던져주고 있다. 부러 꾸미고 배배 꼰 언어가 아니라 날 것의 그대로의 인식과 정서를 드러낸 과감한 진술이 오히려 핍진성을 더한다.
손톱은 밤에 깎는다
시궁쥐들의 분발을 위해
인간이 못 다 저지른 악행을 대신해 준다면
우리는 더 많은 치즈를 빚을 것이다
다음엔 가혹하게 끝내주시겠지
신도 있다는데
무거운 얼굴을 씰룩거리는 새들의 병은
오늘도 차도가 없다
즐겁고 즐거운 나머지
연인들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지나간다
그러자, 그렇게 하자
중국매미는 바로 죽여야 한대
천적이 없기 때문이래 친구가 말한다
천적이 없는 신 같은 건 만날 일 없던데?
그러자, 그렇게 하자
시작하는 안녕은 몰라도 끝내는 안녕은 잊지 마
팔이 하나뿐인 남자는 잊지 않았다
발이 세 개 되는 그는 유일한 팔로
세 번째 발목을 들고 근면성실 양말을 팔았다
아침에 켜두고 간 형광등이
그대로 켜져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불쑥 떠오른 대낮에 한 약속
기꺼이 서로의 신이 돼주기로 한
언제 어디서나 꺼낼 수 있는 포캣치즈처럼
―유계영, 「공공 서울」전문(〈문장웹진〉, 2016년 12월호)
유계영 시인은 주인이 함부로 버린 손톱을 먹은 쥐가 사람으로 변해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옹고집전의 ‘진가쟁주’眞假爭主 모티프를 우선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화자는 시궁쥐를 “인간이 못 다 저지른 악행을 대신해” 주는 대상으로 동기를 변형하고,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치즈를 빚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쥐가 대속의 대상으로 제시된 것은 악행의 원조가 인간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어 “다음엔 가혹하게 끝내주시겠지”라는 심판의 묵시록이 제시되는데, “무거운 얼굴을 씰룩거리는 새들”로 상징되는 피조물들의 병은 차도가 없고, 그저 향락의 날들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악의 공간인 서울이라는 소돔성은 “즐겁고 즐거운 나머지”,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날은 영영 오지 않을 듯이 깊은 향락의 병에 물들어 있다.
손을 맞잡은 연인들처럼 일상은 평화롭고, 천적이 없는 중국매미는 바로 죽여 버릴 수 있지만, 천적이 없는 신은 만날 일이 없다. 언제나 숨어 있는 영생불사의 신. 인간의 비극을 지켜보기만 할 뿐 나타나 말과 행동으로 개입하지 않는 신. 그렇게 구원의 형식으로서는 부재하면서 동시에 현존하는 신. 화자는 “그러자, 그렇게 하자”라는 말을 통해 비극적 세계 인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이는 포기나 체념에 다름 아니다.
팔이 하나 밖에 없는 남자는 곧 발이 세 개인 남자이고, 그는 유일한 팔인 “세 번째 발목을 들고 근면성실 양말을” 판다. 이 순수하면서도 절박한 실존의 양태에도 불구하고, 신은 서울 하늘에 나타난 적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화자는 대낮에 친구와 맺은 “기꺼이 서로의 신이 돼주기로 한” 약속을 떠올린다. 서로에게 “포켓치즈”처럼 꺼낼 수 있는 신이 되어 준다는 것. 신은 숨어 있다.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나 부재의 방식으로만 현현하는 신. 이 비극에 맞서 서로에게 신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은, 진정한 자기구원을 상실한 “공공 서울”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때 공공을 ○○의 의미로 해석했을 때 특정 지역이 아닌 공공의 서울이란 온갖 악행이 넘쳐나는 소돔성으로서의 보편적 도시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숨은 신에 함축되어 있는 비극적 세계인식이 공공의 서울에 어떻게 겹쳐지는가를 고구한 이 작품은, 자기구원의 불가능성과 그 단념의 방식, 더 나아가 실존적 결속의 방식을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다.
세상은 매일 매순간 무너지려 한다.
한순간도 천지사방은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한순간에 무너지고 우주가 쏟아질 수 있다.
세상 모든 새들은
잿빛 댐처럼 우주를 가둔 하늘을 틀어막고 있다.
하늘이 터져 지상이 우주로 뒤덮이지 않도록,
새들은 일생 쉼 없이 우주가 흘러나오려 하는
제 몸피만큼 작은 바람구멍들을 계절마다
매일매일 시시각각 날아다니며 틀어막고 있다.
새들이 모두 잠든 밤이면
우주가 새어나와 지구가 침수되고
집들과 배들과 별들의 깨진 창문 같은 잔해가
둥둥 떠내려왔다가 떠내려간다, 떠내려가다가
흘러내려가다가 고인 곳, 봉분처럼 쌓인, 고인의 곳.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잿빛 댐처럼 지구를 가둔 땅을 틀어막고 있다.
땅이 터져 우주가 지구로 뒤덮이지 않도록,
사람들은 일생 쉼 없이 지구가 흘러나오려 하는
제 발자국만큼 작은 땀구멍들을
매일매일 시시각각 발바닥 닳도록 서로 오가며 틀어막고 있다.
엄마들은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순간 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질까봐
그 자리에 곧바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는다.
지구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해 터져나오려는
그 순간 그 자리를 틀어막듯 주저앉는다.
단 한걸음도 더 내딛지 못할 순간이 왔다.
단 한방울도 남김없이 온 힘이 빠져나간 순간이 왔다.
이제 어떡하나, 엄마들 가슴 한가운데 난 구멍을.
당장 막지 않으면 금세 금가고 갈라져 댐이 툭 터지듯
한순간 무너져내릴 텐데, 세상이 엄마로 다 잠길 텐데.
세상 모든 사람들 물살에 무릎이 부러지고
막지 못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온몸이 줄줄 다 흘러나올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기적을 기다리며
매순간 무너지려는 길을 틈새를
매순간 무너지려는 공중의 틈새를
천지사방을 이 시간을 온몸으로 막으려
죽어서도 그들은 여기에 서 있다.
―김중일, 「매일 무너지려는 세상」전문(〈창작과비평〉, 2016년 겨울호)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매일 무너지려 한다. 모든 것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낡은 것을 수리하거나 허물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한다. 그것이 문명의 역사라면 그 막다른 골목인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네트워크 형태의 시스템으로 규율되고 작동되는 현대사회의 바벨탑은 그만큼 취약하고 그 파국은 막대하고 광범위하다. 지진․ 쓰나미․ 전염병 등 대규모 자연재해나 테러․ 금융위기․ 각종 사고 등 사회적 재난은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또 복합적인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는 그만큼 우리의 삶의 조건이 취약하고 불확실한 토대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평온한 일상이란 재난들의 간극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가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새들은 우주가 흘러나오지 않게 우주를 가둔 하늘을 막고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구가 흘러나오지 않게 지구를 가둔 땅을 틀어막고 있다. 이 팽팽한 긴장과 위기를 “매일매일 시시각각” 견디는 존재들. 이런 존재의 재난상황은 미증유의 사태이며 종말론적인 위기의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이때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엄마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하지만 이 주저앉음이란 망연자실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해 터져나오려는/그 순간 그 자리를” 틀어막는 행위이다. 온몸으로 절망의 불덩이들을 막아선 엄마들. 화자는 “단 한 걸음도 더 내딛지 못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이어 “엄마들 가슴 한 가운데 난 구멍을” 어떡하느냐고 탄식하며 그 구멍을 당장 막지 않으면 “댐이 툭 터지듯/한순간 무너져 내릴 텐데, 세상이 모두 엄마로 다 잠길 텐데”라고 절체절명의 파국적 상황을 타전한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에서 자식 잃은 엄마들의 오열과 분노를 목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유가족들은 자식의 죽음이라는 아픔을 딛고 이대로 진실이 수장되어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지금도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 엄마들의 가슴 한가운데 난 구멍”을 어찌할 것인가. 당장 그 구멍을 막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져내릴 텐데. 그 엄마들은 이제 갈라져 무너지려는 세상에 맞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적을 기다리며” “무너지려는 길의 틈새를” “무너지려는 공중의 틈새”를 온몸으로 막으며, “천지사방을 이 시간을 온몸으로 막으며 죽어서도” 여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재난사회에 살면서도 일상이 유지되는 것은 재난의 상황을 인지한 혹은 그 비극을 이미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희생과 의로운 싸움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우주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지구가 오늘도 무사한 것은, 무수한 구멍들을, 균열의 틈새들을 온몸으로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너질까봐 자리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그 순간 그 자리를 틀어막고 있는 자식 잃은 엄마들처럼.
참을 수 없는 사소함으로 가득 찬 현재 한국시단의 상황은 시대고에 허덕이는 사회 현실과 너무도 상반된다. 내밀한 자의식적 고뇌는 일기장에나 써야할 것이고, 한가한 산책담에 불과한 이야기들은 페이스북에나 적어야 온당하리라. 시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자리이고 그것은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도외시한 자리에서 개화하지 않는다. 이 혹독한 시간을 통과해 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다 치열한 사유와 뼈아픈 고뇌가 필요하다. 변방 오랑캐에 불과한 나의 외로운 타전이, 오만한 언의의 성체를 쌓아올린 저 비만한 중심에 역이逆耳의 목소리로 전해지길 빈다.
김정남金正男 2002년 〈현대문학〉평론, 2007년 〈매일신문〉신춘문예 소설 등단. 문학평론집 『꿈꾸는 토르소』외. 장편소설『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외. 현재 가톨릭관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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