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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둔율동 신앙공동체의 회고
둔율동 성당은 천주교 신앙에서 보면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지정된 거룩한 건물, 곧 하느님의 집이다. 또한 신앙공동체가 공적으로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한 건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의 집이다.(교회법 1214조) 이러한 의미를 가진 둔율동 성당이 종교적 가치를 넘어 국가 공동의 자산(資産)인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것은 당연한 조치이다. 천주교 문화는 한국문화의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일부이다.
문화재로 등록된 성당 건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둔율동 신앙공동체는 이 성당에 담겨져 있는 역사를 말해주어야 한다. 문화유적 답사전문가뿐 아니라 문화유산을 관광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느끼는 아쉬움은 문화재가 지니고 있는 역사를 모르는 체 건물 구경만 하고 돌아오는 경우이다. 둔율동 성당 방문하러 오는 사람들은 별로 볼거리가 없는 부동산을 구경하러 오지 않는다. 이 성당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 둔율동 신앙공동체는 먼저 자신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또한 문화재 활용 방안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도 둔율동 신앙공동체가 살아 온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성당 건물에 담겨져 있는 신자들의 삶과 가치관이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늘 심포지엄은 둔율동 신앙공동체가 자신의 역사를 다시 깨닫고, 문화유산의 지킴이라는 의식을 다지고, 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숙의하는 자리이다. 더구나 아직 둔율동본당사가 없는 상황이라 오늘 강의는 본당사를 서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료가 없으면 역사는 없다. 역사는 자료에 의해 서술되는데 둔율동본당은 역사 자료가 부실한 상황이므로 여러 자료를 짜깁기할 수밖에 없다. 본당사 자료는 기록된 문서 자료와 구전자료에 의존하게 되는데 서술과정에서 주의 할 점이 있다. 자료를 믿는 것은 미신이다. 기록문서 자료이건 구전 자료이건 얼마든지 잘 못이 있을 수 있다. 역사가 야담과 실화가 되지 않으려면 고된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추측은 금물이다. 추측이 사실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역사의 과학성이다. 또 하나 주의 할 점은 아무리 과거 선대들이 살아 온 노력에 애정이 가더라도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침소봉대(針小棒大) 하거나 아전인수격인 해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가 감정에 치우 칠 때 객관성이 모호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구사건 본당사건 역사는 왜 필요한가? 역사는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경험의 기록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워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교회의 역사는 교훈적인 뜻이 강하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보여 준 귀중한 가치와 교훈을 거울삼기 위함이다. 만약 잘못된 역사가 있다면 반성하여 고치기 위해서다. 그러나 많은 본당사와 교구사가 역사서술에 치우쳐 그 사실의 뒤에 숨겨진 정신력 또는 영성(靈性)에 대한 해석이 간과(看過)되고 있다. 그래서 군산지역 천주교의 모태인 둔율동 신앙공동체가 살아 온 정신의 알속과 영성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첫째 순교정신· 순교영성이다
군산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한국천주교회의 초기 역사를 읽는 듯하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없이 스스로 교리를 연구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교회를 세우고 기초를 닦은 역사였다. 군산에 천주교가 기초를 닦는 과정도 그렇하였다.
군산에 천주교를 세우려는 노력은 일찍이 1897년부터 시작되었다. 1897년 조선교구장 뮈텔주교는 목포와 군산에 개항될 것을 예견하고 1897년 5월 8일 드예 신부는 목포 본당을 신설하고, 베르모렐 신부는 강경본당을 신설본당토록 발령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의 내심(內心)은 군산에 본당을 신설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사제가 머무를 만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극성을 보여주지 못하여 뮈텔주교의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1900년 9월 4일 뮈텔 주교는 군산 본당 신설에 대하여 전라도 선교사중 연장자인 전주본당 주임 보두네 신부(전주)와 군산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나바위 본당 주임 베르모렐 신부에게 의견을 묻는 서한을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선교사들 역시 군산 본당신설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까닭은 1890년대 부터 선교사들이 서울 주교관을 갈 경우 군산 사옥개 나루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까지 갔다. 선교사들은 서울을 오르내릴 때 마다 머물곳이 없어 20리 떨어진 산곡(성산면)에 숙소를 정했다.
1900년 당시 군산에는 신자 가정이 한집 살고 있었는데 보두네 신부와 베르모렐 신부는 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미 군산 본당 신설 부지로 선착장에서 멀지 않고, 통상지에서는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동령고개(군산시 구 경찰서 일대)부근 야산을 물색해 놓았다. 그러나 땅값이 1.000냥 가량 필요한데 세 신부의 재정을 모두 털어도 살만한 돈이 못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1924년 나바위 본당 카닥스 신부는 군산본당 신설을 구상하며 꿈이 컸다. 옥구, 임피, 익산지역 공소들을 맡기고 싶었다. 게다가 “군산 가까이 막대한 해안 땅을 소유하고 있는 한 일본인 회사가 그 땅에서 벼농사를 지을 조선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만약 군산에 선교사가 배치된다면 곧 이어 800명 가까운 교우들이 유력한 본당을 형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무산되었다.
교구의 입장은 스스로 교회를 짓고 복음을 전하며 신자를 만드는 개척사목(開拓司牧)이 아니라 사제관과 성당과 신자들 등 본당으로 설립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추어진 후에 부임하여 기존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푸는 관리사목(管理司牧)의 입장이었다. 선교사들은 스스로 길을 닦는 사람들이 아니라 닦여진 길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군산 신앙공동체의 설립
군산에 처음 신자가 처음 발생한 것은 1910년대였다. 교회 기록에는 1911년까지 군산에는 신자가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1900년 베르모렐 신부는 군산에 신자 가정이 한 집있다고 했지만 다른 곳으로 떠난 듯하다.
군산 공소가 시작된 것은 1915년 전후였다. 김 마리아라는 열혈 여교우가 등장하면서였다.(김 마리아의 개인사(個人史)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이 아쉽다). 그는 신자들이 그리웠다. 그래서 매일 천주교 신자를 찾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옹기장사 여인이 옹기를 팔려고 왔는데 목에 성회패를 걸고 있었다. 김 마리아는 옹기장사 여인에게 사는 곳을 물었더니 만동리(성산면 고봉리 만동)에 사는 박 루치아라고 했다.
군산에서 20~30리 떨어진 거리의 만경강과 금강 하구에는 공소가 16개 가량 있었는데 교우들이 운영하는 옹기촌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순교자의 피가 꽃씨가 되어 이 지역까지 번진 것이다. 신자들의 옹기점들은 회현면 칠거리(1884년), 서수면 감동이(1886년), 흥법리(1888년), 관음정이(1892년), 성산면 산곡(1896년), 만동리 등을 들 수 있다. 이 공소는 병인박해가 때 순교한 가족들이거나 연고가 있는 신자들이었다.
옹기촌중 흥법리 공소에는 1872년 4월 16일 나주에서 순교한 유치성 안드레아의 사촌이며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한 유 막달레나의 오빠인 유치경(베드로)가 회장을 맡고있었다. 성산면 창감에는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박도메니코의 아들 요한이 살았고, 산곡과 만동리에는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첨 토마스의 가족들이 살았다.
김 마리아는 군산 인근에 순교자들의 가족과 박해에 쫒겨 숨어 사는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 순교자들을 만난 듯 힘이 솟구쳤을 것이다. 당시 신자들이 귀한 시절이라 신자들은 서로 만나면 친형제 자매처럼 반가워하며 왕래하였다. 옛 부터 구교우 본당에서 세례를 받으면 구교우 신자가 되고, 구교우에게서 교육을 받으면 구교우가 된다고 했다.
김 마리아는 순교자의 가족들을 만나 그들의 신심을 본받으며 열성은 더욱 뜨거워졌다. 순교정신으로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한국 초기교회 시기에 전교가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듯이 먼저 열열한 개신교 신자인 동생 김용진(金瑢鎭. 야고버)을 개종시켰다. 이렇게 해서 군산에 첫 신앙공동체가 시작되었다. 신자 한 사람으로는 교회, 공소, 신앙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모여야 한다. 김 마리아 한 사람이 발생했다고 해서 군산에 공소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김 마리아는 군산교회의 창립자였다. 김 마리아가 자기 집인 군산부 영정 22번지에서 신앙공동체의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13년 혹은 1916년이었을 것이다.(註 7번 참조)
군산공소는 나바위본당 소속이었다. 김 마리아의 개인 가정집은 「공소집」이고, 공소집회를 목적으로 마련한 「공소」는 아니다. 개인 각자는 자기 집에서 일상의 기도를 할 수 있고, 주일과 축일에 정해진 기도로 미사를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두 가정 이상이 모이면 공동으로 기도하기를 원했다. 성경말씀에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오 18, 20)고 하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한 사람들의 모임이고 교회가 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데, 그들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운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소에서는 모든 교우가 모여 아침, 저녁기도를 바치고 함께 공동체가 모여 주일과 축일에 공소예절을 하였다.
일본인의 계획도시인 군산은 전국에서 생업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왔다. 신자들 역시 황해도 해주, 서울, 개성, 평양, 그리고 전라북도 등 경향각지에서 이주하여 무역업, 상업, 노동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군산으로 이주해 온 초기 공소 신자는 해주 출신인 강윤흠(姜允欽. 요한), 이어서 임 바오로, 한민수(韓民洙), 채용수(蔡鏞洙), 양성준(梁聖俊, 베네딕도) 등 그리고 유(劉) 마리아, 박 수산나 등이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군산으로 이사하여 온 이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위로와 평화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이 세상은 역려(逆旅) 같은 세상이 아닌가, 잠시 살다 떠날 나그네의 집과 같은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고향이 필요했다. 그들은 천주교에서 영원한 참 고향을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1918년 특별히 기록을 남겼다. “군산에는 7년 한 사람의 교우도 없었는데, 오늘 날에는 60여명이나 되며, 모두가 열심하다”고 하였다.. 군산 신앙공동체는 신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더 이상 김 마리아 개인 집에서 집회를 할 수 없게 500원을 모아 신영정(新榮町)에 공소 건물로 14칸 목조 와가를 매입하여 내부를 개수해서 강당으로 사용하였다.그러나 군산신앙공동체가 신영정에 공소 건물을 갖게 된 시기는 교구문서를 보면 1917년 이후이다.
군산이 번영 할수록 신앙공동체의 가족도 증가하였다. 개중에는 순교자의 가족이나 박해를 경험한 신자들과 그 후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생계를 차자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 생활이었다. 그들은 생계를 해결하는 것 못지않게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였다. 그들은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면서 매일 미사에 참예할 수 있으면 그 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었다. 그들의 꿈은 성당 가까이 살며 매일 미사에 참예하여 성체를 영할 수 있으면 더 이상 큰 행복이 없었다.
1921년 6월 18일 드망즈 주교는 군산공소를 처음 방문하였다. 군산에 오기 전 6월 16일 나바위 본당에 도착하여 17일 71명에게 견진성사를 주고 18일 군산공소의 본당 신부인 나바위 본당 주임 소세신부와 보좌신부인 파르트네 신부를 대동하고 기차로 강경, 이리를 거쳐 10시 50분 군산역에 도착하였다. 주교 일행은 김용진 회장 집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었다. 주교는 “이곳 신입교우들은 아주 열심하다”고 일기장에 남겼다.
6월 19일 에 주교는 미사를 집전하고 나바위 보좌 파르트네 신부는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날 영성체자는 100여명이었고, 30명에게 견진성사를 주고, 혼배성사까지 주었다. 드망즈 주교는 오전에 군산 시내를 둘러보다가 좋은 집 한 채가 매물로 나온 것을 보고, 이 집에서 신부가 거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주교가 전례를 거행한 집은 적어도 100여명이 미사에 참예할 수 있는 건물이었을 것이므로 신영동에 공소 집을 마련한 시기는 1921년 이전이어야 한다.
1922년 12월 12일 드망즈 주교는 말을 타고 옹기촌인 성산면 만동리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14일 인력거를 타고 군산에 도착하여 이리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번에도 회장 집에서 2시간 동안 몸을 녹이며 기차시간을 기다렸다. 군산공소 회장 집은 드망즈 주교가 군산지역 공소를 방문할 때 휴게소였다. 1927년 11월 16일에는 간척지인 둔산(屯山 :현재 옥구 어은) 공소를 방문하기 위하여 군산 공소를 들렸는데 “그 집은 1m의 대지도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군산공소의 환경은 열악하였다.
군산공소는 전례집회 장소로 비좁고 위치도 부적합하였다. 그래서 “수년전에 매입”한 14칸 와가 건물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신자들은 새로운 성당을 건축하고자 1929년 5월 6일 순교 복자 김대건를 주보하여 「대건 혈루회(大建 血淚會)를 조직하였다. 회의 목적은 조선 수선탁덕 김 안드레아 주보(主保)로 모시는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군산공소 신자들이 만나면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옹기촌을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구교우와 순교자 가족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천주교 신앙의 바탕이 그러하듯 “하느님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위에 물질보다는 정신을, 육신보다는 영혼을, 현세보다는 내세의 가치를 강조하며 살았다. 신자들에게 기도하는 시간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므로 항상 기도하였고,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라고 여겼다.
1925년 김대건 신부가 복자위에 오르자 한국교회는 특별히 복자 김대건을 현양하였다. 그러나 군산신앙공동체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분위기에 대한 정보가 늦었다. 군산에서는 이 시대에 간행된 교회출판물이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대도 군산신앙공동체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을 따르려는 신심운동이 일어났다. 「대건 혈루회」이다. 이러한 회명(會名)은 전국 어느 교회에도 없는 강렬한 성격이다.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피땀을 흘리셨듯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피땀을 흘리신 김대건 신부를 본받는 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굳은 결의로 「대건 혈루회(大建 血淚會)라는 회명(會名)을 지었다. 창립하던 날 출연금으로 2.000원이 거출되었다.
임원
회장 김용진(金瑢鎭) 총무 양성준(梁聖俊) 사교(社交)부장 강윤흠(姜允欽)
재무부장 한민수(韓民洙) 건축부장 未定 서기 한영수(韓永洙) 동(同) 이룡만(李龍萬)
특연금(特捐金) 十圓以下略
200원 한민수. 130원 김용진. 100원 강윤흠. 500원 公所講堂.
50원식(式) : 양성준. 왕용빈(王用彬). 한영수.
30원식(式) : 홍종극(洪鍾極). 송 베드로. 임춘원(任春元).
20원식(式) : 서상호(徐相浩).
15원 : 진윤섭(陳允燮)
10원식 : 이룡만(李龍萬). 최 야고버. 임덕문(林德文). 김 세시리아. 백 이사벨.
송공순(宋公順). 김흥수(金興秀). 윤 모니카. 손 바울라. 엄 안토니오.
임(林) 마리아. 백낙춘(白樂春). 박사노(朴相魯). 손계명(孫啓明)
정인한(鄭寅翰). 송양만(宋陽萬). 김 마리아.
20원 : 백대현(白大鉉)
(이상 군산공소)
50원 : 박준삼(朴準參)
25원 : 송봉원(宋奉元)
20원 : 김인기(金仁基)
(가시메)
100원 : 조성서(趙性瑞)
20원 : 김현순(金賢順)
15원식(式) : 윤약실 . 최성춘(崔成春)
10원식(式) : 이복규(李復圭). 윤상겸(尹相兼)
(두산)
신자들은 하느님의 집, 하느님 백성의 집이 내 집보다 먼저라는 정신으로 신축헌금에 열성을 다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유다스가 있듯이 대건 혈루회에도 서(徐) 아무개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는 대건혈루회 일을 헌신적으로 도맡아 하다가 상당액을 유용하고 떠났다. 그래도 신자들은 실망하여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
군산둔율동 본당 신설
1929년 5월 25일 대구교구의 서품이 있었다. 서품을 앞두고 대구교구는 10명의 사제를 신설 본당에 파견키로 하였다. 1929년 3월 3일 참사위원회에서는 인사이동 안을 짰다. 그 때 전라북도에는 3개 본당을 신설키로 하였다.
a) 수류본당 내에는 능다리(전북 정읍군 산내면 능교리)에 새 본당을.
b) 되재본당 내에는 가새발(당시 전북 금산군, 현재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에
새 본당을.
c) 나바위본당 내에는 군산에 새 본당을(군산은 예정지) 신설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929년 4월 17일 참사위원회에서는 1929년 3월 3일 참사위원회에서 결의된대로 인사이동을 결정하였다. 이 때 이약슬(李若瑟. 요셉)신부는 김천에서 나바위로 발령하고, 그의 보좌로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를 발령하였다. 그리고 군산에 (성당)건물을 마련할 때까지만 있고,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나바위에서 함께 지낸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영구 신부는 1929년 5월 25일 서품되었다.
김영구 신부는 3월 3일 신설 본당인 군산본당 신부로 발령 되어야 하지만 본당으로의 면모를 갖출 때까지 나바위 본당 보좌로 임명하였다. 그러면 군산본당은 김영구 신부가 부임 할 때까지 본당이 아닌가? 교회법으로 판단해야 한다.
준본당(準本堂·準本堂司牧區)
「본당 사목구」 교회법 제 516조 ⓵ “법으로 달리 규정되지 아니하는 한, 본당 사목구와 동등시되는 준본당 사목구는 특별한 사정 때문에 아직 본당 사목구로 설립되지는 아니하였으나, 고유한 목자로서의 사제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 내의 일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즉, 사목구로 설정되기에는 그 구성 요소가 부족한 경우에 준사목구로 결정된다. 예를 들면 신자 수가 적거나 재정 자립도가 약하거나 성당이 없거나 또는 구역 경계가 없는 외국인 성당 등의 경우이다.
교회법대로 군산본당은 성당이 없다는 조건 때문에 설정이 보류되었지만 이미 준본당이었다. 따라서 군산본당의 설립은 1929년 3월 3일로 정해야 한다. 오늘 교회의 사목은 준본당도 본당이다. 당시 교회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 사제가 배출되면 설영 본당신부로 임명되지만 「명실상부한 본당 주임신부(수오 노미네 suo nomine)」가 아니라 3년 동안은 새 사제에게 지도신부를 정해주고 사목지도를 받도록 하였다. 일종의 사목 인턴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본당의 보좌신부는 본당내의 사목을 하지 않고, 본당 구역외의 공소들만 사목하였다. 그래서 「교외(郊外)본당신부」라고 불렀다. 김영구 신부가 나바위 본당 보좌신부로 임명한 것은 당시 교구의 사목 관례를 따른 것 뿐 만 아니라 신부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면 바구스(vagus.떠돌이. 방랑자)가 되기 때문에 취해진 조처였다.
1929년 5월 25일 인사이동이 있은 후 새로 부임한 나바위 본당 이신부와 김신부는 관할 공소인 군산공소를 방문하여 신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1929년 6월 중순경에는 신임하신 나바위 리 신부 ·김 신부 양위를 환영하여 회를 열고 회장 김 야고버씨의 개회사로 시작되어 성심회장 양분도씨의 일반 교우를 대표하여 축사와 주일 야학부 남녀 학생의 축사가 있었으며, 다과회로 끝을 막은 후 일반이 성사를 받아 영육간 기쁨이 일시에 창일되었더라”.
김영구 신부가 군산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것은 늦어도 1929년 여름이다. 그리고 김 신부가 거처하였던 공소 위치는 신영동이 아니라 군산 중동이었다. 김영구 신부는 《가톨릭 청년》. 1936년 6월호 기자와 나눈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초에 내가 처음 들던 성당은 여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정거장(註.기차 정거장) 옆 설레(註. 군산시 중동 써래)란 곳에 있던 공소 집이었지요. 성당 한 간, 제의방 한간, 부엌 한 간 제의 방이 자는 방이고, 사무실이고, 사무실이 식당이고 식당이 곧 손님대합실이었지요”
현재의 둔율동에 성당을 자리 잡기 전 김영구 신부가 사목하던 공소 건물은 신영동이 아니라 「중동 써래」((仲洞 써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산 공소 건물의 위치가 신영동에서 중동 써래로 옮긴 것이다. 《천주교 호남발전사》는 신영동에 14간을 매입한 후 1929년까지 3,4년간 지냈다고 한다. 그러면 1924, 혹은 1925년에 신영동 집을 매입했다는 것이 되는데 그것도 맞지 않다. 1921년 드망즈 주교가 군산공소를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할 때 영성체자 수만 100명이 넘었으므로 백 수십명이 들어 설 건물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신영동 공소 건물은 1921년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군산본당은 준본당 시절부터 주일 야학부를 운영할 만큼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군산본당이 1931년 1월 19일에 본당이 신설되었다면 김영구 신부는 인사발령을 받고 부임했어야 한다. 그러나 교구 문서 어느 곳에도 김영구 신부를 발령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군산 둔율동 본당의 설립일은 참사위원회에서 신설을 결정한 1929년 3월 3일이어야 한다.
군산본당은 설립 때 부터 본당신부들은 하나같이 순교자의 후손이거나 박해를 겪은 신자들의 후손이었다.
김영구 신부는 1902년 수류에서 태어났다. 수류의 전신은 1889년 모악산 정상아래 설립된 배재본당이다. 이곳은 손선지 성인의 아들 요한이 1868년 이후 숨어살았는데 배재공소는 순교자 가족이나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형성한 교우촌이었다. 배재본당은 1895년 수류로 이동하여 새로운 교우촌을 형성하여 수류본당을 이루었다.
김영구 신부는 조실부모하여 수류본당 복사였던 숙부가 길렀다. 수류본당은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못자리이다.
임인교(임복만) 신부는 조화서, 조윤호, 정윤지, 이명서 성인이 살았던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성지동에서 1908년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집은 박해 후 공소집이었는데, 임 신부의 조부 역시 충청도에서 이곳을 피신하여 살았다.
김후상 신부는 1900년에 설립된 진안 백운면 두원리 1901년에 태어났다. 두원리 역시 박해 때 피신 해 온 신자들이 살던 교우촌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한서 회장은 진안, 장수지역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온 이름 높은 회장이었다. 김 신부는 1944년 4월 군산본당에 부임하여 눈물 나는 고생을 했다. 첫째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를 않았다. 신자들은 일제 말기라서 일제의 단말적인 감시와 탄압이 두려웠던가?. 김후상 신부는 이부자리를 팔아 연명하였다 노기남 대주교는 김후상 신부를 두고 “한강 이남의 성인신부”라고 극찬했다
박성운 신부는 천호산 낙수골에서 1918년에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박경진(프란치스코)와 증조모(오 말가리다)는 1868년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아들 박준복은 어린 나이에 피난길에 올라 천호산에 있는 완주군 비봉면 대치 낙수골에 자리잡았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선덕을 베풀어 주민들은 공덕비를 세워주었다(대치리 경로당 옆, 「어깨동무」 후면 개울가에 남아있다)
박신부의 조부 박준복은 "우리 집안은 순교자 집안인 만큼 꼭 훌륭한 신부가 나와야한다"며 성소를 위해 가족들에게 기도하도록 독려하였다.
강윤식 신부는 1908년 나바위에서 태어났고 그의 증조부는 1880년경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조부 강인수는 1888년 나바위로 이사하여 나바위 공소를 돌보고,성당 설립 때부터 회장을 맡았다. 또한 아버지 강한태 역시 나바위본당 회장직을 20여년간 맡았다. 강신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회장들의 표본이었다.
서정수 신부는 1909년 수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 중 순교자가 10여명에 이른다. 1935년 전동 보좌신부로 일제와 맞서 한글보급운동을 펼쳤다
군산둔율동 성당은 일제 때부터 순교자의 후손과 박해를 체험한 신자들의 후손들이 상당 수 모여 살았고, 역대 본당 신부들 역시 순교자의 후손이거나 박해에 시달린 신자들의 자식이었다. 이들의 의지가 둔율동 신앙공동체의 물밑 영성이었다. 순교자 신심이 깊어지도록 풀무 역할을 했던 인물은 1946년 군산으로 이주한 교회사학자 김구정 선생의 영향이 컸다.(1946~1952)
둘째 성모신심이다
군산본당은 1930년 「대건 혈루회」의 노력과 신자들의 협조로 현재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매입 가격은 3500원이었다. 그런데 신축기금은 이미 사고가 발생하여 신자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대구교구청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교구재무위원회는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더구나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공석중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건강이 악화되어 1928년 6월 말 치료와 휴식을 위해 프랑스에서 1년 반 동안 지내기로 하고 떠났다. 그래서 1929년 5월 25일 서품식은 경성교구 뮈텔주교가 주례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1930년 11월 초에 귀국하였다. 김영구 신부는 다시 지원을 요청하여 1.000원을 원조받았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영구부의 말이다
“지금 이 터를 사게 되어 대구(교구) 관리소(관리국)로부터 천원(千圓) 원조를 받게 되었지요. 지금 그 일을 생각하면 통쾌하면서도 우습습니다.”
1955년 오늘의 둔율동 성당을 신축하고 8월 17일 축복식을 가졌고, 본당 주보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성모무염시태)로 정했다. 주보축일을 ”성모무염시태“로 정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둔율동 신앙공동체가 늘 불렀던 노래인다. ”원죄없으신 동정마리아 우리를 도와주소서“하고 즐겨 불렀다.
1954년은 교황 비오 12세가 ”성모무염시태에 관한 교리를 신조(信條)로 선택된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여서 「성모성년」을 선포하였다. 한국교회에서는1954년 2월 27일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각종 행사를 갖기로 하였다. 이 때 군산둔율동 성당은 성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모금운동을 펼첬다.
둔율동 신앙공동체는 8월 17일 성당 축복식을 가지며 평소 불렀던 노래처럼 둔율동 본당이 지니고 있는 성모신심의 선택이었다. 거기에는 당시 교회의 분위기도 큰 몫을 하였다. 성모님은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루치아 도스산토스 와 그의 사촌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히야친타 마르토, 이들 세 어린이에게 나타나셔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와 고행을 바치도록 당부하셨다. 성모님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 6번 발현하셨는데 루치아의 말에 따르면 개인과 세계평화를 위해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도록 말씀하셨다고 한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은 성경에는 근거한 축일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교회를 통해 내려주신 선물이다. 원죄는 자기중심적인 아집, 이기심이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은 자기중심적인 아집이 없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마리아로부터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고백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특별한 배려로 예수 그리스도를 출생하게 하셨듯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매달려 죽음의 문턱에서 발아래에 있는 어머니와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셨다. 어머니 마리아께는 “보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이시오”(요한 19. 26~27). 이렇게 예수님은 성모님과 우리를 모자의 인연을 맺어주셨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성모님은 사랑하는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으로 주신 선물이듯 하느님은 교회를 통하여 무염시태의 성모님을 선물로 주었다. 성모님과 순교자의 믿음은 같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 곧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한국천주교회의 주보는 둔율동 신앙공동체의 주보(수호자)와 같다. 1838년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한국교회의 주보로 성모무염시태의 성모님을 요청하였다.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있을 때마다 성모님께 특별한 전구(轉求를 청했다. 자식을 위해 항상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한국 신자들 역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위기를 당할 때마다 성모님의 전구(轉求)하심을 청하였다
둔율동 본당은 본래부터 성모께 대한 신심이 깊었다. 물론 한국천주교회 신자라면 일반적인 신심이지만 이유가 어떻든 둔율동 신앙공동체의 정서는 더욱 그랬다.
한국 신자들은 아침기도 때마다 「성모을 찬송하는 경」에서 “우리 주보(主保)여 당신 자애로우신 눈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이 찬류(귀양살이)의 기한이 지나거든 네 복중에 나신 거룩한 예수를 우리에게 보이소서.”하고 기도한다. 또한 저녁기도 때면 「성모덕서도문」에서 “성모마리아의 전달하심으로 현재의 비애에서 구원을 얻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했다. 주일 첨례 때는 「성모께 자기를 바치는 경」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모친이여 네 아들이 십자가에 임종하실 때에, 지극한 사랑으로 자기는 성부께 맡기시고 그 제자는 네게 맡기신지라. 이 사랑을 인하여 네게 간절히 구하오니 나를 네 그느르심에 거두사 평생에 모든 위험과 어려움과 더욱 죽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하고 기도한다.
어떤 기도보다 우리에게 쉽고 친숙하게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기도는 묵주신공(로자리오 기도)이다. 열심한 신자들은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다. 묵주신공(기도)을 바칠때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을 한꺼번에 만나 같이 있으며 기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둔율동 신자중에는 6,25사변이라는 한국전쟁 때 묵주기도를 통하여 총살을 집행하는 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 난 일화가 있다.
성모님은 군산둔율동 신앙공동체에 놀라운 일을 하셨던 역사가 있다.
1949년의 일이다. 둔율동 성당은 1948년 여름부터 「신자배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구상은 순교자 현양위원회와 경향신문사를 맡고 있던 윤형중 신부가 박성운 신부에게 제안한 것이다. 박성운 신부는 입담좋은 교회사학자 김구정 선생을 예비자 교리교사로 모셔 순교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예비자들이 넋을 놓고 들었고, 입 소문으로 예비자 수가 늘어났다.
그 결과 예비자 180명중 121명은 1949년 12월 성탄절 때 영세를 받고, 60명은 1950년 부활축일 때 받았다. 이렇게 181명이 세례를 받은 것은 한국교회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성과는 순교자 신심과 성모신심의 힘이었다.
둔율동 본당은 성모께 대한 신심이 깊은 본당으로 정평이 났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도 그것이 계승되지 못한다면 죽은 전통이다. 성모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1955년
「레지오 마리에」가 전주교구에 도입되었고, 둔율동 본당은 1957년에 창설되어 전주교구에서 「레지오 마리에」 활동이 가장 원활하고, 조직이 가장 많은 본당이었다.
사랑과 자비의 실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뜻을 실천하고자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하느님과 성모님의 뜻은 자비와 사랑이다. 순교자와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 분들은 한 개인과 사회와 나라에 자비와 사랑이 넘치기를 원하신다.
군산둔율동 성당은 한국전쟁이 발생시킨 버려진 고아들과 사회가 외면하던 윤락여성들을 보듬어 주었다.
둔율동 성당의 전통적 정신과 영성은 순교자와 성모께 대한 신심 또는 영성이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는 문화재라는 위상에 걸맞게 군산사회문화의 발전에 보태져야 한다.
둔율동 성당은 마음의 휴식처, 생각하는 공간, 머물며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장(場)으로 걸맞겠다. 언제든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치유하는 음악, 모든 사람의 어머니인 성모께 대한 노래. 마음이 추운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일으키고, 고요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선율이 흐르는 곳으로 사람들이 찾게 하는 문화공간이면 제격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