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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유명 정치인이 전 대통령 영부인의 부탁이라는 말에 몇 억을 사기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 할 수 있지만, 이런 일은 어느 정권에서도 일어났던 전형적인 사기수법입니다.
이번 정권에서도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한 메일이 돌았고, 비서실장이나 정무수석 지인이라며 금품을 요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내가 누구누구를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힘써주겠다! 라고 말하면 솔깃해집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기도 어렵지만 연락해서 확인하기는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까지는 아니라도 청와대 비설실장만 되더라도 권력의 중심인물이라서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힘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탓할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의탁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내 주변을 둘러싼 문제가 단 하나라도 바뀌지 않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낙망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권력자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더 나아가 이 땅의 권력자가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잘 아시고 보살펴주신다면 여러분의 어려운 문제들은 어떻게 될까요?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찾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을 나누기 전에 먼저 본문에 자주 사용된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신다’는 단어가 5번 반복됩니다. 개역개정에는 동일하게 ‘아신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세 가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다’라는 단어로 오늘 본문에서 세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잘 안다고 말하면 그 사람과 친분이 있다는 말로 이해 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시인을 잘 안다는 것은 그만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인이 행하였던 모든 활동을 알고 계시고, 시인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도 다 아십니다.
두 번째 쓰인 단어는 ‘빈’이라는 단어로 지식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다, 또는 식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절,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에서 사용된 이 단어는 시인의 생각을 식별하다, 또는 이해한다는 의미로 마치 방공 레이더가 멀리 떨어져 있는 항공기를 식별하듯이 시인의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속속들이 식별하여 알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칸이라는 단어로 3절에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며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돌보다, 살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선 두 단어를 통해서 시인의 모든 행동을 살피고 감찰하시듯이 살피시는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다면, 이 단어는 시인을 보호하시기 위해 살피시는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시인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심판을 행하시는 단호한 하나님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5절을 보면,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돌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자들을 보내셔서 시인을 둘러싸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머리에 손을 얹어두고 계십니다.
전능자의 손이 시인의 머리에 올려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아버지가 그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하나님께서 시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는 이 세 가지 단어와 함께 본문에 사용된 특징적인 구문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 선 이 세 단어의 뜻을 더욱 풍성하고 세밀하게 강조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1절과 3절에 등장하는 살펴보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도 우리말 성경에는 동일하게 살피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두 개의 다른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인 1절에는 조사하다, 시험하다는 의미를 가진 ‘하카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두 번째 구절인 3절에는 키질하다, 구별하다는 의미를 가진 ‘자라’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즉, 1절은 시인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시인의 작은 부분까지 조사하셔서 시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이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고, 3절은 시인의 모든 인생길과 앉고 서고 눕는 모든 활동을 선악 간에 구별하여 이미 알고 계심을 강조하는 구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5개의 아신다에 사용한 단어와 2군데의 살펴보다는 단어를 종합하여 보면, 시인은 하나님이 시인을 전인적으로 살피시고 보호하시고 시인의 일거수일투족과 모든 생각과 말을 모두 보고 듣고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시인을 보살피고 보호하시고 전능하신 오른팔로 안수하여 주셔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이어지는 23-24절에 구구절절이 드러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하나님 저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가 한 모든 행동도 아시죠? 내게 무슨 악한 것이 있는지 보시고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세요!’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인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이 절박함은 이어지는 7-12절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묘사하기 위해 먼저 수직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즉, 높은 하늘과 저 낮고 낮은 스올을 대조하여 하나님이 그 어디에도 계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평적인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편재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9절에 ‘새벽날개치며’라는 단어의 비유를 알면 수평적인 대조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벽날개라는 표현은 햇빛이 새가 날개를 펼치듯이 비추는 형상을 비유하는 것으로 해가 뜨는 동편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고, 바다 끝이라는 단어는 팔레스틴 지역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해 뜨는 동쪽부터, 해지는 서쪽 바다 끝 어디라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은 시인이 하늘 끝에 있더라도, 땅속 깊이 스올에 내려가더라도 거기에 함께 계시며, 아직 해가 뜨지 않는 꼭두새벽이라 할지라도 시인을 지키시고, 시인이 동편 끝에 있든지, 서편 끝에 있든지 하나님의 감찰하심은 멈추지 않으실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계심으로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도 하나님은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붙드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야로 보호하시고 어디서든지 함께하심으로 시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고, 시인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으신다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는데, 시인은 지금 이 순간 어둠에 짓눌려 압박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을 이기실 능력이 없으실까요?
하나님은 왜 시인이 어둠에 짓눌려 생명이 위협을 당하고 있음에도 바라만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요?
시인의 현실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며, 죽음이라는 무게가 시인을 눌러 그 진액이 다 빠져 나오는듯한 상황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어둠의 중압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나 잘 아시고,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 나를 둘러싸 보호하게 하시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직접 시인을 붙잡아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이미 실현된 구원으로 확신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11-12절에 이어지는 고백을 통해서 세상 끝 그 어디든지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하나님의 권능에 반기를 들 자가 없음으로 지금 시인이 마주한 죽음의 어둠은 하나님이 빛으로 임하셔서 물러나게 하실 것이라는 시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였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시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심은 시인의 사소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시겠지만, 시인의 대적들의 모든 활동 또한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굳이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무고를 청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인이 있는 곳뿐만 아니라 시인이 알지 못하는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시인을 짓누르는 어둠의 근원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곳에서도 생명의 빛을 발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이 어둠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시고 시인에게 임한 어둠이 빛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는 흑암에 있더라도 빛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보호하십니다.
아무리 어둠이 시인을 둘러싸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기려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시인 주변에 하나님의 사자를 두르셔서 그 어느 것도 시인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릴 수 없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지금 시인을 돌보시고, 시인을 보호하시며, 시인을 붙들고 계십니다.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이 어둠은 이제 곧 빛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이러한 확신과 고백이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시인을 살피시고 붙드시며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광명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듯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빛이 되어 주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고난에 처했던 시인과 같이 우리 또한 시련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죽음의 어둠이 둘러싸고 우리를 있는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과 역경이 불어 닥쳐와도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천군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둘러싸게 하시고, 우리를 헤치려는 대적들의 손에서 보호하실 것입니다.
지난주에 기적의 소년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 겨울 호수 위 얼음위에서 장난을 치고 놀던 세 친구가 얼음이 깨지며 물에 빠지고, 두 사람은 구조 요원들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주인공 ‘존’은 나오지 못합니다.
두 명의 다이빙 요원들이 입수를 하지만 물속이 어두워서 수색에 실패하고 갈고리로 물속을 더듬어 건져 올라오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10분이 경과하면서 생존가능성은 전무해짐에 따라서, 잠수 요원들이 수색을 중단하고 돌아서려는데 잠수요원 중의 한명인 토미샤인에게 돌아가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 목소리가 구조대장의 목소리라 생각한 토미는 다시 물속에 들어가 갈고리를 이용해 바닥을 헤집었고 결국‘존’을 걸어 올리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미 호흡도 없고 맥박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무려 15분 동안이나 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구조의 골든타임을 한참이나 지난 뒤였고 모두가 회복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확신과 수많은 사람들의 중보기도의 힘으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다시 살아난 ‘존’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구조대원 토미에게 돌아가라 명령한 것도 하나님이셨으며, 바로 어제까지 폐에 핏물이 가득하고 장기가 손상되어 있었는데,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많은 사람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존’이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도 존을 살피시고 존과 함께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생명을 건지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다만, 죽음의 상황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기면 죽음의 상황이 오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극악한 상황이 밀려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의 평안과 보호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그 어떤 힘든 일이 여러분을 둘러싸고 덮어 누를 지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잘 아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안수하시며 붙잡아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오늘이 암흑과 같고 어둠이 짓눌러 진액이 다 빠져 나오는 같다고 해도 빛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더 이상 어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고난 중에 어떤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좋은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난이 밀려 올 때, 도무지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을 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면 해답이 나옵니다.
당장에 어려움이 있고,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를 신뢰하고 버티고 견뎌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현실이 되든지, 아니면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 되든지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권한이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역사하시며, 나의 영혼을 어둠에서 건지사 빛의 나라에 있게 하심을 믿고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인생길이 멀고 험합니다. 그러나 정작 길을 떠날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다 가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을 붙잡고, 주님이 붙들어 주심을 기대하며 견디고 버텨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의 여정 속에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복을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