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광사 선생의 학술사상 (2018년 1월 8일)
* 이 글은 이경룡과 하정숙의 연구논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이광사의 體仁공부와 心卽性 주장」, 『양명학』, 제48호, 2017년 12월.
이광태, 이광찬, 이광신, 이광사, 이광려
李匡度, 1677-1746
李匡德, 1690-1748
李匡泰, 1693-1754
李匡臣, 1700-1744
李匡明, 1701-1778, 이충익의 양부(養父)
李匡贊, 1702-1766
李匡師, 1705-1777
李匡呂, 1720-1783
李肯翊, 1736-1806
李令翊, 1740-1780
李文翊, 1735-1762, 李匡顯의 아들
李忠翊, 1744~1816
1. 이광찬과 이광신의 허령명각 논변
* 주석은 생략하였습니다.
1-1. 덕천군파 이씨 형제들의 강화도 모임
이광찬(李匡贊, 1702-1766)은 서천 이진급(西泉 李眞伋, 1675-1748)의 둘째 아들이며 1755년 을해옥사 때문에 함경도 명천으로 귀양 갔고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진급은 서울 서대문 근처에 살면서 서천매화사(西泉梅花社)를 주도하였고 이광찬은 이광신과 가깝게 지내면서 함께 서천매화사에 참여하였다.
이광찬은 어려서 조태억(趙泰億, 1675-1728)에게 배웠고 조태억은 최석정의 문인이다. 이광찬이 27살(1728) 반시(泮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고 주시관이 하곡 정제두의 문인 윤순(尹淳, 1680-1741)이다. 이때 조태억은 이광찬에게 남구만(南九萬, 1629-1711)에서 최석정(崔錫鼎, 1746-1715)으로 다시 조태억으로 이어지는 문형(文衡)을 이을 만한 경학과 문장(經學、文章)의 인재라고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반란 때문에 전시에는 참가하지 못하였고 37살(1738) 전시에 참여하여 합격하였다.
이광찬은 1733년 겨울부터 1736년까지 가족과 막내아우 이광민을 데리고 강화도 이광명(李匡明) 집에서 지냈는데, 이광명의 초피서실(超避書室)에서 형제들과 시를 짓고 1735년에는 아버지 이진급과 형제들이 전등사에 모여 시회를 열었다. 이듬해에는 이광명, 이광사와 『상서』를 함께 연구하였다. 아마도 이 시기에 이광명을 통하여 이광찬이 하곡 정제두(1649-1736)를 찾아뵙고 하곡학과 양명학을 배웠으며 이때부터 이기일물과 심리일물을 확신하기 시작하였다고 추측된다. 또한 중년에 『대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만년에는 주자를 신봉하였다고 말하지만, 이기와 심리의 일물에 관한 견해를 유지하였다. 이것은 하곡 선생의 이기일물 견해를 지킨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광명, 이광신, 이광찬, 이광사, 이광민 등이 모여서 함께 학술을 논의하였다는 것은 이들의 학술경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광신은 이광찬과 양명학과 주자학을 논변한 뒤에 1732년에 「의왕주문답(擬王朱問答)」을, 이듬해에는 「사성록(思省錄)」을 지었고, 1733년 겨울부터 이광찬이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 이광명 집에 가서 머물렀고, 1734년 이광신이 이광사에게 서신을 보내 적연부동과 미발의 정(靜)에 관하여 설명하였고, 1735년에는 이광사가 인체(仁體)를 깨달았다고 공개하였고, 1736년 이광사가 하곡 정제두 선생에게 다시 배우려고 작정하고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에 갔으며, 겨울에는 이광명, 이광찬, 이광사 셋이 초피서실에서 『상서』를 강독하였다. 『상서』 강독은 아마도 심학의 기원으로 삼는 「대우모」에 관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들 형제들이 강화도에 모여 있는 동안에 하곡학에 근거하여 심학을 연구하고 나아가 양명학을 긍정하는 태도가 확립되었다고 추측된다.
다만 이광신이 이광찬과 논변한 뒤 1743년에 「빙탄록」을 짓고 다시 1744년 죽기 전에 이광찬과 주자와 왕양명의 이기론에 관하여 논변한 「여양중변난주왕이기설(與襄中辨難朱王理氣說)」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보면 두 사람의 학술적인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끝내 서로 폄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광신은 임종 이전에 양명학을 버리고 주자학으로 되돌아갔고 이광찬과 이광사 둘은 여전히 하곡학 입장에서 양명학을 긍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광신은 1741년 봄 정후일(鄭厚一, 1671-1741)을 자주 만나 하곡 선생의 심학을 묻고 하곡의 문집을 교정할 때까지는 이광신이 하곡학과 양명학을 믿었다고 추측된다. 또한 이광찬도 만년에는 조카들에게 양명학보다는 주자학에 힘쓰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하곡후학의 계승과 분화에서 보면 이들의 강화도 모임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1-2. 이광찬과 이광신의 이기와 심리 논변과 허령명각 해석
현재 이광신이 1744년 죽기 전에 이광찬과 이기와 심리에 관하여 논변한 「여양중변난주왕이기설(與襄中辨難朱王理氣說)」에 관하여 대체적인 연구가 있다. 그러나 이광찬이 허령지각에 관하여 이기일물과 수양공부를 주장한 것이 논변의 핵심내용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광신이 1742년 이광사에게 보낸 「변도보이기설(辨道甫理氣說, 壬戌)」 서신의 내용과 연도를 보면 이광신과 이광찬의 양명학과 주자학에 관한 논변에 이광사가 참여하였던 것 같다. 이 서신에서 이광사는 성선뿐만 아니라 기선(氣善)을 주장하였는데 이광찬과 같은 견해이다. 따라서 이광찬의 주장은 이광사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광신의 「여양중변난주왕이기설」 서신과 이광찬의 「논학(論學)」에 따르면, 이광찬이 이기일물 관점에서 왕양명이 이기일물과 심즉리를 주장한 것을 긍정하고 정이천과 주자가 이기와 심리를 모두 이분한 것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광찬은 정기(正氣)의 형연정명(炯然精明)이 미발의 중(中)이고 이체(理體)이며 바로 심신(心神)의 허령명각(虛靈明覺)이며 양지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광신은 이광찬이 이기의 분별을 무시하였다고 반박하고 비난하였다. 더구나 이광찬은 정명순수(精明純粹)한 정기(正氣)가 맹자의 호연지기이고 이체(理體)이며 천명의 본성이다. 따라서 정기가 성선(性善)이라고 주장하였다.
1-3. 하곡후학의 분화 발전
이광찬은 허령명각이 이기의 일물이며, 허령명각의 정명순수한 정기 역시 선(善)이라고 보았다. 이광찬은 왕양명이 자주 말하였던 허령명각이 양지이고 양지가 천리라는 주장을 인용하여 자신의 이기일물을 변호하였다. 사실상 이광찬의 이기일물 주장은 허령명각을 설명하는 논리적 근거이었다. 이광찬은 이기일물에 근거한 허령명각 관점에서 왕양명의 양지를 이해하고 양지가 이기일물이라고 재해석하였다.
그러나 이광신은 끝까지 허령명각의 정기는 선이 될 수 없고 선악을 겸한다고 반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이광찬은 이광신이 여전히 주자학의 이기분리(理氣分離) 입장에서 왕양명을 이해하고 평론한다고 비난하였다. 결국에 이광신은 이광찬이 불교와 도교를 배우면서 성명쌍수를 배웠기 때문에 물욕을 끊고 정기를 수련하여 마음의 영소(靈昭)한 정기를 깨달으면 영생불멸한다고 믿었고 더구나 정기를 본성으로 오해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광신은 이광찬이 허령명각에 관한 이기일물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왕양명의 주장까지도 불교의 선종과 같은 이단이라고 폄하하였다.
그렇지만 이광찬은 서경덕이 주장한 일기상존(一氣常存)과 귀신 불멸을 믿었고 1744년 이광신이 죽자 지은 뇌문(誄文)에서도 여전히 나타냈다. 이율곡은 서경덕의 일기 주장이 기를 리로 오해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이 점에서 보면 이광찬이 허령명각의 선천적 일기(一氣)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상 주자학의 원칙을 부정한 것이며 더구나 율곡학의 이기분리론을 부정하고 서경덕을 긍정한 것이다. 따라서 서경덕은 조선 심학이 허령명각을 건립하는 데 학술적으로 공헌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광사가 기선(氣善)을 주장한 까닭은 바로 이광찬이 주장한 허령명각의 정명순수한 정기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광찬과 이광사는 서로 이기와 성명(性命)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토론하고 연구하였으며 1755년 이후 귀양지에서도 학술교류를 지속하였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이기일물을 주장한 근거가 허령명각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광찬과 이광사는 적어도 불교와 도교의 수양공부에 따라 허령명각을 깨우치는 수양공부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광사가 31살(1735)에 인체(仁體)를 깨달았다는 신비체험도 사실상 이와 같은 수양공부의 결과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왕양명이 정신심사(精神心思)를 응결시키는 도교의 내단 수련공부를 하여 심체를 깨달았다는 것과 서로 호응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광찬과 이광사가 하곡학에 근거하여 양명학을 긍정하였고, 이광신은 하곡학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양명학이 심체를 깨닫는 수양공부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버리고 주자학으로 되돌아섰다는 연유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광찬과 이광사가 허령명각을 깨닫는 수양공부를 선택하였고 이광신은 부정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이 둘로 나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 하곡학의 이기일물과 심성일물
하곡 선생은 이기분리를 부정하고, 심성(心性)에서도 성(性)이 심의 본체이고 심이 성의 주재자이며 모두 리(理)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심을 기(氣), 성을 리(理)로 분리하려는 주자학의 근본적인 이분론 관점을 부정하였다. 심지어 장재(張載)가 이기의 합일이 심이라는 주장도 틀렸다고 보고 수정하여 바로잡았다. 다시 말해 심성을 성즉리와 심즉리처럼 둘로 나누지 않고 심성 모두 이체(理體)로서 일치한다는 심성일물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하곡 선생은 먼저 인의예지 본성과 만물의 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주자학에서 심리와 물리를 둘로 나누는 것도, 나누었다가 다시 둘을 합일시키는 것도 모두 반대하였다. 여기에서 하곡 선생은 인의예지 본성을 먼저 깨달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본성과 만물이 일체(一體)라는 정명도의 만물일체설에 근거한 주장이며 정명도에 근거하여 양명학의 심즉리를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심체를 깨달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주자학의 격물치지가 본성과 만물을 둘로 양분시킨 관점을 반대하였고, 둘로 나누어 먼저 물리를 알아낸 뒤 다시 본성의 의리에 적용하여 합일시키려는 선격물 후치지의 순서 자체가 틀렸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광찬과 이광사 및 이광신이 이기일물을 해석한 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