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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버려진 십자가① 고린도전서 15장 10-20절/곽선희 목사 “10.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11. 그러므로 나든지 그들이든지 우리가 그렇게 선포하매 너희가 그렇게 믿었느니라. 1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고 선포하였거늘 너희 가운데 어떤 자들은 어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지 아니하셨느니라. 14. 또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지 아니하셨으면 우리의 선포하는 것이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15.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리니 이는 우리가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였기 때문이라. 만일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지 아니하셨느니라. 16. 만일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느니라. 17.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18.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19.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중에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 부터 십자가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시간으로 <버려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두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두 길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한길 대속의 십자가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충분 하고,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1. 제일 중요한 것이, 무시되고 있는 십자가 신앙 우리가 다 아는 바 4복음서는 십자가에 관해서 복음서 전체의 삼분의 일에서 많게는 절반까지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매우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절반을, 적게는 삼분의 일의 분량을 십자가 사건으로 길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적생애가 삼년을 지나셨는데 왜 삼년에서 그 마지막 일주일, 그 기간만 길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기독교의 중심은 바로 십자가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일관적인 사역 목표와 푯대가 십자가였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얼핏 보면 성경이 복음서가 십자가 사건을 너무 길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경읽기가 지루해 지는 사람도 일부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나기 마지막 일주일 전까지는 그래도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라든지, 예수님의 교훈이라든지 예수님의 스토리가 나오는데, 십자가 사건 일주일을, 성경이 너무 길게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 읽기가 지루하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 읽는 분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설교하시는 분들을 보면, 성경의 복음서의 1/3 분량을 차지하는 십자가 설교를 설교의 1/3(삼분의 일) 분량으로 할애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열 번 했다고 하면, 서너 번은 십자가 설교를 해야 하는데 설교를 열 번 했다고 하면, 십자가 설교를 1번이나 아니면 설교 20~30번에 1번 할 정도로, 또는, 절기설교 정도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핵심적인 주제(십자가)를 무시하거나 간과(看過)하거나, 조금 옆으로 치워 버리는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부터 "십자가"에 관해서 조금 나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폭을 더 넓혀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적생애의 사역에서, 일관적인 목표와 푯대가 십자가이었고 다시 말해서 우리 각 개인 크리스천의 삶의 푯대와 목표가 일관적으로 십자가 방향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으심으로 가시 사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2. 반박하는 사람들 ‘십자가 설교만 전부가 아니다.’ 주장에 대해서 일리가 있습니다만 잠시 주제를 약간 벗어나서,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십자가 설교가 전부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공적생애의 푯대가 오직 십자가 이었다면 그러면 뭐하려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삼년이나 사셨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공생애를 일주일만 사시면, 되는 거 아니냐?' 십자가 지신 기간은 1주일 이내입니다. 그러면 공생애를 1주일만 사시지, 왜 길게 오래 사시느냐, 왜 3년이나 헛고생 하셨느냐? 하는 주장이지요. 공식생애를 1주일간만 사시면서, 1주일 안에 십자가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서 끝내 버리셨으면 어차피 예수님 목표와 목적은, 그대로 이룬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공생애를 삼년이나 (길게) 사셨느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육신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신 것과 천국의 씨를 전할 제자들을 양육하여서 온 세계에 일리는 것과 크리스천의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 즉 제자도의 삶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데, 최소한 삼년이라는 (긴) 기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십자가 사건>, 그 내용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공적생애 삼년> 이 기간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둘 다 맞는 주장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제자도의 삶> 그리고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양육하신 그 삶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공생애에 일관적인 목표와 푯대가 <십자가>이였다.’ 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이것(십자가)은 벌써 창세기 3장15절부터, 또한 7백년전 이사야 때부터 다 예언된 사실 아닙니까. 3. 대속의 십자가 그래서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십자가의 두길’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한길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즉 대속의 십자가> 이고 또 다른 한길은 <내가 지는 십자가>가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도 있지만 또 내가져야 하는 십자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속의 십자가, 한길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마16:24-25) 하는 말씀을 사복음서에 얼마나 반복하면서 말씀하셨습니까? 적어도 6회 이상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나는 십자가를 전파한다.’ 이렇게 말을 할 때,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믿는다.’ 하는 뜻으로 말씀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고 따라가야 할 자기 십자가’는 거의 무시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그 '대속의 십자가'만 십자가의 전부인 것처럼 이렇게 자기가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대속의 십자가’란? 예수님께서 정말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 뼈가 이렇게 상하는 고통, 그 정형외과에서 뼈를 맞추는 수술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뼈가 부러지시고 정말 채찍질에 등뼈가 허옇게 드러나는 그리고 거기에다 타는 뜻한 갈증, 끊어지는 아픔!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들이 끊임없이 입으로 저주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끊임없이 저주를 하니까,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약간 먹여서 그 저주를 못하게 몽롱하게 만드는 목적도 있다. 그런 말도 들었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그 같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 비명과 저주가, 보통사람 같았으면 막 속에서 쏟아 나와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이런 시편의 구절들을 외우시면서, 저주 대신 가상 칠언을 토해내신 것입니다. 그러한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을, 시편에 기록된 마지막 사역의 기록을 외우셔서 '대속의 십자가'는 내가 당해야 될 모든 죄 짐과 형벌을, 주님이 대신 다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속의 십자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이 이사야서 53장의 기록입니다. “3.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 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창조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3-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의 모든 고통당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허물을 사함 받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속함을 받았습니다. 대신 ‘속했다’는 말은, 교회에서만 쓰는 말인데 ‘대신 값을 치렀다’는 뜻입니다. 2) 이 대속의 십자가는 두 가지의 교리 ‘노예 해방하는 것은 빚 때문에 잡혀있는 것을 대신 값을 갚아준다. 음식점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 후에, 그 중의 한 사람이 값을 치릅니다. 요즘 말로 쏜다고 합니다. 그것은 대속의 교리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음식 값을 내면 (대신 값을 치르고 나면) 다른 사람은 음식 값을 치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 역시 대속의 교리를 잘 보여줍니다. 제물인 짐승인 염소나 양이나 소가, 내 대신에 죄 값으로 죽고 나면 나는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제물이 내 대신 번 제단에서 쪼개지고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시로다’ 말씀처럼, 내 대신, 또한 우리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내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죄 값으로 죽을 필요가 없는 것예요. 이것이 대속의 교리이고요, 또 대표의 교리가 있습니다. 3) <대표의 교리>란? “10.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을진대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11.그러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속죄를 받았으며 그분을 통해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느니라.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13.(율법이 올 때까지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 15.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을진대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로 인하여 선물은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이니라. 16.또 이 선물은 죄 지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정죄에 이르렀으나 많은 범죄로 인한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칭의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 하였을 진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군림하리라.)”(롬5:10-17)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 “대표” 한 분의 순종으로 인해서 온 세상 인류 모두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월드컵에서 축구 할 때, 한국 팀이 (대표로) 승리하면 국민 모두가 기뻐합니다. 또 한국 팀이 패배하면 국민 모두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대표의 원리’인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류의 대표자 첫 아담의 패배/타락은.. 모든 인류의 패배였고 인류의 대표자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대표의 교리’는 가족에게도 적용됩니다. 가족의 대표인 가장 한 사람의 순종으로 가족 모두에게 해택이 돌아 갈수 있고 오늘도 가장인 내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하면.. 우리가족이 다 잘못 될 수도 있습니다. 대표의 교리인 것입니다. 대속의 십자가 (1) 4. 대속의 십자가. 딜레마가 있습니다. 1) 그런데 이 ‘대속의 십자가’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딜레마가 한 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청준 씨가 쓴 소설을 영화화 한 <밀양>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줄거리에, 어떤 엄마가 자기애가 유괴되어 살해를 당했는데요. 나중에 그 살해범이 붙잡혀서 교도소에서 복역했습니다. 그 신애라는 애 엄마가, 기독교 신앙에 귀의해서 자기의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나중에 교도소에 가서, 그 살해범을 용서해 주겠다고, 찾아갔습니다. 자기가 그 살인범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풀려고 가보니까 그 살인범이 너무나 뻔뻔스럽게 ‘자기는 이미 주님께 용서를 받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이 신애 (여주인공)가 미쳐서 기독교에 대해서 좀 안티적인 생각과 반응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 작가의 정확한 의도는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러한 소설/영화의 구성 plot이었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판단해 보세요. ‘과연 그 살인범은 진짜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인가요?’ 그 살인범은, 믿음이 너무 커서, ‘믿음으로 자기가 죄용서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살인범이 뻔뻔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애’가 잘못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대속의 십자가 그 딜레마>라는 것입니다. 소설가가 아주 예리하게 지적을 잘 한 것입니다. 2)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 살해범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와, 대표의 원리로,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내가 사죄를 받았는데, 여러분들이 무슨 잔소리냐? 내가 사죄를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확실히 믿는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있는데요. 애 엄마 입장에서는 ‘그것은 사기다 그런 기독교는 나는 믿지 않겠다. 그게 무슨 십자가 신앙이냐? 그게 올바른 신앙이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가 오늘날 많이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말이 ‘뭐 다 잘못 해놓고 나서 ‘나는 주님께 참회했고, 나는 용서 받았다’ 이렇게 일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도, 사실 있습니다. 이 딜레마(모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대속의 십자가’는 오히려 문제만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무슨 기독교냐?’ 비판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바로 그것이 기독교요, 십자가 은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으려면, 좀 뻔뻔스러워 져야 한다.’ 라고 설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딜레마에 대해서, 저는 이런 해답을 제시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그 살인범이 정말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이 맞다면, 진동이라 할까요. 전율이라 할까요. 다른 사람들, 그 주위의 사람들도 그 사람이 용서 받았다는 것이 진동으로, 전율로 (성령의 역사로)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도 그 사죄 받음을 인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긍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기 아이가 죽은 것은, 애 엄마 입장에서는 좀 그것이 쉽게 수긍이 안 된다 할지라도 결국 애 엄마도 수긍이 될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짜 그 대속에 은혜가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면이 있습니다. 진동, 공명으로요! 물론 끝까지 안 미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성령을 받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못 미치겠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께, 십자가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만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파장이, 그 공명이, 주변에도 반드시 미치게 되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평가로는, 그 영화에 나오는 살해범은, 그저 어떤 신학적 이론에 의해서 지식적으로 이렇게 자기가 용서를 받았다라고 믿는 것이지 진짜 하나님께 용서 받은 것은 아닙니다. 공명과 진동이 안 일어났으니까요! 십자가 복음, 이런 게 모두 지식이 아니잖아요. 기독교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면 사람에게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1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마6:12) 지식이 필요 하지만, 지식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자기가 정말 자기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 파장과 공명이 미치게 되고 그 감동이 미치게 되고,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리라.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오다가 너를 대적할 어떤 일이 네 형제에게 있음을 거기서 기억하거든 네 예물을 거기에,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맨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미5:23-24) 어쨌든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로 ‘자기 죄가 다 용서 받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그러면 사람에게도 잘못을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의 말씀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식적으로야 일초 만에 다 깨달을 수 있고, 그러나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사람의 관계도 회복해야합니다. 3) 십자가의 은혜를 잘못 아는 것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대속의 십자가’를 얄팍하게 깨닫고, 깊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그런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이사야서 53장 5-6절을 읽으면서, 계속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창조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위 구절에서 ‘우리’ 대신에 ‘나’를 넣어 봅시다. 이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계속 외우면서 암송하면서 기도를 하는 그 사람은 ‘대속의 교리’가 뭔지를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성령의 뜨거운 감동 감화 가운데서 ‘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구나!’ 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 동전의 양면 같지만 하나입니다. 오늘 제가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대속의 교리 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이해를 하고 또 실제로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다 잘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일부 우리 교우들 가운데서 ‘내가 지는 십자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마10:38,/눅14:27/막8:34)
앞으로 위 4가지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자세히 들어가서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는 믿고 깨닫고 감사하면서도 자기가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까요? 그것은 대속의 십자가는, 일면 쉽지만,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기에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가도, 그 대목에 이르면, 그냥 성경을 건너뛰고 읽어 버리고, 또한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도, 평소에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여러분, 한 쪽 면만 있는 동전은, 그거 쓸모없는 동전입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안봅니다. 1. <대속의 십자가>도 중요하고 2. <자기 십자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 “감동”에 의해서 자기도 누가 강제로 지라고 안 해도,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막 이렇게 자원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 갈 수 있는 그 힘이 무어냐? “감동”입니다. 자기 마음에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그 십자가에 은혜가 진짜 고귀하고, 진짜 감사하고, 진짜 너무나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다.. 라고 자기 마음에 감동이 된 사람은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용서하고 들으세요.) ‘십자가의 단물만 쏙 빼먹고, 모르는 척하고 돌아 설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단물만 쏙 빼 먹고 ‘나는 예수님 대속의 은혜로, 십자가의 공로로 제가용서 받았습니다.’ 그렇게만 말하면, 그는 십자가 은혜를 지식적으로만 받은 사람이지, 진짜 십자가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아녜요. (구원파의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기 모든 죄가 용서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큰 “감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의 그 감동이 된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 묵묵히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6. 그 대속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주님께서 사도바울(나)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내가 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이게 또한 ‘자기부인(의 십자가)’이지요. 그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에, 큰 감동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주변에서 가만히 보면, 많은 헌신과 희생과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례를 들면, ‘장애인 선교 사역’을 하시는 분들은, 고생이 좀 특별히 심하신 것 같아요. 그 장애인들, 들쳐 없고 다녀야 되지요. 차에 태워서 교회 오고 가는 일이,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 봉사자들은, 장애우들을 업고 다니고 또, 휠체어에 태워서, 차에 실어서, 놀이공원에도 가고, 저분들의 십자가가 너무나 쉽지 않다. 라는 그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6개월 하다가 관두는 게 아니고, 6개월도 오래 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3년, 5년, 10년.. 이렇게 계속 헌신하는 분들이 있어요. 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걸 하게 하는 그 원동력이 뭐냐고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자기 속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그 감동,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동이 계속 일어나니까 그 어려움을 또 극복하고, 또 타고 넘고, 또 인내해서,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교도소 (교정복지) 선교회’ 이런 것도 쉽지 않는 것 같아요. 교도소는 보통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도소까지 가려면, 차를 타고 한 시간 두 시간씩 멀리 가야 됩니다. 더 멀리는 다섯 시간 이상 가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교도소 선교 할 때에, 다 자기 돈 내서 가야 됩니다. 자기 차비 내는 것만 해도 쉽지 않는데, 교도소 선교 간다면 빈손으로 갈수 없지요. 빵이나 우유 등 간식을 사 갖고 가야 됩니다. 그럼 차비만 내는 것도 힘든데, 거기다 자기 사비까지 다 털어서 헌금을 드려서 교도소 선교를 가고, 물론 뭐 교도소 선교뿐만 있겠습니까. 사회 각계각층에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엄청난 ‘희생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르고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중요한 게 뭔가 하면, 정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이 지신 그 대속의 십자가 그게 약간 의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식적으로는 그것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진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깨닫게 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어있어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는 것은 대속의 십자가를 잘못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기복적인 신앙을 갔고 있는 것입니다. 늘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단물만 빼먹을 생각만 갔고 다녔어요. ‘내가 예수 믿어서 뭘 얻어낼까?’ 그 생각으로 구원 받기는 어렵습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거든요.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4) 어쨌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지 않는 그 사람은 정말 기독교 신앙을 지식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인데, 이 경우에 대단히 위험합니다. 자기 구원과 영생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삼성이라는 회사에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삼성이라는 회사에서 나를 받아줘야 입사하게 됩니다. 내가 A라는 형제나 자매와 결혼 하고 싶다고 해서, 다 결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A라는 형제나 자매가 나를 받아줘야, 그와 결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다 믿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구원 받고 싶다고 해서 다 받을 수 있을게 아녜요. 예수님이 나를 받아 주셔야, 내 믿음을 인정해 주셔야 되는 겁니다. 지식적으로야, 모두가 다 대속에 십자가를 믿고 감사하고 다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구원의 도리를 볼 때, 내가 주님께 받아 들여져야 하고 대속의 십자가에 대해, 내게 큰 감동이 일어나야 하고, 그래서 내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13절 말씀을 보시면 “5.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10.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11.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13.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고, 그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게, 주님으로부터 단물이나 뽑아내려는 즉, 주님으로부터 뭔가 기복 주의적 이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어쩌면 자기 구원을 받지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적 동의’의 신앙이 될 때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는 구원받은 사람 같은데 밖에 나가면 대속의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세상 사람과 구별이 안 된다면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5-13절 말씀에 사도바울은 나있을 때나 없을 때나 구원받은 것을 숨기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처럼 “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수고를, 즉 자기가 기꺼이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